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희생시키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사람보다,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구하려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

괴수들은 본능 때문에 싸웠지만, 인간들은 신념 때문에 재앙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신념의 대가를 치른 것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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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라
가레스 에드워즈 감독, 브라이언 크랜스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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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는 무슨 죄가 있는가

— 영화 《고질라》(2014)를 보고, 인간의 호기심과 이기심, 자만심이 불러온 재앙

영화 소개

* 제목 : 고질라(Godzilla)
* 감독 : 개러스 에드워즈
* 개봉 : 2014년 5월 15일
* 장르 : SF, 액션, 재난
* 상영시간 : 123분
* 주요 출연 : 애런 테일러존슨(포드 브로디), 브라이언 크랜스턴(조 브로디), 엘리자베스 올슨(엘 브로디), 와타나베 켄(이시로 세리자와), 줄리엣 비노슈(산드라 브로디), 샐리 호킨스(비비안 그레이엄), 데이비드 스트라탄(윌리엄 스텐츠 제독)
* 제작 특징 : 몬스터버스 세계관의 첫 번째 영화로, 일본의 고질라를 현대적인 할리우드 괴수영화로 재해석한 작품
* 특이사항 : 1954년 비키니 환초 핵실험을 고질라 제거 작전과 연결하고, 일본 잔지라 원전 사고와 무토의 출현을 통해 인간과 거대 생명체의 충돌을 그린 작품

1. 아내의 사진을 찾아서?

《콩: 스컬 아일랜드》(2017)와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2019)를 본 뒤, 시간을 거슬러 《고질라》(2014)를 봤다.

영화는 1999년 일본 잔지라 원자력발전소의 사고로 시작한다.

원전에서 근무하는 조 브로디는 이상한 진동을 감지한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만, 점검을 위해 들어간 아내 산드라는 사고 현장에 갇히고 만다.

조는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 방호문을 닫아야 한다. 문 너머에는 아내가 있다.

결국 아내를 남겨둔 채 문을 닫는다.

산드라는 죽고, 원전은 무너진다.

정부는 자연재난에 따른 원전 사고라고 발표하고 주변 지역을 방사능 오염구역으로 통제한다.

15년이 흐른 뒤에도 조는 사고의 진상을 추적한다. 아들 포드는 이제 그만 과거를 잊으라고 하지만, 조는 그럴 수 없다.

“네 엄마가 거기 있다, 포드. 엄마가 아직 거기 있다고. 급하게 피하느라 엄마 사진이 한 장도 없어.”

“내가 엄마를 거기로 보냈어. 그저 원자로가 용해된 게 아니야.”

이 두 대사가 참으로 슬프다.

조가 사고의 원인을 밝히려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아내를 위험한 곳으로 보냈다는 죄책감, 그리고 아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더구나 아내의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아들과 함께 폐쇄된 잔지라 격리구역에 몰래 들어간다.

그런데 방사능 때문에 출입을 통제했다는 곳에서 개들이 뛰어다니고, 방사선 측정기에는 방사선이 검출되지 않는다.

조의 의심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사고 당시 자료가 담긴 디스크를 챙긴다. 그리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깨진 액자 속에서 아내의 사진을 발견한다.

15년 동안 아내를 잊지 못한 남자가 사고 자료를 찾으러 폐쇄구역에 들어갔다가, 뜻밖에 아내의 사진 한 장까지 되찾은 것이다.

괴수는 아직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이 장면에서 벌써 마음이 아프다.

2. 무토 부부를 생이별시킨 인간들

사건의 시작은 필리핀이다.

1999년 광산에서 거대한 고대 생명체의 뼈와 두 개의 포자가 발견된다. 하나는 이미 부화해 일본 잔지라 원전으로 이동했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에 의해 미국 네바다주의 핵폐기물 저장시설로 옮겨진다.

일본으로 간 놈은 수컷 무토, 미국으로 옮겨진 포자에서는 암컷 무토가 깨어난다.

결국 두 마리는 서로를 찾아가 짝짓기하고 번식하려 한다.

무토 입장에서 보면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부부를 생이별시켜 놓은 꼴이다.

물론 발견 당시부터 두 마리가 부부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를 찾아 번식하려는 생명체였다는 것은 영화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발견하자 연구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이다.

모나크와 일본 정부는 잔지라 원전 사고가 단순한 자연재난이 아니라 거대 생명체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주민들에게 진상을 감췄다.

모나크는 괴수를 제거하면 더 큰 방사능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격리하고 연구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을 숨긴 이유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15년 동안 비밀을 지켰을까.

괴수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고, 연구를 통해 무언가 이득을 얻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영화에서 그런 의도가 직접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조 브로디가 아내를 잃은 상황에서도 진상을 감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방사능 오염을 이유로 15년 동안 출입을 통제했지만, 조가 들어가 확인한 구역에서는 방사선이 검출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연구와 조직의 이해관계를 주민들의 알 권리보다 앞세운 것은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기심이라 할 만하다.

잔지라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고, 조는 아내를 잃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공식 설명은 자연재난이었다.

이쯤 되니 영화 《컨스피러시》가 떠오른다.

정부가 무언가를 숨긴다는 의심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진상을 감추는 일이 벌어지면 음모론이 자라날 토양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조의 의심은 결국 사실로 밝혀진다.

하지만 아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던 조마저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미국으로 옮겨진 포자도 문제다.

모나크 연구진은 수년간 시험한 끝에 그 포자가 휴면 상태라고 판단했다. 이후 미국 측은 방사성이 높다는 이유로 포자를 인수해 핵폐기물 저장시설에 처분했다.

