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2일 이현상부대는 영천을 통과했다. 비행기 폭격이 얼마나 심했는지 영천은 완전히 잿더미였다. 전쟁의 폐허 위에도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미군이 이미 북진해버린 중부전선은 텅 빈 상태였고, 수많은 인민군 낙오병들과 당기관원, 좌익 지지자들이 적의 뒤를 따라 북을 향해 후퇴하고 있었다. 영천을 지나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기 위해 울진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하던 이현상은 남루한 인민군 낙오병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자랑스런 인민의 부대요. 힘을 내시오. 잠시 후퇴를 한다고 그렇게 엉망이어서야 되겠소. 단추도 채우고 먼지도 털고 총도 똑바로 드시오. 행색이 남루해지면 사기도 떨어지는 법이오."
이현상은 본부 취사대원 이창례를 돌아보며 생쌀이라도 한줌 주라고 일렀다. 그렇게 낙오된 병사나 기관원들을 부대 뒤에 따르게 하고 이현상부대는 영일, 양양, 울진의 동해안 도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확 트인 동해를 끼고 북진하다 도계재를 넘어서부터는 태백산맥을 타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부대 뒤에 따라붙은 낙오병과 피난민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삼팔선을 넘을 때는 거의 만여 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사람이 많아지니 식량보급이 우선 문제였고, 부대만 후퇴하는 것보다 시간도 훨씬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 정규사단인 방호산의 6사단이 4백 명의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켰다고 그 후 칭찬이 자자했던 것을 생각하면 백 명도 안 되는 부대로 만여 명을 규합하여 안전하게 후퇴한 이현상부대의 공적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평양으로 간다는 사실에 그들은 가슴이 부풀었다. 삼팔선을 넘기만 하면, 평양에만 가면, 유대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가듯 그들은 자신들의 꿈과 휴식이 이루어질 그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현상부대는 그때까지도 소식이 없는 이영회부대를 위해 백묵으로 갈림길의 큰 바위마다 표지를 남겨놓았다.
본대의 애타는 기다림은 빗물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랫동안 바위 위에 남아있었지만 끝내 후속부대는 본대를 따르지 못했다.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결국 도착할 수 없었듯이.
10월 중순 이현상부대는 양양에 도착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동해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였다. 드디어 삼팔선을 넘은 것이다. "양양 현남면의 어떤 집은 윗방은 이북, 아랫방은 이남, 그렇다오."
다음날도 부대는 떠나지 않았고 대신 어디 가 있었던 것인지 그 마을 기관원들이 쌀과 반찬 등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여맹원들이 잠시 이리저리 부산하게 뛰어다니더니 어느새 밥을 지어왔다. 며칠 뒤에는 어디에 숨겨놨었는지 소와 돼지도 내놓았다
11월 10일경 정식으로 부대가 재편되었다. 승리사단(약 500명) - 사단장 이진범, 정치위원 유주목 인민여단(약 170명) - 사단장 김재연, 정치위원 김삼홍 혁명지대(약 130명) - 사단장 서흥석 본부(약 60명)
총참모장엔 박종하, 본부 정치위원엔 차일평이 임명됐고, 전체는 무려 860명에 이르는 대부대였다. 부대의 정식 명칭도 조선인민유격대 4지대로 바뀌었으나, 통상 남반부 인민유격대로 불렸다. 이 중 승리사단은 여순사건 이후 구빨치를 중심으로 한 중핵부대였으며, 인민여단은 주로 후퇴 중이던 기관원, 남조선 의용군, 민간인 중에서 지원자를 뽑아 새로 만들어진 부대였고, 혁명지대는 원래 충청지방에 침투할 예정으로 경기와 충청 출신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혁명지대와 인민여단은 승리사단과 별도의 행동을 할 경우도 많아서 흔히 두 부대를 묶어 연합부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 찬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아끼고 길이 받드세. 처음으로 마음껏 불러보는 국가였다. 하얗게 서릿발이 내린 들판을 녹이며 뜨거운 애국가 소리가 점점 드높아졌다. 이 국가 한번 맘대로 불러보지 못한 채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죽어갔는가.
