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손장섭, 강연균, 임옥상 같은 호남의 화가들이 풍경 속에 그리는 시뻘건 들판이 남도의 역사적 아픔과 한을 담아낸 조형적 변형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보니 그것 자체가 리얼리티였네요. 정말로 강렬한 빛깔이네요."
나의 학생들은 이처럼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정직하고, 무엇인가 느낄 줄 아는 답사의 모범생들이었다. 대학생 시절 나 역시 처음 남도땅을밟았을 때, 나에게 다가온 가장 큰 감동은 남도의 포근한 들판과 느릿한산등성이의 곡선 그리고 저 황토의 붉은빛이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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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월출산과 남도의 봄
잃어버린 옛 정취의 미련국토의 최남단, 전라남도 강진과 해남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장 제1절로 삼은 것은 결코 무작위의 선택이 아니다. 답사라면 사람들은 으레 경주·부여·공주 같은 옛 왕도의 화려한 유물을 구경 가는 일로생각할 것이며, 나 또한 답사의 초심자 시절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난 세월 내가 답사의 광)이 되어 제철이면 나를 부르는곳을 따라가고 또 가고, 그리하여 나에게 다가온 저 문화유산의 느낌을확인하고 확대하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수없이 여러번 다녀온 곳이 바로 이 강진·해남땅이다. - P13

강진과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일 없었으니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대단한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곳이며, 지금도 반도의 오지로 어쩌다 나 같은 답사객의 발길이나 닿는 이 조용한 시골은 그 옛날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였을 따름이다. - P13

남도의 황토, 남도의 들판나주평야의 넓은 들 저편으로는 완만한 산등성의 여린 곡선이 시야로 들어온다. 들판은 넓고 평평한데도 산은 가깝게 다가오니 참으로 이상스럽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치 길게 엎드려 누운 사람의 등허리 곡선처럼 느슨하면서도 완급과 강약이 있는 리듬을 느낀다. 말끝을당기며 "~잉" 소리를 내는 남도사투리의 여운과도 같고, 구성진 육자배기의 끊길 듯 이어지는 가락같이도 느껴진다. 그것은 나만이 느끼는 별스런 감정이 아니었다. 김아무개라는 졸업생이 내게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남도땅의 산등성은 참으로 포근하게 감싸주는 아늑함이 있네요.
경산의 압량벌이나 안동 쪽에서는 펑퍼짐하거나 육중한 것이 가로막아 저런 따스함을 못 느끼거든요."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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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두 번째 기록 ㅣ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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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가 아니라 슬픔이었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두 번째 기록』 — 세스지

책 소개

* 지은이 : 세스지(背筋), 일본의 공포소설 작가
* 옮긴이 : 전선영
* 출판사 : 반타
* 출간일 : 2026년 6월 22일
* 분량 : 364쪽
* 장르 : 일본 공포소설, 모큐멘터리 호러
* 작품 특징 : 잡지 기사, 인터뷰, 인터넷 게시글, 목격담 등 다양한 기록을 엮어 긴키 지방의 특정 장소에서 발생한 괴이한 사건들을 추적하는 작품
* 특이사항 : 2025년 국내 출간된 동명 소설을 일부 개작한 작품. 기본 줄거리는 유지하면서 인물 설정과 주제, 결말 등을 변경한 일본 문고판을 『두 번째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간.

⸻

책을 읽는 내내 무섭지 않았다.

산속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 기괴한 행동을 하는 여자, 수상한 종교 집단과 저주를 부르는 스티커까지. 실제로 이런 일을 겪는다면 공포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활자로 읽는 이야기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산만했다.

1984년 소녀 실종사건에서 시작해 수련회 집단 히스테리, 인터넷 괴담, 아파트 투신사건, 미확인 생물, 기괴한 사진과 신흥 종교까지. 사건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나의 이야기에 몰입할 만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끼어든다. 작가는 이 모든 사건에서 공통점을 찾아 하나의 장소로 연결하려는 것 같은데, 내게는 서로 다른 괴담을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반복되는 단서들이 조금씩 연결된다. 산과 댐, 신사와 도리이, 감과 신부, 그리고 마시라사마.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말들이 뒤에 가서 설명된다. 하지만 단서들이 연결된다고 해서 읽는 동안 끊겼던 몰입까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연결 관계를 이해하는 것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러 그동안 괴담 속에 가려져 있던 한 가족의 비극이 드러났다.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빨간 여자는 한때 남편과 두 자녀를 둔 어머니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종교에 빠져들었고, 그 과정에서 가족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아키라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으며, 홀로 남은 세노는 평생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들의 사연을 알고 나니 귀신의 정체나 괴담의 진상보다 그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더 마음에 남았다. 그때까지 무섭지 않게만 읽었던 이야기에서 비로소 슬픔을 느꼈다.

