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전대통령에  대해 "문경공립보통학교에 근무할 때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군관으로 지원했으나 1차에 탈락하고 재차 응모했다"면서 "당시의 정황을 <만주신문>은 "혈서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의 기사로 1939년 3월 31일자에 보도했다"라고 밝혔다. 훈도란일제강점기 초등학교 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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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는 현충원 셀프 여행을 위해 만들어진 가이드북‘이다. 이 책을 쓰는 내내 그 점을 염두에두고 기록해나갔다. 그래서 바람이 하나 있다. 우리 일상과 가까운 곳에 있지만 쉽게 찾지 못했던 여러 국립묘지를, 이 책 한 권 들고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떠나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장소 한 곳당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단언컨대 국립묘지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고, 누가 잠들었는지 알고 현장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끼게 될 보람은 투자한 시간보다 몇 배는 더 클 것이다. - P4

2009년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국가공인 친일파로 규정된 7인(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김홍준)을비롯해 평생 독립운동을 했지만 결국 이들 발밑에 잠들게 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의열단,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친일파와 지사들의 공식적인 행적에만 집중해 서술했다. 이유는 하나, 이 책을 살핀 뒤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국가공인 친일파의 묘역에서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바라보자. 그 감정을 잊지 않기를 희망한다. - P5

이외에도 우리 정부가 친일파로 공인하지 않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비공인 친일파 5인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최중심부에 잠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애국가의 주인공 안익태, 한국전쟁 때 한강철교를 폭파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등이 있다. - P5

제2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100만 평에 육박하는 거대한 땅에 마련된 국립묘지다. 충남의 자랑인 계룡산 줄기 따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 P5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곳 국립대전현충원 역시 국립서울현충원과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선택한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함께 잠들어 있다. 이들 중에는 국가에서 공인한 친일파인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이 있다. 2020년 7월 10일백수를 누리고 사망한 국가공인 친일파 백선엽 역시 논란 끝에 장군제2묘역에 영면했다. - P5

제3부는 수유리 4.19국립묘지와 서울 효창공원을 다뤘다. 서울시강북구 북한산 초입에 자리한 민주열사와 애국지사의 무덤, 그 안에 기생하는 친일파와 군부독재의 흔적에 관한 이야기다. 제3부는 앞선 1부와 2부에 비해 덜 무겁다.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든 휴식 공간인 수유리4.19국립묘지를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펼쳐놨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대한민국이 어떠한 과정과 희생을 거쳐 탄생하게 됐는지 수유리 4.19 국립묘지 곳곳에 잠든 지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 P6

한눈에 보는국립서울현충원추천 답사
•서울현충원 만남의광장→• 현충탑→・부부위패묘(김홍준)→• 이승만대통령묘소→• 유공자제1묘역(백낙준)→•장군제1묘역(김백일, 채병덕, 신응균)→•박정희대통령묘소→•장군제3묘역(이종찬, 정일권)→•약수터 →•장군제2묘역(신태영, 이응준, 임충식)→•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유공자제2묘역(안익태 등)→●임시정부요인묘역(이상룡, 박은식, 신규식, 지청천, 김성숙 등)→•김익상, 이재명, 박열 등→•충열대→•애국지사묘역(박재혁, 김상옥, 조명하, 이종암, 남자현 등)→•만남의집 ‘갈비탕으로 마무리 - P14

국립서울현충원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사망한 국군장병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특별시 동작동 일대에 국립묘지를 조성할 것을 결정했고, 1954년 삼일절을 기념해 공사가 시작됐다. 2년이 지난 1956년 4월 대통령령으로 첫 번째 안장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중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의 묘였다. 이듬해인1957년 4월부터 신분이 확인된 군인들을 중심으로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 P16

국가공인 친일파‘도 일곱 명이 있다. 바로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특히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잠든 신태영과 이응준의 묘소 위치가 문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묘역과 애국지사묘역 머리맡에 있다. 지사들의 묘소를 바라보고 참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국가공인 친일파에게도 인사를 드리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이흘렀다. - P17

대통령묘소
박정희1명

장군제1묘역14명
강태민(6번)김용기 (140번)김정호(39번)김백일(국가공인/19번)문용채(72번)박범집(1번)박춘식(92번)신학진(275번)채병덕(12번)안병범(232번)최창언(126번)양국진(118번)신응균(국가공인/288번)윤태일(134번)

장군제2묘역3명
신태영(국가공인/3번)이응준(국가공인/6번) 임충식(2번)

장군제3묘역6명
김용국(20번)이종태(42번)김응조(52번)정일권(4번)김일병(40번)이종찬(국가공인/1번)

유공자제1묘역3명
김정렬(33번)백낙준(국가공인/26번)엄민영(3번)

유공자제2묘역2명
안익태(7번)조진만(8번)

위패2명
김호량(부부위패 02-70)김홍준(국가공인/부부위패05-197)

기타
김준원(충혼당2-212-143)박성도(충혼당2-213-127)안광수(7묘역-5-08)최복수(54묘역-4-2195)4명 - P19

임시정부요인묘역
임시정부요인묘역은 1993년 중국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치되어 있던 임시정부 요인 다섯 명을 모셔오면서 조성됐다. 매우 잘한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국가공인 친일파 두 명이 잠든 장군제2묘역 하단에 묘역을 조성했다.
- P20

김영삼 대통령이 묘역 하단에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글까지 새겨 넣은 제단을 조성하며 독립 의지를 고취했으나, 결과적으로 친일파의 무덤 아래 지사들을 모신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가 됐다. - P20

2020년 4월 기준,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잠들어 있는 분들이다.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상룡 초대국무령,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대명사신규식 국무총리 대리 및 외무총장 역임김동삼 만주 호랑이라 불렸던 서로군정서 참모장지청천 군무총장 및 광복군 총사령을 역임 - P20

오영선 법무총장. 홍진 국무령
박찬익 외무총장. 이유필 내무총장
양기탁 국무령. 황학수 생계부장
노백린 국무총리. 조경한 비서장
김인전, 손정도, 이강 의정원 의장
윤세용 국무위원 - P21

유관순 3·1운동의 불꽃
이상설과 이위종 헤이그 특사
홍범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냄
오동진 정의부 총사령
김익상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폭탄 의거를 유일하게 성공시킴

