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은 은밀히 황친 대성진, 대아명을 설득하고, 보국대장군 최감천, 태복경 대현사와 신득원을 비롯한 무장들을 포섭했다. 이제 하늘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가행렬은 경계가 삼엄해서 백성들은 모두 숨을죽였다. 기르는 개가 어가행렬을 보고 짖었다가 참변을 당한 전례가 있기에 백성들은짐승 단속까지 해야 했다.

잠자리에 들었던 오윤문은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군사들에게 도륙되었다. 황제를 배행했던 태자 대한상은 도끼날에 목이달아났다.
침궁으로 밀입한 박자갑은 벌거벗은 황제에게 어의를 내밀었다.

"폐하, 천명을 받으시옵소서. 천하를 농단했으니 자진하여 죄를 씻으시옵소서!"
박자갑은 날선 칼 한자루를 황제 앞에놓았다. 대위해가 엉겹결에 칼을 받았다.
"좌우를 물려라!"
박자갑이 명하자 무기 든 군사들이 물러섰다. 황제가 스스로 자진하는 걸 볼 수 없게 하려는 배려였다.
대위해는 두 손으로 칼을 부여잡았지만끝내 목에 칼을 박지는 못했다. 대위해가칼을 던지는 순간 박자갑의 칼날이 대위해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혔다.

날이 밝자 황친과 대신들은 대세를 거역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황자 대인선을옹립했다.   
황위에 오른 대인선은 진신들의 주품을받아들여 선제 대위해의 폭정을 들어 폐위하고 연호를 파했다. 또한 백성들의 원성을들어 시호와 묘호를 추증하지 않기로 했다.천심을 거역한 황제였기에 황위에 올랐던대위해의 치세를 파하기로 했다.

대인선은 좌우를 물리고 배정을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정은 한사코 거절했다.
배정은 도성을 떠나기 전, 매를 좋아하는대인선에게 참매 한 마리를 바쳤다. 아직새끼의 때깔을 벗지 않았으나 눈매가 유난히 날카로운 매였다. 예부터 고구려는 매를해동청이라 부르며 영물로 여겼다. 대인선은 배정이 참매를 바치는 뜻을 알 것 같았다. 참매와 같은 강력함과, 번뜩이는 눈매 같은 예지로 장차 정사를 올바르게 펼치라는 충정이었다.

금사미단 계안상신.’
금실은 끊어지지 않았고, 닭의 눈은 새롭기만 하다는 뜻이었다. 대인선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 글을 풀어보면 금사(음막,처녀막)가 찢어지지 않았고, 계안(음핵)은아직 해말간 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낭자는 교접한 적이 없는 진녀임이 분명하다는 뜻이었다

예부터 음부에 털이 없는 백, 치구가 불룩한 고, 살결이 부드러운 연, 음문이 붉은 홍, 교접 때죄는 긴, 이렇게 다섯 가지를 갖춘 여인을존귀하게 여겼다. 특히 계안이 해맑고 붉어야 했다. 곡실이라고도 불리는 계안은 작을수록 정숙하다고 했는데, 흔히 수척한 여인이 풍만한 여인보다 큰 편이었다. 그래서예부터 수척한 여인이 색을 밝힌다는 말도있었다. 그런 까닭에 대인선의 배필은 풍만한 여인으로 정해졌다.

"폐하, 옛일을 상기해야 하옵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나라는 거란과 말갈을 꾀어 선봉에 서게 했사옵니다. 지금도 강성해진 거란이 말갈부를 꾀면 삽시에 준동할 수있사옵니다. 선제께서 그들을 박대하고 조세와 부역을 무겁게 했으며 변방으로 쫓았사옵니다. 그 서러움이 분노가 되었으니 지금 진무해야 하옵니다. 통촉하옵소서."

나라가 안돈하자 사라졌던 승려 담오가법화사로 돌아와 불사를 일으켰다. 무너진채 방치됐던 석탑을 다시 쌓기로 했는데,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였다. 오윤문이 대위해에게 바쳐올린 진신사리는 진품이 아니었다. 진신사리를 지키기 위해 모조품을 만들어 사탑 밑에 두었다고 했다.
이에 황궁에 모셨던 가짜 진신사리는 폐기했다.

당나라 멸망의 가장 큰 근원이 민심 이반이었고, 발해도 그런 조짐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대인선도 알고 있기에 가슴이 무거웠다.

"어쩌다가 사직이 피폐해지고 백성이 곤궁해졌는고?"
"곤궁한 백성들은 의명선사가 살해당한뒤부터 불도를 버리고 도교를 찾게 되었사옵니다. 이것은 조서를 내려 막을 수 없고군사로도 막을 수 없사옵니다."
"짐도 선제의 명을 받아 도교 경전인 도장을 익혔도다."
백성들이 먼저 난세를 알아본다고 했다.예부터 난세에는 점복이 횡행하고 주술로가산을 탕진하며, 사술 부리는 자들이 기승했다.

"도사 자양과 여도사 백화고가 정말 귀신을 부리는고?"
대인선은 세상이 어지러운 틈에 백성들을 현혹하는 무리를 척결하지 않고는 국기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이 생각하기로는 사술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면 당장 척결하라."

"지금은 때가 아니옵니다. 자양과 백화고를 따르는 무리가 너무 많아 때를 기다려야 하옵니다. 두 도사를 따르는 자들은 사물에 현혹되고, 현세에 분노한 무리들이어서 극력 저항할 것이옵니다."

달시화는 발해 여인들과 다른 눈빛 때문에 환몽 같은 신비감을 자아냈다. 무엇인지알 수 없는 게 온몸 가득 숨겨져 있는 듯했다.
대인선을 맞아 방술을 펼칠 때는 물들인비단을 비비대서 빛깔을 빨아내듯 정염을불태웠다. 대인선은 황홀경에 취하며 비로소 선제들이 여색에 빠진 까닭을 알았다.

거란의 군국사를 총괄하던 야율아보기가 8개 부족의 가한에 올랐다는 소식은 또 한번 발해 조정을 놀라게 했다. 거란의 8부는 연합하여 3년마다 한 번씩 질립제(선거제도)로 8부를 통치하는 가한을 선출했다.
야율아보기의 야심은 거대한 중원 땅을경략하는 것이었으니, 발해로선 콧등에 호랑이가 앉은 꼴이었다. 대인선은 오소도의주청을 받아들여, 담대하고 해박한 문적원소감 배구를 북서쪽 거란 땅으로 밀입케했다.

"중원 땅은 넓고 백성 또한 많사옵니다.중원을 평정하려면 반드시 발해를 먼저 짓쳐들 수밖에 없사옵니다. 중원을 공격할 때 배후의 발해가 저들의 근심이옵니다."

"군사를 길러 강병을 만드는 게 첫째요,재정을 견실히 하여 민심을 붙잡는 게 둘째이고, 말갈의 이탈을 막는 게 세 번째 현책이옵니다. 신라와 화친을 도모하고, 일본과교역을 증대하며, 주전충의 양나라와 친선하고, 아보기의 거란과도 화친해야 하옵니다. 그러나 황친국척, 백관, 사족들의 호사를 막지 못하면 결코 민심이 돌아올 수없사옵니다. 폐하, 수라상에 일곱 찬을 넘지 않게 하시고, 황후를 비롯하여 황자와공주는 물론 태후까지도 비단과 보석 치장을 금하옵소서."

해를 넘겨 무진(908)년 정월에 당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이축이 기어이 주전충에게죽임을 당했다. 주전충과 쌍벽을 이루던 사타족 출신 이극용도 천수를 다해 이승을 하직했다.

애제 이축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접한 대인선은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 황친 대진해의 주품을 받아들여 검소령을 내렸다.
배구가 예견한 대로 이축이 살해됐고, 거란은 남진을 거듭하며 위세를 높였기에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은 검소령을 거역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무섭게 치죄하겠다는 황제의 조서를 잊지 않았다.
 
대인선은 며칠이 지나도 대진례를 치죄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지엄한 조서가 무용지물이 되는 걸 보면서 은근히 황제를 원망했다.

문적원 소감 배구가두 차례나 상소했으나 대인선은 대진례를문죄하지 않았다. 배구가 알현을 청했지만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은 황제가 한 번 내린 조서를 황제 스스로 거스르면 국기가 문란해진다고 간쟁했다.

"사람이 귀신과 교접하는 것으로, 한번그 환몽에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고들었사옵니다."
"가엾게도 대공주는 도사가 준 단약을먹고 환몽을 헤매다 귀교하게 되었도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얼마 살지 못할 텐데……."
대인선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췄다. 배구는 그제야 대진례에게그런 아픈 사연이 있어 징치하지 못했음을알았다.

모든 정기를 귀신에게 빼앗기며 혼비의무아경에 빠지고, 한 방울 진액마저 모두빨려 백산의 황홀경에 빠지는 동안 처참할정도로 탈기되어 죽는다.
"대공주는 환몽에 시달리다 비단옷에 치장을 하고 춤추고 노래했도다. 짐이 어찌대공주를 징치하겠는가?"
대진례를 문죄할 수도, 그렇다고 공주가귀교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황제의 심정이느껴졌다.

"마마를 출궁하여 징치하고, 통력을 가진 도사에게 치병을 명하시면 국기도 바로잡고 마마를 구원할 수 있사옵니다. 궁 밖에서는 마음 놓고 무의를 펼치고 약도 쓸수 있사옵니다."
대인선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연을 품고 있었다. 대진례의 침방에서 여러 개의쇄양으로 만든 방이 나왔다.

방이란, 물가에 배를 대거나 물이 얕은곳을 밀어갈 때 쓰는 상앗대를 뜻하지만,실제는 남자의 옥근처럼 만든 물건을 말했다. 물속을 찌르는 상앗대를 남자의 옥근으로 비유해서 쓰는 말이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남진하여 진동에장성을 쌓으면서 요동의 남쪽으로 진출할태세를 갖추었다. 발해와 양나라 사이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아보기 곁에는 유능한 책사와 병법에능한 장수들이 매우 많사옵니다. 기습하여우리의 전력을 탐지할 테니 칙지를 내리시어 적이 기습하면 반드시 추격하여 섬멸하라 명하옵소서. 발해를 침노하면 반드시 보복당하는 전례를 남겨 적을 방비하옵소서."

야율아보기는 전술에만 능한 게 아니라정세 판단에도 뛰어났다. 사람에게 절실한소금을 조달하기 위해 염전을 수중에 넣어백성에게 소금을 싼 값에 공급하고, 중원에서 온 당인들을 농경과 길쌈에 진력하게 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했다.
그들에게 철을 다루는 법을 익혀 무기를만들고, 중원의 강역을 상세히 그리게 하여중원을 공격할 때 이용했다. 그들을 길잡이로 삼아 중원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리기도했다.

"지난날에 패군이 나라를 다스려 백성이곤궁하고 나라가 어지러웠지만, 지금은 현군을 만나 군사를 증강하고 변방의 경계를엄중히 하여 민심을 수습했나이다. 우리가발해를 정복하려면 적어도 10년을 기다려야 하나이다."

진나라에도 각저라고 불리는 씨름이 있었지만, 기상이 넘치는 고구려 씨름만 못했다. 주몽이 즉위하기 전 계루부의 족장일때 고추가들과 씨름을 겨루었듯, 고구려 씨름은 그 시절부터 기개가 넘치고 독특해서각별히 요교라고 불렸다. 이런 씨름이 전승되어 지금 발해 벌을 달구고 있었다. 이를두고 상하가 한마음이 되어 큰마당을 펼치기 때문에 쾌어심이라 했다.