결국, 가족인가.

가족을 갖고 싶었던 사람, 가족을 잃은 사람, 그리고 잃어버린 가족을 끝내 놓아주지 못하는 사람.

특히 빨간 여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다. 열 살 때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3남 1녀, 네 남매를 홀로 책임지셨다. 어린 자식 넷을 키우며 살아오신 세월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럼에도 어머니는 힘을 잃지 않으셨고, 우리 네 남매를 끝까지 지켜주셨다.

그래서 빨간 여자의 이야기가 더욱 안타까웠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혼자 자식을 키워야 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종교에 빠져들고, 결국 자식들마저 비극으로 몰아넣은 삶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만약 우리 어머니도 그랬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책꽂이에 꽂혀 있던 최인호의 『가족』 두 권을 찾아 꺼냈다.

1권의 표지에는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목말 태우고 환하게 웃고 있다.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탄 아이도 함께 웃고 있다. 아이를 목말 태운 아버지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2권의 표지는 더욱 따뜻하다. 아버지가 아들의 뒤에서 두 팔로 가슴을 감싸 안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해맑게 웃고, 아버지는 그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다. 아이의 웃음이 아버지에게 전해진 것인지, 아버지의 행복이 아이에게 전해진 것인지 모를 만큼 두 사람의 표정이 밝다.

그래, 이게 가족의 모습이어야지.

아이를 어깨에 태워주고, 품에 꼭 안아주고,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것. 자식에게 아버지의 어깨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고, 아버지의 품은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키라와 세노의 아버지도, 나의 아버지도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저 사진 속 아버지와 아이처럼 함께 웃고 살아갈 시간이 우리에게는 너무 짧았다. 아키라와 세노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안고 자라야 했고, 나 역시 열 살 이후로는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탈 수도,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떠난 뒤 남겨진 가족의 삶은 너무나 달랐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모두 채울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우리 네 남매가 살아갈 울타리는 끝까지 지켜주셨다. 반면 소설 속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뒤 종교에 의지했고, 가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았다.

그 여자도 처음부터 그런 삶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키라와 세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 표지 속 아버지와 아들의 웃는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가족의 모습이었다면, 그 여자와 아키라, 세노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결국 책을 덮고 내 마음에 남은 것은 귀신도, 저주도 아니었다. 열 살에 아버지를 잃은 우리 네 남매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신 어머니였다. 그 세월의 무게를 이제야 조금 헤아려 본다.

어머니의 은혜는 하늘같다.

식상하고 상투적인 말이지만, 지금 내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내게 이 책은 공포가 아니라 슬픔의 이야기였고,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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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취재를 구실로 ●●●●● 현지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한테서 종교의 발상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들은 거야. 그게 그 인터뷰 녹취. 너무나 하찮은, 불쌍한 남자 이야기. - P-1

우리가 산으로 꾀는 것이라고 부르는 그건…. 그래. 틀림없이 가족을 갖고 싶어 했을 거야. 그러니 집요하게 신부를 계속 구하지 않았겠어? 외톨이니까, 산속에서 손짓하면서. 그건 신 같은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우리랑 같은, 그저 바보 같은 남자. - P-1

동시에 그 돌에 대한 것도 알게 됐어. 사교 집단이 숭배하던 남자는 그저 희생자이고, 모든 원인은 그 돌에 있었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이미 돌은 그 종교 시설에는 없어. 어머니가 훔쳐서 빼돌렸으니까. - P-1

발자취를 뒤쫓지는 않았지만, 아마 여전히 어딘가에서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고 있겠지. 이를테면 종교 단체에서 다단계 판매 집단으로 껍데기만 바꿔서 말이야. - P-1

다단계 판매 집단이 외웠던 그 주문,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야 종교 단체 신자가 외운 것과 거의 같으니까. 잠입 보고 기사를 구멍이 뚫릴 만큼 읽었으니 잊을 리가 없지.
속여서 미안해. 처음부터 난 전부 알고 있었어. - P-1

바보 같지. 자기 어머니가 괴담이 되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확인해야 했어. 유령이 된 어머니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아키라는 정말 되살아났는지. - P-1

하지만 어차피 한낱 괴담이니까 실체 따윈 없고. 폐허가 된 그 집에 가 봤지만, 어머니도, 아키라도 내 앞에는 나타나 주질 않았어. 그런 짓을 계속하는 걸 마음 한구석으로는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어.

