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숨이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야산들은 황금빛 노을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들판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빛으로 반짝였다.
조종사 파비앙은 남쪽 끝 파타고니아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갔다.
이따금 그는 인적 없는 대초원 위를 날다가 외딴 농가를 만나면 날개를 흔들어 인사를 보내곤 했다.
그는 행복한 정박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칠레와 파라과이발 우편기들도 오고 있었다.
이들이 도착하면 오늘도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비행기를 출발시켜야 하는 총책임자 리비에르는 쉴 수가 없었다.
리비에르는 처음으로 자신이 늙고 지쳤다고 느꼈다.
그는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노년에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밀쳐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정말로 시간이 날 것처럼.

‘규칙이란 부조리하게 보이지만 인간을 만드는 종교 의식과 같다.’ 정당하냐 부당하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리비에르에게 인간이란 새로 빚어야 할 밀랍과 같았다.
그는 이 재료에 영혼을 불어넣었고, 의지를 창출해냈다.
그 결과 직원들은 날씨가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들은 구름의 틈새라도 발견하면 서로 소리쳤다.
"북쪽이 개었다. 자, 출발!"

리비에르는 조종사 펠트랭과 외출했던 감독관 로비노를 호출했다.
"펠트랭과는 좀 가까워졌나?"
그는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띠며 호통치듯 말했다.
"자네는 그 조종사에게 위험한 비행을 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도 있네.
그 조종사는 자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네.
만약에 그가 우정 때문에 자네의 명령에 복종한다면 자네는 그를 기만하는 것과 다름없어."
그는 당부했다.
"부하들을 사랑하게. 그러나 그것을 결코 입 밖으로 내선 안 되네."

리비에르는 나이 든 정비사 로블레를 해고했다.
아르헨티나 노선 초창기에 비행기를 조립한 20년 경력의 정비사였지만,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비행기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한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저는 평생을 바쳐 일했습니다."
리비에르는 나이 든 정비사의 쭈글쭈글한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본보기입니다. 본보기로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매정하게 내쫓은 것은 그 정비사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한 잘못이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잘못의 매개자를 발견했는데도 그냥 넘어간다면 그것은 범죄 행위이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조종사의 아내는 그를 좀 더 자게 두었다.
남편의 휴식은 곧 돌격해야 할 예비군의 불안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한 시간 후면 남편은 유럽행 우편 항공기의 운명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비행에 나가기 전, 머리를 손질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했다.
"당신 참 멋있어. 별들에게 잘 보이려고? 질투가 나네요."
그는 웃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집을 나섰고, 그녀는 남겨진 꽃, 책, 온기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리비에르가 그 조종사를 맞이했다.
"지난번 비행에서 큰 실수를 했더군. 무서웠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회오리바람까지 몰아쳤고, 엔진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니. 날씨는 좋았고 엔진도 아무 문제가 없었네. 자네 상상이 지나쳤어."
리비에르는 야간 비행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 주기 위해 매몰차게 조종사를 다그쳤다.
그는 모든 사태에 대응하도록 직원들을 엄하게 단련시켜야만 했다.
‘남에게 사랑받으려면 동정심을 보여 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나는 동정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정부 관료들은 폭풍우와 안개, 밤의 온갖 장애물 속에서 비행하는 것을 군용 비행기나 할 수 있는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야간 우편 비행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비에르는 조종사들을 설득했다.
"우리에게 야간 비행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우리가 낮에 기차와 배보다 앞섰던 거리를 밤마다 까먹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의지와 결단력 때문에 성공했다고 평가했으나, 그는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했다.
해 뜨기 한 시간 전에 비행기를 출발시키고,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무조건 착륙하게 하면서 야간 우편 비행을 정착시킨 것이다.