야율할저는 조아린 채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저런 기개와 웅혼함 때문에사방에서 고구려를 두려워했고, 발해를 범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야율아보기도 강병을 길렀지만 저 기개를 당할 수는 없으리라.
야율할저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굳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내친 김에 황제에게 주청하여 수군의 위용을 살펴보겠다고 했다. 대인선은 기꺼이 수락하고 홀한해에 다녀오라고 명했다.

"이 길로 가면 하루를 벌 수 있습니다.발해 군사들은 늘 이 길로 다닙니다."
이강국은 굳이 먼 길을 돌아가지 말고지름길로 가자고 우겼다.
"나는 황명을 받은 몸으로 상세히 표문을 올리기 위해서 천하를 살펴야 한다. 말머리를 돌려라!"
야율할저가 명했다. 황제의 명을 받아 발해 군사의 동태를 감찰하는 감군관이 아닌가. 그의 명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말머리를 돌려라!"

"누구든지 할저를 주살하면 천금을 내리겠다. 사력을 다하라!"
미사건이 소리 질렀다. 두 식경도 채 되지 않아 감군관 일행을 추격한 군사들이 무섭게 공격했다. 감군관 일행도 맞서 싸웠으며, 야율할저도 칼을 빼들었다. 군사 수효가 열세인데도 야율할저는 두려워하지않았다. 그러나 호위 군사들이 쓰러지고 큰아들 야율무정의 목이 달아나자 도망치기시작했다.
이강국은 기다렸다는 듯 용맹한 수하 몇명을 앞세우고 추격했다. 야율할저를 태운말은 대인선이 하사한 명마 중의 명마가 아닌가. 맹렬한 속도로 나는 듯 내달렸다. 흑사령 계곡으로 들어섰다면 어김없이 주살했으련만, 야율할저는 무슨 낌새를 챘는지길을 에돌았고, 명마를 휘몰아 멀리 도주했다.

그러나 변고는 엉뚱하게 번졌다. 고경단이 밝힌 전모는 놀라웠다. 호위 장수 이강국을 문초하여 캐낸 내용은 태복경 겸 보국대장군 양금당이 배후에 있고, 양금당과 공모한 자는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이라고했다. 대인선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양금당과 이강국을 즉시 참수하고, 두 재상은 차마 죽일 수 없어 유배했다.

대인선은 유배된 오소도와 대성악을 참하고, 배구를 비롯한 강직한 신하들을 모두삭탈하여 하옥했다. 조정 중신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바른 정사에 후덕했던 황제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없었다.

거란군은 국경을 넘어 부여성으로 진격했다. 수자리를 서며 국경을 지키던군사들은 물밀 듯 짓쳐드는 거란군을 막지못하고 도주했다.

그해 9월 초사흘, 거란의 영걸 야율아보기는 서방 정복을 마치고 환궁했다. 공신들에게 훈공을 내리고 장졸들을 호궤한 야율아보기는 황태자 야율배, 둘째아들이자 대원수인 야율요골을 비롯하여 황후 술율, 동생 야율질라와 발해를 공격할 때 선봉으로삼을 장수 척은안단, 소아고지를 불러들였다.

정월 병자(19)일에 야율아보기는 근시 강말달을 비롯한 13명을홀한성으로 보내 모든 병장기를 수습하게 했다. 분개한 발해의 패망 군사들이 일어나 이들을 모두 살해했다.

적의 공격이 사나워지자, 양지각과 이변성이 즉시 주모자를 잡아 성 밖으로 던져 항복을 알리고 성문을 열었다.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하는데, 허공에서 해동청 두 마리가 바람과눈발을 가르며 야율아보기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참매 한 마리는 야율아보기의 뒷머리 쪽 오목한 풍지혈을 모지게 쪼고 창공으로 한껏 날아올

대인선은 바등거리다가 사지를 쪽 뻗은 해동청을 쓰다듬었다. 참매는 숨이 멎었다.
마치 발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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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탄일을 맞아 어화원에는 푸짐한연석이 차려졌다. 권지국사를 비롯한 만조백관이 모였고 황친국척과 구신은 물론, 변방의 도독과 자사들도 참여했다. 겉보기에는 황제의 탄신을 하례하러 온 듯했지만 사실은 내일 아침 등극하는 대건진을 경하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때 진단대장군 장복사가 썩 앞으로나섰다.
"폐하, 지금 칙계하시면 진신들이 엎드려 받들겠사옵니다."
대현석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천하를 농단한 권지국사를 어찌하여 치죄하지 않으시옵니까?"

"진신들은 모두 국사의 명을 따르라."
"신이 설사 죽더라도 폐하의 뜻을 따를수 없사옵니다."
그리고는 표정이 일그러진 대건진을 향해 소리쳤다.
"진단대장군 장복사는 칙지를 받들어 권지국사 대건진을 대역죄로 포박한다."

그때 대건진의심복이었던 금군대총관 임천중이 칼을 높이 들고 외쳤다.
"황상을 받들지 않으면 누구든 처단하겠다."
임천중의 목소리가 살을 벨 듯 살벌했다.

"황상께 맹약의 삼배를 올리시오!"
경기군대총관 김진문이 목청을 갈았다.한두 사람씩 일어나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진신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예를 갖추었다.
그렇게 살벌한데도 황제를 등지고 당당히 걸어나가는 사람이 일곱명이나 되었다.

"참으로 순려하도다. 저것이 발해의 기상이거늘……."
무혈반정을 일으켜 황휘를 찬탈하려던대건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를 옹립하려 했던 측근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정배되거나 삭탈당했지만, 피비린내 나는 참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치자라면 사무치는 자비심을 가져야 하오. 관용과 용서는 강자의덕목이오. 보살심이 없으면 군자가 아니니치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오."
양아림은 공신들에게 자비심을 잊지 말라고 했다.

"구신과 공신들을 함께 중용하는 게 어떠한고?"
"폐하, 대국을 다스림에 있어 친근하다고 해서 가까이해도 아니 되고, 소원하다고멀리해도 아니 되옵니다. 이익이 된다고 추구하거나 손해가 된다고 해서 버려도 아니되옵니다. 사람도 너무 귀중히 여겨도, 너무 천하게 여겨도 아니 되옵니다. 무릇 벼슬에 있는 자들은 모두 불안하여 밤잠을 설치고 있으니, 지난날의 죄업을 모두 사면하옵소서. 오히려 창검 앞에서 굴하지 않고폐하를 논힐한 운칠현에게 관작을 높여주는 게 발해의 기상을 살리는 길이옵니다.그러면 천하가 모두 엎드려 폐하를 숭상할것이옵니다."

"경은 어찌하여 마음이 하해와 같은고?"
"폐하, 신의 마음은 비온 뒤 생긴 소발자국에 괸 물처럼 흐리고 얕사옵니다.다만……."
장복사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마는 눈치였다.
"듣고 싶도다."
대현석이 채근했다.
"신은 은밀히 의명선사의 가르침을 받고있사옵니다."
"의명선사는 입적하지 않았는고?"
대현석은 의명선사가 스스로 법화사 대웅전에 불을 질러 혜진옹주와 함께 산화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덕산대사와 의명선사만을 노린 게아니라 모든 절을 폐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폐불을 단행하려 했기에, 덕산대사는스스로 대웅전에 불을 지르고 홀로 몸을 살라 소신공양을 했다. 그 덕분에 폐불이 단행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성각사와 법화사가 중건되었다.

역신 대건진의 반정을 부추겼던 대소신료들의 지난 죄를 모두 사면하고 부화뇌동했던 황친과 구신들의 죄도 묻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반정을제압한 공신들조차 훈공하거나 초천하지않아 더욱 의아해했다.
대현석의 성덕은 널리 퍼져나갔다. 황제를 흠경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대현석의 탄신일에어화원의 살벌한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고큰소리로 황제를 나무랐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배정을 따라 함께 걸어나갔던 일곱 명을가리켜 사람들은 운칠현이라고 불렀다. 배정을 비롯한 다섯 남자들은 벼슬이 높지 않았으나, 그 기개가 널리 알려져 청5현이라불렀다. 또한 홍2현은 문관 이정심과 무관고서운을 가리키는데, 청5현 못지않은 기개와 시문을 뽐내는 인재였다.

불안한 정정의 당나라에 변화가 왔다. 임인(882)년에는 승승장구하던 제국의 황제황소가 쇠하기 시작했다. 황소의 측근 심복이었던 주온이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황소가 파견한 감군의 간섭과 압력을 견디지 못한 주온은 감군의 목을 베고 투항했는데, 당제 이현은 크게 환대하여 그에게 주전충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대현석은 크게 기뻐한 나머지 배정을 문적원 원감으로 삼고, 후하게 사급하여 그의공을 기렸다.
당나라는 쉽게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다.3백 년 가까이 지탱해온 당조는 화북의 번진들을 회유하여 전세를 조금 역전시켰다.주온이 투항한 게 그 계기였다.

요충지 변주를 근거지로 삼은 주전충과,산서의 태원을 본거지로 삼은 이극용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린 군벌로, 천하를 호령하면서 상호 견제했다. 주전충이 베푼 성대한위로연에서 술에 취한 이극용이 주전충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은 게 화근이었다.분노한 주전충은 성문을 닫아걸고 이극용의 군사들을 무차별 도륙했다. 이극용은 겨우 탈출했지만 거느렸던 군사는 거개가 화를 면치 못했다.

"당나라는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만큼어두워졌지만 군벌들이 녹록지 않도다. 거느린 군사도 수십만이니 어찌 우리가 군사를 길러 대비하지 않겠는고? 당나라가 내란에 휩싸인 틈을 타 북방에서 거란이 흥성하고 있도다. 국고는 채울 수 있지만 사직이 무너지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도다."

"당나라는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만큼어두워졌지만 군벌들이 녹록지 않도다. 거느린 군사도 수십만이니 어찌 우리가 군사를 길러 대비하지 않겠는고? 당나라가 내란에 휩싸인 틈을 타 북방에서 거란이 흥성하고 있도다. 국고는 채울 수 있지만 사직이 무너지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도다."

이 무렵, 발해 황제 대현석이 군사들을이끌고 행궁으로 나가 사냥과 군사 조련을하다 쓰러졌다. 중풍으로 쓰러진 대현석은반신불수가 되어 자리에 누웠다. 군사를 길러 강성대국을 만들어 내란으로 쇠락한 당나라를 치고, 북방의 거란도 평정하겠다던대현석은 혼자서 수라를 들거나 옥음을 내릴 수조차 없었다.

은밀히천하를 평정하여 강성대국을 꿈꾸던 무장들은 통곡했다.
발해 조정은 황자 대위해를 태자로 봉하라 주청했다. 대현석은 자신의 붕어를 예견했는지 서둘러 장자 대위해를 태자로 책봉했다.

여왕은 진골의 반란으로 어지러워진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진력하던 터였는데, 남편이자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수한 상대등위홍이 죽자 정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왕의 숙부이기도 한 위홍은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을 편찬할 만큼학문이 깊었다.

신라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이 들어 많은 고을에서 공물을 바치지 못했다.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에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켰고, 견훤과 양길이 각기 무리를 모아 반란의 싹을키웠다.

당나라에서는 이극용이 또 반란을 일으켜 중원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변 국가들이 쇠락하고 있을 때 발해는 겉으로 평온해 보였지만 속은곪아가고 있었다.

