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미국 서부 5대 캐니언 - 셀프투어 그랜드캐니언 여행
이루다 / 인사이트랩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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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준비하려고 샀더니, 여행을 준비하란다

— 이루다, 『미국 서부 5대 캐니언』을 읽고

1. 여행 정보를 얻으려고 구입한 책

지난 9월 미국 서부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책을 구입했다. 그랜드캐니언을 비롯한 미국 서부의 장대한 자연을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 어디를 어떻게 돌아봐야 할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고 싶었다. 인터넷에도 여행 정보는 넘쳐나지만, 책이라면 그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으리라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헛짚었다.

책 어디에도 여행 안내서라고 명시돼 있지는 않다. 제목과 ‘셀프투어 그랜드캐니언 여행‘이라는 부제, 그리고 여행 준비와 각종 팁을 다룬 목차를 보고 내가 실용적인 여행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기대가 터무니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실망을 넘어 화가 났다.

2. 다섯 캐니언, 남는 것은 감탄사뿐

전체 166쪽 가운데 다섯 캐니언을 소개하는 내용은 약 50쪽이다. 그마저도 사진과 함께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고,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이야기하는 수준이다.

여행의 감동을 전하는 글도 좋다. 여행기가 반드시 관광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곳에서 무엇을 경험했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무엇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를 자신만의 언어로 들려줘야 하지 않을까.

브라이스캐니언을 소개하는 부분을 보자. 48쪽부터 55쪽까지 여덟 쪽에 걸쳐 사진과 감상이 이어진다. 셔틀버스를 탔다고 하지만 어디서 타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브라이스 포인트, 인스퍼레이션 포인트, 선셋 포인트를 방문했다고 하면서도 각 전망대의 특징이나 이동 동선은 알려주지 않는다. 하이킹 코스가 다양하다고 하지만 어느 코스를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여행자가 알고 싶은 것은 아름답다는 감탄사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3. 알맹이 없는 여행 정보와 추천 없는 추천 코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여행 준비와 각종 팁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여행경비를 절약하는 방법이라며 일찍 예약하라, 성수기를 피해라, 현지 식당을 이용하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한다. 이 정도 상식이라면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식당과 카페의 위치, 메뉴, 운영 시간을 알려준다면서 정작 식당 이름 하나 제시하지 않는다. 공원 입구나 방문자센터 근처에 식당이 있고, 운영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확인하라는 식이다.

압권은 추천 하이킹 코스다.

초보자는 2∼5km, 중급자는 5∼15km, 상급자는 15km 이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실제 하이킹 코스의 이름은 하나도 없다. 어느 국립공원의 어디서 출발하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무엇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추천 하이킹 코스를 소개한다면서 정작 추천하는 코스가 없다는 사실이 황당할 따름이다.

가이드 투어 예약 방법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공식 홈페이지를 확인하고, 궁금하면 업체에 문의한 다음 예약하라고 한다. 이런 내용을 네 쪽에 걸쳐 설명한다. 그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책의 곳곳에는 편안한 신발을 신고, 충분한 물을 준비하고, 날씨를 확인하고, 안전수칙을 지키라는 조언도 등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서부 캐니언에 관한 특별한 정보라기보다 어느 여행지에나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주의사항이다.

틀린 말이 없다고 해서 유용한 정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4. 내가 직접 걸었던 그랜드캐니언 1.3km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랜드캐니언의 매더 포인트에서 야바파이 포인트까지 협곡 가장자리를 따라 1.3km를 걸었다. 실제 이동 시간과 관람 시간을 기록했고, 걸으면서 마주한 풍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 짧은 경험만 정리해도 두 전망대의 위치와 이동 경로, 소요 시간, 중간에 만날 수 있는 풍경을 다른 여행자에게 알려줄 수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이 바로 그런 정보였다. 어디가 좋다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경험과 지식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구체성이 보이지 않는다. ‘셀프투어‘라는 부제가 무색할 정도다.

여행 정보가 부족하다면 여행기로서의 매력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마저도 아쉽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자연과 교감하고, 마음의 평화와 치유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정작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특별한 경험이나 저자만의 시선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5. 별 하나조차 아까운 책

인터넷서점에는 이 책을 극찬하는 독자평도 몇 건 올라와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평가지만, 누가 어떤 감상을 남기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실제로 책을 구입하고 읽은 내 판단은 분명하다.

