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희생시키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사람보다,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구하려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

괴수들은 본능 때문에 싸웠지만, 인간들은 신념 때문에 재앙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신념의 대가를 치른 것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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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라
가레스 에드워즈 감독, 브라이언 크랜스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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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는 무슨 죄가 있는가

— 영화 《고질라》(2014)를 보고, 인간의 호기심과 이기심, 자만심이 불러온 재앙

영화 소개

* 제목 : 고질라(Godzilla)
* 감독 : 개러스 에드워즈
* 개봉 : 2014년 5월 15일
* 장르 : SF, 액션, 재난
* 상영시간 : 123분
* 주요 출연 : 애런 테일러존슨(포드 브로디), 브라이언 크랜스턴(조 브로디), 엘리자베스 올슨(엘 브로디), 와타나베 켄(이시로 세리자와), 줄리엣 비노슈(산드라 브로디), 샐리 호킨스(비비안 그레이엄), 데이비드 스트라탄(윌리엄 스텐츠 제독)
* 제작 특징 : 몬스터버스 세계관의 첫 번째 영화로, 일본의 고질라를 현대적인 할리우드 괴수영화로 재해석한 작품
* 특이사항 : 1954년 비키니 환초 핵실험을 고질라 제거 작전과 연결하고, 일본 잔지라 원전 사고와 무토의 출현을 통해 인간과 거대 생명체의 충돌을 그린 작품

1. 아내의 사진을 찾아서?

《콩: 스컬 아일랜드》(2017)와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2019)를 본 뒤, 시간을 거슬러 《고질라》(2014)를 봤다.

영화는 1999년 일본 잔지라 원자력발전소의 사고로 시작한다.

원전에서 근무하는 조 브로디는 이상한 진동을 감지한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만, 점검을 위해 들어간 아내 산드라는 사고 현장에 갇히고 만다.

조는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 방호문을 닫아야 한다. 문 너머에는 아내가 있다.

결국 아내를 남겨둔 채 문을 닫는다.

산드라는 죽고, 원전은 무너진다.

정부는 자연재난에 따른 원전 사고라고 발표하고 주변 지역을 방사능 오염구역으로 통제한다.

15년이 흐른 뒤에도 조는 사고의 진상을 추적한다. 아들 포드는 이제 그만 과거를 잊으라고 하지만, 조는 그럴 수 없다.

“네 엄마가 거기 있다, 포드. 엄마가 아직 거기 있다고. 급하게 피하느라 엄마 사진이 한 장도 없어.”

“내가 엄마를 거기로 보냈어. 그저 원자로가 용해된 게 아니야.”

이 두 대사가 참으로 슬프다.

조가 사고의 원인을 밝히려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아내를 위험한 곳으로 보냈다는 죄책감, 그리고 아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더구나 아내의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아들과 함께 폐쇄된 잔지라 격리구역에 몰래 들어간다.

그런데 방사능 때문에 출입을 통제했다는 곳에서 개들이 뛰어다니고, 방사선 측정기에는 방사선이 검출되지 않는다.

조의 의심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사고 당시 자료가 담긴 디스크를 챙긴다. 그리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깨진 액자 속에서 아내의 사진을 발견한다.

15년 동안 아내를 잊지 못한 남자가 사고 자료를 찾으러 폐쇄구역에 들어갔다가, 뜻밖에 아내의 사진 한 장까지 되찾은 것이다.

괴수는 아직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이 장면에서 벌써 마음이 아프다.

2. 무토 부부를 생이별시킨 인간들

사건의 시작은 필리핀이다.

1999년 광산에서 거대한 고대 생명체의 뼈와 두 개의 포자가 발견된다. 하나는 이미 부화해 일본 잔지라 원전으로 이동했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에 의해 미국 네바다주의 핵폐기물 저장시설로 옮겨진다.

일본으로 간 놈은 수컷 무토, 미국으로 옮겨진 포자에서는 암컷 무토가 깨어난다.

결국 두 마리는 서로를 찾아가 짝짓기하고 번식하려 한다.

무토 입장에서 보면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부부를 생이별시켜 놓은 꼴이다.

물론 발견 당시부터 두 마리가 부부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를 찾아 번식하려는 생명체였다는 것은 영화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발견하자 연구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이다.

모나크와 일본 정부는 잔지라 원전 사고가 단순한 자연재난이 아니라 거대 생명체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주민들에게 진상을 감췄다.

모나크는 괴수를 제거하면 더 큰 방사능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격리하고 연구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을 숨긴 이유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15년 동안 비밀을 지켰을까.

괴수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고, 연구를 통해 무언가 이득을 얻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영화에서 그런 의도가 직접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조 브로디가 아내를 잃은 상황에서도 진상을 감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방사능 오염을 이유로 15년 동안 출입을 통제했지만, 조가 들어가 확인한 구역에서는 방사선이 검출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연구와 조직의 이해관계를 주민들의 알 권리보다 앞세운 것은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기심이라 할 만하다.

잔지라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고, 조는 아내를 잃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공식 설명은 자연재난이었다.

이쯤 되니 영화 《컨스피러시》가 떠오른다.

정부가 무언가를 숨긴다는 의심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진상을 감추는 일이 벌어지면 음모론이 자라날 토양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조의 의심은 결국 사실로 밝혀진다.

하지만 아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던 조마저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미국으로 옮겨진 포자도 문제다.

모나크 연구진은 수년간 시험한 끝에 그 포자가 휴면 상태라고 판단했다. 이후 미국 측은 방사성이 높다는 이유로 포자를 인수해 핵폐기물 저장시설에 처분했다.

휴면 상태라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방사선을 먹고 사는 생명체를 방사성 폐기물 곁에 가져다 놓은 셈이다.

결국 그곳에서 암컷 무토가 깨어났으니, 자신들의 판단이 옳을 것이라는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만심이다.

3. 애먼 관광객들과 내가 다녀온 도시들

무토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대한 발톱이 아니라 EMP, 전자기 펄스다.

이놈이 EMP를 발생시키면 전기가 끊기고 전투기와 통신장비 등 첨단 전자장비들이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이 자랑하는 군사력도 속수무책이다.

예전에 즐겨 하던 《스타크래프트》가 떠오른다. 테란의 사이언스 베슬이 사용하는 EMP 쇼크웨이브 말이다. 프로토스의 보호막과 에너지를 날려버리던 그 기술이 이번에는 미군을 상대로 등장한 셈이다.

인간은 수많은 돈과 기술을 들여 첨단 무기체계를 만들었는데, 무토는 자기 몸에서 EMP 한 번 발생시키면 그만이다.

전자무기와 생체무기의 대결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애먼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하와이 해변에는 평생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여행을 온 관광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질라가 바다에서 나타나자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온다.

호놀룰루 공항에서는 무토가 난입하고, 비행기들이 연쇄 폭발한다.

관광객들은 무슨 죄가 있는가.

그런데 쓰나미 장면에서 우스운 광경도 하나 있다.

나무에 묶여 있던 개가 위험을 감지하고 짖어대더니, 갑자기 목줄이 스르륵 풀린다. 그리고는 죽어라 달아난다.

어처구니가 없어 영상을 되돌려 다시 봤다.

