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 그림은 세상에 발표되지 않았죠. 완성하고 얼마 뒤 화백은 병으로 쓰러졌고, 병으로 세상을 뜬 뒤에는 고베의 집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었으니까요. 듣건대 그건 화백 자신의 뜻이기도 했다는군요. 그리고 그 후에는 후지누마 씨가 그 저택에 가져가버렸고."

"그 그림…… 환상의 유작 ‘환영군상’……."

그렇게 중얼거리고 미타무라는 날렵한 턱 끝을 쓰다듬었다.

"교수님 부친께서는 보셨다는 말씀이죠."

"뒤에서 수군거리기 뭣하지만,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사람은 자의식과 열등감의 화신이에요.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의식과 열등감의 화신)
모리는 미타무라의 과격한 표현에 멈칫했지만 바로 수긍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12년 전 겨울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모리와 미타무라는 물론 오늘 저택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다른 두 사람, 오이시 겐조와 후루카와 쓰네히토도 잘 알고 있었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운전대를 잘못 조작해 반대 차선에서 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차는 엉망으로 망가지고 불탔다. 동승한 친구 중 한 명은 즉사했고 기이치는 얼굴과 양쪽 팔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상태가 너무 끔찍해서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이것은 미타무라의 말이다.

그리하여 기이치가 그런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그 가면이었다.
(하얗고 표정 없는 얼굴……)
모리는 지금도 그 ‘얼굴’을 보면 섬뜩해서 소름이 돋았다.

퇴원한 후에 기이치는 그때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오던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아버지 잇세이의 유산까지 합쳐서 마련한 막대한 자금의 일부를 들여 오카야마 현 북부의 이 산간 지역에 세상과 단절된 기묘한 저택을 지었다.

잇세이의 작품 대부분을 자기 손에 넣었다.
그들은 그것을 ‘후지누마 컬렉션’이라고 불렀다.

그런 가운데 1년에 딱 한 번, 잇세이의 기일인 9월 28일, 저택에 방문해서 수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허락된 네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 모리, 미타무라, 오이시, 후루카와였다.

"3년 전에 혼인 신고를 했다고 들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요. 유리에 씨는 어릴 적부터 줄곧 그 집에 갇혀 지낸 셈이잖아요. 아마 ‘결혼’의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일방적으로 아내라는 이름을 떠안았을 거예요."

"어디서 들은 이름이다 싶더니만."
"그런데 어째서 마사키 씨가 여기에?"
미타무라가 그렇게 물었을 때.
바깥 풍경이 한순간 허연 섬광에 감싸였다.
콰광!
이어서 하늘이 갈라질 듯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리에가 짤막한 비명을 질렀고, 현관 홀에 모인 일동은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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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책이다.
갑자기 어제 아침 7시
북플 마니아 시리즈에 새로운게 하나 생겼다,
“유럽 도시 기행” 이었다.
근데 이게 왜생겼을까
그런데 가지고 있는 책 표지 색이 아니었다.
보라 & 핑크..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었갔으나....
오후 들어.. 어 색이 왜이러지 의문이 생겼다.
아!!! 새 책이 나왔구나.
사야지... 하다가
야. 책꽂이에 꽂아놀데도, 쌓아놀데도 없잖아...
이북을 기다려야 되나.. 고민이 ㅠ

유시민, 유홍준...유씨들이 글을 잘 쓴단 말이야.
부러워!!

유시민 마니아 2등, 유홍준 마니아 1등
유시민도 언능 1등 만들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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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시마다 기요시라고 합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30대 후반쯤 되었을까. 거무스름한 얼굴에 홀쭉한 볼, 약간 퀭한 눈과 꺼칠한 윗입술. 보기에 따라서는 꽤 까다로운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인상이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저한테 그 사건은 생판 남의 일만은 아니거든요."
"무슨 뜻인지?"
"후루카와 쓰네히토. 아시죠?"
"후루카와? 물론."
"작년 그 사건 때 행방이 묘연해진 남자죠. 사실 그는 제 지인입니다."

후루카와 쓰네히토. 1년 전 폭풍우가 치던 밤, 방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춘 남자. 마사키 신고를 죽이고 토막 내서 지하실 소각로에서 태운 뒤 후지누마 잇세이의 그림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

"그러시겠죠. 후지누마 씨가 원래부터 손님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왜 이런 산속에서 그런 가면을 쓰고 사는지 그 사정도 대충은요."

"아아. 저기 보이는 저거 전화선이군요. 송전선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 수차로 발전을?"
"맞습니다."
"그렇군요. 멋집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수차관……."
불쑥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카무라 세이지. 아까도 남자는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나카무라 세이지를 안단 말인가)
묻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어, 들렸습니까?"

