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호메이니 그리고 이란 혁명 - P80

국왕이 이란을 뜨고 몇 주 뒤 1979년 2월 호메이니는 백만명이 넘는 인파의 환영을 받으며 드디어 테헤란에 입성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왕관이 <터번>으로만 바뀌었다는 사실을. - P82

하지만 호메이니가 "이슬람은 정치적이다.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천명했던 것은 무슬림형제단 (Muslim Brotherhood,  1928년 이집트에서 창설된  단체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운동 단체)의 쿠틉 추종자들이 10년 이상을 전파해온 바로 그 말이었다. - P83

테헤란에 입성한 그날, 호메이니는 국민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내가 정부의 이름을 짓겠다."라고. "누가 당신에게 투표했는데요?"라고 채 묻기도 전에 공포가 시작되었다. - P83

악명 높은 파트와(fatwa, 이슬람법에 따른 결정이나  명령)는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가 쓴『악마의 시』 라는 작품을 문제 삼기도 했다. - P85

종교를 빙자한 억압과 그에 분노한 시민들 - P86

최고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듬해인 1989년에 사망했고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 P87

수니파 국가들에 둘러싸인 시아파 국가 - P92

"이스라엘은 도려내야 할 암 덩어리다." 
이렇게까지 비난이 이어지는 것은 종교에 뿌리박은 병적인 증오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P95

미국과의 정략결혼은 계속 이어질까? - P96

1979년 11월 한 무리의 무장세력이 미대사관을 습격해서 50여 명의 미국인을 인질로붙잡았다. 이후 444일에 걸친 위기는 지미 카터대통령의 재선 가도를 막았고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일조했다. - P97

자국의 혁명가들을 비웃는 국민들 - P100

"하메네이에게 죽음을!" 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고 대중은 이란의 대외정책을 소리 높여 비난했다. "가자도, 레바논도 아닌, 이란에서의 내 삶을." 그리고
"시리아로부터 손을 떼라."라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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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10월 12일]라파르트 Rr
최근엔 사생화를 아주 많이 그렸다네.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겠다는 사람들을 몇명 구할 수 있었거든. 덕분에 삽질이나 바느질 등 다양한 포즈를 취한 남녀들의모습을 습작했지. 요즈음은 주로 목탄과 콩테 연필로 작업하는데 세피아 물감과수채화 물감도 시도하고 있어. 내가그린 데생에서 자네가 어떤 발전을 간파하게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변화를 확인할 수는 있을 거야. - P44

아, 저 들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모델료로 좀 더 많은비용을 들인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럴 거라고 장담할수 있어! - P44

사실 난 최근에 데생을 많이 했단다. 특히 인물 습작을 많이 했지. 이것들을 보면 내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게 될 거다. - P45

요즈음엔 아이들도 그렸는데 아주 즐거웠단다. - P45

1881년 겨울, 반 고흐는 그 해 봄부터 함께 살던 부모와 불화를 겪는다. 남편을 잃은지 얼마 안 되는 사촌에게일방적인 관심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1882년 1월에 헤이그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틀리에를 빌려 데생과 스케치 연구에 몰두하면서 미술계에서 알고 지내던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 P47

행복한 가정에 대한 고흐의 꿈은 한낱 환영에 불과했다. - P47

정말이지 난 풍경화 화가는 아니야. 풍경화를 그리고 보면 그 안엔 늘 비유적인 무언가가 존재하니 말이다. - P52

[1882년 3월 24일]
요즈음 난 무척 고된 작업을 했단다. 지금도 아침부터 밤까지 일에 매여 있어.
이처럼 작은 마을의 풍경을 거의 매일 그린단다. 이제야 요령을 터득해가고있지. - P55

[1882년 4월 초]
날씨가 얼마나 화창한지 몰라. 사방에서 봄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인물화는 내게 가장 중요한 작업인 만큼 멈출 수 없지만 간혹밖으로 나가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도 있단다. 하지만 지금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만큼 이대로 팽개쳐둬서는 안 되겠지. - P58

테르스테이흐가 말하더군. "예전에 자네는 운이 나빴지. 그래서 실패한 거야.
그런데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어" 라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지금은 전과는 아주 다른 상황이니까. 그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거지. - P60

나의 ‘처신‘ 에 관한 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었으면해. 내가 품위 있는 옷을 입는다면 모델로 쓰고 싶은 일꾼들이 겁을 먹거나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테지. 아니면 내게 많은 돈을 요구하거나. - P60

그렇다면 나는 어느 면에서 거칠고 교양 없고 세련되지도 않은 그런 사람일까? - P61

그런데 말이지, 내 생각에 정말로 예의바른 태도는 전적으로 모든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거야. 마음씨 고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러니까 자신이 무언가 쓸모 있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거지. - P61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함께살아야 한다는 궁극적인 필요성을 깨닫기 때문이야. 그러기 위해 나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려고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또 누구나 알지는 못하나 주목할 필요가있는 문제들에 그들이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거란다. - P62

내가 그리는 사람들과 함께지낸다고 해서 스스로를 천박하게 만드는 걸까? 일꾼이나 가난한 사람의 집에 들어간다고 해서, 또 그들을 내 아틀리에에 들여놓는다 해서, 나 자신이 싸구려가 되는 걸까? - P62