정말 줄이 스르륵 풀린다.

괴수의 등장은 인정하겠는데, 개 목줄이 저절로 풀리는 모습은 참으로 웃기다.

그 개가 쓰나미에서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네바다에서 깨어난 암컷 무토는 라스베이거스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라스베이거스라니. 얼마 전 내가 직접 여행했던 도시다. 파리스 호텔에 묵고 스피어도 관람했던 곳인데, 이번에는 괴수가 그 도시를 박살 내고 있다.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는 샌프란시스코 역시 내가 다녀온 곳이다.

금문교 위를 직접 걸었고, 다리 위를 자동차로 건너보기도 했다. 구불구불한 길로 유명한 롬바드 스트리트도 가봤다.

공교롭게 영화에서 재앙을 겪는 하와이,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세 곳 가운데 두 곳을 직접 다녀온 셈이다.

내가 걸었던 금문교가 영화 속에서는 괴수의 등장으로 위험에 처하고, 내가 돌아다녔던 도시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그저 화면 속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과는 느낌이 다르다.

괴수들이야 서로를 찾아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사람들에게는 여행지이고 일터이고 삶의 터전이다.

4. 핵폭탄과 PP마대, 인간의 자만심

1954년 비키니 환초.

영화에서는 당시 핵실험이 사실은 고질라를 제거하려는 작전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고질라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 괴수들이 다시 등장하자 미군은 또 핵폭탄을 사용하려 한다.

군 지휘부는 핵탄두의 방사선으로 무토를 유인한 뒤 핵폭발의 충격으로 괴수들을 한꺼번에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핵폭발의 충격과 방사선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능력이 다르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과거에도 핵폭탄으로 고질라를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번에는 훨씬 강력한 폭탄이니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참으로 대단한 확신이다.

그런데 수컷 무토는 인간이 준비한 핵탄두를 암컷에게 가져다준다. 암컷은 샌프란시스코에 둥지를 만들고 핵탄두의 방사성 에너지를 이용해 알을 키운다.

인간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데, 무토에게는 새끼를 키울 에너지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괴수를 죽이겠다고 준비한 폭탄이 괴수의 먹이가 되다니.

이쯤 되면 인간이 우스워진다.

샌프란시스코 방어작전도 마찬가지다.

핵폭탄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괴수를 상대하겠다며 해안가에 PP마대를 쌓아놓고 기관총을 설치한다.

괴수는 방사능을 먹고 사는데, 인간은 모래주머니 뒤에 숨어 총알을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다.

참으로 눈물겨운 방어태세다.

물론 군인들이 우스운 것은 아니다. 위험을 알면서도 명령에 따라 작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도망갈 수도 없다.

웃기는 것은 그들에게 그런 무기를 들고 괴수와 맞서게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세리자와 박사는 이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인간은 자기들이 자연을 통제한다 여기지만, 사실은 그 반대지요.”

맞는 말이다.

자신이 만든 무기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자만심을 지적하는 말이다.

세리자와가 지니고 다니는 회중시계도 인상적이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시간에 멈춘 아버지의 시계다.

핵무기의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이 핵폭탄으로 괴수를 제거하려는 계획에 반대한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는 바로 그 세리자와가 고질라를 살리기 위해 핵폭탄을 직접 작동시키고 죽는다.

핵무기가 인간에게는 파괴의 수단이지만 고질라에게는 에너지원이 된다는 역설이 두 영화를 관통한다.

5. 새끼를 잃은 무토의 울부짖음

그런데 마지막 전투를 보면서 나는 무토가 불쌍해졌다.

수컷과 암컷 무토는 서로를 찾아 만나고, 마침내 알까지 낳는다.

무토가 인간을 미워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기 종족을 이어가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무토를 제거하려 한다.

물론 인간으로서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괴수를 막아야 한다. 하지만 무토가 인간적인 의미의 악의를 품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두 마리가 협공하자 고질라도 상당히 고전한다.

그런데 포드 브로디가 무토의 둥지를 불태워 버린다.

알들이 불타는 모습을 본 암컷 무토는 울부짖는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자기 새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울부짖는 것은 인간이나 괴수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새끼들을 잃은 일이 전투의 흐름을 바꾼다. 수컷은 고질라의 꼬리에 맞아 죽고, 암컷도 결국 죽음을 맞는다.

만약 새끼들이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두 마리의 협공으로 고질라가 상당히 밀리고 있었으니 무토 부부가 이겼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물론 결과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무토들이 죽는 방식도 참으로 제멋대로다.

미군의 총탄과 미사일에도 끄떡없던 수컷 무토가 고질라의 꼬리에 맞아 건물 구조물에 꿰뚫려 죽는다.

암컷은 방사성 에너지를 먹고 사는 괴수인데, 고질라가 입안에 푸른 원자열선을 쏟아붓자 죽는다.

물론 고질라의 원자열선은 단순한 방사선이 아니라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공격이다. 미사일의 폭발과 구조물의 관통도 작용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영화는 무토가 어떤 공격에는 강하고 어떤 공격에는 약한지 충분히 납득시키지 않는다.

차라리 고질라가 사무라이처럼 칼을 뽑아 무토의 목을 댕강 쳤다면 이해하겠다.

아무리 방사능을 먹고 사는 괴수라도 목이 잘리면 죽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으니까.

물론 칼을 든 고질라부터 우습기는 하겠다.

괴수영화라고 현실의 과학을 그대로 적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세계의 논리는 지켜야 한다.

괴수가 등장하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괴수라고 해서 논리까지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스운 설정과 별개로 새끼를 잃고 울부짖는 암컷 무토의 모습은 오래 생각하게 된다.

영화 초반에는 아내를 잃은 조 브로디가 슬펐는데, 마지막에는 새끼를 잃은 무토가 슬프다.

인간에게 가족이 소중하듯 무토에게도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6. 고질라가 도시를 구했다고? 염병이다

고질라는 결국 무토 두 마리를 죽인다.

그러나 자신도 기진맥진해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한다. 다음 날에야 다시 일어나 바다로 돌아간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고질라가 도시의 구원자인지를 묻는다.

고질라가 도시를 구했다고?

염병이다.

하와이에서는 고질라의 등장으로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괴수들의 싸움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과 군인이 희생되었다.

고질라가 인간을 구하기 위해 싸웠다는 근거는 없다. 세리자와 박사도 고질라가 자연의 균형을 회복하러 왔다고 믿었지, 인간을 구하러 왔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고질라는 무토와 싸워 이겼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고 고질라를 영웅으로 만들려 한다.

생각해 보면 이 재앙의 중심에는 괴수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발견하고 연구하려 했던 인간의 호기심.

잔지라 원전 사고의 진상을 감추고 주민들에게 실제 위험을 알리지 않았던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무토의 포자를 휴면 상태라고 믿고 핵폐기물 저장시설에 처분한 데 이어, 괴수들을 핵폭탄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인간의 자만심.

그 결과 관광객들이 죽고, 군인들은 위험한 작전에 내몰렸으며,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무토 가족도 모두 죽었다.

영화 초반에는 아내를 잃은 남자가 울고, 마지막에는 새끼를 잃은 괴수가 울부짖는다.

