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판에 도의가 서라벌에 와서 그 논리와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 들은 도의선사의 외침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격했다. 따지고 보면 도의선사의 주장은 해괴한 마귀의 소리라기보다는 위험한 사상, 불온한 사상이었다. 만약 통일신라에 국가보안법이나 불교보안법이 있었다면 도의는 영락없이 구속.처형감이었다. 그런 위험이 도의에게 닥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의는 서라벌을 떠나멀고 먼 곳으로 가서 은신할 뜻을 세웠으며, 그가 당도한 곳이 설악산의진전사였다. 보림사(寶寺)의 보조선사비문에 의하면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 산림에 은둔한 것이라고 한다. - P148

‘동해의 동쪽‘에서 ‘북산의 북쪽‘으로도의선사가 북쪽으로 간 이유는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의 군대를 피해 갈댓잎을 꺾어 타고 양쯔강 건너 소림사로 간 이유와 같다는 비유도 있다. 그 사정을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현란한 비유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 P148

이 때문에 달마가 중국의 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2조, 우리 스님(보조선사)이 3조다.

도의가 ‘아직 때가 되지 못해 감추었다는 빛은 그의 손자제자 되는시기에 와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P149

이와 같이 도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서라벌의 귀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군사적 부를 키워온 호족들이었다. 호족의 입장에서 보면 도의가 주장한 ‘자심즉불(佛)‘과 ‘일문일가(一家)‘는 하나의 구원의 사상인 셈이었다. 왕즉불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 호족들의 위치는 지배층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체제와 질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침의 능력이 중요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은 곧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에 호족들은 앞다투어 지방에 선종 사찰을 세운다. - P149

선종의 구산선문은 한결같이 오지 중의 오지에 들어서 보령의 성주사,
강릉의 굴산사 등은 오늘날에도 폐사지로 남고 영월 법흥사·남원 실상사·곡성 태안사·문경 봉암사·장흥 보림사처럼 답사객을 열광케 하는심산의 명찰로 남아 있게 되었다. - P150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이내 호족 중 한  사람인 왕건의 승리, 불교의 이데올로기는 선종의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 진행의 출발이 곧 여기 진전사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우리가 도의와 진전사를 모르고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전사 폐사지에 서면 나는 항시 변혁의 계절을 살던 한 선각자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함께 새겨보게 된다(현재 조계종 종헌에서는 도의선사를 종조로 모시고 있다). - P150

탑의 본질은 사리탑이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것은 불탑, 줄여서 탑이라 하고, 스님의 사리를 모신 것은 승탑이다. 승탑은 스님의 이름 뒤에탑을 붙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며 별도로 승탑 자체에 이름을 부여한 경우도 많다.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승탑이라 하고, 스님의 이름을 알 경우에는 아무개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하며, ‘보조국사 창성탑‘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 승탑도 있다. - P151

발굴된 선림원의 범종은 돌볼 이 없는 이곳에 방치할 수 없어 오대산월정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되어 한국전쟁이 터졌다. 오대산은 치열한 전투지로 변하였고 인민군에 밀리던 국군이 월정사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이 불리하여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이르자 국군은 퇴각하면서 인민군이 주둔할 가능성이 있는 양양 낙산사와 이곳 월정사에 불을 질렀다. 그때 낙산사와 월정사는 석탑들만 남긴채 폐허가 되었고 선림원의 범종은 불에 타 녹아버렸다(현재 선림원 범종의잔편들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원 도면을 참고해 만든 복원품이 전시되어있다). - P160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않으리라. - P165

유한준의 원문은 "知卽爲眞愛 愛卽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이며, 이는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 P165

