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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 앱, 갤럭시폰
안드로이드 앱 강제 자동 업데이트 저만 불편한가요?
ㅠㅠㅠㅠ 다들 잘 쓰고계시는거 같네요..ㅎㅎ

새벽에 일어나니
지멋대로 강제 로그아웃되어 있어, 로그인하려하니
유효한 요청이 아니라고 뻣대고 있다가

좀이따 지가 알아서 로그인이 되더니...

엉망진창 북플이 ...

마니아도 없어지고, 스탬프, 통계, 랭킹.....
이것저것 많이 없어졌네요..
일단 알라딘 1:1 문의에 올렸는데.

그래도 갤탭 태블릿, 아이패드는 강제 업데이트가 안되었네요.

카톡 업데이트 안되게 한 것처럼,, 결사항전의 자세로
지켜야겠어요.

강제 로그아웃 ㅎㅎ ㅎㅎ 갤탭, 아이패드
로그인 안됨. 유효한 요청이 아니랍니다.

현재 2017년산 구형 아이패드만 살아있음.
이놈도 강제 로그아웃되었으나, 희한하게 로그인 됨.ㅋ

일단 업데이트 안하고 알라딘에 민원제출.

지켜봐야겠다.

제2의 트랭글 업데이트.

폰 최신버전 북플도 로그인 안되고 있음. 열받아.

지금, 구버전 다시 깔고 어느 순간 로그인이 됩니다.

아무튼 시스템. 먼가 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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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맑음 2026-08-20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폰 아이폰인데, 제 폰도 그래요. 지금 글자체도 바껴 있어요ㅠ.ㅠ

대장정 2026-08-20 11:10   좋아요 1 | URL
아.. ios도 강제 업뎃을 단행했군요... 이건 업데이트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예요, APKpure라는 앱에서 이전버전 다운받아 깔았는데.... 로그인이 안되요..ㅠㅠㅠㅠ, 지우고 최신버전 깔았는데도 안되요..ㅠㅠㅠㅠ, 패드로쓰고 있습니다.
 
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 ㅣ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타샤의 정원』, 그 이후
― 타샤가 떠난 뒤, 가족이 지키고 자연이 되찾아가는 코기 코티지

※ 이 글에서 다룬 타샤 튜더 사후의 코기 코티지 관리·공개 현황과 버몬트의 진흙철 관련 내용은 2026년 8월 현재 타샤 튜더 가족 공식 홈페이지 ‘Tasha Tudor and Family’, 비영리단체 ‘Tasha Tudor Society’, ‘Green Mountain Club’과 버몬트주 말버러 마을 공식 홈페이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참고 자료

1. Tasha Tudor and Family-Tasha’s Corgi Cottage
https://tashatudorandfamily.com/pages/tashas-corgi-cottage

2. Tasha Tudor Society-FAQs
https://tashatudorsociety.org/faq/

3. Green Mountain Club-Mud Season & Hiking in Vermont
https://www.greenmountainclub.org/hiking/mud-season/

4. Town of Marlboro-How Do I?
https://marlborovt.us/how-do-i/

사진 속 전원생활은 참으로 낭만적이다. 꽃이 흐드러진 정원과 오래된 집,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해지고 금세라도 도시를 떠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1970년대 초반 시골에서 태어나 1980년대를 거쳐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낭만일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살아갈 때는 결코 낭만만 있는 생활이 아니었다.

여름에는 덥고 모기가 들끓었으며, 겨울에는 매섭게 추웠다. 모기를 쫓으려고 쑥부쟁이를 태워 모깃불을 피웠고, 마당에는 두엄 냄새가 퍼졌다. 밥상에는 파리가 한두 마리 날아드는 정도가 아니라 더글더글 달라붙었다. 한 손으로 파리를 휘휘 쫓아가며 다른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이 예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까지도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말 그대로 아사리판이었다.

우리 집은 마을 한가운데 다른 집들과 옹기종기 붙어 있지도 않았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고, 집 오른쪽에는 뒷간이 있었다. 뒷간 뒤로는 곧바로 야산이 이어졌으며 그 산에는 묘지가 몇 기 있었다. 집 왼쪽 가까이에는 이른바 ‘오씨네 공동묘지’까지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밤이 되면 집 둘레가 온통 무덤으로 에워싸인 듯했다.

그런 곳에서 밤중에 똥이 마려우면 뒷간까지 나가는 일이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컴컴한 뒷간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똥통 속에서 손이 불쑥 올라와 “파란 손으로 닦아줄까, 빨간 손으로 닦아줄까?” 하고 물을 것만 같았다. 바람에 나뭇가지만 흔들려도 간이 콩알만 해졌다.

밤중에 똥을 누고 돌아와 소에게 절을 하면 다시는 밤에 똥이 마렵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소에게 절까지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무 효과도 없었다. 다음에도 밤이 되면 어김없이 똥이 마려웠다.

이런 생활을 직접 겪어본 까닭에 『타샤의 정원』 속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그 정원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동과 비용이 필요했을지를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 타샤 튜더가 세상을 떠난 뒤, 그 넓은 정원과 외딴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1. 타샤가 떠난 뒤에도 열렸던 정원

타샤 튜더의 가족은 그가 살아 있던 2005년부터 소규모로 정원 관람을 허용했다. 책과 사진을 통해서만 코기 코티지를 보았던 독자들에게 실제 정원을 둘러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타샤는 2008년 6월 18일, 아흔세 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가족은 곧바로 정원의 문을 닫지 않았다. 정원 공개를 이어갔고, 뒤에는 타샤가 생활하던 코기 코티지 내부까지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 범위를 넓혔다.

그곳은 처음부터 박물관으로 지어진 시설이 아니었다. 타샤가 실제로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음식을 만들고 정원을 가꾸던 개인 주택이었다. 가족이 관람을 허용했다는 것은 집과 정원을 보여주는 일뿐 아니라 방문객을 맞이하고 건물과 정원을 관리하는 책임까지 맡았다는 뜻이었다.

2. 2019년 이후 닫힌 코기 코티지

코기 코티지의 정원 관람은 2019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중단된 뒤 현재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코기 코티지 투어가 무기한 연기되었다고 안내되어 있다.

코기 코티지는 지금도 가족이 소유한 개인 주택이자 사유지이다. 관광지나 공공 정원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의 형편과 사생활, 건물의 안전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방문객을 받을 수는 없다. 가족은 집과 부속 건물에 보수가 필요하고, 가족의 건강과 시간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현재 코기 코티지는 아무 때나 찾아가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정원 관람이 다시 시작된다는 공식 발표도 아직 없다. 홈페이지는 계속 운영되고 있지만, 홈페이지가 운영된다는 사실과 정원이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3. 정원을 돌보는 가족들

현재 코기 코티지와 정원을 관리하는 주체는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타샤 튜더의 가족이다. 다만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한 사람이 정원 전체를 전담하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가족 여러 명이 집과 정원, 타샤의 작품과 관련 사업을 나누어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공개적으로 중심 역할을 하는 사람은 손자 윈즐로 튜더(Winslow Tudor)와 그의 아내 에이미 튜더(Amy Tudor)이다. 원예를 공부한 에이미는 1998년부터 타샤의 정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999년부터 가족 사업에 참여했다.