나는 웬만하면 책에 별 네 개 아래의 평점을 주지 않는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책이라도 한 권을 쓰기 위해 들였을 저자의 시간과 노고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만큼은 별 하나조차 아깝다.

책을 쓴 사람의 노고를 존중하는 것과 그 결과물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적어도 내가 읽은 이 책은 그동안 지켜온 관대한 평가 기준마저 무너뜨렸다.

여행기는 저자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여행 정보를 다루는 책이라면 독자가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 수 있는지도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책으로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여행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하고, 여행기로서도 상투적인 감상과 표현을 반복하는 데 그친다.

아름다운 자연을 다룬 책이라고 해서 그 책까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장대한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고 해서 그 자체로 훌륭한 여행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책을 덮고 나서 남은 것은 여행 정보도, 여행에 대한 감동도 아니었다. 왜 이 책을 구입했을까 하는 후회와 허탈함뿐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려고 책을 샀는데, 책은 그저 여행을 잘 준비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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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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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에 대한 단상(步行斷想)
2026년 10월 25일, 일요일


어제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30.6km를 걸었다.

그런데 오늘도 걸었다. 아침에 5.2km, 오후에 20.3km. 합쳐서 25.5km다. 이틀 동안 걸은 거리가 무려 56.1km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참 징하게도 걸었다.

오늘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집 주변을 걸었다. 아침에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들어왔다가 오후에 다시 길을 나섰다. 멀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적게 걸은 것은 아니다.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오후에만 20km를 넘겼다.

오늘 하루 걸음 수를 확인하니 약 3만 7천 보다.

오전에는 평지를 따라 5.2km를 걸었는데 약 6천 보였고, 오후에는 평지와 산길을 섞어 20.3km를 걸었더니 약 2만 6천 보가 나왔다. 산길에서는 보폭이 짧아지니 같은 거리를 걸어도 걸음 수가 더 많아진다.

이렇게 운동하면서 걸은 것만 약 3만 2천 보. 여기에 집에서 돌아다니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등 자잘하게 걸은 것까지 합하니 3만 7천 보가 된 것이다.

얼마 전에는 대전도시철도 1호선의 스물두 역을 따라 걸었다. 역사 따라 걷기 구간은 48km였고, 그날 하루 전체로는 약 57km, 7만 보를 걸었다. 나도 어지간히 걷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지하철 역사 따라 걷기와 어제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걸었던 이야기, 두 편 모두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에 올렸다.

그런데 책을 쓴 하정우, 이 양반은 하루 3만 보를 걷는다고 한다.

하루 3만 보라니.

내 걸음으로 환산하면 대략 24km다. 오늘 오후에만 20km 넘게 걸었는데 쉬는 시간까지 합치니 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다면 하루 3만 보를 걸으려면 도대체 몇 시간을 걸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 그럼 일은 언제 하는겨?

물론 걷는 것이 일상인 사람도 있고, 출퇴근하면서 걸음 수를 채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정우도 일상생활에서 걷는 것까지 모두 합산한 숫자일 것이다.

그래도 하루 3만 보를 매일 채우려면 보통 부지런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하루 3만 보를 목표로 삼는 것과 실제로 날마다 3만 보를 걷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나야 장거리 걷기가 얼마나 힘든지 진즉에 알고 있다. 오래 걸으면 다리도 뻐근해지고 발바닥도 아프다. 아무리 걷는 것을 좋아해도 발바닥까지 그걸 좋아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나는 걷는 것이 좋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어도 좋고, 오래 걸어 낯선 곳에 도착해도 좋다. 때로는 익숙한 길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는다.

지난번에는 지하철역 스물두 개를 찾아 걸었고, 어제는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걷다가 가을 축제들을 만났다. 오늘은 집 주변을 돌아다녔다.

걷는 길도 다르고, 만나는 것도 다르다.

하지만 걷는 것이 좋다고 해서 무작정 많이 걷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56.1km를 걸었더니 온몸이 노곤하다. 어디가 특별히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닌데 그냥 피곤하다.

하긴, 그만큼 걸었으니 피곤하지 않으면 그게 더 신기한 일 아니겠는가.

얼마 전 내가 만든 말이 있다.

