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지녔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불행을 안고 산다.

모스크바의 오블론스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스티바는 아내 돌리를 두고 부적절하게 처신했다.
풀기 어려운 문제에 삶이 제시하는 해답은 그에게 하나였다.
바로 그날그날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었다.

절망에 빠진 돌리 앞에 전보가 도착했다.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스티바의 동생 안나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집으로 와 달라는 스티바의 요청에 안나가 응한 것이었다.

스티바가 안나를 맞이하러 기차역으로 나갔다.
안나와 여행길에 마주친 브론스카야 백작 부인은 아들인 브론스키가 마중 나왔다.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론스키는 역 플랫폼에서 스치듯 인사를 나누었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렸다.

스티바와 여러모로 달랐지만,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던 레빈도 모스크바에 왔다.
용기를 내 스티바의 막내 처제인 키티에게 청혼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키티는 레빈이 아닌 브론스키의 청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절당한 레빈은 상심에 빠져 영지로 돌아갔다.
레빈은 고독 속에 머물렀다.

안나와 인사를 나눈 뒤로 브론스키는 그녀를 다시 만날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오빠 부부를 화해시킨 안나는 검은 벨벳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나타났다.
키티는 안나의 매력이 옷차림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론스키는 안나만 보고 있었다.
키티가 받은 상처는 컸고, 안나는 저녁을 마다하고 자리를 떠났다.

안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브론스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기쁨과 죄책감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결연히 모스크바를 떠났다.
하지만 기차가 잠시 머문 사이, 거센 눈보라 속에서 브론스키와 마주쳤다.
그가 안나를 따라 페테르부르크행 기차를 탄 것이다.

안나는 놀라면서도 알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기차역에는 남편 카레닌과 아들 세료자가 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의 친구이자 브론스키의 사촌 벳시가 여는 살롱은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핵심이었다.
돌리와 스티바는 벳시의 살롱에서도 다투었고, 이들 부부와 다르게 안나와 브론스키는 서로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아름답고 정결한 여인으로 칭송받던 안나의 평판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카레닌은 아내와 브론스키의 관계가 거슬렸지만 체면을 차리기 위해 애써 모르는 척했다.
부부는 거리를 두었고, 어색해졌다.
사교계에서 평판이 나빠질수록 안나와 브론스키의 감정은 깊어져 갔다.
브론스키의 사랑만 있다면, 안나는 위선과 기만으로 지켜 온 결혼 생활을 망가뜨린 죄책감과 수치심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군 복무와 사교계 말고도 브론스키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승마였다.
장교들의 경주에 브론스키도 참가했다.
안나와 카레닌, 스티바와 돌리, 벳시와 브론스카야 백작 부인을 비롯한 명문가 사람들이 승마장에 가득 모였다.
전력 질주하며 선두를 달리던 브론스키가 승리를 확신하던 순간, 말이 비틀대며 쓰러졌다.

브론스키는 다치지 않았고, 말의 허리가 부러졌다.
안나가 주저앉아 부채로 얼굴을 가리더니 가슴을 들썩이며 소리 내 울었다.
정숙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냉담한 표정으로 처신을 나무라는 카레닌에게 안나는 자신이 브론스키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레빈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풀베기를 거들며 마음의 상처를 잊어 갔다.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고, 브론스키의 무관심에 상심했던 키티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내면을 가득 채운 키티가 레빈이 잠시 머물던 곳을 지나가면서, 두 사람은 마주쳤다.
키티의 꾸밈없는 두 눈동자를 알아본 레빈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깨달았다.
레빈과 키티는 가까워졌다.

레빈과 키티는 결혼식을 올렸다.
레빈은 자신의 행복을 믿어도 될지 두려웠다.
두 사람은 시골에 머물며 평범한 일상에 실망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다.
레빈과 키티는 몇 번의 위기를 함께 넘기며 서로를 보듬었다.
형의 죽음 앞에 무너진 레빈을 키티가 위로해 주었고, 새 가족도 생겨났다.

안나를 벌주려는 마음과 체면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던 카레닌은 브론스키의 딸을 낳고 위독해진 안나와 불안에 떠는 브론스키를 용서했다.
건강을 회복한 안나는 아들까지 포기하고, 브론스키는 안나와 함께하기 위해 군 복무를 그만두었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함께하는 행복을 누렸지만, 안나는 아들이 그리웠다.
브론스키는 장교로 복무하며 자유롭게 지내던 예전의 삶이 그리워졌다.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에서 지내던 두 사람은 러시아로 돌아왔다.

