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색깔을 어떻게 칠해야 한다는 법칙이 없듯 인생에도 공식은 없다. 인생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길을 따라가며 하나의 커다란 퍼즐을 맞추듯 완성해가는 여행이다.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갈 것이냐하는 것도 내게 달렸고, 그 길을 어떻게 가꾸느냐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내게 달렸다. 언젠가부터 틈만나면 가방을 챙겨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여행을 했더니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여행 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나도 그저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짐을 꾸렸던 건데... 여행 이야말로 내 삶의 깊이를 달라지게 하고 내 안의 세계를 성장시키는 인생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여행은 이제 내게 더 이상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 P8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 여행이라더니 여행을 하면 할수록 보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가야만 하는 곳이 늘어나 이제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하며 글을 쓰겠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 P8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긴 여행과 같다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많은 준비를 하지만 언제나 의외의 변수에 대비해야 하는 여행처럼, 예상 밖의 놀랍거나 기쁜 일들을 만끽할 줄 알아야 남다른 감동과 재미도 있게 마련이라고. 힘들고 괴로운 일조차 그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마무리를 해야 할 때는 추억과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미련을 버려야 한다고. 마치 사랑처럼, 마음이 가는 곳을 향해 열정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인생이고 여행이라고. - P9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을 만났고,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않고 매일 보고 싶어서 결혼을 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진정으로 설레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고, 다른 일을 하다 남는 시간에 하지 않고나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붓고 싶어 새로운 길을 택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여행에서 또 다른대륙을 찾아 나서는 기분으로 그 첫 여행을 떠났다. 올여름, 왠지 나의 마음을 잡아끌던 그곳, 어쩐지 신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던 그곳, 도쿄를 향해서…. 가슴을 뛰게 하는 데는 아무런조건도 이유도 필요 없다. 왠지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 P9

스무살의 나, 나의 20대를 한순간에, 그리고 영원히매료시킨 한 문장이 있었다. 
"4월의 어느 해맑은아침,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나는 내게 100퍼센트 완벽한 여자 아이와 스쳐 지나간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현대문학가 무라카미하루키의 단편 소설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여자 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라는 작품의 첫 문장이다. - P18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나를 매료시킨다. ‘이번에도 하라주쿠에서 4살가득한 꽃집을 찾아 해바라기 한 다발을 살 테야. 그러고는 질리도록 작은 골목들을걸어봐야지!‘ 도쿄로 떠나기 위한 가방을 쌀 때 내 마음은 다시 스무 살이 되어 이미 하라주쿠, 그곳에 가 있다. 4월의 햇살 아래서 100퍼센트 완벽한 짝과 스쳐 지나가는 하루키 소설 속의 주인공들과 함께. - P20

언젠가 도쿄 여행을 하다 시부야에서 "24시간 서점"을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었다. 깜깜한 밤거리,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 그 시간에 유독 불을 밝히고 있던 그곳은 놀랍게도유흥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모여드는 시부야에 24시간 가라오케도 아니고 24시간 서점이 있다니... 뜻밖의 장소를 그냥 지나칠수 없어 기념으로 그 서점에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한 권 샀다.
어차피 일본어는 이해할 수 없으니 되도록 사진이 많은 책으로 여행을 하면서 24시간영업하는 식당, 술집, 편의점은 수도 없이 봤지만 하루 종일 문을 열고 책을 파는 곳은처음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갑자기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때는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편의점처럼 하루 스물네 시간 문을 여는 서점이라! 그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가? - P25

24시간 문을 여는 책방도, 앞이안 보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또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파란 장미의 신화도 모두가 고정관념과불가능의 틀을 깬 용기 있는 도전의결과다. 고정관념을 완전히 깬 정말멋진 이들 모두에게 박수를! - P26