인간과 괴수라는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소중한 존재를 잃었다.

그런데 영화는 고질라가 이겼다는 이유로 그를 도시의 구원자로 부르려 한다.

나는 오히려 무토가 불쌍하다.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옮겨놓은 포자에서 깨어나, 짝을 찾아 만나고, 새끼를 키우려 했던 두 마리의 생명체.

그들에게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명분도, 인간을 지배하겠다는 야망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아 종족을 이어가려 했을 뿐이다.

무토는 무슨 죄가 있는가.

차라리 괴수보다 인간의 호기심과 이기심, 자만심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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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
마이클 도허티 감독, 밀리 바비 브라운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지구를 구하겠다며 사람을 죽이는 인간들

— 영화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2019)를 보고, 괴물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신념과 희생

영화 소개

* 제목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Godzilla: King of the Monsters)
* 감독 : 마이클 도허티
* 개봉 : 2019년 5월 29일
* 장르 : SF, 액션, 모험
* 상영시간 : 132분
* 주요 출연 : 카일 챈들러(마크 러셀), 베라 파미가(엠마 러셀), 밀리 바비 브라운(매디슨 러셀), 와타나베 켄(이시로 세리자와), 찰스 댄스(앨런 조나), 장쯔이(일린 첸), 샐리 호킨스(비비안 그레이엄)
* 제작 특징 : 몬스터버스 세계관의 세 번째 영화이자 《고질라》(2014)의 후속작으로, 고질라와 모스라, 로단, 킹 기도라의 대결을 다룬 작품
* 특이사항 : 엔딩 크레딧에서 고질라와 콩이 대결하는 모습을 그린 고대 벽화가 등장하며, 쿠키 영상에서는 환경 테러리스트 앨런 조나가 킹 기도라의 잘린 머리를 매입해 후속작과의 연결을 암시

1.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다른 사람의 아들들을 죽인다

《콩: 스컬 아일랜드》를 보고 난 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를 봤다.

전편에서는 빌 랜다라는 인간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겠다고 미지의 섬에 군인들을 끌고 들어가 죽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아예 인류를 희생시켜 지구를 구하겠다는 여자가 등장한다.

베라 파미가가 연기한 엠마 러셀 박사다.

201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고질라와 무토라는 괴수들이 싸우면서 대재앙이 발생한다. 엠마와 남편 마크는 그 과정에서 아들 앤드루를 잃는다. 고질라가 직접 아들을 죽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부부에게는 괴수들의 등장으로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태도가 전혀 다르다.

마크는 고질라를 증오한다. 괴수들을 연구하던 모나크에서도 떠난다. 반면 엠마는 괴수들을 계속 연구하면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타이탄이라 불리는 거대 생명체들은 자연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깨워 인간과 괴수가 공존하던 자연의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 속 설정에서 이 주장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타이탄들이 자연환경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지녔다는 설명이 나오고,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실제로 생태계가 복원되는 모습도 소개된다.

문제는 그 주장을 실행하는 방법이다.

엠마는 타이탄들을 깨우는 과정에서 일부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보면서도, 오르카를 이용하면 그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결정한 사람은 엠마 자신이었고, 실제로 희생될 사람들은 그런 결정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이론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엠마는 환경 테러리스트 앨런 조나와 손잡고, 괴수들과 소통하는 장치인 오르카를 이용해 잠들어 있던 타이탄들을 깨우는 계획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납치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테러리스트들과 협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더구나 딸 매디슨까지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문제가 있다.

엠마는 타이탄들을 깨우기 시작할 때 딸을 자기 곁에 두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뒤 딸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쳤다는 대사도 나온다.

적어도 자기 딸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영화 속 행동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지만, 엠마가 나중에 보여주는 태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인류 전체가 위험해지는 것은 감수하면서도 자기 자식만큼은 그 위험에서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아들 하나를 잃은 슬픔이 그렇게 컸던 여자가, 지구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부모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려 한다.

그런데 그 희생의 범위는 자신이 정한다.

나는 《스컬 아일랜드》의 랜다가 가장 큰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엠마를 보니 랜다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랜다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반면 엠마는 대규모 인명 피해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그 희생을 지구 회복의 수단으로 삼았다.

콩보다 랜다가 더 무서웠는데, 이번에는 랜다보다 엠마가 훨씬 더 무섭다.

2. 베라 파미가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엠마 역을 맡은 배우는 베라 파미가다.

《베이츠 모텔》의 노마 베이츠, 《오펀: 천사의 비밀》의 케이트 콜먼, 《컨저링》의 로레인 워런 등을 연기했던 배우다.

그녀가 맡았던 인물들이 모두 같은 성격은 아니다.

《베이츠 모텔》의 노마 베이츠는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집착과 통제로 이어지는 인물이다.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는 불안과 의심 속에서 가족을 지키려는 어머니를 연기했고, 《컨저링》에서는 초자연적인 위험에 맞서는 로레인 워런을 연기했다.

선한 인물도 있고, 불안정한 인물도 있다. 그러나 모성애와 불안, 신념과 집착이 복잡하게 얽힌 인물을 연기할 때 보여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엠마 러셀도 그렇다.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장면을 보면, 인류가 대규모로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태도는 확신에 차 있다. 과학적 근거를 내세우며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세리자와가 수십억 명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일이라고 경고해도 엠마는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계획이 인류를 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이 더 무섭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과,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위험할까.

나는 후자가 더 두렵다.

베라 파미가는 이런 인물을 연기하는 데 참으로 잘 어울린다.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엠마의 지적인 모습과 그 안에 숨어 있는 무서운 집착이 이만큼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을까 싶다.

그런데 결국 딸 매디슨이 엄마의 모순을 알아차린다.

엠마는 타이탄들을 하나씩 깨워 자연의 균형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기도라가 새로운 우두머리로 나서 다른 타이탄들을 일제히 불러내면서 계획은 통제를 벗어난다.

세상이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자 매디슨은 엄마에게 괴물이라고 말한다.

엄마는 지구를 구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엄마가 시작한 일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딸의 눈에도 엄마가 괴물로 보인 것이다.

3. 괴수들의 왕은 누구인가

괴수들의 싸움도 참으로 요란하다.

고질라, 모스라, 로단, 그리고 머리가 세 개 달린 킹 기도라까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해 보이는 놈은 역시 기도라다.

고질라는 기도라에 상대도 않고, 잘린 머리까지 재생한다. 알고 보니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체도 아니다. 우주에서 온 침입자로, 지구의 타이탄들을 지배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지구를 바꾸려는 존재다.

힘으로만 보면 고질라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기도라는 힘은 세지만 편이 별로 없다.

로단은 처음에는 기도라에게 덤비다가 패하자 곧바로 기도라의 꼬붕으로 들어간다. 나중에는 모스라와 싸우다가 가슴을 찔린다.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남았고, 기도라가 죽자 이번에는 고질라밑으로 첫빠따로 기어들어간다.

이놈은 누가 이기는지 보고 대장을 바꾸는 모양이다.

모스라는 고질라와 각별한 관계다. 영화에서는 둘의 관계를 두고 연인 사이냐는 농담까지 등장하지만, 실제 설정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 관계에 가깝다.

