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색깔을 어떻게 칠해야 한다는 법칙이 없듯 인생에도 공식은 없다. 인생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길을 따라가며 하나의 커다란 퍼즐을 맞추듯 완성해가는 여행이다.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갈 것이냐하는 것도 내게 달렸고, 그 길을 어떻게 가꾸느냐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내게 달렸다. 언젠가부터 틈만나면 가방을 챙겨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여행을 했더니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여행 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나도 그저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짐을 꾸렸던 건데... 여행 이야말로 내 삶의 깊이를 달라지게 하고 내 안의 세계를 성장시키는 인생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여행은 이제 내게 더 이상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 P8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 여행이라더니 여행을 하면 할수록 보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가야만 하는 곳이 늘어나 이제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하며 글을 쓰겠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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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지음 / 창비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 남도답사 일번지
초판 1993.5.20. | 개정판 2011.5.11.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해남 1 「아름다운 월출산과 남도의 봄」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해남 2 「영랑의 슬픔과 다산의 아픔」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해남 3 「세상은 어쩌다 이런 상처를 남기고」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해남 4 「일지암과 땅끝에 서린 얘기들」
예산 수덕사 「내포땅의 사랑과 미움」
개심사와 가야산 주변 「불타는 가야사와 꽃피는 개심사」
경주 1 「선덕여왕과 삼화령 애기부처」
경주 2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경주 3 「에밀레종의 신화(神話)와 신화(新話)」
관동지방의 폐사지 「하늘 아래 끝동네」
문경 봉암사 1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문경 봉암사 2 「술이 익어갈 때는」
담양 소쇄원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
담양의 옛 정자와 원림 「자미탄의 옛 정자를 찾아서」
고창 선운사 「동백꽃과 백파스님, 그리고 동학군의 비기(秘機)」
양양 낙산사 「동해 낙산사의 영광과 상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초판 1994.7.11. | 개정판 2011.5.11.
지리산 동남쪽 - 함양·산청 1 「옛길과 옛 마을에 서린 끝모를 얘기들」
지리산 동남쪽 - 함양·산청 2 「산은 지리산」
영주 부석사 「사무치는 마음으로 가고 또 가고」
아우라지강의 회상 - 평창·정선 1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아우라지강의 회상 - 평창·정선 2 「세 겹 하늘 밑을 돌아가는 길」
토함산 석불사 1 「그 영광과 오욕의 이력서」
토함산 석불사 2 「석굴의 신비에 도전한 사람들」
토함산 석불사 3 「무생물도 수명이 있건마는」
철원 민통선 부근 「한탄강의 비가」
청도 운문사와 그 주변 1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청도 운문사와 그 주변 2 「운문사 사적기와 운문적의 내력」
청도 운문사와 그 주변 3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소」
미완의 여로 1 - 부안 변산 「끝끝내 지켜온 소중한 아름다움들」
미완의 여로 2 - 고부 녹두장군 생가 「미완의 혁명, 미완의 역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 -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초판 1997.7.15. | 개정판 2011.5.11.

서산마애불 「저 잔잔한 미소에 어린 뜻은」
구례 연곡사 「저문 섬진강에 부치는 노래」
북부 경북 순례 1 - 의성·안동 「‘니껴‘형 전탑의 고장을 아시나요」
북부 경북 순례 2 - 안동·풍산 「니, 간고등어 머어봤나」
북부 경북 순례 3 - 하회·예안 「형님, 음복까지는 제사요!」
북부 경북 순례 4 - 도산서원 「저 매화나무 물 줘라」
북부 경북 순례 5 - 임하·영양 「지례보다야 많겠지」
익산 미륵사터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
경주 불국사 1 「불국사 안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
경주 불국사 2 「믿기는 뭘 믿었단 말이냐」
회상의 백제행 1 - 서울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회상의 백제행 2 - 공주 「정지산 산마루에 누대를 세우고」
회상의 백제행 3 - 부여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4 -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초판 2011.5.11.

제1부 평양 대동강
평양행 1 -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평양행 2 - 서재동 초대소 「서쪽 창가의 미루나무 한 그루」
대동강 1 - 대동강과 정지상 「비 갠 강가에는 녹음이 푸르른데」
대동강 2 - 대동문과 연광정 「천하제일강산의 제일누대」
대동강 3 - 부벽루와 김황원 「넓은 들 동쪽으로는 먼 산이 점, 점, 점」
대동강 4 - 칠성문과 을밀대 「황혼의 대동강가엔 환영(歡迎)의 환영(幻影)들이」
보통강 보통문 「무너진 서까래는 고치면 되겠지만……」
평양 대성산성 「드넓은 벌판을 보듬은 고로봉식 산성」
제2부 고인돌에서 현대미술까지 
상원 검은모루동굴 「호모 에렉투스의 살림터」
고인돌 기행 - 용곡리·귀일리·문흥리 고인돌 「고조선 거석 기념유물의 고향」
단군릉 소견 「1,994개의 돌덩이가 지닌 뜻은」
주영헌 선생과의 대화 「˝역사적 상상력을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 1 「역사교육관으로서 박물관의 과제」
조선중앙력사박물관 2 「잃어버린 왕국 발해를 찾아서」
조선미술박물관 1 「북한의 아트뮤지엄, 조선미술박물관」
조선미술박물관 2 「단원과 겸재를 만나다」
북한의 현대미술 「세월만큼 멀어진 남북의 미술」
제3부 묘향산
묘향산 기행 1 - 청천강과 안주들판 「문학이 삶 속에 살아있을 때」
묘향산 기행 2 - 보현사와 8각13층석탑 「그리하여 산은 묘향, 절은 보현이라 했다」
묘향산 기행 3 - 안심사 승탑밭과 만폭동 「장엄하고도 수려한 산, 묘향산」
묘향산 기행 4 - 상원암과 향산호텔 「묘향산 물은 흐르면 폭포요, 마시면 약수라」
묘향산 기행 5 - 서산대사의 금강굴 「내 마음을 갈무리하는 고요한 암자」
제4부 평양의 고구려 고분벽화
진파리 회상 1 - 정릉사 「천년의 비밀을 지켜온 우물 앞에서」
진파리 회상 2 - 동명왕릉 「민족의 영웅서사시로 다시 살아난 그분」
진파리 회상 3 - 진파리 벽화무덤과 평강공주 「아름다운 인생을 축복하는 벽화」
강서의 고구려 벽화무덤 1 - 덕흥리 벽화무덤 「‘축소된 우주‘ 속의 견우와 직녀」
강서의 고구려 벽화무덤 2 - 삼묘리 강서큰무덤 「아! 고구려 문화의 위대한 영광이여!」
그리고 남은 이야기
평양 용악산 「용곡서원의 둔암과 법운암의 백범」
북에서 만난 여인들 「북녀(北女)의 미소」
그들과 함께하며 「북한답사를 마치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5 -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
초판 2011.5.11.