이것들은 내 직업의 일부라 생각해. 그러니까 그림이나 데생에 대해 아무것도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비난이지. - P62

[1882년 5월 1일]
목수의 연필에 관한 한 내 생각은 이렇단다. 옛 대가들은 무엇으로 그림을 그렸지? 분명 파버 B, BB, BBB 따위가 아니라 거친 석묵으로 그렸을 거야. 미켈란젤로와 뒤러가 사용한 도구도 아마 목수의 연필과 아주 흡사하겠지. 그 시대에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한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단다. 이런섬세한 파버 제품들도 목수의 연필만큼 강력한 효과를 낼 수는 없다는 것을. - P62

나는 정교하게 다듬은 비싼 파버보다 가공하지 않은 석묵이 더 좋아. - P62

그건 그렇고 성 제롬처럼 근사한 노인이 이곳에 한 명 있어. 키가 크고 마른,
강인한 주름투성이 갈색 몸의 남자야. 관절 하나하나가 놀랄 만큼 뚜렷하고표정이 풍부해서 이런 남자를 모델로 쓰지 못해 마음이 우울할 지경이란다. - P63

그래도 할 수 없지. 이대로 노력하면서 계속 싸워갈 수밖에. - P63

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물화 풍경화, 감상적인작품이 아니라 진지한 슬픔을 담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단다. - P64

이것이 내 야심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분노보다는 사랑에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근거한 야심이지. 때로 성가신 일을 겪더라도 마음속에는 고요하고 순수한 조화와 음악이 자리하고 있단다. 더없이 누추한 헛간이나 지저분한 구석에서도 난 그림이나 데생의 소재를 찾을 수 있어.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충동의 부추김을 당한 듯 내 영혼은 이 방향을 지향한단다. - P64

내게 밝은 미래가 있을지 여부는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에 달렸다고 믿어.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다른 어떤 길도 아닌 이 길로 묵묵히 투쟁을 계속해나갈거야. 내 작은 창을 통해 자연의 면모들을 즐겁게 관찰하며 애정을 다해 성실히 그것들을 그럴 생각이지. 누군가로부터 방해를 받으면 그저 방어하는 걸로만족할 테다. 이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 그 무엇도 나를 이 길에서 돌려세울 수 없을 거야. 원근법의 독특한 효과는 복잡한 인간사보다 더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단다. - P65

자연과 예술을 향한 진지한 사랑 덕분에 열정과 지혜를 가지고 일한다면 사람들의 견해에 맞서 일종의 갑옷으로 무장하는 셈이지. 자연은 엄격하고 가혹하기조차 하지만 절대로 우리를 속이지 않으며 늘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준단다. - P67

이 모두가 내 기분을 더욱 북돋워주지. 싱싱한 녹색이나 부드러운 청색, 그리고 수없이 다양한 톤의 회색, 이것들에 내가 겁먹지 않는다는 걸 너도 알게 될거야. 붉은 회색, 노란 회색, 초록 회색, 푸른 회색 등 회색을 띠지 않는 색은거의 없단다. 모든 색을 섞으면 이런 회색이 되는 거야. - P67

지금 네게 보여주려는 데생들에 대해서는 한 가지 생각뿐이란다. 내가 같은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제대로 발전하고 있음을 네가 이 그림들을 보면서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상업적 가치에 대해서는 한 가지 사실만 말할 수 있을뿐이지. 그것을 다른 그림들처럼 정해진 경로대로 팔 수 없다면 몹시 의아해할 거라고. 당장 팔릴지 더 기다려야 할지는 네게 맡기겠다. 성실하고 끈질긴작업만이 이 모두가 헛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방법이겠지. - P68

자연에 대한 느낌과 사랑은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에겐 조만간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야 말 거야. 자연에 완전히 몰입해서 자신의 모든 지성을 동원해 그 느낌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작품 속에 표현하는 것이 화가의 의무겠지. - P68

상업적인 판매를 목적으로 일하는 건 그리 올바른 방법이 아닐 뿐더러 예술을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롱하는 짓이 될 거야. - P68

그럼 잘 지내거라. 내게서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순과 온갖 악의를 들추어내며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 언젠가 웃어줄 날이 있을 거야(나라는 사람은 자연과 학문, 일의 친구며, 무엇보다 그저 사람들의 친구이니 말이다). - P68

우리가 스헤베닝언에서 함께 본 모래, 바다, 하늘을 살아 있는 동안 언젠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단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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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는 어떻게 나라의 운명을, 세계의 분쟁을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가 - P1

지리의힘 2
모든 나라의 이야기는 그 <위치>에서 시작된다.
21세기에도 계속되는 지정학적 갈등,
세상은 변했지만 지리는 변하지 않았다. - P1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 P1

"매는 매부리(사냥에 쓰는 매를 기르고 부리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사물이 무너지고 중심이 지탱할 수 없다."
- W. B. 예이츠, 재림」 중에서 - P1