무슨 일이든 생각하기 나름! 그래, 사실 그날 난 무척이나 재수가 좋았던 거다. 일정이 모두 틀어질 수도 있었는데 무사히 제 시간에 떠날 수있었지 않았나. 게다가 이번 일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역시무슨 일에든 자만하면 그에 따른 대가가 있다는 것. 여행 도시는 무슨 가장 기초적인 것을 빼먹는 실수를 하다니.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래서 여행이 좋다. 시작부터 내게 가르침을 주니까. - P35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함께 여행을 해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여행은 아무리 잘 알고 지내던 사이라 해도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의 숨겨진 면모를 드러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행의 파트너는 중요하다. 여행을 하는 도중에 파트너의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더 신나는 여행이될 수도 있고 여행을 완전히 망칠 수도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다.둘도 없는 친구라도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결국 따로 돌아오는 경우를 여러 차례 보았다. 그래서 나는 웬만큼 잘 아는 상대가 아니고서는 함께 여행을 떠나지않는 편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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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과 선묘각
무량수전 좌우로는 이 위대한 절집의 창건설화를 간직한 부석(浮石)과 선묘 아가씨의 사당인 선묘각(善)이 있다. 부석과 선묘에 대하여는 민영규 선생이 일찍이 연구발표한 것이 있고 그 내용은 한국의 인간상』(신구문화사 1965) ‘의상‘편에 자세하다. 부석사를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寺)라고도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이란다. 거대한 자연 반석인 이 부석을 이중환(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1723년 가을 어느 날 답사의 기록을 이렇게 남겼다. - P216

불전 뒤에 한 큰 바위가 가로질러 서 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큰 돌이 내려 덮여 있다. 언뜻 보아 위아래가 서로 이어 붙은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붙어 있지 않고 약간의 틈이 있다.
노끈을 넣어보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비로소 그것이 뜬 돌인 줄 알 수있다. 절은 이것으로써 이름을 얻었는데 그 이치는 전혀 이해할 수가없다. - P216

우리나라 사람은 애국심, 애향심이 남달리 강하다. 그것은 아름다운면이지만 그로 인하여 외국과 이민족에게는 대단히 배타적이라는 큰 결함도 갖고 있다. 심하게 말하여 지독스런 폐쇄성을 갖고 있다고 비난받을 만도 하다.
선묘는 한국인인 의상을 위해 희생한 중국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분의상을 만들어 그 희생의 뜻이 역사 속에 살아남게 한 것은 800년 전 일본인이었다. 나는 그 점을 사과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 P221

부석사 답사에서는 보호각 쪽 언덕 너머로 외롭게 서 있는 고려시대원융(圓融)국사의 비를 보는 것도 답사 끝의 작은 후식(食)이 된다. 지금 우리가 끝없는 예찬을 보내는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1980년의 보수공사 때 문화재위원들이 내린 아주 현명하고 위대한 판단 덕분이었다.
그 당시 보수공사 보고서를 보면 한결같이 부석사의 구조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만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그렇게 시행되었다.
문자 그대로 고색창연한 절을 유지하게끔 한 것이다. - P224

또한 의상 이후 부석사에서는 큰스님이 나오지 않았다. 하대 신라의대표적인 큰스님인 봉암사의 지증대사, 태안사의 혜철스님, 성주사의무염화상 등은 모두가 부석사 출신으로 나중에 구산선문의 개창주가 된스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석사에서 공부하고 떠났지 머물지는 않았다. 결국 부석사는 일시의 수도는 될망정 상주처로는 적당치 않다는뜻인가?
하기야 이렇게 호방한 기상의 주거 공간 속에서는 깊고 그윽한 진리의 탐색이 거추장스럽고 쩨쩨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집이란 언제나 거기에 알맞은 사용자가 있는 법이니 의상 같은 스케일이 아니고서는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 대신 큰스님들은 간간이 이곳을 거쳐가며 호방한 기상을 담아갔던 것은 아닐까. 이 점은 금강산의 사찰도 마찬가지다. 절집도 사람집과 마찬가지로 살기 편한 집과 놀러 간 사람이편한 집은 다른가보다. - P225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P226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 P227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
감은사에 한번이라도 다녀온 분은 나의 이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고, 또 거기에 다녀온 다음에는 모두 내게 공감할 것이 분명한데,
나는 지금 어젯밤 그 멋진 축구 경기를 못 보고 잠만 실컷 잔 사람들을상대로 상황을 다시 떠올려 해설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는 셈이다. - P230

감포로 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어디일까? 남원에서 섬진강을 따라 곡성·구례로 빠지는 길, 양수리에서 남한강 줄기를 타고 양평으로 뻗은 길, 풍기에서 죽령 너머 구단양을 거쳐 충주댐을 끼고 도는 길. 어느것이 첫째고 어느 것이 둘째인지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중에서 내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은 경주에서 감은사로 가는 길, 흔히 말하는감포가도다. - P230