등 독립운동을 한 의사와 열사 115위와 한국전쟁 중 납북된 조소앙, 엄항섭, 박열 등 15위도 함께 모셔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이자 5.16군사혁명의 주역인 김종필 전총리가 무후선열제단 헌시비를 작성했다. - P22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아래쪽으로 조성된 묘역이 독립유공자들이 잠든 곳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이 직접 작성한 소개 글이다.
애국지사 및 임시정부 요인, 무후순국선열을 통틀어 추모하는 충열대가 있다. 1906년 을사5적 처단을 시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한 기산도, 상해의열단 소속으로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운동을 벌인 서재필, 친일 외교 고문인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를 미국에서 척살한 장인환과 전명운, 3·1운동에 참여한 이종일, 권병덕,
라인협 등 민족대표 14위와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애국지사 23위가안장되어 있다. - P24

간도특설대 중대장에서 여순사건 계엄사령관으로1946년 육군 중위로 임관한 김백일은 불과 4년 뒤인 1950년에 대한민국 육군 소장에 오른다.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진압이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등을 중심으로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여수와 순천 지역에 거주했던 무수한 민간인까지 살해됐다. - P29

김백일의 조부 김영학은 만주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만세시위를 전개해 간도지역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손주인 김백일의 길은 달랐다. 김백일은 열아홉 살 때인 1936년 일제가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의 펑톈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향후 간도특설대의 핵심이 되는 신현준, 김석범, 김홍준, 송석하 등을 만났다. 펑톈군관학교를 나온 김백일은 1938년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창설된 간도특설대에 설립부터 기여했다. 해방 때까지 김백일은 간도특설대에서 중위를 거쳐 1944년 대위에 진급한 뒤 중대장에 임명됐다. 김백일의 간도특설대 활동을 높이 평가한 일본 만주국 정부는1943년 김백일에게 훈5위에 해당하는 ‘경운장‘을 수여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러한 활동을 근거로김백일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규정했다. - P31

간도특설대가 집행했다는 삼광정책이란 "모두 죽이고, 모두 태우며, 모두 빼앗는다"는 뜻으로, 위원회는 "특설대 설립부터 해산까지108 차에 달하는 토벌 활동을 전개했고 강간, 강탈, 고문, 구타, 방화 등죄악은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 - P33

국가공인 친일파 신응균은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자 30년 넘게 일본 군인으로 복무한 친일파 신태영의 장남이다. 신응균이 태어날 때 신태영은 일본 나고야 3사단에서 복무 중이었다. - P37

신응균은 아버지 신태영을 따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20세가 되는 1940년 2월에 53기로 졸업했다. 이후 일본 육군과학학교 포병과, 육군중포병학교에서 신식 군사기술을 습득한다. 1943년 12월에대위로 진급한 신웅균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이 점이 신응균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하는 주된 이유가 됐다. - P37

2020년 1월 2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광복회 시무식을 진행한 김원웅 광복회장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명당자리인 이곳에 잠들어 있다"면서 "이런 이들을 두고 (극우 언론에서) 국민화합과 단결을 외치는데 이게 일제강점기 내선일체와 뭐가 다른가"라고 일갈했다. - P46

그러나 장군제2묘역 입구에 2020년을 맞아 새롭게 세워진 현판에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신태영 중장 등 6위가 모셔져 있다"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장군들의 숭고한얼을 기리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해주시기를 바란다"라고만 기록됐다. 친일 행적과 관련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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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서 고통당하고 소외감을 느낄 때마다 그는 무작정 걷거나 독서의 세계로 깊이 침잠했다.

<한 켤레의 구두>반 고흐는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낡은 구두 그림들을 보면 가난한 방랑자가 짊어진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캔버스에 유채, 41.5×37.5센티미터, 1887, 개인 소장.

북유럽의 습기와 혹한 속에서 수십 킬로미터의 황무지를 몇 시간씩 걷는 것이 몸에 밴 빈센트에게 걷기는 훗날에도 현실을 잊게 하는 동시에 살게 하는 수행법이 되었다. 언제나 부랑아 같은 남루한 옷차림과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로 걷고 또 걷는 고행을 거듭하는 일이 평생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했던 빈센트는 남프랑스에 와서도 밤마다 산책길에 나섰다. 하늘을 응시하면서 멀리 있는 행성들과 보이지 않는 세상에 관한 상상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지상에서는 창조할 수 없을 것 같은 천국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졸라는 빈센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졸라의 추종자인 모파상, 알퐁스 도데, 장 리슈팽, 조리 카를 위스망스,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의작품들도 읽었다. 특히 도데의 쾌활한 타르타랭같은 희극 작품은 자신과 테오와 여동생 빌레미나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어쨌거나 빈센트를 만든 것의 8할이 독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맹렬한 탐서가였다. 상당히 폭넓은 독서를 했던 그는 누구와도 폭넓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논쟁과 토론에 능했던 것도 바로 오랜 기간 습득해 온 독서력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글솜씨 또한 탁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읽기는 쓰기의 80퍼센트라고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빈센트의 사회사상, 즉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19세기의 수많은 예술가, 저술가, 철학자 들이 공유한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낭만주의 저술가인 토머스 칼라일, 디킨스, 미슐레가 자본주의 이전의 문화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19세기 정치, 경제, 사회질서를 비판했다는 점에 빈센트는 크게 공감했고, 그것이 그의 사회사상을 형성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크리스마스 캐럴, 엘리엇의 『애덤 비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등을 참된 예술 작품으로 인정했다. 빈센트가 아를 시절에 그린 마담 지누의 초상화에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크리스마스 캐럴이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빈센트가 재정적인 불안감으로 고통을 받는 와중에도 결코 지출을 아낄 수 없었던 부분이 책이었다. 단행본뿐만 아니라 잡지도 구독했다.

<프랑스 소설과 장미가 있는 정물 >
탁자 위의 책들은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공쿠르 형제 등 당대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반 고흐는 당대의 삶을 담은 소설은 성서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캔버스에 유채, 93×73센티미터, 1887, 개인.