휴면 상태라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방사선을 먹고 사는 생명체를 방사성 폐기물 곁에 가져다 놓은 셈이다.

결국 그곳에서 암컷 무토가 깨어났으니, 자신들의 판단이 옳을 것이라는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만심이다.

3. 애먼 관광객들과 내가 다녀온 도시들

무토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대한 발톱이 아니라 EMP, 전자기 펄스다.

이놈이 EMP를 발생시키면 전기가 끊기고 전투기와 통신장비 등 첨단 전자장비들이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이 자랑하는 군사력도 속수무책이다.

예전에 즐겨 하던 《스타크래프트》가 떠오른다. 테란의 사이언스 베슬이 사용하는 EMP 쇼크웨이브 말이다. 프로토스의 보호막과 에너지를 날려버리던 그 기술이 이번에는 미군을 상대로 등장한 셈이다.

인간은 수많은 돈과 기술을 들여 첨단 무기체계를 만들었는데, 무토는 자기 몸에서 EMP 한 번 발생시키면 그만이다.

전자무기와 생체무기의 대결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애먼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하와이 해변에는 평생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여행을 온 관광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질라가 바다에서 나타나자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온다.

호놀룰루 공항에서는 무토가 난입하고, 비행기들이 연쇄 폭발한다.

관광객들은 무슨 죄가 있는가.

그런데 쓰나미 장면에서 우스운 광경도 하나 있다.

나무에 묶여 있던 개가 위험을 감지하고 짖어대더니, 갑자기 목줄이 스르륵 풀린다. 그리고는 죽어라 달아난다.

어처구니가 없어 영상을 되돌려 다시 봤다.

정말 줄이 스르륵 풀린다.

괴수의 등장은 인정하겠는데, 개 목줄이 저절로 풀리는 모습은 참으로 웃기다.

그 개가 쓰나미에서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네바다에서 깨어난 암컷 무토는 라스베이거스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라스베이거스라니. 얼마 전 내가 직접 여행했던 도시다. 파리스 호텔에 묵고 스피어도 관람했던 곳인데, 이번에는 괴수가 그 도시를 박살 내고 있다.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는 샌프란시스코 역시 내가 다녀온 곳이다.

금문교 위를 직접 걸었고, 다리 위를 자동차로 건너보기도 했다. 구불구불한 길로 유명한 롬바드 스트리트도 가봤다.

공교롭게 영화에서 재앙을 겪는 하와이,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세 곳 가운데 두 곳을 직접 다녀온 셈이다.

내가 걸었던 금문교가 영화 속에서는 괴수의 등장으로 위험에 처하고, 내가 돌아다녔던 도시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그저 화면 속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과는 느낌이 다르다.

괴수들이야 서로를 찾아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사람들에게는 여행지이고 일터이고 삶의 터전이다.

4. 핵폭탄과 PP마대, 인간의 자만심

1954년 비키니 환초.

영화에서는 당시 핵실험이 사실은 고질라를 제거하려는 작전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고질라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 괴수들이 다시 등장하자 미군은 또 핵폭탄을 사용하려 한다.

군 지휘부는 핵탄두의 방사선으로 무토를 유인한 뒤 핵폭발의 충격으로 괴수들을 한꺼번에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핵폭발의 충격과 방사선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능력이 다르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과거에도 핵폭탄으로 고질라를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번에는 훨씬 강력한 폭탄이니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참으로 대단한 확신이다.

그런데 수컷 무토는 인간이 준비한 핵탄두를 암컷에게 가져다준다. 암컷은 샌프란시스코에 둥지를 만들고 핵탄두의 방사성 에너지를 이용해 알을 키운다.

인간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데, 무토에게는 새끼를 키울 에너지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괴수를 죽이겠다고 준비한 폭탄이 괴수의 먹이가 되다니.

이쯤 되면 인간이 우스워진다.

샌프란시스코 방어작전도 마찬가지다.

핵폭탄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괴수를 상대하겠다며 해안가에 PP마대를 쌓아놓고 기관총을 설치한다.

괴수는 방사능을 먹고 사는데, 인간은 모래주머니 뒤에 숨어 총알을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다.

참으로 눈물겨운 방어태세다.

물론 군인들이 우스운 것은 아니다. 위험을 알면서도 명령에 따라 작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도망갈 수도 없다.

웃기는 것은 그들에게 그런 무기를 들고 괴수와 맞서게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세리자와 박사는 이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인간은 자기들이 자연을 통제한다 여기지만, 사실은 그 반대지요.”

맞는 말이다.

자신이 만든 무기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자만심을 지적하는 말이다.

세리자와가 지니고 다니는 회중시계도 인상적이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시간에 멈춘 아버지의 시계다.

핵무기의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이 핵폭탄으로 괴수를 제거하려는 계획에 반대한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는 바로 그 세리자와가 고질라를 살리기 위해 핵폭탄을 직접 작동시키고 죽는다.

핵무기가 인간에게는 파괴의 수단이지만 고질라에게는 에너지원이 된다는 역설이 두 영화를 관통한다.

5. 새끼를 잃은 무토의 울부짖음

그런데 마지막 전투를 보면서 나는 무토가 불쌍해졌다.

수컷과 암컷 무토는 서로를 찾아 만나고, 마침내 알까지 낳는다.

무토가 인간을 미워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기 종족을 이어가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무토를 제거하려 한다.

