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탐심 - 인문의 흔적이 새겨진 물건을 探하고 貪하다
박종진 지음 / 틈새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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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3]

후지산의 구름이 만년필에 머물다 ―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운케이 네 자루


이번 후지산 여행에서 새삼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구름이었다.

신칸센 창밖으로 처음 만난 후지산도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고, 타누키호에서도 후지산은 커다란 구름에 가려졌다가 다시 모습을 보여주기를 반복했다.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구름이 어떻게 지나가느냐에 따라 후지산의 표정은 계속 달라졌다.

어떤 순간에는 정상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조금 뒤에는 구름 속으로 반쯤 숨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플래티넘도 그 구름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2023년, 후지산과 그 주변을 흘러가는 구름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을 주제로 새로운 #3776 센추리 시리즈를 시작했다.

후지운케이(富士雲景, ふじうんけい, Fuji Unkei) 시리즈.

‘雲景’.

말 그대로 구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2023년 우로코구모(鱗雲, うろこぐも, Urokogumo)에서 시작해 2026년 운카이(雲海, うんかい, Unkai)까지 모두 네 자루가 나왔다.

첫 번째는 2023년 우로코구모(鱗雲, うろこぐも, Urokogumo).

두 번째는 2024년 카스미(霞, かすみ, Kasumi).

세 번째는 2025년 키누구모(絹雲, きぬぐも, Kinugumo).

그리고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 2026년 운카이(雲海, うんかい, Unkai)다.

구름이라는 것은 잡을 수도 없고 한곳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생겼다가 사라지고, 모였다가 흩어지고, 몇 분 사이에도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한다.

플래티넘은 그런 순간의 구름을 만년필에 붙잡아두었다.

鱗雲.

霞.

絹雲.

雲海.

하늘에서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풍경이지만 만년필 안에서는 그대로 머문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다시 들여다보니 만년필의 색과 무늬보다 오히려 실제 풍경이 궁금해졌다.

저 만년필에 담긴 구름을 후지산에서 직접 만나려면 언제 가야 할까.

그리고 어디에서 기다려야 할까.


1. 우로코구모(鱗雲, うろこぐも, Urokogumo) ― 비늘처럼 펼쳐진 구름

2023년 첫 번째 작품.

鱗은 비늘이다.

鱗雲은 작은 구름들이 하늘에 촘촘하게 늘어서 물고기의 비늘처럼 보이는 구름을 말한다.

우리말로 하면 비늘구름이다.

플래티넘은 후지산 주변 하늘에 펼쳐진 이 불규칙한 비늘구름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 시리즈에서 사용했던 규칙적인 무늬와 달리 일부러 불규칙한 패턴으로 몸체를 가공했다.

몸체의 오목한 절삭면에 빛이 들어오면서 복잡하게 투과되고 반사되도록 만든 것이다.

첫 작품부터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런데 만년필보다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실제 후지산 위에 저런 비늘구름이 펼쳐지는 모습을 보려면 언제 가야 할까.

비늘구름은 일본에서도 흔히 가을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구름이다.

따라서 노린다면 9월에서 11월 무렵이 좋다.

특히 공기가 맑아지고 후지산의 윤곽이 선명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에 높은 하늘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장소를 고른다면 후지산과 넓은 하늘을 함께 볼 수 있는 가와구치호 북안이나 오이시공원 같은 곳이 먼저 떠오른다.

호수와 후지산을 함께 두고 그 위로 넓게 펼쳐진 하늘을 볼 수 있으니, 비늘구름이 제대로 떠준다면 鱗雲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름은 호수가 아니다.

“오늘 鱗雲을 보러 왔습니다.”

한다고 기다려주는 녀석이 아니다.

그날 하늘이 허락해야 한다.

후지산은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에는 비늘구름이 펼쳐져야 한다.

벌써 난이도가 높다.

그래도 눈앞의 후지산 위로 비늘처럼 촘촘한 구름이 한꺼번에 펼쳐진다면 기다린 보람은 충분할 것 같다.


2. 카스미(霞, かすみ, Kasumi) ― 봄날 흐릿하게 번지는 후지산

2024년 두 번째 작품.

霞.

카스미다.

우리말로 옮기면 안개나 아지랑이처럼 먼 풍경이 희미하게 보이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봄 풍경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로 사용해왔다.

플래티넘은 옛 그림 두루마리나 병풍에서도 볼 수 있는 ‘카스미몬(霞文, かすみもん)’이라는 전통적인 안개무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몸체에 작은 원형의 절삭을 이어가면서 안개가 길게 흘러가는 듯한 모습을 표현했다.

이 만년필이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후지산 여행에서 피하려고 하는 풍경을 오히려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후지산을 보러 갔는데 산이 희뿌옇게 보이면 보통은 아쉽다.

“아이고, 오늘 시야가 왜 이래.”

그런데 霞를 보러 간 여행이라면 이야기가 반대다.

후지산이 살짝 흐릿해야 제맛이다.

이 풍경을 노린다면 봄이다.

3월에서 5월 무렵.

겨울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풀리고, 따뜻해진 공기 속에서 먼 후지산의 경계가 희미해질 때다.

봄철 가와구치호 북안에서 호수 너머로 살짝 흐려진 후지산을 만난다면, 이번 겨울에 보았던 또렷한 후지산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일 것이다.

산이 쨍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 여행.

생각해보면 그것도 재미있다.

“오늘은 후지산이 흐릿해서 잘 봤다.”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3. 키누구모(絹雲, きぬぐも, Kinugumo) ― 비단실처럼 하늘을 흐르는 구름

2025년 세 번째 작품.

絹은 비단이다.

따라서 絹雲은 비단처럼 얇고 가느다란 구름이라는 뜻이다.

보통 기상학에서 말하는 권운(巻雲, けんうん), 즉 cirrus를 가리킨다.

하늘 높은 곳에 가늘고 섬유처럼 길게 늘어지거나 깃털처럼 퍼지는 구름이다.

플래티넘은 그 모습을 ‘광선조각’과 ‘V날 조각’이라는 두 종류의 가공으로 표현했다.

몸체 전체를 무늬로 꽉 채우지 않고 일부러 조각하지 않은 부분도 남겨두어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듯한 공간까지 살렸다.

구름 하나 표현하려고 만년필 몸체를 여기까지 파고드는 걸 보면 참 집요하다.

이 풍경은 특정 계절 하나로 정하기 어렵다.

권운은 사계절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絹雲을 만나러 가는 여행은 달력보다는 하늘을 봐야 한다.

푸른 하늘이 열려 있고,

높은 곳에는 가느다란 비단실 같은 구름이 흐르고,

그 아래 후지산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날.

그 순간이 만년필 속 絹雲과 가장 비슷한 실제 풍경이 될 것이다.

이런 구름을 기다린다면 넓은 하늘과 후지산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가와구치호 주변이나,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전망지가 좋을 것 같다.

후지산만 잘 보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구름까지 예쁘게 걸려줘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구름 하나가 후지산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렸다가 다시 열어주는 것을 보았다.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구름이 움직일 때마다 풍경은 계속 달라졌다.

그 위에 가느다란 絹雲까지 걸린다면 같은 후지산이 또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이쯤 되면 관광이라기보다 기다림에 가깝다.


4. 운카이(雲海, うんかい, Unkai) ― 구름바다 위에 솟은 후지산

2026년 네 번째이자 후지운케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雲海.

우리말로도 그대로 운해다.

산 아래에 구름이 넓게 깔리면서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풍경이다.

그리고 그 구름바다 위로 후지산이 우뚝 솟는다.

후지운케이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른다.

플래티넘은 2023년 鱗雲에서 시작해 霞, 絹雲을 거쳐 2026년 이 雲海로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이 녀석이 표현한 실제 풍경을 보는 것은 네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쉽지 않을 것 같다.

운해는 날짜를 정해놓고 찾아간다고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밤사이 지표면이 식고, 습한 공기가 낮은 곳에 머물면서 기온역전이 생기고, 그 위 높은 곳은 맑아야 한다.

전날 비가 내린 뒤 다음 날 아침 맑아지는 날도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

계절로 보면 밤과 낮의 기온 차가 커지기 쉬운 봄이나 가을의 이른 아침을 노려볼 만하다.

장소는 호숫가보다 어느 정도 고도를 확보한 곳이 유리하다.

신도고개(新道峠)의 FUJIYAMA 트윈테라스처럼 높은 곳에서 후지산과 가와구치호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지도 후보가 될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높이는 조건일 뿐이다.

결국 자연이 허락해야 한다.

숙소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높은 전망대로 올라갔는데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반대로 어느 날 운 좋게 산 아래로 끝없는 구름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로 후지산이 떠 있는 모습을 만날 수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본 것은 후지산 주변을 떠다니는 구름이었다.