제1부 금강 입문
금강예찬 「민족의 명산에서 통일의 영산으로」
현대금강호 첫 출항 동선기 「칠순 나이에 부르는 어머니 소리」 
동해항과 장전항 「외금강 관문의 어제와 오늘」
온정리 소묘 「온정이 오가던 온정리가 그립습니다」
제2부 외금강
창터솔밭과 신계사터 「아름다운 금강송과 신계사의 스님들」
옥류동 「풍광은 수려한데 전설은 어지럽고」
구룡폭과 상팔담 「천길 비단폭에 만 섬의 진주알」
만물상 「절집도 들지 못한 금강의 오지」
삼일포 「양봉래의 날 비(飛)자는 사라지고」
제3부 내금강
내금강 가는 길 「단발령 넘는 길과 온정령 넘는 길」
장안사와 삼불암 「장하던 6전(殿) 7각(閣)은 어디로 가고」
표훈사와 정양사 「금강의 맥박은 지금도 울리는데」
내금강 만폭동 「봉래풍악 원화동천」
보덕굴과 묘길상 「묘길상은 솟아 있고 법기봉은 푸르네」
부록
금강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나뭇꾼과 선녀‘에서 현대금강호까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6 - 인생도처유상수
초판 2011.5.11.

경복궁 1 「경복과 근정의 참뜻을 새기면서」
경복궁 2 「아미산 꽃동산엔 십장생 굴뚝을 세우고」
경복궁 3 「경복궁 건축의 꽃, 경회루와 건청궁」
경복궁 4 「광화문에 새겨진 영욕의 이력서」
순천 선암사 1 「산사의 미학 - 깊은 산, 깊은 절」
순천 선암사 2 「365일 꽃이 지지 않는 옛 가람」
달성 도동서원 「도(道)가 마침내 동쪽으로 오기까지」
거창·합천 1 「정자 고을 거창의 코스모스 길」
거창·합천 2 「종가의 자랑과 맏며느리의 숙명」
거창·합천 3 「쌍사자석등은 황매산을 떠받들고」
부여·논산·보령 1 「내 고향 부여 이야기」
부여·논산·보령 2 「그 많던 관아는 다 어디로 갔나」 
부여·논산·보령 3 「백제의 여운은 그렇게 남아 있고」
부여·논산·보령 4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단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7(제주편)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초판 2012.9.15.

제주답사 일번지 1 - 와흘 본향당 「본향당 팽나무에 나부끼는 하얀 소망들」
제주답사 일번지 2 - 조천 너븐숭이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없는 일」
제주답사 일번지 3 - 다랑쉬오름 「설문대할망의 장대한 대지예술」
제주답사 일번지 4 - 용천동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용암동굴은 없다」
제주답사 일번지 5 - 하도리 해녀 불턱 「숨비소리 아련한 빈 바다에 노을이 내리네」
한라산 윗세오름 등반기 - 영실 「진달래니까, 철쭉입니까」
탐라국 순례 1 - 삼성혈 「전설은 유물을 만나 현실로 돌아온다」
탐라국 순례 2 - 관덕정 「탐라국에서 제주도로 넘어가면서」
탐라국 순례 3 - 오현단 「제주의 삼보(三寶)와 영주십경(瀛州十景)」
제주의 서남쪽 1 - 하멜상선전시관 「불로초를 찾아 오고, 태풍에 실려 오고」
제주의 서남쪽 2 - 송악산 「아, 다녀가셨군요」
제주의 서남쪽 3 - 대정 추사 유배지 「세한도를 그릴 거나, 수선화를 노래할 거나」
제주의 서남쪽 4 - 모슬포 「모슬포 모진 바람은 지금도 여전하고」
가시리에서 돈내코까지 1 - 조랑말박물관 「순종을 지키고 고향을 지키련다」
가시리에서 돈내코까지 2 - 제주학의 선구자들 「잊어서는 안 될 그분들을 기리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8(남한강편)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초판 2015.9.15.

제1부 영월 주천강과 청령포
주천강 요선정 「주천강변의 마애불은 지금도 웃고 있는데」
법흥사에서 김삿갓 묘까지 「시시비비 시시비(是是非非是是非)」
청령포와 단종 장릉 「고운 님 여의옵고 울어 밤길 예놋다」
제2부 충주호반 「제천·단양·충주」
청풍 한벽루 「누각 하나 있음에 청풍이 살아 있다」
단양8경 「단양의 명성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구단양에서 신단양까지 「시와 그림이 있어 단양은 더욱 아련하네」
영춘 온달산성과 죽령 옛길 「강마을 정취가 그리우면 영춘가도를 가시오」
제천 의림지에서 충주 목계나루까지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충주 가흥창에서 탄금대까지 「석양의 남한강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3부 남한강변의 폐사지
원주 거돈사터·법천사터와 충주 청룡사터 「마음이 울적하거든 폐사지로 떠나라」
원주 흥법사터와 여주 고달사터 「돌거북이 모습이 이렇게 달랐단 말인가」
여주 신륵사 「절집에 봄꽃 만발하니 강물도 붉어지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9(서울편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초판 2017.8.21.

제1부 종묘
종묘 「종묘 예찬」
종묘 제례 「『보태평』과 『정대업』은 영원하리라」
제2부 창덕궁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인간적 체취가 살아 있는 궁궐」
선정전과 희정당 「조선 건축의 모든 것이 창덕궁에 있다」
대조전과 성정각 「조선의 왕과 왕자들은 이렇게 살았다」
낙선재 「문예군주 헌종과 이왕가의 여인들」
제3부 창덕궁 후원
부용정 「자연을 경영하는 우리나라 정원의 백미」
규장각 주합루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던 궁궐의 후원」
애련정과 연경당 「풍광의 즐거움만이라면 나는 이를 취하지 않겠노라」
존덕정과 옥류천 「만천명월(萬川明月) 주인옹은 말한다」
제4부 창경궁
외조와 치조 「영조대왕의 꿈과 한이 서린 궁궐」
내전 「전각에 서려 있는 그 많은 궁중비사」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춘당지 연못에는 원앙이 날아든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0(서울편2) - 유주학선 무주학불
초판 2017.8.21.