안나는 남몰래 아들을 보러 갔다.
아들을 만나는 기쁨도 잠시, 안나와 카레닌은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안나는 피폐해졌다.
친구 벳시조차 등을 돌릴 정도로 아예 사교계에서 쫓겨났다.
안나는 자신을 향한 브론스키의 사랑까지도 의심했다.
브론스키는 안나의 집착과 질투로 고통스러웠다.

심한 말다툼을 벌이던 날,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사과하며 매달리려 했지만 상황이 엇갈렸다.
마음 붙일 곳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안나는 기차역의 플랫폼에 서 있었다.
화물 열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기 저 한가운데. 모두에게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거야."
안나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며 열차 밑으로 뛰어들었다.

안나가 죽고, 브론스키는 6주 동안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삶의 기쁨을 모조리 잃어버린 뒤,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하러 떠났다.
안나가 낳은 브론스키의 딸은 카레닌이 맡았다.
부모가 된 키티와 레빈은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누리며 지냈다.
레빈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평생이, 자신의 매 순간이 의미 있다고 믿으며, 자신 안에서 느끼는 선의 법칙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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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의 몰락 
어느덧 렘브란트의 인생에도 어둠이 깊어집니다. 렘브란트가 야간순찰을 그린 1642년, 부인 사스키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티투스가 한 살도 되기 전에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면서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티투스를 돌보려고 고용한 보모와 관계를 맺으면서 법정 소송에 시달리고, 밝고 화사한 이탈리아 고전주의 화풍으로 유행이 바뀌면서그림 주문마저 끊깁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애인 헨드리케마저 1663년에 세상을 떠나고, 외아들 티투스도 렘브란트보다 한 해 먼저 숨을 거둡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656년 50세에 접어든 렘브란트는 개인파산을신청합니다. 전성기 시절에 초호화 저택을 매입했다고 말씀드렸죠. 이 저택은 4분의 1만 렘브란트 소유였습니다. 잔금을 연 5퍼센트씩 나누어 갚는 조건으로 계약했거든요. - P440

렘브란트, 클라우디위스 시빌리스의 음모, 
1661~1662년경, 스웨덴 국립미술관 
로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네덜란드 지도자들의 모습을 대담한 필치로 그려냈지만 당시 시 정부는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 P444

마지막 기회마저 허무하게 날아갔군요.
렘브란트는 여기서 좌절을 넘어 최악의 모욕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를 지켜주던 가족마저 잃은 렘브란트는 1669년 63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 P444

프란스 할스도 말년이 고달팠나요?
맞습니다. 1652년 프란스 할스는 개인파산을 신청했는데요. 재산 경매 목록을 보면 그의 빈곤함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렘브란트의 경매 목록에는미술 걸작과 값비싼 물품이 가득했지만, 할스는 매트리스 세 개, 테이블하나, 그림 다섯 점이 전부였으니까요. 파산 이후, 할스는 다행히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게 됩니다. - P447

신비한 분위기가 보는 이의 마음을 단번에 잡아끄는 명작입니다. 얼핏 평범한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특정 인물이 아닌 이상적인 인물을 상상해서그런 것 같습니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빛나는 눈동자가 매력을 더합니다. 그림의 백미는 진주 귀걸이죠. 큼지막한 진주 귀걸이는 평면에 그려졌는데도 매끄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입체적인데요. 페르메이르는 작은점을 겹겹이 찍어 질감을 살리는 유화 기법으로 귀걸이를 강조했습니다.
빛에 반짝이면서도 입체감이 살아있는 귀걸이 때문일까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도 불립니다. - P467

글쎄요, 진리에 정답이 있을까요? 시대가 변하여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있겠지만, 새로움이 더 진리에 가까운 건 아닐 겁니다. 마찬가지로 과거라고 해서 진리로부터 뒤떨어졌다고 볼 수도 없고요. 분명한 건 각각의시대에 걸맞은 방식이 있겠죠. 르네상스는 르네상스만의 방식이 있고, 바로크는 바로크 시대에 맞는 방법이 있었듯이 말이죠. 우리는 르네상스 하면 원근법을 떠올리죠. 바로크에도 이에 대응하는 강력한 시선이 있었습니다. - P469