가족은 잔디를 깎고 잡초와 침입식물을 제거하며 타샤가 심은 식물을 돌본다. 정원에서 씨앗을 받아 보존하고, 일부 씨앗은 가족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한다. 타샤의 책과 카드, 그림을 비롯한 관련 상품을 소개하는 ‘Tasha Tudor and Family’ 홈페이지도 현재 계속 운영되고 있다.

타샤 튜더 소사이어티(Tasha Tudor Society)는 코기 코티지를 직접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단체가 아니라, 타샤의 삶과 작품을 알리고 보존하는 별도의 비영리단체이다. 기존 박물관은 2017년 소사이어티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현재 상설 전시관 대신 온라인 자료와 회원 소식지, 행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4. 자연이 되찾아가는 ‘비밀의 정원’

현재의 정원이 『타샤의 정원』에 실린 사진 속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타샤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정원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가족에게 전했다고 한다.

가족은 타샤가 남긴 정원을 보존하면서도 자연의 변화를 완전히 막으려 하지는 않는다. 다화장미와 마늘냉이 같은 침입식물이 화단 전체를 뒤덮지 못하도록 제거하고, 타샤가 심은 작약과 붓꽃, 양귀비를 돌본다. 접시꽃 어린 모종에는 철망을 씌워 야생동물이 뜯어 먹지 못하도록 보호한다.

그 사이 정원은 새와 야생동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여우는 헛간 아래에서 새끼를 낳고, 호저와 밍크·피셔·너구리를 비롯한 여러 동물이 숲과 정원을 오간다. 수많은 새가 나무와 덤불 속에 둥지를 튼다.

가족은 지금의 코기 코티지가 예전보다 더욱 ‘비밀의 정원’에 가까워졌다고 표현한다. 타샤가 심은 꽃과 가족이 돌보는 화단, 스스로 자리를 넓혀가는 풀과 나무가 한 공간에서 섞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원은 타샤가 완성해 놓은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정원이라기보다, 가족의 관리와 자연의 변화가 함께 진행되는 정원이다.

5. 지금도 계속되는 버몬트의 진흙철

『타샤의 정원』에는 4월과 5월에 눈이 녹으면 코기 코티지로 이어지는 길이 진흙탕이 되어 배달 차량조차 들어오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지금은 도로가 좋아져 그런 불편이 사라졌을까.

버몬트에는 지금도 ‘머드 시즌(Mud Season)’, 곧 진흙철이 있다. 대체로 3월 말이나 4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이어진다. 봄이 되어 지표면은 녹지만 땅속은 여전히 얼어 있어 눈 녹은 물과 빗물이 지하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 차량이 다니면 비포장도로에 깊은 바퀴 자국이 생기고 길 전체가 진흙탕으로 변한다.

코기 코티지가 있는 말버러에서는 지금도 진흙철의 도로 문제가 반복된다. 말버러 마을 공식 홈페이지는 네 명의 도로관리 인력이 약 65마일의 도로를 맡고 있으며, 진흙철에는 가장 심한 진창 구간이 어디인지 대체로 파악하고 현재 도로 상태에 관한 주민들의 제보를 받는다고 안내한다.

따라서 타샤가 살던 시절 책에 묘사된 진흙철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코기 코티지로 들어가는 사유지 진입로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지금도 4월과 5월에 배달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지는 공개 자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확인된 사실처럼 단정할 수 없다.

사진에서는 숲속으로 이어지는 흙길도 낭만적인 풍경이 된다. 그러나 그 길에서 실제로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식료품과 우편물, 난방 재료와 수리 장비가 오가는 생활도로이다. 길이 진흙탕이 되면 불편한 정도를 넘어 일상생활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6.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것

타샤의 전원생활은 누구나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소박한 시골살이와는 거리가 있었다. 넓은 토지와 작가로서 거둔 성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런 바탕이 있었다고 해도 그 정원과 집을 다음 세대가 계속 보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정원에서는 해마다 풀이 자라고 나무가 늙는다. 침입식물이 번지기도 하고, 야생동물이 어린 모종을 먹기도 한다. 집과 온실, 헛간 같은 건물은 비와 눈을 맞으며 낡아간다. 가족은 코기 코티지의 삼나무 지붕널 대부분을 새로 갈았지만, 아직도 손볼 곳이 많다고 밝히고 있다.

정원을 일반에 개방하려면 꽃과 나무만 돌보면 되는 것도 아니다. 건물의 안전을 점검하고 방문객의 동선을 관리해야 하며, 가족의 생활과 사생활도 보호해야 한다. 집과 정원뿐 아니라 진입로와 부속 건물까지 함께 관리해야 한다.

우리가 책과 사진에서 보는 아름다운 정원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꽃 뒤에는 흙을 갈고 풀을 뽑는 손이 있으며, 오래된 집 뒤에는 지붕과 벽을 고치는 노동과 비용이 있다. 타샤의 정원을 보존하는 가족들도 바로 그 현실을 감당하고 있다.

7. 두 번째 계절을 지나가는 정원

한 장의 사진은 정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골라 보여준다. 꽃이 흐드러진 화단과 초록빛 풀밭, 고풍스러운 집과 코기들이 어우러진 장면을 보고 있으면 그곳의 추위와 진흙, 벌레와 수리비까지 떠올리기는 어렵다.

내가 살았던 시골집도 지금 사진으로 보면 그리운 풍경이다. 흙담 밑에 핀 꽃과 우물, 눈 덮인 지붕과 오래된 느티나무가 먼저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살던 때에는 무더위와 추위, 모기와 파리, 두엄 냄새가 함께 있었다. 한밤중에 묘지 옆 뒷간까지 나가야 했던 무서움도 시골생활의 일부였다.

그렇다고 전원생활의 아름다움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아름다움만 보고 실제 생활의 수고와 불편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고된 생활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공간 안에 함께 존재한다.

지금의 코기 코티지는 타샤가 살던 시절의 모습으로 멈춰 있지 않다. 일반 관람은 중단되었지만 가족은 집과 정원을 관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 숲과 야생동물도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그곳은 타샤를 기념하기 위해 고정된 전시물이 아니라, 여전히 가족의 손길과 자연의 변화 속에 놓인 사적인 집이자 정원이다.

