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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의 공간 운영
병산서원 또한 그런 전형적인 서원 배치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을 배경으로 하여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이 빼어난 강산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되어 있다는점에서 건축적 · 원림적 사고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 P41

일신이란 대학』의 "구일신 일일신우일신(苟日新日日新又日新)"에서나온 것으로 "진실로 날로 새롭겠거든 날로 날로 새롭게 하고 또 날로새롭게 하라"라는 뜻이다. 직방이란 『주역』 「곤괘」의 "경이직내(敬而直內) 의이방외(義而方外)에서 나온 말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내면(마음)을 곧게 하고, 올바름으로 외면(행동)을 가지런히 한다"에서 나왔다. 학생들은 모름지기 이 두 경구를 아침저녁으로 간직하여 올바르고 새로워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 P44

만대루에서의 조망, 그것이 병산서원 자리 잡음의 핵심인 것이다.
만대루에 중심을 두는 건물 배치는 건물의 레벨 선정에서도 완연히나타난다. 병산서원이 올라앉은 뒷산은 화산(꽃뫼)이다. 이 화산의 낮은구릉을 타고 외삼문에서 만대루, 만대루에서 강당, 강당에서 내삼문, 내삼문에서 존덕사로 레벨이 올라간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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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이 한적한 절집의 분위기에 척어울리는 저 소담하고 단정한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반도 전하지 못할것 같다. 언제 어느 때 보아도 극락보전은 나에게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학생들은 극락보전의 낮은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본래 단순한 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나는 학생들을 법당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 P27

남도의 봄, 남도의 원색무위사 극락보전 뒤 언덕에는 해묵은 동백나무의 동백꽃이 윤기 나는 진초록 잎 사이로 점점이 선홍빛을 내뿜고, 목이 부러지듯 잔인하게벌어진 꽃송이들은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진읍 묵은 동네 토담 위로는 키 큰 살구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남도의 봄빛이었다. 한껏 끌어안고 싶은 남도의 봄빛은 조선의 원색을 보여준다. 산그늘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햇살을 받으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길가엔 개나리가 아직도 노란 꽃을 머금은 채연둣빛 새순을 피우고 있었다. - P29

한반도에서 일조량이 가장 풍부하다는 강진의 하늘빛은 언제나 맑다.
강진만 구강포의 푸르름보다도 더 진한 하늘빛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청색의 원색이다. 색상표에서 제시하는바 사이언(C) 100퍼센트이다. 솔밭과 동백나무숲이 어우러지며 보리밭 물결이 자아내는 그 빛깔은 노란색과 청색 100퍼센트가 합쳐진 초록의 원색이다. 유채꽃장다리꽃, 개나리꽃은 100퍼센트 노랑(Y)의 원색이며, 선홍색 동백꽃잎은100퍼센트 마젠타(M)이다. 그 파랑, 그 초록, 그 노랑, 그 빨강의 원색을구사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남도의 봄 이외에 아무도 없다. 그 원색을 변주하여 흑갈색 황토와 연분홍 진달래, 누우런 바다갈대밭을 그려낸 화가도 남도의 봄 이외엔 아무도 없다. - P30

건진국시와 헛제삿밥
여행이건 답사건 집을 떠난 사람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어디 가서 잘것인가이고 그다음 문제는 무얼 먹는가이다. 그러나 이왕 맛있는 향토식을 맛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때론 큰 기대가 된다. 안동에는 향토식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이 지역 답사의 한차례 먹을거리가된다. - P31

안동은 내륙 중의 내륙인지라 뱃길이 닿지 않아 냉동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생선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고등어에 굵은 왕소금을 잔뜩뿌려 절여서 가져와야 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만든 자반고등어는 짜도 보통 짠 게 아니다. 그래도 이 간고등어는 안동 사람들의 밑반찬으로 애용되어 반의반 토막을 썰어놓고 온 식구가 밥을 먹기도 한다. 전라도 음식으로 치면 밥맛 돋우는 젓갈 구실도 하는 셈이다. 그간고등어 중에서도 뱃자반이라고 해서 배에서 금방 잡은 싱싱한 놈을 곧장 소금에 절인 것은 진짜 별미이다.(대구에서는 이를 제자리간이라 한다) - P33

바로 이 점 때문에 제비원 석불은 많고 많은 전설을 갖게 됐다. 임재해(林在海) 교수가 「성주의 본향, 제비원의 노래와 전설」(『한국 민속과 전통의 세계』, 지식산업사 1991)에서 조사·발표한 것을 보면, 제비원 석불이 불심많은 착한 연이伊) 아가씨의 화신이라는 설화로 인해 이 석불을 모신절 이름이 연미사(燕尾寺)가 되었다는 이야기.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우리 산천의 지맥을 끊고 다닐 때 이 불상의 목을 잘랐다는 설 등등이 주저리주저리 얽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 무가(巫중성주풀이」라는 성주님께 치성 드리는 성주굿 노래는 어느 지역이든 성주의 본향(本鄕)을 따지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이 제비원 석불을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주님 본향이 어디메냐/경상도 안동땅/제비원이 본일러라/제비원의 솔씨 받아 (...)그래서 안동은 불교 문화, 양반 문화의 본향임과 동시에 민속 문화의본향이라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35