"우리의 혁명은 이제부터입니다. 한라산과 지리산, 남반부 곳곳에 붉은 피를 뿌리고 가신 동지들의 원수를 기어이 갚고야 말 것을, 우리 여기서 다시 한번 결의합시다!"
우리 모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리산 골짜기를 수없이 옮겨 다니며 무주로, 낙동강으로, 그리고 삼팔선을 넘어 그들은 후평까지 왔다. 그들이 그렇게 꿈꾸던 평양도 지척이었다. 그러나 아직 조국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기나긴 투쟁의 여정 또한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내일 남조선으로 떠나오. 옥자 동무는 이곳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시오." "……." "어떻소? 여기 남겠소?" 혼자 이곳에 남는다? 부대는 남조선으로 내려가고? "싫습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죽더라도 부대와 함께 가서 죽을 것입니다. 저 혼자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허, 고집도 참. 옥자 동무의 의사가 정 그렇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오늘 밤 시간을 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오."
다음날(14일이나 15일) 새벽 비상이 걸렸다. 곧바로 아침을 먹고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들판에 9백여 명의 전 대원이 줄지어 섰다. 이현상과 박종하의 연설이 끝나고 나자 붉은 태양이 환하게 솟아올랐다. 부대는 곧 왔던 길을 되짚어 남쪽을 향해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북조선 땅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뒤로는 수십 마리의 황소가 부대가 먹을 식량을 싣고 뒤따랐다.
평강을 지나 철원, 화천, 양구를 가로질러 오대산을 탔는데 중부지역은 완전히 공백상태나 다름없었다. 기동로에는 미군의 보급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지만 큰 전투 한 번 없이 남부군은 진부령에 도착했다. 멀리 넘실거리는 동해바다가 바라보였다. 이곳에서 진부지서를 습격, 점령한 남부군은 그날 나팔을 불며 돌격했었는데 그 후로 나팔만 불고 공격하면 적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바쁠 정도였다. 이곳에서 남부군은 태백산맥을 버리고 소백산으로 향했다.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투쟁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소백산 주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남부군은 한 달여간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단양경찰서와 문경경찰서 습격, 문경에 있는 미군부대 습격, 수안보를 중심으로 한 주요 도로 매복, 기습투쟁, 영풍 미군부대 습격, 기동로인 죽령 국도 열흘가량 차단 등으로 남부군은 자신의 임무대로 후방의 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비행기의 공습은 끊임없이 이들을 쫓아왔고 이 무렵부터 재귀열 환자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과로를 해서 염병(장티푸스)에 걸린 줄 알았으나, 나중에 평양 중앙방송을 듣고서야 미군의 세균 살포로 인한 것이고 병명도 염병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재귀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태규 동무! 살려면 이거 좀 먹어봐!" 의식을 잃고 있던 김태규는 녹 동무가 먹여주는 뱀을 비몽사몽간에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그 뱀고기를 먹고 김태규는 오랜 병에서 회복되었다.
나중에 남부군에서 대단한 활약을 한 문춘이 바로 이때 충북 유격대에 있다가 남부군에 합류했다.
김흥복만이 아니고 당시 남부군의 주요 지휘자들 대부분이 스무 살이 겨우 넘거나 스물다섯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박종하도 그때 겨우 스물다섯의 청년이었다.