타샤가 떠났다고 해서 정원의 시간이 끝난 것은 아니다. 『타샤의 정원』 이후에는 가족의 손과 자연의 시간이 함께 써 내려가는 두 번째 계절이 이어지고 있다.

자료 조사·정리: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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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 ㅣ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이야기 6] 『타샤의 정원』과 흙담 밑 나의 작은 화단
― 사라진 옛집에 다시 피어나는 꽃들

1.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타샤 튜더

타샤 튜더(Tasha Tudor, 1915~2008, 향년 92세)는 미국의 동화작가이자 그림책 화가이다. 그녀는 보스턴의 유복하고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스탈링 버지스(William Starling Burgess)는 선박과 항공기를 설계한 기술자였고, 어머니 로저먼드 튜더 버지스(Rosamond Tudor Burgess)는 초상화가였다. 증조부 프레더릭 튜더(Frederic Tudor)는 미국의 얼음 무역으로 큰 부를 이루어 ‘얼음왕’이라 불린 사업가였다.

그녀의 출생 당시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스탈링 버지스(Starling Burgess)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나타샤(Natasha)를 좋아해 이름을 나타샤로 바꾸었고, 그것이 줄어 타샤(Tasha)가 되었다. 태어날 때의 성은 버지스(Burgess)였으며, 훗날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인 튜더(Tudor)를 자신의 성으로 택해 법적으로 타샤 튜더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유모의 보살핌을 받았고, 집안은 보스턴 상류사회의 유력 인사들과 교류했다. 타샤는 태생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홉 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에는 코네티컷주 레딩에 사는 가족 친구의 집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자연과 가까이 생활하며 농사와 가축 돌보기, 요리와 바느질 같은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타샤가 훗날 선택한 소박한 생활을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낸 삶으로 보기는 어렵다. 실을 잣고 옷을 만들며 가축을 기르고 장작 난로를 사용한 생활은 경제적 궁핍의 결과가 아니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타샤가 자신의 취향과 신념에 따라 선택한 삶이었다.


2. 결혼과 가족, 그림책 작가로 이룬 성공

타샤는 1938년(22세)에 토머스 L. 맥크리디 주니어(Thomas L. McCready Jr.)와 결혼해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가족은 1945년(29세)에 뉴햄프셔의 오래된 농가로 옮겨 생활했으며, 그곳의 가족과 가축, 정원과 들판은 타샤의 글과 그림에 자주 등장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61년(45~46세)에 끝났고, 이후 앨런 존 우즈(Allan John Woods)와 재혼했지만 이 결혼도 1966년(50~51세)에 끝났다. 첫 번째 결혼이 끝난 뒤 자녀들은 성을 맥크리디에서 튜더로 바꾸었다. 훗날 버몬트의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어준 세스 튜더(Seth Tudor)도 네 자녀 가운데 한 명이었다.

타샤는 결혼한 해인 1938년(22~23세)에 첫 그림책 『호박 달빛』을 출간한 뒤 평생 100권이 넘는 책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1945년(29세)에 『마더 구스』로 첫 번째 칼데콧 아너를 받았고, 1957년(41세)에는 『1은 하나』로 두 번째 칼데콧 아너를 받았다. 그림책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카드와 달력, 포스터에도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타샤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으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작가이기도 했다. 1971년(55~56세)에는 직접 쓰고 그린 『코기빌 페어』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당시 자녀들은 모두 성장해 독립한 상태였고, 이 책의 성공은 타샤가 오랫동안 바라던 버몬트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3. 작가로 번 돈으로 마련한 30만 평의 땅

타샤가 버몬트에서 소유한 넓은 땅은 집안에서 그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었다. 그는 오랜 작가 생활과 『코기빌 페어』의 성공으로 마련한 수입을 바탕으로 1971년 무렵(55~56세), 버몬트 남동부의 외딴 산림을 구입했다.

아들 세스는 그 땅의 일부를 개간하고 1750년경에 지어진 뉴햄프셔 농가를 본떠 집을 지었다. 타샤는 그 집을 ‘코기 코티지(Corgi Cottage)’라 부르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타샤는 흔히 ‘30만 평의 정원을 가꾼 사람’으로 소개된다. 나도 처음에는 약 30만 평에 이르는 땅 전체가 정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약 250에이커, 우리 면적으로 약 30만 평은 타샤가 소유한 땅 전체의 면적이었다.

약 30만 평의 땅을 모두 농장으로 경작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손대지 않은 자연림이었고, 일부 목초지에서는 염소를 길렀다. 꽃과 나무를 집중적으로 가꾼 주요 정원은 집과 헛간 둘레의 약 2~3에이커였다. 우리 면적으로 환산하면 대략 2,400~3,700평이니, 그것만으로도 개인이 가꾼 정원으로는 매우 넓은 규모였다.

타샤는 그곳에서 19세기 뉴잉글랜드풍의 옷을 입고 실을 잣았으며, 염소와 닭을 기르고 정원을 돌보았다. 타샤의 정원은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한 배경과 성공한 작가로서 마련한 경제적 기반, 넓은 땅을 구입할 수 있었던 여건, 그리고 오랜 세월 직접 꽃과 나무를 돌본 노동이 함께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4. 소박한 시골 할머니인 줄 알았지만

처음 『타샤의 정원』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타샤를 시골의 조그마한 정원에서 꽃을 가꾸며 살아가는 소박한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책에 담긴 낡은 집과 골동품 가구, 손수 지은 옷과 정원의 꽃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거리가 먼 검소한 생활처럼 보였다.

그러나 타샤의 생애와 정원의 실제 규모를 자세히 알고 나니 처음의 인상만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그는 보스턴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작가로 성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뒤 약 30만 평에 이르는 버몬트의 땅을 구입했다. 그 대부분이 숲이고 실제 정원은 그보다 작았다고 해도, 개인이 그만한 토지를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소박한 시골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한 ‘땅부자’였던 셈이다. 물론 넓은 땅을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타샤의 노동과 삶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전원생활을 이해하려면 꽃과 동물, 낡은 집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장면뿐 아니라 그 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경제적 조건도 함께 바라봐야 한다.


5.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은 아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받고 힘든 직장생활과 고단한 현실에 지칠 때 전원생활을 꿈꾼다. 꽃이 피는 정원을 가꾸고, 직접 기른 재료로 음식을 만들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나 역시 처음에는 『타샤의 정원』과 같은 책을 읽으며 잠시 마음을 달래고 위안을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전원생활은 책이나 사진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평온하고 낭만적인 일만은 아니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며 농사를 많이 지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조금이나마 맛보았다.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어 거두는 일은 날씨와 계절에 맞춰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고된 노동이다.