그런데 영화에서 가장 황당한 것은 인간의 무기가 괴수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군이 산소 파괴자라는 신무기를 발사하자 고질라는 치명상을 입고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반면 기도라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는다.

이후 고질라가 회복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세리자와 박사는 핵폭탄을 이용해 고질라를 되살릴 계획을 세운다.

핵폭탄을 맞으면 인간은 죽지만, 고질라는 방사선 에너지를 흡수해 오히려 강해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설정이다.

나중에는 모스라가 기도라의 공격을 대신 받아 희생되면서 자신의 에너지까지 고질라에게 전달한다.

고질라는 마침내 온몸에서 엄청난 열을 내뿜는 불덩어리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기도라를 압도해 불태워 없애버린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핵폭탄이 괴수에게는 영양제가 되고, 다른 괴수의 희생까지 더해지자 거의 무적이 된다.

괴수영화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이렇게 해결하고 나니 마지막 승부가 다소 허무하다.

그런데 그 핵폭탄을 직접 터뜨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

4. 새 시계를 살 시간이야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이시로 세리자와 박사.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카츠모토를 연기했던 그 배우다.

그 영화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싸웠던 카츠모토가 떠오른다. 이번에도 와타나베 켄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인물을 연기한다.

하지만 세리자와의 신념은 엠마와 다르다.

그는 괴수들을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해서 반드시 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과 괴수가 공존할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질라를 증오하는 마크에게도 그런 생각을 전한다.

고질라를 찾아 잠수함으로 이동하던 중 마크가 세리자와에게 시간을 묻는다.

세리자와가 대답한다.

“새 시계를 살 시간이야.”

마크는 그 말을 듣고 죽은 아들 앤드루가 좋아하던 농담을 떠올린다. 앤드루는 세리자와가 회중시계를 꺼낼 때마다 시간을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계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시간이다. 세리자와가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그때 멈춘 아버지의 회중시계다. 전편 《고질라》에서 이미 소개된 물건이다.

원자폭탄이 남긴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는 고질라를 살리기 위해 핵폭탄을 사용하려 한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마크는 자신이 아들을 잃게 만든 존재를 구하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 그에게 세리자와가 말한다.

“상처를 준 악마와 화해하는 게 아픔을 잊는 유일한 길이지.”

이 말은 단순히 고질라를 구해야 한다는 설명이 아니다.

세리자와는 마크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망하는 대상을 없애는 것만으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마크가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고질라를 증오하는 마음만으로는 남아 있는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한다.

그리고 세리자와는 자신의 신념을 말로만 주장하지 않는다.

고질라가 회복하고 있는 해저의 은신처에 핵폭탄을 설치해야 하는데, 잠수함의 무기 발사 장치가 고장 나 직접 폭탄을 설치하고 작동시켜야 한다.

그곳의 열기와 방사선량을 생각하면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임무다.

세리자와는 자신이 가겠다고 나선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알고 직접 선택한다.

핵폭탄을 작동시킨 세리자와는 마지막으로 고질라에게 다가간다.

거대한 몸에 손을 얹고 조용히 작별을 고한다.

“굳바이, 나의 오랜 친구.”

그리고 핵폭탄이 폭발한다.

세리자와는 죽고 고질라는 살아난다.

이 장면만큼은 그저 황당한 괴수영화라고 웃어넘길 수 없었다.

5. 괴수를 깨운 사람과 막아야 하는 사람

이번 영화에서도 군인들이 수없이 죽어 나간다.

하지만 《콩: 스컬 아일랜드》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편의 군인들은 지질조사를 지원한다는 명령을 받고 위험의 실체도 모른 채 섬에 들어갔다. 이번 영화의 군인들은 이미 발생한 재난에 대응하고,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괴수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출동한다.

임무의 성격부터 다르다.

따라서 단순히 군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출동시킨 결정까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따져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어떤 판단이 내려졌고, 그 판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산소 파괴자다.

미군 지휘부는 고질라와 기도라를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무기의 사용을 결정한다. 세리자와는 고질라를 믿어야 한다며 반대하지만, 군 지휘부는 이미 미사일이 발사되었다고 통보한다.

결과는 실패다.

기도라는 살아남고, 오히려 기도라와 맞서던 고질라만 치명상을 입는다.

그 때문에 세리자와가 나중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고질라를 회복시켜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물론 당시 군 지휘부가 기도라의 정체와 무기의 효과를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괴수들의 공격으로 도시가 파괴되는 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판단에 대한 검토까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군인들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되는 것과, 지휘부의 판단이 적절했는지는 구분해서 따져야 한다.

보스턴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마찬가지다.

딸 매디슨은 엄마의 계획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르카를 가지고 탈출한다. 그리고 야구장에 설치된 음향시설을 이용해 타이탄들을 진정시키려 하지만, 기도라까지 그곳으로 끌어들이고 만다.

그러자 아버지 마크와 모나크 관계자들, 군인들이 매디슨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

물론 군인들의 임무는 매디슨 한 사람의 구조만이 아니었다. 괴수들의 공격을 막고,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재난을 수습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의 출발점에는 엠마와 테러리스트들의 결정이 있었다.

엠마가 벌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위험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스컬 아일랜드》에서 랜다의 탐사 때문에 군인들이 죽었듯, 이번에는 엠마가 불러온 재난을 막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희생된다.

상황은 다르지만 한 가지는 같다.

위험을 만들어낸 사람과 그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괴수영화에서 군인들이 걸핏하면 죽어 나가는 것은 익숙한 장면이다. 그야말로 군인이 동네북이다.

하지만 군인들의 희생을 그저 전투 장면의 일부로 넘기기보다, 그들이 왜 그 위험 속에 들어가야 했는지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6. 생태계는 회복되고, 모나크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영화가 끝나갈 무렵, 고질라는 세리자와의 희생과 모스라의 도움으로 기도라를 물리친다.

살아남은 로단을 비롯한 여러 타이탄들이 고질라에게 복종한다.

이제 고질라가 진정한 괴수들의 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타이탄들이 깨어난 뒤의 세상을 뜻밖의 모습으로 설명한다.

괴수들이 활동한 지역에서 생태계가 회복되고 자연환경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기사들을 통해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엠마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는 말인가.

적어도 영화 속 세계관에서는 타이탄들이 지구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엠마의 행동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회복된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된다는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엠마는 일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오르카로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도라가 다른 타이탄들을 지배하면서 그 계산은 무너졌다.

자신이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는 기술을 이용해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여기서 모나크라는 조직의 역할도 생각하게 된다.

오르카는 괴수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술이다. 마크와 엠마가 개발에 참여한 이 장치는 괴수들을 진정시키는 데도 사용되지만,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가자 거대한 재난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한 기술은 누가 관리해야 하는가. 개발자가 조직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려 할 때, 이를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

물론 영화에서 모나크가 어떤 보안조치를 취했고, 실제로 어떤 관리상 잘못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오르카를 둘러싼 사건은 위험한 기술을 가진 조직이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스컬 아일랜드》에서는 랜다가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고 탐사를 추진했다. 이번에는 엠마가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려고 오르카를 이용했다.

모두 모나크와 관계된 인물들이다.