기암 괴석들이 쪼아 새기고 갈고 깎은 듯이 삐죽삐죽 솟아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하고, 어기어 서 있기도 하고, 기울게 서 있기도 하고 짝지어 서 있기도 한데, 마치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돌아보며 줄지어 따라가는 것 같기도하다. 이는 조물주가 정성 들여 만들어놓은 것이다.
좋은 나무와 기이한 나무들이 푸르게 물들이고 치장하여 삼림이빽빽한데 서로 손을 잡아 서 있기도 하고, 등을 돌려 서 있기도 하고,
옆으로 누워 있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니, 마치 누가 어른인지 다투는 것도 같고, 누가 잘났는지 경쟁하는 것도 같고, 어지럽게일어나 춤추고 절하며 줄지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토신이 힘을 다하여 심어놓은 것이다.
신선과 아라한이 그 사이를 여기저기 걸어다닌다. 이쯤 되면 경개(景)를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 P173

구름이 자욱해서 정상에 오르지를 못하고 존자암에 머물러 있었다. (…) 어제까지 성중에 있으면서 멀리 한라산 중턱을 바라보면 흰구름이 항상 덮여 있었다. 지금은 내 몸이 백운 위에 있음을 깨닫게된다. 이에 장난스런 시 한 편을 짓고 「백운편제목을이라붙였다.

하계(下界)에선 흰 구름 높은 줄만 알고흰 구름 위에 사람 있는 줄 모르겠지.

(---)가슴속 울끈불끈 불평스런 일들을하늘문을 두드리고 한번 씻어보리라. - P175

이 산을 오른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높은 벼슬아치 몇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賢人)들의 거필巨로는 한 번도그 진면목을 적어놓은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가들이 신산(神)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라고 하겠는가. - P178

면암의 말대로 명산은 그것을 노래한 시와 글이 있어 그 가치와 명성을 더해간다. 마치 미술의 역사는 그것에 대한 해석의 역사까지도 포함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명작은 뛰어난 명품 해설이 더해져 그 내용이풍부해지고 더욱 가치가 살아나게 되듯이 지금이라도 한라산과 제주도에 대한 기행문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본래 애국심은 국토사랑에서 시작된다. - P179

이 대목에선 시 한 수가 절로 나올 만한데 노산(山) 이은상(李殷相)이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영실의 진달래를 노래한 것은 참으로 아련한여운을 남기는 절창이다.

높으나 높은 산에 / 흙도 아닌 조약돌을실오라기 틈을 지어 / 외로이 피는 꽃이정답고 애처로워라 / 불같은 사랑이 쏟아지네한 송이 꺾고 잘라 / 품음직도 하건마는내게 와 저게 도로/ 불행할 줄 아홉기로이대로 서로 나뉘어 / 그리면서 사오리다「한라산 등반기 - P181

한라산에서 전하는 그리움
나는 한라산을 무한대로 사랑하고 무한대로 예찬하고 싶다. 그러우리는 한라산을 말하면서 곧잘 잊어버리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제2섬이 곧 한라산이고 한라산이 곧 제주섬이라는 사실이다. 잠깐 생각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속에 그렇게 새기지 못하는 경우ㄱ많다. 그래서 한라산은 산이면서 또한 인간이 살 수 있는 넉넉한 땅 6평을 만들어주었다는 고마움을 잊고 한다.
면암 최익현은 「유한라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내 6, 7만 호가 이곳을 근거로 살아가니, 나라와 백성에게 미치는 이로움이 어찌 금강산이나 지리산처럼 사람들에게 관광이나 제공하는 산들과 비길 수 있겠는가?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대학자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 P196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지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침묵의 물체를 생동하는 영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이는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만남이며,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인 것이다.
조선왕조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山) 정원용(鄭元)은 비록그 자신이 문장가이기는 했지만 글씨에 대하여 특별한 전문성을 갖고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네 사람의 명필을 논한 「논제필가(論諸筆,
여러 서예가를 논함)」에서는 미술과 문학의 행복한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 P200