황제 대현석이 중풍으로 쓰러져 병석에누우면서 발해 조정은 사분오열되었다. 대현석이 치세하는 동안 탕평책으로 지그시눌러놓았던 적손과 방계손의 대립이 극에달했고, 황제의 근신과 태자를 받드는 신하들 간에 갈등이 첨예해졌다. 더구나 군세를업은 무신들과 오랫동안 권세를 누려온 문신들 사이의 암투는 목불인견이었다.
태풍을 예고한 것은 황후 양아림의 급서였다.

참기 어려운 신고의 세월을양아림이 곁에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황후의 죽음으로 대현석은 한쪽 날개가 꺾여버렸다.
황후의 급서에 대현석은 눈물 흘리며 힘들여 입술을 들먹였다.
"홀로 어찌 살라고 먼저 가셨는가……."

"황상께서는 병석에 계시고, 당나라와신라는 내란에 휩싸여 있다. 이럴 때 준동하면 하늘이 노한다."
장복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장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분노하는 군심을 가라앉힐 묘책이 달리 없습니다."
김진문도 군심이 심상찮음을 걱정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당나라와북방의 거란이지, 적손이나 문신들이 아니다. 경거하고 망동하지 말라."
장복사가 군심의 동요를 알면서도 무장들을 다독거리는 이유는 한번 준동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이었다.
크게 나누어보면 적손과 문신들이 한패를 이루었고, 방계손과 무신들이 또 한패가되어 서로 다투었다.

계위하게 될 대위해는 황제가병석에 누워 신음하는데도 미소년을 불러들여 남색에 취했다. 대위해는 황후가 서거하자 마치 천하를 수중에 넣은 양 위세를부렸다.
‘붓다시여! 정의의 칼을 들어야 하나이까?’

태자는 성정이 용렬하고 포악하여 흉금이 좁으니, 대국을 다스릴 만한 그릇이 아님을 어찌 감출 수 있으리오."
장복사를 은밀히 부른 까닭을 짐작할 수있었다.
"신에게는 현책이 없사옵니다."
"천신만고 끝에 천재일우라고 하더이다.황상이 혼암하면 만백성이 신고를 겪게되니……."

이미 그 세가 만만치 않은데, 태자를 폐하고 작은아들 대봉예를 책봉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대위해가 남색에 빠져 호화방탕하며 포악하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태자를 폐하려면 한바탕 회오리가 불어야 했다.
"황상께서는 천추를 다하신 듯하니 서두르시오."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이것은 나라를 흥하게 하고 백성을 살리는 길이니 성심을 다해주시오."

"새벽녘에 기이한 꿈을 꾸었습니다. 공께서 관복을 벗고 삭발한 채 산사의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흉몽이 분명한 까닭은 대장부인 공께서 비구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심복을 먼저 궁궐에 보내 정황을 알아본 뒤입궐하십시오. 아녀자의 어리석은 생각도때로는 명약이 될 수 있습니다. 공의 어깨에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밤늦게 입궐하는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내의 간청을 귓전으로 흘린 장복사는서둘러 입궐했다.

장복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금관조복을 뚫은 창검이 수십 개나 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군 장복사는 즉시 들것에 실렸다.
그날 밤, 장복사를 따르는 임선중과 김진문을 비롯한 맹장들도 비슷한 시각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궁궐 안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렇게 참화가 들끓는데도침궁에 누워 있는 황제는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대위해는 태자를 폐하고 대봉예를 책봉하려는 황후의 계책을 미리 알았다. 만약아우 대봉예가 태자위에 오르면 그는 천하에 낯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황후와 장복사의 밀약을 알아낸 사람은태의 임선도였다. 황제 곁에서 치병하는 임선도를 황후는 철석같이 믿었는데, 임선도는 이미 대세의 흐름을 간파하고 대위해의심복을 자청했다.

남쪽 신라의 정세도 당나라 못지않았다.신해(891)년에는 양길의 부하 궁예가 신라의 여러 군현을 공격하여 천하를 어지럽혔고, 이듬해 임자(892)년에는 견훤이 무진주를 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갑인(894)년, 발해 황제 침소인 침궁에곡소리가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황제 대현석은 참으로 질긴 목숨이었다. 병석에 누운지 7년 동안 초인처럼 버텼지만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승하했다.

장복사와 그 추종 세력을 처단하고문관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 수효를 줄이고, 태복경 대현사에게 명해 군부를 손질했다.

대위해의 침궁에는 얼굴과 몸매가 고운미소년들이 항시 대기했다. 황제에게는 이미 정궁인 고승지가 낳은 장자 대인선과 대소순이 있고, 후궁이 낳은 대우모와, 오미랑이 은밀히 낳아 기른 대한상을 비롯하여여러 공주가 있었다.

누구 한 사람 대위해의 단수를 논힐하는 자가 없었다. 세간의 수군거림을 걱정해 은밀히 총애하라고 간했던 신하가 삭탈당했다. 그러면서 벼슬아치와 사족들은 운칠현 일곱 사람이 뭔가를 도모해주길 은근히 기대했다.

"백성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죽음 앞에 나약한 자요, 막강지권 앞에 용렬한 자요, 백성들 앞에 비겁한 자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고서운의 심정은 비통했다. 그들은 새벽까지 격론을 벌여 옳은 일에 목숨을 바치는게 도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상소문을 닦기로 했다. 그리고 배정의 집으로 달려가 가족에게 피신하라고 종용했다.

또 한번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데 소식을듣고 열네 살 난 배구가 말했다.
"옛날 우왕은 바른말 하는 사람을 보면그 자리에서 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비록제 나이가 어리고 천단하나 부모님 가르침대로 바른길을 가려는데 어찌 현자들께서말리겠습니까?"

배구가 붓을 내려놓자 운칠현은 일필휘지한 상소문을 읽어보았다. 담대한 필치요,거침이 없는 문장이요, 글자 사이에서 천둥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하늘이 있으면 별이 있고, 땅이 있으면초목이 있듯 나라가 있으니 이런 인재가 있구나. 설사 우리가 죽는다 해도 후세에 또의로운 자가 줄을 잇겠구나!"

운칠현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를 어람한대위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궁궐의 폐단을 바로잡으라고 간한 자는 북방흑수지경으로 유배되고, 교화를 밝게 해달라고 상소한 자는 물감옥에서 초죽음을 당했다.

"어린것은 돌려보내라!"
황제의 명을 받은 형졸들이 다가서자 배구가 소리질렀다.
"남색과 천첩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폐하께 말로써 굳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왔으니 썩 물러서시오."
대위해가 어이가 없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겨우 열네 살밖에 안 된 어린것이 황제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대위해도 문적원감 배정에게 영민한 자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린것은 돌려보내라!"
황제의 명을 받은 형졸들이 다가서자 배구가 소리질렀다.
"남색과 천첩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폐하께 말로써 굳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왔으니 썩 물러서시오."
대위해가 어이가 없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겨우 열네 살밖에 안 된 어린것이 황제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대위해도 문적원감 배정에게 영민한 자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저 형벌이 가혹하면 가뭄과기근이 들고, 병란이 일며,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고금의 사필에도 실려 있사옵니다.폐하의 너그러운 성덕이 샘물 같다고 기록될 것이옵니다. 샘물은 눌러서 막을 수 없고 오로지 퍼올려야만 하옵니다

배구가 닦아 쓰고, 운칠현이 연명한 상소문을 백성들이 통쾌해하는 걸 대위해도 알고 있었다. 이럴 때 그들을 척살하면 민심이 등을 돌리고 일곱 사람을 군웅처럼 떠받들게 될 것이다.

고서운이 가볍게 던진 옥가락지는 술병의 홀쭉한 주둥이를 영락없이 깨뜨렸다.
"이 비천한 몸으로 감히 황상을 받들어모실 수 없는 연유는 제 몸속에 흐르는 이예기가 술사들 말로는 척살기라 하여, 지아비를 섬기면 지아비가 살을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혼기가 넘도록 부모님께 불효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데려가신다면 기꺼이 입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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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성으로 뇌물 심부름 갔던 해무량의 심복 왕가희가 태사 신작에게 곤장 30대를 맞고 겨우 돌아오자 해무량은 진노하고 말았다.
"내가 보낸 진귀한 물선을 거절한 것도괘씸한데 심복에게 태질까지 했으니 이는곧 나를 때린 것이다."

"금불상을 만들 형편이면 가난하고 병든자를 구휼해야 한다며, 한 번 더 뇌물을 보내면 그때는 탐관오리로 알고 삭탈하고 가산을 적몰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왕가희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눈초리가 야릇하게 번뜩였다.
"너는 어째서 금불상을 태사에게 주었느냐?"
"자사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런 소식이 어찌 조정에 닿지 않았을까마는 그때마다 조정 대신들은 해무량을 감싸기에 급급했다. 이에 황제는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시어사 고덕술을 염주로 파견했다.
강직한 충신으로 알려진 그는 태태후 고운목의 조카이자 백관을 감찰하는 중정대출신으로, 공명정대함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소식은 지체 없이 염주자사에게알려졌다.

고덕술의 행차는 조촐했다. 소문대로 깐깐하고 강직했다. 영접사로 도성 밖 30리지경에 마중 나간 연타골을 야단쳐 들여보내고 스스로 관아를 찾아왔다. 고덕술은 관작이 높음에도 자사 해무량의 병상을 찾아먼저 예를 갖추었다.

고덕술은 조정에서 파악한 비위 사실은모함이거나 은폐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백관과 변방을 감찰해보면 어디든 크고 작은 비위가 적발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갈수록 흠잡을 데가없다는 게 점점 더 이상했다. 
"해무량이 사가와 관고의 재물을 은밀히빼돌려 바다 건너 섬으로 옮겼다는 제보가있습니다. 허락해주시면 배를 내어 다녀올까 합니다."

"조정에서 어사가 내려오는 바람에 모든장마당을 폐철했으니 죽을 지경이오. 그것도 모르고 가시오?"
사공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어사 출두와 장마당이 무슨 상관이오?"
"답답도 하시오. 용두섬에 가면 세상에없는 게 없는데……. 이놈 입이 방정이오만조정에서 내려온 벼슬아치들은 죄다 자사가 진상한 계집들과 뒹굴다 갈 테니 어찌원망하지 않겠소?"

고덕술은 두려운 생각에 적발한 물목을품속 깊이 넣었다.
"어서 떠나자."
이렇게 많은 재물을 숨겨두는 것은 권신의 비호를 받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아직도 감찰할 게 많습니다. 어사께서먼저 배에 오르시면 저희들이 뒤따라가겠습니다."
수행 관리는 더 많은 비위를 찾아낼 수있을 거라 말했다.
"더 이상 머물다가는 변을 당할 것 같다.해무량이 알기 전에 떠나자."

배는 온통 화염에 싸였다. 어사 고덕술부터 죄 없는 사공까지 불에 타 죽거나 물에빠져 죽었다. 배는 고스란히 바닷물 속으로가라앉고 말았다. 흔적이라고는 타다 남은송판과 배에 실려 있던 물건들뿐이었다.

"어사의 시신 속에 이미 새로 꾸며 만든장계를 넣어두었습니다. 내일 바다에 떠오른 시체를 소금에 채워 도성으로 보내겠습니다. 어사 일행을 돈 많은 상인으로 알고공격한 해적들을 자사께서 몸소 추격하여침몰시켰다고 주달하면 됩니다."

