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시, 어디 색신 줄 몰라도 여기 우리 집에 숨어 있다가 자수하러 갑시다. 요즘엔 자수하면 다 살려준다오. 당신들이 좋은 세상 만들자고 하는 일인 줄은 알지만 그것이 어디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오. 이미 대세가 기울었는데 당신들이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없소. 나도 옛날에는 산사람들 오면 아까운 줄 모르고 털어줬던 사람이오. 인제 틀렸소. 곧 있으면 전쟁도 끝난다는데 틀린 일을 붙잡고 생목숨 버려서야 되겠소? 자수합시다. 사람 목숨만큼 귀한 것이 또 어디 있겠소." - P-1

그녀가 경남도당으로 떠난 후 역시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일하다가 그녀보다 몇 달 앞서 54년 1월 조개골에서 생포된 조병하는 고향의 소꿉친구였던 어느 국군 장성의 끈질긴 전향 권유에도 불구하고 미제의 앞잡이들과 타협할 수 없다며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사형대에 올랐다. - P-1

"동무들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질 것이오. 동무들도 아다시피 산에서는 더 이상 유격투쟁이 불가능하오. 동무들은 곧 지하공작 사업을 맡게 될 것이오. 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처럼 열심히 투쟁하기 바라오." - P-1

"학습 열심히 하고, 건강부터 회복하시오. 건강하게…… 잘 싸우시오."
그것이 이현상과의 마지막이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현상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녀가 아는 이현상은 소박하고 따뜻하고 강인한, 그야말로 철의 투사였다.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대원들의 짐을 대신 들어주고, 이름 없는 하부원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신경 쓰던 아버지 같은 지도자였다. - P-1

그녀는 그곳에서 조국을 알았고 조국을 위해 싸웠고 인간을 알았으며 인간해방을 위해 싸웠다. - P-1

기다렸다. 좀처럼 연락은 오지 않았다. 유화열과 김태봉이 내려가자마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45년 해방 직후의 정세와는 전혀 달랐다. 이미 입산자들의 신원과 경력이 샅샅이 밝혀진 뒤였으며, 그런 그들이 사회에 숨어들어 지하사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 P-1

기다리던 소식 대신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전은 그들이 바라던 바였다. 51년 6월 23일 소련 외상 말리크가 유엔에서 휴전을 제의한 다음부터 남한의 전 빨치산들도 정전을 요구하며 싸워왔다. 그러나 휴전협정에서 빨치산들의 거취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죽음과 함께 생활했던 지난날이지만 이제 정말로 남은 것은 혁명가다운 장렬한 최후뿐이었다 - P-1

전쟁은 끝났다. 빨치산들에게는 바늘 하나 꽂을 만한 해방구도 없었다.
자기들이 피를 흘리며 싸웠던 그 땅에서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 P-1

휴전회담이 빨치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건 이제 몇 가지 선택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혁명투쟁을 포기하고 살기 위해 자수하는 방법이었고, 둘째는 언젠가 다시 올지도 모르는 해방을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유격투쟁을 지하조직 사업으로 바꾸는 것, 셋째는 사라진 꿈과 더불어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것이었다 - P-1

두 번째 방법은 수차례 연구하고 실시했으나 성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살아 있던 대다수의 빨치산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세 번째를 선택했다. - P-1

남부군 출신들이 그런 비판회에 곤욕스러워하고 있던 그 무렵,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은 호위대까지 다 다른 곳으로 떠나보낸 후 부관만을 데리고 경남도당으로 오던 중 경찰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이현상의 죽음에 관해 여러 가지 추측들-남로와 북로 간 헤게모니 투쟁의 희생양이라든가-이 난무하고 있지만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 P-1

종파주의자든 아니면 역으로 종파주의에 의해 희생당한 제물이든 분명한 것은 남한 현대사의 한 장을 장식할 유격투쟁의 지도자였으며 남부군 대원들에게는 친아버지와 같은 존경을 받던 한 탁월한 혁명가가 유격투쟁의 본거지인 지리산에서 최후를 마쳤다는 사실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50년 10월 2일 이현상부대는 영천을 통과했다. 비행기 폭격이 얼마나 심했는지 영천은 완전히 잿더미였다. 전쟁의 폐허 위에도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미군이 이미 북진해버린 중부전선은 텅 빈 상태였고, 수많은 인민군 낙오병들과 당기관원, 좌익 지지자들이 적의 뒤를 따라 북을 향해 후퇴하고 있었다. 영천을 지나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기 위해 울진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하던 이현상은 남루한 인민군 낙오병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자랑스런 인민의 부대요. 힘을 내시오. 잠시 후퇴를 한다고 그렇게 엉망이어서야 되겠소. 단추도 채우고 먼지도 털고 총도 똑바로 드시오. 행색이 남루해지면 사기도 떨어지는 법이오."

이현상은 본부 취사대원 이창례를 돌아보며 생쌀이라도 한줌 주라고 일렀다. 그렇게 낙오된 병사나 기관원들을 부대 뒤에 따르게 하고 이현상부대는 영일, 양양, 울진의 동해안 도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확 트인 동해를 끼고 북진하다 도계재를 넘어서부터는 태백산맥을 타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부대 뒤에 따라붙은 낙오병과 피난민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삼팔선을 넘을 때는 거의 만여 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사람이 많아지니 식량보급이 우선 문제였고, 부대만 후퇴하는 것보다 시간도 훨씬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 정규사단인 방호산의 6사단이 4백 명의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켰다고 그 후 칭찬이 자자했던 것을 생각하면 백 명도 안 되는 부대로 만여 명을 규합하여 안전하게 후퇴한 이현상부대의 공적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평양으로 간다는 사실에 그들은 가슴이 부풀었다. 삼팔선을 넘기만 하면, 평양에만 가면, 유대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가듯 그들은 자신들의 꿈과 휴식이 이루어질 그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현상부대는 그때까지도 소식이 없는 이영회부대를 위해 백묵으로 갈림길의 큰 바위마다 표지를 남겨놓았다.

본대의 애타는 기다림은 빗물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랫동안 바위 위에 남아있었지만 끝내 후속부대는 본대를 따르지 못했다.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결국 도착할 수 없었듯이.