익산 미륵사터에 남아 있는 한 쌍의 구층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데, 돌로 지었을 뿐 거의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를 발전시켜 건축 부재의 표현을 간소화하면서 석탑이라는 양식, 기단부와 각층의 몸돌과 지붕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준 것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이었다. 정림사 오층석탑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미를갖고 있는 또 다른 명작이다. 나의 답사기가 부여로 향할 때 나는 이탑앞에 아주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아하다는 감정을 조형적으로 표현해낸 모범답안이었다. - P245

위대한 탄생, 삼층석탑
정림사의 오층석탑은 곧 신라에서도 모방하는 바가 되었다.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장항리의 오층석탑 등이 바로그 맥이다. 그러던 오층석탑이 감은사에 이르러 삼층석탑으로 변신하게되었다. 그 형태와 층수를 변형시켜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양식적 분석에 입각한 조형 의지의 파악으로 설명해야 한다. - P247

정림사탑은 대단히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갖추고 있다. 고상하다는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그러나 정림사탑에는 힘이 없다. 1층의 몸체가훤출하여 상승감이 돋보이지만 이를 받쳐주는 안정감이 약하다.
감은사를 조영하던 정신은 통일된 새 국가의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의 반영이었으니 백제 식의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 의지의 탑을 원했던 것이다. - P247

기단을 상하 두 단으로 튼실하게 쌓고, 몸체는 1층을 시원스럽게 올려놓고는 2층, 3층을 점점 좁혀서 상륜부 끝으로 이르는 상승의 시각을 유도했다. 상륜부 끝에서 3층, 2층, 1층의 몸체 지붕돌과 기단부의 끝모서리를 그으면 80°의 경사를 이루는 일직선이 되니 여기서는 기단부가 튼실함에도 상승감이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이 구조가 삼층석탑 형식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삼층석탑, 그것은 진짜로 위대한 탄생이었다. - P247

감은사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나는 저 장중한 위세 앞에 주눅이 들어오금에 힘을 쓸 수가 없다. 저 위대한 힘, 그것이 곧 인호라는 학생의 "돌덩이가 내게 말하네요"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 P248

왕이 하루는 표훈대덕(大德, 덕이 높은  스님)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하여주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제께서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얻을 수 없다 하십니다."
"딸을 바꿔 아들을 만들어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서 청하니 상제는 말했다.
"할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는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문란케 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대사가 (하늘과사람 사이를)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앞으로는 다시 다니지 말아야 한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게 한다면 만족하겠소."
그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는 8세 때 왕이 세상을 떠나 왕위에 올랐다.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대신 정사를 보살폈으나 정치가 잘 되지 않았다.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아낼 수없었다. 표훈의 말이 그대로 맞았다.
왕은 여자로 태어나려다 남자가 되었으므로 날 때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가 하는 짓만 했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도사(道士)들과 함께 희롱했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王)이 된 김양상(金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한다. - P260

우드 관장이 멀리 솔밭 아래 오붓하게 들어앉은 강원을 보면서 "나는세계의 무수한 나라를 방문했는데 자연이 예술과 건축에서 차지하는비중이 이렇게 큰 나라는 처음 보았다"고 신기한 느낌을 말하였다. 그때 나는 "이것은 단지 예고편일 뿐입니다"(It‘s only a preview)라고 대답했다. - P280

불국사 답사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결론 삼아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언젠가 나는 답사엔 초급, 중급, 고급이 있다고 했는데 불국사는 당연히 초급 코스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급자가 초급 코스를, 중급자가 중급 코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초급자가 오히려 중급 코스를 더가고 싶어 하고, 중급자는 고급 코스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고급자가 되어야 비로소 초급 코스의 진가를 알고 거기를 즐겨 찾게 된다. 그런 진보와 순환의 과정이 인생유전의 한 법칙이고 묘미인지도 모른다. 결국 불국사는 답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 P281