물론 인간으로서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괴수를 막아야 한다. 하지만 무토가 인간적인 의미의 악의를 품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두 마리가 협공하자 고질라도 상당히 고전한다.

그런데 포드 브로디가 무토의 둥지를 불태워 버린다.

알들이 불타는 모습을 본 암컷 무토는 울부짖는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자기 새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울부짖는 것은 인간이나 괴수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새끼들을 잃은 일이 전투의 흐름을 바꾼다. 수컷은 고질라의 꼬리에 맞아 죽고, 암컷도 결국 죽음을 맞는다.

만약 새끼들이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두 마리의 협공으로 고질라가 상당히 밀리고 있었으니 무토 부부가 이겼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물론 결과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무토들이 죽는 방식도 참으로 제멋대로다.

미군의 총탄과 미사일에도 끄떡없던 수컷 무토가 고질라의 꼬리에 맞아 건물 구조물에 꿰뚫려 죽는다.

암컷은 방사성 에너지를 먹고 사는 괴수인데, 고질라가 입안에 푸른 원자열선을 쏟아붓자 죽는다.

물론 고질라의 원자열선은 단순한 방사선이 아니라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공격이다. 미사일의 폭발과 구조물의 관통도 작용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영화는 무토가 어떤 공격에는 강하고 어떤 공격에는 약한지 충분히 납득시키지 않는다.

차라리 고질라가 사무라이처럼 칼을 뽑아 무토의 목을 댕강 쳤다면 이해하겠다.

아무리 방사능을 먹고 사는 괴수라도 목이 잘리면 죽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으니까.

물론 칼을 든 고질라부터 우습기는 하겠다.

괴수영화라고 현실의 과학을 그대로 적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세계의 논리는 지켜야 한다.

괴수가 등장하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괴수라고 해서 논리까지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스운 설정과 별개로 새끼를 잃고 울부짖는 암컷 무토의 모습은 오래 생각하게 된다.

영화 초반에는 아내를 잃은 조 브로디가 슬펐는데, 마지막에는 새끼를 잃은 무토가 슬프다.

인간에게 가족이 소중하듯 무토에게도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6. 고질라가 도시를 구했다고? 염병이다

고질라는 결국 무토 두 마리를 죽인다.

그러나 자신도 기진맥진해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한다. 다음 날에야 다시 일어나 바다로 돌아간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고질라가 도시의 구원자인지를 묻는다.

고질라가 도시를 구했다고?

염병이다.

하와이에서는 고질라의 등장으로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괴수들의 싸움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과 군인이 희생되었다.

고질라가 인간을 구하기 위해 싸웠다는 근거는 없다. 세리자와 박사도 고질라가 자연의 균형을 회복하러 왔다고 믿었지, 인간을 구하러 왔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고질라는 무토와 싸워 이겼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고 고질라를 영웅으로 만들려 한다.

생각해 보면 이 재앙의 중심에는 괴수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발견하고 연구하려 했던 인간의 호기심.

잔지라 원전 사고의 진상을 감추고 주민들에게 실제 위험을 알리지 않았던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무토의 포자를 휴면 상태라고 믿고 핵폐기물 저장시설에 처분한 데 이어, 괴수들을 핵폭탄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인간의 자만심.

그 결과 관광객들이 죽고, 군인들은 위험한 작전에 내몰렸으며,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무토 가족도 모두 죽었다.

영화 초반에는 아내를 잃은 남자가 울고, 마지막에는 새끼를 잃은 괴수가 울부짖는다.

인간과 괴수라는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소중한 존재를 잃었다.

그런데 영화는 고질라가 이겼다는 이유로 그를 도시의 구원자로 부르려 한다.

나는 오히려 무토가 불쌍하다.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옮겨놓은 포자에서 깨어나, 짝을 찾아 만나고, 새끼를 키우려 했던 두 마리의 생명체.

그들에게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명분도, 인간을 지배하겠다는 야망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아 종족을 이어가려 했을 뿐이다.

무토는 무슨 죄가 있는가.

차라리 괴수보다 인간의 호기심과 이기심, 자만심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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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
마이클 도허티 감독, 밀리 바비 브라운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지구를 구하겠다며 사람을 죽이는 인간들

— 영화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2019)를 보고, 괴물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신념과 희생

영화 소개

* 제목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Godzilla: King of the Monsters)
* 감독 : 마이클 도허티
* 개봉 : 2019년 5월 29일
* 장르 : SF, 액션, 모험
* 상영시간 : 132분
* 주요 출연 : 카일 챈들러(마크 러셀), 베라 파미가(엠마 러셀), 밀리 바비 브라운(매디슨 러셀), 와타나베 켄(이시로 세리자와), 찰스 댄스(앨런 조나), 장쯔이(일린 첸), 샐리 호킨스(비비안 그레이엄)
* 제작 특징 : 몬스터버스 세계관의 세 번째 영화이자 《고질라》(2014)의 후속작으로, 고질라와 모스라, 로단, 킹 기도라의 대결을 다룬 작품
* 특이사항 : 엔딩 크레딧에서 고질라와 콩이 대결하는 모습을 그린 고대 벽화가 등장하며, 쿠키 영상에서는 환경 테러리스트 앨런 조나가 킹 기도라의 잘린 머리를 매입해 후속작과의 연결을 암시

1.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다른 사람의 아들들을 죽인다

《콩: 스컬 아일랜드》를 보고 난 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를 봤다.

전편에서는 빌 랜다라는 인간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겠다고 미지의 섬에 군인들을 끌고 들어가 죽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아예 인류를 희생시켜 지구를 구하겠다는 여자가 등장한다.