중동 지역에서는 광활한 요새인 이란과 그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르시아만을 마주한 채맞서고 있다. 태평양 남쪽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시대 최강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리매김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중해에서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와 터키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당장 내일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 - P1

이제 우리는 양극 시대에서 벗어나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 규범과도 같았던, 여러열강들이 경쟁하는 <다극화  시대>로 회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P1

나는 프리슈티나에 있었다.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은  내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나토군에 앞서 러시아군이 코소보로 밀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러시아인들이 도심으로 밀고 들어옴으로써 세계 무대에 복귀했다."라고 썼다. - P7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은 얼핏 종교 의식처럼 보이지만 정치적이기도 하다. 열정에서 비롯된 이 파도는 지중해 지역에까지 그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는 거였다. - P8

미국은 오바마 정부 8년 동안 국제 무대에서 조금씩 퇴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기조는 트럼프 정부 4년 동안에도 이어졌다. 반면 인도, 중국, 브라질 같은 나라들은 빠른 경제성장을 등에 업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세계 속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했다. - P9

석유가 아니라 물이 혼란을 빚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아프리카의 급수탑인 에티오피아는 물에 관해서라면  이웃 나라들에 비해 결정적인 이점을 안고 있다.  특히 이집트에 비해 그렇다. 이 때문에 이번 세기에 벌어질지도 모를 물 전쟁에서 핵심 지역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게다가 에티오피아는 향후 국운을 바꿀 수 있는 수력 발전 기술의 위력도 보여주고 있다. - P12

즉 <신 오스만 neo-Ottoman> 건국이라는 터키의 의제는 그 제국의 역사는 물론 동서양의 교차로라는 위치에서유래한다. 따라서 이 의제가 추구하는 것은 주요패권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터키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 P13

우리 시대에 가장 경이로운 발전을 꼽는다면그것은바로 지정학상의 권력 투쟁이 지구라는한계를 넘어 우주로 투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 P14

오스트레일리아,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 P16

"혼신의 힘을 다해 거칠게 경기하라. 아예 상대를 갈아서 먼지로 만들어 버려라."
돈 브래드먼(오스트레일리아 크리켓 선수) - P17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
그러나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3분의 1도 안 되는 - P20

미지의 남쪽 땅을 노린 낯선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는 사람들 - P25

흔히 잘못 알려진 사실은 1770년에 영국의 쿡 선장이 이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발견이라는 문제 많은 단어를 제쳐두면, 기록으로 남겨진최초의 상륙은 1606년 네덜란드인 빌럼 얀스존과 그의 선원들이 두이프겐호를 타고 이 대륙의북쪽 해안에 발을 디딘 것이다. 당시 얀스존은 그곳이 뉴기니섬이려니 했다. 이후 그는 토착민들의 적대적인 반응에 곧장 그곳을 떠났는데 그 뒤로 몇몇 유럽 탐험대들이 왔다 갔지만 내륙을 탐험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 P25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필립스 총독은 시드니 주변에 살던 에오라족, 다루그족과 협상을 벌였다. 최초의 접촉 이후 교역에 바탕을 둔 초기 대화가  이뤄졌는데 에오라족이나 다루그족은 낯선 이방인들의 의중이 단지 교역이 아니라 그들의 <땅>에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P28

특히 원주민들은 대량 학살을 당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아무런 권리도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은 안타까운일이다. 실제로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식민지 주민들이 많았다. - P28

20년도 채 못 돼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들을 거의 쓸어내 버렸다. 우리는 개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총질을퍼부었으며전체 부족들을 극심한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들을 술독에 빠뜨리고, 질병을 퍼뜨려서 성인들의 뼈를 썩게 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을 겪게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냈으며 머지않아 전멸될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 P28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라면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등록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원주민들의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고 있다." - P29

유색 인종은 거부하는 백호주의 정책 - P32

이듬해인 1900년 7월5일 영국 의회는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헌법을 통과시켰고 나흘 뒤에 빅토리아 여왕이 서명했다.
그리하여 1901년 1월 1일, 6개의 영국령 식민지들이 연합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구성했다.
당시 50만 명의 시민들이 시드니 거리로 쏟아져나와 이것을 환영했다. - P34

"관리자가 지정한 유럽 언어로 50단어를 넣어 문장을 말하고 그가 말한 내용을 받아쓰지 못한 사람은 이민이 허용되지 않는다." - P34

우리는 경계 없는 벌판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용기를 갖고 우리 모두 함께합시다.
공정한 오스트레일리아가 전진할 수 있도록. - P35

다문화 국가 현대 오스트레일리아의 탄생 - P35

이는 결과적으로 본래 브리티시 또는 앵글로-켈틱 사회가 다문화 국가로 변모되는 뚜렷한 문화적 변화를 불러왔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보고있는 190개 국가의 유산을 지닌 국민들이 만든현대 오스트레일리아로의 급속한 변화였다. - P36

풍부한 천연자원, 하지만 부족한 물과 기후변화 - P38

에너지에 대한 접근은 오스트레일리아에게는중대한 사안이다. 이 나라의 위치와 지리를 감안할 때 이는 곧 안보 이슈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 P41