이 집 설계자가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사실을 알아낸 건 최근 일입니다. 엄청 놀랐죠. 정말 인연이라는 게 있나 싶었다니까요."
"인연이라면?"
"그건……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언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죠."

"변덕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요. 역시 작년 그 사건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그렇지, 나카무라 세이지가 지은 수차관이라는 건물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일단 발동이 걸리면 제동이 안 걸리는 성격이라, 그래서……."

물론 그가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와 자신의 관계를 넌지시 내비친 것이 제일 큰 이유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시마다 기요시, 이 남자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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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바람, 번개와 탁류 그리고 수차가 연주하는 괴이하고도 떠들썩한 음악에 감싸인 긴 하룻밤.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난 몇 가지 일은 그들이 품은 불안감을 들쑤시기에 충분했다.
탑에서 떨어진 한 여자. 사라진 그림 한 점.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자취를 감춘 한 남자.

폭풍우에 희롱당한 하룻밤의 끝.
그때가 되어서야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이상한 마지막 형태를 그들 앞에 드러냈다.

요란스레 몸을 떨며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숲의 나무들. 불어난 강의 거센 물살. 시커먼 모습으로 땅에 웅크린 저택, 그 옆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수레바퀴세대.......

그리고 그 폭풍우의 밤은 새벽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한곳에 엉긴 두툼한 구름들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사키다."
"그럴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몸을 일으키며 얼굴이 흰 남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 왼손 약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오른손으로 비틀면서 말했다.
"마사키 씨의 그 묘안석 반지 자국이겠죠."

애벌레 사체와도 닮은 잿빛 물체. 부자연스럽게 끊긴 밑동에는 응고된 피가 엉겨 있었다.
"절단면의 상태로 보아서 오래된 것 같지는 않군요. 잘린 지 두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남자 한 명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 뒤에 바짝 붙어 선 새하얀 네글리제 차림의 아리따운 소녀. 그 소녀를 보호하듯 두 남자가 양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네사람 약간 뒤에 선 두 남자. 남자들은 모두 잠옷 위에 뭔가를 걸치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쪽에 남녀 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남자가 다섯. 여자가 하나.

새어나온 강렬하고도 야릇한 냄새에 모두 코를 막았다. 동시에 구역질을 한 사람도 분명 있었으리라.
단백질이 타는 냄새였다. 그리고 일제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 냄새가 어디서 발생했을지 똑같은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마사키......."
휠체어를 탄 남자가 괴로운 듯이 신음했다.
......맙소사."

그리고 폭풍우가 걷힘과 동시에 그날 밤의 ‘사건‘은 하나의 ‘해결‘ 속에 묻혔다.

...아아."
바닥을 뒹구는 둥근 물체를 보며 남자는 망연자실하게 말을 흘려냈다.
"어떻게 이런 짓을."
그것은 사람의 잘린 머리였다.
새카맣게 불타서 흰 연기가 쉭쉭 올라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몽땅 탔고 눈, 코, 입 전부 문드러져서 형체를 잃었다.
한편 남자가 쥔 불쏘시개 끝에도 물체 하나가 마치 꼬치처럼 꽂혀 있었다.

‘탑‘에서 떨어진 불행한 여자. 도난당한 그림. 자취를 감춘 수상한 남자. 그 남자를 쫓다가 끝내 소각로에서 토막 시체로 불탄 채 발견된 한 남자.

먼저 굴러 나온 머리와 마찬가지로 불에 타서 새카맣고 열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비틀린 인간의 팔. 아무래도 왼팔 같았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손에 손가락 하나가 모자란다는 사실이다. 엄지손가락부터 헤아려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왼손 약손가락.
소각로 안에서는 인간의 시체 한 구가 불타고 있었다.
머리, 몸통, 양팔, 양다리. 여섯 토막으로 잘린 하나의 몸이.

남자는 소각로 속을 헤집었다.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이었지만 불쏘시개 자루를 쥔 그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불타는 물체 하나를 갈고리로 찍어서밖으로 끌어냈다. 그런데.

덜커덩, 덜컥......
그리고 아련한 물소리에 섞여 건물 서쪽에서 돌아가는 수차 소리. 평온한 아침이었다.
9월 들어서 대체로 좋은 날씨가 이어졌지만, 어젯밤 뉴스에서는 태풍 몇 호인지가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그 영향으로 28일 오후에는 주고쿠 지방에도 비가 내린다고 했으니, 지금의 이 평온은 폭풍 전야의 고요일까.

야윈 몸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가슴 복판에서 솟아올라 온몸으로 퍼지는, 말로 다할 수 없고 도망칠 길도 없는 전율.