한석봉(石峯)의 글씨는 여름비가 바야흐로 흠뻑 내리는데 늙은농부가 소를 꾸짖으며 가는 듯하다.
서무수懋의 글씨는 반쯤 갠 봄날 은일자隱者, 세상을 피해 숨어지내는 사람)가 채소밭을 가꾸는 듯하다.
윤백하(下)의 글씨는 가을달이 창에 비치는데 근심에 서린 사람이 비단을 짜는 듯하다.
이원교(李)의 글씨는 겨울눈이 쏟아져내리는데 사냥꾼이 말을타고 치달리는 듯하다. - P2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미터인데 진전사탑은 5미터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지붕돌의 기왓골이 석가탑은 거의 직선인데진전사탑은 슬쩍 반전하는 맵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미감의 차이를 낳았다.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 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차이다. - P146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있고, 진전사는 변방의 오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다보탑과 함께 쌍탑인데 진전사는 단탑가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국사가 중대 신라를 살던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했다. 중앙 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 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니다. - P146

도의가 당나라에서 익힌 불법은 선종(禪宗) 중에서도 남종(南宗)선의골수였다.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선종이 6조에 와서 남북으로 나누어져 남종선이 조혜능(曹溪慧能, 638-713)부터 다시 시작됨은 내남이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대로다. 달마대사가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면서)"깨달음을 구했던 것이 혜능에 와서는 "문자에 입각하지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敎外別傳直指人心見性成佛)"고 호언장담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P147

6대조 혜능의 뒤를 이어 8대조인 마조도일(馬祖道, 709~88)에 이르면 여기서 더 나아가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 "임을 외치게 되는데, 이 외침은 곧 마조선사가 있던 지명을 딴 홍주종(洪州)의 진면목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가 서당지장(堂智藏,735-814)인바, 도의선사는 바로 그 서당의 홍주종을 익히고 고국으로돌아온 것이었다. - P1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답사의 급수
그 나름의 훈련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거기에는 당연히 급수가 매겨질 수 있다. 문화유산 답사도 마찬가지여서 오래 다녀본 사람과 이제 막 이 방면에 눈뜬 사람이 같을 수 없다. - P141

답사의 초급자는 어디에 가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성심으로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며 골똘히 살피고 알아먹기 힘든 안내문도 참을성을갖고 꼼꼼히 읽어간다. 그러나 중급의 답사객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문화재뿐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 보았던 비슷한 유물을 연상해내어 상호 간의 공통점과차이점을 곧잘 비교해보곤 한다.  - P141

말하자면 초급자가 낱낱 유물의 개별적·절대적 가치를 익히는 과정이라면 중급자는 그것의 상대적 가치를 확인해 가는 수준인 것이다. - P141

어느 폐사지인들 답사객이 마다하리요마는 그중에서도 나에게 답사가 왜 중요한가를 가르쳐준, 꿈에도 못 잊을 폐사지는 설악산 동해와 마주한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진전사터와 하늘 아래 끝동네에 있는선림원터다. 지금 우리는 거기를 찾아가고 있다. - P1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자장은 636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청량산(淸凉山, 일명 오대산)에 들어갔다. 자장은 청량산 북대(臺)에 올라 문수보살상 앞에서 삼칠일(21일)간정진하니 하루는 꿈에 이역승(僧 또는 梵僧)이 나타나 범어로 게송을들려주었다.
하라파좌 달예다거야낭가사가 달예노사나자장은 이 희한한 범어의 뜻을 당연히 알 수 없었는데 이튿날 아침 다시 이역승이 나타나 번역해주었다.
모든 법을 남김없이 알고자 하는가.
본디 바탕이란 있지 않은 것.
이러한 법의 성품을 이해한다면곧바로 노사나불을 보리라. - P135

그러고는 비록 가지 가르침을 배우더라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소"
라고 덧붙이고는 가사와 사리 등을 전하고는 사라졌다. 자장은 이제 수기(記)를 받았으므로 북대에서 내려와 당나라 장안으로 들어가니 당태종이 호의를 베풀며 맞아주었다. - P135