전원생활에는 노동뿐 아니라 많은 돈도 필요하다. 땅과 집을 마련해야 하고, 넓은 정원을 유지하려면 시간과 비용을 계속 들여야 한다. 잡초를 뽑고 물을 주는 일부터 집과 울타리를 보수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까지 어느 하나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타샤의 삶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활방식은 아니다. 충분한 경제적 기반과 넓은 땅, 오랜 노동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삶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삶의 물질적 조건까지 외면한 채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타샤의 삶과 정원이 지닌 가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타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경제적 여건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꿈꾸었던 생활을 실제로 만들었고, 넓은 정원을 평생 직접 돌보았다. 중요한 것은 타샤의 삶을 그대로 흉내 내는 일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함께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경제적 기반과 노동까지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


6. 『타샤의 정원』이 불러낸 기억

정원 작가 토바 마틴(Tovah Martin)과 사진가 리처드 W. 브라운(Richard W. Brown)은 타샤의 생활과 정원의 사계절을 『타샤의 정원』에 담았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수선화와 봄의 튤립, 여름의 장미와 허브, 가을의 정취와 겨울을 준비하는 모습까지 펼쳐진다. 꽃과 나무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정원과 더불어 살아가는 타샤의 일상과 생각도 함께 담은 책이다.

타샤는 정해진 설계도를 그려놓고 식물을 심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마음 가는 대로 어울려 심었다. 아흔 살이 넘어서도 장미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던 타샤에게 가드닝은 평생 배우며 누리는 ‘기쁨의 샘’이었다.

『타샤의 정원』을 읽는 동안 내가 태어나 스무 살까지 살았던 시골집과 흙담 밑의 작은 화단이 떠올랐다. 정원이라는 말도, 가드닝이라는 말도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들과 산에서 마음에 드는 풀과 나무를 가져다 심고 그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를 기다리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7.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

사진 속 집은 내가 태어나 스무 살까지 살았던 시골집이다. 집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찍어둔 사진 속에서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낮은 지붕을 맞댄 집들이 흙담 안에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다. 흙과 돌로 쌓은 낮은 담이 마당 앞을 길게 두르고, 담 뒤로는 집과 집 뒤편의 나무들이 솟아 있다. 좁은 마을길은 집 옆을 지나 대문을 향해 굽어 올라가며, 대문 곁에는 집보다 훨씬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굵은 가지를 사방으로 펼치고 있다.

겨울에 찍은 사진 속 나의 시골집에는 지붕과 마을길과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흰 눈만 보인다. 그러나 내 기억 속 옛집은 흰 눈에 잠긴 모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계절이 바뀌면 흙담 밑에서는 꽃이 피고, 담쟁이는 담을 뒤덮으며, 집 둘레의 나무에서는 여러 열매가 익는다.


8. 흙담 밑에 있었던 작은 화단

시골집 마당 안쪽, 흙담 아래에는 담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작은 화단이 하나 있었다. 정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만큼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곳에 여러 풀과 나무를 가져다 심으며 제법 정성을 들였다.

1980년대의 일이니 꽃집이나 묘목상에서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사다 심을 형편도 아니었다. 화단에 심은 것들은 대부분 들판과 길가에서 뽑아 온 들꽃이었다. 들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꽃이 보이면 뿌리째 뽑아 화단에 옮겨 심었고, 산에서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캐다 심기도 했다.

우리가 노간지나무라고 부르던 나무도 산에서 캐다 심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나무를 트리로 꾸며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허락 없이 산에서 나무를 캐오는 것은 처벌받을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 어린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살아 있는 나무를 집으로 옮겨 크리스마스트리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에 제법 진지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일이었고, 그때의 나는 그것을 ‘가꾸는 일’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저 마음에 드는 풀과 나무를 옮겨 심고, 그것이 살아남아 새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지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9. 해당화와 백일홍, 분꽃과 봉숭아

우리 집 화단에 들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당화와 백일홍뿐 아니라 분꽃과 봉숭아도 피어 있었다. 분꽃과 봉숭아는 그 시절 시골집 흙담 밑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꽃들이었다.

화단 앞쪽에는 낮은 돌을 줄지어 놓아 경계를 만들었고, 그 돌 앞에는 키 작은 채송화가 알록달록한 꽃을 피우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름난 꽃이나 귀한 나무를 계획적으로 배치한 화단은 아니었지만, 계절이 되면 저마다의 자리에서 꽃이 피었다.

흙담에는 담쟁이덩굴이 칭칭 감겨 올라갔다. 봄이면 연둣빛 새잎이 돋았고, 여름이면 짙은 초록빛 잎이 흙담을 거의 보이지 않게 온통 뒤덮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잎은 붉은빛과 갈색빛을 띠다가 서서히 말라 떨어졌다. 흙담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를 덮은 담쟁이의 빛깔은 계절마다 달라졌다.

그곳은 들과 산에서 데려온 식물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 살펴보던 어린아이의 실험장이었고, 계절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10. 한여름에도 손이 얼 것 같았던 우물

화단의 왼쪽 끝 가까이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 우물에서는 한여름에도 손이 얼 것처럼 차가운 물이 나왔다. 무더운 날에도 물에 손을 담그면 금세 얼얼해질 만큼 차가웠다. 한여름에 그 우물물로 등목을 하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대전에 사시던 고모님께서 가끔 시골에 오시면 그 우물물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다.

화단 오른쪽에는 장독 하나를 땅에 묻어두었다. 그 장독은 겨울에만 사용했다. 동치미를 담아두었다가 겨울 내내 뚜껑을 열고 꺼내 먹었다. 한여름의 차가운 우물물과 겨울의 동치미는 꽃과 나무와는 또 다른 옛집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11. 집 둘레를 채웠던 과실나무와 장독대

집 둘레에는 여러 과실나무가 있었다. 집 뒤에는 밤나무가 세 그루 정도 있었고 그 곁에는 감나무도 자랐다. 옛날식 푸세식이라 냄새가 지독했던 뒷간 옆에는 대추나무와 단감나무, 벚나무가 있었으며, 흙담 바깥에는 앵두나무가 자랐다.

뒤뜰에는 포도나무를 세 그루 정도 심어놓았고, 간장과 고추장, 된장 등이 가득 담긴 장독들이 놓인 장독대도 있었다. 포도나무는 그늘진 곳에 있어 열매가 제대로 달리지 않았다. 세 그루나 있었지만 포도를 따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 포도나무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포도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여름이면 담 밖의 앵두나무에 빨간 앵두가 열렸다. 흙담 너머로 뻗어온 가지에서 잘 익은 앵두를 골라 따 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그러나 나무가 더 자라면 뿌리 때문에 흙담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걱정이 생겨 나중에는 베어냈다.