그 구름 하나만으로도 산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산 아래를 통째로 구름이 뒤덮고 그 위로 후지산 정상만 솟아 있는 풍경이라면 어떨까.

사진으로 보는 것과 그 자리에 직접 서 있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래서 네 풍경 가운데서도 雲海는 꼭 한번 직접 보고 싶다.


5. 구름 네 자루를 실제 풍경으로 만난다면

鱗雲, 霞, 絹雲, 雲海.

이 네 자루는 실제 풍경으로 만나기가 만년필을 보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

구름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우로코구모(鱗雲, うろこぐも, Urokogumo)는 가을 하늘을 노려야 한다.

카스미(霞, かすみ, Kasumi)는 봄날 먼 산이 부드럽게 흐려지는 시기가 잘 어울린다.

키누구모(絹雲, きぬぐも, Kinugumo)는 계절보다 그날 높은 하늘에 권운이 떠주는지가 중요하다.

운카이(雲海, うんかい, Unkai)는 봄이나 가을의 새벽, 습도와 기온역전 같은 조건까지 맞아야 가능성이 높아진다.

계절이 맞아야 하고,

시간이 맞아야 하고,

기온이 맞아야 하고,

습도가 맞아야 하고,

구름이 원하는 모양으로 떠줘야 한다.

거기에 후지산까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한 가지라도 틀어지면 만년필 속 풍경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오히려 이 시리즈를 실제 여행으로 따라가 보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다.

“이번에는 鱗雲을 만나러 간다.”

“이번에는 霞를 보러 간다.”

“오늘은 絹雲이 뜰까.”

“이번 여행에서는 雲海를 한번 기다려보자.”

후지산 하나를 앞에 두고도 여행 목적이 전부 달라진다.


6. 플래티넘은 어디까지 후지산을 우려먹을 셈인가

후지운케이 네 자루를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감탄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이 회사는 대체 후지산에서 어디까지 소재를 찾아낼 셈인가.’

이번에는 구름이었다.

비늘처럼 펼쳐진 구름을 찾아내고,

봄날의 흐릿한 안개를 찾아내고,

비단실 같은 권운을 찾아내고,

마지막에는 구름바다까지 끌어왔다.

구름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모양도 계속 변하는데, 그 짧은 순간을 골라 이름을 붙이고 만년필 한 자루의 색과 무늬로 만들어냈다.

이쯤 되면 후지산을 모티프로 만년필을 만든다기보다 후지산 주변에서 만년필 만들 구실을 계속 찾아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예쁘다.

그러니 수집가가 당한다.

욕은 그렇게 해놓고 신제품 사진이 뜨면 또 확대해서 보는 내 손가락도 문제다.

결국 회사만 탓할 일은 아니었다.


7. 내 책상 위에 모두 있었다면

가끔 상상해본다.

후지산을 소재로 만들어진 #3776들이 책상 위에 한 줄로 쫙 늘어서 있는 모습.

내가 가지고 있는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그리고 그 옆으로 내가 놓친 만년필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 가운데 本栖의 투명한 계보를 이어받은 忍野까지 한 자루 세워놓으면 제법 장관이었을 것이다.

전부 #3776.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산은 하나다.

후지산.

책상 위에 작은 후지산 세계 하나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물론 현실의 책상 위에는 그렇게 완성된 모습이 없다.

놓친 녀석들이 있다.

한정판이라는 것은 지나간 뒤에 더 아쉽다.

그때는 ‘다음에 사지 뭐’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다음이 쉽게 오지 않는다.

그래도 이제 그 아쉬움만 들여다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만년필이 없으면 풍경을 만나러 가면 된다.


8. 구름은 다시 온다

만년필은 한정판이다.

정해진 수량을 만들고 판매가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구름은 다르다.

鱗雲은 어느 가을날 다시 후지산 위에 펼쳐질 것이다.

霞도 어느 봄날 후지산의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 것이다.

絹雲도 어느 맑은 날 높은 하늘을 비단실처럼 흘러갈 것이고,

雲海도 어느 새벽 산 아래를 구름바다로 뒤덮을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내가 그곳에 있을 때 나타나준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그것이 오히려 재미있다.

실제 후지산으로 가면 된다.

가을에는 가와구치호 주변에서 비늘구름을 기다리고,

봄에는 霞 속에 흐릿하게 떠 있는 후지산을 바라보고,

푸른 하늘이 열린 날에는 絹雲이 흐르는 순간을 기다리고,

운해를 노리는 날에는 높은 전망지에서 새벽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한 번 간다고 보여준다는 보장은 없다.

두 번 가도 못 볼 수 있다.

그러면 또 가면 된다.

그것도 여행이다.


9. 만년필 하나가 또 여행을 만든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 나는 처음 후지산을 만났다.

신칸센 창밖으로 후지산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렇게 흥분했고,

시라이토 폭포에서는 무지개를 보았고,

타누키호에서는 흰 머리의 후지산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후지산은 그날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책상 위의 만년필을 다시 꺼내게 했고,

오래전에 보았던 한정판들을 다시 찾아보게 했고,

이번에는 그 만년필들이 담고 있는 구름까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후지산을 소재로 한 #3776 시리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모으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다.

하지만 이제 그 아쉬움만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후지오호 다섯 자루는 언젠가 직접 들고 가면 된다.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에서는 本栖를 들고,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에서는 精進을 들고,

사이호(西湖, さいこ)에서는 西를 들고,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에서는 山中을 들고,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에서는 河口를 들고 사진을 한 장씩 찍는다.

그리고 또 다른 날에는 하늘을 기다려본다.

가을 하늘에 鱗雲이 펼쳐질 수도 있고,

봄날 霞 속에서 후지산의 윤곽이 희미해질 수도 있다.

푸른 하늘에 絹雲이 걸릴 수도 있고,

정말 운이 좋다면 어느 새벽 雲海 위로 솟은 후지산을 만날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어떤 후지산을 만나게 될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다음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못 산 만년필은 여전히 아쉽다.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풍경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하늘의 구름은 흘러가지만 플래티넘은 그 순간을 만년필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그 만년필들은 다시 나를 후지산으로 가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만년필 한 자루가 만들어내는 여행도 참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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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7-30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년필을 저런 멋진 감성으로 만든다니 만년필에 관심없는 저 같은 사람도 흔들리네요.
왠지 저런 멋진 감성을 가진 만년필이라면 보고만 있어도 행복할 거 같으네요.

대장정 2026-08-01 10:59   좋아요 1 | URL
네. 일본애들의 완전한 강점인거 같아요, 멀 하나 만들어도, 감성있게.. 부러워요.
 
만년필 탐심 - 인문의 흔적이 새겨진 물건을 探하고 貪하다
박종진 지음 / 틈새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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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2]

후지산의 계절을 만년필에 담다 ―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슌케이 다섯 자루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오호(富士五湖) 시리즈의 첫 자루를 사고 난 뒤부터 문제가 생겼다.

시리즈라는 것이 그렇다.

하나만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두 자루가 되고 세 자루가 되기 시작하면 나머지가 자꾸 눈에 밟힌다.

“시리즈는 모아야 맛이지.”

결국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까지 다섯 자루를 모두 모았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플래티넘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2016년 후지오호 시리즈를 끝내자 이듬해부터는 후지산이 계절마다 보여주는 풍경을 새로운 만년필에 담기 시작했다.

후지슌케이(富士旬景, ふじしゅんけい, Fuji Shunkei) 시리즈.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다시 다섯 자루였다.

슌교(春暁, しゅんぎょう, Shungyo)
쿤푸(薫風, くんぷう, Kumpoo)
롯카(六花, ろっか, Rokka)
시운(紫雲, しうん, Shiun)
킨슈(錦秋, きんしゅう, Kinshu)

참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회사다.

플래티넘은 이 시리즈를 후지산이 만들어내는 계절의 풍경과 아름다운 일본어를 만년필 전체에 표현하려는 기획으로 만들었다.

나라고 이 녀석들을 책상 위에 다섯 자루 나란히 올려놓고 싶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갖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돈이다.

이놈의 돈.

만년필 한 자루 살 때는 그럭저럭인데, 한정판 시리즈가 해마다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벌이는 시원찮고 만년필에 들어가는 돈은 끝이 없다.

그래서 후지슌케이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진을 들여다보며 몇 번이나 망설였다.

살까.

말까.

또 봤다.

장바구니에 넣어놓고도 결제를 못 했다.

그런데 참 웃기는 일이었다.

플래티넘 한정판 몇 자루를 놓고는 비싸다고 고민하던 내가, 그 무렵에는 이미 다른 녀석들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몽블랑이었다.

어린왕자 르그랑 한정판이 눈에 들어오고,

「80일간의 세계일주」 르그랑 한정판이 또 눈에 들어오고,

145 두에와 145 레진, 솔리테어 르그랑에 이어 작가 오마주 시리즈까지 하나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플래티넘을 보면서는

‘아이고, 이것까지 사면 돈이 또 얼마나 깨지는 겨.’