네덜란드는 80년간 스페인과 독립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후, 독립에 성공한 북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고 공화국을 건설합니다. 네덜란드 황금기는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기반으로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는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개인과 공동체가 힘을 합쳐 이뤄낸 하루하루의 평화로운 일상을 소중히 여겼죠. 그걸 그려낸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조금 과장하자면 탈종교, 탈이념을 지향했다고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그린 그림이 유독 많은 이유입니다. - P475

미술은 특정 단어로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 세력의 정치적 자유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습니다. 르네상스가 추구한 인간 중심 문화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서한층 높은 단계로 완성된 이유입니다. - P475

15세기에 출발한 인간을 향한 관심은 17세기에 더욱 확장됩니다. 그 열망이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들끓던 시대의 에너지와 만나 네덜란드에서 독창적인 미술로 탄생한 겁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종교와 신화속 이야기를 현실과 맞닿게 재해석한 걸로도 유명합니다. 시민들이 일군 풍경과 정물을 그림의 소재로 적극 채택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익숙하면서도 평화로운 일상으로 시각화한 거죠.
지금까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을 만났습니다. 이제 바다건너 스페인으로 향할 텐데요.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미술이 펼쳐지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P476

황홀한 영광도 잠시, 타오르는 한낮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던 스페인 황금기도 어둠이 내려앉는다. 영원히 빛날 듯했던 제국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걷는다. 그러나 저무는 해가 오래도록 세상을 얇게 물들이듯이 스페인 바로크 미술은 찬란한 시대의 잔상으로 남아 세계로 퍼져갔다.
-마드리드 왕궁, 스페인 - P483

바로크 미술을 이야기하며 스페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스페인 바로크미술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미술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발 더나아가 바로크 미술의 새로운 정점을 찍었으니까요. - P485

펠리페 2세의 통치 철학은 ‘가톨릭 군주‘였습니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대제국을 가톨릭 신앙으로 묶고자 했죠. 그래서 엘 에스코리알수도원같이 조용한 종교 공간에서 일하기 좋아했습니다. 마드리드를 비롯한 스페인 곳곳에 궁전을 보유했는데도 말이죠. - P488

그는 29살인 1556년 왕위에 올라 159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2년간 스페인을 통치합니다. 16세기 후반의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시대였다고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 P488

펠리페 2세는 아메리카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포르투갈과 합병하는 등 큰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랑하던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에 패배하면서 바다에서의 패권을 잃게 됩니다. 신교도를 탄압하여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부추긴 것도 뼈아픈 실책이었습니다. 1568년부터 1648년까지 80년간 벌어진 네덜란드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스페인은 전쟁의 늪에 빠집니다. 신대륙에서 들여온 막대한 은으로 전쟁 비용을 감당했지만, 비효율적인 관료 시스템마저 겹치며 나라가 파산하고 맙니다. 스페인은 펠리페 2세가 재위하는 동안 네 차례나 국가 파산을 선언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 P489

비록 통치력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리지만 미술에 대한 업적은 이견이 없습니다. 스페인 미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건축물 엘에스코리알수도원 덕분이죠. 펠리페 2세는 즉위한 이듬해 1557년에 숙적 프랑스에게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날이 성 로렌스의 축일과 같아서 엘 에스코리알을 성 로렌스에게 봉헌합니다. - P489

당시 스페인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반종교개혁 운동에 앞장선 스페인은 트리엔트공의회가 선언한 미술 강령을 엄격히 지키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 종교미술은 어떤 곳보다 명확하고 단순하며 지적이어야 했고, 사실적이면서도 신앙에 좋은 자극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엘 그레코의 그림은 어수선해 보였을 겁니다. - P518

‘크레타는 그에게 생명을 주고, 이탈리아는 그에게 붓을 주고, 스페인은그에게 정신을 주었다‘는 어느 미술사가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크레타에서 태어난 그에게 이탈리아는 그리는 재능을 주었지만, 그 능력을 정서적으로 끌어낸 건 스페인이었으니까요. 이 점이 우리가 엘 그레코를 스페인 화가로 부르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 P528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정신을 대표하는 화가다. 엘 에스코리알 프로젝트를 맡•았으나 왕실과 교회의 미감을 충족시키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톨레도에서예술 세계의 전환점을 맞이한 그는 회심의 역작 오르가즈 경의 매장을 탄생시켰다. 이후 엘 그레코가 톨레도에서 여생을 보내며 그린 풍경화는 후대 작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P529