그러면 어디로 갈 것인가? 동생 내외와 나의 아내와 함께 둘러앉아답사 계획을 짜는데 아우는 폐사지라는 걸 하나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제수씨는 아무 데고 한가한 곳이면 좋겠다고 하는데, 나의 아내는 하나를 보아도 제대로 된 감동적인 유물을 보았으면 한다고 했다. 이 세가지 요구를 다 충족하는 답사 코스로, 내가 서울에서 출발하는 당일 답사의 영순위로 삼고 있는 서산 마애불(磨崖佛)과 보원사(普願寺)터를  제시했고 모두들 거기에 합의했다. - P284

나는 언젠가 가을 답사 때 동행했던 나의주례 어른이신 고 리영희 선생이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흘렸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가을날의 단풍이라고 하면 먼 산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는화려한 색감을 말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단풍의 주조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나이가들고서야."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풍광이 느끼기에 따라선기암절경보다도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충청도 땅, 옛 백제의 아름다움 속에 피치 못하게 개입해있을 풍토적 성격일지도 모른다. - P286

평양에 가면 인자한 어머니의 품속에 드는 것 같고 경주에를 가면 친한 친구를 대한 것 같으며, 평양에서는 무엇인가 장쾌한 생각이 나고 경주에서는 저절로 화창한 기운이 듭니다. (...) 평양은 적막한 중에 번화가 드러나고 경주는 번화한 가운데 적막이 숨어 있는데,
백제의 부여는 때를 놓친(실시한) 미인같이, 그악스러운 운명에 부대끼다가 못다 한 천재자(天)같이, 대하면 딱하고 젊고 눈물조차피어오릅니다. (...) 얌전하고 존존하고 또 아리땁기도 한 것이 부여입니다. 적막할 대로 적막하여 표리로 다 적막만 한 것이 부여입니다.
(...) 거기에서는 평양과 같은 큰 시가를 보지 못하고 경주와 같은 풍부한 유물들을 대할 수 없음이 부여를 더욱 쓸쓸히 느끼게 합니다마는 부여의 지형으로부터 백제의 전역사를 연결하는 갖가지 사실 전체가 한 덩어리의 쓸쓸함, 곧 적막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에 비추임을앙탈할 수 없습니다. 사탕은 달 것이요, 소금은 짤 것이요, 역사의 자취는 쓸쓸할 것이라고 값을 정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고적다운 고적은 아마도 우리 부여라 할 것입니다. - P317

부여 답사는 순서와 시간대를 적절히 배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나는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부여 답사의 일정표를 하나의 모범 답안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출발하든 광주 혹은 대구에서 출발하든, 또 공주를 거쳐 오든 곧장 오든 오후 서너 시에는 부여 초입에 있는 능산리고분군에 들르는 것으로 부여 답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왕도에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되며, 거기에서 나성의 등줄기를 어깨너머로바라보며 부여로 들어갈 때 곧 부여 입성(城), 백제행을 실감케 된다. - P319

능산리 다음 코스는 부소산성이다. 부소산 산책길을 거닐면서 영일루(迎一樓)에서  백화정(百花亭)까지 누정(樓亭)마다  오르면서 굽이치는  백마강 물줄기와 부여  읍내와 그 너머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서 호젓한 부소산성을 맘껏 즐기고 숙소로 돌아온다. 만약 여름날 해가 길어 시간이허락된다면 규암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오르며 낙화암 지나 고란사 선착장에 내려 부소산성을 거닌다면 그 즐거움은 더욱 클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구드래 나루터로 산책 나와 구교)제방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백마강 땅콩밭으로 내려가 달빛 어린 강물을 바라보기도 한다(지금은 땅콩밭에 코스모스가 장하게 피어난다). 이튿날 아침일찍 산보 삼아 여유롭게 걸어 궁남지와 정림사 오층석탑을 답사하고돌아와 식사를 한다. 부소산성은 저녁이 좋듯이 궁남지와 정림사탑은아침 안개에 덮여 있을 때가 아름답다. 아침 식사 뒤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진열된 백제의 유물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차분히 감상한다.
그리고 부여를 빠져나가기 전에 백마강변의 나성 한쪽에 세워져 있는불교전래사은비와 신동엽 시비를 보고 나서 임천의 대조사로 혹은 외산의 무량사로 향하는 것이다. - P320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P339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P340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
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 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 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 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 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1995)된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 P345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정도전은 3개월 뒤인 12월 초에 왕궁 건축은물론 도로와 시장에 이르는 신도읍의 기본 설계를 완성하고 종묘, 궁궐,
도성 순으로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놀랍게도 불과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서울 건설의 마스터플랜을 완성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2월 3일 종묘의 터파기 고유제를 지내고 약 10개월 뒤인 1395년(태조 4년) 9월에 공사를 완료했다는 사실이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지체 없이 그해 10월, 4대조 이하 선조들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했다. 이것이 조선왕조 종묘의 시작이다. 종묘 터파기다음날인 12월 4일에 경복궁의 개토제(開土祭, 공사를 시작하기 전 토지신에게올리는 제사)를 열었고, 태조가 정식으로 경복궁에 입주한 것은 종묘 완공3개월 뒤인 1395년 12월 28일이었다. 모든 것이 종묘가 경복궁보다 앞서 이루어졌다. - P357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P377