해상 봉쇄에 속수무책이 되는 나라 - P41

가장 중요한 동맹국은 영국, 미국, 아니면 중국?
위의 시나리오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는 해군력에막대한 비용을 쏟아붓는 것 못지않게 동맹을 신중하게 고르는 등 외교력에도 힘을 모으고 있다. - P43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태평양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민주주의를 위한투쟁 계획이라는 방향으로 모든 힘을 모아야 하는 최우선 과제로 보고 있다. 어떠한 방해도 없다면, 나는 우리가 미국을 바라봐야 한다고 분명히밝힌다. 영국과의 전통적인 관계 또는 연대에 급격한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 P44

"오스트레일리아는 나아갈 수 있고, 영국은머물 것이라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 P44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보다 큰 관심사는기기기기영유권 주장과 영향력 확장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이해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P49

중국과의 관계, 관리 자체가 쉽지만은 않은 - P49

어쨌거나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 P55

이란,
세계와 기싸움을 벌이며
신의 과업을 수행 중이다 - P60

"이슬람은 정치적이다.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1900~1989년, 이란 전 최고지도자) - P61

이란은 두 가지 지리적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
하나는 국경지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딱딱한빵의 가장자리 같은 형태의 산맥이고, 다른 하나는 평행하듯 달리는 저지대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내륙의 평평한 소금사막이다. 산맥은 이란을 일종의 요새로 만들어준다.  어느 각도로든 이 나라로 접근하려고 하면 느닷없이 떡하니 가로막는고지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 P61

어떤 곳에서는 지표면에 있는 소금층이 물에 잠길 만큼 깊은 진흙층을 숨기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곳을 만나면 발이 푹푹 빠질 정도다. 사막에서 익사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게 죽는 방법이 있을까 싶다. - P62

미국이든 다른 어느 나라든 선뜻 파병을 결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나라. - P63

전 합동참모본부 의장이었던 미 국무부 장관 콜린 파월은 이란과의 전쟁은 공군력만 가지고는 승산이 제한적이며 전쟁이길어지면 결국 지상군 투입이 필요할 것이라고보았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그는 "사막은 가능하지만 산은 가능하지 않다."라는 오래된 격언을 들춰냈다. 미국과 이란은 저마다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무엇보다 이란의 역사는 이 나라 산악지대에서 죽어간 숱한 외국인 병사들의 죽음으로 점철돼 있다. - P63

적이 침공하기도 힘들지만
국민을 통합시키기도 어려운 지형 - P63

이 모든 것은 결국, 누군가가 이란을 침공해서 정복하고 싶다면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 습지대에가서 싸우든가, 아니면 수륙양용작전을 펼친 뒤에 다시 똑같이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 습지대에가서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 P64

"우리는 호르무즈 해협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적들이 깨닫도록 할 것이다." - P71

페르시아 제국에서 시아파 이슬람 국가가 되기까지 오늘날의 이란은 문제가 많은 나라이긴 하지만한편으로는 장구하고 위대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문명을 이끈 나라였다. - P72

세계 최초로 말들을 갈아타며 전하는우편 배달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수천 마일에 달하는 포장도로를 포함한 대형 건설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 P73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분열의 기원은 서기 632년 선지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뜬 뒤 누가 그의  후계자가 될것인가를 두고 싸운 서기 680 년의 카르발라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 P75

그들은 종교가 종교를 통제할수는 있지만 과세와 입법 권한은 정치가들에게있다고 주장했다. 세속적 기관과 종교적 기관 사이의 이러한 권력의 분리는 현대 이란 사회에서도 여전히 주요한 이슈로 남아 있다. 이슬람 성직자들이 또다시 정치 영역에서 지나치게 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 P77

외부 세력에게는 먹잇감이 되고,
내부에서는 쿠데타와 시위가 만연하고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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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광기 들린 천재라고 여긴다. 한순간에 자신의 귀를 자르도록 몰고간 그의 정신적 불안정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렸다. 끔찍한 악마에 흘리고 원초적인 충동에 휩싸여 사막에서 외쳐댄 고독한 목소리. 이것이야말로 그를 둘러싼 오늘날의 공통된 견해이다. - P8

실제로 반 고흐는 힘겨운 삶을 살았다. 관습에 대한 반감은 (비록 많은 모방자들을 낳긴 했지만) 그가 비길 데 없는 예술 언어를 발전시켜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던 반면, 동시에 친구와 친지들로부터 그를 갈라놓았다. 그런가 하면 말년에 그는 여러 번 좌절을 경험하는데, 물론 여기에는 정서적인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젊은 시절에 걸린 성병의 후유증으로 악화된 간질 발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몇 차례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황당하리만큼 서툰 판단으로 매번 불행한 결과에 이르렀고 결국 독신생활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오랫동안 성공 가도를 벗어나 있던 고흐는 서른일곱에 마침내 평단의 인정을 받는가 싶었는데, 권총자살로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해버린다. - P8