베라 파미가가 연기한 엠마 러셀 박사다.

201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고질라와 무토라는 괴수들이 싸우면서 대재앙이 발생한다. 엠마와 남편 마크는 그 과정에서 아들 앤드루를 잃는다. 고질라가 직접 아들을 죽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부부에게는 괴수들의 등장으로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태도가 전혀 다르다.

마크는 고질라를 증오한다. 괴수들을 연구하던 모나크에서도 떠난다. 반면 엠마는 괴수들을 계속 연구하면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타이탄이라 불리는 거대 생명체들은 자연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깨워 인간과 괴수가 공존하던 자연의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 속 설정에서 이 주장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타이탄들이 자연환경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지녔다는 설명이 나오고,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실제로 생태계가 복원되는 모습도 소개된다.

문제는 그 주장을 실행하는 방법이다.

엠마는 타이탄들을 깨우는 과정에서 일부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보면서도, 오르카를 이용하면 그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결정한 사람은 엠마 자신이었고, 실제로 희생될 사람들은 그런 결정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이론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엠마는 환경 테러리스트 앨런 조나와 손잡고, 괴수들과 소통하는 장치인 오르카를 이용해 잠들어 있던 타이탄들을 깨우는 계획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납치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테러리스트들과 협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더구나 딸 매디슨까지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문제가 있다.

엠마는 타이탄들을 깨우기 시작할 때 딸을 자기 곁에 두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뒤 딸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쳤다는 대사도 나온다.

적어도 자기 딸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영화 속 행동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지만, 엠마가 나중에 보여주는 태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인류 전체가 위험해지는 것은 감수하면서도 자기 자식만큼은 그 위험에서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아들 하나를 잃은 슬픔이 그렇게 컸던 여자가, 지구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부모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려 한다.

그런데 그 희생의 범위는 자신이 정한다.

나는 《스컬 아일랜드》의 랜다가 가장 큰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엠마를 보니 랜다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랜다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반면 엠마는 대규모 인명 피해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그 희생을 지구 회복의 수단으로 삼았다.

콩보다 랜다가 더 무서웠는데, 이번에는 랜다보다 엠마가 훨씬 더 무섭다.

2. 베라 파미가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엠마 역을 맡은 배우는 베라 파미가다.

《베이츠 모텔》의 노마 베이츠, 《오펀: 천사의 비밀》의 케이트 콜먼, 《컨저링》의 로레인 워런 등을 연기했던 배우다.

그녀가 맡았던 인물들이 모두 같은 성격은 아니다.

《베이츠 모텔》의 노마 베이츠는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집착과 통제로 이어지는 인물이다.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는 불안과 의심 속에서 가족을 지키려는 어머니를 연기했고, 《컨저링》에서는 초자연적인 위험에 맞서는 로레인 워런을 연기했다.

선한 인물도 있고, 불안정한 인물도 있다. 그러나 모성애와 불안, 신념과 집착이 복잡하게 얽힌 인물을 연기할 때 보여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엠마 러셀도 그렇다.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장면을 보면, 인류가 대규모로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태도는 확신에 차 있다. 과학적 근거를 내세우며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세리자와가 수십억 명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일이라고 경고해도 엠마는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계획이 인류를 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이 더 무섭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과,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위험할까.

나는 후자가 더 두렵다.

베라 파미가는 이런 인물을 연기하는 데 참으로 잘 어울린다.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엠마의 지적인 모습과 그 안에 숨어 있는 무서운 집착이 이만큼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을까 싶다.

그런데 결국 딸 매디슨이 엄마의 모순을 알아차린다.

엠마는 타이탄들을 하나씩 깨워 자연의 균형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기도라가 새로운 우두머리로 나서 다른 타이탄들을 일제히 불러내면서 계획은 통제를 벗어난다.

세상이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자 매디슨은 엄마에게 괴물이라고 말한다.

엄마는 지구를 구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엄마가 시작한 일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딸의 눈에도 엄마가 괴물로 보인 것이다.

3. 괴수들의 왕은 누구인가

괴수들의 싸움도 참으로 요란하다.

고질라, 모스라, 로단, 그리고 머리가 세 개 달린 킹 기도라까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해 보이는 놈은 역시 기도라다.

고질라는 기도라에 상대도 않고, 잘린 머리까지 재생한다. 알고 보니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체도 아니다. 우주에서 온 침입자로, 지구의 타이탄들을 지배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지구를 바꾸려는 존재다.

힘으로만 보면 고질라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기도라는 힘은 세지만 편이 별로 없다.

로단은 처음에는 기도라에게 덤비다가 패하자 곧바로 기도라의 꼬붕으로 들어간다. 나중에는 모스라와 싸우다가 가슴을 찔린다.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남았고, 기도라가 죽자 이번에는 고질라밑으로 첫빠따로 기어들어간다.

이놈은 누가 이기는지 보고 대장을 바꾸는 모양이다.

모스라는 고질라와 각별한 관계다. 영화에서는 둘의 관계를 두고 연인 사이냐는 농담까지 등장하지만, 실제 설정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 관계에 가깝다.

그런데 영화에서 가장 황당한 것은 인간의 무기가 괴수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군이 산소 파괴자라는 신무기를 발사하자 고질라는 치명상을 입고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반면 기도라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는다.

이후 고질라가 회복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세리자와 박사는 핵폭탄을 이용해 고질라를 되살릴 계획을 세운다.

핵폭탄을 맞으면 인간은 죽지만, 고질라는 방사선 에너지를 흡수해 오히려 강해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설정이다.

