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이야기 6] 『타샤의 정원』과 흙담 밑 나의 작은 화단
― 사라진 옛집에 다시 피어나는 꽃들

1.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타샤 튜더

타샤 튜더(Tasha Tudor, 1915~2008, 향년 92세)는 미국의 동화작가이자 그림책 화가이다. 그는 보스턴의 유복하고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스탈링 버지스(William Starling Burgess)는 선박과 항공기를 설계한 기술자였고, 어머니 로저먼드 튜더 버지스(Rosamond Tudor Burgess)는 초상화가였다. 증조부 프레더릭 튜더(Frederic Tudor)는 미국의 얼음 무역으로 큰 부를 이루어 ‘얼음왕’이라 불린 사업가였다.

그의 출생 당시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스탈링 버지스(Starling Burgess)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나타샤(Natasha)를 좋아해 이름을 나타샤로 바꾸었고, 그것이 줄어 타샤(Tasha)가 되었다. 태어날 때의 성은 버지스(Burgess)였으며, 훗날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인 튜더(Tudor)를 자신의 성으로 택해 법적으로 타샤 튜더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유모의 보살핌을 받았고, 집안은 보스턴 상류사회의 유력 인사들과 교류했다. 타샤는 태생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홉 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에는 코네티컷주 레딩에 사는 가족 친구의 집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자연과 가까이 생활하며 농사와 가축 돌보기, 요리와 바느질 같은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타샤가 훗날 선택한 소박한 생활을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낸 삶으로 보기는 어렵다. 실을 잣고 옷을 만들며 가축을 기르고 장작 난로를 사용한 생활은 경제적 궁핍의 결과가 아니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타샤가 자신의 취향과 신념에 따라 선택한 삶이었다.


2. 결혼과 가족, 그림책 작가로 이룬 성공

타샤는 1938년(22세)에 토머스 L. 맥크리디 주니어(Thomas L. McCready Jr.)와 결혼해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가족은 1945년(29세)에 뉴햄프셔의 오래된 농가로 옮겨 생활했으며, 그곳의 가족과 가축, 정원과 들판은 타샤의 글과 그림에 자주 등장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61년(45~46세)에 끝났고, 이후 앨런 존 우즈(Allan John Woods)와 재혼했지만 이 결혼도 1966년(50~51세)에 끝났다. 첫 번째 결혼이 끝난 뒤 자녀들은 성을 맥크리디에서 튜더로 바꾸었다. 훗날 버몬트의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어준 세스 튜더(Seth Tudor)도 네 자녀 가운데 한 명이었다.

타샤는 결혼한 해인 1938년(22~23세)에 첫 그림책 『호박 달빛』을 출간한 뒤 평생 100권이 넘는 책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1945년(29세)에 『마더 구스』로 첫 번째 칼데콧 아너를 받았고, 1957년(41세)에는 『1은 하나』로 두 번째 칼데콧 아너를 받았다. 그림책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카드와 달력, 포스터에도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타샤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으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작가이기도 했다. 1971년(55~56세)에는 직접 쓰고 그린 『코기빌 페어』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당시 자녀들은 모두 성장해 독립한 상태였고, 이 책의 성공은 타샤가 오랫동안 바라던 버몬트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3. 작가로 번 돈으로 마련한 30만 평의 땅

타샤가 버몬트에서 소유한 넓은 땅은 집안에서 그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었다. 그는 오랜 작가 생활과 『코기빌 페어』의 성공으로 마련한 수입을 바탕으로 1971년 무렵(55~56세), 버몬트 남동부의 외딴 산림을 구입했다.

아들 세스는 그 땅의 일부를 개간하고 1750년경에 지어진 뉴햄프셔 농가를 본떠 집을 지었다. 타샤는 그 집을 ‘코기 코티지(Corgi Cottage)’라 부르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타샤는 흔히 ‘30만 평의 정원을 가꾼 사람’으로 소개된다. 나도 처음에는 약 30만 평에 이르는 땅 전체가 정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약 250에이커, 우리 면적으로 약 30만 평은 타샤가 소유한 땅 전체의 면적이었다.

