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공국사탑비 원공국사 승묘탑비는 돌거북 받침대와 용머리 지붕돌을 모두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비신은 가늘어 날씬한 편인데, 받침대와 지붕돌은 꽤 큰 편이어서 안정감을 주며 조각 기법도 매우 치밀하다. 돌거북의 머리는 거북이 아니라 양의 머리처럼 조각한 것이 특이하고 목을 바짝 세우고 입을 꽉 다물어 야무진 느낌을 준다. - P357
원공국사 승묘탑 원공국사 승묘탑(보물 제190호)은일제강점기 때 서울에 살던 일본인이 훔쳐서 서울로 옮겨간 것을 회수해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다. - P359
어째서 21세기 사람들은 1,000년 전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느냐고 힐난을 보내니 우리 시대 문화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을 그저 안타까워할 뿐이다. - P361
지금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장선우 감독이 한창 영화에 열을 올리고있을 때 거돈사터를 무대로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서울대 이애주 교수는 "달밤에 여기서 춤 한번 춰보고 싶다"고 했고, 음악 애호가들은 "여기서 야외음악회가 열리면 환상적일 것 같다"고 했다. 언젠가 석양 무렵 거돈사터에 왔을 때 나도 그런 꿈을 그려보았다. 석축에 관객들이 둘러앉아 불상 좌대를 무대로 삼아 음악회를 열어보는것이다. 그때 내 마음속에 떠오른 레퍼토리는 이생강의 대금산조, 이애주의 살풀이춤, 김덕수의 사물놀이였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한 명 데려올까 생각하니 불현듯 떠오른 것은 야니(Yanni)의 피아노 연주였다. - P361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우리나라의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비석이다. 조각이 섬세하고 비문 글씨도 뛰어나 가히 국보라 할 만하다. - P369
지광국사 현묘탑비의 디테일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자 천하의 명작이다. 특히 탑비의 조각이 더없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우리나라 조각에 이처럼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 있었던가 싶다. - P371
지광국사 현묘탑 지광국사 현묘탑비 바로 곁에 서 있었던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은 높이 6.1미터의 승탑으로 팔각당이라는 기본형에서 벗어난 대단히 화려한 2층탑이다. 일제 때 일본에 반출된 것을 되찾아 경복궁에 세워놓았지만 한국전쟁 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이를 다시 짜맞추어 간신히 복원해놓았다. - P373
다산 정약용도 유배객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담배라고 하며 이렇게 읊었다.
요즘 새로 나온 담바고 유배객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지 살짝 빨아들이면 향기 그윽하고
淡婆今始出 遷客最相知 紐吸涵芳烈 - P378
슬그머니 내뿜으면 실처럼 간들간들 객지의 잠자리 언제나 편치 못한데 봄날은 왜 이리도 길기만 할까
微噴看裊絲 旅眠常不穩 春日更遲遲 - P379
그리고 고별연 마지막 연기를 내뿜으면서 소월이 애절하게 노래한「담배」라는 시를 아련히 그려보았다.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가지로 지나가라. - P379
비두리라는 시골 동네 길이란 묘해서 나올 때보다 들어갈 때 멀게 느껴진다. 초행일 때는 특히나 심하다. 나올 때는 길을 잃지 않지만 찾아 들어갈 때는 행여 길을 잃을까 어리벙벙해지기도 한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있고, 길도 잘 닦여답사 다니면서 헤매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1980년대만 해도 지방도로는 비포장길이 많았고 특히 폐사지 가는 길은 거의 다 흙먼지 날리는 비좁은 길이었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어 길을 잃기 일쑤였는데 한번 길을 잘못 들어서면 큰 버스를 되돌려 나오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 P381
"우리는 비두네미라고 하는데 군에서 저렇게 써 붙여놓았구먼. 동네이름은 비두리라고 합니다." "왜 비두리라고 해요?" 그러자촌로는 길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비석받침돌거북이가 하나 있어서 비석 비(碑) 자에 머리 두(頭) 자를 써서 비두리(碑頭里)라고 불렸다오." - P382
비두리 귀부와 이수 비두리 귀부와 이수(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0호)는 규모도 웅장하거니와 귀부의 귀갑문과 이수의 운룡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 우람한 몸체의 목에 돋은 비늘이 선명하고 고개를돌린 모습까지 사실적이다. - P383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진공대사탑비 진공대사 탑비에는 당 태종글씨의 멋이 잘 드러나 있다. 신운이감도는 듯한 리듬이 있다. 이런 명비이건만 크게는 두 동강으로 잘려나가원주 반절비라고 불리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P397