<낮잠 >
잘 감동할 줄 알았던 반 고흐에게는 좋아하는 화가들이 많았다. 그는 특히 밀레에 깊이 매료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생레미 시절에 밀레의 소묘 작품인 <한낮>을유화로 모사한 것이다. 말년의 반 고흐는 발작에서 벗어날 때면 이렇듯 자신의 예술 행보가 시작된 밀레로 돌아갔다. 캔버스에 유채, 91×73센티미터, 1890, 오르세미술관, 파리.

빈센트는 특별히 매료된 화가는 밀레였다. 밀레의 작품은 노동의 신성함을 찬미한 당시의 소박한 농촌 그림과는 달리 과격한 정치적 주장을 내포한 것처럼 보였다.
주지하듯 빈센트가 본 그림은 원화가 아니라 흑백의 동판화였기에 그런 느낌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색과 빛이 더해진 원화는 성스러운 제단화 같기는 하지만 정치적 선전성은 약하다. 빈센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가장 처음으로 몰입한 그림 중 하나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이미지였다.

반에이크와 한스 멤링 같은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브뤼셀까지 갔고,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안트베르펜까지 가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걸작이라고 판단한 작품 한 점을 보기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준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아를에 와서는 빈센트의 그림 그리는 방식이 달라졌는데,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의 영향이 컸다. 즉 눈앞에 있는 것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들라크루아적 감각에 따라 느낌을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더욱더 자유롭게 구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빈센트는 일찌감치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일본 그림을 보고 몸살을 앓았다. 당대 유럽에서는 ‘일본주의‘ 혹은 ‘일본 취향‘을 일컫는자포니슴이 예술가와 지식인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화가들 중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이 더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마치 희랍인 조르바가 모든 만물을 처음 보듯 감탄했던 것처럼. 그래서 "되도록 많이 감탄하려무나.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감탄하지를 않아"라고 테오에게 보낸 조언은 비단 테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하고자 하는 존재 모두에게, 아니 그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우키요에는 잡지나 전단지처럼 가볍게 취급되었고, 유럽으로 수출하는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구겨진 우키요에를 펼쳐 보던 화가겸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은 그 새로운 미감에 충격을 받았고, 친구인 마네와 드가 같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라. 한낱 포장재에불과하던 우키요에가 희귀하고 신비로운 보물로 격상되는 순간이 아닌가!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화로, 주로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우키요에라는 말은 ‘덧없는 세상‘을 뜻하는 ‘우키요浮世‘와 ‘그림‘을 뜻하는 ‘에絵‘가 결합한 것이다. 본래 전국시대 계속되는 내전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이승에서의 덧없는 삶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에도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자 대중의 일상과 쾌락적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그림을 가리키게 되었다.

자포니슴은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예술 전반에서 일본의 영향이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즉 유럽의 작가들이 일본 미술의 조형적 특질을 자기 작품 안에창조적으로 살리는 태도를 말한다. 1854년, 일본이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일본 미술의 영향이 서구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862년의 런던만국박람회와 1867년의 파리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도자기와 차 문화, 부채, 우키요에 판화 등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도 열렬해졌다.

빈센트는 일본 미술을 연구하면 너무나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철학을 만나게 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적인 감각과 묘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파리에 오기 전 빈센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은 암울한 작품을 그렸지만,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그의 그림은 차츰 밝아지고 화사해지고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원색의 색채, 대담한 형태와 같은 표현법은 우키요에를 벤치마킹한 덕분이었다.

빈센트가 우키요에에 이끌린 것은 그 독특한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향이 네덜란드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네덜란드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유지할 때도 유럽 국가중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한 나라다. 빈센트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온 도자기, 공예품, 우끼요에 등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런던에 살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은 1886년에 파리로 간 뒤 본격적으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멋진 것, 훌륭한 것, 이상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가장 완벽한 대상이었다. 그러니 실제 일본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일본은 그저 빈센트가 추구하고 싶은 가장먼 곳이자 미지의 세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일본과 우키요에에 대한 그의 사랑도 짧은 연애처럼 막을 내렸다.

우키요에 전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빈센트였다. 그는 우타가와 히로시게 같은 유명 판화가의 우키요에를 모사했다. 파격적인 각도의 히로시게의 다리 그림은 빈센트의 아스니에르 철교 그림에서 재현되었다. 빈센트 역시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우키요에의 가장 혁신적인 방법론을 인용하고 실험했다. 즉 원색을 사용한 단순하고 선명한 색조와 윤곽선과 평면적인 구성 기법은 그의 그림을 명쾌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귀에 붕대를 두른 자화상>
아를시절,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난 뒤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을 보면 배경에 사토 토라키요의 우키요에인 <게이샤가 있는 풍경>이 걸려 있다. 일본에 대한반 고흐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캔버스에 유채, 49×60센티미터, 1888, 코톨드미술관, 런던.

그가 찬양하던 일본으로 착각한 아를, 그곳에서 고갱과의 동거가 파국으로 끝나고 공동체의 이상이 결렬되자 비센트는 더 이상 일본도 우키요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다리 >
런던만국박람회와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 미술과 문화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유럽의 예술가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반 고흐 역시 우키요에의독특한 구도와 색채와 질감에 매료되어 직접 모사하기까지 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54×73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화가들은 우키요에 덕분에 원근법이라는 서양미술의 오랜 규범을 파괴하게 되었다. 특히 인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림을 그리는 데 너무나 원칙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키요에는 서양미술의 원칙, 즉 화면의 중심에 꼭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명암 구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생각, 그림의 중심이 되는 대상을 그릴 때 그 전체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 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서유럽에서 자포니슴의 바람은 1910~1920년 사이에 사라져 갔다. 이는 자포니슴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미처럼 그저 동양에 대한취향의 하나로 일시적인 유행에 그쳤음을 말해 준다. 자포니슴의 소멸은 그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하는데, 서구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를 대변하는 신비로운 타자이던일본이 이웃 나라를 무참히 짓밟는 나라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더 이상 일본은 신비한 유토피아로서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 여인>.
클로드 모네가 1876년에 열린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모델은 모네의 첫 번째 아내인 카미유다. 캔버스에 유채,
142.3×231.8센티미터, 1876, 순수미술박물관, 보스턴.