"폐하, 어사 고덕술이 해적에게 살해된사건은 의혹이 있나이다. 선제께서 어세하시는 동안 뭍에는 비적이 없고, 바다에는해적이 없었나이다. 어사 일행 중에 섬으로감찰 나간 자는 단 한 사람도 살아 오지 못했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덕술의 시신만 떠올랐고, 그 품속에서 나온 장계가 해무량의 치적만 나열했겠나이까. 다시 어사를 보내되 암행하게 하옵소서."
해무량은 내시감 해지량의 사촌아우여서 내밀하게 어사를 보내 암암리에 감찰해야 했다.

"천하의 주인은 폐하뿐이나이다. 어사는폐하의 칙서를 받들고 출사했나이다. 어사를 죽임은 곧 폐하를 능멸한 것이니, 반드시 밝혀 국기를 바로 세우소서."

"해씨 가문에서 강직하고 흉금이 넓은자를 골라 보내옵소서."
"해씨 가문에서 고르라면……."
"나중에 태후마마께서 아시더라도 공정했다고 할 수 있나이다."
"과연 양책이오."
대이진은 해동정에게 밀명을 내려 어사를 제수하고 염주로 암행하라고 명하였다.해동정은 성정이 곧고 바른말하는 데 앞장섰으며, 당나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아들해초경이 으뜸으로 뽑힐 만큼 박학다식한선비였다. 장안의 태학에 들어가 당나라의걸출한 인재들과 겨루는 유학생은 소년급제를 했거나 학식과 지혜가 뛰어난 자를 선발했다. 이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거정, 주승명, 고수해는 동량지재라 하여 젊은나이에도 관작을 높이 받았다.

"병사한 게 아니라, 염주자사의 비리를고발했다가 독살당했습니다."
순간 해동정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 말이 사실이오?"
"어찌 생명의 은인 앞에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건강하셨던 아버님은 염포 거상박무덕의 집 잔치에서 교묘히 독살당했습니다. 독살이 아니고서야, 아버님이 쓰러지자마자 해무량의 수하들이 들이닥쳐 시신을 거둬갔겠습니까? 수하 중에 다행히 아버님과 절친한 사람이 있어 귀띔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내막을 소상히 밝혀 조정에상주하려고 은밀한 곳에 감춰두었습니다."

해동정은 좌우를 물리친 해무량에게 두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자사께서는 내가 누구이며, 왜 이곳에왔는지 알고 있소. 내가 덫에 걸렸으니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일러주시오. 이렇게 참담한 누명을 쓰고 살기 싫소. 조정에서 도대체 어느 누가 자사와 밀통하는지 알고싶소."

"폐하, 폐하의 성덕을 널리 받들어야 할권신은 천하만민이 우러를 만한 만부지망의 인재를 중용해야 하나이다. 그럼에도 해씨 가문을 사사로이 중용했고, 입신양명에만 혈안이 된 자와 절조 없는 자, 뇌물을 바쳐 벼슬을 구걸했거나 백성을 괴롭힌 자,인륜을 그르치거나 줏대 없는 자에게 너무무거운 감투를 씌웠나이다. 장차 나라의 손실이 침중할 것이니, 폐하의 재결을 거두어주소서."

이듬해 이른 봄 해무량은 드디어 용원부도독을 제수받았다. 해동정은 대중정 자리에 올랐다. 대이진이 계위한 이래 처음으로큰 폭의 관작 개편이 이루어졌다. 눈에 띄는 것은 태후 해수련 측근들이 대거 발탁되었다는 사실이다. 태후의 등등한 위세 앞에감히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스승인 태사 신작은 편전대령한 문무백관앞에서 간쟁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짐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스승이지만 지나치시오. 나라가 이만큼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 태후마마의 은사임을 어찌모르시오?"
"폐하의 위엄은 천둥처럼 무서워야 하고권위는 태산처럼 무거워야 하나이다. 현명한 황제는 반드시 천하의 주인임을 잊지 않나이다."
옳은 소리였으나, 서궁에서 편전 소리를모두 듣고 있는 태후가 걱정이었다. 대이진은 스스로 꼭두각시라는 걸 알고 있었다.조정 대신과 변방의 장수들까지 모두 태후에게 조아리고 있어, 태후의 말 한마디면아우인 대건황에게 천하를 넘겨야 할지도모른다.
"물러가시오. 짐이 찾을 때까지는 입궐을 금하겠소!"

신작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표정이 결연해 보였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해지량은 고개를 저으며 혼잣소리를했다.
"조금 훔치면 도둑이 되지만, 많이 훔치면 군주가 된다고 했소. 태사는 너무 많은걸 훔치려 하고 있소. 충역을 뛰어넘기에는너무 정직하오."

"황상께 아뢰시오. 불경에 이르기를 불이 나서 뭇 생명이 죽을 지경에 작은 앵무새 한 마리가 제 깃털에 물을 적셔 불을 끄려고 했소. 그랬더니 원이 이루어져 불을끄고 뭇 생명도 구했다 했소. 신이 아무리앵무새 노릇을 하고 싶어도 물이 멀리 있으면 깃털을 적실 수 없다고 아뢰시오."

"황상께 한시라도 쉴 틈을 주지 말라. 천하 미인들을 물색해 끝없이 향락에 빠지게해서 책과 충신의 말을 멀리하고 조정대사를 귀찮아하게 하라."
대이진은 어려서부터 싫증을 잘 내는 성미였다. 후궁들도 수시로 바꾸어 침궁에 들게 할 만큼 변덕이 심했다.
"골라 바친 후궁은 탐염이 진동하여 황상의 총첩이 되어야 한다."

황제 대이진은 총애하는 후궁들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파천하듯 홀한해에 행궁을차렸다. 병란은 아니라도 가뭄으로 지친 백성들이 아우성치고 굶어죽어 난리와 다름없었다. 이런 판국에 황제가 도성을 떠나자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황제가 황음무도하고 태후의 섭정으로 하늘이 진노한 것이라는 풍문도 나돌았다.

병란을 알리는 봉화였다.그리고 뒤따라 동경용원부에서 병란이 일어났다는 파발이 도성으로 날아들었다.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봉기하여 염포현승 기국청과 염주자사 은사공을 죽였고, 동경용원부 도독 해무량은 중경 쪽으로 도망쳤다는 급보였다.
반란의 수괴는 거상 장사경과 율창직이었다. 그들이 봉기하자 놀랍게도 군사들이기다렸다는 듯 반란에 합류하여 동경용원부를 함락했다. 농어민은 물론이고 염전의역부들과 상인, 삯일꾼들까지 반란 대열에뛰어들었다. 급보를 받은 해태후는 분기를누르지 못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동경용원부 도독해무량이 변방 수장 가운데 가장 많은 공물을 보냈사옵니다.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봉기한 것이옵니다."
"어찌 수습할 수 있겠는고?"
"조금 더 지켜보면 반드시 수습할 길이있을 것이옵니다."
태후궁에서 물러나오는 장덕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앞날을 예견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태후궁의 젊고 다부진 내관들은 밤마다 태후 침소에 들어 온몸으로 해수련을섬겼다. 그래서 백성들은 태후가 아끼는 총신들을 은밀히 육총신이라 불렀다.
해수련은 태후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황제들이 여색을 탐하는 까닭을 이해하였다.
여인으로 태어나 가장 높이 오르는 자리가 태후로되 가장 외로운 자리도 그 자리였다. 남색의 황홀경이 이리 좋고, 권세 또한 이리 좋은 걸 왜 진작 몰랐던가. 천하를호령하고 있으니 이리 황홀한 것을…….

"황상께서 환궁하여 친정하게 하옵소서.목마르고 배고픈 건 군사들도 마찬가지옵니다. 진병한 군사들도 불만이 터뜨려지면회군할지 모르옵니다. 그때는 마마의 안위가 근심이옵니다. 그러나 황상께서 몸소 군사를 이끌면 사방에서 충성스런 군사와 현사들이 모여들고 반란군은 명분을 잃고 내홍에 휩싸이게 되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이참에 신작과 황친을 비롯하여 간쟁을일삼는 자들을 숙청하옵소서. 반란군이 그들을 섬기고 있으니 절호이옵니다."
"옳은 말이로다."

"참으로 답답하시오. 반적들은 폐하를폐하고 신작을 옹립하려고 하오. 지난날의을사유신을 받들어 사족과 양민을 구별하지 않고 노비와 부곡을 양민이 되게 하려는것이오."
뜻밖의 소리에 당황한 대이진의 낯빛이굳어졌다.
"설마하니 신작이……."
해수련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반란군이 신작 만세를 외치는 걸 모르시오?"

해지량과 신작의 모습이 겹쳐졌다. 신작의 직간이 떠올랐다.
"엄인을 내시감으로 삼으면 밤낮없이 황궁에 기거하면서 폐하의 뜻을 잘 탐지하여비위에 맞는 소리만 하게 되옵니다. 죄를숨겨 간교를 품고, 미혹한 재간으로 폐하를속이며, 황궁 밖의 진실을 어지럽게 하여폐하께서 보고 듣는 것을 혼미하게 되옵니다. 환관이 궁성에 자리잡으면 계속 환관을 길러 궁성으로 끌어들인 뒤 그들끼리 아첨으로 폐하의 환심을 사는 재주를 익힐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끝내 폐하께서 책을 멀리하고 충신을 내쫓고 여색으로 미혹케 되어 반드시 경술을 배척하므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은 누란지세에 빠지게 되옵니다."
대이진은 때때로 해지량의 중용을 후회했다. 생김새부터 싫었다. 나이 마흔인데쭈글쭈글 늙었고 졸린 듯한 눈과 기이한음성, 비쩍 마른 몸과 구부정한 어깨, 걸을때마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 겅둥거리는 게싫었다. 그러나 한편, 그런 그가 옆에 없으면 불안했다. 해지량이 건네주는 여인이 없으면 심심했고 아첨하는 말이 없으면 짜증났다.

계책을 마련한 것은 해무량과 그의 심복왕가희였다. 순시 나섰다가 치소인 동경성을 빼앗긴 해무량은 중경으로 도망쳤다가다시 상경으로 달려왔다. 살길을 찾지 못하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래서 살궁리 끝에 반간계를 쓰되, 태후와 해지량이가장 싫어하는 신작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계책이 기이하다고 생각한 해지량은 태후에게 먼저 아뢰었다. 해수련은 고심 끝에청을 받아들였다. 해수련의 고심은 두 가지였다. 황제가 친정군을 이끌고 대승을 거두면 황제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고, 만약 친정군이 패하거나 내분이 일어 도성이 함락되면 치욕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태후를 폐하여 사가로 내쫓김을 당한 척하여 병란이 수습된다면, 신작과 같은 구신들을 한꺼번에 처단하고 계속 섭정할 수 있을것이다.

"암계가 분명합니다. 태후를 폐했다면돌멩이도 웃습니다. 도망갔던 해무량이 제발로 기어들어온 것도 기이합니다. 천하에간특한 해무량이 스스로 참수당할 줄 알면서 뇌옥에 갇혔겠습니까?"

신작은 다 꿰고 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바치겠다. 누가 이기든 수많은 백성이죽는다. 기근에 허덕이는 나라에서 내전이일면 어찌 외적들이 두고 보겠느냐?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내 목숨이 무에 그리 소중하겠는가."