10월 중순 이현상부대는 양양에 도착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동해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였다. 드디어 삼팔선을 넘은 것이다.
"양양 현남면의 어떤 집은 윗방은 이북, 아랫방은 이남, 그렇다오."

다음날도 부대는 떠나지 않았고 대신 어디 가 있었던 것인지 그 마을 기관원들이 쌀과 반찬 등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여맹원들이 잠시 이리저리 부산하게 뛰어다니더니 어느새 밥을 지어왔다. 며칠 뒤에는 어디에 숨겨놨었는지 소와 돼지도 내놓았다

11월 10일경 정식으로 부대가 재편되었다.
 
승리사단(약 500명) - 사단장 이진범, 정치위원 유주목
인민여단(약 170명) - 사단장 김재연, 정치위원 김삼홍
혁명지대(약 130명) - 사단장 서흥석
본부(약 60명)

총참모장엔 박종하, 본부 정치위원엔 차일평이 임명됐고, 전체는 무려 860명에 이르는 대부대였다. 부대의 정식 명칭도 조선인민유격대 4지대로 바뀌었으나, 통상 남반부 인민유격대로 불렸다. 이 중 승리사단은 여순사건 이후 구빨치를 중심으로 한 중핵부대였으며, 인민여단은 주로 후퇴 중이던 기관원, 남조선 의용군, 민간인 중에서 지원자를 뽑아 새로 만들어진 부대였고, 혁명지대는 원래 충청지방에 침투할 예정으로 경기와 충청 출신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혁명지대와 인민여단은 승리사단과 별도의 행동을 할 경우도 많아서 흔히 두 부대를 묶어 연합부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 찬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아끼고 길이 받드세.
 
처음으로 마음껏 불러보는 국가였다. 하얗게 서릿발이 내린 들판을 녹이며 뜨거운 애국가 소리가 점점 드높아졌다. 이 국가 한번 맘대로 불러보지 못한 채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죽어갔는가.

"우리의 혁명은 이제부터입니다. 한라산과 지리산, 남반부 곳곳에 붉은 피를 뿌리고 가신 동지들의 원수를 기어이 갚고야 말 것을, 우리 여기서 다시 한번 결의합시다!"

우리 모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리산 골짜기를 수없이 옮겨 다니며 무주로, 낙동강으로, 그리고 삼팔선을 넘어 그들은 후평까지 왔다. 그들이 그렇게 꿈꾸던 평양도 지척이었다. 그러나 아직 조국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기나긴 투쟁의 여정 또한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내일 남조선으로 떠나오. 옥자 동무는 이곳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시오."
"……."
"어떻소? 여기 남겠소?"
혼자 이곳에 남는다? 부대는 남조선으로 내려가고?
"싫습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죽더라도 부대와 함께 가서 죽을 것입니다. 저 혼자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허, 고집도 참. 옥자 동무의 의사가 정 그렇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오늘 밤 시간을 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오."

다음날(14일이나 15일) 새벽 비상이 걸렸다. 곧바로 아침을 먹고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들판에 9백여 명의 전 대원이 줄지어 섰다. 이현상과 박종하의 연설이 끝나고 나자 붉은 태양이 환하게 솟아올랐다. 부대는 곧 왔던 길을 되짚어 남쪽을 향해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북조선 땅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뒤로는 수십 마리의 황소가 부대가 먹을 식량을 싣고 뒤따랐다.

평강을 지나 철원, 화천, 양구를 가로질러 오대산을 탔는데 중부지역은 완전히 공백상태나 다름없었다. 기동로에는 미군의 보급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지만 큰 전투 한 번 없이 남부군은 진부령에 도착했다. 멀리 넘실거리는 동해바다가 바라보였다. 이곳에서 진부지서를 습격, 점령한 남부군은 그날 나팔을 불며 돌격했었는데 그 후로 나팔만 불고 공격하면 적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바쁠 정도였다. 이곳에서 남부군은 태백산맥을 버리고 소백산으로 향했다.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투쟁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소백산 주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남부군은 한 달여간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단양경찰서와 문경경찰서 습격, 문경에 있는 미군부대 습격, 수안보를 중심으로 한 주요 도로 매복, 기습투쟁, 영풍 미군부대 습격, 기동로인 죽령 국도 열흘가량 차단 등으로 남부군은 자신의 임무대로 후방의 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비행기의 공습은 끊임없이 이들을 쫓아왔고 이 무렵부터 재귀열 환자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과로를 해서 염병(장티푸스)에 걸린 줄 알았으나, 나중에 평양 중앙방송을 듣고서야 미군의 세균 살포로 인한 것이고 병명도 염병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재귀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태규 동무! 살려면 이거 좀 먹어봐!"
의식을 잃고 있던 김태규는 녹 동무가 먹여주는 뱀을 비몽사몽간에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그 뱀고기를 먹고 김태규는 오랜 병에서 회복되었다.

나중에 남부군에서 대단한 활약을 한 문춘이 바로 이때 충북 유격대에 있다가 남부군에 합류했다.

김흥복만이 아니고 당시 남부군의 주요 지휘자들 대부분이 스무 살이 겨우 넘거나 스물다섯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박종하도 그때 겨우 스물다섯의 청년이었다.