약 30만 평의 땅을 모두 농장으로 경작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손대지 않은 자연림이었고, 일부 목초지에서는 염소를 길렀다. 꽃과 나무를 집중적으로 가꾼 주요 정원은 집과 헛간 둘레의 약 2~3에이커였다. 우리 면적으로 환산하면 대략 2,400~3,700평이니, 그것만으로도 개인이 가꾼 정원으로는 매우 넓은 규모였다.

타샤는 그곳에서 19세기 뉴잉글랜드풍의 옷을 입고 실을 잣았으며, 염소와 닭을 기르고 정원을 돌보았다. 타샤의 정원은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한 배경과 성공한 작가로서 마련한 경제적 기반, 넓은 땅을 구입할 수 있었던 여건, 그리고 오랜 세월 직접 꽃과 나무를 돌본 노동이 함께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4. 소박한 시골 할머니인 줄 알았지만

처음 『타샤의 정원』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타샤를 시골의 조그마한 정원에서 꽃을 가꾸며 살아가는 소박한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책에 담긴 낡은 집과 골동품 가구, 손수 지은 옷과 정원의 꽃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거리가 먼 검소한 생활처럼 보였다.

그러나 타샤의 생애와 정원의 실제 규모를 자세히 알고 나니 처음의 인상만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그는 보스턴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작가로 성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뒤 약 30만 평에 이르는 버몬트의 땅을 구입했다. 그 대부분이 숲이고 실제 정원은 그보다 작았다고 해도, 개인이 그만한 토지를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소박한 시골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한 ‘땅부자’였던 셈이다. 물론 넓은 땅을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타샤의 노동과 삶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전원생활을 이해하려면 꽃과 동물, 낡은 집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장면뿐 아니라 그 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경제적 조건도 함께 바라봐야 한다.


5.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은 아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받고 힘든 직장생활과 고단한 현실에 지칠 때 전원생활을 꿈꾼다. 꽃이 피는 정원을 가꾸고, 직접 기른 재료로 음식을 만들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나 역시 처음에는 『타샤의 정원』과 같은 책을 읽으며 잠시 마음을 달래고 위안을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전원생활은 책이나 사진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평온하고 낭만적인 일만은 아니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며 농사를 많이 지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조금이나마 맛보았다.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어 거두는 일은 날씨와 계절에 맞춰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고된 노동이다.

전원생활에는 노동뿐 아니라 많은 돈도 필요하다. 땅과 집을 마련해야 하고, 넓은 정원을 유지하려면 시간과 비용을 계속 들여야 한다. 잡초를 뽑고 물을 주는 일부터 집과 울타리를 보수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까지 어느 하나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타샤의 삶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활방식은 아니다. 충분한 경제적 기반과 넓은 땅, 오랜 노동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삶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삶의 물질적 조건까지 외면한 채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타샤의 삶과 정원이 지닌 가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타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경제적 여건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꿈꾸었던 생활을 실제로 만들었고, 넓은 정원을 평생 직접 돌보았다. 중요한 것은 타샤의 삶을 그대로 흉내 내는 일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함께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경제적 기반과 노동까지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


6. 『타샤의 정원』이 불러낸 기억

정원 작가 토바 마틴(Tovah Martin)과 사진가 리처드 W. 브라운(Richard W. Brown)은 타샤의 생활과 정원의 사계절을 『타샤의 정원』에 담았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수선화와 봄의 튤립, 여름의 장미와 허브, 가을의 정취와 겨울을 준비하는 모습까지 펼쳐진다. 꽃과 나무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정원과 더불어 살아가는 타샤의 일상과 생각도 함께 담은 책이다.

타샤는 정해진 설계도를 그려놓고 식물을 심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마음 가는 대로 어울려 심었다. 아흔 살이 넘어서도 장미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던 타샤에게 가드닝은 평생 배우며 누리는 ‘기쁨의 샘’이었다.

『타샤의 정원』을 읽는 동안 내가 태어나 스무 살까지 살았던 시골집과 흙담 밑의 작은 화단이 떠올랐다. 정원이라는 말도, 가드닝이라는 말도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들과 산에서 마음에 드는 풀과 나무를 가져다 심고 그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를 기다리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7.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

사진 속 집은 내가 태어나 스무 살까지 살았던 시골집이다. 집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찍어둔 사진 속에서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낮은 지붕을 맞댄 집들이 흙담 안에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다. 흙과 돌로 쌓은 낮은 담이 마당 앞을 길게 두르고, 담 뒤로는 집과 집 뒤편의 나무들이 솟아 있다. 좁은 마을길은 집 옆을 지나 대문을 향해 굽어 올라가며, 대문 곁에는 집보다 훨씬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굵은 가지를 사방으로 펼치고 있다.