산골짜기에 있는 이곳은 세상의 소란에 아랑곳없이 한적했다. 골짜기 물은 막힘없이 흘러갔고 세대의 수차는 쉴 새 없이 돌았다. 저택에는 나와 유리에, 구라모토 세사람이 조용히 살고 있었다. 통근하는 가정부 말고 찾아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죽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취를 감춘 한 명의 남자.. 유리에라는 이 소녀의 마음에도 그 사건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깊은상처라는 형태로.
요 1년 사이 나도 변했지만, 그녀 또한 상당히 변했다.

필시 현재의 나, 후지누마 기이치의 삶을, 아니 존재의 전부를 상징하는 물건.
가면.
그렇다, 내게는 얼굴이 없다. 나는 내 저주스러운 맨얼굴을 감추기 위해 일상생활을 할 때도 가면을 쓴다. 이 저택 주인의, 원래 있어야 할 ‘얼굴‘을 본뜬 하얀 가면.
살에 착 감기는 고무의 감촉. 살아있는 얼굴에 쓰는 차가운 데스마스크.......

그날로부터 벌써 1년이 지난 것이다. 피로 물든 폭풍우의 그 밤으로부터.
파이프담배를 피우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1년 전의 그날 밤으로 사고의 촉수를 가만히 뻗었다. 그날 일어난 여러 일들, 그리고 그 후.......

생각해보니 작년 오늘, 9월 28일도 지금과 비슷한 아침으로 시작되었다. 그때도 대형 태풍이 접근하고 있다고 뉴스에서 보도했다. 그리고 예보대로 몰아닥친 그거센 폭풍우.

"규슈의 오이타 현경에 있는 지인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니무라 님은 기묘한 남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런 남자가."
"작년에 일어난 사건에 흥미가 있나 봅니다. 어제 갑자기 니무라 님을 찾아와서 사건에 관해 이것저것 묻더니 이곳 위치를 확인하고 내일 가봐야겠다고 했답니다.
니무라 님도 폐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인의 동생이라서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며 미안해하셨습니다."

거한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어깨가 실팍하고 넓은 데다 키도 큰 남자다.
올백으로 넘긴 백발성성한 머리카락. 넓고 각진 이마. 쌀알처럼 조그만 눈에 핏기 없는 두툼한 입술.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이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름이 두드러진 창백한 얼굴에 웃음 한 번 짓는 법이 없었다. 귀에 잘 들어오는 바리톤 목소리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으스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 사람 이름은?"
"시마다라는 남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에게는 지금은 거의 사어가 되어버린 ‘집사‘라는 명칭이 잘 어울렸다. 주인을 모시면서 그 뜻에 거스르는 일 없이 묵묵히 저택을 관리한다. 그리고일에 자신의 감정을 일절 끌어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재능이다. 구라모토라는 이 남자는 그러한 재능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1년 전 그날 밤, 불가능한 상황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 남자가 유령처럼 이 저택을 배회하지 않는 한.
나와 유리에는 한동안 말없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는 지금 이 하얀 가면 위에서 뭘 보고 있을까)

구라모토는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경찰의 니무라 님 전화였습니다."
니무라라면 오카야마 현경 수사 1과의 경부다. 1년 전에 이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맡아 수사했다.

9월 28일. 그들, 오이시 겐조, 모리 시게히코, 미타무라 노리유키 세 사람이 이 저택을 찾아오는 오늘만은.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낯선 방문자를 환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 외진 곳에서, 그것도 마을에서 뚝 떨어진 산속에서 이런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살겠는가.

"어떻게 할까요?"
"되돌려 보내."
"알겠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알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한다는 점에서는 구라모토와 마찬가지로 고마운 존재지만, 필요 이상으로 주눅 들어 있는 태도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구라모토처럼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어서 때때로 나를 몹시 짜증나게 했다.

이 저택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1년에 딱 한 번이다. 9월 28일. 후지누마 잇세이의 기일인 오늘 딱 하루.
기일이라고 하면 오늘은 예전 가정부 네기시 후미에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일 9월 29일은. 그렇다, 일찍이 후지누마 잇세이의 제자였던그 남자, 마사키 신고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날.......

9월 28일. 올해도 어김없이 이날이 돌아왔다. 오후에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손님 네 명이 저택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오이시 겐조, 모리 시게히코, 미타무라 노리유키, 그리고 후루카와 쓰네히토.

덜커덩, 덜컥.......
그리고 아련한 물소리에 섞여 건물 서쪽에서 돌아가는 수차 소리. 평온한 아침이었다.
어젯밤 뉴스에서 태풍 몇호인지가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그 영향으로 오늘 오후에는 주고쿠 지방에도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다.
가면.
필시 현재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후지누마 기이치의 삶을, 아니 존재의 전부를 상징하는 물건.
가면.
그렇다, 그에게는 얼굴이 없다. 그는 자신의 저주스러운 맨얼굴을 감추기 위해 일상생활을 할 때도 가면을 쓴다.

