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 세 개의 가르침

옛날에 서당 선생이 삼 형제를 가르쳤다. 어느 날 서당 선생은 나란히 앉은 삼 형제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봤다. 첫째가 대답하길 “저는 커서 정승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서당 선생이 “그렇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라고 응수하면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둘째가 “저는 커서 장군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서당 선생이 이번에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아암, 그래야지. 사내대장부라면 큰 뜻을 품어야지”라고 했다. 그러고는 막내를 바라보며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라고 물었다. 막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희망은 그만두고 지금 여기에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엉뚱한 대답에 서당 선생이 “개똥 세 개? 그건 왜?”라고 물을 수밖에. 막내가 대답하길 “저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그 입에 개똥 한 개를 넣어주고 싶고… 저보다 겁이 많은 작은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그 입에도 개똥 한 개를 넣어주고 싶고….” 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 선생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외할아버지가 잠시 뜸을 들이시다가 나에게 물었다. “얘야, 막내가 뭐라고 했겠니?” 나는 주저 없이 “그거야 서당 선생 먹으라고 하지 않았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건 왜 그러냐?” 나는 또 서슴없이 “큰형과 둘째 형의 그 엉터리 같은 소리에 맞장구치며 좋아했으니까 그렇죠, 뭐!”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는 주저함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자 외할아버지는 나를 넌지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마지막 세 번째 개똥은 서당 선생이 먹어야 마땅하지. 그런데 얘야,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잊지 마라. 앞으로 네가 살아가면서 오늘처럼 세 번째 개똥을 서당 선생이 먹어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 말을 하지 못할 때엔, 그땐 네가 그 세 번째 개똥을 먹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알았어요.” 나는 작은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 번째 개똥을 하나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 번째 개똥은 당신 몫입니다!”라고 발언했어야 마땅했음에도 침묵하고 지나갔던 나 자신을 자주 발견했다. 그렇지만 세 번째 개똥을 되도록 적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의 속내 한구석에 께름칙한 무엇인가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은 내가 나를 ‘개똥 세 개’ 이야기에 등장하는 삼 형제 중에서 막내와 일치시킨 것과 관련되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나?’ 나는 첫째와 둘째를 타자화했고 능멸했다. ‘그런 나는 첫째보다 글 읽기를 즐기고 있나?’ ‘나는 둘째보다 겁이 없나?’ 이런 물음들이 나를 헤집었다. 나는 글 읽기보다는 놀이를 훨씬 더 즐겼다. 또 겁도 많다. 나는 막내보다 첫째와 둘째에 가까웠다. 나는 나의 진짜 모습에 가까웠던 첫째와 둘째를 타자화하고 업신여겼던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 했다. ‘개똥 세 개’의 등장인물이 ‘세 자매’가 아니라 ‘삼 형제’라는 점을 알아차린 건 그보다 또 한참 뒤의 일이었는데, 그러자 삼 형제의 바깥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프랑스 땅에서 가난한 난민의 처지가 되었을 때, 막내는커녕 첫째나 둘째도 아닌, 서당 마당을 쓰는 개똥이가 된 내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결 : 거칢에 대하여 | 홍세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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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광란의 역사를 만든 것도 인간이었지만,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것도 인간이었다. 어느 때곤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 이만큼이라도 덜 비인간적인 사회에 살 수 있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그들은 항상 소수파였다.

완벽한 승리는 애당초 기대 밖의 일이었고 안타깝고 답답할 정도의 작은 진전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기 위한 채찍질에 있다기보다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가려는 강력한 힘에 안간힘으로 맞서는 데 있었다.

걸핏하면 너희들이 ‘보릿고개를 아느냐’, ‘전쟁을 알기나 하느냐’면서 질타한다.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느끼기 어렵다고 말할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인간을 사랑하는 한, 인간의 삶을 사랑하는 한, 인간다움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그러했다. 이 땅은 나에게 실존적 고민의 한가운데서 선택한 시지프스의 바위였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상황은 마치 고릴라가 사람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여 잘만 하면 사람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얼토당토않은 부조리의 연속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는 성과에 대한 조급성과 일에 대한 전문성과 지적, 논리적인 취약함을 은폐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다.

부도덕한 사회의 도덕적 인간에게 남는 건 낭패감과 박탈감뿐이다. 정신적 공황을 피할 수 없었고 올바른 생활은 개그가 되었다. 차차 부도덕한 사회의 비도덕적인 개인들이 되었고 고릴라가 들어설 자리는 더욱 확장되었다.

나의 20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을 위해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20대의 젊음은 분출하는 욕망과 삶을 향한 벅찬 기대, 그리고 낭만적 사랑에 대한 예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시절에 20대를 맞아야 했던 우리 세대는 억압된 욕망과 자유 그리고 인간과 삶에 대한 회의의 시작을 의미했다.