제1부 서울 한양도성
한양도성의 건설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까지의 긴 여정」 
한양도성의 변천 「한양도성 순성길이 다시 열렸다」
제2부 자문밖
탕춘대와 홍지문 「조선시대 군사구역, 자문밖」
세검정과 석파정 「유주학선 무주학불」
부암동의 별서들 「한양의 옛 향기가 오히려 여기 있네」
제3부 덕수궁과 그 외연
덕수궁 전사(前史) 「시청 앞 광장은 이렇게 변해왔다」
경운궁·인경궁·경희궁 「선조, 인목대비, 광해군의 역사 단막극」
덕수궁 「대한제국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법궁」
제4부 동관왕묘
동관왕묘의 역사 「관왕묘의 기구한 역사」
동관왕묘와 그 주변 「관왕묘의 부활과 도시 재생을 위하여」
제5부 성균관
성균관 「장래의 선비를 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다」
명륜당 「『반중잡영』, 혹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들」
대성전과 탕평비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도 천리를 간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1(서울편3) - 사대문 안동네
초판 2022.10.25.

북악산 「서울의 주산, 그 오랜 금단의 땅」
서촌 「내 어린 시절 서촌 이야기」
인왕산 「인왕산 계곡의 옛 모습을 복원하며」
북촌 「북촌 만보(漫步)」
인사동1 「고서점 거리의 책방비화」
인사동2 「민예사랑과 현대미술의 거리」
인사동3 「인사동을 사랑한 사람들」
북한산 「북한산과 진흥왕 순수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2(서울편4) - 강북과 강남
초판 2022.10.25.

성북동1 「성저십리 마전골의 북둔도화」
성북동2 「『문장』과 ‘호고일당‘의 동네」
성북동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선정릉 「‘범릉적‘에게 도굴된 비운의 왕릉」
봉은사 「절집의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경교명승첩>과 『동의보감』의 현장」
망우리 별곡 1 「공동묘지에서 역사문화공원으로」
망우리 별곡 2 「역사문화 인물들의 넋을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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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 남도답사 일번지
초판 1993.5.20. | 개정판 2011.5.11.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해남 1 「아름다운 월출산과 남도의 봄」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해남 2 「영랑의 슬픔과 다산의 아픔」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해남 3 「세상은 어쩌다 이런 상처를 남기고」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해남 4 「일지암과 땅끝에 서린 얘기들」
예산 수덕사 「내포땅의 사랑과 미움」
개심사와 가야산 주변 「불타는 가야사와 꽃피는 개심사」
경주 1 「선덕여왕과 삼화령 애기부처」
경주 2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경주 3 「에밀레종의 신화(神話)와 신화(新話)」
관동지방의 폐사지 「하늘 아래 끝동네」
문경 봉암사 1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문경 봉암사 2 「술이 익어갈 때는」
담양 소쇄원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
담양의 옛 정자와 원림 「자미탄의 옛 정자를 찾아서」
고창 선운사 「동백꽃과 백파스님, 그리고 동학군의 비기(秘機)」
양양 낙산사 「동해 낙산사의 영광과 상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초판 1994.7.11. | 개정판 2011.5.11.
지리산 동남쪽 - 함양·산청 1 「옛길과 옛 마을에 서린 끝모를 얘기들」
지리산 동남쪽 - 함양·산청 2 「산은 지리산」
영주 부석사 「사무치는 마음으로 가고 또 가고」
아우라지강의 회상 - 평창·정선 1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아우라지강의 회상 - 평창·정선 2 「세 겹 하늘 밑을 돌아가는 길」
토함산 석불사 1 「그 영광과 오욕의 이력서」
토함산 석불사 2 「석굴의 신비에 도전한 사람들」
토함산 석불사 3 「무생물도 수명이 있건마는」
철원 민통선 부근 「한탄강의 비가」
청도 운문사와 그 주변 1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청도 운문사와 그 주변 2 「운문사 사적기와 운문적의 내력」
청도 운문사와 그 주변 3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소」
미완의 여로 1 - 부안 변산 「끝끝내 지켜온 소중한 아름다움들」
미완의 여로 2 - 고부 녹두장군 생가 「미완의 혁명, 미완의 역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 -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초판 1997.7.15. | 개정판 2011.5.11.

서산마애불 「저 잔잔한 미소에 어린 뜻은」
구례 연곡사 「저문 섬진강에 부치는 노래」
북부 경북 순례 1 - 의성·안동 「‘니껴‘형 전탑의 고장을 아시나요」
북부 경북 순례 2 - 안동·풍산 「니, 간고등어 머어봤나」
북부 경북 순례 3 - 하회·예안 「형님, 음복까지는 제사요!」
북부 경북 순례 4 - 도산서원 「저 매화나무 물 줘라」
북부 경북 순례 5 - 임하·영양 「지례보다야 많겠지」
익산 미륵사터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
경주 불국사 1 「불국사 안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
경주 불국사 2 「믿기는 뭘 믿었단 말이냐」
회상의 백제행 1 - 서울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회상의 백제행 2 - 공주 「정지산 산마루에 누대를 세우고」
회상의 백제행 3 - 부여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4 -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초판 2011.5.11.