자신을 낮춰 말했지만 그것은 겸손이었다. 왕건은 진공대사의 행적을 일일이비문에 밝히고 난 뒤 대사의 열반을 애도하는 대목에서는 이런 비유로표현했다. 지금 비록 스님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 진실인 법제(法體)는 길이남아 있도다. 전에는 물이 고이니 고기가 찾아옴을 기꺼워했건만 이제는 숲이 없어지니 날아가는 새를 슬퍼하도다. 학식이 얕은 사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그리고 왕건은 대사를추모하는 명(銘)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맺었다. 보배를 감추고 법인(法印)을 알았도다. 자비의 그 배는 풍랑에 빠졌고지혜의 등불은 그 빛을 잃지만은빛 석등의 불꽃은 영원히 비추리. - P399
염거화상 승탑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이 흥법사터에서 불법 반출해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실패한 후회수돼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 승탑은 흥법사터에서 옮겨왔다고 전하지만 절터에서는 그 원래 자리가 확인되지 않았다. - P401
조선 초기 성종 때 대학자인 서거정은 우리가 다녀온 법천사와흥법사 등 남한강변의 사찰을 여행하면서 지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법천사의 뜰에서는 탑을 보며 시를 읊고 흥법사의 대 앞에선 비석을 탁본하네
法泉庭下詩題塔 興法臺前墨打碑 - P402
문막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영동고속도로에 문막휴게소가 생기고부터다. 그러나 문막은 본래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상에서 원주의 초입이 되는 오래된 마을이다. 문화재 조사에서 첫 단계인 지표조사를 할 때는 우선 나무부터 살펴본다. 근처에 오래된 느티나무가있으면 마을이 있었다는 증거이고 감나무가 많으면 민가가 있었다는증거다. 그리고 해묵은 은행나무가 있다면 마을 역사가 그 나이만큼 올라간다는 뜻이다. 문막에는 흥법사의 연륜과 맞먹는 은행나무가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1495-1번지)다. - P402
아쉬움이 있다면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인지라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은 내가 답사객들에게 그것을 아쉬움으로 말하자 곁에서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던 동네 어른이 내 말을 가로채면서 나섰다. "이 은행나무가 수나무라는 건 맞는 말이여. 그래서 은행을 맺지 않는다는 것도 맞는 말이여. 그러나 이 은행나무가 있어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은행나무 암컷 100여 그루가 실한 은행을 맺고 있으니 그게 얼마나고마운 일인감, 서운키는 뭐가 서운하단 말이여!"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동네 신목에 와서 흠을 잡느냐는 호통이었다. 그때 답사회원들은 반계리 촌로에게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박수는 분명 깊은 향토애를 나타내는 촌로에게 존경의 뜻으로 보냈음이틀림없다. 그러나 항시 답사 질서를 지키라고 회원들을 야단치면서 엄하게 굴던 인솔자가 보기 좋게 녹다운된 모습이 고소해서 박수 소리가 더커졌다는 것도 내가 잘 안다. - P405
비두리나 문막에서 겪었듯 시골 촌로들의 향토애는 참으로 귀하고 존경스러운 것이다. 반계리 촌로의 일갈 이후 나는 그동안 언필칭 객관적으로 말한답시고 그야말로 ‘남의 동네 얘기하듯‘ 해온 걸 미안하고 죄스럽게 생각하며 다시는 답사길에 남의 동네 가서 아쉽다느니 어디 있는무엇에 비해 못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아는 데까지 30년이 걸렸다. - P405
나옹선사가 지었다는 「참선곡」은 오늘날까지 널리 수행의 지침으로 되어 있다.
하하 우스울사 허물 말 우스울사 엇지하야 허물인가 본래공적 무상(無常事)를 누설하야 일렀으니 엇지 아니 허물인가 - P430
나옹선사 진영 고려시대 마지막 고승이었던 나옹선사의 영정이 여러 폭 전하는데 그중 가장 우수한 것은 현재 평양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다. 나옹선사의 사리는 둘로 나누어 나옹선사가 주석했던 양주회암사와 신륵사에 승탑으로 모셨다. - P431
나옹선사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청산은 나를 보고(靑山要我)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要我以無垢聊 無怒而無惜兮 如水如風而終
(이 시는 다른 스님이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중국 한산(山)스님이지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나옹선사가 지은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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