대신에 우리에겐 자유와 민주의 복원에 대한 열정과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의 열망이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자유 역시 사회적 제 관계 속에서 지나치게 구체화되고 개별화되어 마치 상대적 가치인 양 그 실용성이 강조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잊어버려선 안된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살았다. 영혼을 떠나보내지 않고. 그래서 아픔은 있었지만 후회는 없다.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 남을 것이지만.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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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는 시험 본 다음에 잊어버린 학생과 시험보기 전에 잊어버린 학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학교와 교실이 차별과 억압을 ‘익히는(習)’ 곳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가령 한국의 일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노동자의식은 ‘의식적인 노동자의식’일 경우가 많다. ‘단결’, ‘투쟁’이 적힌 조끼를 입고 〈임을 위한 행진곡〉, 〈철의 노동자〉를 함께 부를 때나 노동자의식을 확인한다. 이와 같은 소수의 노동자들조차 일상을 지배하는 의식은 소시민의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익힘, 즉 ‘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환경과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사람은 어렸을 때 형성된다’라는 교육 금언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의 교육환경과 일상이 이웃에 대한 배려나 인권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 수 있다.

공부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소설책이든 교양서든 책을 읽을라치면 ‘공부 안 하고 뭐 하냐?’라는 지청구를 들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면서도 책은 안 읽거나 못 읽는 현실, 이것이 우리 학생들의 일상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명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료하다. 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한다. 사람에 관한 학문, 곧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사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곧 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역시 분명하다. 사회 안에서 주체적 자아로 살기 위해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주체적 자아를 지향하는 나에게 요구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 뜨기’를 위한 학문인 인문사회과학에는 원래 정답이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노동이란 육체노동, 공장노동을 뜻하고 그래서 ‘하지 않는 게 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수준에 가깝다. 대부분 노동자가 될 학생들이 일찍부터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등수로 줄 세우는 대신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글쓰기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이전에 독서와 글쓰기가 사라진 중고등학교의 ‘미친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만큼 자아의 세계가 확장된다.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게 해야 한다. 학생들은 사물과 현상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펼 때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의 ‘국민’은 본디 ‘일제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국민’을 말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불령선인이라 했고 ‘비(非)국민’이라고 불렀다.

첫째 목적이 의식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면, 둘째 목적은 몸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 몸의 통제가 의식을 통제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미셸 푸코가 강조한 바 있다. 마지막 셋째 목적은 식민지 중하급 관리자, 즉, 식민지 관리를 위한 마름 양성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출세한’ 사람 대부분이 일제부역자가 되었던 것은 출세하려면 박정희처럼 몸과 정신이 모두 일본인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일본의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합한 학교가 군사학교였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학교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학교 건물 구조가 병영 구조와 같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교문 옆 수위실은 위병소고, 운동장은 연병장이고, 구령대는 사열대다. 일제가 망한 뒤에 일제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듯이 민주공화국이 선 뒤에도 일제시대의 학교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봉건사회에서 신의 ‘명령’(order)으로 받아들여졌던 신분‘질서’(order)는 인류 역사상 인간에게 강제된 질서 중에서 가장 무섭고도 강고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공화국은 ‘군주국의 반대’라는 의미만 있을 뿐이고, ‘대통령을 뽑는 것’으로 공화국이 완성된 양 집단 착각에 빠져 있다. 주체도 없고 목표도 없고, 다만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의 개념만 남아 있다. 그것도 실상은 ‘법의 권위’가 아닌 ‘힘과 돈’이 지배하는 국가로.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의 말로 전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논리로 밀릴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함으로써 자리를 모면하는 사람들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21세기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뜻은 단순명료하다. 자본가는 자본가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본가 의식을 갖고, 노동자, 농민은 노동자, 농민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노동자, 농민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들 중 노동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의식을 가진 극소수의 노동자들도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동자의식을 가진 게 아니다.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지배세력에 의해 의식화되었던 반노동자의식을 ‘반전’시킨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노동자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오늘의 대학에서는 80~90년대와 달리, 소수에게나마 탈의식의 계기를 주었던 선배와 동아리를 만나기 어렵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사회비판적 안목을 갖춘 진보적 의식의 형성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의 정서의 고향인 땅이 사라지는 사회, 다만 투기 대상인 ‘부동산’으로 바뀌는 사회……, 앞으로 우리 농촌도 물질과 경쟁으로 채워진 시간과 공간만 남을 것인가. 그리고 시간의 효율적 안배를 위해 앞당겨 치러내던 설 차례나 추석 성묘마저도 사라져갈 것인가.