가르쳤으나 가르침이 없는 경지
글쟁이를 업으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논문, 비평문, 해설문, 잡문에 답사기까지 식성껏 글을 써오다보니 나도 모르게 몇 가지 글버릇이 생겼다. 고백하건대 반드시 만년필이어야 하고, 원고지는 나의 전용 1천자원고지여야 하며, 구상은 밤에 엎드려 하고, 글은 낮에 책상에 앉아서 쓰며, 먼저 제목을 정해야 쓰기 시작하고, 첫 장에서 끝 장까지 단숨에 써야 되는데 글쓰는 동안에는 점심 저녁도 무드 깨질까봐 대충 때운다. - P137

아내는 월운스님이 강술한 금강경을 주고 간다. 밤새 읽어가다보니25번째 마디, 화무소화(化無所化), 번역하여 ‘교화(化)하여도 교화함이없음‘ 풀이하여 ‘가르쳤으나 가르침이 없는 경지‘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부처님이 장로(長老) 수보리(須菩提)에게 하는 말이다. - P139

수보리야! 너희들은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여기지 마라. (...)진실로 어떤 중생도 여래가 제도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을여래가 제도할 것이 있다면 이는 여래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아상이 있다"라고 한 것은 곧 아상이 아니건만 범부들은 아상이 있다고 여기니라 수보리야! 범부(凡)라는 것도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니라. - P139

*이렇게 아리랑은 지역과 세대를 불문하고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다는 점과 누구나 쉽게부를 수 있고 재창조할 수 있다는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15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전승되고 있다. - P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는 병산서원에 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이 만대루에서 보내면서 이공간의 슬기로움에 감탄한다. 그리고 그 슬기로움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만대루의 성공은 병산서원의 중정(中庭)이 갖는 마당의 기능을 이 누마루가 차출함으로써 건물 전체에서 핵심적위치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P46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晦齋)이언적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溪流)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이 배치된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현풍도동서원은 공간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 P47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결과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P47

강당의 마루는 항상 마른걸레질을 해서 윤기를 잃지 않았고, 동재와 서재 그리고 원장실은 추운 날이면 장작불을 때어 흙벽이 바스러지는 일이 없다. 그 싱싱한 보존의 비결은 서원을 지금도 사람이 기거하는 양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고 여름이면 문을 활짝 열어주고 겨울이면 군불을 때어주는 것이며, 그렇게 방문객들의 체온이나무 마루와 토벽에 서려 병산서원은 이제껏 옛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 P49

그런 데에는 무엇보다도 지극정성으로 고사를 지키는 류시석 아저씨의노고를 빼놓을 수 없다. 서애의 후손으로 풍산류씨 가문의 인물 많음은유명하지만 문화유산 보호에 힘쓰신 시자 석자 아저씨 같은 분은 병산서원만큼이나 세상에 다시 없는 귀한 분이다. - P49

어느 답사 때였다. 모닥불이 시들해질 즈음, 나는미리 준비한 사과나무 가지를 불속에 던졌다. 그날따라 사과나무 가지는 불꽃을 둥글게 만들면서 사파이어 빛보다 더 푸른 광채를 발했다. 누군가가 그 불꽃의 아름다움을 말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뒤질세라감탄사를 발하며 화답했다. 무슨 나무냐고 묻기에 내가 사과나무임을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예술마당 솔 답사회 회장인 영남정형외과 정재명 원장이 빙그레 웃고만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웃냐고 물으니 정회장은 새로 지은 병원의 벽난로에 대구, 경산의 사과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로 수거한 사과나무 장작만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한국전력앞에서 촛불 자랑한 격이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手). 세상엔그런 식으로 상수(上) 위에 또 상수가 있는 법이다 - P50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며 안동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비롯하여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장성 필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돈암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했다. - P50

누정의 미학광주광역시의 동북 방향, 무등산 북쪽 기슭과 맞대고 있는 담양군 고서면과 봉산면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누각과 정자 그리고 원림 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면앙정(면仰亭), 송강(松江亭), 명옥헌(鳴玉軒),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식영정(息影亭) 거기에 송강 정철의 별서까지 들러보는 답사 코스는 조선시대 조원(造園, 정원이나 공원)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황금 코스이며, 이른바 조선시대 호남가단(歌壇)이라 불리는 가사(歌辭)문학의 본고장이니 국문학도들에게는 필수의 답사 코스가 된다. - P51