그가 자신의 그런 심정을 부정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불문곡직하고 그들의 방문을 거부할 수도 있다. 요 몇 년 그러지 않은 것은 아마 양심의가책 비슷한 감정 때문이리라.
(어쨌거나......)그는 눈을 감은 채 갈라진 입술로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오늘도 올 것이다, 기정사실이니 하는 수 없지)이제 와서 자신의 굴절된 심리를 분석할 마음 따위 없었다. 그들의 방문이 성가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단지 그뿐이다.

원형의 넓은 방이다. 아래층 식당 천장이 2층까지 뚫려 있으니 정확하게는 지상 3층인 셈이다.
벽 색깔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차분한 회백색. 바닥에는 털이 긴 연보랏빛 융단이 깔려 있고, 중후한 진갈색 판자를 댄 천장 복판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낮인데도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공간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너무 작은 탓이다.

그러고 얼마 뒤 그 사람, 후지누마 기이치가 유리에를 거두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고이치로가 기이치에게 미리 부탁을 해두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후지누마 기이치. 시바가키 고이치로가 일찍이 스승으로 섬겼던 화가 후지누마 잇세이의 외동아들.

원형의 넓은 방이다. 아래층 식당 천장이 2층까지 뚫려 있으니 정확하게는 지상 3층인 셈이다.
벽 색깔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차분한 회백색. 바닥에는 털이 긴 연보랏빛 융단이 깔려 있고, 중후한 진갈색 판자를 댄 천장 복판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낮인데도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공간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너무 작은 탓이다.

한편 마사키는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열정은 남달랐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는 법학부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이 우연히 후지누마 잇세이의눈에 띄어서 대단한 호평을 들었다. 이것이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회계사사무소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잇세이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이 수차는 마치......"
남자는 거기서 말을 끊고 내내 말이 없던 기이치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마치?"
쉰 목소리가 가면 틈으로 새어나왔다.
"마치 이 저택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이 골짜기 이 공간에 정지시켜놓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12년 전의 사고......)(하지만 억울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덜커덩, 덜컥........
그칠 줄 모르고 돌아가는 수차 소리가 그날 밤의 파멸의 외침과 겹쳤다.

"그래, 유리에는 내내 마음을 닫고 살았지. 12년 전에 그 아이 아버지가 죽고 이 저택에 살기 시작한 뒤로 줄곧."
"하지만 후지누마 씨, 그건......."
"알아. 내 탓이지. 내가 유리에를 여기, 저 ‘탑‘ 위에 가뒀어. 그 애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기이치는 가면 아래의 눈으로 친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당한 미남이다. 옛날과 다름없이...... 아니다, 그건 아니다. 가만히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서는 역시 옛날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색이 나쁘고 눈빛도 달랐다.

기이치는 가면 아래의 눈으로 친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당한 미남이다. 옛날과 다름없이...... 아니다, 그건 아니다. 가만히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서는 역시 옛날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색이 나쁘고 눈빛도 달랐다.

"음, 후지누마 씨한테 유리에 씨는 잇세이 선생님이 남긴 예술작품과 같은 존재 아닌가요? 유리에 씨를 잇세이 선생님이 그린 풍경들 속에 가둬두고 싶었다, 그런 거죠?"
"아아......."
기이치는 헐떡이듯이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쥐어짰다.
"넌 역시 시인이야."

이 폐쇄된 시간과 공간에서 그녀를 그만 놓아주고 싶다고 나도 가끔 냉정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유리에는 말없이 자신이 오랫동안 갇혀 지낸 ‘탑‘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옆얼굴에서 그녀의 아버지 시바가키 고이치로의 모습을 보았다.

오카야마 현 북부. 수차관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위치한 A** 마을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은 더 들어와야 하는 산간벽지에 있다. 주인의기괴한 외모에 빗대어 ‘가면 저택‘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후지누마 잇세이의 제자 중 하나였던 그. 열정과 진지함, 그리고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기술을 지녔음에도 결국은 스승의 작품을 흉내 내는 것으로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했던 남자. 너무 이른 죽음을 맞이한 그의 유일한 걸작은 딸 유리에이리라.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덜커덩, 덜컥, 덜커덩.......
그날 밤. 1973년 12월 24일 밤, 한 차에 탄 세 명의 남녀. 후지누마 기이치, 마사키 신고, 그리고 마사키의 약혼녀 호쓰타 게이코.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장래를 약속한 연인이 당시 고베에 있던 후지누마 저택의 파티에 함께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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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한낮, 어느 틈엔가 들물은 노출이 심했던 사진처럼 온통 하얗게 완주를 에워쌌다. 바닷물은 점점 물높이를 키우면서 그가 앉은 바위 위로 기어올랐다. 헤엄칠 줄도 모르는 내가 왜 겁도 없이 그냥 거기에 눌러앉아 있었을까? 그때 마침 지나가던 뗏마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한없이 넓은 캔버스처럼 흰 반사광을 입은 바닷물에 에워싸인채 꼼짝도 않고 앉아서 낚싯줄을 응시하던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밀짚모자로 그늘진 옆얼굴, 네거필름 같은 얼굴, 살점이 벗겨져내린 희디흰 해골, 아마 그때 난 막연히 죽음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생이별이란 생초목에 불난다더니, 하여간 지독한 거였지. - P302