사와생보(死臥生步).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 있으니 걸어라.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떠날 수 있을 때 떠나고, 읽을 수 있을 때 읽자는 뜻에서 만든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여야겠다.

피즉휴식(疲則休息).

피곤하면 쉬어라.

집에 돌아와 쉬는 동안에는 틈틈이 책도 읽는다. 한참 걷고 난 뒤 편히 앉아 책장을 넘기는 시간도 좋다. 두 다리는 쉬고, 좋아하는 책은 읽고.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휴식 아니겠는가.

死臥生步 疲則休息.

살아 있으니 걷되, 피곤하면 쉬어야 한다.

걷는 것도 좋지만 내일은 좀 쉬어야겠다.

그런데 또 길을 보면 걷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참, 사람 마음이란.

⸻

걷기 기록

2026년 10월 25일(일요일)

오전 걷기
전체거리 : 5.2km
출발시간 : 오전 7시 56분 33초
종료시간 : 오전 9시 33분 19초
소요시간 : 1시간 36분 46초
운동시간 : 1시간 14분 46초
휴식시간 : 22분 00초
평균속도 : 4.2km/h
누적고도 : 133m
걸음 수 : 약 6,000보

오후 걷기
전체거리 : 20.3km
출발시간 : 오후 1시 00분 58초
종료시간 : 오후 6시 21분 27초
소요시간 : 5시간 20분 29초
운동시간 : 5시간 01분 24초
휴식시간 : 19분 05초
평균속도 : 4.0km/h
누적고도 : 720m
걸음 수 : 약 26,000보

하루 합계
전체거리 : 25.5km
소요시간 : 6시간 57분 15초
운동시간 : 6시간 16분 10초
휴식시간 : 41분 05초
평균속도 : 4.1km/h
누적고도 : 853m

하루 전체 걸음 수 : 약 37,000보 (일상생활 약 5,000보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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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6 0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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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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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가을 축제들을 만나다

—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가을의 한자락을 거닐다 —

2026년 10월 24일, 토요일

날씨: 하루 종일 비

ㅇ 걷기 코스: 집 → 유림공원(국화축제) → 신세계백화점 → 엑스포다리 → 둔산대공원 → 도안호수공원 → 가수원교 → 소태봉,옥녀봉 → 집

ㅇ 걷기 기록

* 전체거리 : 30.6km
* 출발시간 : 오전 9시 25분 15초
* 소요시간 : 7시간 02분 30초
* 운동시간 : 5시간 54분 45초
* 휴식시간 : 1시간 07분 45초
* 평균속도 : 5.2km/h
* 누적고도 : 532m

⸻

1. 이번에는 비를 맞으며 걸어보자

지난 10월 10일, 대전도시철도 1호선의 스물두 역을 따라 48km를 걸었다.

유성온천역에서 출발해 반석역을 찍고 판암역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유성온천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었고, 그곳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그냥 주말이니 또 한번 걸어보자는 생각이었다.

마님은 일직근무를 나갔다. 지난번에는 마님이 사과를 싸줬지만, 이번에는 그럴 형편이 아니니 내가 직접 사과를 썰어 통에 담았다.

배낭을 챙기고 집을 나서려는데 밖에서는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아니, 모처럼 걷겠다고 나서는 날에 비라니.

그렇다고 비가 온다는 이유로 걷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우산을 챙겨 들고 오전 9시 25분, 집을 나섰다.

처음부터 비가 꽤 내렸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걷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거리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고, 나무에서는 젖은 낙엽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릴 모양이었지만 걷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오래 걷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직은 레인코트를 꺼내 입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 우산을 쓴 채 계속 걸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까.

아직 정해진 것은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자는 생각뿐이었다.

2. 비 내리는 국화축제, 그리고 태권브이

우산을 쓰고 걷다 보니 제17회 유성국화축제 현장이 나타났다.

국화축제가 한창이었다.

노란색과 분홍색, 자주색과 붉은색 국화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비를 맞은 꽃들은 색깔이 더욱 진해 보였고, 물기 어린 바닥에는 꽃과 주변 시설물의 모습이 비쳤다.

축제장에는 단순히 국화 화분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갖가지 조형물도 만들어놓았다.

그중 단연 눈길을 끈 것은 거대한 로보트 태권브이였다.