남부군은 적의 차량 수십 대를 동원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백여 명의 좌익수와 전리품을 실은 다음 유유히 예비대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에 가서 자동차를 모두 소각한 뒤 전리품만 가지고 그날 밤중으로 무사히 속리산에 도착했다. 남한 내의 유격대로서 도청소재지를 점령한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신발 한 짝이라도 다 보고하고 부대 안에서 가장 발이 안 좋은 대원에게 그 신발을 주는 것이 남부군의 사업작풍이었다. 그 정도의 동지애가 아니었다면, 언제라도 뒷주머니에 자기 것을 챙기는 요즘의 세태대로였다면, 그 혹독한 조건 속에서 이탈하지 않고 어떻게 싸울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청주작전 후 국군과 경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미 공군의 공중폭격으로 더 이상 속리산에서 버틸 수가 없게 되자 남부군은 석 달여간 활약하던 무대를 버리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환자들과 그들을 보살필 의무요원, 보급요원 등 총 50여 명을 속리산에 남겨놓은 채 눈물을 머금고 다시 남진을 시작했다
속리산을 출발하여 백화산을 지나고 추풍령고개를 넘고 황학산을 거쳐 민주지산에 도착한 것은 아카시아 꽃내음이 향긋한 5월 중순이었다. 경상, 충청, 전라 3도의 접경지점인 민주지산에는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한창이었다
남부군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몇 개의 부대로 나눠 부근의 미군, 국군 주둔지와 경부선 철도 등을 습격하며 십여 일을 보냈다. 전투마다 승승장구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남한에서의 유격투쟁을 포기하고 북상하던 길에 덕유산에서 6.25 소식을 접하고는 그 후 꼭 일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후평에서 덕유산까지 참으로 먼 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부군의 누구 하나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삶을 거기서 마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8월 초순(10일에서 12일 사이), 남부군은 남부군 유격투쟁의 정점을 이루는 가회지서 습격투쟁을 시작한다. 이 가회지서 습격투쟁을 마지막으로, 승승장구하던 남부군의 투쟁은 고개를 꺾기 시작한다. 이후로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부군은 그곳에서 48년 이래 남부군을 지휘해왔던 탁월한 지휘자 박종하를 잃게 된다.
미군복을 입고 나갔던 어제의 그 모습 그대로 이마가 총탄에 뚫려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싸늘하게 누워 있는 시체는 바로 박종하였다. 박종하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느닷없이 막내가 보고 싶다고, 해방되면 다 같이 고향에 가자고, 평소에는 꺼내지도 않던 말을 하고 나가더니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박종하의 죽음은 부대 내에서 일체 비밀에 부쳐졌지만 간부들에게 준 충격만도 엄청났다. 박종하의 죽음 이후 남부군은 두 번 다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물론 그 패전의 원인이 박종하의 죽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후평에서 지리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 주전선에 적들의 모든 관심이 쏠려있었고 이후에는 휴전협정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적의 병력이 지리산으로 몰려든 탓도 있었을 것이고, 빨치산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단련된 적들이 갈수록 강해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박종하가 살아있었다면 남부군의 투쟁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바로 지리산의 초입 달뜨기가 녹음에 우거진 채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구빨치에게는 꼭 1년 2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그날 중으로 경호강을 건너 웅석복 어느 골짜기에 도착한 부대는 그곳에서 노숙하고 다음날 지리산 거림골과 중산리 입구에 있는 시천지서, 삼장지서와 덕산리 외곽에 있는 경찰초소를 공략했다. 작전지휘는 속리산에서 합류한 충북부대 출신의 문춘이 맡았다.
지리산의 여름은 비가 잦다. 워낙 산이 크고 웅장하니 아래쪽의 날씨로는 산 날씨를 짐작키도 어렵다. 지리산에 처음 도착한 다음날도 여름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앞으로 닥칠 남부군의 처절한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고라도 하듯이.
"미제의 앞잡이 놈들! 역사가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박대수는 경찰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하며 대들었다. "이런 개새끼! 쏴버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 외마디 비명이 채 끝맺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대부분의 빨치산은 당시 최대한 적의 병력을 끌어들여 주전선으로 향하는 적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유일한 임무라고 생각했고 그 임무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돼 있었다. 물론 머지않아 해방이 될 거라는 확신 속에서 말이다. 그것이 무모했건 어리석었건 순수한 혁명성에서였건 적어도 당시의 실정은 그랬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매일매일 전투에 쫓기는 상태에서 일반대원들은 실제로 당장 내일의 자기 운명조차도 모르고 살 때였고,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감상쯤은 끼어들 여지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리산 상봉에까지 쫓겨 와서 두 사람의 입씨름이 또 한판 붙은 것이다. 이현상의 중재로 유주목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물러나긴 했지만 그날의 정겨운 다툼을 사무치게 그리운 추억으로 남기고 유주목은 그 후 어느 땐지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빨치산에게 있어 무소식이란 희소식이 아니라 죽음 아니면 생포를 의미했다. 유주목이 생포됐다는 말은 그 후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 지리산 어느 골짝엔가 무덤도 없이 누워 있을 것이다.