안동은 언어생활에서도 전통을 고수하는 집념을 보여준다. 저전(田)을 모시밭이라고 하듯 천전(前)보다 내앞, 수곡(水谷)·박곡(谷)보다 무실(물실)·박실, 온혜(溫惠)보다 더운골 등이 입에 익숙하다. 언젠가 와룡면 일대를 누비고 다니는데 윗골, 고누골, 음지마, 양지마, 가장실, 가느실, 밤실, 짓실, 대밭골, 택골, 도장골, 잣골, 오리실, 건너나별, 고불고개 등 듣기만 하여도 향토적 서정이 물씬 일어나는 동네 이름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얼핏 생각하기에 안동 양반들은 한자어를많이 썼을 듯한데 이처럼 한글 이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한글이고 한자고 한번 접수한 것은 무조건 끝까지 지키고 보는 전통 고수의 저력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사람들은 일상에서는 순우리말을 많이 쓰다가품위와 권위를 찾을 때는 한자어를 많이 쓰는 독특함이 있다. 예를 들어평소에는 ‘더운골할배‘ ‘건네 아재‘ 하고 친숙하게 말하다가도 저전 장질(長), 춘양삼종숙(三從, 촌 아저씨) 하면서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 P37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이 풍산 읍내에 있던 풍산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岳書堂)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후 1614년에는 정경세를 비롯한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모신존덕사(祠)를 지었고,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배향했으며 1863년엔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건재했던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다. - P39

병산서원은 하회 입구에서 마을로 가는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십 리 (약 4킬로미터) 남짓 걸어가면 나온다. 옛날에는 시골 버스,
경운기나 다니는 비포장 흙길이어서 그것이 병산서원 보존의 큰 비결이었는데, 슬프게도 이 비책 아닌 비책은 곧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병산서원 답삿길에 나는 항시 이 십릿길을 걸어다녔다. 다리가 아프고 피곤하면 고갯마루까지만 차를 타고 가서는 거기부터 오릿길이라도걸었다. 병산서원은 반드시 걸어가야만 병산서원에 간 뜻과 건축적·원림적(園林的) 사고가 맞아떨어진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절집 입구의 진입로와 같아서 만약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내소사를 자동차를 타고 곧장 들어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할까를 생각해본다면 왜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질 것이다. - P39

"타고 온 자가 문명인이냐, 걸어온 자가 문명인이냐?"
이에 더 이상 못 참겠던지 차 타고 먼저 온 한 ‘노련한 동양철학자가느긋하게 답한다.
"편하게 타고 오면서도 걷는 맛까지 다 느낀 자가 문명인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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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손장섭, 강연균, 임옥상 같은 호남의 화가들이 풍경 속에 그리는 시뻘건 들판이 남도의 역사적 아픔과 한을 담아낸 조형적 변형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보니 그것 자체가 리얼리티였네요. 정말로 강렬한 빛깔이네요."
나의 학생들은 이처럼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정직하고, 무엇인가 느낄 줄 아는 답사의 모범생들이었다. 대학생 시절 나 역시 처음 남도땅을밟았을 때, 나에게 다가온 가장 큰 감동은 남도의 포근한 들판과 느릿한산등성이의 곡선 그리고 저 황토의 붉은빛이었다. - P16

월출산 도갑사
월출산의 대표적인 절집 도갑사(寺)의 정취는 아침나절 산안개가 걷힐 때 가장 아름답다고 기억한다. 매표소에서 돌담을 끼고 계곡을따라 조금 가다보면 비스듬히 출입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해탈문(解脫)은 국보 제50호로 일찍부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초기의 목조건축으로 집의 생김새가 특이하고 주심포. 다포 양식의공존이라는 건축사적 의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정도 건물에 국보라는 가치를 부여한 것에 나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시대가 오래되고드물다고 해서 국보가 되는 것은 아니리라. - P18

도갑사 관음32응신도
사실 도갑사의 불화로 말할 것 같으면 생각할수록 아쉬움이 남는 조선시대 불화의 최고 명작이 봉안되어 있었다. 지금은 일본 교토(京都)의 대찰인 지은원(知恩院, 지온인)에 소장되어 있는 <관음32응신도三十二應身圖)>다. 높이 2.3미터, 폭 1.3미터의 비교적 대작인 이 두루마리 탱화는 화려한 고려 불화의 전통과 조선 전기의 산수화풍이 어우러진 둘도 없는 명작으로 1550년 인종 왕비인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돌아가신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자실(李)에게 그리게 하여이곳 도갑사에 봉안했다. - P20