내가 어찌 경복궁을 헛것으로 만들고 쓰지 않겠는가? (...) 조정의사신이 오는 것과 성절(聖, 성인이나 임금의 생일)의 조하(朝賀, 경축하고조문함)하는 일 같은 것은 반드시 이 경복궁에서 하기 위해서 때로 기와를 수리하여 기울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11년(1411) 10월 4일자) - P384

태종의 뜻인즉 국가적 의전과 의례는 경복궁에서 치르고, 창덕궁은일상 정무를 보고 기거하는 곳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창덕궁은 경복궁이 있다는 전제하에 지은 것이 된다.
돌이켜보건대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태조 4년(1395) 이고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태종 5년(1405)이었다. 조선 개국 후 10년 사이에 전혀 다른성격으로 지어진 두 궁궐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비극의 소산이었지만결국 우리 문화유산의 큰 자산이 되었다. 당시 이 엄청난 두 차례의 대역사(事)에 동원되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던 조상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싶다. - P384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왕이 기거하는 공간으로서 궁궐은 그 시대의문화 능력을 대표한다. 정조대왕은 『궁궐지(宮闕志)에서  궁궐이 장엄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406

그러나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 P407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407

궁궐 건축에 대한 정도전의 이런 정신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우리궁궐의 미학이다. 일찍이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室儉而不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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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판에 도의가 서라벌에 와서 그 논리와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 들은 도의선사의 외침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격했다. 따지고 보면 도의선사의 주장은 해괴한 마귀의 소리라기보다는 위험한 사상, 불온한 사상이었다. 만약 통일신라에 국가보안법이나 불교보안법이 있었다면 도의는 영락없이 구속.처형감이었다. 그런 위험이 도의에게 닥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의는 서라벌을 떠나멀고 먼 곳으로 가서 은신할 뜻을 세웠으며, 그가 당도한 곳이 설악산의진전사였다. 보림사(寶寺)의 보조선사비문에 의하면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 산림에 은둔한 것이라고 한다. - P148

‘동해의 동쪽‘에서 ‘북산의 북쪽‘으로도의선사가 북쪽으로 간 이유는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의 군대를 피해 갈댓잎을 꺾어 타고 양쯔강 건너 소림사로 간 이유와 같다는 비유도 있다. 그 사정을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현란한 비유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 P148

이 때문에 달마가 중국의 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2조, 우리 스님(보조선사)이 3조다.

도의가 ‘아직 때가 되지 못해 감추었다는 빛은 그의 손자제자 되는시기에 와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P149

이와 같이 도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서라벌의 귀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군사적 부를 키워온 호족들이었다. 호족의 입장에서 보면 도의가 주장한 ‘자심즉불(佛)‘과 ‘일문일가(一家)‘는 하나의 구원의 사상인 셈이었다. 왕즉불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 호족들의 위치는 지배층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체제와 질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침의 능력이 중요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은 곧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에 호족들은 앞다투어 지방에 선종 사찰을 세운다. - P149

선종의 구산선문은 한결같이 오지 중의 오지에 들어서 보령의 성주사,
강릉의 굴산사 등은 오늘날에도 폐사지로 남고 영월 법흥사·남원 실상사·곡성 태안사·문경 봉암사·장흥 보림사처럼 답사객을 열광케 하는심산의 명찰로 남아 있게 되었다. - P150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이내 호족 중 한  사람인 왕건의 승리, 불교의 이데올로기는 선종의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 진행의 출발이 곧 여기 진전사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우리가 도의와 진전사를 모르고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전사 폐사지에 서면 나는 항시 변혁의 계절을 살던 한 선각자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함께 새겨보게 된다(현재 조계종 종헌에서는 도의선사를 종조로 모시고 있다). - P150