"대부시여, 운명을 하늘에 맡기시라. 그대들은 수만 백성을 살려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신작과 반란의 주역들이 막 남문을 통과하는 순간, 창검궁시로 무장한 금군들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찌르고 베었다. 삽시였다.신작 일행이 들어서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대부시여, 운명을 하늘에 맡기시라. 그대들은 수만 백성을 살려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신작과 반란의 주역들이 막 남문을 통과하는 순간, 창검궁시로 무장한 금군들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찌르고 베었다. 삽시였다.신작 일행이 들어서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대씨의 사직이 분명한데, 해씨가 치세하고 있나이다. 선제와 선조들께서 무어라하시겠나이까?"
대이진은 가슴만 파고들 뿐 입을 열지않았다.
"이대로 계시면 오래지 않아 선위하고태상황이 되시나이다."
태상황이란 살아 있는 동안에 황위를 물려주고 물러앉는 것이었다.
"짐은 태상황이 되고 싶소."

"폐하 곁에는 해지량 같은 간신들이 있어 무엇이든 숨길 수 없나이다. 신첩을 믿고 맡기면 어의를 편케 하겠나이다."
"현책이 궁금하오."
"황궁 출입을 하는 자는 누구나 기찰을받나이다. 그러나 서궁 출입하는 여인들은자유롭나이다."
"여인이라…… 과연 절묘하오."

남쪽 바닷가에 있는 남경남해부 도독 신대남은 많은 봉물을 마련했지만, 해태후를즐겁게 하기 위해 기이한 재주를 가진 자들을 뽑아 잔치마당에서 마음껏 작희를 뽐내기로 했다.

시해 음모의 전말은 잔치 후 사흘 만에밝혀졌다. 남경 예인들을 깊은 산속에 묶어두고 예인인 척 어화원 잔치에서 군무를 추며 태후에게 비도를 던진 무리는 황후 주신강의 사주를 받은 오사마의 무리였다. 오사마는 황후의 시위로 잠시 서궁에 머물다가궁성을 떠나 용마사에 머물렀다.

오사마는 남녀 20명을 선발하여 황후의뜻을 받들기로 맹약하고 해태후를 주살할궁리를 하고, 생신잔치에서 태후의 심장에칼을 꽂을 참이었다. 태후를 주살하는 순간황제가 칙지를 내려 태후를 처단했음을 선포하기로 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마마, 누구라도 황후마마를 혹독히 다루어 효수경중하리라 생각하옵니다. 사가에서도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해하려 했다면 살아날 길이 없사옵니다. 이럴 때 마마께서 두터운 은혜를 보이시면 모두 마마의섭정을 흠숭하게 되옵니다."
"그 요망한 것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암계를 부리지 않겠느냐?"
"마마, 머지않아 반드시 요망한 꼬리가잡혀 스스로 자결할 것이옵니다."

내시감은 황제의 근신이지 태후의 근신이 아닌데도 태후는 수시로 해지량을 서궁으로 불러들였다. 마마의 변이 수습되면서태후의 섭정은 더욱 강화되었다.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대이진은 대전에 나가지 않았다. 국사는 모두 권지국사가 된 해태후에게 일임한 채 후궁이나 궁녀들 치마폭에 싸여 세월과 여인을 희롱하였다. 모두들 오태후가 권지국사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던 때를 연상했다.

"남근이 없는 사람만이 엄인이겠느냐.구중궁궐에서 긴긴밤을 홀로 지새며 달빛이 지아비 얼굴인 줄 아는 여인도 분명 엄인이다."
그 한마디에 해지량은 고개를 더 깊숙이숙였다. 해태후는 밤마다 남색을 즐겼다.그녀가 아끼는 남총만도 족히 대여섯 명은되었다. 말로는 외로운 척하지만, 밤 깊도록 환락경에 빠지기 위해 혼몽약을 찾았다.

권세를 빼앗겨 허수아비가 된 황제는 외로움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밤마다 여색에취하고 천하지존으로 군림하는 태후는 권세가 지나쳐 위망을 견디지 못해 남색을 취했다. 세월은 황제 대이진을 더 몽롱하게만들었고, 태후 해수련을 무치하게 만들었다.

"덕산대사가 바쳐 올린 금불상은 바라만봐도 악심이 사라지고 선심이 생기옵니다.당나라 황제는 내부 혼란을 밖으로 돌리기위해 우리를 공격할 궁리를 할 것이옵니다.그러니 금불상을 보내옵소서."
"안대문을 사신으로 삼아라."
해태후는 금불상을 물선으로 내놓았다.당나라와 화친하기 위해 무엇이든 아끼지않고 귀한 물선을 보냈다. 전쟁을 치르려면막대한 인력과 물력을 소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불상을 가지고 당나라에 갔던 안대문은 환대받지 못한 채 돌아왔다. 깜짝 놀라연유를 묻자 안대문이 대답했다.
"당나라 황제는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와경교, 마니교와 배화교를 싫어한다고 하였사옵니다."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마마, 그런 청을 하는 순간 금불상을 파할지 모르옵니다. 당제에게 변고가 생기지않은 것을 보면 불상은 아직 온전한 듯하옵니다."
송경신은 당나라 궁성에서 금불상을 보관하는 것이 좋다고 우겼다. 한쪽 눈을 뜨고 있는 불상이 당나라 궁성을 지켜보기 때문에 감히 발해를 공략할 궁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송경신은 천문에 해박하고 학문이 깊은 명신이어서 해태후가 중용했다.

내시감 해지량이 궁성으로 아편을 반입한 후 발해 궁성에서는 앵속화를 황상화라고 불렀다. 아편은 당나라에서 구해오는 것도 있었지만 어화원 양지바른 곳에 심은 여춘화의 덜 익은 열매 껍질을 칼로 에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진으로 직접 만들기도했다. 그래서 여춘화가 피어 있는 곳에는항시 금군이 창검을 들고 지켰다

해태후는 아편을 금하기로 작정하고 과감하게 손을 떼었다. 황제와 둘째아들 대건황이 하루가 멀다 하게 즐기고 해지량까지아편에 취하자 단호하게 마음먹었다. 해태후는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건황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태후궁 창고를 개조하여 가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이진이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 자손도 없었다. 해태후는 혼수상태에 빠진 대이진을 쳐다보고 어금니를 악물고 돌아섰다. 병석에 누운 지 불과닷새 만에 대이진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정축(857)년 정월 열이틀이었다. 재위 26년 동안 어머니 해태후에게 정사를넘긴 채 혼몽한 상태로 살다가 힘없이 무너졌다.
황태제 대건황이 계위하여 연호를 대정으로 바꾸고 선제 대이진의 시호를 장황제로, 묘호를 장종으로 했다. 26년 동안 섭정하며 천하를 주무른 해태후는 작은아들 버릇을 고치기 위해 태후궁 창고를 개조하여 가두었다.

태후를 질책하고 논힐하며 해씨 일족들의 전횡을 야단치던 황친 중에는 비명횡사하거나 밤사이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황친들은 그것이 태후의 은밀한 징계라는 걸 알았다.

황친들의 사치는 끝이 없었다. 더러는 그들 때문에 관고를 걱정해야했다. 이에 해태후는 황친들을 대거 숙청할 궁리를 했다.
"마마, 황친의 수효를 줄이고, 그들에게나누어준 식읍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사직을 보전하기 어렵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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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홀한성을 점령한 대창해는 태자 대신덕을 동궁에 가두고 서궁을 봉쇄했다. 그러면서도 대신덕과 황태후 고운목의 저항이 큰 걱정이었다. 대가 약한 대신덕은 순순히 국새를 내놓고 동궁에 갇혔지만, 고태후는 끝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고태후는 교지를 한눈에 읽고 찢어버렸다. 창검을 든 군사들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도 전혀 굴할 기세가 아니었다.
참다 못한 대창해는 호위 군사를 대동하고 서궁으로 갔다. 고태후가 갇혀 있는 태후궁은 한 팔 간격으로 무장한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할 만큼 삼엄했다.

고태후는 가볍게 웃었다.
"잘 새겨들으시오. 여인이지만 칼날이두려워 초목이 모두 적군으로 보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소이다. 비록 힘이 모자라 역신의 손에 죽는다면 기꺼이 죽으리다. 구천에올라 모든 선제들께 고하고 악귀가 되어 역신의 무리를 참하겠소."

"초륜하지 못한 자가 제위에 오르면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곤궁해지는 법이니부디 역신의 너울을 벗겨내고 과욕을 삼가시오."
칼을 받아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고태후의 표정은 너무나 대범했다. 대창해는 칼을 치켜들었다.

"불자라면 지켜야 할 금계가 있소이다.중생을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그대는 황제의 신하와 군사들을 죽이고 범궐하여 태후마저 죽이려 하니 첫 번째 금계를 어겼소.훔치지 말라 했거늘 언감생심 황위를 훔치려 하고 사직을 찬탈하려 하니 두 번째 금계를 어겼소. 또한 거짓말을 하지 말라 했는데 황상께서 붕어했다고 거짓을 말하고천하가 역적에게 굴종했다는 헛소리를 했으니 세 번째 금계를 어겼소."

"내게 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상뿐이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태자를 풀어주고 대전에 엎드려 석고대죄하시오. 그러면 죽음은 면할 것이오. 황상께서 진격하면 도성이 삽시에 조아릴 것을 왜 모르시오."

황친과 신료들이 황제를싫어할망정 태후는 받들었다. 후덕해서 황친들을 꼼꼼히 챙긴 탓도 있지만 성정이 다사로워 두루 화친했기 때문이다. 지금 태후를 참하면 황친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동경용원부도독 고좌민과 장령부도독 임기록, 솔빈부도독 최가림과 휘하 변방 장수들이 뜻밖에 황명을 받들어 토평군에 가담했다는 소식이 대창해에게 전해졌다. 뿐만아니라 변방의 도독, 자사, 현승과 장수들이 대창해에게 군사를 증원해 주지 않기로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태자의 교지만 있어도 대인수를 폐하고계위할 수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황제의 친정군이 달려오고 궁성에는 태자가 버티고있습니다. 이참에 태자를 주살하고 등극해야 합니다."

물론 토평군에는 천하명장이라는 장수와충성스런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면 포악한 짐승도 놀란다는 주홍기사단과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와 금군들이 즐비하지만 모두 합쳐야 수천 명에 불과했다. 도성에 남겨두었던 금군은 반란군에게 제압당했으니 군사력으로 본다면 반란군의 군세가 훨씬 우세했다.

"폐황 대인수를 사로잡거나 참하지 않고는 계위할 수 없습니다. 만약 대인수가 신기한 전술로 도성을 함락하면 현책이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역적이 되고 멸문지화당할 것을 왜 염두에 두지 않습니까? 대군께서 황위에 오르시려면 군사를 휘몰고 남정하여 대인수를 주멸해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대군께서는 결코 천심을 얻지 못합니다. 대인수가 살아 있는 한 등극할 수 없습니다."
원로대신이자 황친인 대신명이 호통치듯말했다.

"자고로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긴다고했소. 우리가 남정하는 사이에 대인수의 군사가 도성을 침입할 수 있으니 백성과 노비를 조련시켜 도성을 사수하면 보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대인수를 공격할 수 있소."
대창해는 하루빨리 대인수를 물리치고황위에 오르기 위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대곤명을 홀한성 수성 대총관으로 명했으니 귀신이라도 준동하지 못하오."
대곤명은 황친이지만 서자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고도 낮은 관작으로 비탄에 젖어 살던 자였다. 대인수는 그의 뛰어난 무예와 용맹함을 높이 사 전투마다 선봉을 삼았고, 혁혁한 공을 세울 때마다 여러 차례초천하여 대장군으로 삼았다. 그에게 초천장군이란 별호가 붙은 것도 그런 사연이었다.