나중에는 모스라가 기도라의 공격을 대신 받아 희생되면서 자신의 에너지까지 고질라에게 전달한다.

고질라는 마침내 온몸에서 엄청난 열을 내뿜는 불덩어리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기도라를 압도해 불태워 없애버린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핵폭탄이 괴수에게는 영양제가 되고, 다른 괴수의 희생까지 더해지자 거의 무적이 된다.

괴수영화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이렇게 해결하고 나니 마지막 승부가 다소 허무하다.

그런데 그 핵폭탄을 직접 터뜨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

4. 새 시계를 살 시간이야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이시로 세리자와 박사.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카츠모토를 연기했던 그 배우다.

그 영화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싸웠던 카츠모토가 떠오른다. 이번에도 와타나베 켄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인물을 연기한다.

하지만 세리자와의 신념은 엠마와 다르다.

그는 괴수들을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해서 반드시 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과 괴수가 공존할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질라를 증오하는 마크에게도 그런 생각을 전한다.

고질라를 찾아 잠수함으로 이동하던 중 마크가 세리자와에게 시간을 묻는다.

세리자와가 대답한다.

“새 시계를 살 시간이야.”

마크는 그 말을 듣고 죽은 아들 앤드루가 좋아하던 농담을 떠올린다. 앤드루는 세리자와가 회중시계를 꺼낼 때마다 시간을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계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시간이다. 세리자와가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그때 멈춘 아버지의 회중시계다. 전편 《고질라》에서 이미 소개된 물건이다.

원자폭탄이 남긴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는 고질라를 살리기 위해 핵폭탄을 사용하려 한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마크는 자신이 아들을 잃게 만든 존재를 구하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 그에게 세리자와가 말한다.

“상처를 준 악마와 화해하는 게 아픔을 잊는 유일한 길이지.”

이 말은 단순히 고질라를 구해야 한다는 설명이 아니다.

세리자와는 마크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망하는 대상을 없애는 것만으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마크가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고질라를 증오하는 마음만으로는 남아 있는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한다.

그리고 세리자와는 자신의 신념을 말로만 주장하지 않는다.

고질라가 회복하고 있는 해저의 은신처에 핵폭탄을 설치해야 하는데, 잠수함의 무기 발사 장치가 고장 나 직접 폭탄을 설치하고 작동시켜야 한다.

그곳의 열기와 방사선량을 생각하면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임무다.

세리자와는 자신이 가겠다고 나선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알고 직접 선택한다.

핵폭탄을 작동시킨 세리자와는 마지막으로 고질라에게 다가간다.

거대한 몸에 손을 얹고 조용히 작별을 고한다.

“굳바이, 나의 오랜 친구.”

그리고 핵폭탄이 폭발한다.

세리자와는 죽고 고질라는 살아난다.

이 장면만큼은 그저 황당한 괴수영화라고 웃어넘길 수 없었다.

5. 괴수를 깨운 사람과 막아야 하는 사람

이번 영화에서도 군인들이 수없이 죽어 나간다.

하지만 《콩: 스컬 아일랜드》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편의 군인들은 지질조사를 지원한다는 명령을 받고 위험의 실체도 모른 채 섬에 들어갔다. 이번 영화의 군인들은 이미 발생한 재난에 대응하고,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괴수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출동한다.

임무의 성격부터 다르다.

따라서 단순히 군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출동시킨 결정까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따져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어떤 판단이 내려졌고, 그 판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산소 파괴자다.

미군 지휘부는 고질라와 기도라를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무기의 사용을 결정한다. 세리자와는 고질라를 믿어야 한다며 반대하지만, 군 지휘부는 이미 미사일이 발사되었다고 통보한다.

결과는 실패다.

기도라는 살아남고, 오히려 기도라와 맞서던 고질라만 치명상을 입는다.

그 때문에 세리자와가 나중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고질라를 회복시켜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물론 당시 군 지휘부가 기도라의 정체와 무기의 효과를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괴수들의 공격으로 도시가 파괴되는 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판단에 대한 검토까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군인들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되는 것과, 지휘부의 판단이 적절했는지는 구분해서 따져야 한다.

보스턴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마찬가지다.

딸 매디슨은 엄마의 계획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르카를 가지고 탈출한다. 그리고 야구장에 설치된 음향시설을 이용해 타이탄들을 진정시키려 하지만, 기도라까지 그곳으로 끌어들이고 만다.

그러자 아버지 마크와 모나크 관계자들, 군인들이 매디슨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

물론 군인들의 임무는 매디슨 한 사람의 구조만이 아니었다. 괴수들의 공격을 막고,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재난을 수습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의 출발점에는 엠마와 테러리스트들의 결정이 있었다.

엠마가 벌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위험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스컬 아일랜드》에서 랜다의 탐사 때문에 군인들이 죽었듯, 이번에는 엠마가 불러온 재난을 막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희생된다.

상황은 다르지만 한 가지는 같다.

위험을 만들어낸 사람과 그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괴수영화에서 군인들이 걸핏하면 죽어 나가는 것은 익숙한 장면이다. 그야말로 군인이 동네북이다.

하지만 군인들의 희생을 그저 전투 장면의 일부로 넘기기보다, 그들이 왜 그 위험 속에 들어가야 했는지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6. 생태계는 회복되고, 모나크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영화가 끝나갈 무렵, 고질라는 세리자와의 희생과 모스라의 도움으로 기도라를 물리친다.

살아남은 로단을 비롯한 여러 타이탄들이 고질라에게 복종한다.