파타고니아 우편기는 폭풍우에 다가가고 있었다.
비행기는 난기류에 요동치며 곤두박질쳤다.
파비앙은 위험을 감지하고 회항하려 했으나 비행 각도를 1도도 바꿀 수 없었다.
무전사가 무전을 쳤다.
"사방이 막혔음. 1천km에 걸쳐 폭풍우가 발생하여 회귀 불가능."
파비앙은 삼십 초마다 나침반을 들여다보았지만, 비행기의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암흑 속에 완전히 포위되어버린 것이다.

"응답이 없나요?"
무선국에서 정비사들은 실험하듯 기기를 만졌다.
"응답 없음."
파비앙의 목소리, 그의 웃음이 사라진 것이다.
연료가 바닥나서 더 이상의 비행은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리비에르는 온몸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로비노에게 지시했다.
"파타고니아 우편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네.
유럽행 우편기의 이륙을 준비시키게."

파비앙의 아내는 새벽 1시쯤 남편이 가까이에 와있는 것처럼 느꼈다.
하늘 위가 추웠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식사와 따뜻한 커피를 준비했다.
그리고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파비앙 씨 착륙했나요?"
"악천후 때문에 늦어지고 있습니다."
"연착인가요? 그럼 몇 시에 도착하나요?"
침묵이 흘렀다.

"아! 날씨가 많이 나쁜가요?"
"무언가 소식이 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군요!"
비극적인 사건에서 감정적인 요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이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진짜 존재한다면 과연 무엇일까?
리비에르는 사랑보다 더 중대한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는 잉카의 태양 신전을 떠올렸다.
‘산 위에 세워진 돌기둥이 없었다면 이 문명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옛 지도자는 개인의 고통보다 종족의 소멸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사람들에게 사막에 매몰되지 않을 돌기둥을 세우게 했을 것이다.

파비앙은 심하게 진동하는 비행기를 통제하는 데 집중했다.
주변은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암흑이었다.
결국 그는 고도 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덫 속의 치명적인 미끼처럼 별들이 폭풍의 찢긴 틈 사이로 반짝였다.
그쪽으로 올라갔다가는 다시는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별을 향해 솟아올랐다.
보름달과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다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파비앙은 뒷좌석의 무선사를 돌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끝났어."
그들은 보석이 가득 찬 방에 갇혀서 다시는 그 방을 빠져나올 수 없는 동화 속 도둑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파비앙의 아내가 회사로 왔다.
리비에르는 그녀에게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그것은 마치 ‘집에 가서 다시 보게 될 램프, 저녁 식사, 그리고 꽃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겸손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그들은 결혼한 지 6주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로비노가 말했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을 내일에서야 실감할 거라고 생각하며 리비에르는 울적한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로비노는 리비에르를 위로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지시할 것이 있으신지요?"
"유럽행 우편 항공기를 이륙시키게."
리비에르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조종사들은 파비앙의 행방불명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리비에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다른 우편 항공기의 안전한 비행을 확인했다.
우편물들이 유럽행 비행기에 실렸다.
"다 실었나? 그럼, 출발!"
엔진에 시동이 걸렸다.
비행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상공을 지나갈 것이다.
리비에르는 비행기의 엔진 소리를 듣고 싶어 유리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가 한 번이라도 출발을 중지시켰더라면, 야간 비행을 계속할 명분은 사라졌을 것이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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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는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교차한 시기였습니다. 스페인과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여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투기 열풍이 불어 파산자도 속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네덜란드의 국민화가 렘브란트도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습니다. - P421

드디어 렘브란트군요. 그의 작품 야간순찰이 라익스 뮤지엄 한가운데 멋지게 걸려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맞습니다. 그는 격동의 시대를 지나온 네덜란드를 누구보다 생생하고 깊이 있게 그려냈죠. 덕분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 미술 애호가와 네덜란드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 P421