대곤명은 황제의 총신이었지만 대창해가 반란을 일으키자 선뜻 가담했다. 대창해가 황위에 오르면 무관으로서 더 이상 오를데가 없는 진단대장군 겸 태복경에 봉하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반란의 주역들은 대곤명을 선봉에 세우지 않았다. 그가 큰 공을 세우는 것도 싫었고, 혹시나 군사를 이끌고 변심할 가능성도 있었다.

태자 대신덕이 그의 아들 대이진과 함께볼모가 되었으니 자칫하면 사직이 어지러워질 수 있는 중대 고비였다.
"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어느 정도의 참화를 각오해야 하오."
대인수는 이미 태자와 황실의 참화를 각오하고라도 사직의 안녕을 도모할 작정이었다. 무서운 결심이었다.

"폐하,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나이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반란군을 평정하면 폐하께서 을사유신을 제대로 펼칠 수 있나이다. 어쩌면 하늘이 폐하의 성덕을 크게일굴 수 있게 시련을 준 듯하옵니다."
신작의 위로가 대인수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대인수는 단숨에 짓쳐들어 역적의 무리를 단칼에 베고 싶은 분노를참을 수 없었다.

"파저라는 게 있사옵니다. 신은 물결 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일 뿐이옵니다. 좋은세상이 가까워졌으니 옥체를 보전하옵소서."
대곤명은 큰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당당한 체구에 훤칠한 장부의 기개가 느껴지는장수였다.
대곤명이 돌아가자 고운목은 혼잣소리로 파저라는 말을 되새김질했다. 물결의 밑을 파저라고 했다. 그렇다면 물결 밑에서헤엄치는 물고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뭔가 예사롭지 않은 여운에 끌려 곰곰이 새겨보았지만 뚜렷이 잡히는 게 없었다.

"장수 대곤명이 거느린 군사는 거개가노비와 부곡이 아니면 양민이옵니다. 그들은 폐하를 흠숭하고 있나이다. 영리한 대곤명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나이까? 때를 기다리는 것 같으니 마마께서 모른 체하시고옥체를 보전하옵소서."
대사연은 귀띔하듯 말하고 서둘러 돌아갔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황상의 성덕을 따르는 게 하늘의 뜻이요, 역적을 따르는 게 백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분하여 대장군을참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인의를 버린 대장군은 장수가 아니라 혼신일 뿐입니다."
순간 대곤명은 사방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대장군의 수급을 하늘 높이 매달고 역적의 무리를 모조리 베고 성문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대창해를 주살하겠습니다. 여봐라! 대문을 열고 횃불을 올려라!"
대도만덕이 소리쳤다. 그러자 대문이 활짝 열렸다. 횃불이 앞뒤 좌우로 번지는데궁성이 온통 군사로 에워싸인 듯했다. 대곤명은 이미 대도만덕이 도성을 장악했다는걸 알았다.

대곤명의 목을 벤 대도만덕은 밀지를 주워 읽었다. 황제의 밀지가 분명했다. 대곤명은 한순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첩을 올려충성을 맹약한 것 같았다.
대도만덕은 눈앞이 캄캄했다. 경솔했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역적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말라. 남김없이 도륙하라!"
대도만덕의 외침은 분노로 가득했다. 끝까지 지켰어야 할 태자가 주살되었으니 원통함에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분노한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도망치는 역적들을 찾아목을 베었다.
새벽녘에 대도만덕은 군사를 이끌고 태후 앞에 부복하고 죄를 청했다.

"태자의 죽음이 나라를 잃은 것보다 더슬프단 말이냐?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역적을 토평하고 백성들을 진무할 때다.출진 채비를 서두르라!"

반란군의 모주인 왕축경은 갑자기 불어난 도성 수비군의 허실을 대번에 눈치챘다.
"공성무기 없이 공격하기에는 우리 군사의 손실이 너무 크지 않겠느냐?"
"노비와 부곡은 보잘것없어서 처음에는짐승처럼 용맹하지만 기가 꺾이면 놀란 짐승처럼 도망칩니다. 천 명만 희생시키면 성문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대창해의 수급을 자루에 담아든 대도만덕은 황제 앞에 꿇어 엎드렸다. 대도만덕은무모하게 황궁을 장악하려다가 태자를 시해하게 만든 죄를 청했다. 황제가 그 죄를물으면 천하 없는 공을 세웠더라도 살 길이없었다.
"장하고도 장하도다!"
황제의 옥음은 뜻밖이었다. 대도만덕은더 깊이 조아렸다.

대인수는 대사령과 함께 을사년(825)에선포했던 유신을 더욱 강화했다. 그토록 유신을 반대했던 대소신료들도 모두 침묵했다. 대인수는 신작을 태사로 봉하고 을지후문을 태복경 겸 진단대장군으로 삼았다

"이것은 가림토 정음 38자로 오래 전에새긴 듯하옵니다."
누가 새겼고 왜 새겼는지 밝힐 수 있는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가림토 정음38자만 세로로 새겨 있을 뿐이었다. 대인수가 석판을 매만지며 새벽녘에 꾼 꿈을 털어놓자 신작이 해몽을 했다.

대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들이 책을 읽고 과거를 보려 해도 당문이 아니면가림토인데, 당문은 배우고 쓰기 어렵고,뜻마저 다양해서 익히기 쉽지 않았다. 가림토는 그보다 쉽지만 정음의 수가 많고, 뜻이 오묘해서 시를 짓고 문장을 다듬는 데는적격이지만 양민이 배워 익히기에는 결코쉽지 않았다.

가림토가 제대로 쓰이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족들이 당문을 선호해서 신분을 가르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구별하려는욕심 때문이었다. 즉, 당문으로 시문을 지으면 지체 높게 생각하고 가림토로 시문을읊으면 서인 취급했다.

"신은 폐하의 성덕을 받아 당나라에 다녀왔사옵니다. 당나라는 조정 안팎이 어지러워 밖으로 눈 돌릴 틈이 없고, 신라 역시김헌창과 김범문의 반란 이후 정세가 어지럽사옵니다. 일본은 여러 해 동안 기궁하여교빙조차 꺼릴 지경이옵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사해로 번져 백성들은 근면하고신료들은 충성스럽사옵니다. 어찌 강역이넓고 사람이 많음에 견주겠사옵니까?"

"백제를 침략한 소정방은 국서고를 불태워 조선과 백제 역사를 모두 없앴고, 설인귀는 고구려의 국서고를 불태워 옛 역사와고구려 역사를 없애버렸도다. 선비들이 이를 통탄하지 않으면 모화 선비가 아니고 무엇인고? 선비나 신료들이 우리 역사인 단기고사가 가림토로 쓰였다고 탐독하지 않으니 또한 통분할 일이로다. 오죽하면 황조복이 단기고사를 당문으로 옮겼겠느냐?"

"이미 고구려 때 가림토 문자를 일본에전했도다. 조선 제3대 가륵단군께서 을보륵을 시켜 만들었으니 우리 선조의 숨결이어려 있는 문자가 아니더냐? 지금으로부터3천여 년 전에 창제된 문자이니 흐른 세월만큼이나 잘 갈고 닦아 써야 하도다."

"태평성대를 구가하기 위해서 반드시 문자가 간결하고 쓰기 쉬워야 하도다. 그렇게익힌 문자로 옛 역사를 배워 익히고 앞날을예견하는 지혜를 터득하면 어찌 천하 대국이 되지 않겠는고?"

"본디 가림토는 가림다라고도 불렀사옵니다. 가는 더하고 다는 많아진다는 뜻이옵니다. 즉 수는 더해지면 많아지고 빼면 줄어드는 것인데, 그런 수의 원리를 따르므로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을 다 표현할 수 있는문자라는 뜻이옵니다. 이는 곧 천, 지, 인의의미를 글자에 담아 하늘의 소리이든 땅의소리이든 사람의 소리이든 흉내 내지 못하는 게 없사옵니다."

을사유신과 북벌, 당나라를 비롯한 신라와 일본과의 다양한 교역, 해를 이은 풍년,병들고 기궁한 백성들을 나라에서 구휼한덕에 발해 강역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런데 황제 대인수가 병상에 누웠다. 온백성이 황제의 쾌유를 빌고 있다는 소식은멀리 당나라 장안까지 날아들었다.
이담의 뒤를 이어 정미(827)년에 계위한당제 이앙은 대인수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숭선을 발해 도성으로 보냈다. 이숭선은 병상에 있는 대인수를 알현하고 당나라 황제의 신한을 올렸다.
‘해동성국 대발해.’
병상에서 대인수는 이앙에게 휘호를 돌려주고, 사신 이숭선을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영문 모르는 내시감 임산록이 부복했다.

"발해를 동쪽 바다의 나라라 칭함은 결국 우리를 멸시함이다. 당나라가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가 동쪽 바닷가에서 융성한 나라를 가꾸었다는 뜻이 아니더냐? 짐이 당제 이앙에게 해서성국 대당이란 휘호를 보내면 곱게 두 손으로 받겠느냐?"
임산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공하옵니다."
"사신 이숭선을 보름 동안 가두고 풀어주어라. 그리고 품속에 짐의 휘호를 넣어보내라. 그리하면 발해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니……."
대인수가 내린 휘호에는 해서성국 대당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명심하여 받들겠사옵니다."

"폐하의 성지를 받들어 선조들이 남겨준소리글자 가림토 정음 38자를 23자로 줄여무지한 백성들이라도 익히기 쉽고 쓰기 편케 했사옵니다. 오로지 폐하의 훈유를 받든것이옵니다."
대인수는 누운 채 손을 들었다 놓았다.
"경들의 수고로움에 경탄하도다. 정음스물석 자를 발해 문자로 삼을 테니 부디백성들을 고루 편케 하라."

"입술은 반쯤 열면서 내는 소리 ㅁ, 혀끝을 꼬부리면서 내는 소리 ㄴ, 숨을 아랫니쪽으로 내뿜으며 내는 소리 ∧, 입천장과코로 숨을 내쉬면서 내는 소리 ㆆ, 숨을 입천장으로 몰아내는 소리 ㄱ, 입천장에 혀끝을 대었다 떼면서 내는 소리ㅿ, 입천장에아랫니를 대고 숨을 내보내며 내는 소리ㅈ."
양지강의 목소리가 끊겼다. 황제 대인수는 그토록 열망하던 발해 문자 소리를 다듣지 못하고 승하했다. 때는 경술년 섣달스무닷새, 건흥 12년이었다. 새해를 며칠앞두고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던 대인수는 숨을 거두었다.

대인수의 을사유신에 맞섰던 황친은 물론이요, 대소신료와 만백성은 섣달 그믐께승하한 황제를 숭례하느라 모두 소복하여설을 맞았으며, 대인수를 위해 제례상에 따로 술 한 잔을 올렸다. 황제의 붕어를 천하가 그토록 슬퍼하고 치세를 흠숭할지 대인수는 알지 못했다.
대인수의 뒤를 이어 맏손자 대이진이 계위했다. 선제 묘호를 성종으로, 시호를 선황제로 하고, 신해(831)년 정초에 발해 제11대 황제로 등극한 대이진은 연호를 함화로 바꾸었다. 반란군에게 아버지 대신덕을잃은 그는 나이가 어린데다 성품도 유약했다.