이제 고질라가 진정한 괴수들의 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타이탄들이 깨어난 뒤의 세상을 뜻밖의 모습으로 설명한다.

괴수들이 활동한 지역에서 생태계가 회복되고 자연환경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기사들을 통해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엠마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는 말인가.

적어도 영화 속 세계관에서는 타이탄들이 지구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엠마의 행동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회복된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된다는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엠마는 일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오르카로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도라가 다른 타이탄들을 지배하면서 그 계산은 무너졌다.

자신이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는 기술을 이용해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여기서 모나크라는 조직의 역할도 생각하게 된다.

오르카는 괴수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술이다. 마크와 엠마가 개발에 참여한 이 장치는 괴수들을 진정시키는 데도 사용되지만,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가자 거대한 재난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한 기술은 누가 관리해야 하는가. 개발자가 조직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려 할 때, 이를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

물론 영화에서 모나크가 어떤 보안조치를 취했고, 실제로 어떤 관리상 잘못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오르카를 둘러싼 사건은 위험한 기술을 가진 조직이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스컬 아일랜드》에서는 랜다가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고 탐사를 추진했다. 이번에는 엠마가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려고 오르카를 이용했다.

모두 모나크와 관계된 인물들이다.

물론 모나크의 모든 구성원을 이들과 같은 부류로 볼 수는 없다. 세리자와처럼 인류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고 싸우다 죽은 사람들도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행동과 조직의 책임을 구분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개인의 잘못을 따지는 것과 별개로,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과정과 기술의 관리체계를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자 이번에도 다음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스컬 아일랜드와 콩에 관한 기록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질라와 콩이 서로 맞서는 모습을 그린 고대 벽화가 나타난다. 두 거대한 괴수 아래에는 두 팔을 들어 올린 작은 인간들의 모습도 보인다.

《스컬 아일랜드》에서는 콩이 아직 성장 중인 존재였고, 이번 영화에서는 고질라가 기도라를 물리치고 괴수들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그 둘이 맞서는 그림이라니.

이번에는 괴수들의 왕과 스컬 아일랜드의 왕이 맞붙을 모양이다.

고대 벽화는 과거에도 고질라와 콩의 종족 사이에 대결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앞으로 벌어질 고질라와 콩의 대결 또한 암시한다.

그리고 크레딧이 모두 끝난 뒤의 쿠키 영상에서는 환경 테러리스트 앨런 조나가 멕시코에서 기도라의 잘린 머리를 사들인다.

죽은 줄 알았던 기도라의 머리가 또 다른 사건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 머리는 후속작 《고질라 VS. 콩》에서 메카고질라와 연결된다.

괴수들의 싸움은 끝났지만, 인간들이 괴수를 이용하려는 시도는 끝나지 않은 셈이다.

7. 결자해지와 대의를 위한 희생

엠마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오르카를 이용해 기도라를 유인하고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준다.

자신이 벌인 일을 자신이 수습하려 한 것이다. 결자해지다.

딸을 구하려는 마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마지막에는 행동을 바꾸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미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까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리자와의 희생은 성격이 다르다. 모나크의 핵심 인물이었지만 엠마의 계획에 가담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일으키지 않은 재난을 막기 위해,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해저로 향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여기서 《라스트 사무라이》의 카츠모토가 떠오른다.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위험을 감수하고 마지막까지 그 선택을 책임졌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괴수들의 왕은 고질라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진정한 영웅은 핵폭탄을 맞고 더욱 강해진 고질라가 아니다.

그 폭탄을 직접 작동시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

《라스트 사무라이》의 카츠모토,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이시로 세리자와 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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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산서원에 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이 만대루에서 보내면서 이공간의 슬기로움에 감탄한다. 그리고 그 슬기로움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만대루의 성공은 병산서원의 중정(中庭)이 갖는 마당의 기능을 이 누마루가 차출함으로써 건물 전체에서 핵심적위치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P46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晦齋)이언적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溪流)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이 배치된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현풍도동서원은 공간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 P47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결과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P47

강당의 마루는 항상 마른걸레질을 해서 윤기를 잃지 않았고, 동재와 서재 그리고 원장실은 추운 날이면 장작불을 때어 흙벽이 바스러지는 일이 없다. 그 싱싱한 보존의 비결은 서원을 지금도 사람이 기거하는 양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고 여름이면 문을 활짝 열어주고 겨울이면 군불을 때어주는 것이며, 그렇게 방문객들의 체온이나무 마루와 토벽에 서려 병산서원은 이제껏 옛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 P49

그런 데에는 무엇보다도 지극정성으로 고사를 지키는 류시석 아저씨의노고를 빼놓을 수 없다. 서애의 후손으로 풍산류씨 가문의 인물 많음은유명하지만 문화유산 보호에 힘쓰신 시자 석자 아저씨 같은 분은 병산서원만큼이나 세상에 다시 없는 귀한 분이다. - P49

어느 답사 때였다. 모닥불이 시들해질 즈음, 나는미리 준비한 사과나무 가지를 불속에 던졌다. 그날따라 사과나무 가지는 불꽃을 둥글게 만들면서 사파이어 빛보다 더 푸른 광채를 발했다. 누군가가 그 불꽃의 아름다움을 말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뒤질세라감탄사를 발하며 화답했다. 무슨 나무냐고 묻기에 내가 사과나무임을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예술마당 솔 답사회 회장인 영남정형외과 정재명 원장이 빙그레 웃고만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웃냐고 물으니 정회장은 새로 지은 병원의 벽난로에 대구, 경산의 사과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로 수거한 사과나무 장작만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한국전력앞에서 촛불 자랑한 격이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手). 세상엔그런 식으로 상수(上) 위에 또 상수가 있는 법이다 - P50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며 안동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비롯하여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장성 필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돈암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했다. - P50