하고 망설이던 사람이,

몇 배나 더 비싼 몽블랑 앞에서는 또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가격을 보고,

사진을 확대해 보고,

다른 사람의 실물 사진까지 찾아보고,

어느새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하다.

플래티넘은 돈이 아까워 참으면서 그보다 몇 배 비싼 몽블랑은 하나둘 모셔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몽블랑을 산 것이 후회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도 책상 위에 어린왕자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꺼내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뿌듯하다.

문제는 사람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쪽을 얻으면 다른 한쪽을 놓친 것이 또 아쉽다.

결국 후지슌케이 다섯 자루는 사지 못했다.

인터넷에서 그렇게 많이 들여다봤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만년필을 하나씩 사들이면 택배가 온다.

한 번 오고,

또 오고,

며칠 있다 또 온다.

그러면 아무리 내 취미라 해도 마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마님이 착하다.

내가 술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하니 만년필 사는 것 정도는 그냥 모른 척 눈감아주는 것 같다.

말은 안 해도 그런 것 같다.

마님 하나는 잘 모시고 온 셈이다.

그래서 나도 어느 정도는 참아야 했다.

그렇게 후지슌케이는 결국 화면 속 만년필로만 남았다.

문제는 한정판이라는 것이다.

그때 안 사면 나중에는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당시에는

‘다음에 사지 뭐.’

했는데 그 ‘다음’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돈이 생겼을 때는 물건이 없고,

어쩌다 물건이 나오면 상태나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하나씩 사둘 걸 하는 미련이 남는다.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옆에

春暁, 薫風, 六花, 紫雲, 錦秋까지 쫙 늘어서 있었다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

시리즈는 역시 모아야 맛이다.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만년필만 붙들고 아쉬워할 수는 없다.

만년필은 놓쳤어도 그 만년필들이 담아낸 후지산의 계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해진다.

春暁, 薫風, 六花, 紫雲, 錦秋.

이 다섯 풍경을 실제 후지산에서 만나려면 언제 가야 할까.


1. 슌교(春暁, しゅんぎょう, Shungyo) ― 봄날 새벽의 후지산

2017년 첫 번째 작품.

春暁는 ‘봄날의 새벽’을 뜻한다.

겨울의 추위가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이른 봄 새벽, 햇빛이 퍼지면서 붉게 물드는 하늘과 검은 실루엣처럼 서 있는 후지산을 표현했다.

붉은 몸체와 불규칙한 가는 선, 무광 가공으로 새벽 하늘을 표현했고 캡 꼭대기에는 후지산을 형상화한 부분도 넣었다.

세계 3,776자루 한정.

후지산의 높이 3,776m와 정확히 맞춘 숫자다.

이 풍경을 실제로 보고 싶다면 언제 가야 할까.

이름부터 春暁다.

봄날 새벽.

따라서 3월에서 4월 무렵, 해가 뜨기 전부터 후지산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벽이다.

해가 높이 뜬 뒤가 아니라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하고 후지산은 아직 검은 실루엣으로 남아 있는 짧은 시간.

그 순간을 만나야 슌교의 풍경에 가까워진다.

이번 여행에서는 겨울 아침의 후지산을 처음 만났지만, 언젠가는 봄날 새벽에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후지산도 한번 보고 싶다.

검은 산의 윤곽 뒤로 붉은 빛이 번지기 시작하는 순간.

그 풍경을 실제로 보고 나면 春暁라는 이름도 지금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2. 쿤푸(薫風, くんぷう, Kumpoo) ― 신록 사이로 부는 초여름 바람

2018년 두 번째 작품.

薫風은 초여름 신록 사이로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을 뜻한다.

플래티넘은 햇빛을 받은 신록과 푸른 하늘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반투명한 터키석빛 몸체에 담았다.

신록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풍경이 이 만년필의 모티프다.

이걸 실제로 보려면 초여름이다.

대략 5월 하순에서 6월 무렵.

눈 녹은 후지산 기슭의 나무들이 연두색에서 짙은 초록으로 바뀌고, 파란 하늘 아래 신록이 가장 싱싱할 때다.

다만 여름으로 갈수록 후지산은 구름에 가릴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이 풍경을 만나려면 아침 일찍 후지산 앞에 서는 편이 낫다.

산 아래 신록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뒤로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내준다면, 만년필 속 薫風이 실제 풍경이 되는 셈이다.

겨울의 흰 후지산을 먼저 본 나로서는 초록빛으로 가득한 계절의 후지산이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하다.

같은 산인데 주변의 색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3. 롯카(六花, ろっか, Rokka) ― 눈과 얼음의 후지산

2019년 세 번째 작품.

六花.

글자 그대로 보면 ‘여섯 개의 꽃’이다.

하지만 여기서 꽃은 눈 결정이다.

육각형으로 이루어진 눈 결정을 꽃에 비유한 옛 표현이다.

플래티넘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후지산의 깨끗한 풍경을 이 만년필에 담았다.

몸체에도 눈 결정이 이어지는 듯한 정밀한 가공을 넣었다.

빛을 받으면 여러 면에서 반사되며 눈 결정처럼 반짝인다.

이 풍경은 비교적 명확하다.

겨울이다.

12월부터 2월.

눈을 뒤집어쓴 후지산을 볼 가능성이 높고, 공기가 건조해 산의 윤곽도 선명하게 보이는 시기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후지산도 12월 27일의 겨울 후지산이었다.

신칸센 창밖에서 처음 만났고, 시라이토 폭포를 지나 타누키호에 이르기까지 흰 머리의 후지산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직접 만난 후지산은 후지슌케이 다섯 풍경 가운데 六花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책상 위에는 六花 만년필이 없었지만, 그 만년필이 표현하려 했던 겨울의 후지산은 내 눈으로 직접 본 셈이다.


4. 시운(紫雲, しうん, Shiun) ― 보랏빛 구름에 감싸인 후지산

2020년 네 번째 작품.

紫雲.

보랏빛 구름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진 구름이기도 하다.

플래티넘은 후지산 주변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구름과 그 사이로 비치는 빛을 정밀한 렌즈컷으로 표현했다.

세계 3,776자루 한정이었다.

이 녀석이 표현한 실제 풍경을 찾아가는 것은 조금 어렵다.

春暁처럼 ‘봄에 가면 된다’, 六花처럼 ‘겨울에 가면 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랏빛 구름은 계절보다 빛과 구름의 조건이 중요하다.

해가 뜨기 직전이나 해가 진 직후, 낮은 각도의 햇빛이 구름을 붉고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순간을 만나야 한다.

맑기만 해서도 안 된다.

후지산은 보여야 하지만 그 주변에는 빛을 받을 적당한 구름도 있어야 한다.

결국 이 풍경은 기다려야 한다.

운도 따라줘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후지산은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숨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구름 하나가 후지산의 표정을 얼마나 크게 바꾸는지 느꼈다.

그 구름이 어느 저녁 보랏빛으로 물들기까지 한다면 또 얼마나 다른 후지산이 될까.

어쩌면 다섯 풍경 가운데 가장 만나기 어려워서 더 보고 싶은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5. 킨슈(錦秋, きんしゅう, Kinshu) ― 단풍으로 물든 후지산의 가을

2021년 마지막 작품.

錦秋.

‘비단 같은 가을’이라는 뜻이다.

산과 들이 단풍으로 붉고 노랗게 물든 모습을 금실과 은실로 짠 비단인 錦에 비유한 이름이다.

플래티넘은 불타는 듯한 가을 단풍을 붉은 몸체와 정밀한 커팅으로 표현했다.

후지슌케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이 풍경을 만나려면 당연히 가을이다.

후지오호 지역을 기준으로 보면 대체로 10월 하순부터 11월 무렵이 좋다.

특히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 일대처럼 단풍과 호수, 후지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에서 가을빛을 기다려보고 싶다.

붉은 단풍 아래 호수.

그 뒤로 솟은 후지산.

정상에는 흰 눈.

겨울 타누키호에서 보았던 후지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春暁가 하루의 시작을 담았다면 錦秋는 한 해의 깊어진 계절을 담은 듯하다.

언젠가 실제로 한번 보고 싶은 풍경이다.


6. 다섯 자루의 만년필을 실제 풍경으로 만난다면

春暁, 薫風, 六花, 紫雲, 錦秋.

만년필은 다섯 자루지만 결국 모두 하나의 후지산이다.

계절과 시간, 빛이 달라졌을 뿐이다.

春暁를 만나려면 봄날 새벽에 가야 한다.

薫風을 만나려면 신록이 가장 싱싱한 초여름의 아침이 좋다.

六花를 만나려면 눈 덮인 겨울의 후지산을 찾아가야 한다.