뒷간 옆의 단감나무는 몇 년 동안 땡감나무인 줄만 알았다. 열매가 달려도 당연히 떫을 것이라고 생각해 따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 나무의 감을 혼자 따 먹고 있는 모습을 딱 보았다. 그때서야 땡감인 줄 알았던 감이 달고 아삭한 단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는 이미 그 맛을 알고 있었는데, 나는 몇 년 동안 땡감인 줄만 알고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몹시 억울했다.

그래도 시골집에서 자란 덕분에 대추와 감, 밤과 단감, 앵두와 버찌를 따 먹으며 살았다. 특히 버찌를 정신없이 따 먹고 나면 입술이 꺼멓게 물들곤 했다.

집 둘레의 나무들이 모두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흙담 밖의 앵두나무는 담이 무너질 것을 걱정해 베어냈고, 뒷간 옆의 대추나무와 벚나무는 죽은 뒤 베어버렸다.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질 때마다 그 나무가 만들던 그늘과 꽃, 해마다 내어주던 열매도 함께 사라졌다.


12. 대문 옆의 느티나무 보호수

대문 옆에는 집의 다른 나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낮은 흙담과 지붕보다 훨씬 높이 솟아 굵은 가지를 사방으로 펼친 나무였다. 우리 집에서 심어 가꾼 나무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며 마을의 세월을 함께 견뎌온 보호수였다.

느티나무 곁의 보호수 비석에는 1991년 9월 25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지정 당시 기록은 수종 느티나무, 수령 120년, 수고 15m, 나무 둘레 2.8m이다. 비석 아래에는 “조상의 얼이 깃들인 이 나무를 보호합시다”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다.

1991년 당시 추정 수령 120년에 그 뒤로 흐른 세월을 더하면, 2026년 현재 수령은 단순 환산으로 약 155년이 된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때에도 느티나무는 이미 집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나무였다. 우리 집에 딸린 나무 한 그루라기보다 집과 마을의 시간을 함께 지켜본 존재에 가까웠다.


13. 사진 속에서 다시 돌아오는 계절

내게 남은 옛집 사진은 눈 내리던 겨울의 한 장면뿐이다. 그러나 나는 사진에 미처 담기지 않은 공간들의 위치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한다. 흙담 안쪽 어디에 화단이 있었는지, 우물과 땅에 묻은 장독은 어디에 있었는지, 집 뒤와 뒷간 옆, 담 밖에는 어떤 나무가 자랐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사진을 바라보면 눈 덮인 겨울 풍경 위로 다른 계절이 겹쳐진다. 흑백에 가까운 집과 담에 꽃과 잎의 색이 돌아오고, 한여름의 차가운 우물물과 겨울 동치미의 맛까지 함께 떠오른다. 사진 한 장은 그렇게 내가 태어나 성장한 집과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되짚어가는 기억의 지도가 된다.


14. 타샤의 정원과 나의 작은 화단

타샤의 정원과 내 어린 시절의 화단은 규모도, 만들어진 조건도 달랐다. 그 차이를 알고 나니 두 공간을 같은 것으로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식물을 가까이에 심고, 그것이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기를 기다리는 기쁨은 서로 닮아 있었다.

『타샤의 정원』이 내게 건네준 것은 타샤의 전원생활을 그대로 따라 살고 싶다는 환상이 아니었다. 이 책은 오래전에 사라진 옛집과 흙담 밑의 작은 화단,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계절을 다시 불러내 주었다.

그 시절의 생활은 힘들었고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가난 그 자체가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형편 속에서도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찾아 옮겨 심고 작은 기쁨을 만들었던 시간은 지금도 아련하게 남아 있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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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8-13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그나저나 정원이 3천평이라니 한국인은 꿈도 꿔보지 못할 스케일이네요.

대장정 2026-08-13 10:17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입니다.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 - 매뉴얼도 알려주지 않는
니콜 S.영 지음, 공민희 옮김, 윤우석 감수 / 멘토르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독서사진에세이]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와 함께한 나의 첫 DSLR
― 아이들의 성장과 남도 답사, 그리고 첫 해외여행까지


필름카메라와 작은 디지털카메라들을 거쳐 처음으로 큰맘 먹고 장만한 DSLR. 아이들과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따라 남도를 답사했으며, 마흔을 넘겨 처음 떠난 해외여행까지 함께했다. 지금 옛 사진을 다시 보면 촬영 장소가 어디였는지 한참 기억을 더듬어야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EOS 60D에는 우리 가족의 한 시절과 내가 여행하고 답사하는 방식을 만들어가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들어가며 ― 필름카메라에서 DSLR까지

내 카메라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처음에는 삼성 필름카메라가 있었다. 정확한 모델명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

지금처럼 셔터를 누르고 곧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필름 한 통을 다 찍어 사진관에 맡기고, 현상과 인화를 거쳐 사진을 받아봐야 제대로 찍혔는지 알 수 있었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필름값과 현상비, 인화비가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디지털카메라의 시대가 찾아왔다.

Canon PowerShot A70도 한동안 사용했다. 기억으로는 이 카메라를 가족사진용으로 샀다기보다 사무실에서 공사현장에 가지고 다니며 현장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마련했던 것 같다. 공사현장을 다니다 보면 글과 도면만으로는 남길 수 없는 그 순간의 상태를 사진으로 기록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이들이 정말 똥강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많이 담아준 카메라 가운데 하나는 Sony Cyber-shot DSC-W1이었다. 지금 그 시절 사진을 들여다보면 몇백만 화소였는지, 렌즈가 어떠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조그만 아이들의 얼굴과 몸짓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돌이켜보면 내게 카메라는 일찍부터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족의 시간을 남기는 도구이자, 내가 직접 본 현장을 기록하는 도구였다.

2008년 11월에는 Canon DIGITAL IXUS 870 IS도 구입했다. 작고 가벼워 어디든 들고 다니기 편한 컴팩트 디지털카메라였다.

그 사이 잠깐 캠코더에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

첫째가 태어나기 전인 2003년 무렵이었다. 아이가 생기면 동영상도 많이 찍게 될 것 같아 당시 형편에는 조금 무리해서 캠코더를 할부로 샀다.

그런데 캠코더를 사 온 바로 그날 새벽이었다.

아내가 새로 산 캠코더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살림살이를 생각하면 그 물건에 들어간 돈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결국 캠코더를 반품했다.

지금 생각하면 반납하길 잘했다. 이후 디지털카메라가 사진뿐 아니라 동영상 촬영까지 상당 부분 해결해 주었고, 나중에는 스마트폰까지 그 역할을 떠맡았다. 내 캠코더 생활은 사 온 날 새벽에 사실상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크게 아쉬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메라에 대한 욕심은 끝나지 않았다.

2010년 11월.

나는 큰맘을 먹고 Canon EOS 60D를 장만했다.