남부군은 적의 차량 수십 대를 동원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백여 명의 좌익수와 전리품을 실은 다음 유유히 예비대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에 가서 자동차를 모두 소각한 뒤 전리품만 가지고 그날 밤중으로 무사히 속리산에 도착했다. 남한 내의 유격대로서 도청소재지를 점령한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신발 한 짝이라도 다 보고하고 부대 안에서 가장 발이 안 좋은 대원에게 그 신발을 주는 것이 남부군의 사업작풍이었다. 그 정도의 동지애가 아니었다면, 언제라도 뒷주머니에 자기 것을 챙기는 요즘의 세태대로였다면, 그 혹독한 조건 속에서 이탈하지 않고 어떻게 싸울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청주작전 후 국군과 경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미 공군의 공중폭격으로 더 이상 속리산에서 버틸 수가 없게 되자 남부군은 석 달여간 활약하던 무대를 버리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환자들과 그들을 보살필 의무요원, 보급요원 등 총 50여 명을 속리산에 남겨놓은 채 눈물을 머금고 다시 남진을 시작했다

속리산을 출발하여 백화산을 지나고 추풍령고개를 넘고 황학산을 거쳐 민주지산에 도착한 것은 아카시아 꽃내음이 향긋한 5월 중순이었다. 경상, 충청, 전라 3도의 접경지점인 민주지산에는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한창이었다

남부군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몇 개의 부대로 나눠 부근의 미군, 국군 주둔지와 경부선 철도 등을 습격하며 십여 일을 보냈다. 전투마다 승승장구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남한에서의 유격투쟁을 포기하고 북상하던 길에 덕유산에서 6.25 소식을 접하고는 그 후 꼭 일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후평에서 덕유산까지 참으로 먼 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부군의 누구 하나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삶을 거기서 마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8월 초순(10일에서 12일 사이), 남부군은 남부군 유격투쟁의 정점을 이루는 가회지서 습격투쟁을 시작한다. 이 가회지서 습격투쟁을 마지막으로, 승승장구하던 남부군의 투쟁은 고개를 꺾기 시작한다. 이후로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부군은 그곳에서 48년 이래 남부군을 지휘해왔던 탁월한 지휘자 박종하를 잃게 된다.

미군복을 입고 나갔던 어제의 그 모습 그대로 이마가 총탄에 뚫려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싸늘하게 누워 있는 시체는 바로 박종하였다. 박종하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느닷없이 막내가 보고 싶다고, 해방되면 다 같이 고향에 가자고, 평소에는 꺼내지도 않던 말을 하고 나가더니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박종하의 죽음은 부대 내에서 일체 비밀에 부쳐졌지만 간부들에게 준 충격만도 엄청났다. 박종하의 죽음 이후 남부군은 두 번 다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물론 그 패전의 원인이 박종하의 죽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후평에서 지리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 주전선에 적들의 모든 관심이 쏠려있었고 이후에는 휴전협정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적의 병력이 지리산으로 몰려든 탓도 있었을 것이고, 빨치산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단련된 적들이 갈수록 강해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박종하가 살아있었다면 남부군의 투쟁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바로 지리산의 초입 달뜨기가 녹음에 우거진 채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구빨치에게는 꼭 1년 2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그날 중으로 경호강을 건너 웅석복 어느 골짜기에 도착한 부대는 그곳에서 노숙하고 다음날 지리산 거림골과 중산리 입구에 있는 시천지서, 삼장지서와 덕산리 외곽에 있는 경찰초소를 공략했다. 작전지휘는 속리산에서 합류한 충북부대 출신의 문춘이 맡았다.

지리산의 여름은 비가 잦다. 워낙 산이 크고 웅장하니 아래쪽의 날씨로는 산 날씨를 짐작키도 어렵다. 지리산에 처음 도착한 다음날도 여름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앞으로 닥칠 남부군의 처절한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고라도 하듯이.

"미제의 앞잡이 놈들! 역사가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박대수는 경찰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하며 대들었다.
"이런 개새끼! 쏴버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
외마디 비명이 채 끝맺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대부분의 빨치산은 당시 최대한 적의 병력을 끌어들여 주전선으로 향하는 적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유일한 임무라고 생각했고 그 임무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돼 있었다. 물론 머지않아 해방이 될 거라는 확신 속에서 말이다. 그것이 무모했건 어리석었건 순수한 혁명성에서였건 적어도 당시의 실정은 그랬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매일매일 전투에 쫓기는 상태에서 일반대원들은 실제로 당장 내일의 자기 운명조차도 모르고 살 때였고,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감상쯤은 끼어들 여지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리산 상봉에까지 쫓겨 와서 두 사람의 입씨름이 또 한판 붙은 것이다. 이현상의 중재로 유주목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물러나긴 했지만 그날의 정겨운 다툼을 사무치게 그리운 추억으로 남기고 유주목은 그 후 어느 땐지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빨치산에게 있어 무소식이란 희소식이 아니라 죽음 아니면 생포를 의미했다. 유주목이 생포됐다는 말은 그 후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 지리산 어느 골짝엔가 무덤도 없이 누워 있을 것이다.

후평에서부터 남부군에 합류한 차일평은 김일성대학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는, 삼십대 중반의 전형적인 학자풍의 사나이로 그녀의 학습을 담당한 개인교수이기도 했다. 훗날에야 차일평이 실제로 적에게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한동안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다. 그에게는 혁명의 순결성보다 자신의 생명과 지식이 더 중요했던 걸까. 그녀를 감탄시키던 놀라운 지식과 이론이 한낱 관념이었을 뿐일까. 적어도 그가 인간인 이상 아마 적에게 구걸한 나머지 인생 동안 그의 앞에 기다리는 것은 굴욕과 자기파괴와 참담함뿐이었을 것이다.

한두 사람이야 어땠건 대부분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적과 투쟁하면서 마지막 총 한 방까지 적을 향해 겨누다가 전사하거나 자폭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두었다. 이현상도, 박종하도, 김흥복도, 이진범도, 이영회도, 전남도당의 박영발이나 김선우도, 전북도당의 방준표도, 모두 자신의 동지들이 숨져간 차가운 산기슭에서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해방을 꿈꾸며 죽어간 것이다

이 대부대는 적정을 피해 세석평전 서쪽을 돌아 칠성봉 아래 대성골로 접어들었다. 대성골에 도착한 것이 새벽쯤 되었을까. 이상하게 그날 새벽까지 사방에서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몰려들었다. 얼마 전 거림골에서 갈라졌던 92사단도 대성골로 밀려왔고, 전남부대에서 지리산으로 파송했던 투쟁인민과 노약자들, 조금 전에 만난 경남도당, 경남부대, 지리산을 무대로 싸우던 적어도 천 명 이상의 빨치산들이 사십 리가 넘는 대성골 넓은 골짜기에 총집결한 것이다(이 피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남부군은 작전 총화를 통해 국방군이 며칠 동안 전 빨치산을 대성골로 몰아넣기 위해 교묘하게 대성골로 가는 길목만 터놓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리산 숱한 골짜기를 놔두고 전 부대가 대성골로만 집결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국민학교에 갓 입학할 나이였다. 여덟 살 자형이는 전남부대의 꽃이었고 전남부대만이 아니라 전 빨치산에게 유명한 꼬마 영웅이었다. 지난번 악양전투 때 남부군들도 소문으로만 듣던 자형이를 직접 봤는데 정이 많은 유주목은 특히 두고두고 자형이 얘기를 꺼내곤 했다.
"공화국의 보배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텐데……."