나는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는 것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인간의 자발적 반란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때문이라고 전망한다. 자본을 매개로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인간의 반란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을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때가 기어이 올 것이고, 그때까지도 자본주의는 탐욕스런 아집을 계속 부리겠지만 끝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전쟁 수행자들이고 인간 문명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자연의 반란은 지배, 피지배 관계를 뛰어넘어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가져온다.

"우리는 이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라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다."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이명박 정권이 특히 귀기울여야 할 생텍쥐페리의 말이다.

마하트마 간디였다. "신은 우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말했던 이는. 신조차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켜줄 수 없다면, 무엇이 인간의 탐욕을 채워줄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공멸뿐인가.

인류가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최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시기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분명한 것은 인간의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 또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태양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확인한 사흘째 날이 바로 12월 25일이다.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축제일로 기념했다. 나중에 그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태양축제일은 성탄절이 되었고 그것이 유럽 전역으로 역으로 전파된 것이다.

세상에 엽기적인 일이 참 많지만 가장 엽기적인 일은 엽기적인 일을 엽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는 목사님들의 행태가 그런 예에 속한다.

인구 중 65퍼센트가 가톨릭이고 2퍼센트가 개신교도로 구성원의 다수가 하느님을 믿는 프랑스는 잘 사는 나라에 속하는데,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피에르 신부는 "사람을 굳이 둘로 나누어야 한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군자는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데, 소인은 별 차이도 없으면서 불화한다는 것이다.

볼테르의 말처럼 "우리들의 부싯돌은 부딪혀야 빛이 난다." 서로 다른 견해가 표현되어 부딪힐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견해를, 다르다는 이유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내 견해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서도 옳지 못한 행위다.

인간은 편함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특히 정의와 진실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요구한다. 일상에서 사회문제, 정의와 진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소수가 한국사회에서는 극소수에 가깝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마르크스는 "자유 언론의 일차적 조건은 산업이 아니어야 한다는 데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문이 미디어산업의 하나로 머물 때, 누가 소유하고 있나에 따라 신문의 지향이 규정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68년 혁명의 열정이 아직 살아 있던 때 민중 주체 신문인 〈해방LIBERATION〉지를 탄생시키는 데 산파역을 했던 장 폴 사르트르는, "자유언론은 생존 수단이 존재 이유를 훼손하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해방〉지는 로스차일드가의 소유가 되었다. 체 게바라가 상업주의의 아이콘이 되었듯이 〈해방〉이 재벌 가문에 포획된 것이다.

한겨레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장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구되는 긴장의 크기를 가늠케 한다. 한겨레 구성원들이 다른 언론계 종사자들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박봉을 감내하는 것은, 그것이 자유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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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 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의 작은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그지없이 기쁜 일이다.
-‘책머리에 중에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존재인 양 착각하기도 하지만, 일찍이 칸트가 지적했듯이 ‘생각하는 바에 관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다.

스피노자가 강조했듯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스피노자가 강조했듯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고집하고 쉽게 버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 라고.

"사람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따르면, 사람은 이성적 동물, 합리적 동물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이처럼 우리 몸은 건강하지 않는 대부분의 경우 자각증세를 보여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해주지만 우리 생각은 그렇지 않다. 너무 늦어서 탈이지만 그래도 종내는 자각증세를 보이는 암보다도 더 지독해서 그릇된 생각, 그래서 내 삶을 그르칠 수 있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에도 자각증세가 없다. 자각증세는커녕 그 생각을 고집한다. 생각의 성질이 그와 같다.

내 안에 생각을 집어넣는 실제 주체인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춰 나가면서 기존에 형성된 생각을 끊임없이 수정하여 나의 주체성을 확장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인도, 내 삶의 진정한 주인도 되기 어렵다.

1) 폭넓은 독서 2) 열린 자세의 토론 3) 직접 견문 4) 성찰

내게 ‘폭넓은 독서’란 이런 의미다.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 중 책을 남긴 사람의 생각을 내가 ‘주체’적으로 참조하는 것".

내게 ‘열린 자세의 토론’이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을 열린 자세로 참조하려고 ‘주체’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또 ‘직접 견문’이란 "오감을 가진 주체로서 다양한 경험과 여행 등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직접 보고 겪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찰’이란 "폭넓은 독서와, 열린 토론, 그리고 직접 견문을 통해 만나는 뭇 생각들이 소우주와 같은 나의 의식세계 안에서 서로 다투고 비벼지고 종합되고 정리되는 과정"을 뜻한다.

스페인의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는 지극히 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옥에 하나의 창이 나 있다. 놀랍게도 이 창은 모든 세계와 만나게 해준다. 바로 책이라는 이름의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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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그동안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 새롭게 작성한 글, 강연 원고를 정리한 글을 묶은, 그야말로 잡문집이다. 이 책이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의 작은 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그지없이 기쁜 일이다.

이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시금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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