생존 당시에는 완전히 외면당했던 그의 그림들이  오늘날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런 예술가의 진면목을 우리는 7백 통이 넘는 편지들을 읽으며 가늠해볼 수 있다. - P8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위해 물감과 캔버스를 살 수 있었던 것도 테오의 재정 지원 덕택이었다. 실제로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마다 더 많은 돈을 요청하거나 돈을 송금해줘서고맙다는 내용의 글을 적고 있다. 테오의 지칠 줄 모르는 격려 또한 불행한 형에게는 구명의 밧줄이었다. 그렇다고 고흐가 동생에게 수동적으로 의존했던것만은 아니다. 그는 동생에게 활기찬 대화 상대였으며, 사적이며 정신적인문제들을 두 사람이 함께 나누었음이 편지에서 드러난다. - P8

이 특징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연과 풍경에서 위로와 감흥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런던이나 헤이그, 혹은 그 밖의 북유럽 전역에서 그가 보낸 편지들에는 주변 환경에 대한 매우 서정적인 묘사가 담겨 있다. 이처럼 삶의 초기에는 그의 사고에 깃든 목가적인 요소들이 깊은 신앙심과 일체를 이룬다(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나중에 고흐는 신앙을 버리게되지만 자연에 대한 사랑만은 그 후로도 오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P11

그가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관심을 보였던 또 다른 영역은 전원생활과 육체노동이었다. 벨기에의 탄광지역인 보리나주에서 선교사로 일할 당시 이 짧은 체류 동안 제약된 조건 속에서도 그는 광부들의 일상을 스케치했는데, 이것은 광부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한 그의 통렬한 묘사와 맞물린다. 실제로 이 시기에 그는 성직 대신 화가가 되겠다는 새로운 야심-품는다. - P11

반 고흐는 평생 동일한 화풍의 영향을 받으며 이 화풍에 절대적으로 헌신한다. 그의 작품 경향이 변화를 거듭할 때에이런 헌신은 계속되었다. 특히 프랑스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에 대한 숭배의 감정은 말년의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들물론 초기의 편지나 스케치에서도 나타난다. 밀레가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고귀하게 묘사한 농민의 삶은 고흐에게감동을 불러일으켰다. - P11

특히, 해질 무렵 가로등이 켜지고 젖은 도로 위에 그 불빛이 반사되는 모습을 말이야. - P14

아침에 턴햄그린으로 가는 길은 몹시 아름다웠어. 밤나무와 맑고 파란 하늘, 템스 강물에 반사되는 아침 햇살..…그리고 풀들이 놀랄 만큼 푸르렀단다. 사방에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지. - P19

네 생각을 자주 한단다. 아주 잘 지내고 있다니 반갑다. 네 기분을 돋워주고 진정한 삶을 위한 건전한 양식이 될 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니 기쁘구나. 그런 것들이야말로 진짜 예술이며 자신의 마음과 영혼, 생각을 바쳐 일하는 사람들의 작품일거야. 어쩌면 넌 그런 사람들을 적잖이 알 뿐 아니라 직접 만나보기도 했을 거야. 말과 일이 생명이자 영혼인 그런 사람들을말이다. - P19

살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다양한 모습들을 대충 스케치해두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러다 보면 내가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작업에 방해가 될 수도있으니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누가복음 13장 6절~9절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설교를 쓰기 시작했단다. - P21

난 종종 늦은 밤까지 그림을 그린단다. 어떤 사물들을 볼 때면 절로 떠오르는생각들에 분명한 형태를 부여하고 이런저런 기억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야. - P22

1880년 7월
털갈이 시기란 새들이 깃털을 바꾸는 시기로, 사람의 경우로 말한다면 역경과불행 같은 일이 닥치는 어려운 시기를 뜻하지. 우린 이런 털갈이 시기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일들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것도 웃어넘길 일도 아니어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을 필요가 있단다. 사정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겠지. - P22

요즈음에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태가 이미 상당 기간 지속되었는데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지 몰라. - P22

"결국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거야"라고 - P22

내게서 게으름뱅이 같은 모습 외에 네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으름뱅이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 말이다. 나태하거나 비굴한 성격이거나천성이 야비해서 게으름뱅이로 간주되는 사람이 있지. 너 역시 나를 그런 사람으로 여긴다 해도 할 수 없겠지. - P22

"난 새장 안에 있다. 새장 안에 있어. 그러니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 바보들아! 난 필요한 모든 걸 가졌어! 아, 제발 내게 자유를 다오. 다른 새들처럼 말이야." - P23

때로 자연과의 싸움은 셰익스피어가 ‘말괄량이 길들이기‘ 라고 부른 것과 비슷해 (즉 인내심을 발휘해 어떻게 해서든 저항하는 쪽을 정복하는 거야). 많은 영역에서 그렇듯이 특별히 그림에서는 꽉 움켜잡는 편이 포기하는 편보다 낫단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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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가 그런 미술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는 판화가 일찍부터있었지만 유럽에서는 15세기에야 비로소 활발히 제작돼요. 우리나라의 경우, 석가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은 제작연대가 751 년으로추정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죠. - P376

흥미롭게도 뒤러는 생애 중요한 시기마다 외국에서 상당한 시간을보낸 독특한 이력을 가진 화가였거든요. 알프스 이북과 이남 지역을 짧으면 1~2년, 길면 3~4년씩 여행하면서 작품 세계를 다양하게발전시켜나갔죠. 이 때문에 저는 뒤러를 ‘최초의 다국적 화가‘로 평가합니다. - P378