화가 공동체라는 이상을 찾아서빈센트는 1886년에 남프랑스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가 아를에 도착한 것은 1888년 2월 20일로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이후 그는 1889년 5월 3일까지 1년 하고도 두 달 반 동안 아를에서 살면서 200점 이상의 유화와 100점 이상의 이상의 수채와 소묘를 그렸다.

329년,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아를은 로마제국 제3의 도시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735년부터 4년간 아랍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855년부터 사실상 독립 왕국인 아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9세기에 바이킹과 사라센 해적의 침공을 받으며 쇠퇴했고, 이로써 프로방스의 중심지는 마르세유로 옮겨졌다.

아를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에 위치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적 도시다. 지리적으로는 론강 하류를 끼고 있으며, 삼각주를 형성하는 카마르그 평원에 위치해 있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아렐라테Arelate라고 이름 지었는데, ‘늪지 속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빈센트라는 유명 화가가 아를을 이상향으로 낙점한 것처럼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남프랑스의 여러 도시로 향하는 낭만적인 여행을 상상하고는 한다. 이렇듯 욕망은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해 매개되기 마련이다.

‘갈리아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고대 로마의 번성한 도시였던 아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를 도와 마르세유를 침략한 뒤 점령한 기원전 49년부터 발전하기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시적이거나 동양적이거나 환상적인 파라다이스를 추구하는 화가들의 꿈이 공동체의 형식으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빈센트는 화가 공동체의 꿈을 실현하고자 베르나르, 로트레크 등 여러 동료 화가들에게 아를로 올 것을 제안했다. 화가의 천국을 프로방스에 세우겠다는 꿈을 함께 실현해 보지 않겠느냐고 호소했다.

당대 화가들 사이에서는 파리를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들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그림 같은 장소를 여행했다. 클로드 모네는 앙티브로, 베르나르와 폴 시냐크와 카미유 피사로는 노르망디나 브르타뉴로 갔다. 고갱도 브르타뉴, 파나마,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타히티로 떠났다. 게다가 프로방스에는 빈센트가 좋아하는 화가인 몽티셀리와 세잔이 머물고 있었다.

빈센트가 파리를 떠날 즈음 사실 그는 알코올에 빠져 있었다. 거의 알코올중독자 수준이었으며, 매춘의 쾌락과 매독의 위험에도 빠져 있었다. 테오도 이전처럼 형을말리기는커녕 전위적인 유행을 퍼트리는 트렌드 세터로서의 새 역할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번성했던 아를에는 지금도 그 유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1888년 2월, 화가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품고 밝은 빛과 아름다운 자연이있는 이곳에 도착한 반 고흐는 고대 원형 극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을 빌렸다. 3개월 뒤에는 라마르틴광장에 있는 작고 노란 집을 빌려 이사했다. 그리고 동료 화가들에게 그 꿈의 실현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빈센트는 자신이 아를로 떠난 이유를 보다 드높은 예술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늘 추구해 오던 화가 공동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북쪽 출신의 사람답게 빛과 태양을 찾아서, 파리의 추위와 소음을 피하기 위해, 파리 사람들의 냉정함과 동료 화가들의 끝없는 경쟁과 당파성이 싫어서, 신경쇠약과우울증 때문에 휴식이 필요해서, 돈 걱정을 덜해도 되는 건강한 시골 생활을 위해, 그림 구매자가 원하는 주제를 찾기 위한 사업적 모험을 위해, 새로운 예술적 탐색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빈센트의 전략적인 행동과 테오의 연줄로도 단 한 작품도 판매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빈센트를 남프랑스로 향하게 했다.

아를과 일본의 유사성은 전혀 없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사실 아를은 해안 지역도 아니고 특별히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사람들은 아를을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아주 잠시 동안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남프랑스에서 ‘완벽한 일본‘을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바로 눈앞에 일본이 있다고, 그저 자기 앞에 있는 것을 그리기만 하면 된다고 과장했다.

몽마주르수도원에서 내려다본 아를 전경반 고흐는 아를 인근에 있는 몽마주르수도원의 유적지를 적어도 50번은 다녀왔다고 했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한때 성지순례지로 유명했지만, 반 고흐 당시에는 많이 쇠락해 있었다. 화가는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순례하듯이 그곳을 자주 찾았다. 그는 수도원이 자리한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를 전경에 깊이 심취했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먼저 아를은 남쪽 도시들 중 네덜란드와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했던 것. 아를 주변의 평원은 개척지여서 네덜란드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지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상인이나 포주와 싸웠고, 물감과 캔버스를 대 주던 장사꾼과도 싸웠으며, 파리로 보내는 소포와 운임 때문에 우체국 직원과도 싸웠다. 예민한 위장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당 주인과 싸웠고, 여지없이 그를 조롱하는 10대 아이들과도 싸웠다. 호텔 주인과는 난방과 관리비 문제, 불량한 화장실 상태, 포도주 맛 같은 사소한 이유로 싸움질을 해 댔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그들을 따분한 사람, 놈팽이, 건달, 비열한 욕심쟁이라고비난과 불평을 쏟아 냈다.

빈센트는 자포니슴에 홀딱 빠져 있던 베르나르에게 일본 판화에서 볼 수 있는 이상적인 풍경을 아를에서 볼 수 있다면서 함께 살자고 부추겼다. 베르나르가 거절하자빈센트는 로트레크를 비롯해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료 화가들에게까지 편지를 써 가며 화가 공동체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갱만이 가능성을 비추는 답변을 해 왔다.

그는 아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마르세유 같은 프로방스의 다른 지역으로 떠날까 하고 생각했다.

<아를의 정원>
아를의 화사한 봄은 반 고흐를 진정으로 매료시켰다. 파리 시절부터 시도한 그의 인상주의적 색채는 아를에 와서 완연히 무르익었다. 캔버스에 유채, 91×72센티미터, 1888, 덴하흐미술관, 덴하흐.