여성과 예술인을 특별히 우대하는 남부군이라 일선 지휘자들이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주었지만 특별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거부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남자들보다 몇 배나 더 열악한 신체조건을 가지고도 남부군의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조국해방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해도 해도 산더미처럼 쌓이는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또 역사와 조국이란 무엇인지도 생각할 짬이 없던 그녀들이 지금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바치겠다는 뜨거운 결의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싸워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94호 결정서가 즉각 이현상에게 전달되었다. 이 전달서에는 도당을 해체하고 5지구당을 결성할 것이며 지리산 일대 5지구당의 책임자로 이현상을 임명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중앙당이 현지의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지시했다는 이유로 박영발과 방준표는 도당 해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도당조직은 그대로 둔 채 통일적인 지도를 담당할 5지구당 조직위원회를 결성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위원장에는 이현상, 부위원장에는 박영발과 방준표가 임명됐다.

5지구당 결성과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20여 명의 상선 연락대는 다음날 오전 다사로운 가을햇살을 받으며 정든 지리산을 떠나갔다. 이제 남은 인원은 총 백 명도 되지 않았다. 후평을 떠나올 때 8백이 넘었던 인원이었으니 만 2년도 안 되는 동안 8백 가까운 동지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젊고 뜨거운 피를 바친 것이다. 남은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먼 얘기가 아니었다.

서류봉투 두 개 분량쯤 되는 서류를 누런 밀가루 푸대로 겹겹이 싼 후 솥에 넣고 바위틈으로 들이밀었다. 전투 와중에도 무슨 보고서와 문서가 그렇게 많았던 것인지, 아마 그 몇 년간 지리산에 비장한 것만 해도 한 트럭분이 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 동무와 둘만 있어도 비좁은 비트 안에 넷이 있자니 눕지도 못하고 아이를 안은 채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그녀는 벼락같은 고함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옥남아! 뭐하고 있냐! 애기 울리지 말고 요 너머 골짝으로 가거라!"
분명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 P-1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아이가 한 번이라도 울음을 터뜨렸다면 꼼짝 없이 이 세상 목숨이 아닐 판이었다. 차츰 총소리가 가라앉고 있었다. 다른 동무들은 어떻게 됐을까? - P-1

아무래도 산사람들이 다니는 길 같아 그 길을 따라 걷던 그녀는 무심코 앞을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십 미터 앞이 온통 누랬다. 기백 명이 넘어 보이는 토벌대의 누런 군복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그녀는 이미 산비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P-1

면당으로 가기 위해 어둠을 더듬어 길을 나선 그들은 뜻밖에 사오십 명의 빨치산 부대와 마주쳤다. 이현상부대에서 보급사업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무심코 사람들을 둘러보던 그녀는 한 남자에게 문득 눈길을 멈췄다. 근 일 년 반 만에 만나는 남편 최윤호(최규복의 가명)였다. - P-1

고생했다는 말도, 뭐 어쩌라는 말도 없이 잠시 아이를 안고 있던 남편은 훌쩍 일어나 자기 부대 쪽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깨어났을 때 남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대신 남편의 분신인 양 서투른 솜씨로 만들어진 새 짚신 한 켤레가 머리맡에 놓여있었다. 일에 지쳐 남편이 돌아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 그녀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던 남편의 손길처럼 발에 꼭 맞는 짚신은 포근하고 따스했다. - P-1

아이와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한편으로는 일제시대보다 더 처참한 세상을 한탄하고 증오하며 그녀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 P-1

단오 이전에는 아무 풀이나 먹어도 독이 없다던 간부들의 말이 생각나 냇가에 비죽비죽 고개를 내미는 고사리밥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참꽃(진달래)을 따먹기도 하고 닥치는 대로 나물을 뜯어먹으며 최대한 쌀을 아꼈지만, 이십 일이 지나자 가져온 식량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사나흘간은 나물만 한 솥씩 삶아 배를 채우거나 물로 끼니를 때웠다. 나물이 독했는지 계속 설사를 하는 바람에 탈진상태가 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처참한 굶주림이 계속되었다. - P-1

굶은 지 십삼 일 만이었다. 밖에서 철썩 하는 쇳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적인가 하는 순간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녀는 누군가 자기를 부르며 흔들어대는 통에 부스스 눈을 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눈도 침침해 흐릿하게 윤곽만 보이는 사람은 적이 아니라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연락원이었다. - P-1

"동지 여러분! 저 이옥자 동무의 참혹한 모습을 보십시오. 이옥자 동무는 아이까지 딸린 여성의 몸으로 혁명사업에 뛰어든 우리의 귀중한 재산일 뿐 아니라 해방 직후부터 혁명사업에 몸 바친 이현상부대 정치위원 최윤호 동무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이 귀중한 동지를 저 지경이 되도록 방치할 수가 있습니까? 비인간적이며 비인도적인 군책 동무와 지도층의 무책임한 처사를 규탄합니다!" - P-1

아이가 귀엽게 놀수록 그녀의 가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는 운명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아이도 남편도. 누가 먼저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그게 언제일 줄은 알지 못했다. 그 이별이 두어 달도 남지 않은 바로 내일모레의 일이라는 것도. 자기 혼자 살아남아 그 아이를 죽인 슬픔이 지워지지 않는 피멍으로, 평생의 짐으로 그녀와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도. - P-1

"이봐! 없어, 없어. 거긴 내가 다 뒤졌어."
그러자 토벌대원은 그들이 숨어 있는 다래덩굴을 휙 스쳐갔다. 귀찮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보고도 일부러 피해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순사건 이전까지는 군대 내에도 좌익세력이 상당히 조직화되어 있었고, 지리산 토벌대 중에도 동조자들이 있어서 간혹 이렇게 보고도 못 본 체하거나 식량과 총탄을 슬쩍 흘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 P-1