않은 곳에서 방앗간을 운영했는데요. 렘브란트를 중등 교육기관인 라틴어학교와 대학에 진학시킨 것으로 미루어 교육 열정이 대단했던 듯합니다.
정작 렘브란트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나 봅니다. 대학을 금방 그만두고 그림 공부에 전념했거든요. 어릴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나타낸 렘브란트는레이던에서 선배 화가들에게 3년간 그림을 배웁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6개월간 기본기를 다지죠. 1625년 렘브란트는 레이던으로 돌아와 작업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습니다. 그의 나이 19살이었습니다. 공방을 연 이듬해에 그린 그림을 볼까요. 다음 페이지에 있는그림입니다. - P423

렘브란트,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마우리츠하위스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조합은 매년 해부학 공개수업을 열고, 5~10년에 한 번씩 유능한 초상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렘브란트가 26세에 그린 이 작품에서그의 초기 초상화 실력을 엿볼 수 있다. - P425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50대 들어 재산을 몽땅 잃고 요즘으로 치면 신용불량자 같은 신세가 됩니다. 노년기의 자화상을 보면 젊었을 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초라한 노인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때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선 전성기 시절의 렘브란트부터만나보겠습니다. - P432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해진 젊은 렘브란트는 1634년 전직 시장의 딸 사스키아 오일렌부르크와 결혼합니다. 성공 가도를 달린 렘브란트의 삶은 선술집의 탕자라는 작품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결혼 이듬해에 그린 다음 페이지의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성경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를 주제로 삼있습니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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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바로크
비로소 쟁취한 평화를 새기다 - P267

네덜란드 곳곳을 수놓는 색색의 튤립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유산이다. 그 시절 네덜란드는 오랜 투쟁 끝에 거머쥔 자유와 구슬땀으로 일궈낸 풍요로 활기가 가득했다. 안락하고 편안한 일상의 틈에서 움튼 자본주의 아래 화가들은 각자의 시선을 캔버스에 담았다. 네덜란드 미술은 그렇게 피어났다.
ㅡ튤립밭, 네덜란드 - P268

나는 낡은 붓을 들고 홀로 서서.
하나님께 영감을 구하는 단순한 사람일 뿐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 P270

북유럽 바로크를 이끈루벤스

#북유럽 바로크 #루벤스 #안트베르펜
#궁정화가 #외교관 #사업가

17세기 화가 중 바로크 미술처럼 다채롭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 간 화가가 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에너지, 탁월한 그림 솜씨에 사업 수완까지 좋았던 인물이죠.
화가라고 하면 외롭게 살다가 죽고 나서야 유명해지는게 아닌가요? - P271

화가라고 하면 외롭게 살다가 죽고 나서야 유명해지는 게 아닌가요?

이 화가는 그런 삶과 거리가 멀어요. 살아있을 때부터 그림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서 화가들의 왕‘이었고, 유럽의 여러 왕이 그의 그림을 너무나 갖고 싶어 해서 왕들의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화가는 바로 루벤스입니다. 북부 유럽 출신이지만 알프스산맥을 오가며 바로크 미술을 유럽 전체로 확산시킨 주인공입니다. - P271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전시된 십자가를 세움 
루벤스가 안트베르펜에 돌아와서 그린 첫 번째 대규모 작품이다. 성 발부르가 성당의 중앙 제대화로 제작되었지만, 나폴레옹 시대에 약탈당했다가 1815년 반환되어지금은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자리한다. - P276

이 그림 이전에는 교훈적인 내용을 크게 그리고 사물은 배경에 소품처럼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전통적 화면 배치를 완전히 뒤집어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배경에 넣고 사물을 앞자리에 내세운 겁니다. - P287

맞습니다. 안트베르펜을 비롯하여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루터파보다 강경한 칼뱅파 교리를 따르며 종교미술을 비판합니다. 급기야 플랑드르에있는 성당 곳곳에서 성상 조각이나 종교화가 제거되거나 폐기되는 일이벌어지죠. 그중 가장 대규모 성상 파괴 운동이 1566년 8월 안트베르펜에서 일어납니다. 아래 삽화에는 신교도들이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들어가밧줄로 성상을 끌어내리고 사다리로 부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16세기안트베르펜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정치·종교적으로는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 P295