빈센트가 아를에 가장 초대하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 고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동생 테오였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구필화랑을 그만두고 자기와 함께아를에서 살자고 했다. 그럴 수 없다면 최소 1년 동안만이라도 휴가를 내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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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쉬르우아즈의 들판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죽기 전 빈센트는 불안한 하늘 아래 펼쳐진 거대한 밑밭을 보면서 명료한 정신으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시골 생활을 통해 건강과 원기도 되찾았다고 전했다.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그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누구보다도 분투한 건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여기 돌아와서 다시 일을 시작했어. 그러나 붓이 손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아. 그래도 자신이 바라는 바를 잘 알기 때문에 다시 세 점의 큰 캔버스를 그렸어. 불안한하늘 아래 펼쳐진 거대한 밀밭이야. 나는 명료한 정신으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어. 곧 볼 수 있을 거야.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고립된 소년빈센트는 반 고흐 가문에서 가장 불쾌한 아이로 낙인찍혔다. 태생부터 남달랐기 때문일까? 형의 대체아로 태어난 것 말이다.

반 고흐의 아버지가 몸담았던 교회반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신교 교회 목사였다. 교회 묘지에는 반 고흐보다 먼저 태어나 죽은 형의 묘비가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반고흐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를 동일시하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면모를 가진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상냥하고 부드럽게 다가가는 면모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반 고흐는 아버지의 그런 두 얼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때부터 정확히 만 1년 뒤 빈센트가 태어났다. 죽은 형의 생일과 같은 날에 태어난 아이는 이름마저 형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물론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당시 네덜란드에서 먼저 죽은 아이의 이름을 이어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죽은 형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빈센트의 삶을 더욱 미스터리하게 했을까?

그런 어머니는 마치 장남의 죽음이 빈센트의 탓인 듯 그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먼저 죽은 형의 이름을 빈센트에게 그대로 붙임으로써 평생을 형에 대한 애도와 죄의식 속에서 살게 한 것이다.

정작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우울하고 고집스럽고 어딘지 심통이 나 있는 빈센트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신의 은총이 아들에게는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과부가 된 사촌 누이에게 청혼하고, 창녀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하고, 학교를 중퇴하거나 퇴학당하고, 목사의 길도 실패하고, 돈도 못벌고 제멋대로 물의만 일으키는 아들을 아버지로서는 비난하고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는 빈센트를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치부했다.

성서 앞에 놓인 삶의 기쁨
아버지 테오도뤼스는 발음이 나쁘고, 단어를 까먹거나 혼동하는 등 좋은 설교자는 못 되었다. 가족조차 그가 대중적인 연설자로는 재능이 없음을 인정했다. 아버지는목회 활동이 끝나면 가족들과 거리를 둔 채 다락방 서재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파이프 담배와 시가를 즐겨 피웠고, 술은 조금씩 즐겼다. 병치레가 잦았던그는 아플 때면 더욱 침울하게 홀로 침잠했다.

아버지의 신앙과 신념으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장 2절에는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라고 적혀 있다. 이는 빈센트를 향한 아버지의 일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기독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졸라와 자연주의에 심취했다고 혐오했다. 성서 앞에 졸라의 책을 그린 것은 아버지의 완전무결하고 격식을 차린 삶과 신앙에 대한 빈센트의 도전이었다.

본명이 빈센트와 똑같은 큰아버지 센트는 빈센트의 인생에서 테오 다음으로 특별한 의미를 차지한다. 1840년대 말에 센트는 ‘반 고흐 국제 미술상‘이라는 이름으로덴하흐에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의 이름은 네덜란드와 전 유럽에 걸쳐 미술품 거래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

<성서가 있는 정물화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하는 불 꺼진 촛대와 구약의 이사야 편이 펼쳐져 있는 성서 앞에는 빈센트가 좋아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 있다. 캔버스에 유채,
78.5×65.7센티미터, 1885,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소장.

그는 런던의 분위기에 대해 "사람들은 무정하고, 무미건조하며, 섬세하기보다 무감각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목사가 되기에 당시로서는 빈센트의 나이가 너무 많은 데다, 수학과 고전은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엄청난 수업료도 필요했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15개월 동안 기를 쓰고 공부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전도사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와 존스 목사의 소개로 플랑드르 전도사 양성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수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그는 런던의 분위기에 대해 "사람들은 무정하고, 무미건조하며, 섬세하기보다 무감각했다"라고 회상했다.

보리나주의 옛 탄광의 모습화상 일을 그만둔 반 고흐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국경 지대에 있는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떠났다. 매우 위험하고 열악하기로악명 높았던 이곳에서 그는 평신도 전도사로서 광부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위해 초인적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교단 측에서는 설교 능력이 수준 이하라는 이유로그를 해임하고 말았다.

빈센트가 가난한 자의 편에 서게 된 데는 한 설교의 영향이 컸다. 즉 산업혁명은 큰아버지인 센트 같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빈곤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가 진정한 실존자들이자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끈기 있고 의연하고 학대에 가까운 노동을 참아 낸다는 사실과,
전혀 희망이 없는데도 신앙을 고수한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탄광주들은 광부의 처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광부들에게도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빈센트의 반감은 강해져만 갔고, 가난한 광부들과 완전히 일체화되고자 했다.

이때부터 빈센트는 농민화가의 수호성인 같은 밀레의 작품들을 자신만의 상상력의 신전에 모셨다.

목회자가 꿈이었던 반 고흐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반 고흐를 처음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남다른 종교적 열정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가는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사진은 보리나주 시절에 실직한 뒤 떠돌던 무렵, 퀴에메에서 잠시 머물렀던 방이다.

종교적 믿음이 미술에 대한 믿음과 뒤섞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위대한 화가들의 걸작에서 신을 발견했고, 그림 그리기를 숭고한 선교 행위라고 믿게 되었다. 둘다 모두 화해와 구원의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였다.
2026.07.11 오후 21시 22분21%목사를 등에 업은 화가빈센트는 보리나주에서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의 초기 습작은 몇 점 안 되지만, 그야말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보아도 손색없다.

보리나주에서 실직하고 무일푼이 된 그는 브뤼셀까지 걸어가 과거에 자기를 도와 보리나주로 보내 준 목사를 만나 복직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보리나주의 실태를 그린 그림을 목사에게 보여 주었다. 세상에서 최초로 빈센트의 그림을 보게 된 목사는 그에게 종교보다 예술이 더 중요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당장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그 순간 빈센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물일곱 살, 당시로서는 그림을 시작하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림 그리기는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우정에 굶주려 있는 그에게 조용히 타인을 관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과 손을 바쁘게 움직여 몰두할수 있는 일이며, 자기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과 다시 연결해 주는 매개체였다.