어디를 어떻게 해서 토벌대가 겹겹이 둘러싼 뱀사골 능선을 빠져나왔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다음날 피아골 군당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다래덩굴 아래서의 그 숨막히던 기억만, 그 다래덩굴 아래만 그녀의 머릿속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아이가 죽었다는 걸 그녀는 실감할 수 없었다. - P-1

아이를 낳던 날 방구들을 파내던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태어난 날부터 내쫓겼던 아이, 죽는 날까지 울음 한번 시원하게 터뜨려보지 못하고 쫓겨만 다니던 아이, 네 앞에서 결코 부끄러운 어미는 되지 않겠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토록 질긴 운명과 슬픈 이별을 강요하는가. 어미는 그것을 부숴버리고야 말겠다. 이 땅의 모든 어미가 밥을 달라고 우는 아이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야 말 테다. - P-1

50년 봄은 6.25 이후 빨치산이 완전히 궤멸될 때까지 근 7년여의 남한 유격투쟁 동안 가장 참혹한 시기였다. - P-1

며칠 후 뿔뿔이 흩어졌던 광양군당이 다시 합류했는데, 그 사이 사람은 반으로 줄어 있었다. 합류하지 못한 반은 족제비나 까마귀 밥으로 산에 널려 있을 것이었다. - P-1

해방의 그날까지 우리가 살아있다면 그때쯤엔 웃으며 오늘을 기억할 수 있겠지. 어쩌면 혁명사업이란 소태 같은 것이 아닌가. 쓰디쓰지만 먹고 나면 몸에 좋은 것. 쓰디쓴 날을 웃으며 기억할 수 있는 해방은 기어코, 기어코 오고야 말 테지. 그러나 살아서 그 서글픈 추억을 되씹을 수 있었던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좋은 추억이 되겠다던 김선우도, 영원히 잊지 않겠다던 오금일도 54년 빨치산 최후의 무렵에 적과 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람 좋은 미소만 띠고 있던 구례의 ‘각시순사’ 김병추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다. 소태처럼 쓰디쓴 혁명의 물결에 그들은 하나뿐인 생명까지 던져버린 것이다. - P-1

잠시 후 군책이 그녀를 불러 이현상부대에서 부른다며 소환장을 내놓았다.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남편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소환이 적당치가 않은 것 같았다. 아직 행군도 제대로 버텨내지 못할 정도이니 전투부대의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 P-1

여순사건 직후 14연대를 주축으로 7백여 명에 이르렀던 이현상부대는 매번 전투에 수많은 병력을 잃고 고작 150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었고, 부대편제는 이현상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3, 5, 7연대의 3개 부대와 부대본부, 호위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는 며칠 후 본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었다. - P-1

자신의 활동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기 일이 아주 좋았다. 이현상이 처음 했던 말대로 정말 그녀의 역할은 어머니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 P-1

어쩌면 이현상은 아이를 잃고 난 그녀의 마음을 그렇게 달래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로서는 입산한 지 두 해가 다 되어가지만 아이 때문에 체계적인 조직생활을 해보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구체적인 자기 임무를 수행하면서 비로소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당에 대한 죄책감도 아이에 대한 죄책감도 차츰 엷어져갔다. 너무 바빠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 P-1

몸이 약해 늘 비실거리던 그녀도 이제는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행군을 하고 보초도 설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남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현상의 그 말없는 웃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 P-1

그러나 적들은 그들이 웃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다. 탄압의 고삐는 나날이 조여 오고 결단의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후방 없는 유격전의 미래……. 지리산 주변의 각 도당들은 몇 남지 않은 인원을 데리고 기아에 허덕이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 P-1

이현상부대야 워낙 탁월한 전투부대라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각 도당의 처참한 상황은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바로 자신들의 운명이었다. - P-1

함양, 거창을 거쳐 덕유산에 도착한 것은 7월 초순 무렵이었다. 숨쉴 틈도 없이 행군을 계속했는데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근 한달 남짓 걸린 것이다. 처음 보는 덕유산은 지리산처럼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포근하고 정겨웠다. 그만하면 숲도 좋고 산세도 좋아 빨치산이 생활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산이었다. 토벌대는 주둔해 있지 않았다.

이미 이 무렵엔 6.25로 인해 모든 군인이 전선으로 이동한 뒤였지만 놀랍게도 이현상부대는 그때까지 전쟁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이현상부대의 정보가 그렇게 늦었던 것은 당시 토벌대의 횡포가 너무 심해 인민들이 위축되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고, 정세를 모르는 이현상부대가 다급하게 목표한 정보-적의 주둔상황-만 다그치고 훌쩍 떠나버리는 바람에 인민들이 말할 기회가 없었거나, 아니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탓일 것이다.

이현상은 단 한 번도 함부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아주 어린 소년 대원에게나 여성 동무에게나 하급원들에게도 절대 반말을 쓰지 않았다. 너무 깍듯한 말과 태도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선생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일제시대부터 이 나라의 해방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살아오신 분, 언젠가 자기의 지난 시절을 잠깐 얘기하면서 쓸쓸한 어조로 "집사람이 고생 많이 했지요" 하며 자신의 고통은 뒤로 감추며 웃던 분, 자기 큰딸이 그녀와 동갑이라 그녀가 마치 딸처럼 느껴진다며 귀여워해주시던 분, 그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한 자세로 바위에 앉아 텅 빈 마을을 내려다보는 이현상이 그가 앉아 있는 바위처럼 느껴졌다. 붉은 기가 도는 짙은 밤색 안경테가 저녁햇살을 받아 유난히 붉게 보였다.

속리산으로 가기 위해 무주 쪽으로 행군하던 이현상부대는 무주 적상산에 머물면서 정찰병을 내보냈다가 뜻밖의 정보를 입수했다. 정찰병이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만났는데 벌써 한 달 전에 전쟁이 일어나 어제 대전이 함락되고 무주도 경찰이 다 후퇴해 텅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지 여러분! 아직도 안심할 때는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앞서간 동지들의 뜻을 기려 기필코 혁명을 완수하고 새 세상을 건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무주읍으로 진격하려 합니다. 인민들에게 절대로 피해를 끼치지 마십시오. 인민대중 없이는 혁명도 없습니다. 만약 이 원칙을 어기는 동지에게는 가혹한 책임이 주어질 것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공손하게 해야 합니다. 인민은 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 자, 해방의 감격은 조금 미루었다가 무주에 진입한 후에 나누기로 합시다."