1. 내 손을 거쳐 간 카메라들

돌이켜보면 내 손을 거쳐 간 카메라가 제법 많다.

삼성 필름카메라로 아내와의 연애시절을 찍었고, Canon PowerShot A70으로는 공사현장의 모습을 기록했다. Sony Cyber-shot DSC-W1은 똥강아지 같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많이 남겨주었고, Canon DIGITAL IXUS 870 IS는 가족의 일상을 부담 없이 담아주었다.

그리고 2010년 11월 EOS 60D를 구입하면서 작은 디지털카메라에서 본격적인 렌즈교환식 DSLR로 넘어갔다.

그 뒤 공사현장에서 좀 더 작고 간편하게 사용할 카메라로 Sony Cyber-shot DSC-RX100 II도 마련했다. 작은 몸집에 비해 화질이 좋았고 활용도도 높아 지금도 참 잘 만든 카메라로 기억한다. 이 카메라는 나중에 딸에게 넘겨주었다.

2016년에는 EOS 5D Mark IV, 이른바 오막포를 샀다.

그때부터 내 카메라의 무대는 국내 가족여행과 답사를 넘어 캐나다와 미국, 일본과 중국 등 더 넓은 세계로 본격적으로 확장되었다.

작은 카메라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지 2021년에는 Sony Cyber-shot DSC-RX100 VII도 다시 샀다.

2024년 6월에는 DSLR에서 미러리스로 넘어가 EOS R6 Mark II를 장만했고, 2026년 3월에는 다시 EOS R6 Mark III로 바꾸었다.

정리하면 내 카메라의 시간은 대략 이렇게 흘렀다.

삼성 필름카메라
→ Canon PowerShot A70
→ Sony Cyber-shot DSC-W1
→ Canon DIGITAL IXUS 870 IS
→ Canon EOS 60D
→ Sony Cyber-shot DSC-RX100 II
→ Canon EOS 5D Mark IV
→ Sony Cyber-shot DSC-RX100 VII
→ Canon EOS R6 Mark II
→ Canon EOS R6 Mark III

정확한 구입 시점이 희미해진 오래된 디지털카메라도 있지만, 지금 옛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면 기종보다 더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그 카메라를 사용하던 시절의 내 삶이다.

그리고 그 변천사에서 EOS 60D는 꽤 중요한 자리에 서 있다.

60D부터 사진의 범위가 가족의 일상에서 여행과 답사의 기록으로 본격적으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2. 처음 손에 넣은 본격 DSLR

작은 디지털카메라들을 사용하다 EOS 60D를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느낌은 지금도 남아 있다.

크고 묵직한 몸체부터 달랐다.

렌즈를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것도 새로웠고, 셔터를 누를 때 들리는 소리부터 작은 디지털카메라와는 전혀 달랐다.

당시 내 눈에는 거의 신의 병기였다.

아이들을 찍어도 사진이 달라 보였다. 작은 디지털카메라로 찍던 사진보다 피사체가 훨씬 또렷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고, 배경이 부드럽게 흐려지는 사진을 보면서 DSLR이라는 물건의 매력을 처음 제대로 느꼈다.

카메라를 사고 나서는 렌즈에도 욕심이 생겼다.

지금도 15년이 훌쩍 넘은 당시의 렌즈 구매 메모가 남아 있다.

시그마 18-250mm, 탐론 18-270mm, 캐논 EF-S 18-200mm 등 여러 렌즈를 적어놓고 무게와 가격까지 비교해 놓았다. 1번 시그마 렌즈에는 동그라미를 치고 ‘구입’이라고까지 적어놓았지만 실제로 구입한 것은 그 렌즈가 아니었다.

실제로 산 것은 메모의 4번에 적혀 있던 Tamron AF 28-300mm XR Di VC 계열의 고배율 줌렌즈였다.

이 렌즈는 훗날 DSLR을 쓰는 막내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지금 그 메모를 다시 보면 15년이 넘도록 크게 달라지지 않은 내 여행사진의 습관도 보인다.

당시에도 여러 렌즈를 갈아 끼우기보다 광각에서 망원까지 한 렌즈로 해결할 수 있는 28-300mm를 골랐다. 여행에서는 사진 한 장을 위해 멈춰 서서 렌즈를 바꾸는 것보다 계속 움직이며 눈앞에 나타나는 장면을 놓치지 않는 쪽이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 R6 Mark III에 Canon RF24-105mm F4 L IS USM을 주로 물려 다니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다.

화각은 달라졌고 카메라도 몇 세대나 바뀌었지만, 여행에서는 하나의 렌즈로 최대한 많은 장면을 담고 싶어 하는 내 방식은 60D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사면 나는 또 책을 샀다.

그때 함께 읽었던 책이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였다.


3.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 ― DSLR을 처음 배우다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쓸 때는 복잡하게 생각할 일이 많지 않았다.

카메라를 켜고 화면을 보고 셔터를 누르면 됐다.

그런데 DSLR은 달랐다.

조리개가 나오고, 셔터속도가 나오고, ISO가 나오고, 노출과 측광, 초점 방식까지 알아야 할 것이 갑자기 많아졌다.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는 그런 내게 DSLR이라는 새로운 카메라를 이해하게 해준 책이었다.

카메라에는 왜 이렇게 버튼이 많은지, 각각의 기능은 무엇인지, 조리개와 셔터속도를 바꾸면 사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하나씩 읽어 나갔다.

책을 읽을 때에는 이해한 것 같았다.

며칠 지나면 또 헷갈렸다.

그래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적어도 카메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필요할 때 어떤 기능을 찾아봐야 하는지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훗날 『캐논 EOS 5D Mark IV 완벽가이드』와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를 읽게 되었지만, 내게 카메라 공부라는 것을 처음 본격적으로 시켜준 책은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였다.


4. 아이들과 함께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EOS 60D와 함께한 시간에는 아이들의 성장기가 그대로 들어 있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던 시절도 아니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국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여행에는 거의 늘 60D가 따라다녔다.

사진 속 아이들도 조금씩 자랐다.

여행지에서 뛰어다니고, 절집 마당에 서 있고, 산길을 걷고, 바닷가에서 장난치는 모습이 차곡차곡 남았다.

그래서 지금 60D로 찍은 옛 사진들을 보면 풍경보다 아이들부터 보게 된다.

“야, 이때는 니가 이렇게 쪼끄맸었구나.”

카메라는 그대로였지만 사진 속 아이들은 계속 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EOS 60D는 내게 단순한 첫 DSLR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시간을 오랫동안 바라본 카메라 가운데 하나다.


5. 유홍준의 답사기를 들고 남도로

그 시절 국내 가족여행의 또 하나의 중심에는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있었다.

책을 읽고 나면 책 속에 나온 장소를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기에 나온 길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남도 쪽을 참 많이 다녔다.