1879년 7월, 빈센트는 결국 전도사에서 해임되었다.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에는 파면의 이유가 ‘수준 이하의 설교‘라고만 적혀 있지만, 진짜 이유는 타협과 굴복 없는빈센트의 저항적인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리의 이방인1885년 11월 말, 빈센트는 조국 네덜란드를 영원히 떠났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으로 간 빈센트는 왕립순수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지만 아카데믹한 교육에 회의를느끼고 얼마 있지 않아 학업을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이듬해 2월에 파리로 갔다.

어머니를 쏙 빼닮아 의지가 강한 누이동생 아나는 오빠가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고 비난했다. 빈센트는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상처 입은 마음으로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얼마 되지 않는 유산에 대한 권리도 포기했다.

파리 시절, 테오와 함께 살았던 레픽가1886년, 서른세 살의 반 고흐는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스무 살 무렵 구필화랑 본점에서 일할 때도 살았던 도시다. 그는 테오와 함께 파리 외곽 몽마르트르에 있는 아파트를 구해 2년간 살았다. 탁 트인 하늘과 파리 시내를 내다볼 수 있었던 그곳은 사진에서 오르막길이 있는 오른쪽 구석에 있다.

당시 동료들은 빈센트가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파리인의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북쪽 사람이라며 은근히 조소했다. 그리고 ‘돌았지만 해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판단했고, 애써 괴롭힐 정도로 흥미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무시해 버렸다.

빈센트는 파리에서 2년 가까이 동생에게 의탁했다. 테오는 형 때문에 힘들어했다. 누이에게 "형은 지저분하고, 늘 불만으로 가득하고, 사람을 업신여기고, 심지어 자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야"라고 썼다.

인상파의 색채를 받아들이던 낯선 파리 생활에서 고달픈 이방인 작가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회의에 직면해야만 했던 상황도 자화상에 몰입하게 했을지도모른다.

파리 시절 빈센트는 "모델이 없어서 나 자신이라도 그리려고 꽤 괜찮은 거울을 하나 샀지", "다른 모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자화상을 두 점 그리고 있다"라고 테오에게 넋두리를 한 적이 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파리에 온 반 고흐는 처음에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을 드나들었다. 아카데미에 비해 엄격하지 않고 모델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낀 반 고흐는 약 3개월 만에 화실 출입을 그만두었다. 이 그림은 화실에서 만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카페에 앉아 있는 반 고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판지에 파스텔, 45×54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그의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묘사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색과 성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고뇌와 연민, 고립과 소외, 충동과 공격성, 외로움과 고독 등을 극복하고 살아남고자 한 존재의 필사적인 투쟁의 역사를 보여 준다.

<꽃핀 밤나무>1874년, 클로드 모네를 필두로 한 젊은 예술가들이 파리에서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를 개최한 이래 인상주의는 당대 미술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반 고흐 역시파리에서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기법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전의 어둡고 짙은 색조가 밝고 화사한 색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유채, 46.5×56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빈센트는 파리 시절과,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말기에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렸다. 화가들은 고단하고 암울한 시기에 가장 많은 자화상을 그린다. 빈센트역시 약 2년간의 파리 시절에 스물일곱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나체로 서는 것은 더더욱 꺼렸다. 그래서 빈센트가 택한 방법은 창녀를 구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아닌 타인을 그리면서 사람과 접촉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어 주지도, 관심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

1860년대에 등장한 인상주의 미술은 빈센트에게 생소하지만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한 양식이었다. 그러나 막 인상주의 그림과 그 화가들을 접하게 된 빈센트는 그들이 서로 비난하고 반목하는 데 여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씁쓸함을 느꼈다.

폴 세잔은 빈센트가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보고 미치광이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그렇게 자극받은 빈센트의 그림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즉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파리코뮌의 멤버이던 탕기는 새로운 미술이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상주의 화가들은 지배 체제 이데올로기에서 배제된 민중화가였다. 그러기에 그들을 어떻게든 도와야 했다. 특히 자신과 신념을 공유한 세잔을 지지했다.

탕기화방이 있던 몽마르트르 클로젤가파리 시절 반 고흐는 쥘리앵 탕기가 운영하는 화방을 자주 드나들며 미술 재료를 샀다. 파리코뮌에 참여했고 사회주의를 지향한 탕기는 가난한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해서 팔아 주는가 하면, 재료비 대신 그림을 받거나 외상으로 내어 주기도 했다. 당시 파리의 화가들은 이런 그를 ‘탕기 영감‘이라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랐다.

<탕기 영감의 초상 >반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을 세 점 남겼는데, 마지막에 그린 이 그림이 가장 대표적이다. 부처처럼 묘사된 인물, 우키요에가 잔뜩 걸려 있는 배경, 대담하고 강렬한선과 색채, 화가 특유의 짧은 붓 터치 등이 어우러져 초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캔버스에 유채, 75×92센티미터, 1887, 로댕미술관, 파리.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일본 판화는 빈센트가 얼마나 자포니슴*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여 준다. 우키요에에 매혹되었던 빈센트는 <탕기 영감의 초상>에서 평면적이고 대담한 선과 원색의 색채 표현 등으로 대담하게 인물을 묘사했고, 모델의 영혼을 그리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었다.

빈센트는 남프랑스가 따뜻한 태양과 다채로운 색채, 값싼 생활비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다른 화가들을 초청하여 공동체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빈센트가 남프랑스로 가겠다고 했을 때, 테오는 내심 동의하며 이사 비용을 대 주면서 결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빈센트는 행선지를 고대로마제국의 잔해가 남아 있는 아를로 정했다.

파리는 자유로웠지만 사람들은 냉담했고 빈센트는 고독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치열한 생존경쟁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나름의예술을 추구할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떠올린 곳은 남프랑스였다.