모든 집들이 저 어둡고 질펀한 평면의 품 안으로 여며들고 있다. 능선 위 잎 털린 나무마저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목탄화처럼 단순화되어버렸다. 어째서 사물은 저렇게 덧없이 제 모습을 잃어버리나? 왜 밤마다 어둠은 내려와 염하는 어두운 손길로 사물들을 조그맣게 싸서 빛과 운동이 빠져나간 가공의 의뭉한 뭉치로 만들어버리는가? - P303

인정이를 만난 것도 말하자면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그건 연분도 숙명도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일 뿐. 자, 그러니 인정이 이젠 미련 없이 너를 저 익명의 시절로 돌려보내주마난 기다려야 하는 거야. 완석이 녀석이 죽어서 돌아오건 살아서 돌아오건 난 기다려야 해. 막무가내로 기다려야 해. 완석이도, 인정이너도, 완석이를 찾던 최 형사도 발이 끊긴 이 방구석에서 이렇게 미친놈처럼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며 기다리는 거다. 이긴 겨울 내내. - P304

그런데 누이는 오늘도 안 오니 어찌 된 일일까? 이번엔 누이마저발이 끊기나? 누이 차롄가? 완주는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미어질듯 답답하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았나? 새로 시작했다는옷장사, 넓은 비닐천 위에 싸구려 옷을 가득 쌓아놓고 팔다가 단속반이 먼발치로 보이기만 해도 비닐천의 네 귀퉁이에 달린 끈을 끌어모아 등에 들쳐메고 냅다 도망치는 그런 장사, 그게 또 거덜나고말았나? 아기침대를 만들어 팔다가 폭삭 망하고 나서 비옷장사, 과일행상, 채소장사, 포장마차 술장사, 매형이 손수레를 끌고 누이가뒤에서 밀고, 나중에는 손수레마저 도둑맞고...... 이제 매형은 취중에 누이에게 손찌검까지 한단다. 한달 보름 전 일요일날 찾아와서 십오만원을 빌려가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던 누이 - P304

이때 문득 오른쪽 손등에 초록색 반점이 하나 뚝 떨어졌다. 뭘까? 아주 조그만 풀벌레. 하도 작아서 발이 안 보일 지경이다. 여태 이런 여름것이 살아 있었다니.
완주는 별생각 없이 왼쪽 손가락으로 그 곤충을 부드럽게 누른 채옆으로 칙 그어버린다. 그러자 벌레는 없어지고 대신 손등에 푸른잔디 잎새 같은 흔적만 남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치 그벌레가 마지막 여름인 것처럼. - P305

나는 열살 때 고향을 등진 후 여태껏 찾아가본 일이 없다. 게다가 어지간히 방심한 상태가 아니면 고향 추억에 잠기는 일도 퍽 드문 편이다.
죽어 있는 마을, 소등해버린 자정 이후의 먹칠 같은 어둠으로 지워진 마을, 노형리 함박이굴이라는 지리상의 대견한 장소에서 조그만 반점으로 응축되어 내 상상 속으로 옮아와버린 지금, 고향이란 게 대체 무얼까? 아이 시절의 그 여름밤같이 새깜깜한 망각이고향의 윤곽을 헐고 안으로 함몰시킨 뒤 최후로 운동장의 흰 반점만을 나에게 남겨준 듯이 여겨진다. 오랜 방학으로 텅 비어 있던운동장, 불타버린 마을을 벗어나며 마지막으로 본 그 희디희던 운동장 말이다. - P308

그런데 운동장의 넓은 백색은 조용히 유동하며 복판의 흑점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에 타 죽은 산폭도라고 했다. 미친 짓, 개죽음이라고 했다. 맹목적인 정열이라고 했다. 맹목적으로 타올랐던 끔찍한 불꽃, 그러나 이제 그는 검게 타버린나뭇등걸처럼 꺼버덩 나둥그러져 있었다. 타버린 숯이었다. 그냥숯이었다. - P309

사람들은 그 송장이 너무 타버려서 누군지 통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게 내 아버지라고 귀띔해주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게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돼버렸나? - P309