"그 유명한 지리산 빨치산 동무들을 이렇게 만나니 꿈 같습네다레. 동무들은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투쟁했습네까? 잠은 어데서 잡네까? 밥은 어떻게 해먹고 불은 어떻게 피웁네까?"

"그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대전에서 중앙지도부를 만나 그동안 우리 지리산유격대의 영웅적인 투쟁을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들을 교란시키고 인민군의 남하를 하루빨리 앞당겨야 합니다. 패주하는 적을 쫓아 부산까지 완전히 해방시켜야 우리의 임무가 끝남을 명심하시고 투쟁의 고삐를 단단히 조여 맵시다. 지금부터 남쪽을 향해 계속 전진합시다. 우리 손으로 적들을 완전히 격퇴합시다!"

남루하던 이현상부대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노획한 미군복으로 갈아입었고, 그동안 전투에서 너무 오래 사용하는 바람에 총구가 넓어진 낡은 총을 모두 버리고 전원 새 엠원이나 카빈으로 단장했다. 무기는 물론이고 식량에 담배에 미제가 아닌 것이 없었다.

빨치산에 죽음이란 살아있다는 것만큼 친숙한 것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의미를 모를 때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아는 순간 죽음은 곧 또 다른 삶인 것이다. 월급을 받고 돈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터에 팔려온 미군들이 자기 죽음의 의미를 알았을 리 없다. 그들에게 만리이국에서의 전사는 그야말로 자기 삶의 끝이며 개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은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미 제국주의에 짓밟힌 조국의 해방이며 억압당하는 삼천만 인민의 해방을 약속하는 징표였다. 어쨌든 미군과 몇 번 싸워보고 미군 포로를 겪어본 이현상부대는 그 뒤로 미군만 보면 지던 싸움도 승리로 이끌 정도였다.

인민군의 도강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며칠쯤 지났을까, 미군 비행기가 계속 북쪽 하늘로 날아가고 미군 트럭들도 밤낮 없이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며칠간 이현상부대에 대한 공격이 잠잠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장 정찰병을 마을로 내려 보내 정보를 수집했더니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해 이미 서울이 함락되었고, 계속 미군부대가 북상 중이며, 이 근처의 미군들도 모두 북상하여 마을이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인민군들도 모두 후퇴했다는 정보였다. 이현상부대라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리하여 꼭 두 달간의 낙동강 시절이 막을 내렸다. 단숨에 서울을 함락하고 대전을 무너뜨렸던, 그 막강했던 인민군의 어떤 부대도 넘지 못한 낙동강을 넘어 백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수십 군데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고 적진 사이를 누비고 다니던 이현상부대는 결국 먼저 후퇴한 인민군의 뒤를 따라 북으로 향해야 했다.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이영회부대를 위해 북상한다는 표지를 남겨놓고. 그러나 아무도 영원한 후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군의 희생자도 거의 없이 잠 한번 맘껏 자보지 못하며 싸웠던 낙동강 시절을 구빨치산들은 이현상부대의 본때를 보여준 가장 치열하고도 가장 탁월했던 한때로 기억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집, 시집을 간다. 그녀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 결혼은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거울을 보고 앉아 소담스럽게 잡히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잘 들지도 않는 녹슨 가위로 싹둑 잘라냈다.

"한문을 배워야 마음이 순해지고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 옥남이도 부지런히 글을 익혀서 신사임당처럼 훌륭한 여자가 되거라."

양남진은 훈장이 없을 때면 그녀를 불러 일본말을 가르쳐주었고,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가야 한다고 그녀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양남진에게 일본말을 배우다 훈장에게 들키는 날이면 무릎을 꿇고 앉아 벌을 받아야 했다.
"옥남이는 조선말을 다 아느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선생의 코피자국은 양남진의 사각모처럼 그녀를 흥분시켰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부서지고 밀려가는 바닷물처럼 양남진이나 김진환을 보고 있으면 멈춰 있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앞을 향해 돌진하는 신선한 힘이, 생명력이 그녀에게까지 옮겨오는 것 같았다.

신들린 사람처럼 졸라대는 어머니를 말리지 못하고 온 가족이 구례로 돌아온 것은 섣달 그믐날이었다. 이상하게 고향으로 가자고 조르던 어머니는 고향에서 봄을 채 보내기도 전에 아이를 낳다 세상을 뜨고 말았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은 최후의 힘까지 짜내 발버둥치다가 결국은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느껴졌다. 양남진의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던 검정 교복이나 김진환의 강의록에 점점이 떨어져 있던 검붉은 코피의 흔적이 자꾸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살아가기 힘들 것이오. 바보같이 나 기다리지 말고, 몇 해 기다려서 오지 않거든 다른 사람 찾아가오. 내가 가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어질 텐데……. 당장 당신 외가로 가 있으려오?"

"어머니, 우리 관산댁 잘해주씨요이. 관산댁 참 좋은 사람이요, 어머니."
그녀의 친정이 관산리이니 관산댁은 곧 그녀를 가리키는 택호였다. 내내 울먹거리는 시할머니와 시부모에게 활짝 밝은 웃음을 보이며 남편은 곧 그들 곁을 떠나갔다.
"출전용사 최규복 만세!"
"살아오라 김갑동!"
"무운장구!"

수많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지만 살아서 돌아오기는 남편이 처음이었다.

그 봄부터 남편은 군청에 다니기 시작했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지만 읍내까지 다니기가 너무 멀어 두어 달 뒤 면으로 옮기더니 무슨 까닭인지 금세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남편은 조금씩 변해갔다. 남편의 귀가시간이 한 시간씩 두 시간씩 늦어져갔다. 드디어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밤을 새웠는지 첫새벽에 충혈된 눈으로 들어온 남편은 아침도 거른 채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매국노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가라!"
"타도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
"정권은 인민에게로!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로!"
삐라에는 붉은 글씨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남편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예, 좋은 세상 만들라고요."
"해방이 됐는디 또 먼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남편이 그토록 빠져 있는 좌익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남편이야 무슨 일을 하든 그녀는 여전히 층층시하 대가족의 맏며느리일 뿐이었다.