프란스 호헨베르흐, 칼뱅주의자의 성상 파괴, 1566년

 1566년 8월 안트베르펜 대성당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곳곳에서 칼뱅파 신도들이 교회의 성상을 파괴했다. - P295

80년 전쟁 또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라고도 합니다. 기나긴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를 구성하는 17개 주 중 북쪽의 7개 주가 독립에 성공해 공화국을 세웁니다. 이들은 1581년 독립을 선포하고 계속 저항하다 결국 1648년 최종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습니다. - P298

나머지 10개 주는 독립하지 못했나요?
플랑드르 남쪽 지역의 10개 주는 계속 스페인의 지배를 받습니다. 안트베르펜은 반란의 중심지였지만, 스페인 군대가 이곳을 잔혹하게 진압해서계속 스페인의 지배를 받습니다. - P298

루벤스의 활동 지역 루벤스는 지겐에서 태어나 쾰른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12세에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간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만토바에 살며 로마 등지를 여행하고, 만토바 공작의 명으로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도 일한다. 또한 마리 드 메디시스의 연작을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으며, 스페인과 영국 외교 사절로서 런던과 마드리드를 오간다. - P299

설마 한복을 입은 건가요?
글쎄요, 학계에서는 이 인물의 국적과 관련하여의견이 분분합니다. 중국인으로 보기도 하고, 한국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복이 중국식도포인지 한복인지 다소 애매하기 때문이죠.
정확히 어느 나라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저는 한국인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물이 쓴 모자가 우리 전통 모자탕건과 비슷하고, 남자를 그리기 위한 루벤스의 준비 드로잉도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루벤스가 한국의 복식과 외양을 구전으로듣거나 간단한 스케치를 보고 나서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P307

앞쪽 배는 사람들을 질서 있게 구해내지만 바로 오른쪽 뒤의 배는 위태로워 보입니다. 사람을 잘 구하는 앞쪽 배는 개신교를 상징하고, 위태로운뒤의 배는 가톨릭을 상징합니다. - P329

167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동인도회사는 상선 150척, 군함 40척, 직원 5만 명, 군대 1만 명을 보유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 P344

전성기를 누렸던 네덜란드와 영란전쟁의 흔적을 살피려면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을 찾아야 합니다. 라익스 뮤지엄으로도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네덜란드의 국보급 미술품이 가득합니다. 이중에서도 한 점을뽑아야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명화를 한자리에 모은 2층 정중앙에 당당히 자리할 정도로 네덜란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작품이죠. - P345

그림의 대상이 일상적인 소재에서 점점 사치품으로 바뀝니다. 이처럼 16세기에는 소시민의 소박한 삶을 나타내는 정물화가 대부분이었다면, 17세기에 들어서 정물화는 부유층의 고급스러운 삶을 우아하게 보여줍니다. - P358

그러나 만개한 해바라기 사이로 병들어 시든 꽃이 눈에 띕니다. 삶을 예찬하는 동시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네덜란드 정물화의 전통이반 고흐 같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에게까지 이어진 셈이죠. 반 고흐역시 네덜란드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찍부터 전통적인 네덜란드 정물화의 특성을 알았을 겁니다. - P365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를 세계 최초로 보는 구체적 근거는 무엇인가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02년에 설립되었다고 말씀드렸죠. 동인도회사는 최초로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을 발행하여 만든 회사였습니다. 따라서 기업이 발행한 주식 역시 공공장소에서 거래했는데요. 바로 이 목적에 맞게 새롭게 지은 건물이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였습니다. - P377

경제학자들은 이 현상을 튤립 버블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희귀한 튤립을 갖기 위해 돈을 있는 대로 끌어다 쓰면서 튤립 가격이 천정부지로솟구칩니다. 가장 귀한 품종이었던 셈퍼르 아우휘스튀스는 구근 하나가격이 20배 가까이 오릅니다. 1633년에 500 길더였던 구근이 불과 4년 만에 1만 길더가 된 거죠. 1636년에 배 한 척이 500 길더였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치인 셈입니다. - P386