그러다가 나는 이 연못과 딱 마주쳤던 거였다. 쇠고삐 쥔 손을얼른 뒤로 돌리며 주춤 물러섰다. 풀숲에서 뱀을 만날 때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연못이, 이쪽 방심상태를 얕잡고 홀연 틈입해온 부정한 길짐승같이 느껴졌던 거였다. 맞았어, 맞았어. 나는 너무멀리 와버렸던 거야. 마을에서 너무 멀리 나가면 산사람들이 나타나서 잡아간다고 했지. 정말 산은 한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선 듯했다. 연못을 내 소유로 결정한 그날부터 나에게 이러한 낯선 소심증이 들쑤시고 일어나고 말았다. - P312

그런데도 과연 이 비밀을 어린아이의 조그만 가슴속 어둠에다가두고 묵힐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반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가끔 손으로 확인해보곤 하는 허리띠 고리나 속돌 두낱처럼 외부로부터 완전히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 연못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엄청났다. - P313

닷새 전 한밤중에 아버지가 찾아왔었다. 그렇다. 두어달에 한번쯤 몰래 찾아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잠든 여름밤 그 칠흑 같은 오밤중을 쉴 새 없이 걸어서 집에 당도하였고, 설핏 잠이 깨었을 때는 이미 내 머리맡을 등지고 앉아 있던 거였다. 그날밤도 밤중에 잠이 깨었는데 아버지가 와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진 등 뒤에서 자는 척하고 귀를 바싹 기울였다. (할머니는 뾰족 세워진 내 한쪽 귀를 여느 때처럼 손바닥으로 닫아주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몸에선 쉬어빠진 땀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등잔불이 뿌지직뿌지직 타들어갔다. - P314

"당장 읍내 형님한테로 이살 가야 한다니깐요. 내 참, 동네가 온통불질러진다니깐 그러네."
마술에 걸린 듯 불끈거리던 악력, 아버지는 빈 담뱃갑을 찌그러뜨리는 대신 다른 뭐를 찌그러뜨리는 게 아닐까? 아버지, 아버지.
왜 이사를 가야 해요?
하지만 아침에 막상 토끼눈같이 눈이 빨개진 할머니를 보자, 나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고 말았다. - P315

이제는 그 새까만 점이 자라는 시간이다. 무척 먼 곳, 분명 산사람들이 산다는 산기슭에서부터 점은 구르기 시작했다. 어둠 위를부드럽게 뒹군다. 고무공같이 가볍게 튀어오른다. 풀썩 물크러지기도 하고 다시 어둠을 뭉치면서 떼굴떼굴 뒹굴어 왔다. 때는 대개자정 무렵이었는데 밤이 거듭할수록 그 점은 매일 조금씩 커졌다.
또 그만큼 동네와 거리도 가까워진 듯하였다. 그것은 소리로 치면, 둥둥 커져가는 북소리라고 할까. 오밤중을 뭉쳐 먹으며 매일 자라나는 이놈은 대체 무얼까? 순전히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내 상상력을 먹고 살찌는 걸까? 아버지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호미를 가져오라구 했잖니?" - P316

그 백회벽은 아이들의 손이 닿는 높이까지 빈틈없이 낙서로 채워져 있었다. 울긋불긋한 크레용 글씨가 열기로 끈적거렸다. 63÷9=7, 머리 긴 사람의 얼굴, 때 묻은 성기를 지웠다. 이렇게 한낮을구석구석 허비하면서 나는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그 까만 점이 자라는 것이다! - P318

사마귀점만 하던 게 호박 크기가 되자, 그 어둠 덩어리는 요 며칠 사이에 아주 성급하게 자라났다. 장독만큼 커지고도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전혀 감당 못할 어떤 엄청난 결과를 향해서 막무가내로 커가는 거였다. 두려웠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게 이제는 두려웠다. 열살 나이에는 도시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질문으로 추궁당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어둠 덩어리는 동구 앞 늙은 팽나무 밑을지나자 길쭉한 원통이 되어 굴러왔다. 제재소 앞에 쌓인 굵은 통나무들 중 하나가 떨어져 떼굴떼굴 뒹구는 모양과 흡사했다. - P318

산에서 아버지가 왔어. 설핏 잠들었던 할머니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목이 바싹 말라붙어서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나쁜 꿈을 꾼 모양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푸슬거리며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나갔다. 외양간에서 소 되새김질 소리가 들렸다.
마당을 가로질러 찍찍 고무신 끄는 소리, 뜰 한 귀퉁이에서 소변보는 눈치더니 곧 돌아왔다. 그런데 저것 봐, 저기 빨간 게 뭐야?
문밖에 아버지가 와서 담배 피우고 있잖아. 무서워, 무서워. 할머니가방금 들어온 문밖 어둠속에 뱀딸기같이 붉은 점이 타고 있지 않은가. 그 선을 타고그러나 그건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담뱃불이 아니었다.
멀리 컴컴한 산에 찍혀 있는 산불이었다. 그날밤부터 산불이 타기시작했다. - P319