탑의 본질은 사리탑이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것은 불탑, 줄여서 탑이라 하고, 스님의 사리를 모신 것은 승탑이다. 승탑은 스님의 이름 뒤에탑을 붙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며 별도로 승탑 자체에 이름을 부여한 경우도 많다.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승탑이라 하고, 스님의 이름을 알 경우에는 아무개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하며, ‘보조국사 창성탑‘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 승탑도 있다. - P151

발굴된 선림원의 범종은 돌볼 이 없는 이곳에 방치할 수 없어 오대산월정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되어 한국전쟁이 터졌다. 오대산은 치열한 전투지로 변하였고 인민군에 밀리던 국군이 월정사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이 불리하여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이르자 국군은 퇴각하면서 인민군이 주둔할 가능성이 있는 양양 낙산사와 이곳 월정사에 불을 질렀다. 그때 낙산사와 월정사는 석탑들만 남긴채 폐허가 되었고 선림원의 범종은 불에 타 녹아버렸다(현재 선림원 범종의잔편들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원 도면을 참고해 만든 복원품이 전시되어있다). - P160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않으리라. - P165

유한준의 원문은 "知卽爲眞愛 愛卽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이며, 이는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 P165

기암 괴석들이 쪼아 새기고 갈고 깎은 듯이 삐죽삐죽 솟아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하고, 어기어 서 있기도 하고, 기울게 서 있기도 하고 짝지어 서 있기도 한데, 마치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돌아보며 줄지어 따라가는 것 같기도하다. 이는 조물주가 정성 들여 만들어놓은 것이다.
좋은 나무와 기이한 나무들이 푸르게 물들이고 치장하여 삼림이빽빽한데 서로 손을 잡아 서 있기도 하고, 등을 돌려 서 있기도 하고,
옆으로 누워 있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니, 마치 누가 어른인지 다투는 것도 같고, 누가 잘났는지 경쟁하는 것도 같고, 어지럽게일어나 춤추고 절하며 줄지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토신이 힘을 다하여 심어놓은 것이다.
신선과 아라한이 그 사이를 여기저기 걸어다닌다. 이쯤 되면 경개(景)를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 P173

구름이 자욱해서 정상에 오르지를 못하고 존자암에 머물러 있었다. (…) 어제까지 성중에 있으면서 멀리 한라산 중턱을 바라보면 흰구름이 항상 덮여 있었다. 지금은 내 몸이 백운 위에 있음을 깨닫게된다. 이에 장난스런 시 한 편을 짓고 「백운편제목을이라붙였다.

하계(下界)에선 흰 구름 높은 줄만 알고흰 구름 위에 사람 있는 줄 모르겠지.

(---)가슴속 울끈불끈 불평스런 일들을하늘문을 두드리고 한번 씻어보리라. - P175

이 산을 오른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높은 벼슬아치 몇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賢人)들의 거필巨로는 한 번도그 진면목을 적어놓은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가들이 신산(神)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라고 하겠는가. - P178

면암의 말대로 명산은 그것을 노래한 시와 글이 있어 그 가치와 명성을 더해간다. 마치 미술의 역사는 그것에 대한 해석의 역사까지도 포함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명작은 뛰어난 명품 해설이 더해져 그 내용이풍부해지고 더욱 가치가 살아나게 되듯이 지금이라도 한라산과 제주도에 대한 기행문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본래 애국심은 국토사랑에서 시작된다. - P179

이 대목에선 시 한 수가 절로 나올 만한데 노산(山) 이은상(李殷相)이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영실의 진달래를 노래한 것은 참으로 아련한여운을 남기는 절창이다.