어릴 적 즐겨 보았던 바로 그 태권브이가 꽃으로 옷을 갈아입고 서 있었다. 몸통에는 노란 국화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특유의 브이자 장식도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로켓처럼 생긴 조형물도 있었다.

태권브이와 로켓이라니.

어릴 적 만화영화를 보던 때가 떠올랐다. 꽃구경을 하러 왔다가 뜻밖에 어린 시절의 영웅까지 만난 셈이다.

국화꽃으로 만든 커다란 책도 있었다. 펼쳐진 두 장의 책장을 꽃으로 빼곡하게 장식해 놓았는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괜히 더 눈길이 갔다.

이 밖에도 두 마리 학이 긴 목을 굽혀 부리를 맞대고 있는 조형물이 있었다. 서로 마주한 목이 하트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제법 그럴듯했다.

녀석들, 사람들 사진 찍으라고 자세 한번 잘 잡았구먼.

국화꽃 사이에는 인공 폭포도 만들어놓았다. 바위 사이로 물이 떨어지고 주변에는 형형색색의 국화들이 가득했다.

한쪽에는 노란색과 자주색 국화들이 줄지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분홍색 꽃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축제장을 둘러보며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 우산을 들고 구경하기가 조금 불편했지만, 꽃구경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에 젖은 국화와 물기 어린 바닥이 가을날의 운치를 더했다.

처음부터 국화축제를 구경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냥 걷다가 만난 것이다.

이것이 오늘 첫 번째 우연이었다.

3. 엑스포다리에서 레인코트로, 그리고 코스모스

국화축제를 구경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엑스포다리까지 걸어왔다. 출발한 뒤 거의 10km를 우산을 쓰고 걸은 셈이다.

이쯤 되니 우산을 들고 걷는 일이 슬슬 귀찮아졌다.

마침 엑스포다리 아래에는 비를 피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산을 접고 배낭에 넣어두었던 레인코트를 꺼내 입었다.

이제야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레인코트를 입었다고 비가 그치는 것은 아니지만, 장거리 걷기에는 우산보다 훨씬 편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갑천변에 펼쳐진 코스모스 꽃밭을 바라보았다.

분홍색과 흰색 코스모스가 강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붉고 푸른 아치가 교차하는 엑스포다리가 보였고, 반대편에는 높이 솟은 엑스포타워가 서 있었다.

그런데 이곳이 어딘가.

불과 엿새 전에도 왔던 곳이 아닌가.

지난 10월 18일 일요일, 고향 친구가 대전에 찾아왔었다. 그날도 비가 내렸지만 마님과 친구, 이렇게 셋이 함께 이곳을 찾아 코스모스를 구경했다.

그날의 이야기는 「가을비 속에 만난 동네 친구」라는 제목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그런데 엿새 만에 또 이곳에 온 것이다.

그날은 친구와 마님이 함께였고, 오늘은 나 혼자다.

코스모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피어 있었다.

엿새 전에도 느꼈지만 요즘 코스모스는 키가 작아 예전처럼 하늘거리는 맛이 없다. 그래도 넓게 펼쳐진 꽃밭을 바라보니 가을 분위기는 제법 난다.

같은 장소를 찾았으니 사진도 비슷하게 찍게 된다.

엑스포다리를 배경으로 한 장, 이번에는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돌려 엑스포타워를 배경으로 또 한 장.

그러면서 엿새 전 친구와 함께 걸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고향 친구와 함께한 코스모스 구경도 좋았지만, 오늘 혼자 걸으며 그날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았는데도 함께하는 사람이 다르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내 마음도 다르다.

엿새 전에는 친구와 함께 코스모스를 보았고, 오늘은 코스모스를 보며 친구를 떠올렸다.

꽃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엿새라는 시간 사이에 또 하나의 추억이 쌓였다.

4. 사과 한 조각과 따뜻한 커피

걷기를 이어가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배낭을 내려놓았다. 준비해 온 사과를 꺼내고 따뜻한 커피도 한 잔 마련했다.

비 오는 날 오래 걸은 뒤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은 참 좋다.

사과 한 조각을 곁들이니 이만한 간식도 없다.

근사한 카페에 앉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걷다가 잠시 쉬어가는 이 시간이 좋았다.

한 손에는 사과를 들고, 옆에는 커피를 놓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사과를 씹었다.