물론 모나크의 모든 구성원을 이들과 같은 부류로 볼 수는 없다. 세리자와처럼 인류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고 싸우다 죽은 사람들도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행동과 조직의 책임을 구분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개인의 잘못을 따지는 것과 별개로,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과정과 기술의 관리체계를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자 이번에도 다음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스컬 아일랜드와 콩에 관한 기록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질라와 콩이 서로 맞서는 모습을 그린 고대 벽화가 나타난다. 두 거대한 괴수 아래에는 두 팔을 들어 올린 작은 인간들의 모습도 보인다.

《스컬 아일랜드》에서는 콩이 아직 성장 중인 존재였고, 이번 영화에서는 고질라가 기도라를 물리치고 괴수들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그 둘이 맞서는 그림이라니.

이번에는 괴수들의 왕과 스컬 아일랜드의 왕이 맞붙을 모양이다.

고대 벽화는 과거에도 고질라와 콩의 종족 사이에 대결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앞으로 벌어질 고질라와 콩의 대결 또한 암시한다.

그리고 크레딧이 모두 끝난 뒤의 쿠키 영상에서는 환경 테러리스트 앨런 조나가 멕시코에서 기도라의 잘린 머리를 사들인다.

죽은 줄 알았던 기도라의 머리가 또 다른 사건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 머리는 후속작 《고질라 VS. 콩》에서 메카고질라와 연결된다.

괴수들의 싸움은 끝났지만, 인간들이 괴수를 이용하려는 시도는 끝나지 않은 셈이다.

7. 결자해지와 대의를 위한 희생

엠마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오르카를 이용해 기도라를 유인하고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준다.

자신이 벌인 일을 자신이 수습하려 한 것이다. 결자해지다.

딸을 구하려는 마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마지막에는 행동을 바꾸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미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까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리자와의 희생은 성격이 다르다. 모나크의 핵심 인물이었지만 엠마의 계획에 가담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일으키지 않은 재난을 막기 위해,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해저로 향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여기서 《라스트 사무라이》의 카츠모토가 떠오른다.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위험을 감수하고 마지막까지 그 선택을 책임졌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괴수들의 왕은 고질라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진정한 영웅은 핵폭탄을 맞고 더욱 강해진 고질라가 아니다.

그 폭탄을 직접 작동시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

《라스트 사무라이》의 카츠모토,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이시로 세리자와 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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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스컬 아일랜드 (1disc)
조던 보트 로버츠 감독, 존 굿맨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콩보다 더 큰 괴물

— 영화 《콩: 스컬 아일랜드》(2017)를 보고, 애먼 사람들만 죽어 나가는 세상

영화 소개

* 제목 : 콩: 스컬 아일랜드(Kong: Skull Island)
* 감독 : 조던 보트로버츠
* 개봉 : 2017년
* 장르 : 액션, 모험, 판타지
* 상영시간 : 118분
* 주요 출연 : 톰 히들스턴(제임스 콘래드), 브리 라슨(메이슨 위버), 사무엘 L. 잭슨(프레스턴 패커드), 존 굿맨(빌 랜다), 존 C. 라일리(행크 말로)
* 제작 특징 : 몬스터버스 세계관의 두 번째 영화, 1973년을 배경으로 한 킹콩 이야기
* 특이사항 : 쿠키 영상에서 고질라, 모스라, 로단, 킹 기도라의 존재를 암시

1. 누가 이 일을 벌였는가

괴수영화 한 편을 봤다. 《콩: 스컬 아일랜드》. 거대한 고릴라가 등장하고, 헬기가 추락하고, 괴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볼거리는 충분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콩보다 더 화가 나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존 굿맨이 연기한 빌 랜다. 비밀 연구기관 모나크의 책임자다.

이 인간이야말로 영화에 등장하는 가장 큰 괴물이다.

1973년,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하던 무렵이다.

랜다는 위성으로 발견된 미지의 섬, 스컬 아일랜드에 탐사대를 보내려고 한다. 그곳에 거대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랜다는 상원의원을 찾아가 탐사에 대한 정치적 지원을 얻어내고 군대의 지원까지 요청한다. 소련이 먼저 섬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논리도 동원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어이가 없다. 상원의원 한 사람의 정치적 지원으로 탐사가 추진되고, 군 병력까지 동원되는 과정이 너무도 손쉽게 그려진다. 물론 실제로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별도의 장군이다. 그렇다고 해도 영화 속 의사결정 과정은 참으로 허술하다.

더 큰 문제는 탐사의 진짜 목적이다.

겉으로는 지질조사다. 폭발물을 투하해 지하 구조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조사 목적도 있지만, 랜다가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거대 생명체의 존재였다.

그는 위험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가는 사람들이 그 위험을 충분히 알고 판단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 싶은 욕심, 남들이 믿지 않는 것을 자신이 밝혀내겠다는 집착. 그 목적을 위해 군인들과 조사원들이 동원된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정작 다른 사람들이다.

2. 집에 가고 싶었던 군인들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패커드 중령.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한다.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싸웠던 군인들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패커드는 철수를 마냥 반기는 지휘관은 아니다. 전쟁이 이런 식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불만도 있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 임무가 주어진다.

미지의 섬에 과학자들을 데려다주라는 것이다.

패커드는 기꺼이 임무를 받아들인다. 전쟁이 끝나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부하들과 함께 비행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부하들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전쟁이 끝났으니 가족을 만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군인에게 상부의 명령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결국 패커드는 부하들을 데리고 섬으로 향한다.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평범한 지질조사 따위가 아니었다.

폭발물이 투하되자 거대한 콩이 나타난다. 헬기들이 추락하고 군인들이 죽어 나간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전우들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콩의 입장에서는 자기 영역에 난데없이 침입한 인간들이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니 침입자들을 공격하는 것이 잘못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죽어 나간 군인들은 무슨 죄인가.

그들에게 이 섬에 오고 싶으냐고 물어보기나 했던가.

3. 패커드의 복수는 비난받아야 하는가

패커드는 분노한다.

자신이 지휘하던 부하들이 죽었다.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전우들이다. 마지막 임무만 마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괴물에게 죽임을 당했다.

패커드가 콩을 죽이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는 콩이 섬을 지키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부하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며 끝까지 싸우려 한다. 이 대목은 지휘관으로서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패커드를 그저 복수에 눈먼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는 애초에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들어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과학자들을 수송하는 임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의 거대 생명체 탐사에 동원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패커드가 느꼈을 분노와 배신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패커드가 처음부터 아무런 판단 없이 명령만 수행한 것은 아니다.

섬에 접근하던 중 거대한 폭풍을 마주하자, 랜드샛의 현장 책임자 니에베스는 위험을 이유로 탐사 중단을 주장한다. 하지만 랜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패커드에게 결정을 넘긴다. 결국 패커드는 헬기대를 이끌고 폭풍 속으로 들어간다.

패커드는 섬에 거대한 괴물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위험을 감수하고 작전을 강행하는 결정에는 직접 참여했다.

여기서 패커드의 책임도 시작된다.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이라는 사실과 현장에서 부하들의 안전을 판단해야 하는 지휘관이라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분노가 향한 대상은 잘못되었다.

부하들을 그 섬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랜다였지만, 패커드는 눈앞에서 부하들을 죽인 콩을 적으로 삼았다.