그러다 당신과 만났지. - P-1

새삼스럽지만 한때나마 이런 나와 가족이 돼줘서 고마워. 이제야 겨우 과거의 저주에서 풀려나는구나,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
아이가 생겼을 때는 정말 기뻤어. 하지만 난 그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질 못했지. 아직 이름조차 없던 그 아이. 사랑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니 다정한 당신은 용서해 주었지만,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어. 아니, 아냐. 무서웠어. 유산하고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돼버렸으니까 당신에게 버림받는 게 아닐까 두려웠어. 그래서 내가 먼저 이혼해 달라고 부탁한 거야.
미안. 새삼스럽네, 참. 울지 말고.
당신이 말했잖아.
따뜻한 가족을 갖고 싶다고. 미안해. 나로선 그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없었어. - P-1

만약 이 세상에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면 유령은 존재할 수 있을 거 같아?
인지하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모호하고 약한 존재라고 생각해 - P-1

유령으로서 어머니를, 아키라를 계속 존재하게 만들 생각이었어.
어리석고, 하지만 소중한 내 가족을. 마지막까지 가족이 될 수 없었던 내 가족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못 견디게 미우니까.
계속 존재시킴으로써, 바보 같은 가족의 모습을 계속 대중의 눈에 노출함으로써 복수하고 싶었어. - P-1

관계없는 당신을 끌어들여서 미안해.
나 말이야, 올해로 어머니가 죽은 나이가 되었어.
이제 이런 짓 그만두자고 생각했지. 질려버렸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어쩔 수 없는 과거를 죽도록 조사하는 것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 가는 것도. 차라리 오컬트 작가 따위 때려치우고 어디 숨어서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지. 그런데 당신한테서 연락이 오고 말았어. - P-1

나는 그저 그 아이를 찾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읽고 그 아이를 보는 사람이 나타나리라 믿고 계속 썼다. 세노를, 지히로를 이해해 주기 위해서.
설령 아키라를 본 사람이 어떻게 되더라도. - P-1

괴이한 존재는 때로 우리에게 구원이 된다.
우리는 항상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신이 죽고 나면 어떻게 돼 버릴까. 소중한 사람이 죽은 뒤 어떻게 돼버릴까 두려워한다.
심장이 움직임을 멈춘 육체는 내버려두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또는 화장장에서 고온의 불에 타서 재가 된다. 하지만 그런 잔혹한 ‘현상’으로서의 죽음은 우리에게서 살아갈 의미를 빼앗는다.
사후의 세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면서 어떻게든 인생을 보내고 있다. - P-1

선을 행하면 틀림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 악인은 지옥에 떨어진다. 신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사십구재까지는 현세에 혼이 머무르고, 음력 칠월 보름이면 피안에서 돌아온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죽음 너머에 있는 ‘무(無)’로부터 계속 시선을 돌렸다. - P-1

그것은 두려움을 낳으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사후의 구원을 넌지시 알려준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써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약한 존재다. 허구를 계속 믿다 결국 사실로 만들어버릴 만큼 애처로운 존재다. - P-1

생각해 보면 당신과 나는 서로 닮은꼴이었을지도 몰라.
서로 이해하기를 회피하고 자신만 지키며 살아온 인간이니.
당신과 처음 만났던 그날, 마치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
그렇기에 더욱 당신에게 끌렸지.
나와 닮은 당신을 이해함으로써 그런 자신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니까. - P-1

당신이 필사적으로 죽은 모친을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그리고 당신과 다시 가족이 되기 위해서.
줄곧 생각했어.
"겨우 그 아이가 내 눈에 보였어."
그렇게 당신이 말했을 때부터.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도 내게는 보이지 않아. 유령이. 당신의 동생이.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만 보이지 않아. - P-1

앞으로 당신이 이걸 읽는 날이 올까.
만약 내가 당신의 동생을 볼 수 있다면 그때는 다시 한번 가족이 돼줄까.