이런 명화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나는 임진왜란, 또는 그 직전 이 일대에 빈발하던 왜변(倭變) 때 왜구들이 약탈해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16세기 후반 강진. 영암 일대에 일어났던 왜변의 상황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제3권 양반편 마지막 장에 잘 그려져 있다. 활 잘 쏘는 이봉학이와 돌팔매질 잘하는 배돌석이가 재주 시합한 곳이 바로 영암성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그렇게 잦았고 그들은 우리 사찰의 범종과 불화를 가져다 일본 사찰에 거금을 받고 팔아넘기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들이 이 그림을 반환해줄 리 만무인지라 잃어버린 문화유산의 이야기로만 남을 수밖에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근래에는 실물대 정밀 복사본을 만들어 도갑사 성보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있다). - P22

이것으로 도갑사의 볼거리는 다 본 셈인데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따로 있으니, 월출산이 낳은 불세출의 인물 도선국사를 말하지 않는다면여기를 다녀간 의미가 반감된다. 그리고 영암 월출산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인물, 백제 왕인(王仁) 박사의 유허지가 도갑사 남쪽 성기동洞)에 있는데 한번은 가볼 만하다. 왕인박사는 백제 고이왕 52년(285)에 일본에 한문(천자문)을 전해주어 일본의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인프라를제공했던 백제인이다. - P24

그러나 그가 영암 출신임을 크게 내세워 자랑하는 방식에 대해 나는조금은 생각을 달리한다. 왕인을 추앙할 사람들은 우리보다 일본인이다. 아펜젤러는 한국 개화사에서 이름난 것이지 미국 현대사에 족적을남긴 인물이 아닌 것처럼. 실제로 일본 도쿄의 우에노 공원을 거닐다가길가에 세워진 왕인 박사 추모비를 보면 일본 사람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영암의 왕인박사유적지도 이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사적지로 만들었으면 마음으로 생각게 하는 바가 더 깊고 그윽했을성싶다. 그러나 자못 거대한 기념관으로 치장해놓고 보니 혹시 식민지시절 일본에 당했던 아픔의 정신적 보상을 이런 식으로 찾으려는 것이아닌가 싶어 애처로운 마음에 오히려 발길이 한 번에 그치고 말았다. - P24

월남리에서 강진 쪽으로 불과 3킬로미터. 길가에는 ‘국보 제13호‘라는 큰 글씨와 이발소 그림풍의 관음보살상 입간판이 오른쪽으로 화살표를 해놓고 있다. 여기서 월출산 쪽으로 다시 3킬로미터.
우리는 이 입구부터 걸어가야 옳았다. 비탈길을 계단식 논으로 경작해 흙과 함께 살고 있는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 그 일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동그만 마을과 마을. 그리고 저 위쪽 마을, 오래된 한옥과 연꽃이 장엄하게 피어난다는 백운동(洞)의 연못도 구경하고, 가다가 모정(亭)에 쉬면서 촌로의 강한 남도 사투리도 들어보았어야 했다. 그러다 산모퉁이를 도는 순간 월출산의 동남쪽 봉우리가 환상의 나라입간판처럼 피어올랐을 것이다. 우리는 이 행복한 40분간의 산책로를,
무감각하게도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5분 만에 지나 무위사 천왕문 앞에 당도해 버렸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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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월출산과 남도의 봄
잃어버린 옛 정취의 미련국토의 최남단, 전라남도 강진과 해남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장 제1절로 삼은 것은 결코 무작위의 선택이 아니다. 답사라면 사람들은 으레 경주·부여·공주 같은 옛 왕도의 화려한 유물을 구경 가는 일로생각할 것이며, 나 또한 답사의 초심자 시절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난 세월 내가 답사의 광)이 되어 제철이면 나를 부르는곳을 따라가고 또 가고, 그리하여 나에게 다가온 저 문화유산의 느낌을확인하고 확대하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수없이 여러번 다녀온 곳이 바로 이 강진·해남땅이다. - P13

강진과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일 없었으니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대단한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곳이며, 지금도 반도의 오지로 어쩌다 나 같은 답사객의 발길이나 닿는 이 조용한 시골은 그 옛날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였을 따름이다. - P13

남도의 황토, 남도의 들판나주평야의 넓은 들 저편으로는 완만한 산등성의 여린 곡선이 시야로 들어온다. 들판은 넓고 평평한데도 산은 가깝게 다가오니 참으로 이상스럽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치 길게 엎드려 누운 사람의 등허리 곡선처럼 느슨하면서도 완급과 강약이 있는 리듬을 느낀다. 말끝을당기며 "~잉" 소리를 내는 남도사투리의 여운과도 같고, 구성진 육자배기의 끊길 듯 이어지는 가락같이도 느껴진다. 그것은 나만이 느끼는 별스런 감정이 아니었다. 김아무개라는 졸업생이 내게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남도땅의 산등성은 참으로 포근하게 감싸주는 아늑함이 있네요.
경산의 압량벌이나 안동 쪽에서는 펑퍼짐하거나 육중한 것이 가로막아 저런 따스함을 못 느끼거든요."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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