제1부 평양 대동강
평양행 1 -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평양행 2 - 서재동 초대소 「서쪽 창가의 미루나무 한 그루」
대동강 1 - 대동강과 정지상 「비 갠 강가에는 녹음이 푸르른데」
대동강 2 - 대동문과 연광정 「천하제일강산의 제일누대」
대동강 3 - 부벽루와 김황원 「넓은 들 동쪽으로는 먼 산이 점, 점, 점」
대동강 4 - 칠성문과 을밀대 「황혼의 대동강가엔 환영(歡迎)의 환영(幻影)들이」
보통강 보통문 「무너진 서까래는 고치면 되겠지만……」
평양 대성산성 「드넓은 벌판을 보듬은 고로봉식 산성」
제2부 고인돌에서 현대미술까지 
상원 검은모루동굴 「호모 에렉투스의 살림터」
고인돌 기행 - 용곡리·귀일리·문흥리 고인돌 「고조선 거석 기념유물의 고향」
단군릉 소견 「1,994개의 돌덩이가 지닌 뜻은」
주영헌 선생과의 대화 「˝역사적 상상력을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 1 「역사교육관으로서 박물관의 과제」
조선중앙력사박물관 2 「잃어버린 왕국 발해를 찾아서」
조선미술박물관 1 「북한의 아트뮤지엄, 조선미술박물관」
조선미술박물관 2 「단원과 겸재를 만나다」
북한의 현대미술 「세월만큼 멀어진 남북의 미술」
제3부 묘향산
묘향산 기행 1 - 청천강과 안주들판 「문학이 삶 속에 살아있을 때」
묘향산 기행 2 - 보현사와 8각13층석탑 「그리하여 산은 묘향, 절은 보현이라 했다」
묘향산 기행 3 - 안심사 승탑밭과 만폭동 「장엄하고도 수려한 산, 묘향산」
묘향산 기행 4 - 상원암과 향산호텔 「묘향산 물은 흐르면 폭포요, 마시면 약수라」
묘향산 기행 5 - 서산대사의 금강굴 「내 마음을 갈무리하는 고요한 암자」
제4부 평양의 고구려 고분벽화
진파리 회상 1 - 정릉사 「천년의 비밀을 지켜온 우물 앞에서」
진파리 회상 2 - 동명왕릉 「민족의 영웅서사시로 다시 살아난 그분」
진파리 회상 3 - 진파리 벽화무덤과 평강공주 「아름다운 인생을 축복하는 벽화」
강서의 고구려 벽화무덤 1 - 덕흥리 벽화무덤 「‘축소된 우주‘ 속의 견우와 직녀」
강서의 고구려 벽화무덤 2 - 삼묘리 강서큰무덤 「아! 고구려 문화의 위대한 영광이여!」
그리고 남은 이야기
평양 용악산 「용곡서원의 둔암과 법운암의 백범」
북에서 만난 여인들 「북녀(北女)의 미소」
그들과 함께하며 「북한답사를 마치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5 -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
초판 2011.5.11.

제1부 금강 입문
금강예찬 「민족의 명산에서 통일의 영산으로」
현대금강호 첫 출항 동선기 「칠순 나이에 부르는 어머니 소리」 
동해항과 장전항 「외금강 관문의 어제와 오늘」
온정리 소묘 「온정이 오가던 온정리가 그립습니다」
제2부 외금강
창터솔밭과 신계사터 「아름다운 금강송과 신계사의 스님들」
옥류동 「풍광은 수려한데 전설은 어지럽고」
구룡폭과 상팔담 「천길 비단폭에 만 섬의 진주알」
만물상 「절집도 들지 못한 금강의 오지」
삼일포 「양봉래의 날 비(飛)자는 사라지고」
제3부 내금강
내금강 가는 길 「단발령 넘는 길과 온정령 넘는 길」
장안사와 삼불암 「장하던 6전(殿) 7각(閣)은 어디로 가고」
표훈사와 정양사 「금강의 맥박은 지금도 울리는데」
내금강 만폭동 「봉래풍악 원화동천」
보덕굴과 묘길상 「묘길상은 솟아 있고 법기봉은 푸르네」
부록
금강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나뭇꾼과 선녀‘에서 현대금강호까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6 - 인생도처유상수
초판 2011.5.11.

경복궁 1 「경복과 근정의 참뜻을 새기면서」
경복궁 2 「아미산 꽃동산엔 십장생 굴뚝을 세우고」
경복궁 3 「경복궁 건축의 꽃, 경회루와 건청궁」
경복궁 4 「광화문에 새겨진 영욕의 이력서」
순천 선암사 1 「산사의 미학 - 깊은 산, 깊은 절」
순천 선암사 2 「365일 꽃이 지지 않는 옛 가람」
달성 도동서원 「도(道)가 마침내 동쪽으로 오기까지」
거창·합천 1 「정자 고을 거창의 코스모스 길」
거창·합천 2 「종가의 자랑과 맏며느리의 숙명」
거창·합천 3 「쌍사자석등은 황매산을 떠받들고」
부여·논산·보령 1 「내 고향 부여 이야기」
부여·논산·보령 2 「그 많던 관아는 다 어디로 갔나」 
부여·논산·보령 3 「백제의 여운은 그렇게 남아 있고」
부여·논산·보령 4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단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7(제주편)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초판 2012.9.15.

제주답사 일번지 1 - 와흘 본향당 「본향당 팽나무에 나부끼는 하얀 소망들」
제주답사 일번지 2 - 조천 너븐숭이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없는 일」
제주답사 일번지 3 - 다랑쉬오름 「설문대할망의 장대한 대지예술」
제주답사 일번지 4 - 용천동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용암동굴은 없다」
제주답사 일번지 5 - 하도리 해녀 불턱 「숨비소리 아련한 빈 바다에 노을이 내리네」
한라산 윗세오름 등반기 - 영실 「진달래니까, 철쭉입니까」
탐라국 순례 1 - 삼성혈 「전설은 유물을 만나 현실로 돌아온다」
탐라국 순례 2 - 관덕정 「탐라국에서 제주도로 넘어가면서」
탐라국 순례 3 - 오현단 「제주의 삼보(三寶)와 영주십경(瀛州十景)」
제주의 서남쪽 1 - 하멜상선전시관 「불로초를 찾아 오고, 태풍에 실려 오고」
제주의 서남쪽 2 - 송악산 「아, 다녀가셨군요」
제주의 서남쪽 3 - 대정 추사 유배지 「세한도를 그릴 거나, 수선화를 노래할 거나」
제주의 서남쪽 4 - 모슬포 「모슬포 모진 바람은 지금도 여전하고」
가시리에서 돈내코까지 1 - 조랑말박물관 「순종을 지키고 고향을 지키련다」
가시리에서 돈내코까지 2 - 제주학의 선구자들 「잊어서는 안 될 그분들을 기리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8(남한강편)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초판 2015.9.15.

제1부 영월 주천강과 청령포
주천강 요선정 「주천강변의 마애불은 지금도 웃고 있는데」
법흥사에서 김삿갓 묘까지 「시시비비 시시비(是是非非是是非)」
청령포와 단종 장릉 「고운 님 여의옵고 울어 밤길 예놋다」
제2부 충주호반 「제천·단양·충주」
청풍 한벽루 「누각 하나 있음에 청풍이 살아 있다」
단양8경 「단양의 명성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구단양에서 신단양까지 「시와 그림이 있어 단양은 더욱 아련하네」
영춘 온달산성과 죽령 옛길 「강마을 정취가 그리우면 영춘가도를 가시오」
제천 의림지에서 충주 목계나루까지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충주 가흥창에서 탄금대까지 「석양의 남한강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3부 남한강변의 폐사지
원주 거돈사터·법천사터와 충주 청룡사터 「마음이 울적하거든 폐사지로 떠나라」
원주 흥법사터와 여주 고달사터 「돌거북이 모습이 이렇게 달랐단 말인가」
여주 신륵사 「절집에 봄꽃 만발하니 강물도 붉어지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9(서울편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초판 2017.8.21.