오래 걷는 날에는 이런 짧은 휴식도 중요하다.

아무리 걷는 것을 좋아해도 계속 걷기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리를 쉬게 하면서 주변도 둘러보고, 사진도 확인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배낭을 둘러멨다.

아직 걸을 길이 많이 남았다.

5. 둔산대공원에서 만난 또 하나의 우연

이번에는 둔산대공원에서 또 하나의 행사를 만났다.

「2026 대전지역 전통민속놀이 대축제」.

넓은 광장에 초록색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과 우산을 쓴 방문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천막에는 지역별 민속놀이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날씨가 영 협조해 주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광장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바닥은 온통 젖어 있었다. 넓은 공간에 마련된 행사 시설들을 보니 맑은 날이었다면 제법 볼만했을 것 같았다.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얼마나 속상할까.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천막과 행사장을 설치하고, 준비할 것도 많았을 텐데 하필 비가 내리다니.

그래도 천막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고, 우산을 쓴 시민들도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며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신승훈의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우연히」.

우연히 그렇게 널 만난 거야.

오래전에 들었던 노래다.

노래 속에서는 우연히 만난 사람이 애틋한 사연의 주인공이지만, 오늘 내게 우연히 찾아온 것은 사람 대신 축제들이었다.

국화축제를 만났고, 이번에는 전통민속놀이 행사까지 만났다. 그 사이 엿새 전 친구와 함께 보았던 코스모스도 다시 보고 왔다.

이쯤 되면 참 풍성한 하루다.

그냥 걷겠다고 길을 나섰을 뿐인데, 대전에서 열리는 가을 행사들을 연달아 구경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동차를 타고 목적지만 찾아다녔다면 이런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걸으니 보인다.

오늘은 발길 닿는 곳마다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6. 갑천누리길, 물새들과 함께 걷다

다시 갑천을 따라 걸었다.

엑스포다리에서 가수원교까지 이어지는 길은 갑천누리길 1코스다.

총연장 약 10.3km.

도심을 가로지르는 갑천을 따라 걸으면서도 자연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길이다.

한쪽에는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이어지고, 다른 한쪽에는 갈대와 물풀이 우거진 하천이 펼쳐져 있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으니 도심과 자연이 나란히 있는 셈이다.

물가에서는 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녀석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 위를 떠다녔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헤엄치는 녀석도 있었고, 함께 움직이는 녀석들도 있었다.

얕은 물에는 하얀 백로들도 보였다.

긴 다리로 물속을 천천히 걸으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고, 다른 녀석은 날개를 펼치기도 했다.

그 뒤로는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었다.

참 재미있는 모습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심 한복판에서 물새들이 제법 한가롭게 자기들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월평습지 일대에는 갑천 습지보호지역이라는 안내판도 있었다.

안내판을 읽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이 단순한 산책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대와 물풀, 물새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도심 가까이에 남아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물길을 따라 걷다 보니 징검다리도 만났다.

물 위로 콘크리트 블록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물이 흘렀다. 비가 내려 젖은 블록들을 바라보니 괜히 옛날 생각도 났다.

비가 내리는 갑천변은 한산했다.

산책로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고, 나무 아래에는 젖은 낙엽들이 떨어져 있었다. 길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가을이 조금씩 깊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런 날에는 일부러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니 길이 한결 조용하다.

우산을 쓰고 걷던 아침과 달리 이제는 레인코트를 입고 있으니 두 손도 자유롭다.

물가의 새들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며 걸었다.

오랫동안 도로와 교량을 다루던 토목기술자라 그런지 다리 아래 비탈면이나 시설물도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쉬는 날에도 그런 것까지 살펴보고 있으니 직업이란 것이 참 무섭다.

그래도 오늘은 업무를 보는 날이 아니다.

그냥 걷는 사람이다.

7. 도안호수공원에서 먹는 건빵

둔산대공원에서 민속놀이 행사를 구경한 뒤에도 한참을 더 걸었다.

대략 6km쯤 걸었을까. 도안호수공원에서 잠시 쉬었다.

이곳에서는 아까 먹던 사과 대신 건빵을 꺼냈다.

‘우리밀 추억건빵’.

건빵이라니.

군대에서 먹던 그 건빵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건빵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추억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팔고 있으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한 봉지를 뜯어 먹었다.