빈센트의 여성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프랑스 사학자 쥘 미슐레가 쓴 『사랑』과 『여성이다.
미슐레는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문필가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만큼 유럽의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자신이 사랑하면 상대방도 동시에 사랑에 빠져 신비롭게 결합되는 자연 발생적인 현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런던의 하숙집 딸, 사촌 누이, 창녀, 카페 여주인에게 무모하게 구애했던 것도 자기가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방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상복 입은 여인>반 고흐의 여성관은 프랑스 사학자 쥘 미슐레가 쓴 『사랑』과 『여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슐레는 여성이란 본질적으로 섬세하고 사랑을 위해 신이 고안한 존재이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성은 동정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반 고흐는 특히 외롭고 무력하고 슬프고 천대받는 여성에게 마음이 깊이 움직였다. 캔버스에 유채, 33×45.5센티미터, 1885,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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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일곱 살에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삽화와 소묘를 그리는 것은 그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퇴 정도의 학력을 가진 빈센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가문의 사업이던 화랑에서 그림 파는 일을 하기도 했고, 서점에서도 일했으며,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도 했고, 벨기에 탄광촌의 전도사로도 일했다.

그는 파리에서 엄청난 소외와 고립을 맛보았고 금세 염증을 느꼈다. 그리하여 평소에 추구해 오던 이상향을 재빨리 불러냈고, 그곳이 바로 남프랑스의 아를이었다.

인생 자체가 노마드였던 그는 37년의 삶 속에서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의 스무 개가 넘는 도시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이다.

열두 살 때 부모로부터 내쳐져 원하지 않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던 사건은 평생토록 지속될 빈센트의 정신적 방황에 단초를 제공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노마드적 삶은 그의 평생 동안 함께한 실존적 조건이 되었다. 따라서 스스로 타자로 소외되었던 그가 또 다른 타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다 객사한 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중 마지막 3년 동안 300여 점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 300여 점은 빈센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하이라이트다. 걸작의 탄생으로 점철된 마지막 3년은 수만 볼트의 빛이 한꺼번에 켜졌다 사라져 버린 그런 순간이었다.

나의 여정도 바로 이 마지막 3년, 그러니까 아를, 생레미,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집중되었다.

그중 마지막 3년 동안 300여 점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 300여 점은 빈센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하이라이트다. 걸작의 탄생으로 점철된 마지막 3년은 수만 볼트의 빛이 한꺼번에 켜졌다 사라져 버린 그런 순간이었다.

아를은 네덜란드인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친숙한 동양의 일본을 투사한 장소였다. 이 시절의 빈센트에게 좋은 것, 멋진 곳, 이상적인 것, 훌륭한 것은 모두 일본에서 온 것이었다.

아를의 거리<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까마귀가 나는 밀밭>, <꽃핀 아몬드나무> 등 오늘날의 반 고흐를 있게 한 대표 걸작들은 그가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장 폭발적으로 분출한 생의 마지막 3년에 탄생한 것이다. 그 마지막 여정의 시작점이 남프랑스의 아를이었다. 사진은 아를 시절 반 고흐가 즐겨 찾던 카페로, 코발트색의 하늘과노란색의 카페가 조화를 이룬 그의 또 다른 걸작인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빈센트는 병세가 완화되어 자신을 치료해 줄 정신과 의사가 있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보낸 1년 3개월 남짓 동안 그토록 꿈꾸던 화가 공동체는 폴 고갱과의 불화로 결렬되고,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아를 시절은 끝이 났다. 그 후 근처작은 도시인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 입원하여 또 약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일본의 선승들에게도 매료되었던 빈센트는 그들처럼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꿈에 부풀었다. 물론 그는 일본에 가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건조하고바람이 강한 아를의 기후는 일본의 습한 기후와 전혀 달랐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자크 라캉의 아포리즘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내 삶을 관통하는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단박에 빈센트를 떠올렸다.

<꽃핀 복숭아나무>1888년 2월, 반 고흐는 그가 존경한 선배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랬듯이 화가 공동체라는 새로운 꿈을 안고 시끄러운 파리를 떠나 최고의 밝음을 자랑하는 아를로 왔다. 이른 봄, 사방으로 꽃이 만개한 아를의 풍부한 색채에 완전히 매료된 그는 "순간순간 땅이 진동하는 것을 바라볼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라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 화사한 풍경은 마치 그의 유토피아적 꿈에 대한 약속처럼 보였을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60.2×80.9센티미터, 1888,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사실 그는 일생 동안 기성세대의 보수적 이념과 구태의연한 체제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으로 경계하며 저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빈센트와 만나 수년간 동거했다. 그 동거는 정주가 아닌 탈주의 동거였다.

지긋지긋했으나 지극히 투명한 지복의 시간이었다. 빈센트와 떠난 정신적인 여행, 그러니까 빈센트로 시작해 나에게 도달한 이 영적인 여행은 감히 감동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생레미의 광장에서평생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하고 낯선 곳을 떠돌았던 반 고흐의 여정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고 한 자크 라캉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상의 망명자인 양 그의삶은 늘 고달프고 애처러웠지만, 그 탈주의 드라마는 영원으로 이어진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켰다.

"화가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은 조금이라도 표현하고자 할 때 자연과 나는 조화되고 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빈센트는 광인인가?
빈센트에 대한 세간의 가장 큰 오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광기에 치달아 죽어 버렸다는 것, 그러니 너무나 불행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가 불행한 인간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불행한 화가는 아니었다고.

죽기 1년 전, 갑작스럽게 습작 시절에나 하던 밀레 모사로 돌아간 것 역시 자기 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이를 두고 ‘신성한 불만족‘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기 작품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 역시 신경증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빈센트는 단연코 행복했던 인간이다. 우울하기만 했다면 그는 그렇게 많은 작품을 그려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생명력을 오롯이 활기 있게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갱과 동료 화가들도 빈센트 안에 사랑스러운 면모와 참을 수 없는 면모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갱은 빈센트의 성격이 얼마나 급작스럽고 격렬하게 바뀌었는지를 회상했다. 지나치게 떠들썩했다가 불길할 만큼 조용한 태도로 돌아왔다가는 다시 이전처럼 바뀌었다는 것이다.

