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의 맛은 뜨거운 물과 뜨겁게 볶은 원두가 합작해서 만들어낸다. 차는 잎을 말리기만 하면 되지만, 커피 원두는 최소 섭씨 200도에서 최대 섭씨 280도까지 강한 불에 볶아야 한다. 센 불에 익어 까맣게 변신하지 않은 녹색 커피 원두는 푸석푸석한 푸성귀 맛밖에는 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Ethiopia 사람들이 즐기던 커피가 16세기에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의 본부인 터키Turkey로 유입된다. 오스만 제국은 무슬림 제국. 술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알코올이 차단된 제국의 백성들에게 커피는 강렬한 기호 식품으로 퍼져나간다. 통치자들은 처음에는 커피를 금지하기 위해 맹렬한 조치들을 취했다. 커피 가게에 평민들이 모여서 나랏일에 대해 떠드는 꼴을 두고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터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커피는 반드시 마셔야 했다. 전쟁에 나갈 때도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커피를 두둑이 챙겨가야 했다.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랜 원수. 서로 영토가 닿아 있고 종교가 달랐으니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683년에는 터키군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 문턱까지 진격한다. 이들은 화약통 곁에 커피 자루를 높이 쌓아놓았다. 연일 대포로 빈의 성벽을 가격했으나 적은 항복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병사들은 커피로 무료함을 달랬다.
교회 안에서 불온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평화의 기도 모임’을 한다며 반동분자들이 거기서 모인 지는 벌써 여러 해됐다. 집회가 끝나고 교회 문이 열린다. 그런데 이날따라 안에서 나오는 인원이 평소보다 많다. 대략 7천에서 8천 명? 놀랍기는 하나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다.
라이프치히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개신교 종교 개혁을 일으킨 작센Sachsen 지방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20세기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정치 혁명의 진원지 니콜라이 교회는 18세기 초, 감동적인 교회 음악을 수없이 창조해낸 한 거장이 활동하던 곳이다. 그의 이름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코린토스 Korinthos (코린트)가 위치한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직선거리는6.3킬로미터밖에 안 된다. 이 좁은 지협은 양편의 두 바다, 사로니코스만과코린토스만을 연결해준다.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여기에 육로 디올코스Diolkos를 건설해 배를 끌어서 반대편 바다에내려놓았다.
아프로디테의 고유 영역은 성적 욕구와 섹스. 코린토스항에 정박하는 배들에는 성욕이 들끓는 사내들이 넘쳐났다. 선원과 상인 외에도 순전히 섹스 관광이 목적인 자들도 많았다. 이들이 코린토스에 도착하면 언덕 위에 하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지어놓은 아프로디테 신전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이도시의 섹스 산업을 주도하고 관리하는본부였다.
기원전 1세기에 지중해 지역을 두루두루 여행했던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n(B.C.64?~A.D.23?)은 언덕 위 신전에서 1천 명 정도의 ‘여사제’가 ‘신도’들을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이 여신을 섬기는 방식은 ‘신도’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스트라본이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섬김’의 장소가 신전 내부는 아니었다. 아크로코린토스에서 발굴한 신전 터는 그다지 크지 않다. 여사제들이 열성 신도들을 맞이할 시설도 발견되지 않았다.
신전으로 올라온 사내들은 언덕 아래도시의 주점들이나 ‘여사‘들의 거처에서 일을 치렀다. 사내들은 정해진 액수를 미리 지불했다. 이들의 아프로디테 경배는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스트라본은 코린토스에 온 남자들이 가져온 돈을 모두 탕진하는 일도 빈번했다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생긴 격언마저 있었다. "코린토스 여행은 아무나 할게 아니다."
포르나이급이건 헤타이라이급이건, 코린토스에서 이들이 섹스를 팔아 받은돈은 온 도시를 살찌웠다. 코린토스가섹스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극진히 섬긴이유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Paradiso」 11곡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1182~1226)의 위대함을 이렇게 칭송한다. 프란체스코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녀’와의 결혼이다. 그녀의 이름은 ‘포베르타Povertà’(가난). ‘포베르타’는 예수가 첫 ‘남편’이었으나 예수가 부활, 승천한 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일천백 년이 넘도록 천대받던 이 여인은 1200년대 초, 드디어 새로운 짝 프란체스코를 만난다.
그는맨발에 사시사철 옷 한 벌만 입고 이탈리아 도시들을 걸어 다니며 설교했다. "돈의 종이 되지 마세요, 가난한 이들을돌보세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세요."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진 이탈리아 도시 상인들로서는 매우 듣기 싫은 소리였다. "어디 조용한 수도원 하나 지어줄테니, 거기서 기도나 하고 지내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제안했으나 ‘가난‘과 결혼한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라하 동쪽에 있는 아담한 중세 도시 쿠트나호라Kutná Hora는 세들레츠Sedlec 납골당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수만 개의 뼈와 해골로 온갖 형상들을 만들어놓은 것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여든다. 미사용 제단이나 기둥 장식은 물론이요, 천정에 걸어놓은 샹들리에도 사람 뼈와 해골로 만들었다. 납골당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매년 20만 명에 육박한다. 이들이 쿠트나호라나 프라하에서 쓰고 가는 돈도 만만치 않다.
세월이 흘러 금화도 은화도 아닌 지폐와 신용 카드가 결제 수단인 시대에 쿠트나호라는 세들레츠 납골당의 하얀 뼈와 해골들과 함께 관광 도시로 다시 살아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