47년 7월 그녀는 남조선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광의면 여맹위원장이 되었다.

"우리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근데 우리가 언제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여자라고 공부도 못했고, 부뚜막에서 밥을 먹어야 했고, 딸자식은 딴 집 식구니 입이나 줄이자고 철도 안 든 나이에 시집을 가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친정에서나 시집에서나 태어나면서부터 종처럼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여자들이 남자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받으려면 봉건적 잔재와 계급을 타파해야 합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르르 방으로 몰려들어온 경찰들이 곡괭이로 방구들을 내리쳤다. 백년 묵은 방구들이 곡괭이에 부딪쳐 불꽃을 튀기며 부서졌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이 개 같은 놈들. 짐승이라도 이러진 않겠다아 이놈들아!"
시어머니가 바락바락 악을 쓰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단지 목숨만 붙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절망스러운 것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기를 그렇게 만든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삶이 아닌 것 같은 시집살이를 하면서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한겨울에 차가운 물 속에 들어앉아 있자니 춥기도 하려니와 장이 상했는지 점점 설사가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피똥이 나왔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참고 견디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광의면당은 천은사골, 화엄사골, 문수골 등 주로 노고단 근처를 넘나들며 토벌대의 끈질긴 공격을 피해 다녔다. 토벌대가 물러간 밤에는 각 마을로 내려가 정보를 수집하거나 비밀조직을 만들고 보급투쟁을 하는 등 당 정비, 강화사업에 주력했다.

좌익 가족은 개보다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박춘산의 어머니를 쫓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막내 박병주의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잘 익은 밤송이처럼 단단하고 야무지던 병주는 나중에 남부군 사령관 박종하의 연락병을 지냈는데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 길이 없고 박춘산도, 그의 어머니도, 누이 정숙도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토벌대의 총탄에 쓰러져 한 많은 눈을 감아야 했다. 무덤 하나 없이 온 식구가 남녘의 산에 뿔뿔이 흩어져 한줌의 흙으로 썩어간 것이다.

"아니요! 안 봤어라. 형수 안 봤다고라. 나는 산에도 안 갔어라!"
아홉 살짜리 소년은 기어이 형수와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어린 시동생이 자기와의 약속을 지켜내느라 어떤 고초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시간만 나면 시아버지와 시동생들이 힘없이 걸어 내려가던 골짜기를 쳐다보았다.

그 날 이후 그녀는 시아버지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며느리 얼굴 한 번 보았다는 죄로 끝내 총살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등사기를 짊어진 남자가 누구인지, 그가 나중에 그녀와 어떻게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채 두 사람의 짧은 첫 만남은 그렇게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속에는 세 남자의 활기찬 모습과 힘차게 휘날리던 빨간 스카프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등사기를 짊어진 남자는 바로 유혁운이었다.

그때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최후의 시기가 지나고 절망에 빠져 새롭게 주어진 삶 앞에서 방황하던 시절에 다시 만나 동지로 연인으로 부부로 살아갈 바로 그 유혁운이었다.

"선생님!"
그녀는 말없이 버선을 내밀었다. 노 동무는 그녀가 내미는 버선을 받아들고 싱긋이 웃었다.
"고맙소. 잘 신겠소. 그런데 내가 버선이 없는 줄을 어떻게 알았소?"

그 뒤로 몇 번 구례군당에 들른 노 동무는 그녀를 보면 다가와 아이를 얼러보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면서 그녀를 격려하곤 했다. 이 노 동무가 바로 그 유명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었다. 그녀는 얼마 후 남부군으로 소환되어 이현상의 측근에서 일하게 된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심지어는 핏덩어리 아이까지도 무참히 짓밟는 것, 그게 바로 적들의 본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무렵 경찰들은 동부와 서부의 연락선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연락선을 잡으면 동부와 서부를 각기 고립시킬 수 있어 토벌작전을 수행하기가 용이해지는데다 정보를 많이 갖게 돼 큰 건수를 올릴 수도 있고, 연락선은 유격부대가 아니니 생포하기도 용이했다. 연락원들은 날마다 연락을 다녀야 하니 일이 고되기도 하려니와 백아산 요소요소에 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결찰들이 잠복해 있어 사잣밥을 싸 가지고 다녀야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단한 사람이드만요이.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해갖고 시방 총사에 와 있다만요. 두 사람이 탈출을 했다는디, 그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에서 워트케 탈출을 했는가 몰라요. 유격대원도 아니고 당일꾼임서."

수많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쏴대는데 다행히 총이 목 근처로 스쳐 지나갔다. 옆 사람이 푹푹 쓰러지기에 자기도 죽은 척하고 시체더미 위로 쓰러졌는데 시체가 워낙 많으니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국방군이 사라졌다. 시체더미 속에서 하루 종일 쓰러진 그 자세로 꼼짝도 않고 있다가 밤이 되자 자기 위로 수북이 쌓인 시체를 걷어내고 그 길로 입산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멸해가는 당과 죽음을 선택했다. 그렇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역사에도 남아있지 않고 더러는 자신의 호적에조차 남아있지 않다. 후손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아예 살다 간 흔적조차 지워버린 것이다. 자신의 부모를, 형제를 그렇게 부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당연히 당의 명령에 따라야지요."

"아이, 아가…… 니가 안 죽고 살아 있었냐. 살아 있었어이……."

밥이라도 싸올 것인디, 니를 만날 줄 알았으먼 보리밥이라도 한 뎅이 싸올 것인디…….