정자는 휴식처이자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한가할 때 홀로 거기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 오붓하게 모여 정서를 교감하고 흥을 돋우던 장소다. 재미나는 이야기로 길고무더운 여름밤을 보내기도 했고, 정치적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기분이 나면 노래 한 곡 뽑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흥이 나면 언제고 시 한 수쯤은 거뜬히 지어낼 수 있을 정도로문학의 생활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유행가를 부르듯이 그들의 시작(詩作)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옛정자는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것이 곧 우리 정자 문화의 내용이다.
이러한 정자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말할 것도 없이 위치 설정이었다. 마을 어귀 사람들이 편안히 모일 수 있는 한쪽 켠, 전망이 좋은 언덕, 강변의 한쪽・・・・・・ 우리가 지나가다 잠시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세워져 있다. - P52

원림의 미학
원림(園林)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의미와 미학이 더욱 깊어진다. 원림이란 일종의 정원이지만 원림과 정원의 뜻은 사뭇 다르다. - P52

정원(庭園)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낸 것으로 우리에게는 식민지 시대에 이식된 단어다. 그래서 1982년 ‘한국정원학회가 창립되면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표기는 정원(庭園)이 아니라 정원(庭苑)이다. 고려·조선시대에는 가원(園), 임원(林園), 화원(花園), 임천(林泉), 원림(園林), 궁원(宮苑) 등이 두루 쓰였다. 그 표현이야 어찌 됐든 정원이 일반적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 작업을 통하여 동산(園)의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옛날에는 성 밖에서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원과 원림에서 자연과인공의 관계는 정반대다. 우리가 찾아갈 소쇄원과 명옥헌은 정원이 아닌 원림이다. - P53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글로써 형언키 어려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대승), 송순, 정철, 백광훈(白光勳),
고경명(高敬命), 김인후(金麟厚)라면  당대의 명유(儒), 명문(名文), 명류(名流)라  할 것인데 그들 모두 소쇄원을 찬양한 시를 남긴 분들이니 이로써도 소쇄원의 성가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증명할 수 있다. - P59

나는 이것을 조선시대 사대부 문화의 위대한 강점이라고 생각하고있다. 사대부는 군자로서 살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확고한 도덕률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지향한 바는 전문인·기능인이 아니라 총체적 지식인으로서 문사철겸비한 사람이었을으며, 그리하여 그 지식으로 세상을 경륜하고, 그 안목으로 시를 짓고 거문고를 뜯고 글씨를 쓰고 집을 짓고 사랑방을 디자인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전쟁조차도 전문성보다는 총체성에 입각하여 대처했다. 우리 시대의 전문인들이 잃어버린 바로 그 총체성을 우리는 이곳 소쇄원에서배워야 마땅할 것이다. - P64

1985년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린 섣달 스무날, 나는 처음으로문화유산 답사의 인솔자가 되어 그림 그리는 친구와 후배 그리고 젊은미술학도 45명을 이끌고 남도를 순례하는 첫 기착지로 소쇄원에 들렀다. 그때 나의 답사팀 모두는 소쇄원 입구 대밭으로 들어서는 순간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천지가 하얗게 눈으로 덮인 세상에 대밭만이 의연히청정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음에 대한 감동이었을 것이다. 대나무가 겨울에도 푸르다는 것이야 모를 리 있었으리요마는 모두가 상상을 초월하는 이 황홀한 실경에 감복했다. - P65

배롱나무의 진짜 아름다움은 한여름 꽃이 만개할 때이다. 배롱나무꽃은 작은 꽃송이가 한데 어울려 포도송이를 올려세운 모양으로 피어나는데 7월이 되면 나무 아래쪽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여 9월까지 100일간붉은빛을 발한다. 그래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저 꽃이 다 지면벼가 익는다고 해서 쌀밥나무라는 별명도 얻었다. 탐스런 꽃송이가 윤기 나는 가지 위로 무리지어 피어날 때면 그 화사함에 취하지 않을 인간이 없다. 본래 화려함에는 으레 번잡스러움이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배롱나무의 청순한 맑은 빛에서는 오히려 정숙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되니아무리 격조 높은 화가인들 이처럼 맑은 밝고 화사한 색감을 구사할 수있을 것인가. - P67