후평에서부터 남부군에 합류한 차일평은 김일성대학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는, 삼십대 중반의 전형적인 학자풍의 사나이로 그녀의 학습을 담당한 개인교수이기도 했다. 훗날에야 차일평이 실제로 적에게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한동안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다. 그에게는 혁명의 순결성보다 자신의 생명과 지식이 더 중요했던 걸까. 그녀를 감탄시키던 놀라운 지식과 이론이 한낱 관념이었을 뿐일까. 적어도 그가 인간인 이상 아마 적에게 구걸한 나머지 인생 동안 그의 앞에 기다리는 것은 굴욕과 자기파괴와 참담함뿐이었을 것이다.
한두 사람이야 어땠건 대부분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적과 투쟁하면서 마지막 총 한 방까지 적을 향해 겨누다가 전사하거나 자폭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두었다. 이현상도, 박종하도, 김흥복도, 이진범도, 이영회도, 전남도당의 박영발이나 김선우도, 전북도당의 방준표도, 모두 자신의 동지들이 숨져간 차가운 산기슭에서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해방을 꿈꾸며 죽어간 것이다
이 대부대는 적정을 피해 세석평전 서쪽을 돌아 칠성봉 아래 대성골로 접어들었다. 대성골에 도착한 것이 새벽쯤 되었을까. 이상하게 그날 새벽까지 사방에서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몰려들었다. 얼마 전 거림골에서 갈라졌던 92사단도 대성골로 밀려왔고, 전남부대에서 지리산으로 파송했던 투쟁인민과 노약자들, 조금 전에 만난 경남도당, 경남부대, 지리산을 무대로 싸우던 적어도 천 명 이상의 빨치산들이 사십 리가 넘는 대성골 넓은 골짜기에 총집결한 것이다(이 피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남부군은 작전 총화를 통해 국방군이 며칠 동안 전 빨치산을 대성골로 몰아넣기 위해 교묘하게 대성골로 가는 길목만 터놓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리산 숱한 골짜기를 놔두고 전 부대가 대성골로만 집결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국민학교에 갓 입학할 나이였다. 여덟 살 자형이는 전남부대의 꽃이었고 전남부대만이 아니라 전 빨치산에게 유명한 꼬마 영웅이었다. 지난번 악양전투 때 남부군들도 소문으로만 듣던 자형이를 직접 봤는데 정이 많은 유주목은 특히 두고두고 자형이 얘기를 꺼내곤 했다. "공화국의 보배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텐데……."
여성과 예술인을 특별히 우대하는 남부군이라 일선 지휘자들이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주었지만 특별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거부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남자들보다 몇 배나 더 열악한 신체조건을 가지고도 남부군의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조국해방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해도 해도 산더미처럼 쌓이는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또 역사와 조국이란 무엇인지도 생각할 짬이 없던 그녀들이 지금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바치겠다는 뜨거운 결의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싸워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94호 결정서가 즉각 이현상에게 전달되었다. 이 전달서에는 도당을 해체하고 5지구당을 결성할 것이며 지리산 일대 5지구당의 책임자로 이현상을 임명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중앙당이 현지의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지시했다는 이유로 박영발과 방준표는 도당 해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도당조직은 그대로 둔 채 통일적인 지도를 담당할 5지구당 조직위원회를 결성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위원장에는 이현상, 부위원장에는 박영발과 방준표가 임명됐다.
5지구당 결성과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20여 명의 상선 연락대는 다음날 오전 다사로운 가을햇살을 받으며 정든 지리산을 떠나갔다. 이제 남은 인원은 총 백 명도 되지 않았다. 후평을 떠나올 때 8백이 넘었던 인원이었으니 만 2년도 안 되는 동안 8백 가까운 동지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젊고 뜨거운 피를 바친 것이다. 남은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먼 얘기가 아니었다.
서류봉투 두 개 분량쯤 되는 서류를 누런 밀가루 푸대로 겹겹이 싼 후 솥에 넣고 바위틈으로 들이밀었다. 전투 와중에도 무슨 보고서와 문서가 그렇게 많았던 것인지, 아마 그 몇 년간 지리산에 비장한 것만 해도 한 트럭분이 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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