누정의 미학광주광역시의 동북 방향, 무등산 북쪽 기슭과 맞대고 있는 담양군 고서면과 봉산면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누각과 정자 그리고 원림 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면앙정(면仰亭), 송강(松江亭), 명옥헌(鳴玉軒),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식영정(息影亭) 거기에 송강 정철의 별서까지 들러보는 답사 코스는 조선시대 조원(造園, 정원이나 공원)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황금 코스이며, 이른바 조선시대 호남가단(歌壇)이라 불리는 가사(歌辭)문학의 본고장이니 국문학도들에게는 필수의 답사 코스가 된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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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오래된 정원

— 왜 가니, 니가. 잘 가라, 이 바보야.

<책 소개>

* 지은이 : 황석영
* 출판사 : 창비
* 출간일 : 2000년 4월 24일
* 분량 : 상권 332쪽, 하권 320쪽, 총 652쪽(출판사 초판 안내 기준)
* 장르 : 한국 장편소설
* 작품 특징 :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사회주의권의 붕괴 등 격변의 시대를 배경으로, 오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남자가 과거의 사랑과 잃어버린 시간을 되짚는 이야기

<영화 소개>

* 제목 : 오래된 정원(The Old Garden)
* 감독 : 임상수
* 각본 : 임상수
* 원작 : 황석영의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 제작사 : MBC 프로덕션
* 제작연도 : 2006년
* 개봉일 : 2007년 1월 4일
* 상영시간 : 112분
* 장르 : 드라마
* 주요 출연 : 지진희(오현우), 염정아(한윤희), 이은성(오은결), 윤여정(오현우의 어머니)
* 작품 특징 :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도피 중인 오현우와 그를 숨겨준 한윤희의 6개월간의 사랑, 17년의 이별과 재회를 이루지 못한 상실을 그린 영화. 시대적 격변과 개인의 사랑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황석영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

1.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엇갈린 두 사람의 궤적

오현우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다 수배되어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미술교사 한윤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지낸 시간은 불과 3개월. 현우는 다시 떠나고,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18년 만에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낯선 세상과 이미 세상을 떠난 연인 한윤희의 흔적뿐이다.

그가 믿었던 이념도, 함께 싸우던 사람들도, 세상도 달라져 있다.

황석영은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1980년대 한국사회의 격변과 사회주의권의 붕괴까지 이야기한다. 개인의 삶과 시대의 역사가 함께 흘러가는 소설이다.

현우는 18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청춘을 잃었고,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으며, 세상이 변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윤희의 18년은 어떠했을까.

현우가 감옥에 있는 동안 윤희의 시간도 흘렀다. 독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하기도 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현우의 딸 은결을 키우며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현우가 돌아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현우에게 18년은 빼앗긴 시간이지만 윤희에게는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당연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맞서 싸운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잊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 사람들의 세월도 그에 못지않게 무겁다.

윤희를 단순히 남자를 기다리며 살아간 여자로 볼 생각은 없다. 그녀에게도 자신의 신념과 삶이 있었고, 예술가로서의 꿈이 있었다. 현우와 헤어진 뒤에도 세상을 살아가며 사랑하고, 상실을 겪고, 아이를 키웠다.

그녀는 현우의 삶에 딸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함께하지 못한 세월을 현우의 희생만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가 감옥에서 잃어버린 18년과 그녀가 홀로 살아낸 18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두 사람의 삶을 바꿔놓았다.

황석영은 현우가 윤희의 기록을 읽으며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월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우가 몰랐던 것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만이 아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것이 18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다.

2.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 염정아가 연기한 한윤희; 6개월의 사랑, 17년의 이별

한윤희, 염정아. 이쁘다.

숨겨줘, 재워줘, 먹여줘, 몸줘.

2024년 10월 30일, 영화를 보고 남긴 독서노트다.

도피 중이던 오현우를 숨겨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사랑까지 내어준 여자다.

그런데 이놈은 떠난단다.

왜 가니, 니가.

그래, 네가 왜 가야 하느냐는 말이다.

염정아가 연기한 한윤희는 당차고 씩씩하다. 현우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자 씻기나 하라며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현우는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이야기하지만, 윤희에게는 우선 눈앞에 있는 현우라는 사람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윤희는 자신이 운동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도피 중인 현우를 숨겨주고, 함께 생활하며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이 갈뫼에서 지낸 시간은 영화에서 6개월로 그려진다.

그 짧은 시간에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독재정권에 쫓기는 남자와 그를 숨겨준 여자라는 사정만 빼면 여느 연인과 다를 것도 없다.

그런데 서울에서 동료들이 모두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현우는 혼자 숨어 있을 수 없다며 갈뫼를 떠나기로 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니 화가 난다.

그렇게 아름답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여자를 두고 왜 떠난다는 말인가.

솔직히 염정아가 너무 아름다워서 현우의 선택이 더욱 못마땅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미모 때문에 떠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윤희가 현우에게 내어준 것은 단순히 잠자리나 은신처가 아니다. 자신의 생활 속으로 그를 받아들였고, 함께하는 삶을 시작했다.

현우에게 갈뫼는 잠시 몸을 피하는 장소였을지 모르지만, 윤희에게는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 현우가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현우는 다시 떠나겠다고 한다.