그게 문제였어요. 이런 상황이 사람들의 조바심을 불러일으켰고, 너나 할것 없이 꽃 재배 사업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극에 달한 기현상도 결국 끝을보입니다. 1637년 2월, 오를 대로 오른 튤립 가격이 상승을 멈추거든요. 불과석 달 만에 수요가 급격히 줄고 가격은 순식간에 폭락합니다. 이 여파로파산자가 속출하자 네덜란드 정부까지 개입해서 간신히 위기를 넘깁니다. - P387

당시 유럽 국가 중 사회 전 계층이 미술품을 거래한 곳은 네덜란드뿐입니다. 힌트는 부의 분배에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비교적 부가 고르게 주어진 사회였습니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투자나 투기를 할 수 있는 잉여 자본을 갖고 있었죠. 일찌감치 거래 문화에 익숙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미술품을 투자 대상으로 인식한 겁니다. - P392

힌트는 오른쪽 아래 계단에 놓인 칠판에 있습니다. ‘풍요 속 사치를 조심하라‘는 속담이 적혀 있는데요. 그림 속 집주인처럼 눈 감은 채로 손을 놓으면 힘들게 쌓은 재물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경고를 담은 겁니다. 천장에 달린 바구니 속 목발, 지팡이, 회초리는 사치로 재물을 몽땅 잃었을 때얻게 될 질병과 빈곤을 의미합니다. - P401

그림 오른쪽 요리하는 두 하녀 앞에 깨진 달걀 껍데기가 마구 널려 있습니다. 당시 달걀 깨기는 성관계를 암시하는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속이텅 빈 달걀은 아버지로 보이는 인물이 생식 능력이 없음을 뜻하죠. 아니나 다를까 아이를 안은 아버지 뒤에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는남성이 있습니다. 짓궂은 웃음이 마치 자신이 진짜 아버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 P403

네덜란드의 김홍도 
이렇듯 얀 스테인은 세속적인 블랙 코미디를 즐겨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을 더 소개할게요. 다음 페이지에 있는 마을 학교라는 작품입니다. - P403

얀 스테인, 마을 학교, 1670년경,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남자 선생은 술에 취해 있고 여자 선생님만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제각각 소란스러운 모습이다. - P404

당시 네덜란드 교육 체계의 문제점을 풍자한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네덜란드에서 초등 교육이 얼마나 활발하게 운영되었는지 엿볼 수 있죠 네덜란드는 시민사회였는데요.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평민이 이끄는 사회여서 교육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학교 풍경을 담은 얀스테인은 한국에서 특이한 별명으로 불립니다. 바로네덜란드의 김홍도인데요. 얀 스테인이 그린 또 다른 마을 학교를 보면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 P405

왼쪽 페이지의 그림은 간척 사업 전1300년대 네덜란드 지형입니다. 군데군데비어 있죠?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며 오늘날 국토의 약 20퍼센트에 해당하는 땅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들이 만들었다‘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을 정도죠. 수 세기에 걸쳐 국토를 직접 일군 노력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 P409

좋은 지적입니다. 이 인물은 언제든지 군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전쟁을 치르며 용병을 동원했지만, 병력의 핵심은 시민군이었습니다. 민병대가 잘 짜여 있어서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비상시에는 전쟁터로 나갔죠. 여기서 의기양양한 사냥꾼은느긋하게 사냥길에 나서지만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지 조국을 위해 싸우는 군인이 되었을 겁니다. - P418