작곡가 로시니가 이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세빌리아로 제목을 지었지만, 스페인어에 따라 세비야로 부르는 게 옳습니다.
세비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위치한 도시로,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수도 마드리드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1600년 마드리드 인구가3만 명이었는데요. 당시 세비야의 인구는 15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사실상 규모면에서 세비야는 당시 스페인의 경제 수도였습니다. 얼마나위용이 대단했는지 ‘세비야를 보지 않고 세상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 P531

세비야는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한 항구로 유명합니다. 이후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스페인이 아메리카와 교역할 때 가장 중요했던 항구가 바로 세비야였습니다. 스페인의 황금기를 이끈 막대한 부가 바로 이곳을 거쳐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비야는 바다에서 약 60킬로미터떨어진 내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 P532

아니, 그렇게 안쪽에 자리한 도시가 어떻게 항구가 될 수 있었나요?
과달키비르라는 강 덕분입니다.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강은수심이 깊고 강폭도 넓어 큰 배들이 강을 따라 세비야와 대서양을 오갔습니다. 왼쪽 위의 그림을 보면 과달키비르강을 통해 수많은 배들이 세비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17세기 후반부터 강에모래가 퇴적되면서 세비야는 항구 기능을 점점 잃게 됩니다. - P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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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숨이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야산들은 황금빛 노을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들판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빛으로 반짝였다.
조종사 파비앙은 남쪽 끝 파타고니아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갔다.
이따금 그는 인적 없는 대초원 위를 날다가 외딴 농가를 만나면 날개를 흔들어 인사를 보내곤 했다.
그는 행복한 정박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칠레와 파라과이발 우편기들도 오고 있었다.
이들이 도착하면 오늘도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비행기를 출발시켜야 하는 총책임자 리비에르는 쉴 수가 없었다.
리비에르는 처음으로 자신이 늙고 지쳤다고 느꼈다.
그는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노년에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밀쳐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정말로 시간이 날 것처럼.

‘규칙이란 부조리하게 보이지만 인간을 만드는 종교 의식과 같다.’ 정당하냐 부당하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리비에르에게 인간이란 새로 빚어야 할 밀랍과 같았다.
그는 이 재료에 영혼을 불어넣었고, 의지를 창출해냈다.
그 결과 직원들은 날씨가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들은 구름의 틈새라도 발견하면 서로 소리쳤다.
"북쪽이 개었다. 자, 출발!"

리비에르는 조종사 펠트랭과 외출했던 감독관 로비노를 호출했다.
"펠트랭과는 좀 가까워졌나?"
그는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띠며 호통치듯 말했다.
"자네는 그 조종사에게 위험한 비행을 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도 있네.
그 조종사는 자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네.
만약에 그가 우정 때문에 자네의 명령에 복종한다면 자네는 그를 기만하는 것과 다름없어."
그는 당부했다.
"부하들을 사랑하게. 그러나 그것을 결코 입 밖으로 내선 안 되네."