최초의 원인을 제공한 인간과 직접적인 죽음을 가져온 괴물 사이에서, 패커드는 결국 괴물에게 복수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자신도 죽는다.

생각해 보면 랜다와 패커드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랜다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고, 패커드는 부하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아남은 부하들까지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두 사람의 동기와 책임은 다르다. 패커드는 랜다가 벌인 일에 끌려 들어간 피해자이면서도, 현장에서는 부하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지휘관이었다. 부하들을 잃은 피해자라는 사실이 남은 부하들의 생명까지 걸고 복수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 결국 패커드도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랜다와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참으로 비극적인 인물이다.

4. 가고 싶었던 사람과 가기 싫었던 사람

이 영화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사람들의 운명이다.

톰 히들스턴이 연기한 콘래드는 돈을 받고 탐사에 참가한다. 위험을 예상하고 보수를 다섯 배나 더 요구하고, 살아 돌아왔을 때 보너스까지 추가로 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브리 라슨이 연기한 사진기자 위버도 자신의 취재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섬에 들어간다.

반면 현장 책임자 니에베스는 폭풍을 보고 탐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탐사는 강행된다.

결국 니에베스는 섬을 탈출하기 위해 강을 따라 이동하던 중, 날개 달린 괴생명체 무리에게 붙잡혀 공중에서 목숨을 잃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군인들도 죽는다. 위험하다고 반대했던 사람도 죽는다.

반면 스스로 탐사를 선택한 콘래드와 위버는 살아남는다.

물론 위험을 감수하고 참가한 사람이 살아남았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들도 목숨을 걸고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데 있다.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과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돈을 받고 위험을 감수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섬에 들어갔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정작 목숨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는 애초에 그 섬에 가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대목이었다.

5.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랜다도 결국 섬에서 죽는다. 그러니 그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가 위험을 알고 있었는가. 누가 탐사를 추진했는가. 누가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는가. 그리고 그 위험을 함께 감수해야 할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주었는가.

영화는 이런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패커드는 콩에게 복수하려는 집착적인 군인으로, 콘래드와 위버는 콩을 이해하고 보호하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는 사이 정작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었던 랜다와 모나크의 책임은 괴수들의 싸움 속에 묻혀버린다.

콩은 자기 영역을 지키려고 싸웠다. 인간들이 먼저 폭발물을 터뜨렸고, 그 소란으로 섬의 위험한 생명체들까지 깨어났다.

반면 랜다는 자신이 믿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험 속으로 데려갔다.

누가 더 괴물다운 행동을 했는가.

나는 콩보다 랜다가 훨씬 무서웠다.

영화 마지막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섬에 불시착해 오랫동안 고립되었던 말로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내를 만나고, 그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아들도 만난다.

그 장면은 반갑고 따뜻하다.

그런데 문득 생각한다.

말로는 수십 년 만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제 막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패커드의 부하들 가운데 일부는 영영 돌아가지 못했다.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가는 마당에 누군가의 탐사 욕심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괴수영화에서 이런 것까지 따져야 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애먼 군인들이 죽어 나갔는데, 누가 그들을 그 섬으로 보냈는지는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고, 그 일을 수습하느라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무 잘못도 없이 희생되는 사람도 있다.

《콩: 스컬 아일랜드》도 결국 그런 이야기로 보였다.

6. 사람은 죽어도 조직은 살아남는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쿠키 영상에서 살아남은 콘래드와 위버는 모나크 관계자들을 만난다. 그들은 다른 거대 생명체들의 존재를 보여준다. 고질라, 모스라, 로단, 킹 기도라. 스컬 아일랜드의 콩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랜다는 죽었다. 패커드도 죽었다. 수많은 군인과 조사원들도 죽었다. 그런데 모나크는 여전히 건재하다.

섬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모나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오히려 새로운 거대 생명체들을 보여주며 다음 이야기를 준비한다.

모나크라는 조직 전체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지는 영화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조직의 인물이 위험한 탐사를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된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조직은 다음 일을 준비한다.

하긴, 모나크까지 책임을 물어 해체해 버리면 다음 영화는 누가 만들겠는가.

영화 제작진 입장에서는 후속작을 위한 장치겠지만, 앞서 희생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한 결말이다.

사람은 죽고 조직은 살아남는다. 일을 벌인 사람은 사라져도 그 조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사업을 준비한다.

어디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겠는가.

결국 이 영화에는 두 종류의 괴물이 등장한다.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괴물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남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인간.

영화의 제목은 《콩: 스컬 아일랜드》지만, 내가 본 가장 큰 괴물은 콩이 아니었다.

빌 랜다. 바로 그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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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전사
마이클 크라이튼 외 감독, 안토니오 반데라스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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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보고서] 『13번째 전사』
― 야만인의 땅에서 전우를 만나다

“내 이름은 아메드 이븐 파할란, 이븐 알라바스, 이븐 라시드 이븐 하마드.”

1999년 존 맥티어난 감독의 『13번째 전사』는 오래전에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거칠고 묵직한 바이킹 액션영화였다. 안개 속에서 나타나는 벤돌, 곰가죽을 뒤집어쓴 전사들, 산등성이를 거대한 불의 용처럼 내려오는 횃불의 행렬,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발할라를 이야기하는 불바이와 북구 전사들의 모습이 강하게 남았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니 이 영화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실제 10세기 아랍 여행가 아흐마드 이븐 파들란의 기록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 위에 고대 영웅서사시 『베오울프』의 이야기를 얹었다. 실존 인물을 전설 속으로 밀어 넣고, 신화 속 괴물을 인간으로 바꾸고, 서로 말조차 통하지 않던 아랍인과 북구인들을 열세 명의 전사로 묶는다.

한쪽에는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자부하는 바그다드에서 온 시인 아메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가 처음에는 야만인이라고 여겼던 북구의 전사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사람인지 괴물인지조차 알 수 없는 벤돌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영화는 단순하지만 꽤 묵직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믿는 신도 다르고, 살아온 방식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과연 서로를 이해하고 목숨까지 맡길 수 있는가.

『13번째 전사』는 그 답을 열세 명의 전사들에게 맡긴다.


1. 바그다드의 시인, 사실상의 유배길에 오르다

아메드 이븐 파들란에게 세상의 중심은 바그다드다. 글을 읽고 시를 쓰며, 예법과 문명을 알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권력자의 아내와 불륜 관계를 맺은 것이 문제가 되면서 머나먼 북쪽으로 사절 임무를 받아 떠나게 된다. 명목은 외교사절이지만 영화 속 아메드의 처지에서 보면 사실상 추방이고 유배다.

그렇게 문명의 중심에서 살던 시인이 자신이 ‘야만인의 땅’이라고 여기는 곳으로 밀려난다.

아메드가 처음 만난 북구인들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 너무 다르다. 술을 마시고, 큰소리로 웃고, 싸우고, 죽은 왕을 불태우며 죽음을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인다. 식사와 위생에 관한 습관조차 아메드의 눈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히 그에게 북구인들은 야만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북구인들에게도 아메드는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들보다 작은 몸집에, 그들이 보기에는 개만 한 아라비아 말을 타고 나타난 남쪽 사람이다. 커다란 북구식 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본다.