식영정, 이 정자의 이름을 나는 한동안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뜻으로새기고 이 정자의 이름이 서정적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옛 식영정 주인이 쓴 기문(記)을 읽어보니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림자가쉬고 있다‘는 자못 심오한 뜻이 들어 있었다. 식영정은 서하당(棲霞堂)김성원(金)이 그의 장인어른인 석천(石川) 임억령(齡)을 위해지어올린 집인데, 정자의 이름을 지으면서 장인 사위 사이에 그림자 이야기가 오갔던 모양이다. 그 내용이 『식영정기(息影亭記)』에는 이렇게실려 있다. - P69

장자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림자는 이 사람이 빨리 뛰면 빨리 쫓아오고천천히 뛰면 천천히 쫓아오며 끝끝내 뒤에 붙어다녔다. 그러다 다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 나타나지 않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내 말을 듣고 나서) 김성원은 말하기를, 사람과 그림자의 관계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나 선생(임억령)이 (...) 스스로 자기 빚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 관계 없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나는 말하기를 (…)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고 시원하게 바람 타고 자연조화와 함께 어울리며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니 (…) 그림자도 쉬고 있다는 뜻으로 식영이라 이름 짓는 것이 어떠하냐. 이에김성원도 좋다고 응하였다.

때는 1560년, 명종 15년으로 임억령 나이 65세 때의 일이다. - P69

환벽당에서 이제 우리는 취가정(歌亭)으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걸어서 불과 5분 거리다. 이때 사람들은 대개 자미탄 개울길을 따라가지만나는 항시 뒤편으로 돌아서 탱자나무 울타리가 인상적인 묵은 동네뒷길로 간다. 길가엔 무슨 연고인지 사금파리가 많이 깔려 있는데 17세기도편(陶)이 적지 않아 그것이 항시 나의 미술사적 의문이다. - P73

취가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후손인 김만식(金晚植)이  1890년에 장군의 덕을 기리며 지은 정자다. 그 정자 이름을 취가정이라 한 것은 송강의 제자였던 권석주(石洲)라는 분의 꿈에 김덕령장군이 나타나서 취시가(歌)를 불렀다는 이야기에서 따왔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했던 김덕령이 결국은 옥사를 하고 마는원한의 노래였다. - P73

조요한 선생님의 ‘한국 정원미‘
숭실대 총장을 지낸 예술철학자이자 나의 스승이신 고 조요한 선생은 명옥헌의 아름다움을 입이 마르도록 감탄하고는 함경도 사투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선생의 고향은 함북 경성이다).

"내레 마음이 확 풀리더구마. 명옥헌은 대단한 원림임둥." - P77

한국의 정원미는 중국 정원처럼 인공에 의하여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정원처럼 자연을 주택의 마당에 끌어들여서 주인 행세를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정원의 이상은 소박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스승의 이 결론으로 담양땅의 원림과 정자를 찾아가는 이 글의맺음말을 삼고 싶다. - P78

누각 하나 있음에 청풍이 살아 있다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는 수식이 자주 붙는다. 맑은 바람에 밝은 달‘이라는 이 청명한 이미지는 산은 아름답고 물은 맑다는 산자수명(山水明)과 함께 어우러진다. 충청북도의 상징적인 대처(處)는 청주와 충주이고, 유명한 명산대찰은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이고, 대표적인 서원(書院)은 괴산의 화양동구곡에 있는 화양서원이지만, 충북이 내세우는 청풍명월의 고장은 제천과 단양이다. 충주댐이 담수되면서 아쉽게도 유서 깊은 강변 마을의 풍광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 대신 남한강 물줄기가 넓고 깊게 차오르면서 드넓은 호수로 변신하여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풍광을 연출해내고 있다. - P79