그때였다. 바로 곁에서 첨벙 물 튀는 소리가 났다. 누가 숨어서돌멩이를 던진 게 분명했다. 들켰구나.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큰일 났다.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후회가 바늘끝처럼 날카롭게 일어났다. 두번째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물살에 세차게 박히는 것으로 보아 힘껏 팔매 친 모양이다. 적은 보이지 않고 나는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다. 호흡을 멈춘채돌이 날아온 곳과 반대 방향으로 황망히 헤엄쳐갔다. - P320

붙잡고 있는 물 묻은 내 오른손을 지그시 밟아 누르는 맨발이 보였다. 발등에 뿌옇게 흙먼지가 올라앉아 있다.
"도루 들어가!"
더러운 발의 명령에 나는 순순히 복종했다.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물러가면서 완실이를 치어다본다. 머리 위로 힘차게 굽혀 치켜올린 오른 손아귀에서 조약돌 한개가 반짝거렸다. 움켜쥔 그 손도아슬아슬한 정점에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내 이마로달려들고 싶은 듯이 돌멩이는 손아귀에서 바둥거린다. - P321

그런데 잠시 후 완실이는 치켰던 팔을 내려뜨렸다. 조약돌을 다른 손에 옮겨 쥐더니 땀이 뺀 손바닥을 바지에다 쓱쓱 문지른다.
다시 바른손에 쥐고서 무게를 가늠해보듯 조약돌을 흔들흔들해 보인다. 조약돌의 표면이 둥글고 매끈한 게 아주 여물어 보인다.
"년 독 안에 든 쥐야!"
그 음성은 정말 쥐 한마리 든 빈 독 안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이상스럽게 웅덩이 안에 횡횡 울려퍼졌다. - P321

자맥질하고 말았다. 텅 빈 수면, 텅 빈 수면은 불안하다.
완실이는 빈 수면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하고 있으리라. 고함지르며 이 바위 저 바위로 길길이 날뛰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물속에선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가슴이 몹시 뛰고, 비슷한 속도로 귓속에서 쌕쌕거리는 소리가 조급하게 일어났다. 기다란 물풀이 허벅다리에 흐느적 스쳐갔다. 어두운 물바닥을 더듬어 돌멩이를 찾았다. 멀렁한 진흙이 만져지고 손끝에 차인 자갈이 탁하고음산한 소리를 냈다. 물때가 묻어 미끌미끌한 돌멩이 두개를 움켜쥐자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 P324

저건 영락없이 밤에 본 굴뚝도깨비야. 사타구니 밑으로 시꺼먼검댕을 흩날리던 그 굴뚝도깨비가 저놈일지도 몰라. 아니다, 아니다. 그건 밤에 먼 산에서 걸어내려오던 아버지였어. 두어달에 한번쯤 찾아오는 아버지. 내가 잠든 여름밤, 참 먼 곳에서 칠흑 같은오밤중을 쉴 새 없이 걸어서 자꾸자꾸 커지면서 집 앞에 당도했던거다. 덩덩 북소리처럼 커지던 굴뚝도깨비, 다락같이 큰 키, 사마귀 같은 점이 굴뚝도깨비로 다 자라버렸는데도 아버지는 종내 오지 않았다. 그렇다. 이젠 들켜버린 거다. 비밀은 그 부정한 몸을 노출시켰다. 아버지는 머리가 긴 산폭도였다! 읍내 순경 세명이 차를타고 와 할머니를 만나고 간 저녁에 나는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산불이 타고 있었다. 그것은 굴뚝도깨비를 만난 요전날 밤에 깜깜한 문밖 어둠속에 담뱃불똥처럼 찍혀 있던 붉은 점이었다. - P326

빨갱이 산폭도들이 습격해온단다. 낮에도 산불이 타는 것을 알 수있었다. 낮에 보면 서편 산등성이에 시꺼멓게 불탄 자리가 소 잔등에 생긴 버짐같이 흉스러웠다. 산불의 열도를 돋우며 여름 해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산불이 탄다. 산은 아득하게 멀었지만, 살갗 태우는 낮의 열풍 속에 산불 냄새가 분명 섞여 있는 듯했다. 매캐한 냄새. 거기다가 웬 몸집 큰 산짐승이 불에 그슬린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타죽는다. 타 죽는다. 해는 아예 그 둥근 윤곽이 허물어져 완回味실이네 풀뭇집 쇳물 같은 게 너울거리며 중천을 태웠다. - P327

완실이네 풀무간에서 만든 새 바퀴를 단 구루마에 이삿짐을 싣고서 대식이네가 맨 먼저 동네를 떠났다.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불을 놓는단다. 동네가 몽땅 불탈 거란다. - P328