이번에도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만 담은 게 아니네요.
국토에 대한 인식을 치밀하면서도 친절하게 그림으로 표현한 장르가 풍경화였던 거죠. 평범해 보이는 자연과 생활의 터전이 네덜란드인들에겐정성껏 일군 세계였습니다. 풍경을 화폭에 담는 과정은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었을 거예요.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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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고 다른 애가 무덕이 본 적 있어?"
"몰라."
"그럼 혹시 거꾸로 말고 바닥에 내려와서 무덕이랑 논 적 있어?"
"아니." - P-1

"수상장(樹上葬) 하던 나무 말이야. 옛날에 아이가 죽으면 그 시신을 짚으로 싸 가지고 나무에 매달아 놓는 풍습을 가진 마을이 있다 하더마는, 여가 거긴가 보네." - P-1

"아이고야, 주렁주렁 많이도 달렸다. 이거 덕달이 나무고만. 뭐더러 학교 터에 이런 걸 남겨 놔 가지고……. 쯧쯧."
"덕달이…… 나무요?" - P-1

그리고 얼마 후, 학교의 허가를 받았는지 그 나무 밑에서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커다란 굿판이 열렸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 주는 천도제였다고 합니다. - P-1

제가 외로울까 봐 좋은 곳으로 간 무덕이가 친구를 보내 준 것일지도 모르죠. 홀로 남겨진 아이가 느끼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무덕이는 겪어 봤을 테니까요.

벌써 15년도 넘은 일이네요. 제가 나온 대학교는 경기도에 있는 한 예술 대학인데요. 저는 실용음악과였고 그 안에서도 기타 전공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귀신들 중에는 예술을 좋아하는 귀신이 꽤 많은가 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딱히 귀신이 나올 만한 장소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학교 음악실이나 미술실,
연극 연습실 같은 곳에서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가 종종 있더라고요.

산안개가 끼면서 공기도 차갑고 축축한 느낌마저 들었고요. 신입생 때여서 연습실의 밤 분위기를 잘 몰랐던 거죠. 하지만 이미 셔틀버스는 끊겼고 터미널까지 가는버스도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집에 갈 수도 없었어요.

"호, 제법인데...... 잼을 걸어 볼까."
뮤지션들끼리 모이면 재미있는 게, 마음만 맞으면 즉석에서 애드리브를 겨루는 잼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때의 저는 프로 세션들처럼 수준급의 애드리브를 할 수 있는 실력은 아니었지만, 학교에 들어와서 잼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어떻게든 잼을 걸어서 그 곡을 같이 연주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연주를 하면서도 느껴지는 건, 피아노가 나를 리드하면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저의 솔로 연주에 맞춰 코드를 변주하면서 살짝살짝서브 멜로디까지 얹는 게 들리자 절로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이 자식, 뭐지? 쩐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각 방에는 정말 아무도 없는 거예요. 복도 끝 계단 근처까지 오게 된 저는 왠지 오싹해져서 다시 제 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어요.
방금 그 피아노 연주는 대체 누가 했단 말인가요.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진짜 너무 오싹해서 체온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성호(聖號)를 그으며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어요. 그러자 이어폰이삑삑 하더니 고장이 나 버리는 거예요. 너무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부터 제 귀에는 피아노 연주만이 꽂히듯 들려왔어요. 근데 이게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뇌에 때려 박는 느낌이랄까.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는 거죠.
‘환청인가? 내가 미친 건가? 갑자기?‘

갑자기 방 안의 불이 꺼졌어요. 너무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고, 그 사이에 제 눈은 점점 어둠에 익숙해졌어요. 그러자 보였습니다. 아니, 보고 말았어요. 어떤 여자의등을요.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제 방 안의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이후로 다시는 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렇게 점점 연습에 소홀해졌고, 결국 저는 현재 음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밤새도록 그 귀신과 잼을 나눴다면 저는 음악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고요. 물론 그 뒤로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죠.