리비에르는 나이 든 정비사 로블레를 해고했다.
아르헨티나 노선 초창기에 비행기를 조립한 20년 경력의 정비사였지만,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비행기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한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저는 평생을 바쳐 일했습니다."
리비에르는 나이 든 정비사의 쭈글쭈글한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본보기입니다. 본보기로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매정하게 내쫓은 것은 그 정비사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한 잘못이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잘못의 매개자를 발견했는데도 그냥 넘어간다면 그것은 범죄 행위이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조종사의 아내는 그를 좀 더 자게 두었다.
남편의 휴식은 곧 돌격해야 할 예비군의 불안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한 시간 후면 남편은 유럽행 우편 항공기의 운명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비행에 나가기 전, 머리를 손질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했다.
"당신 참 멋있어. 별들에게 잘 보이려고? 질투가 나네요."
그는 웃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집을 나섰고, 그녀는 남겨진 꽃, 책, 온기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리비에르가 그 조종사를 맞이했다.
"지난번 비행에서 큰 실수를 했더군. 무서웠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회오리바람까지 몰아쳤고, 엔진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니. 날씨는 좋았고 엔진도 아무 문제가 없었네. 자네 상상이 지나쳤어."
리비에르는 야간 비행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 주기 위해 매몰차게 조종사를 다그쳤다.
그는 모든 사태에 대응하도록 직원들을 엄하게 단련시켜야만 했다.
‘남에게 사랑받으려면 동정심을 보여 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나는 동정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정부 관료들은 폭풍우와 안개, 밤의 온갖 장애물 속에서 비행하는 것을 군용 비행기나 할 수 있는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야간 우편 비행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비에르는 조종사들을 설득했다.
"우리에게 야간 비행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우리가 낮에 기차와 배보다 앞섰던 거리를 밤마다 까먹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의지와 결단력 때문에 성공했다고 평가했으나, 그는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했다.
해 뜨기 한 시간 전에 비행기를 출발시키고,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무조건 착륙하게 하면서 야간 우편 비행을 정착시킨 것이다.

파타고니아 우편기는 폭풍우에 다가가고 있었다.
비행기는 난기류에 요동치며 곤두박질쳤다.
파비앙은 위험을 감지하고 회항하려 했으나 비행 각도를 1도도 바꿀 수 없었다.
무전사가 무전을 쳤다.
"사방이 막혔음. 1천km에 걸쳐 폭풍우가 발생하여 회귀 불가능."
파비앙은 삼십 초마다 나침반을 들여다보았지만, 비행기의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암흑 속에 완전히 포위되어버린 것이다.

"응답이 없나요?"
무선국에서 정비사들은 실험하듯 기기를 만졌다.
"응답 없음."
파비앙의 목소리, 그의 웃음이 사라진 것이다.
연료가 바닥나서 더 이상의 비행은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리비에르는 온몸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로비노에게 지시했다.
"파타고니아 우편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네.
유럽행 우편기의 이륙을 준비시키게."

파비앙의 아내는 새벽 1시쯤 남편이 가까이에 와있는 것처럼 느꼈다.
하늘 위가 추웠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식사와 따뜻한 커피를 준비했다.
그리고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파비앙 씨 착륙했나요?"
"악천후 때문에 늦어지고 있습니다."
"연착인가요? 그럼 몇 시에 도착하나요?"
침묵이 흘렀다.

"아! 날씨가 많이 나쁜가요?"
"무언가 소식이 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군요!"
비극적인 사건에서 감정적인 요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이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진짜 존재한다면 과연 무엇일까?
리비에르는 사랑보다 더 중대한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는 잉카의 태양 신전을 떠올렸다.
‘산 위에 세워진 돌기둥이 없었다면 이 문명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옛 지도자는 개인의 고통보다 종족의 소멸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사람들에게 사막에 매몰되지 않을 돌기둥을 세우게 했을 것이다.

파비앙은 심하게 진동하는 비행기를 통제하는 데 집중했다.
주변은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암흑이었다.
결국 그는 고도 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덫 속의 치명적인 미끼처럼 별들이 폭풍의 찢긴 틈 사이로 반짝였다.
그쪽으로 올라갔다가는 다시는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별을 향해 솟아올랐다.
보름달과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다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파비앙은 뒷좌석의 무선사를 돌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끝났어."
그들은 보석이 가득 찬 방에 갇혀서 다시는 그 방을 빠져나올 수 없는 동화 속 도둑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파비앙의 아내가 회사로 왔다.
리비에르는 그녀에게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그것은 마치 ‘집에 가서 다시 보게 될 램프, 저녁 식사, 그리고 꽃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겸손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그들은 결혼한 지 6주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로비노가 말했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을 내일에서야 실감할 거라고 생각하며 리비에르는 울적한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로비노는 리비에르를 위로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지시할 것이 있으신지요?"
"유럽행 우편 항공기를 이륙시키게."
리비에르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조종사들은 파비앙의 행방불명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리비에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다른 우편 항공기의 안전한 비행을 확인했다.
우편물들이 유럽행 비행기에 실렸다.
"다 실었나? 그럼, 출발!"
엔진에 시동이 걸렸다.
비행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상공을 지나갈 것이다.
리비에르는 비행기의 엔진 소리를 듣고 싶어 유리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가 한 번이라도 출발을 중지시켰더라면, 야간 비행을 계속할 명분은 사라졌을 것이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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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는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교차한 시기였습니다. 스페인과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여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투기 열풍이 불어 파산자도 속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네덜란드의 국민화가 렘브란트도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습니다. - P421