겨울에 찍은 사진 속 나의 시골집에는 지붕과 마을길과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흰 눈만 보인다. 그러나 내 기억 속 옛집은 흰 눈에 잠긴 모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계절이 바뀌면 흙담 밑에서는 꽃이 피고, 담쟁이는 담을 뒤덮으며, 집 둘레의 나무에서는 여러 열매가 익는다.


8. 흙담 밑에 있었던 작은 화단

시골집 마당 안쪽, 흙담 아래에는 담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작은 화단이 하나 있었다. 정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만큼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곳에 여러 풀과 나무를 가져다 심으며 제법 정성을 들였다.

1980년대의 일이니 꽃집이나 묘목상에서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사다 심을 형편도 아니었다. 화단에 심은 것들은 대부분 들판과 길가에서 뽑아 온 들꽃이었다. 들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꽃이 보이면 뿌리째 뽑아 화단에 옮겨 심었고, 산에서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캐다 심기도 했다.

우리가 노간지나무라고 부르던 나무도 산에서 캐다 심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나무를 트리로 꾸며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허락 없이 산에서 나무를 캐오는 것은 처벌받을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 어린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살아 있는 나무를 집으로 옮겨 크리스마스트리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에 제법 진지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일이었고, 그때의 나는 그것을 ‘가꾸는 일’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저 마음에 드는 풀과 나무를 옮겨 심고, 그것이 살아남아 새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지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9. 해당화와 백일홍, 분꽃과 봉숭아

우리 집 화단에 들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당화와 백일홍뿐 아니라 분꽃과 봉숭아도 피어 있었다. 분꽃과 봉숭아는 그 시절 시골집 흙담 밑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꽃들이었다.

화단 앞쪽에는 낮은 돌을 줄지어 놓아 경계를 만들었고, 그 돌 앞에는 키 작은 채송화가 알록달록한 꽃을 피우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름난 꽃이나 귀한 나무를 계획적으로 배치한 화단은 아니었지만, 계절이 되면 저마다의 자리에서 꽃이 피었다.

흙담에는 담쟁이덩굴이 칭칭 감겨 올라갔다. 봄이면 연둣빛 새잎이 돋았고, 여름이면 짙은 초록빛 잎이 흙담을 거의 보이지 않게 온통 뒤덮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잎은 붉은빛과 갈색빛을 띠다가 서서히 말라 떨어졌다. 흙담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를 덮은 담쟁이의 빛깔은 계절마다 달라졌다.

그곳은 들과 산에서 데려온 식물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 살펴보던 어린아이의 실험장이었고, 계절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10. 한여름에도 손이 얼 것 같았던 우물

화단의 왼쪽 끝 가까이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 우물에서는 한여름에도 손이 얼 것처럼 차가운 물이 나왔다. 무더운 날에도 물에 손을 담그면 금세 얼얼해질 만큼 차가웠다. 한여름에 그 우물물로 등목을 하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대전에 사시던 고모님께서 가끔 시골에 오시면 그 우물물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다.

화단 오른쪽에는 장독 하나를 땅에 묻어두었다. 그 장독은 겨울에만 사용했다. 동치미를 담아두었다가 겨울 내내 뚜껑을 열고 꺼내 먹었다. 한여름의 차가운 우물물과 겨울의 동치미는 꽃과 나무와는 또 다른 옛집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11. 집 둘레를 채웠던 과실나무와 장독대

집 둘레에는 여러 과실나무가 있었다. 집 뒤에는 밤나무가 세 그루 정도 있었고 그 곁에는 감나무도 자랐다. 옛날식 푸세식이라 냄새가 지독했던 뒷간 옆에는 대추나무와 단감나무, 벚나무가 있었으며, 흙담 바깥에는 앵두나무가 자랐다.