발해 문자 정음 23자는 선제의 성덕과큰 베풂으로 탄생했다 하여 백성들 사이에선문으로 불리었다. 대인수의 시호가 선황제인 탓도 있지만 백성들은 대인수의 성덕을 큰 베풂으로 여겼다. 선문을 발해 강역의 학당마다 가르치고, 도성에 있는 주자감에서 가르쳤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해서글공부하는 백성들이 도처에서 모여들었다.

대이진은 할아버지의 위망에 눌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머니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근신인 내시감과 대신인 대내상을 새로명하고 변방을 진무하시오."
대이진은 어머니 뜻에 따라 만인지상인대내상에 대공정을, 내시감에 해지량을 임명하고 변방의 도독과 자사를 비롯하여 장수들을 교체했다. 대공정은 황친으로 덕망이 높았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이래 대신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두루 화친한 성품으로 평판이 좋았다. 내시감 해지량은 태후 해수련의 친조카로, 오라버니 해수청의 장자였다. 해지량은 품계를뛰어넘어 황제의 근신인 내시감이 되었다.

해수련이 조카 해지량을 지극히 아끼는까닭은, 젊은 시절 사냥터에서 사고를 당해사내의 상징인 옥근이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해지량은 문과에 장원급제할 만큼 머리가 좋았고, 무과에도 급제할 정도로 출중한 인재였다. 문무를 겸비한 동량지재라 하여 선제 대인수가 무척 아꼈지만 신료들과어울리지 못해 중용하지 못했다. 사고당하기 전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지만 사내구실을 못하자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 재혼하게 할 만큼 통이 큰 사내였다

"폐하, 자고로 백성이 고루 현명하면 정사를 제대로 펼칠 수 없었사옵니다. 백성이우둔해야 다스리기 쉽사옵니다. 글을 깨우쳐 유식해지면 불평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되옵니다."
"꼭 그러하더냐?"
"고금을 막론하고 충역을 뛰어넘는 자나역심을 품었거나 무리를 이끌고 준동한 자는 모두 유식한 자들이었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태사의 한마디가폐하의 옥음보다 귀하고, 태사를 따르는 무리가 폐하를 따르는 백성보다 많사옵니다.태사는 지난 날에 선제의 그림자였고 지금은 선제의 현신과 같사옵니다."
신작은 발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대이진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어쩌란 말이냐?"
"서서히 물리쳐야만 하옵니다. 머지않아반드시 폐하께 간언할 테니 그때 징치하옵소서."
"태사가 그른 말을 하지는 않을텐데……."

"폐하, 선제의 을사유신으로 양민 중에는 크게 농경을 일구고 교역을 하여 재물을모은 호족이 많사옵니다. 노비나 부곡 중에부호가 많고, 변방에서 올린 장계를 보면그들은 관리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뿐더러위세가 관리보다 높다 하옵니다. 백성들도글을 깨우쳐 사리를 따지는 자가 많사옵니다."

사촌형 해지량이 내시감이 되자 해무량은 스스로 변방의 자사 자리를 달라고 애걸했다. 자사로서 너른 땅을 다스리고 싶었던 것이다. 염주는 바닷가에 치소를 둔 곳으로, 염전이 많고 교역선이 수시로 드나드는데다 농사가 잘되고 사냥거리가 많아 풍족했다. 특히 염주 소금은 품질이 좋고 염도가 높아비싼 값에 팔리며 염세가 많이 걷혀 치소의재정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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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수는 출병했던 군사 가운데 둔전병을 뽑아 서쪽으로 진병하게 했다. 이는 다분히 당나라를 의식한 것이다. 번진을 토평하고제나라까지 멸망시켰으니 당나라는당연히 발해를 넘볼 것이다.

뱃머리가 노들섬에 닿자 멀리 암자에서사람들이 달려왔다."정진중이라 저녁 공양 때가 아니면 나오지 않을 것이옵니다."나이든승려가 암자 뒤편 토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작과 난타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토굴에서 정진하여 불러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황제가 행차하면 마땅히 나와서 알현해야 하는데 그들은 당당했다."정진을 훼방했으니 스님께서 널리 헤아려주시오."

저녁때가 되어서야 토굴에서 참선하던 신작과 난타가 급한 걸음으로 황제를알현했다. 대인수는 좌우를 물리고 마주 앉았다."천하를살펴보니 짐의 능력이 참으로보잘것 없었소. 짐에게 바른말로 논힐하고짐의 모자람을 채워줄 현사가 절실하오."황제가 몸소 먼 길을찾아와 태사 자리를 권하니, 신작은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짐이 작정한 것이요, 이미 옥음을 내렸는데 어찌 번복하겠소? 짐이 부덕하여 마땅히 스승을 모셔야 하고 황자와 공주들에게도스승이 필요하오.""신은 한 번도 정사에 참여한 적 없는 백면서생일 뿐이옵니다. 오랫동안 조정대사를 논한 대소신료들에게 염치가없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신은 3공의 아랫자리인 사공이면 족하옵니다.""그러면 난타는 어찌 귀하게 쓸 수 있소이까?" "난타는 의술과 마의술에 뛰어나니태의로 삼고 장차 태복경을 맡기옵소서."

"사공은 짐과 황실의 스승이 될 수 없소.그러니 태보로 봉하겠소."이렇게 해서 대인수는 신작을 태보로, 난타를 태의로 명했다.

대인수가 여세를 몰아 곧장 흑수를 토평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흑수를 공격하는 사이 당나라가 변경을 침노할 것을걱정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흉맹한 흑수와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군사를 잃을까 하는 근심에서였다.

"흑수와 월희 군사보다 한 발 빠른 기동력과 작고 가벼우면서도 멀리 나가는 과간편한 양식이 필요하옵니다. 또한 가볍지만 튼실한투구도 만들어야 하옵니다." "과연 짐을 가르칠 만한 스승이오."대인수는 뒤엉킨 실타래가 풀어진 듯 기뻐했다.

"지금까지는 고구려의 전술과 편제로 군사를 다스렸사옵니다. 그러나 기마병 중심으로 기습하고 도주하는 흑수 군사와 응전하기위해서는 5병제를 버리고 10진제로군대를 편제해야 하옵니다. 즉 십, 백, 천,만으로 구별하면 통솔하기 쉽사옵니다."

"통솔하는 무리가 많으면 명령을 내리는자도 많기 마련이옵니다. 명령하는 자가 많으면 규율에 얽매여 공수가 느려지고 손발이 묶여적의 침공을 받게 되옵니다. 지금까지는 장수가 뒤에서 군사를 몰았지만 앞으로는 장수가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어야하옵니다."

"기마병의 반이나 정진대가 되어야하오?"어느 병법에도 나와 있지 않는 전술로기마병의 반수가 특공대 역할을 하는 것이기이했다.

"전투식량 만드는 묘책이 무엇이오?" "짐승을 잡아 털을 벗기고 잘게 저며 햇빛에 말렸다가 빻으면 양이 얼마 되지 않사옵니다.
그것을 짐승의 오줌보 말린 것에넣으면 좋은 전투식량이 되옵니다. 또한 곡물을 가루 내어 가지고 다니면 그 역시 좋은전투식량이옵니다."

대인수는 난타의 등을 두드렸다."그대의 손에 발해의 운명이 걸렸음을 명심하라. 짐이 죽어 천 마리의 말로 환생할 수만 있다면 발해군마로 태어나 저 광활한 북방을 한없이 달리고 싶다."

대인수는 가볍고 탄력이 좋은 각궁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살의 허릿간 길이와 촉의 무게, 궁깃의 넓이와 오늬의 크기를 매일 바꾸어최대 사거리를 모색하기 때문에수많은 활과 화살이 쌓여 있었다. 대인수가표적을 향해 날린 화살은 자로 잰 듯 표적을 뚫었다. 각궁은무려 백척이나 날았다.사거리를 확인한 대인수는 크게 기뻐하며궁공들에게 사급을 내렸다.

신축(821)년 초가을, 드디어 발해 황제친정군이 사열을 마치고 북방을 향해 진병했다. 이하앙과 장두불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앞서나가고, 전경채의 주홍기사단이 황제를 옹위하고 드넓은 벌을 내달렸다.

지난 전투 때만 해도 황제는 후군을 맡아 전황을 살펴 군사를 투입하고, 이번 전투는 북방 강자 흑수를 상대하기에 황제가몸소 적과응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발해 친정군이 흑수전에 나섰다는 급보를 받은 당나라 조정은 달구와 철리가 힘없이 무너지자 요서를 방비하는 한편 흑수를지원했다. 그래서 많은 운전금과 군마와 병장기를 보냈고, 병법에 능하고 신통술까지부린다는 장수왕시성을 흑수의 장사로 삼아 흑수 군사를돕게 했다.

"예부터 소각(작은 나팔) 소리는 용의 울음소리 같다고 했사옵니다. 적을 교란하기위해 소각과 전고를 삽시에 아우성치게 하면 적의군마는 놀라 날뛸 것이옵니다. 말은 꾀가 많지만 겁이 많은 짐승이어서 폐하의 뜻대로 부릴 수 있사옵니다."

"공격하라!"대인수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무수한 발해 기치가 오르며 펄럭였다. 나팔과 전고소리가 자지러지고 북소리도 콩 볶듯했다.고함소리도 되알졌다. 여기서 두들기면 저기에서 불고, 저기에서 고함치면 여기서두들기는데 마치 지옥의 암굴에서억조창생이 한꺼번에 분탕질하는 듯했다.흑수군 기마병들이 놀란 말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흑수군에 정신없이 도망치던 발해 군사들이 갑자기 뒤돌아섰다. 둔덕 아래 숨어있던 주홍기사단이 먼저 소리화살을 날리자 숨어 있던궁노수들도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마치 하늘에서 검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듯했다. 흑수 군사들은 쓰러지고 뒹굴고비명을 질렀다.
죽어가는 군사들의 비명은애처로웠다.

좌웅과 우웅이 협공을 하자 흑수 군사들의 예기가 꺾였다. 병에는 기가 있는 법, 적군의 전의를 꺾으면 아무리 용맹해도패하게 마련이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내달려 성 가까이 당도한 옥작소는 성곽을 쳐다보며 아연실색했다. 흰 바탕에 승천하는 황룡이 새겨진기치가 바람에펄럭이고 있었다. 바로 발해황제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뿐만 아니라황색 바탕에 효포하는 백호가 수놓아진 기치가 성곽 좌우에서힘차게 펄럭였다. 점령당한 게 분명했다.

발해군은 흑수군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다. 난전이었다. 그러나 우측에서 장척안의 군사들이 흑수군에게 한바탕 칼부림을하면,
어느새 좌측에서 윤호세의 군사들이한바탕 칼부림을 했다. 분병필패라 했던가.분한 마음으로 악에 받쳐 덤벼들 때는 꽤아귀차게보이지만 오래 못가 전의를 상실하기 마련이었다.

"복건성 성루 위에 백기가 펄럭입니다."뜬금없는 소식이었다. 항복을 뜻하는 백기를 내걸었으면 마땅히 적장이 걸어나와무릎을꿇어야 했다." 지키는 군사는 얼마나 되더냐?" "군사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의를 잃고 도망친 듯합니다."