영화는 바로 그 거리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메드가 북구인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하면 처음의 이 거리감이 더욱 중요하다.

처음에는 문명인과 야만인이었다.

마지막에는 전우가 된다.


2. 열세 번째 전사는 북구인이 아니어야 한다

불바이가 등장하면서 아메드의 개인적인 유배 이야기는 갑자기 영웅서사로 넘어간다.

불바이는 북구 전사들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그가 말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용감한지 떠벌리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끊임없이 명령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판단을 기다리고, 싸움이 시작되면 그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다.

그런 불바이에게 흐로스가르의 나라에서 전령이 찾아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으며,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막아낼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무녀가 뼈를 던져 점을 친다.

그곳으로 갈 전사는 열세 명이어야 한다.

전사들이 하나씩 정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열세 번째.

열세 번째 전사는 북구인이 아니어야 한다.

그 한마디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던 아메드가 갑자기 전쟁에 끌려 들어간다. 아메드는 전사가 아니다. 불바이나 다른 북구인들처럼 전투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죽음을 명예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열세 번째 전사가 된다.

그래서 『13번째 전사』는 처음부터 강했던 영웅들이 괴물을 무찌르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전사가 아니었던 아메드가 어떻게 그들 사이의 한 사람이 되고, 마침내 서로 목숨을 맡기는 전우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3. 벤돌, 괴물의 얼굴을 한 인간

흐로스가르의 사람들에게 벤돌은 평범한 적이 아니다.

안개와 함께 나타난다. 사람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가져간다. 시체를 먹는다. 곰가죽을 뒤집어쓰고 공격한다. 산등성이를 따라 수많은 횃불을 들고 내려오는 모습은 거대한 불의 용처럼 보인다.

더 무서운 것은 싸움이 끝난 다음이다.

분명히 죽였는데 벤돌의 시체가 남아 있지 않는다. 자기편의 시체를 모두 가져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남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벤돌은 점점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칼에 맞아도 죽지 않는 놈들.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놈들.
죽은 사람을 먹는 놈들.
곰인지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는 놈들.

공포는 실제보다 더 큰 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불바이와 전사들이 벤돌을 상대하면서 그 공포의 껍질이 하나씩 벗겨진다. 그리고 결국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너무나 단순하다.

벤돌은 인간이다.

곰가죽을 벗기면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 칼에 맞으면 피를 흘리고 죽는다.

나는 이 순간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괴물이라고 믿는 동안에는 싸울 방법이 없다.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싸울 수 있다.

『베오울프』에 등장하는 초자연적 괴물 그렌델을 영화는 이런 식으로 다시 만들었다. 진짜 괴물을 등장시키는 대신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괴물이라고 믿게 된 인간 집단을 등장시켰다.

괴물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은 곧 공포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이다.


4. 아메드는 귀로 배우고, 불바이는 눈으로 배운다

이 영화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처음에는 북구인들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던 아메드가 모닥불 주변에 앉아 그들의 말을 계속 듣는다.

처음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소음이다. 하지만 아메드는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반복되는 말을 듣고, 같은 상황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연결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단어가 들린다.

조금 뒤에는 문장이 들린다.

마침내 자신과 자기 어머니를 두고 농담하는 북구인의 말을 알아듣고 그들의 언어로 받아친다. 놀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말을 배웠느냐고 묻자 아메드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들었다고.

실제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외국어를 완벽하게 습득한다는 것은 영화적 과장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현실적인 어학학습을 보여주려는 장면이 아니다.

아메드가 북구인들의 세계 바깥에서 구경하던 사람에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아메드만 배우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메드가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불바이가 아메드의 글에 관심을 가진다.

불바이는 아메드에게 소리를 글자로 그릴 수 있느냐는 식으로 묻는다. 말을 소리로만 기억하는 사람의 눈에 문자는 ‘소리를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메드가 땅에 글을 쓴다.

불바이는 그것을 유심히 본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도 그 모양을 기억해 바닥에 써본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익힌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메드가 사용하는 문자를 보고 그것을 스스로 따라 써본 것이다.

이 장면이 참 좋다.

아메드는 귀로 북구인의 세계에 들어갔고, 불바이는 눈으로 아메드의 세계에 들어가려 한다.

한쪽만 배우는 관계가 아니다.

아메드가 북구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불바이가 아랍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다만 상대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조금씩 들여다본다.

나중에 두 사람이 서로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사이가 되는 출발점은 어쩌면 칼을 함께 휘두른 순간보다 이런 작은 장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5. 벤돌보다 먼저 무너져 있던 나라

그러나 벤돌이 강한 이유를 벤돌에게서만 찾으면 안 된다.

흐로스가르의 나라는 이미 내부에서 약해져 있다.

마을은 제대로 된 방어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다. 더 답답한 것은 밖에서 벤돌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데도 안에서는 권력과 후계를 둘러싼 의심과 다툼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해 불바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정작 불바이가 도착해 백성들의 신뢰를 얻자 이번에는 불바이를 경계한다.

저 사람이 우리를 구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왕국을 차지하려는 것인가.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왕자리 걱정부터 한다.

나는 이 대목이 단순한 곁가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벤돌은 단결해 있다.

흐로스가르 쪽은 갈라져 있다.

벤돌은 자신들의 지도자와 신앙을 믿는다.

흐로스가르 쪽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 벤돌의 정체조차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르니 공포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불바이가 상대해야 했던 것은 벤돌의 칼만이 아니었다.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 서로를 믿지 못하는 내부의 불신까지 함께 상대해야 했다.

외부의 적 앞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권력욕과 의심.

어쩌면 벤돌보다 먼저 이 나라를 약하게 만든 진짜 적은 그쪽이었는지도 모른다.


6. 모두 죽일 수 없다면 뿌리를 친다

불바이는 벤돌을 한 명씩 모두 죽여 전쟁을 끝내려 하지 않는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열세 명의 전사가 아무리 강해도 수적으로 압도적인 벤돌족 전체를 칼로 베어 없앨 수는 없다. 첫 전투부터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간다.

그러자 방향이 달라진다.

벤돌을 움직이는 뿌리를 찾아야 한다.

정신적 중심인 ‘어머니’, 그리고 뿔을 쓴 군사적 우두머리.

그 둘을 없애야 한다.

불바이 일행은 벤돌이 숨어 사는 동굴까지 들어간다. 폭포 뒤에 감춰진 동굴 안에는 그동안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서 상상했던 벤돌의 세계가 실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뼈와 시체, 식인의 흔적, 그리고 그 집단의 중심에 있는 벤돌의 어머니.

불바이는 마침내 그녀를 죽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독에 당한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불바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그런데 벤돌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벤돌을 전투로 이끄는 우두머리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에서 불바이는 죽어가는 몸으로 다시 일어나 그 우두머리와 맞선다.

우두머리가 죽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벤돌의 전사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싸움을 멈춘다.

그리고 물러난다.

열세 명의 전사가 벤돌족을 몰살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싸움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었던 정신적 중심과 군사적 중심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이 전쟁의 승리는 숫자의 승리가 아니다.

적의 뿌리를 찾아 끊어낸 승리다.