제1부 종묘
종묘 「종묘 예찬」
종묘 제례 「『보태평』과 『정대업』은 영원하리라」
제2부 창덕궁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인간적 체취가 살아 있는 궁궐」
선정전과 희정당 「조선 건축의 모든 것이 창덕궁에 있다」
대조전과 성정각 「조선의 왕과 왕자들은 이렇게 살았다」
낙선재 「문예군주 헌종과 이왕가의 여인들」
제3부 창덕궁 후원
부용정 「자연을 경영하는 우리나라 정원의 백미」
규장각 주합루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던 궁궐의 후원」
애련정과 연경당 「풍광의 즐거움만이라면 나는 이를 취하지 않겠노라」
존덕정과 옥류천 「만천명월(萬川明月) 주인옹은 말한다」
제4부 창경궁
외조와 치조 「영조대왕의 꿈과 한이 서린 궁궐」
내전 「전각에 서려 있는 그 많은 궁중비사」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춘당지 연못에는 원앙이 날아든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0(서울편2) - 유주학선 무주학불
초판 2017.8.21.

제1부 서울 한양도성
한양도성의 건설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까지의 긴 여정」 
한양도성의 변천 「한양도성 순성길이 다시 열렸다」
제2부 자문밖
탕춘대와 홍지문 「조선시대 군사구역, 자문밖」
세검정과 석파정 「유주학선 무주학불」
부암동의 별서들 「한양의 옛 향기가 오히려 여기 있네」
제3부 덕수궁과 그 외연
덕수궁 전사(前史) 「시청 앞 광장은 이렇게 변해왔다」
경운궁·인경궁·경희궁 「선조, 인목대비, 광해군의 역사 단막극」
덕수궁 「대한제국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법궁」
제4부 동관왕묘
동관왕묘의 역사 「관왕묘의 기구한 역사」
동관왕묘와 그 주변 「관왕묘의 부활과 도시 재생을 위하여」
제5부 성균관
성균관 「장래의 선비를 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다」
명륜당 「『반중잡영』, 혹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들」
대성전과 탕평비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도 천리를 간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1(서울편3) - 사대문 안동네
초판 2022.10.25.

북악산 「서울의 주산, 그 오랜 금단의 땅」
서촌 「내 어린 시절 서촌 이야기」
인왕산 「인왕산 계곡의 옛 모습을 복원하며」
북촌 「북촌 만보(漫步)」
인사동1 「고서점 거리의 책방비화」
인사동2 「민예사랑과 현대미술의 거리」
인사동3 「인사동을 사랑한 사람들」
북한산 「북한산과 진흥왕 순수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2(서울편4) - 강북과 강남
초판 2022.10.25.

성북동1 「성저십리 마전골의 북둔도화」
성북동2 「『문장』과 ‘호고일당‘의 동네」
성북동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선정릉 「‘범릉적‘에게 도굴된 비운의 왕릉」
봉은사 「절집의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경교명승첩>과 『동의보감』의 현장」
망우리 별곡 1 「공동묘지에서 역사문화공원으로」
망우리 별곡 2 「역사문화 인물들의 넋을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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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 : 한 권으로 읽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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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아들 청탁과 천상계 민원대행업자 표훈대덕

— 『아는 만큼 보인다: 한 권으로 읽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불국사 안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에 소개된 『삼국유사』 권2 「기이」 편의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설화를 읽고

1. 옥경은 여덟 치인데 아들이 없다고?

유홍준의 『아는 만큼 보인다: 한 권으로 읽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 「불국사 안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를 읽다가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를 만났다. 일연의 『삼국유사』 권2 「기이」 편에 수록된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설화다.

이야기는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다.

경덕왕의 옥경(玉莖)은 길이가 무려 8촌이나 되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왕비를 폐했다는 것이다.

아니, 왕의 거시기가 여덟 치라는 사실부터 왜 역사책에 기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누가 측정했으며, 측정할 때는 또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궁금하다. 당시 왕실에는 별의별 일을 다 기록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그 크기와 아들을 낳는 일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왕의 생식기 크기가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이 곧 생식 능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들이 없으니 왕비를 폐했다고 한다.

아들을 낳지 못한 책임은 무조건 여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왕의 몸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은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던 모양이다.

왕의 거시기는 여덟 치나 된다고 자랑스럽게 적어놓고, 아들이 없는 책임은 왕비에게 떠넘겼으니 참으로 편리한 논리다.

결국 경덕왕은 첫 왕비를 내보내고 만월부인을 새 왕비로 맞아들인다.

그런데 새 왕비를 맞았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왕은 여전히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사실에 안달하고 있었다.

여기서 불교의 고승 표훈대덕이 등장한다.

2. 천상계 출입이 가능한 왕실 민원대행업자

경덕왕은 표훈을 불러 아들을 얻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한다.

그러면서 천상의 상제에게 부탁해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쯤 되면 표훈은 승려라기보다 왕실의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는 민원대행업자다.

그런데 이 양반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다. 하늘나라를 제집 드나들듯 오갈 수 있다고 한다.

표훈이 천제에게 올라가 왕의 부탁을 전하자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딸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민원에 대한 회신이 명확하다. 그런데 경덕왕은 포기하지 않는다.

딸로 태어날 아이를 아들로 바꿔달라고 다시 부탁한다.

표훈은 또 하늘로 올라간다.

요즘으로 치면 한 차례 반려된 민원을 보완해서 다시 제출한 셈이다. 그것도 단순한 재신청이 아니라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바꿔달라는 특례 요청이다.

천제의 두 번째 답변은 더 기가 막히다.

가능하기는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천제는 표훈에게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웃 마을 드나들듯 왕래하며 천기를 누설했다면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경고한다.

천상계의 출입 권한까지 정지당한 셈이다.

왕의 개인적인 소원을 들어주려다가 하늘나라 출입금지 처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정말 놀라운 인물은 표훈보다 경덕왕이다.