당시는 지리적 대발견이 이뤄지던 시대였어요. 1488년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고 1492년에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했거든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속속 알려지면서 뒤러처럼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다양한 주변 세계를 직접 두루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을 거예요. - P381

지리상의 발견은 세계에 대한 관심을 크게 끌어올렸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유럽 경제는 보다 큰 단계로 도약하게 됩니다. - P381

사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시장이 확대되거나 사유 재산이 늘어난다고 해서 가능한 건 아니었어요.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이면에 ‘세계 경제 시스템의 완성‘이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1500년을 중심으로 유럽은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뻗어나가면서 소위 ‘세계 경제 시스템‘을 체계화시켰다는 거예요. - P382

아래 그림은 뒤러가 그린 풀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풀 줄기뿐만 아니라 이파리까지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려한 꽃이 아닌 잡풀을 이렇게 진지하게 그렸다는 점이 신선하죠. 특히 여기서뒤러는 아주 낮은 시점을 택했어요. 그래서 이 그림은 "마치 곤충의눈으로 그린 것 같다"는 평가를 받죠. - P388

사실 뒤러가 영향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는 건 수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뒤러는 독특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저 여행만 다닌 게 아니라 여행기와 편지를 쓰고 그림까지 그리며 충실히 기록했던 거죠. - P389

물을 섞어서 그리는 수채화는 빨리 말라서 여행지의 현장감을 살리는 데 장점이 있죠. 뒤러가 남긴 여행스케치북은 그야말로 감동 그자체입니다. 다음 페이지를 보세요. 여기에 그려진 수채화들을 보고 있자면 뒤러가 수채화를 높은 예술단계로 올려놓은 화가라는걸 깨닫게 됩니다. - P390

스스로가 누구인지 고민하기 시작하다 
뒤러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도 해요. 이 관심은 바로 자화상으로 드러납니다. 뒤러는 10대부터, 정확히는 13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자화상을 그린 독특한 화가예요. - P392

특히 뒤러는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갖고 여행을 떠났기에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더욱 깊이 바라볼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러한 고민은 자화상에 반영됩니다. 다음페이지에는 뒤러의 자화상들이 실려 있어요. 이 중 맨 왼쪽은 뒤러가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입니다. - P392

르네상스 시기에는 유럽 안에서도 이렇게 문화 차이가 컸어요. 뒤러는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깊이 고민합니다. 특히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1506년에는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여기서 신사로 지내지만 고향에서는 한낱 식객에 지나지 않는다네"
라고 적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예술가가 대접받는데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은 현실을 한탄한 거죠. - P398

우리나라의 윤두서도 뒤러와 고민이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정치의중심에서 밀려난 몰락한 양반에다 벼슬도 가질 수 없었으니, 평생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을까요.
뒤러와 윤두서의 자화상은 시공간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비슷하게자기를 드러낸다는 점이 제게는 아주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 P399

사실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뒤러는 예수를 그릴 자리에 자기 얼굴을 집어넣은 겁니다. 아래에서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린 예수 얼굴과 뒤러의자화상을 비교해 보세요. 정면상이라는 점 그리고 손의 위치가 많이 비슷하죠 - P400

정리하자면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화가가 지닌 사회에 대한 의무, 즉 자신이 무언가를 창작해내는 자임을  새롭게 인식한 결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뒤러의 삶과 예술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여기서 잘 연결되죠. - P402

결국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화가의 사회적 가치를 자각한 모습으로일종의 ‘화가의 독립선언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P402

뒤러는 화가이자 과학자였고, 철학가이면서 여행문학가로도 이름을 남겼어요. 뒤러의 예술 업적 가운데 판화를 미술의 한 장르로 발전시킨 점에서 그의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 P403

말씀대로 가격이 저렴한 판화는 대중 친화적인 미술입니다. 유화는판화와 비교했을 때 가격이 비싸서 상류층을 위한 미술이었지요.
판화는 같은 크기인 유화에 비해 10분의 1, 때론 100분의 1 정도까지 가격이 쌌어요. 뒤러는 이처럼 값싼 미술로 알려진 판화를 미술의 한 장르로 개척해냅니다. 판화의 약점을 강점으로 역이용했다고볼 수 있어요. - P403

판화는 값이 싼 대신 많이 제작할 수 있으니 많이 팔 수만 있다면이윤을 더 낼 수 있다는 점을 알았던 겁니다. 판화를 수백 장 이상팔면 유화보다 훨씬 더 이득이라는 걸 정확히 간파했던 거죠. - P403

맞아요. 알파벳 D를 알파벳 A가 덮고 있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A와 D는 알브레히트의 ‘A‘,
뒤러의 ‘D‘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Anno Domini를 뜻합니다. Anno Domini는 라틴어로 그리스도의 해라는 뜻으로 서력기원을 의미하죠. - P407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 주장했던 사건은 아실 거예요. 이 혁명적인 주장을 담은 책이 최초로 출판된 곳은 바로 뉘른베르크입니다. 위 사진은 코페르니쿠스가 쓴 책의 표지예요. 제목이 ‘레볼루션‘, 그러니까 ‘전환‘이나 ‘혁명‘인 셈이죠.
이 같은 뉘른베르크가 배출한 최고 스타가 알브레히트 뒤러였던 겁니다. - P419