강진은 세 번이나 찾아갔다.

강진의 유명한 한식집 해태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도 영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오래전 남도 여행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강진을 지나 장흥으로, 다시 해남으로 내려갔다.

해남에서는 두륜산과 대흥사를 찾았다.

대흥사 입구의 유선관도 참 기억에 남는다.

두륜산 아래 오래된 절집을 찾아가고, 그 앞의 옛 한옥에서 머물며 아이들과 남도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장소 하나하나보다 그곳을 찾아가던 길과 함께했던 가족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당시의 여행은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는 가족여행이면서 동시에 내 답사여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책에서 읽은 장소를 직접 찾아간다.

그곳을 걷는다.

문화유산을 보고 주변의 산과 마을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진으로 남긴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 책을 펼쳐보고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다시 생각하고, 책과 자료를 찾아보고, 사진 속에 담긴 장소를 다시 이해하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여행을 하는 방식이 그 무렵부터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오막포를 들고 세계 곳곳의 역사유적과 자연을 찾아다니기 훨씬 전, 그 출발점에는 아이들과 남도를 돌아다니던 EOS 60D가 있었다.


6. 사진은 남았는데 여기가 어디더라

60D로 찍은 옛 사진을 지금 다시 들여다볼 때 가장 아쉬운 점도 하나 있다.

위치정보다.

EOS 60D 바디 자체에는 촬영 위치를 자동으로 기록해 주는 GPS 기능이 없었다.

당시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강진에서 찍으면 강진 사진이고, 해남에서 찍으면 해남 사진이니 당연히 나중에도 기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문제가 생겼다.

사진 한 장을 연다.

산도 있고 오래된 절도 있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한참을 들여다본다.

“강진인가? 장흥인가? 해남인가?”

겁나게 생각해야 한다.

사진은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사람의 기억은 그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처럼 위치정보까지 사진에 함께 남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래서 장소를 알아내려고 오래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런데 화면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정작 장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그때의 어린 아이들과 아내의 모습이다.

위치정보가 없어서 불편한 것은 분명하지만, 오래된 사진을 그렇게 한 장 한 장 다시 들여다보는 동안 잊고 있던 가족의 모습까지 함께 되살아난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위치정보는 남아 있는 편이 낫다.

“여기가 어디여?” 하고 매번 머리를 쥐어짜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7. 2016년 2월, 마흔을 넘겨 처음 국경을 넘다

2016년 2월.

EOS 60D와 함께 내 여행에서 중요한 일이 하나 생겼다.

마흔을 넘겨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난 것이다.

아내와 두 아이가 함께였다.

목적지는 일본 오사카와 교토였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첫 해외여행이니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은 빠질 수 없었다. 우리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바로 앞의 유니버설 포트 호텔에서 4박을 했다.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며 신이 났고, 나는 그 모습을 60D에 부지런히 담았다.

하지만 첫 해외여행에서 내 눈을 더 오래 붙잡은 곳은 교토였다.


8. 처음 만난 교토 ― 청수사에서 아라시야마까지

교토에서 가장 먼저 기억에 남은 곳 가운데 하나가 청수사였다.

오토와산 자락에 자리한 청수사에 올라 본당 앞으로 돌출된 넓은 목조 무대에 서니 교토의 풍경이 아래로 펼쳐졌다.

사진과 책에서 수없이 보았던 바로 그 ‘청수의 무대’였다.

한국에서 책으로만 보던 오래된 일본의 사찰에 내가 직접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웠다. 단순히 유명한 절 하나를 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사람들이 찾아왔던 장소의 공간감과 주변의 산세, 그곳에서 바라보는 교토를 처음 내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청수사를 내려오면서는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걸었다.

돌계단과 오래된 건물들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청수사 관람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교토의 옛 거리 속으로 이어졌다.

마루야마공원을 지나 쇼렌인과 지온인도 찾았다.

지금 돌아보면 첫 해외여행부터 절과 오래된 거리를 참 열심히도 찾아다녔다.

그리고 아라시야마로 향했다.

도게츠교를 건너며 강과 산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바라보고, 양쪽으로 높게 솟은 대나무가 길을 감싸는 치쿠린을 걸었다. 덴류지도 찾아가 그곳의 정원과 오래된 공간을 둘러보았다.

아라시야마는 당시에도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지금은 도게츠교와 치쿠린을 찾아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교토의 대표 명소가 되었다.

2016년의 나는 그저 눈앞에 펼쳐진 교토가 새로웠다.

청수사의 무대에 서보고,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걷고, 아라시야마의 대나무숲 속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여행은 거듭될수록 보는 눈을 조금씩 바꾸어놓았다.


9. 9년 뒤 다시 찾은 교토역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25년 1월.

나고야 여행 중 나는 다시 교토역에 섰다.

이번에는 청수사나 아라시야마를 다시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백제계 도래인들의 흔적을 찾아 비와호 일대로 가기 위해 교토역을 찾은 것이었다.

2016년에는 교토의 오래된 절과 거리를 보았다면, 2025년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 한반도와 일본 사이를 오간 사람들과 문화의 흔적을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여행을 계속하면 세상을 조금씩 더 알게 된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같은 장소를 바라보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2016년의 나는 교토라는 오래된 도시를 처음 만나는 데 마음을 빼앗겼다.

9년 뒤의 나는 그 도시 너머에 있는 역사와 사람의 이동,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오래된 교류까지 생각하며 다시 교토역에 서 있었다.

카메라도 달라져 있었다.

첫 교토 여행에서는 EOS 60D가 내 손에 있었고, 9년 뒤에는 EOS R6 Mark II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바뀐 시간만큼 여행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달라져 있었다.


10. 오사카성, 그때는 몰랐던 윤봉길 의사의 흔적

첫 해외여행에서 오사카성 천수각에도 올랐다.

당시에는 그저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한 성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훗날 윤봉길 의사님이 가나자와로 압송되기 전 오사카성 일대의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6년의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당시 오사카성 사진을 다시 보면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윤 의사님, 그때는 제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26년 5월, 나는 가나자와에서 윤봉길 의사님의 마지막 흔적을 직접 찾아갔다.

노다야마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를 찾아가 먼저 주변을 빗자루로 깨끗이 쓸었다. 마님과 함께 순국기념비 앞에서 묵념하고, 암장지에서는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간 소주 ‘처음처럼’ 한 병을 올린 뒤 절을 했다.

2016년의 오사카성과 2026년의 가나자와 사이에는 10년의 시간이 있다.

그 사이 여러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고, 책을 읽고 역사를 찾아보면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 세상을 더 알게 되고, 아는 만큼 같은 장소에서도 더 많은 것이 보인다.