표훈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천제의 경고를 전하자 왕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게 한다면 만족하겠소.”

아니, 이 양반은 대체 어느 나라 왕인가.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데 자기 아들만 얻으면 만족하겠다니!

국왕의 첫 번째 책무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경덕왕에게는 국가의 안위보다 자기 혈통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일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왕이 아니라 왕실 가문의 사적 이익을 관리하는 집안 어른에 가깝다.

더구나 이미 하늘에서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는데도 아들을 얻겠다고 고집했으니, 나라가 어지러워진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도 분명해 보인다.

3. 여자아이의 놀이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결국 만월왕후는 아들을 낳는다.

그 아이가 훗날의 혜공왕이다.

여기까지는 왕실의 아들 얻기 소동이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설화는 그다음부터 더 황당해진다.

혜공왕은 원래 딸로 태어날 운명이었는데 아들로 바뀌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여자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비단주머니를 차고 도사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에 큰 혼란이 일어나 마침내 혜공왕이 죽임을 당했다고 설명한다.

이건 또 무슨 논리인가?

비단주머니를 좋아하면 나라가 망하는가?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들의 놀이를 즐기면 왕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인가?

옛날 사람들이 남녀의 행동을 엄격하게 구분했다는 사실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편견을 나라의 정치적 혼란과 연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귀족들이 권력을 놓고 다투었으며,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이 복잡한 정치적 혼란을 원래 여자였던 아이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로 설명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왕권을 둘러싼 귀족들의 갈등도, 당시 신라의 정치구조도, 반란을 일으킨 세력들의 책임도 모두 뒷전으로 밀려난다.

오히려 경덕왕이 국가의 안위보다 아들에 집착했다는 이야기는 앞에 떡하니 적어놓고 말이다.

원래 딸이었기 때문에 여성적인 행동을 했고, 그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러워졌다는 식의 설명에는 당시 사회의 남아선호사상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드러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경덕왕의 옥경이 여덟 치였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아들의 여성적인 행동을 나라가 어지러워진 원인처럼 서술한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왕실 남성의 생식과 남성성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 이야기다.

이쯤 되면 왕실의 후계자 문제보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더 궁금해진다.

4. 불교의 고승이 왜 부처님이 아니라 천제를 찾아가는가

그런데 내가 이 설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따로 있다.

표훈대덕은 누구인가.

신라 화엄종을 발전시킨 의상의 제자이며, 당대의 이름난 고승이었다. 『삼국유사』에서는 표훈 이후 신라에는 성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이 위대한 고승이 하는 일을 보자.

왕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천제에게 올라가 청탁하고, 딸밖에 안 된다고 하자 다시 올라가 성별을 바꿔달라고 부탁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초월적 존재는 부처가 아니라 상제 또는 천제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천제가 아이의 성별을 결정하고 나라의 운명까지 좌우한다.

도대체 불교와 하늘을 숭배하는 토속 신앙이 어떻게 연결된 것일까?

물론 불교에도 제석천을 비롯한 여러 천신이 등장한다. 그러니 불교 설화에 천제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교리에 어긋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야기에서는 불교의 수행과 깨달음보다 초월적 존재의 힘을 빌려 현실의 소원을 이루려는 모습이 훨씬 두드러진다.

내가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는 스스로 마음을 닦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가르침 때문이다.

집착을 버리고 욕망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불교의 핵심이다.

그런데 경덕왕은 아들을 얻겠다는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표훈은 그 집착을 해결해 주기 위해 하늘나라까지 올라간다.

고승이라면 먼저 왕에게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

천제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표훈이 그 경고를 왕에게 전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왕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려고 두 번이나 천제를 찾아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왕실의 후계자 청탁을 해결하려다가 천상계 출입금지까지 당한 고승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불교의 수행자보다는 뛰어난 신통력을 가진 무속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여기서 문득 얼마 전 같은 책에서 읽었던 부석사 창건 설화가 생각났다.

의상은 화엄경을 강의할 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선묘가 바위를 띄워 500명을 쫓아낸 덕을 보았다.

그런데 그 의상의 제자인 표훈은 이번에는 왕실의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나라를 왕래한다.

스승은 부동산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제자는 왕실의 출산 민원을 해결했으니 사제간에 사업 분야가 제법 다양했던 모양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두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전해지는 설화 속 모습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로 이 두 설화가 당시의 종교관을 생각하게 만든다.

5. 신라 불교와 토속 신앙의 습합, 그 역사적 한계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믿어온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을 숭배하고, 산과 강에 깃든 신령을 섬기며, 초월적인 힘을 빌려 질병을 고치거나 재앙을 피하고 복을 얻으려 했다.

불교가 들어왔다고 해서 이런 신앙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었다.

새로운 종교가 뿌리내리려면 기존 사회의 문화와 신앙을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어야 했을 것이다.

불교와 토속 신앙이 결합하는 습합(習合)은 그런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가 신라 사회에 정착하는 데 기존 신앙과의 융합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모습도 형성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교의 본래 가르침이 뒷전으로 밀려난 측면이 있었다면 그것은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실과 귀족들은 불교를 통해 왕권을 뒷받침하고자 했고, 백성들은 현실의 고통을 덜어줄 신령한 힘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수행과 깨달음보다 기복과 신통력이 강조되는 모습도 나타났을 수 있다.

표훈대덕의 설화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 읽힌다.

불교의 고승이 하늘나라를 오르내리며 왕실의 소원을 해결하고, 나라의 운명까지 천제의 결정에 따라 바뀌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다만 역사적 시기는 구분해야 한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6세기 법흥왕 때이고, 경덕왕과 표훈의 이야기는 이미 불교가 깊이 뿌리내린 8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삼국유사』는 13세기 고려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책이다.

따라서 이 설화만으로 불교 도입 초기의 실제 모습을 단정할 수는 없다. 오랜 세월 전해진 이야기에 후대의 종교관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불교가 신라에 전래되어 왕실 및 토속 신앙과 결합하고,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불교 자체의 한계가 아니다. 외래 종교인 불교가 신라 사회에 수용되고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역사적 한계다.

불교의 깊은 철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과 불교의 신통력을 이용해 현실의 소원을 이루려는 일은 분명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이 설화에서 발견한다.

6. 위대한 고승의 신통력보다 중요한 것

『아는 만큼 보인다』를 읽으며 다시 만난 『삼국유사』의 설화들은 참 재미있다.

역사와 전설이 뒤섞여 있고,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야기 속에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과 믿음이 담겨 있다.