그 유람선을 타고 아름다운 비봉산·옥순봉·구담봉을 올려다보며 지나가자면 차라리 이국적인 정취조차 일어난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산상의 호수(피어발트슈테터호)를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충청북도가 산자수명하고 청풍명월하다는 이미지는 여전히 제천과 단양이 갖고 있다. - P80

주로 단양 제천 지역이 수몰되어 이루어진 호수이지만 댐 이름을 따라 충주호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자 제천시에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청풍면 전체가 수몰되어 청풍땅이 호수가 되었으면 청풍호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제천시는 주민청원 서명을 첨부하여 국토부와 행정안전부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는데 별무소득이었다. 게다가 충주시가 반대하고나섰다. 그러나 제천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청풍호라고 주장하며 관광팸플릿, 도로 표지판에 청풍호, 또는 살짝 비켜서 청풍호반이라고 쓰고 있었다. 이에 내가 제천시 관계자에게 이렇게 해도 별문제가 없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그럴듯했다. - P83

"충주호라고 하는 건 행정 명칭일 뿐이쥬. 그러나 세상엔 애칭두 있구 별칭이라는 것두 있는 거 아뉴. 제천 송학면 시곡리를 그곳 사람들은 깊은골·안골·곰바우골이라고 나눠서 불러유. 그래야 외레 잘 통하는 걸유.."

그래서 한번은 충주시에 갔을 때 제천에서  청풍호라고 부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슬쩍 물어봤더니 관계자가 펄쩍 뛰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되쥬. 충주댐이면 당연히 충주호지유, 충주호가 어디 청풍땅만 수몰했나유. 충주는 읎구 단양은 읎대유? 자꾸 그렇게 나오면 충주댐 수문을 확 열어서 청풍 물을 다 빼버릴 모양이유." - P83

"냅둬유. 충주호면 어떻구, 청풍호면 어때유. 관광객만 많이 오면 제일이지유. 어차피 배 타면 다 단양으로 오게 되어 있어 우린 신경 안써유. 그래두 충주호라고 해야 많이들 오지 않겠슈. 청풍이라면 그 산골을누가 안대유." - P84

"난 청풍이 처음인데 청풍이라면 청풍 김씨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네요. 대단한 명문이었죠. 조선 말기의 대신 운양 김윤식植,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이 다 청풍김씨죠."
"명문이고말고요.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金堉)도 있죠. 왕비도 둘 배출했죠. 금곡에 청풍김씨 묘역이 있고, 몽촌토성 안에도 있죠." - P85

청풍김씨는 신라 김알지(智)의 후예인 김대유(金大猷)가 고려 말에 문하시중을 지내고 청성부원군에 봉해진 뒤 청풍에 세거하면서 집안의 시조가 되었다. 그 자손들이 대대로 번성하여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상신, 영의정·좌의정·우의정) 8명, 대제학 3명을 배출했다. 왕비도2명이나 나왔다. 김육의 손녀딸이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되었고,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도 청풍김씨였다. - P85

보기에 따라서는 문화유산의 진실성은 보이지 않고 역사 테마공원처럼 되었다고 불만을 말하는 분도 있을 것 같은데,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 조성된 문화재단지임을 감안하면 수몰지구에 이런 역사공원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더욱이 아직 나라경제에 여유가 없던 1980년대에 꾸며진 것치고는 제법인 문화 역량을보여주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 P89

더욱이 이곳에는 한벽루라는 조선시대 최고의 누각이 있고, 그 위치가 다름 아닌 망월산성 자리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아름다운 청풍호반을한껏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답사객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 P89