드디어 렘브란트군요. 그의 작품 야간순찰이 라익스 뮤지엄 한가운데 멋지게 걸려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맞습니다. 그는 격동의 시대를 지나온 네덜란드를 누구보다 생생하고 깊이 있게 그려냈죠. 덕분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 미술 애호가와 네덜란드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 P421

않은 곳에서 방앗간을 운영했는데요. 렘브란트를 중등 교육기관인 라틴어학교와 대학에 진학시킨 것으로 미루어 교육 열정이 대단했던 듯합니다.
정작 렘브란트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나 봅니다. 대학을 금방 그만두고 그림 공부에 전념했거든요. 어릴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나타낸 렘브란트는레이던에서 선배 화가들에게 3년간 그림을 배웁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6개월간 기본기를 다지죠. 1625년 렘브란트는 레이던으로 돌아와 작업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습니다. 그의 나이 19살이었습니다. 공방을 연 이듬해에 그린 그림을 볼까요. 다음 페이지에 있는그림입니다. - P423

렘브란트,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마우리츠하위스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조합은 매년 해부학 공개수업을 열고, 5~10년에 한 번씩 유능한 초상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렘브란트가 26세에 그린 이 작품에서그의 초기 초상화 실력을 엿볼 수 있다. - P425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50대 들어 재산을 몽땅 잃고 요즘으로 치면 신용불량자 같은 신세가 됩니다. 노년기의 자화상을 보면 젊었을 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초라한 노인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때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선 전성기 시절의 렘브란트부터만나보겠습니다. - P432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해진 젊은 렘브란트는 1634년 전직 시장의 딸 사스키아 오일렌부르크와 결혼합니다. 성공 가도를 달린 렘브란트의 삶은 선술집의 탕자라는 작품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결혼 이듬해에 그린 다음 페이지의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성경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를 주제로 삼있습니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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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바로크
비로소 쟁취한 평화를 새기다 - P267

네덜란드 곳곳을 수놓는 색색의 튤립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유산이다. 그 시절 네덜란드는 오랜 투쟁 끝에 거머쥔 자유와 구슬땀으로 일궈낸 풍요로 활기가 가득했다. 안락하고 편안한 일상의 틈에서 움튼 자본주의 아래 화가들은 각자의 시선을 캔버스에 담았다. 네덜란드 미술은 그렇게 피어났다.
ㅡ튤립밭, 네덜란드 - P268

나는 낡은 붓을 들고 홀로 서서.
하나님께 영감을 구하는 단순한 사람일 뿐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 P270

북유럽 바로크를 이끈루벤스

#북유럽 바로크 #루벤스 #안트베르펜
#궁정화가 #외교관 #사업가

17세기 화가 중 바로크 미술처럼 다채롭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 간 화가가 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에너지, 탁월한 그림 솜씨에 사업 수완까지 좋았던 인물이죠.
화가라고 하면 외롭게 살다가 죽고 나서야 유명해지는게 아닌가요? - P271

화가라고 하면 외롭게 살다가 죽고 나서야 유명해지는 게 아닌가요?

이 화가는 그런 삶과 거리가 멀어요. 살아있을 때부터 그림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서 화가들의 왕‘이었고, 유럽의 여러 왕이 그의 그림을 너무나 갖고 싶어 해서 왕들의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화가는 바로 루벤스입니다. 북부 유럽 출신이지만 알프스산맥을 오가며 바로크 미술을 유럽 전체로 확산시킨 주인공입니다. - P271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전시된 십자가를 세움 
루벤스가 안트베르펜에 돌아와서 그린 첫 번째 대규모 작품이다. 성 발부르가 성당의 중앙 제대화로 제작되었지만, 나폴레옹 시대에 약탈당했다가 1815년 반환되어지금은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자리한다. - P276

