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는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 극세필 붓을 사용하여 먹으로 쓴 깨알 같은 글씨 1만 3,311 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편지이다. 누구든 이 편지를 보면 내용은 둘째 치고 그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울산대곡박물관에서는 ‘천주교의 큰 빛, 언양‘이라는 기획전을 하면서 이 황사영 백서의 정밀 복제본을 전시했는데 박미연 학예사의 말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그 내용보다 깨알 같은글씨를 보면서 울먹이며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황사영이 얼마나 걸려서 썼을까. 그가 토굴에 들어온 것은 1801년 음력 2월이었다. 그는 여기서 각지의 천주교인 박해 상황에 관한 정보를수집하고 토굴로 찾아온 교우 황심(黃沁)과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법을상의한  끝에 백서를 썼다고 하는데 완성된 날이 음력 9월 22일이니 7개월 이상 걸렸다는 얘기다. - P285

그 방안으로서 그는 첫째로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조선도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둘째로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셋째로 서양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호소하여 군함 수백 척과 5, 6만 군대를 데리고 오거나, 그렇지 못하면 수십 척의 군함에 5, 6천 명의 군대라도 가능하다고 했다. - P286

비록 이 나라를 섬멸한다 하여도 성교의 명분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다급한 심정을 토로한 이 문장은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두고두고 황사영 개인의 신앙과 사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천주학의도덕성에 상처를 주게 되었다. - P287

세월이 90여 년 지난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인수했고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공식적으로 복자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행사) 때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 P289

박달재
제천에서 충주로 가자면 봉양면에서 백운면으로 넘어가는 박달재를넘어야 한다. 산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생긴 이름이겠건만 사람들은 박달이와 금봉이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옛날에 박달이라는 청년이 과거 보러 가는 길에 고개 아래 마을 금봉이와 눈이 맞아 사랑을 했는데 급제해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나서는 낙방하여 돌아오지 못했고 기다리다 지친 금봉이는 가슴앓이하다 죽고 금봉이를 끝내 못 잊어 뒤늦게 찾아온 박달이는 금봉이의 허상을 보고 껴안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고갯마루를유행가 가사로 많이 쓴 반야월(半夜月, 1917~2012)이 1948년에 울고 넘는 박달재」를 발표해 크게 히트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게 되었다. - P293

유행가의 파워는 대단하여 박달재 고개에는 커다란 노래비가 새겨져있고 금봉이와 박달이 동상도 서 있다. 그런 것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강만길 선생님이 이것 좀 보라며 나를 부른다. 제법 오래된 ‘박달재비‘였다. 비문을 읽어보니 문장이 유장하다. 그리고 "1216년 고려의 김취려장군이 거란의 대군을 여기서 물리쳤고 1268년에 고려의이 고장 별초군(別抄軍)이 또한  여기서  몽고의 군사를 막아냈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언론인 천관우의 글이었다. 그분은 제천 출신이었다. - P295

철수네 화실에서
우리는 박달재를 떠나 박달이가 금봉이를 만났다는 아랫마을, 을미년제천의병들이 충주로 쳐들어가기 위해 박달재 너머 하룻밤 야영하며진을 쳤다는 평동 마을에 있는 ‘철수네 화실‘로 향했다.
이철수는 1980년대 초 ‘현실과 발언‘ ‘임술년‘ 그룹 등 민중미술의 소집단들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을 때 단기필마로 등장하여 오윤吳潤)의 뒤를 잇는 목판화가 중 한 명으로 맹활약을 했다. 나는 그의 개인전때마다 팸플릿 서문을 썼다. 그것이 세 번이나 된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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