한벽루의 시
청풍 한벽루에 부친 시는 많고도 많다. 옛날에 서울에서 경상좌도 안동쪽으로 가는 길은 조령(새재)과 함께 죽령이 가장 일찍 열려 있었다.
서울에서 남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다 충주 목계나루를 지나면 뱃길은 한수·청풍·단양으로 이어지고 단양에서 죽령을 넘어가면 풍기가 된다. 이 여정에서 나그네는 반드시 청풍을 지나가게 되어 있다.
청풍에서 묵어가든 그냥 지나가든 문인들은 이 유서 깊은 강변 고을의 아름다운 한벽루에서 저마다의 서정을 발하는 시를 남기곤 했다. 그중 대표적인 예로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의시를 꼽을 수 있으니 웬만한 학식 · 문장. 경륜으로는 여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기 힘들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벽루를 신선이 사는 집에 비겼다. - P101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으로 2층이면 누각, 단층이면 정자라불리며 이를 합쳐 누정(樓亭)이라 하는데 흔히 정자로 통한다. 정자는사찰.서원. 저택. 마을마다 세워졌지만 그중에서도 관아에서 고을의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 규모도 제법 당당하고 생기기도 잘생겼다. 정자는생김새보다 자리앉음새가 중요하다. 그래서 강변에 세운 관아의 정자에명작이 많다.
진주 남강의 촉석루, 밀양 밀양강의 영남루, 청풍 남한강의 한벽루 같은 3대 정자 외에도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연광정, 안주 청천강의 백상루, 의주 압록강의 통군정 등이 예부터 이름 높다. - P104

일찍이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한·중·일 3국의미술적 특성을 비교하면서 중국미술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미술은 색채 감각이 뛰어나며, 한국미술은 선이 아름답다며 중국 도자기는 권위적이고, 일본 도자기는 명랑하고, 한국 도자기는 친숙감이 감도는 것이특징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도자기는 멀리서 감상하고 싶어지고, 일본 도자기는 곁에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손으로 어루만져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런 친숙감이 우리나라 정자에도 그대로 어려 있다. - P105

권위적이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는 평범한 형식 속에 깊은 정감이 서려 있는 친숙감과 생활 속에서 은은히 일어나는 미감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미의 특질이다. 이런 우리 도자기의 미적 특질은우리나라 정자 건축에도 그대로 대입된다. 확실히 정자는 한국의 이미지를 대표할 만한 우리 문화의 자랑이다. - P106

이 아우라지 처녀상은 비극의 동상이다. 40년 전쯤 어느 혼례식날 신랑신부와 마을 하객을 태운 나룻배가 필시 정원 초과로 뒤집어지는바람에 신랑만 남고 모두 익사해버린 대형사고가 있었는데 그때 신부는가마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여 가마째 쏠려갔단다. 그래서 이동네는 지금도 3월이면 같은 날 제사가 많다고 한다. 그 후 해마다 익사사고가 잇따르게 되어 8년 전에는 이 동상을 세워 신부의 원혼을 달래주었고 지금은 푯말까지 세워 답사객을 일없이 부르고 있다. - P110

사북에는 예전부터 탄좌 막장이 무너져 애꿎은 목숨들이 희생당하는사고가 종종 있었다. 험한 세상을 살다가 인생 막장에 와 광부가 되려는 사람들이 맨 처음 부닥치는 절망은 정식 광부가 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아 하청업자의 하청업자인 덕대 밑에서 안전시설이란 없는 거의무방비 상태로 가혹한 저임금 아래 노동하며 당장의 생계를 위해 빚부터 지게 되는 현실이었다. 그 빚이 평생을 가는데 더구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유족이 떠안아 헌 보상금으로 갚고는 다시 무일푼으로원위치하여 세 겹 하늘 아래 흐를 눈물도 없다는 사실만을 나는 듣고보았다. - P121

나의 아내가 아버님께 인사 드리게 하려고 사북으로 나를 데려오면서 했던 그 말이 생각난다.
"사북이 처음이지요? 강원도의 산들이 얼마나 아프게 병들어 있는지 몰라요. 큰 수술 하지 않고는 치료할 수 없는 골수암 같은 거예요.
아버님 뵈면 괜히 쓸데없는 말 묻지 말아요." - P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