김정식은 그 후에도 오래도록 그가 붙잡혀 그날 얘기를 불까봐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그날 옆에 같이 있던 친구가 김정식에게 혁운이는 절대 그럴 친구가 아니니 우리 입만 다물면 알 사람이 없다고 계속 달래 주어서 마음을 놓았던 김정식은 훗날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나온 그를 붙잡고 술을 사라며 난리였다.
"나 아니었으면 자네가 시방 여그 서 있을 목숨이 아니네. 내가 그날 총만 댕겼어 보라고."
"아따, 내 총은 어디 있었간디."
"사실 자네가 총을 댕길까봐 얼마나 겁이 났는지 앙가. 나도 총을 쏠까 어쩔까 그 짧은 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들대. 하여간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이여."

친구고 부모고 없던 그 험난한 시절에도 어디에나 아름다운 사연은 많았다.

8월 19일. 일주일 후면 김춘옥은 산을 떠난다. 1950년 9.28후퇴와 함께 입산했던 만 2년의 산생활이 끝나는 것이다. 이제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이다. 과연 그녀가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을까. 바깥사회의 고통은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가는 총알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스며들어 어느 날인가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안일함이나 긴장의 이완이다. 어쩌면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적보다 훨씬 어려운 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길이었다. 숨막히는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갔다. 백운산의 여름은 점점 뜨겁게 타올랐다.

죽고 사는 것도 자신의 자존심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죽는 것은 깨끗하고 단순하고 고결하지만, 그럼 그에게 맡겨졌던 임무는 어쩔 것인가.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서 임무를 완수하시오, 완수하시오, 완수…….

운명? 그렇다. 이제 그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나가야 했다. 미처 준비도 끝나기 전에 갑작스레 다가와 버린 일이지만 어차피 그의 임무는 지하조직의 건설이었다. 그의 운명도, 전남도당의 운명도, 이 땅 사회주의운동의 운명도 그가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지프는 어둠을 가르며 보성-화순 간 국도를 달려갔다.

도민증을 만들려면 사진 위에 철인을 찍고 경찰서 관인과 서장의 개인도장이 있어야 했다. 그까짓 것, 하던 홍고는 정말 쉽게 도민증을 만들어왔다. 서장실에 무시로 출입하던 홍고가 서장 옆에서 조는 척하고 있다가 서장이 홍고만 두고 나간 사이 몰래 찍어 나온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일수록 죽음은 집요하게 쫓아다닌다. 권상수뿐만 아니라 수많은 배신자들의 최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왕규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는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요. 나는 적어도 우리 조선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김왕규는 일제시대에 일본정부의 관료로 출세한 친일파요. 그런 친일파가 해방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애국자 행세를 하며 설치고 있소. 나는 그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오. 김왕규는 자기 입으로 자기를 애국자라 하며 나를 비애국민으로 매도하지만 과연 누가 애국자고 누가 비애국민이오? 내가 취조를 받기 위해 검사 방에 갈 때마다 김왕규는 양담배를 수북이 쌓아놓고 피워댔소. 전쟁이 끝나고 우리 민족의 경제를 부흥, 발전시켜야 할 이 마당에 양담배를 피워대다니! 그가 과연 애국자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오. 누가 애국자였고 누가 이 민족을 위해 살았으며, 누가 사형을 언도받아야 할지는 역사가 반드시 증명할 것이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이 아니라 능지처참형을 선고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애국적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미제의 앞잡이들이 선고하는 무엇도 인정하지 않소!

"사내대장부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법이다! 대세를 따라가는 것은 소인배의 삶이지……."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그들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꿈꾸었던 해방의 날은 멀어지고 당분간 반동의 시대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미제의 식민지정책은 더 노골화될 것이고, 권력을 잡기 위해 조국을 미제에 팔아먹은 반동권력의 횡포도 점점 더 심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영원한 후퇴란 없다. 언제일지는 모른다. 그들이 다 죽고 난 뒤, 어쩌면 한 세기 뒤일 수도 있다. 세게 눌린 용수철일수록 더 거세게 튀어 오르듯이 억압당하는 인민들은 언젠가 다시 자신들의 피로써 항거할 것이고, 미래의 새로운 세대는 한국현대사의 초기에 피로 씌어진 역사의 바탕 위에서 더욱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그 밑거름만 되어도 좋다. 자기가 반드시 살아서 그날을 봐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권상수 같은 비겁한 배신자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지 않고 일본으로 가는 밀항 루트를 개척할 수 있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얼마 남지 않은 빨치산 동지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자책감만이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박영발도 54년 1월 뱀사골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권총으로 자결(최근 박영발이 자결한 게 아니라 함께 비트에 있던 주치의 박 모에 의해 사실되었다는 빨치산 출신 박남진의 증언이 있었다. 당시 박영발이 지리산 비트에서 운영한 ‘조국출판사’ 필경사로 일하던 박남진에 의하면 주치의 박 모가 총상을 입은 후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다 1954년 2월 21일 비트 보초를 서던 중 박영발과 무전사, 여성비서 등에게 30연발 카빈 소총을 난사했다고 한다)했으며, 오금일도 김선우가 자폭한 직후 통명산에서 부상당한 채 포로로 잡혔으나 연행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남의 최고지도부는 최고지도부답게 장렬한 최후를 맞아들인 것이다.

투쟁인민 중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유격대나 당기관으로 배치돼서 사상훈련을 받았지만 노인네들은 사상이랄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좌익보다 우익의 탄압이 더 심하고 자기들이 보고 겪어보건대 좌익들이 더 나으니까 그저 좌익을 따라온 사람들에 불과했다. 죄라곤 그것밖에 없는데도 투쟁인민의 대부분은 무기수였다.

"선생님,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저의 임무가 바로 조직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대부집 아씨처럼 안방에만 갇혀 산다면 사상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대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 아닙니까?"

"선생님,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저의 임무가 바로 조직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대부집 아씨처럼 안방에만 갇혀 산다면 사상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대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 아닙니까?"

나는 무엇인가? 살아남아서, 세상으로 나와서 무엇을 했는가? 스스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철저하지 못한 사상성 때문인가, 아니면 반동의 시대 때문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아무튼 그는 전향을 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김규호는 그대로 특사에 남았다. 그가 사랑했던 많은 동지들은 남녘의 산과 들에서 죽었다. 남한에서의 치열했던 사회주의 운동은 교도소 특사에 갇힌 채 막을 내렸다. 그의 앞날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과 치욕의 삶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