7. 두 개의 기도, 그리고 불바이의 마지막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아메드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한다.

예전에 이 영화를 보고 적어두었던 기도문이 지금 다시 보아도 마음에 남는다.

우리가 생각했던 모든 것과
생각하지 못한 모든 것,

우리가 말했던 모든 것과
말하지 않았던 모든 것,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과
행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신이시여, 부디 용서하소서!

아메드의 기도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는 전혀 다른 신을 믿는 북구 전사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

보라, 저기 나의 아버지가 보인다.
보라, 저기 나의 어머니와 자매들, 형제들이 보인다.
보라, 태초까지 이어지는 내 민족의 혈통이 보인다.
보라, 그들이 나를 부른다.
그들은 내게 그들 가운데 자리를 잡으라 한다.
발할라의 전당에서,
용감한 자들이 영원히 살아가는 그곳에서.

나는 이 기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살려달라는 말이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적을 모두 죽이게 해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다.

대신 죽은 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말한다.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있고, 태초부터 이어져 온 조상들이 기다리는 곳.

발할라의 전당.

죽음을 피하려는 기도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기도다.

이슬람교도인 아메드는 발할라를 믿지 않는다.

북구인들은 아메드가 믿는 알라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전투를 앞둔 순간 두 기도는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다.

자기 앞에 놓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믿는 신과 죽은 자들에게 마음을 맡긴다.

같은 신을 믿어서 전우가 된 것이 아니다.

믿는 신이 다른 상태 그대로 서로를 위해 싸운다.

그리고 불바이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

벤돌의 어머니에게 당한 독이 몸에 퍼져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워서 죽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자 불바이는 다시 몸을 일으킨다.

나는 이 장면 때문에 불바이를 단순히 힘센 바이킹 전사로만 볼 수가 없다.

그에게 지도자는 뒤에서 사람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앞에 서는 사람이다.

불바이는 벤돌의 우두머리를 쓰러뜨린다.

그 순간 벤돌들은 싸움을 멈추고 물러난다.

나라를 구한 뒤 불바이도 조용히 죽는다.

왕좌처럼 보이는 자리에 앉아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금 전 전사들이 읊었던 기도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발할라의 전당에서,
용감한 자들이 영원히 살아가는 곳.

실제 바이킹들이 저 기도문을 그대로 읊었는가 하는 역사적 문제와는 별개다.

영화 속 불바이에게만큼은 그 기도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처음에는 북구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바라보던 아메드도 이제 그들을 다른 눈으로 본다.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리고, 결국 목숨까지 내놓은 사람들이다.

종교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살아온 세계도 달랐지만, 이제 그 차이보다 함께 흘린 피가 더 중요해졌다.

바그다드의 시인은 그렇게 열세 번째 전사가 되었다.


8. 볼가강의 롱십, 그래도 이것만은 못 넘어가겠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다가도 지도를 한번 펼치면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다.

불바이의 배다.

실제 이븐 파들란이 10세기 볼가강 유역에서 루스인들을 만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스칸디나비아계 사람들이 발트해에서 동유럽의 강과 호수를 이용해 러시아 내륙으로 들어왔고, 볼가강 유역까지 교역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영화 화면에 실제로 등장하는 배다.

불바이가 타는 것은 몇 사람이 어깨에 둘러메고 옮길 수 있는 작은 카누나 하천용 조각배가 아니다.

분명 롱십 계열이다.

긴 선체에 여러 개의 노가 있고 돛대가 서 있다.

그리고 불바이 주변의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볼가강은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흐르는 강이 아니다.

발트해와 볼가강을 오가려면 여러 강과 호수를 이어가야 하고 수계가 끊기는 곳에서는 육상을 넘어야 한다.

흔히 바이킹의 동방교역로를 설명하면서 “배를 육지로 끌어 옮겼다”고 간단하게 말한다.

말은 쉽다.

배를 끌었다.

하지만 실제로 배를 물에서 육지로 꺼내는 순간부터 일이 시작된다.

짐을 내려야 하고, 선체를 물 밖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통나무나 썰매 같은 운반수단도 마련해야 한다. 사람이나 가축의 힘으로 배를 끌어 분수령을 넘어야 하고, 다른 수계에 도착하면 다시 배를 물에 내려 띄워야 한다.

아무리 바이킹 배가 흘수가 얕고 다른 대형 선박보다 가볍다고 해도 영화에 나온 것은 분명 롱십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략 당시 메흐메드 2세가 함선을 육지로 넘겨 골든혼에 집어넣었던 일을 떠올린다.

오스만 제국은 국가였다.

군대가 있었다.

많은 인력과 물자, 가축과 장비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런 국가가 비교적 짧은 육상구간을 넘기는 것조차 대규모 작전이었다.

그런데 불바이는 제국의 황제가 아니다.

동인도회사처럼 곳곳에 지점과 인력과 물류망을 갖춘 거대한 상단의 주인도 아니다.

영화 화면에서 그 주변을 따라다니는 전사도 많지 않다.

그 인원으로 저 롱십을 몰고 볼가강과 발트해 사이의 수계를 오간다?

나는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바이킹이 볼가강까지 왔다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올 수 있다.

물건도 올 수 있다.

실제로 교역망도 존재했다.

구간마다 배를 갈아탈 수도 있었을 것이고, 화물을 내려 육로로 옮긴 뒤 다른 강에서 다른 배에 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지의 인력과 현지 운송수단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복합적인 장거리 물류망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과 물자가 이동했다는 사실과 영화에 보이는 저 롱십 한 척을 소수의 불바이 일행이 그대로 끌고 다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길이 있다는 것과 저 배로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내게 이것은 단순한 옥의 티가 아니다.

실제 이븐 파들란이라는 인물을 끌어오고, 그가 실제로 볼가강에서 루스인들을 만났던 역사적 사실까지 이용한 영화라면 정작 그곳에서 다시 북유럽으로 이동하는 과정도 조금은 생각했어야 한다.

이 부분만큼은 지리와 수송에 관한 고증을 제대로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커다란 허점을 알고 난 뒤에도 『13번째 전사』가 싫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아마 이 영화가 결국 배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여행가 이븐 파들란을 『베오울프』의 세계로 데려간 발상은 여전히 재미있다. 신화 속 괴물을 벤돌이라는 인간 집단으로 바꾼 것도 흥미롭다. 괴물의 공포를 벗겨내고 인간임을 확인한 뒤 그들의 정신적·군사적 중심을 무너뜨리는 과정도 좋다.

무엇보다 서로를 야만인과 이방인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함께 싸우면서 전우가 되는 과정이 좋다.

아메드는 북구인들의 말을 귀로 듣고 배운다.

불바이는 아메드가 쓰는 글자를 눈으로 보고 배운다.

아메드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불바이는 마지막까지 발할라를 향한다.

어느 누구도 상대에게 자기 신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같은 신을 믿어서 친구가 된 것이 아니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음식을 나누고, 같은 적과 싸우고, 서로를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전우가 된다.

그래서 『13번째 전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도를 펼치면 롱십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지만, 불바이가 죽어가는 몸을 일으키는 순간 다시 영화를 보게 만드는 이야기.


발할라의 전당.

용감한 자들이 영원히 살아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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