맞아요. 말을 타고 나치 깃발을 든 히틀러입니다. 뒤러가 그려낸 기사의 히틀러 버전이지요. 다소 충격적이기도 합니다만, 앞서 스티브 잡스의 초상 사진부터 히틀러 버전의 기사까지 뒤러의 이미지는현대에 와서도 다양한 각도로 새롭게 활용됩니다. 뒤러의 지대한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P420

"두려워하라!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그 누구도 내 판화를 찍어내거나 조잡한 모방품으로 만들어 팔 수 없다. 내가 이 권리를 영광스러운 황제 막시밀리안에게서 받았음을 모르는가? 들어라! 만일 그대가 악의와 탐욕으로 이를 어기게 된다면 그대의 재산이 압수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몸도 안전하지 않을 것을 명심하라.‘
" - P424

지리상 대발견이 끊임없이 이뤄지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뒤러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키워갔다. 그 관심은 여행으로 표출되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여행 중 목격한 이탈리아미술의 번영은 뒤러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도록 이끌었다. - P431

베네치아에서 판화 표절 사건이 일어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통해저작권을 획득함. → 이 관계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거상인 야코프 무거가 맺어준 것. - P431

세상에 아름다운 곳은 많아도 베네치아만 한 곳은 없다.
도시 자체가 물 위에 떠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특히 비잔티움 제국의 전통을 잘 간직한 이곳에서사람들은 동방적 분위기와 이국적 풍취에 빠져들었다.
바닷길과 운하를 통해 세계 각국의 상인과 진귀한 물건이넘나들고 모여든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여러 문화가만나고 뒤섞인 베네치아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 성당, 이탈리아 베네치아 - P436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이탈리아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이탈리아를사람들의 흥을 돋울 줄 아는 사람은 나폴리를 선호할 것이고감상적인 사람은 베네치아를 선택할 것이다.
미셸 피에르, 「열정의 이탈리아」 - P437

이때 베네치아는 ‘인간의 모든 상행위가 집중된 곳‘, ‘부가 분수처럼넘쳐흐르는 곳‘, ‘넘쳐나는 상품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곳‘으로알려졌습니다. - P439

경제사에서는 베네치아가 플랑드르 도시들보다 한발 앞서 중세 상업 세계를 이끌었다고 봐요. 이 때문에 상업자본주의의 계보를 따질 때 아래 표처럼 베네치아를 맨 위에 두어야 할 거예요.
11세기 베네치아
15세기 브뤼헤
16세기 안트베르펜
17세기 암스테르담
상업자본주의의 시기별 중심도시 - P441

베네치아나 플랑드르 모두 늪지대이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고 도시 안은 운하로 촘촘히 짜여 뱃길이 발달했어요. 이 관점에서 보면상업 활동에는 강점을 지녔던 겁니다. 농사지을 땅이 없었던 베네치아나 플랑드르 사람들에게 상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어요. 이때문에 두 지역 모두 상업에 매진하다가 크게 성공하죠. - P446

베네치아 전체를 놓고 보면 물고기 두 마리의 입이 맞물린 듯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마주한 두 물고기 머리 사이로 큰 운하가 있어요.
이 운하를 카날 그란데라고 부릅니다. 15세기나 16세기에 형성된이런 도시 모습은 현재와 큰 변화가 없지요. - P449

바로 그겁니다. 정부 청사가 활짝 열린 형태여도 무방했던 거죠. ‘우리 베네치아는 안정된 정치를 일찍부터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내륙의 모든 도시국가는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죽도록 싸웠어요. 내부적으로도 여러 정치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고요. 베네치아에서는 이탈리아 내륙에 비하면 그런 싸움이나 내부 갈등이 없었어요. - P477

역사학자들은 베네치아 국민의 모든 이익이 딱 하나, 바로 무역에서 비롯했고 이해관계가 거의 똑같아서 싸울 일이 별로 없었다고 설명해요. - P477

정리하자면 기적이 일어나는 도시 베네치아에 대한 자신감을 호들갑 떠는 방식이 아니라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한 거예요. 당시 여러지역을 지배했던 베네치아가 지녔던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집니다.
이 점은 비슷한 일화를 묘사한 다른 그림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요. 바로 ‘산 로렌초 다리 근처에서 일어난 성 십자가의 기적‘이란 작품이에요. 오늘날 이 그림은 앞서 본 ‘산 마르코 광장의 행진‘
과 나란히 아카데미아미술관에 걸려 있죠. - P492

플랑드르 이전에 상업 세계의 대학교 역할을 할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던 베네치아는안정된 정치 환경 속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온갖 호화로운 물건들을 접하며 독특한 미술양식을 만들어나갔다. 이들이 자기 도시에 대해 느꼈던 자부심은 베네치아에서 그려진그림들에 나타난다. - P503