이 그림 이전에는 교훈적인 내용을 크게 그리고 사물은 배경에 소품처럼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전통적 화면 배치를 완전히 뒤집어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배경에 넣고 사물을 앞자리에 내세운 겁니다. - P287

맞습니다. 안트베르펜을 비롯하여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루터파보다 강경한 칼뱅파 교리를 따르며 종교미술을 비판합니다. 급기야 플랑드르에있는 성당 곳곳에서 성상 조각이나 종교화가 제거되거나 폐기되는 일이벌어지죠. 그중 가장 대규모 성상 파괴 운동이 1566년 8월 안트베르펜에서 일어납니다. 아래 삽화에는 신교도들이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들어가밧줄로 성상을 끌어내리고 사다리로 부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16세기안트베르펜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정치·종교적으로는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 P295

프란스 호헨베르흐, 칼뱅주의자의 성상 파괴, 1566년

 1566년 8월 안트베르펜 대성당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곳곳에서 칼뱅파 신도들이 교회의 성상을 파괴했다. - P295

80년 전쟁 또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라고도 합니다. 기나긴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를 구성하는 17개 주 중 북쪽의 7개 주가 독립에 성공해 공화국을 세웁니다. 이들은 1581년 독립을 선포하고 계속 저항하다 결국 1648년 최종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습니다. - P298

나머지 10개 주는 독립하지 못했나요?
플랑드르 남쪽 지역의 10개 주는 계속 스페인의 지배를 받습니다. 안트베르펜은 반란의 중심지였지만, 스페인 군대가 이곳을 잔혹하게 진압해서계속 스페인의 지배를 받습니다. - P298

루벤스의 활동 지역 루벤스는 지겐에서 태어나 쾰른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12세에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간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만토바에 살며 로마 등지를 여행하고, 만토바 공작의 명으로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도 일한다. 또한 마리 드 메디시스의 연작을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으며, 스페인과 영국 외교 사절로서 런던과 마드리드를 오간다. - P299

설마 한복을 입은 건가요?
글쎄요, 학계에서는 이 인물의 국적과 관련하여의견이 분분합니다. 중국인으로 보기도 하고, 한국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복이 중국식도포인지 한복인지 다소 애매하기 때문이죠.
정확히 어느 나라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저는 한국인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물이 쓴 모자가 우리 전통 모자탕건과 비슷하고, 남자를 그리기 위한 루벤스의 준비 드로잉도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루벤스가 한국의 복식과 외양을 구전으로듣거나 간단한 스케치를 보고 나서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P307

앞쪽 배는 사람들을 질서 있게 구해내지만 바로 오른쪽 뒤의 배는 위태로워 보입니다. 사람을 잘 구하는 앞쪽 배는 개신교를 상징하고, 위태로운뒤의 배는 가톨릭을 상징합니다. - P329

167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동인도회사는 상선 150척, 군함 40척, 직원 5만 명, 군대 1만 명을 보유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 P344

전성기를 누렸던 네덜란드와 영란전쟁의 흔적을 살피려면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을 찾아야 합니다. 라익스 뮤지엄으로도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네덜란드의 국보급 미술품이 가득합니다. 이중에서도 한 점을뽑아야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명화를 한자리에 모은 2층 정중앙에 당당히 자리할 정도로 네덜란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작품이죠. - P345

그림의 대상이 일상적인 소재에서 점점 사치품으로 바뀝니다. 이처럼 16세기에는 소시민의 소박한 삶을 나타내는 정물화가 대부분이었다면, 17세기에 들어서 정물화는 부유층의 고급스러운 삶을 우아하게 보여줍니다. - P358

그러나 만개한 해바라기 사이로 병들어 시든 꽃이 눈에 띕니다. 삶을 예찬하는 동시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네덜란드 정물화의 전통이반 고흐 같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에게까지 이어진 셈이죠. 반 고흐역시 네덜란드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찍부터 전통적인 네덜란드 정물화의 특성을 알았을 겁니다. - P365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를 세계 최초로 보는 구체적 근거는 무엇인가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02년에 설립되었다고 말씀드렸죠. 동인도회사는 최초로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을 발행하여 만든 회사였습니다. 따라서 기업이 발행한 주식 역시 공공장소에서 거래했는데요. 바로 이 목적에 맞게 새롭게 지은 건물이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였습니다. - P377