경덕왕의 옥경이 실제로 여덟 치였는지, 표훈이 정말 하늘나라를 다녀왔는지, 혜공왕이 원래 딸로 태어날 운명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기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아들을 얻기 위해 왕비를 폐하는 이야기에서는 남아선호사상을 볼 수 있고, 나라가 위태로워져도 아들을 얻겠다는 왕의 고집에서는 혈통과 왕위 계승에 대한 집착을 볼 수 있다.

혜공왕의 여성적인 행동을 정치적 혼란과 연결하는 대목에서는 당시의 성별에 대한 편견이 드러난다.

그리고 표훈이 천제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는 불교와 토속 신앙, 왕권이 결합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이러한 이야기가 고승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설화로 전해졌느냐는 점이다.

표훈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경고를 전했지만, 왕의 집착을 내려놓게 하지는 못했다.

의상은 화엄경을 강의할 절을 얻었지만, 설화 속에서 기존의 500명을 교화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 두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다시 불교의 가르침을 생각한다.

부처의 가르침이 위대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하늘을 날고, 바위를 띄우고,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능력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고, 집착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며 스스로 마음을 닦으라는 가르침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설화들에서는 신통력이 전면에 등장하고, 정작 그러한 가르침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후대 사람들이 위대한 인물의 권위를 높이려고 신통력을 강조하다 보니,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가르침은 오히려 가려진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을 닦는 일보다 기적을 바라는 일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부처는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왕은 아들에 집착하고, 그 집착을 해결하려고 고승이 하늘나라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결국 나라가 위태로워졌다고 한다.

아들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일이었고, 하늘의 뜻을 바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 쉬운 이치를 깨닫는 데에는 천상계를 몇 번씩 왕래하는 신통력도 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바위를 공중에 띄우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 하나를 움직이는 일이 더 어려운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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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 : 한 권으로 읽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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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악덕 부동산 개발업자와 강제 이주 용역

— 『아는 만큼 보인다: 한 권으로 읽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다가 만난 억울한 500명의 사람들

1. 천년 고찰에서 만난 수상한 부동산 개발사업

나는 유홍준의 글을 좋아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기 시작했으니 그 인연도 벌써 수십 년이다. 우리나라 답사기는 물론 북한, 일본, 중국을 다룬 책들과 산사 순례, 인생만사 답사기까지 두루 읽었다. 그의 책을 읽고 직접 여행과 답사를 다닌 곳도 많다.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재미를 알게 된 데에는 그의 영향이 컸다.

그런데 좋아하는 저자의 글이라고 해서 모든 생각에 동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읽다가 부석사의 창건 설화를 접하고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악덕 부동산 개발업자와 강제 이주 용역의 이야기가 아닌가?

경북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찰이다. 국보인 무량수전과 그 유명한 배흘림기둥,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의 풍경까지, 우리 건축문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찰이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창건 과정에는 의상과 그를 흠모했던 당나라 여인 선묘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당나라에서 의상을 만난 선묘는 그를 사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의상의 귀국길에 용이 되어 그를 지켰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신라에서 화엄의 가르침을 펼칠 터전을 마련할 때도 선묘는 그를 도왔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2. 사교의 무리 500명, 그 절에 먼저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화엄의 가르침을 펼칠 장소를 찾아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500명가량의 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책은 이들을 ‘잘못된 주장을 하는 종파’라고 풀이한다.

그들이 어떤 주장을 했고, 무슨 사정으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의상이 들어가려던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고, 그곳에 500명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자신들이 머물던 절에 새로운 사람이 찾아와 다른 가르침을 펼치겠다며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기존 시설의 점유자를 내보내고 새로운 사업자가 들어서는 것이다. 화엄경 강의를 위한 종교시설 개발사업이라고나 할까.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다음이다.

설득이나 협의 과정도 없다. 의상의 뜻을 알아챈 선묘가 곧바로 거대한 바위로 변해 공중에 떠올랐다고 한다. 그 위협에 놀란 무리는 흩어졌고, 의상은 그 절에 들어가 화엄경을 강의했다.

그야말로 신통력을 동원한 강제 이주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사업시행자는 의상대사, 강제 이주를 집행한 용역은 선묘룡인 셈이다. 선묘는 의상을 향한 지극한 정성으로 행동했겠지만, 쫓겨난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존재였을 것이다.

기존 시설을 확보하고, 점유자 500명을 내보내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신규 부지를 확보하거나 건물을 신축할 필요도 없었다. 더구나 이주 업무까지 선묘가 해결해 주었으니, 의상은 그저 들어가 화엄경만 강의하면 되는 것이다.

사업 추진 실적만 놓고 보면 요즘 부동산 개발업자도 혀를 내두를 만한 수완이다.

물론 이것은 설화를 오늘날의 사회현상에 빗댄 풍자다. 실제 토지 소유권이나 점유 권리를 따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설화가 그들의 사정을 설명하지 않은 채 의상이 화엄경을 강의하기 위해 사라져야 할 무리로만 등장시킨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혹시 그들은 국가의 수탈과 조세 부담을 피해 깊은 산중으로 숨어든 백성들이 아니었을까?

물론 확인된 사실은 아니고 나의 상상이다.

옛날 그 험한 산중에 누가 살고 싶어 들어갔겠는가. 관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심심유곡을 찾아 들어온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밤이면 호랑이와 늑대가 돌아다녔을 것이고, 겨울이면 추위와 굶주림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 살 수 없으니 하나둘 모여 서로 의지하며 공동체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마련한 터전에서 이제 좀 살아보려는데, 이번에는 불교계의 강제 이주 용역을 만난 셈이다.

승리한 사람의 시각에서 쓰인 이야기는 아름다운 기적이 되지만, 쫓겨난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3. 사람을 교화하러 갔는가, 쫓아내러 갔는가

내가 이 설화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중생을 깨우치겠다는 목적과 신통력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방법이 서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란 무엇인가.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치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든,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설득하고 교화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물론 직접 바위로 변해 사람들을 위협한 것은 선묘다. 의상이 선묘에게 그런 행동을 지시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선묘가 의상의 뜻을 알아채고 스스로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 절에 들어가 화엄경을 강의한 사람은 의상이었다.

그런 신통력까지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바위를 공중에 띄워 겁을 줄 것이 아니라, 그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설령 그 500명이 산적이나 도적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면 올바른 가르침을 설파하고, 그 잘못을 깨닫도록 이끌었어야 한다.