오래 걷다가 먹으니 건빵도 제법 맛있다.

지난번 48km 걷기에서는 코다리냉면에 동태전까지 시켜 먹었다. 결국 너무 많이 주문한 동태전은 절반이나 포장해서 들고 왔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오늘은 사과와 커피, 건빵으로 간식을 해결했으니 제법 소박한 편이다.

물론 30km 넘게 걷는 사람이 먹는 것을 너무 소박하게 챙기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뭐, 어쩌겠는가.

건빵도 맛있으면 그만이지.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8. 가수원교에서 방향을 바꾸다

갑천누리길 1코스의 끝은 가수원교다.

엑스포다리에서 시작해 갑천을 따라 내려온 길이 이곳에서 끝난다.

그러나 오늘 걷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수원교에서 방향을 바꿔 건양대학교병원 쪽으로 향했다. 이후 소태봉과 옥녀봉을 거쳐 목원대학교 방향으로 걷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하천을 따라 걷던 길에서 산길과 도심을 지나는 길로 바뀌었다.

비를 맞으며 오래 걸었으니 몸도 제법 무거워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집까지도 내 두 발로 돌아가야 한다.

애초에 어디까지 걷겠다고 정하지 않았으니, 돌아가는 길도 오늘 걷기의 일부다.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

최종거리 30.6km.

지난번 대전도시철도 1호선 48km 걷기보다는 짧았지만, 이번에도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무엇보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걸었다는 점에서 지난번과는 또 다른 하루였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갑천누리길에 얽힌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9. 8년 전 걸었던 길, 그리고 다음 걸음

2018년 10월.

그때도 갑천누리길을 걸었다.

갑천누리길은 모두 세 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는 엑스포다리에서 가수원교까지 이어지는 약 10.3km의 도심 속 갑천길이다. 2코스는 약 16.6km, 3코스는 약 13.0km로, 세 코스를 합하면 약 40km에 이른다.

2018년 10월에는 이 길을 두 차례로 나눠 걸었다.

먼저 1코스를 걸었다. 그런데 가수원교에서 걷기를 끝낸 것이 아니라 집까지 그대로 걸어 돌아왔다.

그렇게 걸은 거리가 20km였다.

다음에는 2코스와 3코스를 한 번에 이어 걸었다. 두 코스를 합하면 약 30km. 그렇게 두 차례에 걸쳐 갑천누리길 세 코스를 모두 완주했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이번에는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1코스를 다시 걸은 셈이다. 물론 국화축제도 구경하고 코스모스 꽃밭도 둘러본 뒤, 가수원교에서 건양대학교병원 쪽으로 방향을 바꿔 소태봉과 옥녀봉, 목원대학교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으니 전체거리는 30.6km가 됐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2코스와 3코스도 다시 걸어보고 싶어졌다.

다음 주쯤 두 코스를 한 번에 다시 걸어볼까.

2018년에 걸었던 길이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그때 보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새롭게 바뀐 곳도 있을 것이다.

8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같지는 않을 테고.

이번에는 그냥 걷고 싶어 길을 나섰다가 국화축제와 전통민속놀이 행사를 만났다. 엿새 전 친구와 함께 보았던 코스모스를 다시 보았고, 비 내리는 갑천을 따라 걷다 보니 8년 전의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러고는 또다시 걸어보고 싶은 길이 생겼다.

2018년 10월에 걸었던 그 길을, 2026년 가을에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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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열네 번의 인생 수업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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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속에 만난 동네 친구

— 비에 젖은 대전의 어느 일요일(’26.10.18.), 세월이 흘러도 이어지는 관계와 만남의 소중함

1. 대전에 오는 동네 친구

오랜만에 고향 동네 친구가 대전에 놀러 온다고 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다. 같은 동네에서 자랐으니 알고 지낸 세월만 해도 반세기에 가깝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나뿐 아니라 아내와도 인연이 있다. 아내에게도 중학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일요일에 온다고 하자 아내가 토요일에 오라고 했다. 일요일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는 일기예보에 비가 저녁부터 온다고 했다며 부득불 일요일에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일요일로 약속이 정해졌다.

모처럼 찾아오는 친구를 어디로 데리고 갈까 고민했다. 하필 날씨가 좋지 않으니 야외 나들이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대전에 왔으니 이것저것 구경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야겠다.