장두불이 명을 내리자 뒤따르던 군사들이 성안으로 달려들었다. 장두불도 곧 그뒤를 쫓았다. 바로 그때 화살이 먹구름처럼날아와발해 군사들을 덮쳤다. 사방에 몸을숨기고 있던 흑수 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땅속에서 기어나오고, 지붕을 뚫고나오고,풀더미를 헤집고 달려들고, 성루에서 뛰어내리는 군사들의 기세는 물 만난 악머구리 같았다.

"남김 없이 도륙하라! 한 놈도 살려두지말라!"흑수군의 함성이 하늘을 흔들었다.발해군은 도망갈 길 없이 독 안에 든 꼴이었다.
저항하면 칼을 맞았고 무릎 꿇으면포박을 당했다.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성안으로 들어갔던 2천 군사는 가을바람에흩날리는가랑잎처럼 나뒹굴었다. 장두불은 적의 칼날 앞에 주검이 되었고, 군사들은 창검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했다. 이런걸 두고 궤멸이라하는 걸까. 도망갈 길이없는 발해 군사들은 손쉽게 항복했고 끝까지 싸우던 군사들은 창졸간에 목숨을 놓았다.

"흑수군이 쫓기는 마당에 호기를 부린것은 말미를 벌기 위함인데 그것을 모르고덤벼들다니 참으로 안타깝소." "드릴 말씀이없습니다."장수들은 장두불의 죽음이 마치 자신들의 책임인 양 어쩔 줄 몰라 했다.

날이 부옇게 밝아오자 신작은 공성을 명했다. 발해의 공성무기가 사정없이 성문을때리고 성루를 부쉈다. 마침내 남문이 불길에•휩싸이더니 무너졌다. 성곽도 일부가 무너져내렸다.옥작소는 수하 기병들을 거느린 채 동문쪽으로 내달렸다. 동문 밖은 창검을 든발해 군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군사를 물린 대인수는 날이 밝자 정탐병을 보내 적정을 탐지하고 군사를 풀어 시신을 한곳으로 모았다. 먼저 적의 시신을 위해 제사지낸 뒤 아군을 위해 제사 지냈다. 또 산신과 지신을 위무하는 제사도 잊지 않았다.

예부터 흑수를 정벌하기 어려웠던 것은패하면 군사를 이끌고 한없이 북방으로 도망쳤다가 날이 풀리면 군사를 휘몰아 공격해오기때문이었다. 만약 대인수가 환궁하면 어김없이 또 변경을 침노하여 백성을 죽이고 부녀자를 빼앗고 마소와 양곡을 남김없이 쓸어갈것이다.

"폐하, 적은 우리의 동태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사옵니다. 군사를 풀어 사냥으로 식량을 확보하고, 조련을 통해 군사들마음을 다잡으며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 하옵니다. 지금 적을 제압하지 않으면 반드시또 준동할 것이옵니다."신작은 오히려 봄을맞을 때까지 전선을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작의 예견은 적중했다. 흑수군 대수령옥작소는 발해군이 철수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백기를 든 장수를 보내 발해 황제대인수와단둘이 창검을 겨루어 승패를 가르자는 군첩을 보냈다. 성을 빼앗긴 채 먼곳까지 도망간 옥작소는 마지막 승부수를던진 것이다. 대국의 황제가 결코 응하지않을 것을 셈속에 넣은 제안이었다.

"전쟁이란 어느 한쪽이 일방으로 이길수 없도다. 우리가 적을 열 명 죽이면 우리군사 한 명쯤은 잃게 마련이다. 짐이 칼을들고 나아가옥작소를 잡는다면 천하가 조용해지지 않겠느냐. 한 나라의 주인이면 마땅히 한 명의 백성이라도 살리는 게 주인된 도리이다."

"태보는 어찌 말이 없으신고?"대인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신작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신작은눈을 뜨며 빙긋이웃었다. 황제도 따라 웃었다."진병하실 때 반드시 명광개를 갖추옵소서. 적을 능히 눈부시게 할 것이옵니다."신작과 대인수의 눈빛이마주쳤다. 장수들이 반대해도 대인수는 흑수 사신을 되돌려 보냈다.

칼을 치켜들자 사내가 두 손으로 칼을 막는 시늉을 했다."살려주시오! 나는 단지 명을 받고 대수령의 갑옷과 투구를 썼소."황금빛투구를 쓴 장수는 재빨리 사내를말에 태우고 밧줄로 몸을 묶어 안장에 걸었다. 그리고는 고삐를 채어 잡고 진영으로돌아왔다.

투구를 벗은 대인수의 형형한 눈빛은 천하를 호령할 기세였다. 그때 신작이 썩 앞으로 나섰다."겨루실 때는 반드시 투구를 쓰고햇빛을 받으며 공격하옵소서."막아섰던 장수들이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수도 단기필마였다. 저만치에서옥작소가 철편을꼬나들어 허공을 갈랐다.
222/307(72%)예견하고 대처했지만 옥작소의간계에 속지 않은 것에 모두 안도했다.

옥작소는 살기 등등 했다. 대인수의 장검에 몇 차례 갑주가 찢겨 속살이 벌겋게 드러났어도 기세는 여전했다. 칼과 철편이 부딪쳐불꽃이 튕겼다. 철편이 직하하면 칼날이 직상하며 불꽃을 터뜨리곤 했다.

옥작소는 대인수의 뜻을 알아차린 듯 한손으로 칼을 집었다. 그의 눈에는 증오도분노도 없었으며, 애통이나 비애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옥작소가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수령들이 그냥 둘 리 만무했다. 어쩌면 옥작소가 참패하기를 기다리는 자가 많을지도 모른다. 옥작소는 평소 대수령 자리를노리던 수령들의 얼굴에 비웃음과 잔인함이 배어드는 걸 떠올렸다.

항복의 절차는 복잡하지 않았다. 머리를풀어 헤치고 무릎을 꿇은 채 목을 내밀었다. 목을 치거나 항복을 받아들이거나 발해황제 뜻에따르겠다는 굴종의 예였다.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고 복속을 맹약한 신하였기에 응당 반역죄로 다스려야 했다.

발해 장수들이 도열한가운데 흑수 수령들도 함께 제사 지냈다.제사가 끝나자 대인수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고루 호궤하고 전공에 따라 후사했다. 흑수 장졸들은 발해 황제의 성은에모두 흠복했다. 대인수는 수령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골타를대수령으로 삼아 돌려보내고, 흑수를감찰할 장사에 진부달을 명했다.

"폐하, 월희는 흑수의 사주를 받아 출병했사옵니다. 흑수를 보내면 우리 군사의 손실 없이 항복을 받을 수 있사옵니다."장수이하앙이 주품했다."만약 월희가 흑수 손에 정벌되면 언제까지나 흑수를 상국으로 섬길 테니 우리 군사의 손실을 각오하고 토평해야한다."

"대장군에게도 훈공의 기회를 주어야 하옵니다."신작이 거들고 나서자 대인수는 기꺼이을지후문에게 부월을 주었다.
을지후문은대종과 화달에게 선봉을 맡기고 동쪽으로군사를 휘몰았다.월희를 공격한 지 보름 만에 월희부 대수령 야사리가 휘하 수령나야발, 오기리를대동하고 항복했다. 밧줄에 묶여 수레에 실려 온 야사리는 맨땅에 꿇어 엎드려 목숨을구걸했다.

"아! 말갈 제부를 평정했도다."대인수의 입에서 절로 환호가 터졌다. 발해를 창업한 지 120여 년 만에 고구려 옛땅은 물론 당나라 땅일부와 말갈제부, 흉맹하고 반복무상한 흑수 말갈과 월희까지평정하여 번속을 삼았다.드디어 성무고황제의 유지를 받들어 사방 5천리를 경략하게 되었다.

말갈제부 가운데 가장 흉맹한 부족은 제일 북쪽에 있는 흑수부였고, 버금으로는 철리부와 월희부였다. 흑수와 철리,
월희는 세력다툼을 해왔지만 발해가 강성해지면서불열과 우루부를 구슬려 동맹을 맺고 발해와 맞서려 했다.

대인수는 고순작에게 물었다."흑수부는 남으로 흑수에서 시작해 북으로 머나먼 동토에 이르며, 철리, 불열, 월희와 이웃하여 광활한영토를 가졌사옵니다.강성했던 서쪽의 거란과 돌궐도 가로막힌망망한 수림과 험한 길 때문에 흑수를 넘보지 못했으며, 당나라도침공하지 못했사옵니다. 오직 흑수를 위협하고 정복한 나라는고구려와 발해뿐이었사옵니다. 이제 흑수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쪽을발리부로 하고, 북쪽을 흑수부라 하옵소서."

대인수는 고순작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조서를 내려 발리부도독에 골타를, 흑수부도독에 오소진몽을 제수했다. 또한 골타와오소진몽에게 아속을 내려 각기 발리군왕과 흑수군왕으로 봉작했다. 드넓은 땅을두고 남쪽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맞서던 흑수는대인수의 탕평책을 받아들여 남북으로 강역을 나누고 이때부터 흑수와 발리로구분했다.

발해 강도가 완성된 것은 장장 2년 뒤였다. 동원된 인원만 무려 2천 명이었다. 2년 동안 병사하거나 변고로 목숨 잃은 자만도 50여 명이나 되었고, 부상당한 자만도백여 명이었다. 깊은 산골에서 짐승에게 먹히기도 하고, 독사에 물려 죽거나 강물에빠져 죽은 자도있었다. 바다에서 풍랑으로고기밥이 된 자도 있고, 장맛비를 미처 피하지 못해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리거나 겨울에 눈사태에 파묻혀죽은 자도 있었다.

발해는 광활한 국토를 5경 15부 62주로나누어 다스렸고, 북방에 흑수부와 발리부를 두어 말갈족을 복속했다.대인수는 태보 신작과을지후문, 시종장과 시위만을 대동하고 전서구를 기르는 구사를 찾았다. 아군끼리 연통하는 데 이용하는 비둘기를 조련시키는 장수양위음이 조련장으로 안내했다. 양위음은 독수리와 매사냥에 조예가 남다른 장수였다.

대인수는 황궁으로 돌아와 선대 개국공신 신재용이 남긴 서책을 펼쳐들고 찬찬히살폈다. 여러 가지 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진책으로, 어선과 군선, 전선의 그림들이 가득했다. 대인수는 수군으로 명성을 떨쳤던장문휴와 양소화 장군이 그려놓은 서책도펼쳐보았다. 맹선을 비롯해서 옥선, 유격선등 갖가지 전선이 그려져 있었다.큰 전선 1척에는 무려 3백 수십 명이 탈정도였으며, 어떤 배는 누선의형태였다.이런 배들은 한결같이 선각이 든든해서 모두 접근전에 유리하게 만들었는데, 수밀격벽이 잘 이루어지고 배 밑바닥이이중저로된 것이 특징이었다. 격벽은 물이 새지 않게 막아주고, 이중저는 배 밑에 내저판을두어 선체가 손상되더라도 쉽게침수하거나 좌초하지 않게 만들었다.

대인수는 태보 신작의 청을 받아들여 품질 좋기로 소문난 위성 철을 다량 확보했다. 철로 돌격선이나 전투선을 비롯하여 지휘선의용골과 늑골을 꾸몄다. 선제 대무예가영주벌을 토평할 때 검거를 투입하여 당나라 군사들의 혼을 빼앗고 섬멸했던 것처럼,돌격선뱃머리에 철곡을 빼곡하게 박아 적의 배를 당파시키려는 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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