뒤뜰에는 포도나무를 세 그루 정도 심어놓았고, 간장과 고추장, 된장 등이 가득 담긴 장독들이 놓인 장독대도 있었다. 포도나무는 그늘진 곳에 있어 열매가 제대로 달리지 않았다. 세 그루나 있었지만 포도를 따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 포도나무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포도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여름이면 담 밖의 앵두나무에 빨간 앵두가 열렸다. 흙담 너머로 뻗어온 가지에서 잘 익은 앵두를 골라 따 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그러나 나무가 더 자라면 뿌리 때문에 흙담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걱정이 생겨 나중에는 베어냈다.

뒷간 옆의 단감나무는 몇 년 동안 땡감나무인 줄만 알았다. 열매가 달려도 당연히 떫을 것이라고 생각해 따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 나무의 감을 혼자 따 먹고 있는 모습을 딱 보았다. 그때서야 땡감인 줄 알았던 감이 달고 아삭한 단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는 이미 그 맛을 알고 있었는데, 나는 몇 년 동안 땡감인 줄만 알고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몹시 억울했다.

그래도 시골집에서 자란 덕분에 대추와 감, 밤과 단감, 앵두와 버찌를 따 먹으며 살았다. 특히 버찌를 정신없이 따 먹고 나면 입술이 꺼멓게 물들곤 했다.

집 둘레의 나무들이 모두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흙담 밖의 앵두나무는 담이 무너질 것을 걱정해 베어냈고, 뒷간 옆의 대추나무와 벚나무는 죽은 뒤 베어버렸다.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질 때마다 그 나무가 만들던 그늘과 꽃, 해마다 내어주던 열매도 함께 사라졌다.


12. 대문 옆의 느티나무 보호수

대문 옆에는 집의 다른 나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낮은 흙담과 지붕보다 훨씬 높이 솟아 굵은 가지를 사방으로 펼친 나무였다. 우리 집에서 심어 가꾼 나무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며 마을의 세월을 함께 견뎌온 보호수였다.

느티나무 곁의 보호수 비석에는 1991년 9월 25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지정 당시 기록은 수종 느티나무, 수령 120년, 수고 15m, 나무 둘레 2.8m이다. 비석 아래에는 “조상의 얼이 깃들인 이 나무를 보호합시다”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다.

1991년 당시 추정 수령 120년에 그 뒤로 흐른 세월을 더하면, 2026년 현재 수령은 단순 환산으로 약 155년이 된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때에도 느티나무는 이미 집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나무였다. 우리 집에 딸린 나무 한 그루라기보다 집과 마을의 시간을 함께 지켜본 존재에 가까웠다.


13. 사진 속에서 다시 돌아오는 계절

내게 남은 옛집 사진은 눈 내리던 겨울의 한 장면뿐이다. 그러나 나는 사진에 미처 담기지 않은 공간들의 위치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한다. 흙담 안쪽 어디에 화단이 있었는지, 우물과 땅에 묻은 장독은 어디에 있었는지, 집 뒤와 뒷간 옆, 담 밖에는 어떤 나무가 자랐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사진을 바라보면 눈 덮인 겨울 풍경 위로 다른 계절이 겹쳐진다. 흑백에 가까운 집과 담에 꽃과 잎의 색이 돌아오고, 한여름의 차가운 우물물과 겨울 동치미의 맛까지 함께 떠오른다. 사진 한 장은 그렇게 내가 태어나 성장한 집과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되짚어가는 기억의 지도가 된다.


14. 타샤의 정원과 나의 작은 화단

타샤의 정원과 내 어린 시절의 화단은 규모도, 만들어진 조건도 달랐다. 그 차이를 알고 나니 두 공간을 같은 것으로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식물을 가까이에 심고, 그것이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기를 기다리는 기쁨은 서로 닮아 있었다.

『타샤의 정원』이 내게 건네준 것은 타샤의 전원생활을 그대로 따라 살고 싶다는 환상이 아니었다. 이 책은 오래전에 사라진 옛집과 흙담 밑의 작은 화단,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계절을 다시 불러내 주었다.

그 시절의 생활은 힘들었고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가난 그 자체가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형편 속에서도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찾아 옮겨 심고 작은 기쁨을 만들었던 시간은 지금도 아련하게 남아 있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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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8-13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그나저나 정원이 3천평이라니 한국인은 꿈도 꿔보지 못할 스케일이네요.

대장정 2026-08-13 10:17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