이 친구에게는 우리 부부와 관련된 특별한 이력이 있다.

바로 우리 부부의 중신애미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나와 아내를 맺어준 사람이 바로 이 친구다. ㅋㅋ

2. 하늘거리지 않는 코스모스

친구를 만나 먼저 갑천변 코스모스 꽃밭으로 향했다.

분홍색과 흰색 코스모스가 넓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꽃밭 너머로는 엑스포다리가 보였다. 잿빛 하늘 아래 펼쳐진 코스모스는 제법 아름다웠다.

그런데 꽃밭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코스모스가 너무 작았다.

내가 기억하는 코스모스는 저렇지 않았다. 사람 허리춤을 훌쩍 넘기는 가느다란 줄기 끝에 꽃을 매달고, 가을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흔들리던 꽃이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쓰러질 듯 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섰다. 꽃잎이 예쁜 것도 좋았지만, 코스모스는 그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더 좋았다.

요즘은 키가 작은 왜성 품종을 많이 심어서인지 예전처럼 훤칠한 코스모스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꽃은 촘촘하고 화려하지만 하늘거리는 맛이 없다. 꽃밭은 풍성해졌는데 운치는 오히려 줄어든 것 같다.

어린 시절 고향의 가을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는 길가에도 코스모스가 흔했다. 누가 심었는지도 모르는 꽃들이 가을이면 피어났고, 가느다란 줄기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 시절 우리는 그런 풍경 속에서 자랐다.

같은 동네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쉰 살을 훌쩍 넘겼다. 그때는 매일 마주치던 얼굴들이었는데, 이제는 서로 다른 곳에서 살면서 이렇게 날을 잡아야 만날 수 있다.

코스모스 구경을 마치고 꿈돌이와 꿈순이도 만나러 갔다.

대전의 마스코트인 꿈돌이와 꿈순이를 보니 1993년 대전엑스포가 생각났다. 그때 우리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났으니 꿈돌이도 우리와 함께 세월을 먹은 셈이다.

우산을 쓰고 사진도 찍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날씨가 영 고약했다.

3. 비 맞은 개꼬라지

일기예보에는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했지만, 비는 저녁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것도 적당히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 대차게 쏟아졌다.

우산을 받쳐 들어 머리와 윗몸은 어느 정도 비를 피했지만, 바짓가랑이와 신발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빗물이 튀고 바닥에 고인 물을 밟을 때마다 바짓단이 젖어 들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길도 온통 구적구적했다.

그래도 이왕 나온 김에 구경은 계속했다.

마침 엑스포과학공원 일대에서 대전 빵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데도 행사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천막 사이를 오가며 빵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틈에 섞여 돌아다녔다.

대전의 빵축제라면 역시 성심당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성심당 부스에 가보니 줄이 드럽게 길었다.

비까지 맞아가며 그 긴 줄에 서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빵이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신발까지 젖어 가며 기다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축제장 성심당 부스의 긴 줄은 포기했다. 대신 그 근처에 있는 성심당 DCC점 튀소정거장으로 향했다.

친구는 그곳에서 빵을 한 보따리 샀다. 우리야 대전에 사니 언제든 사 먹을 수 있지만, 멀리서 찾아온 친구는 기왕 온 김에 넉넉히 사 가고 싶었을 것이다.

친구가 산 빵은 내가 대신 들었다. 한 손에 빵 봉지를 잔뜩 들고 젖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사진에도 남았다.

그동안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신발 속까지 물이 들어왔다. 아내도 친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셋 다 비 맞은 개꼬라지가 되었다. ㅋㅋ

토요일에 오라고 했던 아내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는가.

4. 비에 젖어도 즐거운 하루

몸은 고단했지만 참 재미있었다.

어릴 적에는 친구를 만나는 일이 특별하지 않았다.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 시간을 맞추고 먼 길을 오가야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어도 만나면 반갑고 편안하다. 오랜 친구 앞에서는 굳이 지난 시간을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그날 찍은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비에 젖은 풍경도,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던 모습도 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다음에는 날씨가 좋은 날 다시 만나면 좋겠다.

하지만 이번처럼 궂은 날씨에 고생한 하루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쨌든, 비는 실컷 맞았어도 친구는 참 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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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ㅣ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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