자각몽이라고 아시나요? 맞아요, 루시드 드림. 그게 자각몽이에요. 정확한 뜻을 말하자면 내가 꿈을 꾸고 있다. 현재 내가 꿈속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꿈을 꾸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각몽이라고 아시나요? 맞아요, 루시드 드림. 그게 자각몽이에요. 정확한 뜻을 말하자면 내가 꿈을 꾸고 있다. 현재 내가 꿈속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꿈을 꾸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각몽을 어떻게꾸게 된 거냐, 글쎄요. 어떤 사람들은 연습을 통해서 자각몽을 꾸기도 한다는데 저는 어느 날 꿈에서 그냥 알게 됐어요. ‘아, 꿈속이구나‘ 하고 한번자각몽을 꾸기 시작하면 그 빈도는 점점 늘어납니다. 그런데 자각몽을 자주 꾸게 되면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일 년에 한 번, 태국의 푸껫에서는 음력 9월의 첫날부터 9일 동안 ‘낀쩨(ñ, 채식주의)‘라 불리는 채식주의자 축제가 열립니다.

9일간 흰옷을 입고 중국의 도교에서 비롯한 아홉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채식만을 하는 금욕 생활과 고행을 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행운을 비는 행사라고합니다.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발생하고,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접 보거나 체험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는괴이한 사건들이기에,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오로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귀신의 존재를 믿느냐‘라는 질문에, 단호하게 ‘귀신은 있다‘보다는 ‘사람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가 더 정확한 저의 입장입니다.

‘단지 재미있는 공포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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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니발레 카라치, 이아손과 메데이아 이야기, 1583~1584년, 팔라초 파바 그림 양옆에 세워진대리석 조각까지 모두 그림이다. 사람들이 올려다봤을 때 진짜 조각상처럼 느끼도록 시선의 각도에 맞춰 그렸다. - P156

원래 파르네세 가문은 파르마 지역을 지배하는 명문가였습니다. 이런 집안이 교황까지 배출하면서 더욱 막강해집니다.
파르네세 가문 출신인 바오로 3세가 교황에 오르자 가문 사람들은 권위에 어울리는 대저택을 로마 한복판에 짓기 시작합니다. 오른쪽의 지도와 같이 주변 땅을 사들여 저택 앞에 큰 광장을 만들고,
길도 팔라초 파르네세를 중심으로 직선으로 다시 만들어버린 거죠. 그 결과 새로운 도시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 P158

팔라초 파르네세, 1517~1589년, 로마 
현재는 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 P158

파르네세 가문의 문장(왼쪽)
 팔라초 파르네세 2층 중앙 발코니에는 여섯 송이의 백합이 박힌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그 위로 바오로 3세를 기념하는 교황의 관이 올라가 있다.
티치아노, 교황 바오로 3세와 그의 손자들, 1545~1546년,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오른쪽)
 바오로 3세는 파르네세 가문이 배출한 교황이다. 바오로 3세를 중심으로 왼쪽엔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오른쪽엔 파르마 공작인 오타비오 파르네세가 있다. - P159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신의 본질이자 큰 덕목입니다. 신들의사랑을 다룬 이 그림에서 우리는 종교적 가르침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물론 충분히 이중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밖에서는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다가 정작 안에서는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축제를 즐긴 셈이니까요. 그러나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던 시기가 바로 안니발레가 살던 17세기였고, 그 모순을 엿볼 수 있는 곳을 파르네세 갤러리라고 생각하면어떨까요? - P168

두 화가는 거의 동시에 로마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비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니발레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계보를 이으면서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를 고전적 아름다움을 계승한 정통파 화가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즉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이상화된 표현을 중시하면서도 시각적으로 더욱 강렬하게 풀어냈던 겁니다. - P169

반면 카라바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모든 주제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 과정에서 로마의 하층민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삼아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카라바조를 사실주의자로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두 화가는 그리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안니발레는 수많은 드로잉을 통해대상을 연구하고 체계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반면 카라바조는 관찰한모델을 드로잉 없이 캔버스 위에 바로 그렸습니다. 이 때문에 카라바조의드로잉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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