높으나 높은 산에 / 흙도 아닌 조약돌을실오라기 틈을 지어 / 외로이 피는 꽃이정답고 애처로워라 / 불같은 사랑이 쏟아지네한 송이 꺾고 잘라 / 품음직도 하건마는내게 와 저게 도로/ 불행할 줄 아홉기로이대로 서로 나뉘어 / 그리면서 사오리다「한라산 등반기 - P181

한라산에서 전하는 그리움
나는 한라산을 무한대로 사랑하고 무한대로 예찬하고 싶다. 그러우리는 한라산을 말하면서 곧잘 잊어버리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제2섬이 곧 한라산이고 한라산이 곧 제주섬이라는 사실이다. 잠깐 생각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속에 그렇게 새기지 못하는 경우ㄱ많다. 그래서 한라산은 산이면서 또한 인간이 살 수 있는 넉넉한 땅 6평을 만들어주었다는 고마움을 잊고 한다.
면암 최익현은 「유한라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내 6, 7만 호가 이곳을 근거로 살아가니, 나라와 백성에게 미치는 이로움이 어찌 금강산이나 지리산처럼 사람들에게 관광이나 제공하는 산들과 비길 수 있겠는가?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대학자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 P196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지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침묵의 물체를 생동하는 영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이는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만남이며,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인 것이다.
조선왕조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山) 정원용(鄭元)은 비록그 자신이 문장가이기는 했지만 글씨에 대하여 특별한 전문성을 갖고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네 사람의 명필을 논한 「논제필가(論諸筆,
여러 서예가를 논함)」에서는 미술과 문학의 행복한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 P200

한석봉(石峯)의 글씨는 여름비가 바야흐로 흠뻑 내리는데 늙은농부가 소를 꾸짖으며 가는 듯하다.
서무수懋의 글씨는 반쯤 갠 봄날 은일자隱者, 세상을 피해 숨어지내는 사람)가 채소밭을 가꾸는 듯하다.
윤백하(下)의 글씨는 가을달이 창에 비치는데 근심에 서린 사람이 비단을 짜는 듯하다.
이원교(李)의 글씨는 겨울눈이 쏟아져내리는데 사냥꾼이 말을타고 치달리는 듯하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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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미터인데 진전사탑은 5미터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지붕돌의 기왓골이 석가탑은 거의 직선인데진전사탑은 슬쩍 반전하는 맵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미감의 차이를 낳았다.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 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차이다. - P146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있고, 진전사는 변방의 오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다보탑과 함께 쌍탑인데 진전사는 단탑가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국사가 중대 신라를 살던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했다. 중앙 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 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니다. - P146

도의가 당나라에서 익힌 불법은 선종(禪宗) 중에서도 남종(南宗)선의골수였다.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선종이 6조에 와서 남북으로 나누어져 남종선이 조혜능(曹溪慧能, 638-713)부터 다시 시작됨은 내남이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대로다. 달마대사가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면서)"깨달음을 구했던 것이 혜능에 와서는 "문자에 입각하지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敎外別傳直指人心見性成佛)"고 호언장담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P147

6대조 혜능의 뒤를 이어 8대조인 마조도일(馬祖道, 709~88)에 이르면 여기서 더 나아가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 "임을 외치게 되는데, 이 외침은 곧 마조선사가 있던 지명을 딴 홍주종(洪州)의 진면목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가 서당지장(堂智藏,735-814)인바, 도의선사는 바로 그 서당의 홍주종을 익히고 고국으로돌아온 것이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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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의 급수
그 나름의 훈련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거기에는 당연히 급수가 매겨질 수 있다. 문화유산 답사도 마찬가지여서 오래 다녀본 사람과 이제 막 이 방면에 눈뜬 사람이 같을 수 없다. - P141

답사의 초급자는 어디에 가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성심으로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며 골똘히 살피고 알아먹기 힘든 안내문도 참을성을갖고 꼼꼼히 읽어간다. 그러나 중급의 답사객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문화재뿐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 보았던 비슷한 유물을 연상해내어 상호 간의 공통점과차이점을 곧잘 비교해보곤 한다.  - P141

말하자면 초급자가 낱낱 유물의 개별적·절대적 가치를 익히는 과정이라면 중급자는 그것의 상대적 가치를 확인해 가는 수준인 것이다. - P141

어느 폐사지인들 답사객이 마다하리요마는 그중에서도 나에게 답사가 왜 중요한가를 가르쳐준, 꿈에도 못 잊을 폐사지는 설악산 동해와 마주한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진전사터와 하늘 아래 끝동네에 있는선림원터다. 지금 우리는 거기를 찾아가고 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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