紫雲은 계절보다 일출이나 일몰 무렵의 빛과 구름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錦秋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늦가을이 제격이다.

후지오호 시리즈와는 여기서 차이가 난다.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사이호(西湖, さいこ),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는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호수는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후지슌케이는 그렇지 않다.

계절이 맞아야 하고,

시간이 맞아야 하고,

빛이 맞아야 한다.

그날 후지산이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니 만년필에서 모티프를 얻은 바로 그 풍경을 직접 만나려면 한 번의 여행으로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이 재미있다.

봄에는 春暁.

초여름에는 薫風.

겨울에는 六花.

어느 날의 일출이나 일몰에는 紫雲.

가을에는 錦秋.

같은 후지산을 보러 가는데도 여행의 목적과 풍경이 전혀 달라진다.

이쯤 되면 단순히 ‘후지산을 보러 간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떤 후지산을 만나러 가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7. 만년필은 놓쳤어도 풍경까지 놓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생각을 조금 바꿔보면 아직 남은 것이 있다.

만년필은 놓쳤지만 그 만년필이 담았던 실제 후지산의 풍경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봄날 새벽의 春暁.

초여름 신록의 薫風.

눈 덮인 六花.

보랏빛 구름의 紫雲.

가을 단풍의 錦秋.

그 풍경들은 지금도 후지산 어딘가에서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다시 나타난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 가운데 겨울의 六花에 가까운 후지산을 만났다.

다음에는 다른 얼굴의 후지산을 만나러 가도 좋겠다.

“이번에는 春暁를 만나러 간다.”

“이번에는 錦秋의 후지산을 보러 간다.”

그렇게 하나의 만년필 이름을 여행의 목적처럼 정해놓고 떠나는 것이다.

언제 다시 후지산으로 가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단순히 후지산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절의 후지산을 만나러 가는지부터 정해보고 싶다.

봄날 새벽의 붉은 하늘일 수도 있고,

초여름 신록일 수도 있고,

가을 단풍 너머의 흰 후지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후지오호 다섯 자루를 들고 실제 다섯 호수를 하나씩 찾아가는 여행까지 한다면 더 좋겠다.

만년필은 책상 위에만 있는 물건이지만, 그 만년필 하나 때문에 알게 된 이름이 실제 여행지가 되고, 그 속에 담긴 색과 무늬 때문에 어느 계절의 풍경을 찾아가게 된다.

다음에는 어떤 후지산을 만나게 될까.

아직 보지 못한 풍경이 남아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꽤 즐거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플래티넘이 만들어놓은 것은 만년필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한테는 아직 가보지 않은 여행지가 또 이렇게 생겨버렸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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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탐심 - 인문의 흔적이 새겨진 물건을 探하고 貪하다
박종진 지음 / 틈새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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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1]

내 책상 위의 후지오호 ―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오호 다섯 자루


후지산을 처음 본 것은 이번 여행이지만,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후지산 주변의 다섯 호수를 알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만년필을 모으면서 하나씩 손에 넣었던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오호(富士五湖) 시리즈’ 때문이다.

후지오호는 후지산 북쪽 기슭을 둘러싼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사이호(西湖, さいこ),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의 다섯 호수를 말한다.

플래티넘은 이 다섯 호수를 하나씩 만년필로 만들었다.

첫 번째는 2011년 ‘本栖(Motosu)’.

두 번째는 2012년 ‘精進(Shoji)’.

세 번째는 2013년 ‘西(Sai)’.

네 번째는 2015년 ‘山中(Yamanaka)’.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가 2016년 ‘河口(Kawaguchi)’였다.

2011년 시작된 시리즈가 2016년 가와구치까지 나오면서 비로소 후지오호 다섯 자루가 완성된 것이다.

플래티넘도 2016년 가와구치를 발표하면서 이를 후지오호 시리즈의 최종작으로 밝혔다.

나는 이 다섯 자루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섯 자루 모두 아직 한 번도 잉크를 넣어 사용하지 않았다.

만년필을 사면 당연히 잉크를 넣고 글을 써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녀석들은 처음 손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펜촉에 잉크 한 번 묻히지 않은 채 지금까지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아직 한 번도 잉크를 머금어보지 못한 처녀 상태의 다섯 자루다.

사진 속에 늘어놓은 순서도 발매 순서 그대로다.


1. 本栖(Motosu) ―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2011년 나온 첫 번째 만년필이다.

후지오호 시리즈의 시작이면서 #3776 센추리의 시작을 알린 모델이기도 하다.

완전히 투명한 몸체가 특징이다.

플래티넘은 이후 공식 자료에서도 本栖를 2011년 후지오호 시리즈의 첫 모델로 소개하면서, 완전한 투명 몸체를 특징으로 들고 있다.

모티프가 된 곳은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후지오호 가운데 가장 깊은 호수이며 물이 맑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만년필 역시 색을 거의 넣지 않은 투명한 몸체로 호수의 맑은 물을 표현했다.

이번 여행에서 타누키호에 갔을 때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모토스호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타누키호에서 조금 더 가면 모토스호가 나온다.

책상 위에 있는 만년필의 이름과 실제 여행지의 지명이 그대로 겹쳐졌다.

시간만 있었으면 가보고 싶었다.

결국 이번에는 타누키호에서 돌아섰다.

내 책상 위에는 오래전부터 ‘本栖’가 있었는데 정작 그 이름의 주인공인 호수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2. 精進(Shoji) ―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2012년 두 번째로 나온 모델이다.

모티프는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사진으로 보면 첫 번째 本栖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체에 아주 옅은 푸른빛이 돈다.

투명한 수면에 아침빛이 스며든 듯한 느낌이다.

本栖의 맑은 투명함과는 또 다르다.

두 자루를 나란히 놓아야 그 미묘한 차이가 제대로 보인다.

처음 구입했을 때는 本栖와 거의 비슷한 투명 만년필처럼 보였다.

‘왜 또 투명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햇빛 아래에서 바라보니 本栖와는 다른 은은한 푸른빛이 드러났다.

쇼지호의 수면에 아침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표현한 만년필이라는 설명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번 여행에서 이른 아침 신칸센을 타고 달리다 구름 사이로 후지산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런 맑은 겨울 아침빛을 보았다.

오랫동안 책상 위에서 보아온 푸른빛이 실제 후지산의 아침 풍경과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3. 西(Sai) ― 사이호(西湖, さいこ)

2013년 세 번째 모델.

모티프는 사이호(西湖, さいこ)다.

이름은 한자로 달랑 ‘西’.

일본어로는 ‘사이’라고 읽는다.

다섯 자루 가운데서도 사진으로 금방 구별되는 만년필이다.

몸체 전체에 물결이 흐르는 것 같은 독특한 가공이 들어가 있다.

빛을 받으면 투명한 몸체 위로 선들이 반짝이면서 호수의 수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난다.

처음 손에 넣었을 때도 이 물결무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만년필을 이리저리 돌려보면 빛을 받을 때마다 몸체 위의 선들이 반짝였다.

‘이건 정말 호수 수면을 담아냈구나.’

그렇게 느꼈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는 우에노공원의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도 걸었다.

물론 그곳은 사이호와 전혀 다른 도쿄 한복판의 연못이지만, 수면 위에 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니 문득 이 만년필의 물결무늬도 생각났다.

서로 다른 장소의 물이었지만 빛을 받아 흔들리는 수면이라는 점에서는 묘하게 겹쳐 보였다.


4. 山中(Yamanaka) ―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2015년 네 번째 모델.

모티프는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세계 3,776자루 한정으로 만들어졌는데, 숫자 3,776은 후지산의 해발고도 3,776m에서 가져왔다.

플래티넘은 후지오호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약 1,000m에 자리한 야마나카호에 아침의 맑은 빛이 비치며 호수가 반짝이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투명한 몸체에 빛이 들어오면 수면이 반짝이는 듯 보이도록 가공한 것이 특징이다.

플래티넘의 대표 만년필인 ‘#3776’이라는 이름 자체가 후지산의 해발고도 3,776m에서 비롯되었다.

야마나카 한정판은 이 상징적인 숫자를 한정수량에도 그대로 적용해 3,776자루를 제작했다.

즉 #3776이라는 모델명과 야마나카의 한정수량 모두 후지산의 높이 3,776m를 공통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이 펜을 구입했을 때도 ‘3776’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후지산을 모티프로 한 #3776이라는 이름에 다시 후지산 높이만큼인 3,776자루라는 한정수량을 맞춰놓은 셈이다.

이번 여행에서 시라이토 폭포를 바라볼 때는 절벽 사이로 흘러내리는 수많은 물줄기와 그 위에 비치는 햇빛을 보았다.

폭포의 물과 호수의 물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의 모습에서는 山中의 투명한 바디가 떠올랐다.


5. 河口(Kawaguchi) ―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

2016년 마지막으로 등장한 다섯 번째 모델이다.