그때를 기다리고 있어. 계속.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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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ㅣ 아무튼 시리즈 34
김지승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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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블랙윙에 대한 단상
(今朝黑翼斷想)

어제 직원이 내가 쓰는 연필을 보더니 부러워했다. 연필이야 집에 차고 넘치니 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집 책상 구석에 블랙윙 LAB 11.24.23 한 상자가 올라가 있기에 오늘 아침 출근하며 집어왔다.

사무실에 와서 상자를 열었다. 예전에 이 제품 가운데 희귀한 색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서였다. 혹시 내 상자에도 들어 있나 싶어 한 자루씩 살펴보는데, 열두 자리가 다 차지 않는다. 세어보니 열 자루다. 두 자루가 없다. 언제 꺼내 썼는지, 누구에게 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제 갈 길을 간 모양이다.

LAB 11.24.23은 블랙윙 랩 시리즈의 아홉 번째 제품이다. 블랙윙이 3년 넘게 모아둔 ‘미스핏 연필’을 열두 자루씩 담아 2023년 11월 24일 내놓았다. 기존 제품을 만들다가 색이 고르게 나오지 않았거나, 칠이 한 겹만 입혀졌거나, 표면에 작은 흠이 생기는 등 외관상 정식 제품의 규격에서 벗어난 연필들이다. 생김새는 제각각이지만 필기 성능에는 문제가 없다.

상자마다 연필의 색과 심이 다르며 상자 번호도 따로 붙어 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열어봐야 안다. 그냥 버렸으면 불량품이었을 것을, 블랙윙은 세상에 하나뿐인 조합으로 만들어 한정판으로 팔았다. 장사를 참 잘한다.

나도 이 LAB을 여섯 상자쯤 샀다. 그런데 오늘 찾던 쨍한 파란색은 한 자루도 보이지 않는다. 파란색이 귀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블랙윙이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산 여러 상자에는 없으니 적어도 내게는 희귀한 색이 맞다.

상자를 뒤지다 보니 2021년 마지막 날 북플에 올렸던 글이 생각났다. 그동안 사들인 연필을 한데 모아놓고 “몇 번을 태어나 죽어도 다 쓰지 못할 연필들”이라며 자랑했던 글이다. 그때 찍어둔 사진을 다시 펼쳐보니 수많은 연필 사이에 푸른색 블랙윙 한 자루가 보였다.

그 연필은 오늘 찾던 LAB의 파란색이 아니었다. 블랙윙 Volume 73, 레이크 타호였다.

레이크 타호는 2017년 6월에 나온 한정판이다. 연필 몸통에는 타호 블루 색을 입혔고, 표면에는 호수 주변의 지형을 본뜬 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은색 페룰과 흰색 지우개를 달았으며, 심은 진하고 부드러운 소프트 흑연이다.

숫자 73은 타호호의 투명도를 측정한 세키 깊이 73피트에서 따왔다. 한때 개발과 오염으로 맑은 물빛을 잃어가던 호수가 보전 노력으로 투명도를 회복한 것을 기념한 연필이다. 호수의 색과 지형, 환경보전의 의미까지 연필 한 자루에 담았다.

나는 이 연필이 나오기 전인 2016년 10월, 실제 레이크 타호에 갔었다.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넓고 푸른 호수와 그 뒤를 둘러싼 산을 직접 보았다. 이듬해 그 호수의 이름과 색을 담은 블랙윙이 나왔고, 지금 내게는 두 타스가 상자째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출시된 지 9년이 지난 지금은 온전한 한 상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연필이 되었다.

오늘 직원들에게 한 자루씩 나눠주려고 LAB 상자를 가져왔을 뿐인데, 두 자루가 없다는 것을 알차리고, 희귀하다는 파란색을 찾아보고, 5년 전 북플에 올린 글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 글의 사진 속에서 레이크 타호를 찾아내어, 10년 전 그 호수 앞에 서 있던 시간까지 돌아보았다.

LAB의 두 자루는 이미 어디론가 갔고, 찾던 쨍한 파란색은 애초부터 없었다. 대신 레이크 타호 두 타스가 여전히 내 연필 상자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연필은 쓰면 쓸수록 짧아진다. 하지만 연필 한 자루에 붙은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길어진다. 오늘 내 손을 떠나 직원들 손으로 건너갈 연필에도 또 하나의 이야기가 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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