완실이는 여전히 푸른 공중에 까맣게 걸려 있다. 완실아, 이젠 더못 참겠어. 벗어둔 마른 옷가지들이, 광택이 눈부시게 흐르는 바위아래로 금세 미끄러져내릴 것만 같다. 그늘에 벗어놓을걸. 나는 점점 게을러졌다. 더 못 참겠어. 두 다리는 무거운 돌멩이로 채워진자루처럼 바닥으로 늘어지고 몸 구석구석에 쥐가 생기려는지 응어리가 딱딱하게 불거졌다. 물 온도를 전혀 감각할 수 없다. 몸뚱어리가 물에 부풀려 퉁퉁해지고 탁한 물의 농도 안으로 허물어져가는느낌이 더욱 절실해진다. 물의 부력 속은 뻐끔하게 구멍 뚫린 느낌이다. 그 매끄러운 틈새로 몸이 조금씩 빠져들어가는 거다. - P329

번쩍거리는 바윗날, 바위틈새의 시꺼먼 그림자. 햇빛은 벗어놓은 옷을 지속적인 파장으로 짓눌러댔다. 그런데도 바지의 구겨진주름살 갈피마다 짙은 그늘이 우글거린다. 아버지가 꾸겨뜨린 담뱃갑 같구나. 머릿속이 점점 혼미해진다. 허벅다리 살집에 달라붙어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바짓가랑이가 저렇게 볼품없이 찌그러져있다니. 저 바지를 일으켜세우고 그 텅 빈 공동을 양다리로 팽팽하게 채우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이러다간 정말 죽을지도 몰라.
공회당 앞마당에서 본 산폭도 송장의 흰 아랫도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비에 젖은 가마니턱 밑으로 핏기 가신 허벅다리가 비어져나와 있었지. 무성하게 피어오른 흐린 날씨가 흰 허벅다리를 파먹고 있었지. 누가 송장의 아랫도리를 벗겨놓았나? 사람이 죽으면 바지를 벗겨버리나? 옷이 벗겨졌으니 나도 송장이 되는 걸까? - P329

완실아, 이젠 그만해. 더 참을 수 없어. 이젠 다 끝난 거야. 비가와야 해. 이젠 비가 올 차례야. 저 산불을 꺼야지. 비가 억수로 쏟아져야지. 그래, 완실아, 비가 오는 거야. 자, 봐, 사물의 맨 말미에서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거야. 노여운 죽창처럼 빗줄기가 무섭게 내리꽂히는 거야. 타버린 잿가루가 풀썩풀썩 튀어오르고 사방이 빗소리로 가득하다. 창호지에 번지는 시원한 누기. 완실아, 우리는 밤새도록 물이 시내를 타고 먼 산에서 마을까지 천천히 걸어오는 꿈을 꾸었지. 아침에 깨어나서 산골짝마다 번쩍거리는 흰 물줄기를보고 말리라. 고운 물을 한아름 덩실 안고 흘러가는 시내를 보고말리라. 산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가뭄 타던 산. 그 사람들이 산불까지 놓았어. 산불을 끄고 산에서 물이 내려온다. 산에서 물이 내려온다! 아침에 아이들은 길에 괸 물을 튀기며 냇가로 내달을 거야. - P330

뜨거운 하상은 수증기와 흙탕물이 범벅이 되어 뭉게뭉게 부풀어오른다. 물은 점점 수역을 넓히면서 사방으로 질펀한 공간을 터놓는다. 백발의 수로(水路)노인은 어디 있나? 내가 터지면 수로노인이 선두에서 물의 진행을 이끈다던데. 그런데 저게 뭐야? 더러운흙탕물의 선두에 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폭도 대장이 되어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다!
아버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손에 쥔 피 묻은 죽창으로 앞물을 두들겨 갈래갈래 찢어놓고 있다. 갈라진 물무리들은 왈칵왈칵 사방으로 퍼져 메마른 모래와 자갈을 빈틈없이 먹어치운다. - P331

나는 어느새 죽을힘을 다해서 물가로 헤엄쳐가고 있었다. 고막은 내가 일으키는 물소리에 뒤덮여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이때 머리 정수리에 짧고 강한 충격이 왔다. 완실이의 팔맷돌이었다. 대번에 나의 동작은 꺾이고 긴장이 썰물처럼 시원하게 빠져나갔다. 향긋한 피 냄새. - P331

그러나 그건 환각이었을 뿐 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시냇물도 흐르지 않았다. 산불도 꺼지지 않았다. 한밤중 불붙은 그 산에서 산폭도들이 산불을 옮겨왔다. 마을은 불타고 그 이튿날 학교 운동장에불에 탄 공비의 시체 하나가 전시되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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