모티프는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

앞의 네 자루가 대부분 투명하거나 아주 옅은 색인데, 마지막 가와구치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짙은 청색이다.

플래티넘이 붙인 색의 이름은 ‘Dawn Blue’.

해가 뜨기 직전,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시간에 후지산과 가와구치호가 깊은 푸른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플래티넘의 공식 설명도 ‘새벽을 기다리는 가와구치호’를 중심 이미지로 삼아, 정적 속에 떠 있는 후지산과 호수의 수면을 표현했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 한정수량은 2,500자루였다.

처음 구입했을 때도 이 짙은 청색은 앞의 네 자루와 확연히 달라 보였다.

투명하거나 옅은 색의 만년필 네 자루 사이에 놓으니 가와구치의 푸른색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마지막은 새벽의 푸른빛으로 장식했구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라는 느낌이 확실했다.

그래서 다섯 자루를 나란히 놓으면 마지막 가와구치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투명한 네 자루 끝에 짙은 푸른색 한 자루.

후지오호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잘 어울리는 만년필이다.

타누키호에서는 커다란 구름 사이로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숨기를 반복했다.

겨울의 푸른 하늘과 짙은 구름 사이로 눈 덮인 후지산이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와구치의 Dawn Blue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만년필 속에서는 새벽의 푸른빛으로 후지산을 상상했는데, 이날은 실제 후지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6. 책상 위의 후지산, 창밖의 후지산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다섯 자루를 하나씩 모으면서 후지오호의 이름과 위치도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런데 정작 후지산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보았다.

신후지역으로 들어가는 신칸센 오른쪽 창밖으로 후지산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렇게 흥분했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만년필 이름으로 익숙했던 후지산과 그 주변의 지명들이 갑자기 실제 풍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책상 위에서는 투명한 바디와 옅은 푸른빛, 물결무늬, 반짝이는 빛, 새벽의 짙은 청색으로 후지산과 다섯 호수를 상상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눈 덮인 정상과 구름, 시라이토 폭포의 물줄기, 타누키호의 겨울 수면으로 후지산을 직접 만났다.

시라이토 폭포를 지나 타누키호까지 갔고, 그곳에서 흰 머리의 후지산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다.

타누키호에서 조금만 더 가면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였다.

‘저기까지 가면 내가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녀석, 本栖의 진짜 호수를 볼 수 있는데.’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는 거기까지였다.

책상 위에 다시 다섯 자루를 발매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아직 어느 한 자루에도 잉크 한 번 묻히지 않았다.

처음 손에 넣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다섯 자루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동안은 만년필을 보면서 호수를 떠올렸다면, 이제는 이 만년필들을 볼 때마다 이번에 직접 보았던 흰 머리의 후지산과 타누키호의 겨울 풍경도 함께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다섯 호수도 남아 있다.

언젠가는 이 다섯 자루의 이름을 하나씩 직접 찾아가 보는 여행도 해보고 싶다.

그때는 책상 위에서만 보아온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를 실제 호숫가에 서서 하나씩 만나보게 될 것이다.


7. 그리고 하나 더, 忍野(Oshino)

후지오호 시리즈 이야기를 하다 보면 빠뜨리기 쉬운 만년필이 하나 있다.

오시노(忍野, おしの, Oshino)다.

처음 보면 ‘후지오호 시리즈의 여섯 번째 만년필인가?’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하다.

완전히 투명한 몸체를 가지고 있고, 이름 역시 후지산과 밀접하게 연결된 지명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忍野는 후지오호 시리즈에 포함되는 한정판이 아니다.

2018년에 등장한 #3776 센추리의 별도 정규 모델이다.

그런데 이 녀석의 출생 배경을 따라가면 다시 첫 번째 후지오호 만년필인 本栖와 만나게 된다.

플래티넘은 2011년 발매한 本栖의 완전히 투명한 몸체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로부터 7년 뒤인 2018년 더욱 높은 투명감을 추구해 忍野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즉 忍野는 후지오호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은 아니지만, 디자인의 계보를 놓고 보면 本栖의 투명한 바디에서 출발한 만년필인 셈이다.

이름의 모티프가 된 곳은 오시노핫카이(忍野八海, おしのはっかい).

후지산의 눈과 비가 지하로 스며들어 오랜 시간을 거친 뒤 용천수로 솟아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맑은 물로 유명한 오시노핫카이의 이미지를 보다 높은 투명도의 만년필로 표현한 것이 忍野다.

本栖가 모토스호의 맑고 깊은 물을 담았다면, 忍野는 후지산에서 흘러내려 지하를 거쳐 다시 솟아난 맑은 물을 담은 셈이다.

같은 투명 만년필이지만 출발점은 조금 다르다.

本栖는 ‘호수’.

忍野는 ‘용천수’.

후지산의 물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이어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忍野가 나온 2018년에도 플래티넘은 후지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해에는 후지산의 계절 풍경을 담은 후지슌케이(富士旬景)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쿤푸(薫風, くんぷう, Kumpoo)도 발매됐다.

한쪽에서는 本栖의 투명성을 이어받은 정규 모델 忍野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계절의 후지산을 한정판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후지오호 다섯 자루를 완성하고 나면 끝날 줄 알았는데 플래티넘은 그 뒤에도 후지산을 놓아주지 않았다.

호수에서 시작해 용천수로 이어지고, 다시 계절과 구름으로 이야기를 넓혀갔다.

그러고 보면 #3776이라는 이름부터가 후지산 높이 3,776m에서 가져온 것이니, 플래티넘에게 후지산은 그저 한 번 써먹고 끝낼 소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책상 위에는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다섯 자루가 있다.

忍野는 그 다섯 자루의 정식 식구는 아니다.

하지만 本栖에서 시작된 투명한 #3776의 계보와 후지산의 물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냥 남이라고 하기도 묘하다.

후지오호 다섯 자루 옆에 세워놓으면 꽤 잘 어울릴 녀석이다.

문제는 또 하나다.

이렇게 하나를 알고 나면 또 갖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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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
두경아 지음 / 길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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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내 책상 위의 후지오호(富士五湖) ―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오호 다섯 자루

후지산을 처음 본 것은 이번 여행이지만,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후지산 주변의 다섯 호수를 알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만년필을 모으면서 하나씩 손에 넣었던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오호(富士五湖) 시리즈’ 때문이다.

후지오호는 후지산 북쪽 기슭을 둘러싼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사이호(西湖, さいこ),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의 다섯 호수를 말한다.

플래티넘은 이 다섯 호수를 하나씩 만년필로 만들었다.

첫 번째는 2011년 ‘本栖(Motosu)’.

두 번째는 2012년 ‘精進(Shoji)’.

세 번째는 2013년 ‘西(Sai)’.

네 번째는 2015년 ‘山中(Yamanaka)’.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가 2016년 ‘河口(Kawaguchi)’였다.

2011년 시작된 시리즈가 2016년 가와구치까지 나오면서 비로소 후지오호 다섯 자루가 완성된 것이다.

플래티넘도 2016년 가와구치를 발표하면서 이를 후지오호 시리즈의 최종작으로 밝혔다.

나는 이 다섯 자루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섯 자루 모두 아직 한 번도 잉크를 넣어 사용하지 않았다.

만년필을 사면 당연히 잉크를 넣고 글을 써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녀석들은 처음 손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펜촉에 잉크 한 번 묻히지 않은 채 지금까지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아직 한 번도 잉크를 머금어보지 못한 처녀 상태의 다섯 자루다.

사진 속에 늘어놓은 순서도 발매 순서 그대로다.

1. 本栖(Motosu) ―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2011년 나온 첫 번째 만년필이다.

후지오호 시리즈의 시작이면서 #3776 센추리의 시작을 알린 모델이기도 하다.

완전히 투명한 몸체가 특징이다.

플래티넘은 이후 공식 자료에서도 本栖를 2011년 후지오호 시리즈의 첫 모델로 소개하면서, 완전한 투명 몸체를 특징으로 들고 있다.

모티프가 된 곳은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후지오호 가운데 가장 깊은 호수이며 물이 맑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만년필 역시 색을 거의 넣지 않은 투명한 몸체로 호수의 맑은 물을 표현했다.

처음 이 펜을 구입했을 때 투명한 바디 안으로 빛이 스며드는 모습이 너무 맑아 한동안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아, 이게 모토스호의 물빛을 표현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타누키호에 갔을 때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모토스호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다시 실감났다.

타누키호에서 조금 더 가면 모토스호가 나온다.

책상 위에 있는 만년필의 이름과 실제 여행지의 지명이 그대로 겹쳐졌다.

시간만 있었으면 가보고 싶었다.

결국 이번에는 타누키호에서 돌아섰다.

내 책상 위에는 오래전부터 ‘本栖’가 있었는데 정작 그 이름의 주인공인 호수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2. 精進(Shoji) ―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2012년 두 번째로 나온 모델이다.