현우가 떠나는 이유는 이해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 마음은 그와 다르다.

동료들이 붙잡혔다는 사정도 알겠고, 그가 지키려는 신념이 무엇인지도 알겠다.

그래도 윤희를 두고 떠나는 현우가 야속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지고, 영화 속 현우는 17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다.

윤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제 현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윤희가 남긴 기록을 읽고, 자신이 없었던 세월을 더듬는 것뿐이다.

오현우, 지진희. 바보, 지진아.

3. 그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거든

독서노트에는 현우의 말도 적어놓았다.

˝그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왠지 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거든.˝

그 시절은 그랬다.

독재정권이 국민을 억압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사람들이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죽어가던 시대였다.

그런 세상에서 자기 혼자 편안하게 살겠다는 것이 부끄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거리로 나섰고, 누군가는 감옥에 갔으며,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가치와 그 과정에서 감당한 희생을 가볍게 평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자기만 행복하면 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까지 죄스러운 일이었을까.

현우에게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함께 싸우던 사람들이 잡혀갔는데 자기 혼자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윤희와 함께하는 삶이 동료들을 배신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우가 갈뫼에 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동료들을 외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언젠가 다시 붙잡혔을 수도 있고, 윤희와 함께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떠나는 것만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현우가 지키려던 신념은 소중하다. 윤희와 함께할 수 있었던 삶도 소중하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반드시 우선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옳은 일을 했다는 이유로 그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고통까지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목적이 정당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겪은 상실은 구분해야 한다.

현우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은 독재정권의 억압 때문이지, 사랑하는 여자를 떠났기 때문에 받아야 할 대가가 아니었다.

현우를 비난하다가도 결국 그 시대를 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두 사람이 평범하게 사랑하며 살 수 없도록 만들었던 시대가 있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 민주화운동의 목적 중 하나 아니었을까.

그런데 정작 그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죄스럽게 여겨야 했다.

참 고약한 시대였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난 현우의 선택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4. 글로 읽는 시대와 영상으로 보는 사랑; 원망스러운 시대, 야속한 오현우

황석영의 소설과 임상수의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읽고 보는 과정에서 내가 바라보는 곳은 달라진다.

소설은 현우와 윤희가 헤어진 뒤에도 각자의 삶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폭넓게 보여준다. 민주화운동과 사회주의권의 붕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생각과 삶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함께 담겨 있다.

현우는 감옥에 있었지만 윤희는 그 밖에서 세상의 변화를 직접 겪었다. 그녀의 기록에는 현우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역사가 들어 있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현우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그 선택 이후 두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반면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갈뫼에서 함께했던 생활이 눈앞에 펼쳐진다.

윤희의 표정과 목소리, 두 사람이 나누는 농담과 사랑, 그리고 갈뫼를 떠나는 현우의 모습까지 직접 보게 된다.

소설에서 3개월이었던 두 사람의 동거 기간도 영화에서는 6개월로 늘어났다.

단순히 함께 지낸 기간이 길어졌다는 사실보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영화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일상을 관객에게 직접 보여주고, 그 모습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한다.

물론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효과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두 작품을 받아들인 방식은 그렇다.

소설에서는 윤희가 살아온 삶을 읽으며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갔다면, 영화에서는 윤희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를 먼저 좋아하게 된 셈이다.

글로 읽을 때와 영상으로 볼 때의 감정이 다르다.

소설에서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시대가 원망스럽고, 영화에서는 윤희를 두고 떠나는 현우가 야속하다.

5. 다시 찾은 오래된 정원, 그곳에 없는 사람; 돌아갈 수 없는 과거, 남아 있는 삶

오현우가 다시 갈뫼를 찾았을 때 그곳에는 윤희가 남긴 기록과 그림이 있다.

그러나 정작 윤희는 없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장소는 다시 찾을 수 있지만, 그때의 시간까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현우에게 갈뫼는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장소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했던 시간은 감옥에서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희에게 갈뫼는 현우와 함께했던 장소인 동시에 그가 떠난 뒤에도 자신의 삶이 계속된 현실의 한 부분이었다.

같은 장소를 기억하더라도 두 사람이 기억하는 시간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목이 오래된 정원인가 보다.

현우가 돌아온 것은 정원이지만, 정작 그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그곳에 없다.

대신 딸 은결이 있다.

현우가 기억하는 윤희는 과거의 연인이지만, 은결에게 윤희는 자신을 낳고 키운 어머니다. 같은 사람을 기억하지만 서로 알고 있는 삶이 다르다.

현우에게는 딸에게 설명할 이야기가 많겠지만, 은결에게도 아버지가 없는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려줄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다. 이제 현우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했던 딸의 삶을 알아가는 일일 것이다.

오래된 정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 살아갈 시간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니까.

6. 잘 가라. 이 바보야.

황석영의 소설과 임상수의 영화를 함께 읽고 보면서 결국 현우의 선택을 다시 생각한다.

나는 현우의 신념을 존중한다. 그가 무엇을 위해 싸웠고,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도 안다. 그러나 그의 선택까지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사랑도 때가 있는 법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것이 용기라면, 남아야 할 때 남는 것도 용기일 것이다.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당사자조차 평생 알지 못할 수 있다.

현우가 윤희 곁에 남았다면 두 사람은 행복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아깝다고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이다.

그러니 그에게 한마디는 해야겠다.

한윤희, 염정아. 이쁘다.

오현우, 지진희. 바보, 지진아.

왜 가니, 니가.

잘 가라. 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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