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산서원에 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이 만대루에서 보내면서 이공간의 슬기로움에 감탄한다. 그리고 그 슬기로움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만대루의 성공은 병산서원의 중정(中庭)이 갖는 마당의 기능을 이 누마루가 차출함으로써 건물 전체에서 핵심적위치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P46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晦齋)이언적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溪流)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이 배치된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현풍도동서원은 공간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 P47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결과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P47
강당의 마루는 항상 마른걸레질을 해서 윤기를 잃지 않았고, 동재와 서재 그리고 원장실은 추운 날이면 장작불을 때어 흙벽이 바스러지는 일이 없다. 그 싱싱한 보존의 비결은 서원을 지금도 사람이 기거하는 양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고 여름이면 문을 활짝 열어주고 겨울이면 군불을 때어주는 것이며, 그렇게 방문객들의 체온이나무 마루와 토벽에 서려 병산서원은 이제껏 옛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 P49
그런 데에는 무엇보다도 지극정성으로 고사를 지키는 류시석 아저씨의노고를 빼놓을 수 없다. 서애의 후손으로 풍산류씨 가문의 인물 많음은유명하지만 문화유산 보호에 힘쓰신 시자 석자 아저씨 같은 분은 병산서원만큼이나 세상에 다시 없는 귀한 분이다. - P49
어느 답사 때였다. 모닥불이 시들해질 즈음, 나는미리 준비한 사과나무 가지를 불속에 던졌다. 그날따라 사과나무 가지는 불꽃을 둥글게 만들면서 사파이어 빛보다 더 푸른 광채를 발했다. 누군가가 그 불꽃의 아름다움을 말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뒤질세라감탄사를 발하며 화답했다. 무슨 나무냐고 묻기에 내가 사과나무임을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예술마당 솔 답사회 회장인 영남정형외과 정재명 원장이 빙그레 웃고만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웃냐고 물으니 정회장은 새로 지은 병원의 벽난로에 대구, 경산의 사과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로 수거한 사과나무 장작만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한국전력앞에서 촛불 자랑한 격이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手). 세상엔그런 식으로 상수(上) 위에 또 상수가 있는 법이다 - P50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며 안동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비롯하여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장성 필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돈암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했다. - P50
누정의 미학광주광역시의 동북 방향, 무등산 북쪽 기슭과 맞대고 있는 담양군 고서면과 봉산면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누각과 정자 그리고 원림 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면앙정(면仰亭), 송강(松江亭), 명옥헌(鳴玉軒),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식영정(息影亭) 거기에 송강 정철의 별서까지 들러보는 답사 코스는 조선시대 조원(造園, 정원이나 공원)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황금 코스이며, 이른바 조선시대 호남가단(歌壇)이라 불리는 가사(歌辭)문학의 본고장이니 국문학도들에게는 필수의 답사 코스가 된다. - P51
정자는 휴식처이자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한가할 때 홀로 거기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 오붓하게 모여 정서를 교감하고 흥을 돋우던 장소다. 재미나는 이야기로 길고무더운 여름밤을 보내기도 했고, 정치적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기분이 나면 노래 한 곡 뽑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흥이 나면 언제고 시 한 수쯤은 거뜬히 지어낼 수 있을 정도로문학의 생활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유행가를 부르듯이 그들의 시작(詩作)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옛정자는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것이 곧 우리 정자 문화의 내용이다. 이러한 정자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말할 것도 없이 위치 설정이었다. 마을 어귀 사람들이 편안히 모일 수 있는 한쪽 켠, 전망이 좋은 언덕, 강변의 한쪽・・・・・・ 우리가 지나가다 잠시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세워져 있다. - P52
원림의 미학 원림(園林)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의미와 미학이 더욱 깊어진다. 원림이란 일종의 정원이지만 원림과 정원의 뜻은 사뭇 다르다. - P52
정원(庭園)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낸 것으로 우리에게는 식민지 시대에 이식된 단어다. 그래서 1982년 ‘한국정원학회가 창립되면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표기는 정원(庭園)이 아니라 정원(庭苑)이다. 고려·조선시대에는 가원(園), 임원(林園), 화원(花園), 임천(林泉), 원림(園林), 궁원(宮苑) 등이 두루 쓰였다. 그 표현이야 어찌 됐든 정원이 일반적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 작업을 통하여 동산(園)의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옛날에는 성 밖에서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원과 원림에서 자연과인공의 관계는 정반대다. 우리가 찾아갈 소쇄원과 명옥헌은 정원이 아닌 원림이다. - P53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글로써 형언키 어려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대승), 송순, 정철, 백광훈(白光勳), 고경명(高敬命), 김인후(金麟厚)라면 당대의 명유(儒), 명문(名文), 명류(名流)라 할 것인데 그들 모두 소쇄원을 찬양한 시를 남긴 분들이니 이로써도 소쇄원의 성가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증명할 수 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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