석호를 개간해서 만든 인공 섬. 섬 118개를 다리 400여 개로 연결함.
석호가 적의 침입을 막아줬으며 운하가 발달해 국제 상업도시로 성장. - P503

신의 머리카락은 라피스라줄리로 되어 있다.
- 고대 이집트인 - P504

변화의 빛: 야코포 벨리니 
곧 베네치아도 피렌체에서 일어난 회화의 혁신을 따라잡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베네치아 화가로 야코포 벨리니를 주목해볼 수있습니다. ‘벨리니‘라는 이름이 어쩐지 익숙하죠? 산 마르코 광장의행진을 그린 젠틸레 벨리니가 야코포 벨리니의 아들이에요. - P508

그렇다면 베네치아 화가들도 이젠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한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16세기를 전후해 베네치아 회화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피렌체가 원근법을 통해 회화의 혁신을 이루어냈다면, 베네치아는 다른 측면에서 회화의 혁신을 완성하는데, 바로 ‘색채‘ 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베네치아가 색채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16세기미술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 P527

역동적인 공간: 티치아노의 페사로 제대화 
이제 베네치아 미술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을 살펴봅시다.
티치아노가 그린 페사로 제대화입니다. 티치아노Tiziano는 앞서 조반니 벨리니를 잇는 베네치아 화가라고 소개해드렸습니다. 확실히베네치아 회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국제적인 명성도 대단해서 유럽 각국마다 그를 다르게 부를 정도예요.
예를 들어 영어로는 티션Titian, 프랑스어로는 티셩Titien, 독일어로는 티치안Tizian이라고 부른답니다. - P559

그 집안들이 유력 가문으로 커나가기도 했지요? 베네치아도 마찬가지였나요?
베네치아에서 일찍 성공한 상인 가문 중 일부는 귀족에 속하면서정치적으로 보다 높은 권한을 누립니다. 예를 들어 페사로 가문의남성은 성인이 되면 베네치아를 이끄는 원로원 의원에 자동 선출되었습니다. - P568

요즘이라면 선거를 꼭 거쳐야 할 텐데, 그런 과정이 필요 없는 금수저 의원인 셈이네요.
당시 베네치아는 신분제 사회였고, 원로원 의원을 배출할 집안을제한했습니다. 정해진 가문의 구성원만 국가를 대표할 수 있었죠.
페사로 제대화 속 페사로 가문의 남성은 국회의원이거나 국회의원이 될 자격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특히 눈에 띄는사람이 있지 않나요? - P568

1453년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1000년 이상 이어온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끝내버립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지배 영역을 넓혀가면서 베네치아가 다스리던 지중해의 여러지역을 속속 빼앗아버리죠. 그 결과 16세기를 거치면서 지중해에대한 베네치아의 장악력은 축소되고,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할 기회가 크게 줄어들고 만 겁니다. - P570

세상일을 한 치 앞도 알 수 없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군요.
지리 환경도 급격히 변하고 있었어요.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이희망봉을 거쳐 항로를 개척하면서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의 대서양이 문명의 바다로 거듭납니다. 베네치아가 주도했던 지중해 시대는막을 내리고 있었던 거죠. - P570

유럽 대륙의 정세도 격변하고 있었습니다. 페사로 제대화가 그려지기 두 해 전부터 독일에서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커지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죠. - P570

이 소년이 앞으로 활동할 16세기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였습니다. 이처럼 뜨겁게 변모하는 시대상황과 이에 발맞추어 다채롭게 변화하는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강의에 풀어놓으려 합니다. - P570

르네상스가 오기 전까지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받은 전통을 고수해오고있었다. 그러던 중 원근법과 유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며 16세기에 이르러황금시대를 맞이한다. 그도약의 바탕에는 안료 무역과 캔버스화가 있었다. - P571

.베네치아는 안료 무역의 중심지로 좋은 안료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음.
색채 중심으로 회화 발전.
• 습한 기후로 인해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함.
강렬한 색채 표현이 가능해졌으며 생생한 붓 터치 등 표현이 다양해짐. - P571

더 읽어보기
나의 미술 이야기는 내 지식의 깊이라기보다는 관심의 폭에 기댄 결과물이다. 미술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의 최대치를 용감하게 던졌다. 그러나 논의된 시기와 지역이 방대해지면서 일정한 오류도 피할 수 없게되었다. 앞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은 성실한 수정으로 보완하겠다는 말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 책은 많은 국내의 선행 연구자들의 노고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전문서의 무게감을 독자들에게 지우지 않기 위해 각주를 달지 않았다. 책에 빛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미술사학계의 업적에 기댄 결과다. 초고 정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제자 양정애, 송준영의 도움이 컸고, 마지막 교정 작업에는 고용수, 이샘, 박정선, 김가령, 김진주, 박원영의 도움이 컸다.
수록된 작품의 작품명과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소장처의 홈페이지 정보를 참고하되 학계에서 일반적으로통용되는 기준과 비교해 정리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경우에는 제프리 스미스의 책을 많이 참고했고,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경우에는 퍼트리샤 포르티니 브라운의 책을 기준으로 했다. - P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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