모티프는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사진으로 보면 첫 번째 本栖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체에 아주 옅은 푸른빛이 돈다.

투명한 수면에 아침빛이 스며든 듯한 느낌이다.

本栖의 맑은 투명함과는 또 다르다.

두 자루를 나란히 놓아야 그 미묘한 차이가 제대로 보인다.

처음 구입했을 때는 本栖와 거의 비슷한 투명 만년필처럼 보였다.

‘왜 또 투명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햇빛 아래에서 바라보니 本栖와는 다른 은은한 푸른빛이 드러났다.

쇼지호의 수면에 아침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표현한 만년필이라는 설명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번 여행에서 이른 아침 신칸센을 타고 달리다 구름 사이로 후지산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런 맑은 겨울 아침빛을 보았다.

오랫동안 책상 위에서 보아온 푸른빛이 실제 후지산의 아침 풍경과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3. 西(Sai) ― 사이호(西湖, さいこ)

2013년 세 번째 모델.

모티프는 사이호(西湖, さいこ)다.

이름은 한자로 달랑 ‘西’.

일본어로는 ‘사이’라고 읽는다.

다섯 자루 가운데서도 사진으로 금방 구별되는 만년필이다.

몸체 전체에 물결이 흐르는 것 같은 독특한 가공이 들어가 있다.

빛을 받으면 투명한 몸체 위로 선들이 반짝이면서 호수의 수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난다.

처음 손에 넣었을 때도 이 물결무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만년필을 이리저리 돌려보면 빛을 받을 때마다 몸체 위의 선들이 반짝였다.

‘이건 정말 호수 수면을 담아냈구나.’

그렇게 느꼈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는 우에노공원의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도 걸었다.

물론 그곳은 사이호와 전혀 다른 도쿄 한복판의 연못이지만, 수면 위에 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니 문득 이 만년필의 물결무늬도 생각났다.

서로 다른 장소의 물이었지만 빛을 받아 흔들리는 수면이라는 점에서는 묘하게 겹쳐 보였다.

4. 山中(Yamanaka) ―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2015년 네 번째 모델.

모티프는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세계 3,776자루 한정으로 만들어졌는데, 숫자 3,776은 후지산의 해발고도 3,776m에서 가져왔다.

플래티넘은 후지오호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약 1,000m에 자리한 야마나카호에 아침의 맑은 빛이 비치며 호수가 반짝이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투명한 몸체에 빛이 들어오면 수면이 반짝이는 듯 보이도록 가공한 것이 특징이다.

플래티넘의 대표 만년필인 ‘#3776’이라는 이름 자체가 후지산의 해발고도 3,776m에서 비롯되었다.

야마나카 한정판은 이 상징적인 숫자를 한정수량에도 그대로 적용해 3,776자루를 제작했다.

즉 #3776이라는 모델명과 야마나카의 한정수량 모두 후지산의 높이 3,776m를 공통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이 펜을 구입했을 때도 ‘3776’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후지산을 모티프로 한 #3776이라는 이름에 다시 후지산 높이만큼인 3,776자루라는 한정수량을 맞춰놓은 셈이다.

이번 여행에서 시라이토 폭포를 바라볼 때는 절벽 사이로 흘러내리는 수많은 물줄기와 그 위에 비치는 햇빛을 보았다.

폭포의 물과 호수의 물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의 모습에서는 山中의 투명한 바디가 떠올랐다.

5. 河口(Kawaguchi) ―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

2016년 마지막으로 등장한 다섯 번째 모델이다.

모티프는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

앞의 네 자루가 대부분 투명하거나 아주 옅은 색인데, 마지막 가와구치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짙은 청색이다.

플래티넘이 붙인 색의 이름은 ‘Dawn Blue’.

해가 뜨기 직전,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시간에 후지산과 가와구치호가 깊은 푸른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플래티넘의 공식 설명도 ‘새벽을 기다리는 가와구치호’를 중심 이미지로 삼아, 정적 속에 떠 있는 후지산과 호수의 수면을 표현했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 한정수량은 2,500자루였다.

처음 구입했을 때도 이 짙은 청색은 앞의 네 자루와 확연히 달라 보였다.

투명하거나 옅은 색의 만년필 네 자루 사이에 놓으니 가와구치의 푸른색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마지막은 새벽의 푸른빛으로 장식했구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라는 느낌이 확실했다.

그래서 다섯 자루를 나란히 놓으면 마지막 가와구치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투명한 네 자루 끝에 짙은 푸른색 한 자루.

후지오호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잘 어울리는 만년필이다.

타누키호에서는 커다란 구름 사이로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숨기를 반복했다.

겨울의 푸른 하늘과 짙은 구름 사이로 눈 덮인 후지산이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와구치의 Dawn Blue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만년필 속에서는 새벽의 푸른빛으로 후지산을 상상했는데, 이날은 실제 후지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6. 책상 위의 후지산, 창밖의 후지산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다섯 자루를 하나씩 모으면서 후지오호의 이름과 위치도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런데 정작 후지산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보았다.

신후지역으로 들어가는 신칸센 오른쪽 창밖으로 후지산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렇게 흥분했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만년필 이름으로 익숙했던 후지산과 그 주변의 지명들이 갑자기 실제 풍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책상 위에서는 투명한 바디와 옅은 푸른빛, 물결무늬, 반짝이는 빛, 새벽의 짙은 청색으로 후지산과 다섯 호수를 상상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눈 덮인 정상과 구름, 시라이토 폭포의 물줄기, 타누키호의 겨울 수면으로 후지산을 직접 만났다.

시라이토 폭포를 지나 타누키호까지 갔고, 그곳에서 흰 머리의 후지산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다.

타누키호에서 조금만 더 가면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였다.

‘저기까지 가면 내가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녀석, 本栖의 진짜 호수를 볼 수 있는데.’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는 거기까지였다.

책상 위에 다시 다섯 자루를 발매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아직 어느 한 자루에도 잉크 한 번 묻히지 않았다.

처음 손에 넣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다섯 자루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동안은 만년필을 보면서 호수를 떠올렸다면, 이제는 이 만년필들을 볼 때마다 이번에 직접 보았던 흰 머리의 후지산과 타누키호의 겨울 풍경도 함께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다섯 호수도 남아 있다.

언젠가는 이 다섯 자루의 이름을 하나씩 직접 찾아가 보는 여행도 해보고 싶다.

그때는 책상 위에서만 보아온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를 실제 호숫가에 서서 하나씩 만나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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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만드는 기술 이야기 - 다리, 터널, 도로, 통신망, 전력망, 철도, 댐, 상하수도, 건설 장비까지 우리 주변을 둘러싼 인프라의 모든 것
그레이디 힐하우스 지음, 윤신영 옮김 / 한빛미디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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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북알프스 여행기 - 특별기고]

黒部ダム(쿠로베댐) 건설기
― 26년 도로맨의 눈으로 본 일본 토목기술의 기념비
(파쇄대를 뚫고 북알프스에 떨친 일본의 토목기술)

1. 여행지가 아니라 거대한 토목구조물 앞에 서다

立山黒部アルペンルート(다테야마쿠로베 알펜루트)를 여행하며 만난 수많은 풍경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 중 하나가 黒部ダム(쿠로베댐)이었다.

웅장한 북알프스의 산과 깊은 계곡 사이를 막아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관광객의 눈으로만 보면 장대한 풍경 속에 자리한 유명 관광명소다.

그러나 내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나는 토목기술자로 26년을 살아왔다.

국도와 고속도로의 설계와 공사현장을 오가며 수많은 도로와 터널, 교량을 직접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그중에는 국내 최초의 해저터널 건설공사도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도로와 함께 살아온 사람의 눈으로 黒部ダム(쿠로베댐)과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을 바라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콘크리트 구조물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저 거대한 산속에서 측량을 하고, 길을 내고, 터널을 뚫고, 물과 암반과 싸우며 구조물을 세웠을 당시 기술자들과 근로자들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토목기술자의 위대함이여.”

이 댐을 만든 일본의 토목기술자들과 근로자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전후 일본의 전력난에서 시작된 黒四(쿠로욘)

黒部ダム(쿠로베댐)은 단순히 관광을 위해 만들어진 댐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은 빠른 경제복구 과정에서 심각한 전력 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関西(간사이) 지역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안정적인 대규모 전원개발이 절실해졌다.

関西電力(간사이전력)은 사람의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黒部川(쿠로베강) 상류의 막대한 수력에 주목했다.

그 결과 추진된 사업이 黒部川第四発電所(쿠로베강 제4발전소) 건설사업이다.

흔히 ‘黒四(쿠로욘)’이라고 부르는 대사업이었다.

1956년 공사가 시작되어 1963년 완공될 때까지 약 7년이 걸렸다.