그게 불법을 전하러 간 승려가 할 일 아닌가.

그런데 이 설화에서는 교화는커녕 머리 위에 바위부터 띄워놓고 쫓아냈다니!

적어도 이 설화 속 의상에게서는 중생을 깨우치는 위대한 고승의 모습보다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킨 뒤 그 자리를 차지하는 승리자의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그런 이야기를 위대한 고승의 행적으로 전하는 설화부터 잘못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역사적 인물로서 의상이 실제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의상은 한국 화엄불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승려이고, 그 업적은 별도로 평가할 문제다.

도리어 후세 사람들이 위대한 고승의 권위를 높이려다가 그가 전하려던 불교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정말로 그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싶었다면 신통력으로 500명을 겁주어 쫓아내는 것보다, 그들을 감화시켜 함께 불법을 공부하도록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훨씬 그럴듯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자비도 실천하고, 중생도 교화하고, 화엄경 강의라는 사업 목적도 달성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설화의 사업 추진 방식이 잘못되었다.

4. 누구 마음대로 사교라고 부르는가

나는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에 가장 호감을 갖고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흔히 자신이 믿는 절대자를 믿으라고 가르치지만, 내가 이해하는 불교는 자신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일을 중시한다.

부처를 무조건 믿으라는 것보다 네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고 수양하라는 가르침이 내게는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설화가 더욱 마음에 걸린다.

책에서는 그 500명을 ‘잘못된 주장을 하는 종파’라고 풀이한다. 같은 불교 안의 다른 교파였다 해도, 다른 교리를 따른다는 이유로 사교라 부르고 쫓아냈다면 자비와 포용에는 더욱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나는 종교에 관한 한 상당히 포용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두 사람이 모여 믿어도 그들 나름의 정교로 인정해 주는 사람이다. 신도가 두 명이든 이백만 명이든 사람 숫자로 정교와 사교를 나눌 생각은 없다.

물론 특정 집단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을 해쳤다면 그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교리가 다르다는 것과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어느 교리가 옳고 그른지를 논쟁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과 다른 교리를 따른다는 사실 자체가 배척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설령 그들이 정말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더라도, 그들과 논쟁하고 설득하는 과정이야말로 불교의 자비와 지혜를 보여 줄 기회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신통력의 기적담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5. 좋아하는 저자의 글에도 이견은 있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저자지만, 그렇다고 그의 모든 표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유홍준이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의 글에 나타난 특정한 표현과 관점이다.

특히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선묘의 목조상 앞에서 합장의 예를 올리며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대신한다고 말한 장면이다.

책 219쪽에서 저자는 일본 교토박물관에 보관된 선묘 목조상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대신해서 사과드리는 합장의 예를 올렸다.”

처음에는 무슨 이유로 국민 모두를 대신해 사과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220~221쪽을 읽으면 그 이유가 나온다.

선묘는 신라의 승려 의상을 위해 헌신한 중국 여인이었다. 그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졌으며 부석사에는 선묘를 기리는 선묘각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미 약 800년 전에 묘에 스님이 선묘를 기리는 사찰을 세우고 목조상까지 만들어 봉안했다.

저자는 일본인들이 12세기에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남기고, 선묘를 위한 사찰과 조각상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선묘각은 규모도 작고 역사도 짧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한국인의 강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외국과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과 폐쇄성으로 이어지는 문제를 비판한다.

그런 맥락에서 221쪽에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점을 사과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저자가 왜 사과했는지는 알겠다.

신라의 승려를 위해 헌신한 중국 여인을 우리나라에서는 충분히 기리지 못했는데,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그 희생을 기념해 왔다는 사실이 미안했던 것이다.

그 마음은 이해한다.

국적과 민족을 넘어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한 이를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뜻깊다. 선묘의 희생에 감사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선묘의 헌신과 그 헌신이 낳은 결과는 구분해야 한다. 의상을 향한 사랑과 희생은 기릴 만하더라도, 그 힘이 500명을 위협해 쫓아내는 데 쓰였다는 설화의 내용까지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정작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아니, 지가 뭔데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대신한다는 것인가?

대한민국에는 불교 신자만 사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 신자도 있고, 천주교 신자도 있으며, 이슬람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그 사람들이 선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앞에서 사과할 필요를 느끼는지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저자가 무슨 재주로 안단 말인가.

나야 앞서 말했듯이 두 사람이 믿어도 정교로 인정해 주는 아주 포용적인 사람이다. 선묘에게 합장을 하든 절을 하든 상관할 바 아니다.

다만 남의 이름까지 가져다 쓰지는 말라는 것이다.

참으로 지식인들이란!

가끔 보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알고, 제일 올바르게 생각하며, 국민의 마음까지 대표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지식인이란 자신의 지식과 식견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지, 국민 모두의 양심을 대표할 권한까지 가진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 표현에서 지식인이 자칫 빠지기 쉬운 오만을 느꼈다.

더욱이 저자는 한국인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비판하고 있다.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를 존중하자는 취지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과 신앙 역시 존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민족을 넘어 타인을 이해하자면서 정작 국민 모두가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그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과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고 여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선묘에게 감사하고 싶다면 감사하고, 사과하고 싶다면 자신의 이름으로 사과하면 될 일이다.

거기에 굳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좋아하는 저자의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찬성하는 것 역시 제대로 읽는 태도는 아닐 테니까.

6. 바위 아래에서 사라진 500명의 목소리

부석사라는 이름은 공중에 떠올랐다는 바위, 곧 부석(浮石)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은 그 바위에 얽힌 선묘의 헌신을 이야기하고 의상의 위대한 불법을 칭송해 왔다.

그런데 나는 그 바위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그 아래에서 바위를 올려다보던 500명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신통력에 감탄했을까. 불법의 위대함을 깨달았을까.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황급히 달아났을까.

설화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없다. 그들은 잘못된 주장을 하는 무리로 등장했고, 의상이 그 절에 들어가 화엄경을 강의할 수 있도록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만 그려졌다.

부석사의 건축적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의상의 화엄사상과 불교사적 공헌을 깎아내리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라고 해서 모든 행동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천년 고찰의 아름다운 전설을 읽으며 악덕 부동산 개발업자와 강제 이주 용역을 떠올린 것은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화를 반드시 설화가 의도한 방향으로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설화는 의상의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바위 하나를 띄우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 하나를 움직이는 일이 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나는 위대한 고승의 신통력보다, 그날 산을 내려갔을 500명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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