빈센트에 관한 또 하나의 오해는 그가 세속적인 성공과 무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성공이라는 불가능한 희망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감정적 욕구와 예술적 야심이 결합되어 부지런히 광적으로 작업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화가로 산 10년 동안 불가능해 보이는 엄청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예술가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얼마간 이런 측면이 존재한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광인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초월적 상상력을 지닌 자로 간주되었다.

테오는 자주 형이 이중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두 명의 인물이 한 존재 안에 있는 것 같다고. 하나는 놀랍도록 재능이 많고 섬세하고 훌륭하며, 다른하나는 이기적이고 무정하다는 것이다.

존 피터 러셀이 그린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는 늘 부랑자 같은 모습이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비뚤어진 입, 무섭도록 반짝이는 가느다란 눈,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모습등 누구도 그를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신 파리 시절에 알게 된 존 피터 러셀이 그린 이 초상화만큼은 좋아해서 테오에게도 잘 관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러셀은 반 고흐의 옆모습을 살짝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듯한모습으로 그렸는데, 반 고흐가 이 초상화를 좋아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 타인에게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는 말도 된다.
캔버스에 유채, 45.6×60.1센티미터, 1886,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부모는 빈센트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유쾌하고 명랑하며 농담도 잘 던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뚱하고 신경질적이며 성질을 부리고 쉽사리 우울해한다며 그런 기질을 문제라고 여겼다.

절친인 에밀 베르나르 에 따르면 빈센트는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발전시키면서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토론은 지루하고 장황할 때가많았다. 이견을 참지 못했고, 이로 인해 성질을 부리고 예민해졌다.

정상은 아니지만 해가 되지는 않는오해를 받을 만한 여러 속성을 겸비한 빈센트는 예측 불허의 사람이었다. 한 내면에 두 개의 상반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반 고흐의 방아를시절의 반 고흐 방을 재현한 것이다. 반 고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감정과 드높은 예술적 열망으로 인해 늘 어딘지 불안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듯해보였다. 오직 자연과 그림만이 그의 불안을 잠재워 주는 차단막이 되어 주었다.

빈센트의 인정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일종의 억강부약抑强扶弱으로, 다시 말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주는 스타일이다.

스물여섯 살 때 그는 "나는 정열의 인간이고, 다소 무분별하고 지나친 행동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종종 후회하기도 해. 더욱 참고 기다리는 편이 좋았을 때도 바로 말을 뱉거나 행동하는 경우도 자주 있어.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라고 했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지만 사람들은 그의 의도를 왜곡하고 힘들어했다. 그로 인해 그에게 남은 것은 뼈저린 실망과 상처뿐이었다.

타자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동일시의 투사라고 부른다. 상대방과 나, 나와 타자가 하나라는 생각은 그만큼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다는것이다.

<울고 있는 여인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남달랐던 반 고흐는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는 예수가 그랬듯이 노동자, 창녀, 빈민, 정신병자 등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목회자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고 그림으로 세상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기로 했다. 종이에 분필, 31.4×50.2센티미터, 1883, 시카고미술관, 시카고.

인내와 성실의 다른 이름, 천재그렇지만 유일하게 빈센트를 아프게 하지 않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그림이었다. 그림만이 그를 덜 외롭게 했다. 그림에 몰입하는 것만이 그의 자존감을 세워 주었다.

부르주아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빈센트는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촌에서는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한 가운데 그들과 일체되고자 했다.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도 고통에 빠진 환자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했고 잘 동화했다. 이렇듯 그는 정신병자, 창녀, 빈자, 노동자, 농민, 탄광 인부, 어린아이 등 언제나 사회적 약자와 함께 생활하고자 했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환경에서 보람을 느꼈다. 그는 소외된 자들과 함께할 때 고독감도 덜 느꼈다.

반 고흐가 쓰던 화구반 고흐는 정규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제도권의 보수적이고 틀에 짜인 교육 방식은 그와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독학으로그림을 익힌 그는 약 10년이라는 화가로서의 짧은 경력이 무색할 만큼 특유의 거침없는 스타일로 엄청난 양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빈센트 역시 테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재능은 오랜 인내의 선물이고, 독창성은 강한 의지와 예리한 관찰을 통한 노력에 의해 얻어진다"라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폴 발레리는 "천재! 오긴 인내여"라고 했고, 샤를 보들레르 역시 "영감은 일상적인 훈련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고 했다.

급하게 그린 그림이 잇달아 나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해 둔 덕분이다.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이 급하게 본 거라고 말해 주어라.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흔히 천재성을 ‘일정한 훈련 없이도 생산적인 결과를 산출해 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빈센트에게 이 말은 일부만 옳다.

빈센트가 이런 천재적인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정규 미술 교육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로 출발하기에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일곱 살에 화가가 되어 서른일곱 살에 생을 마감한 빈센트는 10년 동안 1000점의 작품을, 그중에서도 마지막 3년 동안은 300점을 그렸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것도 빨리 그릴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 짧은 시간에 작품성이 탁월한 수많은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일까?

반 고흐의 어머니반 고흐의 예술적 재능과 지칠 줄 모르는 생산성에는 왕실 제본사의 딸이자 아마추어 삽화가였던 어머니 아나 카르벤튀스의 영향이 컸다. 어린 빈센트는 어머니에게서 미술을 비롯하여 책 읽기와 음악 등을 배웠다. 또한 어머니는 늘 아이들에게 한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려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캔버스에 유채, 32.5×40.5센티미터, 1888, 노턴사이먼미술관, 패서디나.

이런 막대한 소비에 대해 그는 "많이 쓸수록 빨리 성공하고 많이 발전할 겁니다"라고 장담했다. 더군다나 유화를 시작하자 "번개처럼 빨리 그릴 것이며, 내 붓에 더많은 활력을 불어넣겠다"라고 다짐했다. 건강한 남자답게 물감을 캔버스에 칠하는 유일한 방식은 주저 없이 칠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매일을 분투하다빈센트에게 ‘예술가‘라는 의미는? 그것은 바로 ‘나는 탐구한다, 나는 분투한다, 나는 열중한다‘는 뜻이다. 빈센트는 자신이 목표하는 바가 생기면 몰입의 강도가 막강한 존재였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성실했으며,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한 남자, 그의 지나친 노력과 헌신은 과도한 운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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