당시 돈으로 500억 엔이 넘는 막대한 사업비가 들어갔고 연인원 약 1,000만 명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171명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거대한 관광명소가 된 黒部ダム(쿠로베댐)은 그만큼 많은 사람의 땀과 희생 위에 세워진 구조물이다.


3. 높이 186m, 일본 최대급 아치식 댐

黒部ダム(쿠로베댐)은 黒部川(쿠로베강) 상류에 건설된 아치식 콘크리트댐이다.

댐 높이는 186m.

댐 정상부 길이는 약 492m에 이른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산과 산 사이를 하나의 곡선으로 연결하고 있다.

아치댐은 수압을 댐 자체의 무게만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곡선 형태를 이용해 양쪽 암반으로 전달하는 구조다.

따라서 무엇보다 양쪽 산의 암반이 충분히 견고해야 한다.

댐의 형태 하나만 보더라도 지형과 지질, 구조계산, 시공기술을 모두 종합한 결과물이다.

내가 댐 위를 걸으며 자꾸 양쪽 산과 댐의 접합부를 바라보게 된 것도 토목쟁이의 버릇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광객들은 호수와 방류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콘크리트 구조와 암반부터 눈에 들어왔다.


4.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문제, 어떻게 공사장까지 들어갈 것인가

이곳에 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사람도 장비도 자재도 들어갈 길이 없었다.

지금이야 버스를 타고 扇沢(오기사와)에서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을 지나 黒部ダム(쿠로베댐)까지 쉽게 들어간다.

하지만 1950년대 당시 이 일대는 북알프스 깊숙한 오지였다.

거대한 댐을 만들려면 시멘트와 철근, 중장비와 수많은 인력을 끊임없이 현장으로 운반해야 했다.

따라서 먼저 산을 관통하는 자재운반용 터널이 필요했다.

이것이 大町トンネル(오마치터널), 현재의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이다.

그러나 이 터널이 黒四(쿠로욘) 공사의 가장 악명 높은 난공사가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5. 터널 앞을 가로막은 破砕帯(파쇄대)

공사는 순조롭게만 진행되지 않았다.

1957년 5월.

터널을 굴진하던 공사팀 앞에 예상하지 못했던 지질대가 나타났다.

破砕帯(파쇄대)였다.

파쇄대란 단층운동 등으로 암반이 잘게 부서져 매우 약해진 지질대를 말한다.

단단한 암반이라면 발파하고 버럭을 반출하며 앞으로 굴진하면 된다.

그러나 파쇄대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암반 자체가 부서져 있기 때문에 굴착하는 순간 무너질 수 있고 그 틈을 따라 엄청난 양의 지하수가 터져 나온다.

실제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 공사에서는 차가운 지하수가 터널 안으로 쏟아졌다.

공식 기록에도 이 파쇄대는 黒部ダム(쿠로베댐) 건설의 대표적인 난공사로 기록되어 있다.

불과 약 80m 정도의 구간을 통과하는 데 약 7개월이 걸렸다.


6. 물과 흙과 암반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터널

알펜루트 버스를 타고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을 지나면서 지금도 당시 破砕帯(파쇄대)를 통과한 지점을 볼 수 있다.

버스 안에서도 이곳이 黒四(쿠로욘) 건설의 최대 난공사 구간이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나도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보려고 했다.

하지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데다 어두운 터널이라 제대로 찍기가 어려웠다.

그곳에서는 당시 암반 틈에서 얼마나 많은 물이 터져 나왔는지, 그리고 공사팀이 그 물과 어떻게 싸웠는지 영상과 자료로 보여주었다.

물을 머금은 부서진 암반.

굴착하면 무너지고,

막으면 다시 물이 터지고,

그 물을 빼내면서 다시 조금씩 굴진해야 하는 공사.

터널공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터널에서 물은 단순히 ‘물이 나온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막대한 용수가 들어오면 지반이 함께 흐트러지고 막장 붕괴와 토사 유출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공사를 계속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7. 80m를 뚫는 데 7개월

전체 터널 길이에 비하면 파쇄대 자체는 길지 않았다.

약 80m.

하지만 이 80m를 돌파하는 데 무려 7개월이 걸렸다.

하루에 몇 미터씩 굴진하는 일반적인 터널공사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구간이었다.

한 발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배수하고, 보강하고, 굴착하고, 또다시 무너지는 지반을 잡아야 했다.

당시 기술자들과 근로자들은 결국 파쇄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산을 우회할 수도 없었다.

댐 건설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이 산을 뚫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쇄대를 돌파했다.

그 뒤에야 자재와 인력을 黒部(쿠로베) 깊숙한 곳으로 대량 수송할 길이 열렸다.

지금 우리가 편안히 버스를 타고 지나는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은 원래 관광시설이 아니다.

黒部ダム(쿠로베댐)을 만들기 위해 먼저 뚫어야 했던 공사용 생명선이었다.


8. 171명의 이름 앞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는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현장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黒四(쿠로욘) 건설공사에서는 모두 17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 黒部ダム(쿠로베댐) 오른쪽에는 그들을 기리는 殉職者慰霊碑(순직자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댐을 바라보며 그 숫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171명.

지금의 산업안전 기준으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희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대의 열악한 장비와 기술, 혹독한 자연조건 속에서 이 거대한 공사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이기도 하다.

거대한 구조물의 뒤에는 언제나 사람의 노동이 있다.

토목기술자로 살아온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黒部ダム(쿠로베댐)의 높이나 길이보다도 171이라는 숫자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9. 黒部記(쿠로베기)

댐 주변을 돌아보다 콘크리트 벽에 설치된 청동판 하나를 보았다.

제목은

黒部記(쿠로베기)

였다.

일본 시인 竹中郁(다케나카 이쿠)이 黒部(쿠로베) 개발의 과정을 시처럼 적어놓은 글이다.

현장에서 직접 읽었던 글이라 여행기에 원문 그대로 남겨두고 싶다.


[黒部記 원문]

黒部記

昭和三十一年五月の勇断
たちまち英智による工事に着手
秀れた自然への礼讃をこめて
関電 黒部の両トンネルは掘り進められた

思いもかけず 同三十二年五月
関電トンネルで大破砕帯に遭遇し
人智人力の限りをつくして半年
未来をひらく鍵は貫かれた

ここへわれらが生みつづけた黒部湖は
澄みわたる大空からの光りを貯え
いずかたへでも電力は
昭和三十五年十一月に湧きはじめた

遠く山野をはしり 川を越え 街をくぐり
人間生活の手となり 足となる電力
その源は全く澄い 讃歌はこれを呼んだ
時にこれ 昭和三十八年六月であった

竹中 郁


[黒部記 해석]

1956년 5월의 용단.

곧바로 지혜를 모아 공사에 착수하고,
뛰어난 자연에 대한 찬미의 마음을 담아
간사이전력의 쿠로베 양쪽 터널은 앞으로 굴진해 나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듬해인 1957년 5월,
간덴터널에서 거대한 파쇄대와 맞닥뜨렸다.

사람의 지혜와 힘을 모두 쏟아부은 반년 끝에
마침내 미래를 여는 열쇠가 관통되었다.

이곳에 우리가 만들어낸 쿠로베호는
맑게 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담고,
그곳에서 태어난 전력은
1960년 11월부터 솟아나기 시작했다.

멀리 산과 들을 달리고,
강을 건너고,
도시 아래를 지나,

사람들의 생활에서 손이 되고 발이 되는 전력.

그 근원이 이토록 맑고 깨끗하니
찬가가 이를 노래한다.

때는 1963년 6월이었다.

― 竹中郁(다케나카 이쿠)


글 가운데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人智人力の限りをつくして半年
未来をひらく鍵は貫かれた’

라는 부분이었다.

사람의 지혜와 힘을 다한 반년 끝에 미래를 여는 열쇠가 관통되었다.

토목기술자인 내게는 단순한 미사여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반년’ 안에 파쇄대와 싸운 기술자와 근로자들의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0. 黒部湖(쿠로베호)

댐을 막으면서 산속에는 거대한 호수가 생겼다.

黒部湖(쿠로베호)다.

해발 약 1,450m의 북알프스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거대한 인공호수다.

맑은 물과 주변의 높은 산, 그리고 거대한 콘크리트댐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은 인공구조물과 자연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댐을 만든 것은 사람이지만 그 물을 채우는 것은 눈과 비이고, 그 주변을 둘러싼 것은 수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산이다.

현장에서 보니 댐 자체만큼이나 이 호수가 인상적이었다.


11. ダム湖百選(댐호수백선) 黒部湖(쿠로베호)

댐 주변 콘크리트 벽에는 작은 명판 하나가 붙어 있었다.