경제학자들은 이 현상을 튤립 버블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희귀한 튤립을 갖기 위해 돈을 있는 대로 끌어다 쓰면서 튤립 가격이 천정부지로솟구칩니다. 가장 귀한 품종이었던 셈퍼르 아우휘스튀스는 구근 하나가격이 20배 가까이 오릅니다. 1633년에 500 길더였던 구근이 불과 4년 만에 1만 길더가 된 거죠. 1636년에 배 한 척이 500 길더였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치인 셈입니다. - P386

그게 문제였어요. 이런 상황이 사람들의 조바심을 불러일으켰고, 너나 할것 없이 꽃 재배 사업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극에 달한 기현상도 결국 끝을보입니다. 1637년 2월, 오를 대로 오른 튤립 가격이 상승을 멈추거든요. 불과석 달 만에 수요가 급격히 줄고 가격은 순식간에 폭락합니다. 이 여파로파산자가 속출하자 네덜란드 정부까지 개입해서 간신히 위기를 넘깁니다. - P387

당시 유럽 국가 중 사회 전 계층이 미술품을 거래한 곳은 네덜란드뿐입니다. 힌트는 부의 분배에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비교적 부가 고르게 주어진 사회였습니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투자나 투기를 할 수 있는 잉여 자본을 갖고 있었죠. 일찌감치 거래 문화에 익숙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미술품을 투자 대상으로 인식한 겁니다. - P392

힌트는 오른쪽 아래 계단에 놓인 칠판에 있습니다. ‘풍요 속 사치를 조심하라‘는 속담이 적혀 있는데요. 그림 속 집주인처럼 눈 감은 채로 손을 놓으면 힘들게 쌓은 재물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경고를 담은 겁니다. 천장에 달린 바구니 속 목발, 지팡이, 회초리는 사치로 재물을 몽땅 잃었을 때얻게 될 질병과 빈곤을 의미합니다. - P401

그림 오른쪽 요리하는 두 하녀 앞에 깨진 달걀 껍데기가 마구 널려 있습니다. 당시 달걀 깨기는 성관계를 암시하는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속이텅 빈 달걀은 아버지로 보이는 인물이 생식 능력이 없음을 뜻하죠. 아니나 다를까 아이를 안은 아버지 뒤에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는남성이 있습니다. 짓궂은 웃음이 마치 자신이 진짜 아버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 P403

네덜란드의 김홍도 
이렇듯 얀 스테인은 세속적인 블랙 코미디를 즐겨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을 더 소개할게요. 다음 페이지에 있는 마을 학교라는 작품입니다. - P403

얀 스테인, 마을 학교, 1670년경,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남자 선생은 술에 취해 있고 여자 선생님만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제각각 소란스러운 모습이다. - P404

당시 네덜란드 교육 체계의 문제점을 풍자한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네덜란드에서 초등 교육이 얼마나 활발하게 운영되었는지 엿볼 수 있죠 네덜란드는 시민사회였는데요.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평민이 이끄는 사회여서 교육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학교 풍경을 담은 얀스테인은 한국에서 특이한 별명으로 불립니다. 바로네덜란드의 김홍도인데요. 얀 스테인이 그린 또 다른 마을 학교를 보면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 P405

왼쪽 페이지의 그림은 간척 사업 전1300년대 네덜란드 지형입니다. 군데군데비어 있죠?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며 오늘날 국토의 약 20퍼센트에 해당하는 땅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들이 만들었다‘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을 정도죠. 수 세기에 걸쳐 국토를 직접 일군 노력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 P409

좋은 지적입니다. 이 인물은 언제든지 군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전쟁을 치르며 용병을 동원했지만, 병력의 핵심은 시민군이었습니다. 민병대가 잘 짜여 있어서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비상시에는 전쟁터로 나갔죠. 여기서 의기양양한 사냥꾼은느긋하게 사냥길에 나서지만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지 조국을 위해 싸우는 군인이 되었을 겁니다. - P418

이번에도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만 담은 게 아니네요.
국토에 대한 인식을 치밀하면서도 친절하게 그림으로 표현한 장르가 풍경화였던 거죠. 평범해 보이는 자연과 생활의 터전이 네덜란드인들에겐정성껏 일군 세계였습니다. 풍경을 화폭에 담는 과정은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었을 거예요.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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