ダム湖百選
黒部湖

(댐호수백선
쿠로베호)

였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길 100선’ 같은 식으로 일본에서도 지역에 사랑받고 가치가 있는 댐 호수를 선정한 제도가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黒部湖(쿠로베호)는 2005년 일본의 ダム湖百選(댐호수백선)에 선정된 65개 호수 가운데 하나다.


[ダム湖百選 선정 취지 원문]

私たちの生活を水害から守り、
用水や電力の供給を行っているダム湖は、
四季を通じて美しい景観を見せたり、
水や自然の学習と上下流交流の場となるなど、
人々にさまざまな恩恵をもたらしているものが多くあります。

ダム湖百選は、
そのような地域に親しまれ、
地域にとってかけがえのないダム湖を選定、顕彰することによって、
より一層地域に親しまれ、
地域の活性化に役立つことを願って認定するものです。


[해석]

우리 생활을 수해로부터 지키고,
용수와 전력을 공급하는 댐 호수 가운데에는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물과 자연을 배우는 장소가 되며,
상류와 하류 지역 사람들이 교류하는 공간이 되는 등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는 곳이 많이 있다.

‘댐호수백선’은 이처럼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고,
그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댐 호수를 선정하고 널리 알림으로써

그 호수가 더욱 지역민의 사랑을 받고,
지역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인증하는 제도이다.


선정 기준도 단순히 풍경만 보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경관,
생태계에 대한 배려,
역사적 가치,
사람과 자연의 교류,
상하류 지역의 교류,
학습장소로서의 이용,
지역 주민의 관심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2005년 전국 165개 댐 호수가 추천되었고 이 가운데 65곳이 선정됐다.

그 하나가 바로 黒部湖(쿠로베호)다.


12. ダム湖百選(댐호수백선)이 소개하는 黒部湖(쿠로베호)

공식 ダム湖百選(댐호수백선) 자료에서는 黒部湖(쿠로베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원문]

黒部湖は、通称「くろよん」の名で全国に親しまれている黒部ダムの貯水池。

建設費には昭和31年当時で513億の巨費が投じられ、
延べ1,000万もの人手により、
実に7年の歳月を経て完成しました。

今では立山黒部アルペンルートの名勝として知られており、
大迫力の放水や、
大自然の中にそびえる巨大建造物としての存在感以外にも、
黒部ダムには数々のエピソードや歴史が詰まっています。


[해석]

쿠로베호는 통칭 ‘쿠로욘’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진 쿠로베댐의 저수지다.

건설에는 1956년 당시 513억 엔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었고,
연인원 1,000만 명에 이르는 인력이 동원되어
무려 7년의 세월 끝에 완성되었다.

오늘날에는 다테야마쿠로베 알펜루트의 명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박력 넘치는 방류와
대자연 속에 우뚝 선 거대한 구조물이라는 존재감뿐만 아니라,

쿠로베댐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가 담겨 있다.


그 글을 읽어보니 역시 黒部湖(쿠로베호)를 단순히 아름다운 호수로만 선정한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자연,
댐이라는 토목구조물,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역사까지 함께 평가받은 곳이었다.


13. 관광객이 지나가는 터널 속에 남은 공사현장

현재 우리가 扇沢(오기사와)와 黒部ダム(쿠로베댐) 사이를 편안하게 이동하는 길은 70년 가까이 전 공사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뚫었던 길이다.

버스는 터널을 아무렇지 않게 달린다.

에어컨이 나오고,
조명도 켜져 있고,
관광객들은 창밖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콘크리트 벽 너머에는 당시 터널 기술자들과 근로자들이 겪었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특히 破砕帯(파쇄대)를 지나며 그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 버스로 몇 초 만에 지나가는 그 짧은 구간을 뚫기 위해 당시 사람들은 7개월 동안 물과 암반을 상대로 싸웠다.

토목이라는 일은 완성되고 나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터널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길 같고,

교량은 원래 강 위에 놓여 있었던 것 같고,

도로는 원래 산을 넘어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먼저 산을 조사했고,
누군가 선을 그었고,
누군가 계산했고,
누군가 발파했고,
누군가는 막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과정을 아는 사람에게 완성된 구조물은 그냥 구조물이 아니다.


14. 『黒部の太陽(쿠로베의 태양)』

이 공사는 일본 사회에서도 워낙 큰 사건이었다.

결국 黒四(쿠로욘) 건설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木本正次(기모토 쇼지)의 논픽션 소설 『黒部の太陽(쿠로베의 태양)』이 발표되었고, 이를 원작으로 1968년 같은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연은 三船敏郎(미후네 도시로)과 石原裕次郎(이시하라 유지로).

감독은 熊井啓(쿠마이 케이)였다.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묘사되는 장면 역시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의 破砕帯(파쇄대) 공사다.

암반이 무너지고 차가운 물이 터널 안으로 쏟아지는 가운데 기술자와 근로자들이 공사를 계속한다.

실제 黒四(쿠로욘) 건설이 그만큼 당시 일본인들에게도 ‘세기의 난공사’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15. 화려한 관광지 뒤에 있는 7년

오늘날 黒部ダム(쿠로베댐)은 너무나 잘 정비된 관광지다.

전망대가 있고,
식당이 있고,
관광방류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알펜루트를 따라온 관광객들은 댐 위를 걷고 黒部湖(쿠로베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이곳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관광지라는 모습 뒤에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이어졌던 7년의 공사현장이 보인다.

길도 없었던 산.

파쇄대.

쏟아지는 지하수.

수많은 터널.

거대한 콘크리트 타설.

그리고 171명의 희생자.

그 모든 시간이 끝난 뒤 지금의 黒部ダム(쿠로베댐)이 남았다.


16. 171명의 희생을 기억하는 殉職者慰霊碑(순직자위령비)

이 거대한 쿠로베댐을 바라보며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바로 이 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쿠로욘 건설공사에서는 모두 171명이 목숨을 잃었다.

쿠로베댐 우안에는 이들을 기리는 殉職者慰霊碑(순직자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에는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여섯 사람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곁에는 공사 중 목숨을 잃은 171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쿠로베댐을 여기까지 돌아보면서 나는 거대한 아치댐의 위용과 발전시설, 북알프스를 뚫고 들어온 터널과 파쇄대를 보며 토목기술의 힘에 감탄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기술과 장비만이 아니었다.

험준한 북알프스의 산속에서 길을 내고, 터널을 뚫고, 물과 암반과 싸우며 직접 공사를 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171명은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토목기술자로 26년을 살아오며 수많은 공사현장을 경험한 나에게 그 숫자는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공사현장에서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의 거대한 토목구조물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높이 186m의 거대한 쿠로베댐을 바라보며 느꼈던 경이로움 뒤에는 그렇게 171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까지 기억할 때 비로소 쿠로베댐의 역사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사 중 목숨을 잃은 171명의 순직자들에게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

17. 토목기술자의 눈으로 바라본 黒部ダム(쿠로베댐)

댐을 떠나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평생 토목현장에서 살아왔다.

설계도면 위에서 선을 그리고,
현장에서 구조물이 실제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수도 없이 보았다.

국도와 고속도로의 설계와 공사현장을 오가며 수많은 도로와 터널, 교량을 직접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그중에는 국내 최초의 해저터널 건설공사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黒部ダム(쿠로베댐)을 보며 단순히

“크다.”

“대단하다.”

라는 감상만 들지는 않았다.

저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고민했을까.

설계자는 밤새 도면을 들여다봤을 것이고,

현장 기술자는 예상하지 못한 지질을 만나 머리를 싸맸을 것이며,

근로자들은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막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것이다.

토목공사는 자연을 상대로 하는 일이다.

도면에서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해도 현장은 그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특히 산과 땅속은 열어보기 전까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것이 터널공사의 무서움이고 토목의 어려움이다.

1950년대의 기술과 장비로 북알프스 한복판에서 이 정도 규모의 사업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같은 토목기술자의 입장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 우리 토목기술자의 위대함이여

나는 黒部ダム(쿠로베댐)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도로를 여행하면서 사람들은 대부분 목적지를 기억한다.

터널을 지나면서 그 터널을 누가 뚫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면서 그 교량을 누가 설계하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댐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까지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것이 어쩌면 토목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완성된 뒤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당연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누군가는 몇 년씩 현장에서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목숨까지 잃었다는 것을.

黒部ダム(쿠로베댐) 역시 그런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일본을 무조건 찬양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기술은 기술대로 평가해야 한다.

1950년대 북알프스의 혹독한 자연 속에서 길을 만들고, 터널을 뚫고, 파쇄대를 돌파하고, 마침내 높이 186m의 거대한 아치댐을 완성한 기술자와 근로자들의 집념에는 같은 토목인으로서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래서 黒部ダム(쿠로베댐) 앞에서 내 마음속에 떠오른 말은 결국 하나였다.

“우리 토목기술자의 위대함이여.”

그리고 한마디를 더 남긴다.

이 댐을 만든 일본의 토목인들과 근로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Translated by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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