2016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쳤던 오사카성을, 10년 뒤에는 윤봉길 의사님의 시간을 함께 생각하며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가나자와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를 직접 찾아 소주 한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내게 답사는 그렇게 조금씩 깊어져 왔다.

그래서 여행은 다녀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직접 보고 사진으로 남긴 뒤, 다시 책을 읽고 역사를 알아가며 오래전 사진을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11. 도톤보리와 처음 맛본 일본 초밥

첫 해외여행이었으니 먹는 것도 모두 새로웠다.

도톤보리의 번잡한 거리를 걸었다.

커다란 간판과 네온사인,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일본 현지 초밥을 처음 제대로 먹어보았다.

한 점을 입에 넣고 깜짝 놀랐다.

“워매, 초밥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그 맛의 차이가 무엇 때문이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 처음 먹었던 일본 초밥이 겁나게 맛있었다는 기억만은 아직도 또렷하다.

지금은 일본을 여러 번 다녀왔고 일본 음식도 익숙해졌지만, 처음이라는 경험은 다시 만들 수 없다.

청수사도 처음이었고,

아라시야마도 처음이었고,

도톤보리도 처음이었고,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어 며칠씩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 모든 첫 장면을 EOS 60D가 기록했다.


12. 첫 해외여행을 끝으로 오막포에게 자리를 내주다

공교롭게도 2016년 2월 오사카·교토 여행은 60D의 마지막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해 EOS 5D Mark IV가 출시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막포를 샀다.

주력 카메라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EOS 5D Mark IV로 넘어갔다.

오막포를 들고 캐나다와 미국, 홋카이도와 괌, 중국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60D는 점점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때는 가족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챙기던 카메라였는데 새로운 풀프레임 DSLR이 들어오자 순식간에 뒷방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바로 처분하지는 않았다.

사용 횟수는 크게 줄었지만 오랫동안 집에 남아 있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수많은 가족여행, 남도 답사와 첫 해외여행이 모두 그 카메라와 연결되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13. 2024년, 오래된 60D를 보내다

2010년 11월에 구입했던 EOS 60D는 그렇게 2024년까지 내 곁에 남아 있었다.

그해 6월 EOS R6 Mark II를 구입하면서 구형 카메라를 반납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는 행사가 있었고, 결국 60D를 반납했다.

13년 반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주력으로 사용한 기간은 그보다 짧았지만 내 카메라 역사에서는 참 오래 남아 있던 녀석이었다.

삼성 필름카메라와 작은 디지털카메라들을 거쳐 처음 손에 넣은 본격 DSLR.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찍었고,

가족과 전국을 돌아다녔고,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따라 남도의 문화유산을 찾아갔으며,

마흔을 넘겨 처음 떠난 해외여행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의 초입에는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가 있었다.


14. 돌아보며 ― 내 여행과 답사의 시작에 있었던 60D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는 지금 내 책장에 없다. 오래전에 중고책으로 팔아버렸다.

하지만 그 책을 읽으며 처음 DSLR을 배우던 시절의 기억은 남아 있다.

60D는 내 첫 DSLR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서며 여행과 답사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시절을 기록한 카메라였다. 책에서 본 곳을 직접 찾아가 내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지금의 여행 방식도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2016년 첫 해외여행까지 함께한 뒤 오막포에게 주력 자리를 내주었지만, 내 사진과 여행의 역사에서 60D가 차지하는 자리는 여전히 크다.

오막포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데리고 나갔다면, 60D는 그 세계를 찾아 나서는 방법을 처음 가르쳐준 카메라였다.

돌이켜보면 내 여행과 답사의 시작에는
EOS 60D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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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 ㅣ 정원그라피아 캐논 EOS 시리즈
임프레스 재팬 지음, 정원그라피아 편집부 옮김 / 정원그라피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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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진에세이]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와 함께한 R6 Mark II 1년 반
― 미러리스로 넘어와 세계를 돌고, 결국 또 자동모드로 사진 찍기까지


EOS 5D Mark IV 이후 내 사진생활의 중심을 미러리스로 옮겨준 카메라. 약 1년 반 동안 중국과 일본, 튀르키예를 함께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진을 남겼다. 책에서 배워야 할 기능은 더 많아졌다. 하지만 카메라도 그만큼 훨씬 똑똑해졌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다 할 필요가 있나. 여행 현장에서는 똑똑해진 카메라를 믿고 자동모드에 맡겼다. 결국 이번에도 자동이었다. ㅎㅎ


들어가며 ― 카메라를 목에 걸고 현장으로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사진 한 장이 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이제는 작고하신 정수일 교수님께서 캐논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답사하고 계신 모습이다. 그 사진은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

노구에도 직접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찾아다니시며 문명의 흔적을 확인하시고, 그곳에서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문명을 읽고 해부해 나가셨다.

내가 정수일 교수님처럼 문명이론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직접 현장을 걷고, 내 눈으로 보고, 카메라에 남긴 뒤 돌아와 다시 그 기록을 들여다보는 그분의 답사 방식에는 내가 오래도록 닮고 싶었던 태도였다.

그래서 내게 카메라는 단순히 예쁜 사진을 찍는 기계만은 아니다.

내가 그곳에 있었고, 직접 보았다는 것을 남기는 답사의 기록도구다.

아마 그래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카메라를 챙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무겁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들고 나선다.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여행이 끝난 뒤 다시 그 장소와 사람, 역사와 문명을 불러내는 기록이 된다.

2024년 6월 1일, 그런 내 여행의 새로운 기록도구로 EOS R6 Mark II를 구입했다.

당시 구형 카메라를 반납하면 새 카메라를 할인해 주는 행사가 있었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EOS 60D를 반납했다. 60D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내 카메라 역사를 처음부터 되짚을 때 다시 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그렇게 오래된 DSLR 한 대를 떠나보내고 Canon RF24-105mm F4 L IS USM과 함께 EOS R6 Mark II를 손에 넣었다는 것만 기록해 둔다.

EOS 5D Mark IV를 오랫동안 사용해 왔지만, 무거운 DSLR과 렌즈를 들고 여행하는 것이 예전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카메라 시장 역시 이미 미러리스 중심으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R6 Mark II의 구입은 내게도 미러리스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새 카메라가 생기면 나는 또 책을 찾는다.

이번에 고른 책은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였다.


1. 두 대의 미러리스를 함께 다루는 완벽가이드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는 EOS R6 Mark II와 EOS R8의 주요 기능과 활용법을 다루는 책이다. 기본 조작에서부터 AF와 피사체 검출·추적, 셔터 방식과 연사, 화질 설정, 뷰파인더와 모니터, 버튼과 다이얼의 사용자 설정 등 미러리스 카메라의 다양한 기능을 폭넓게 설명한다.

이 책 역시 오막포 때 읽었던 『캐논 EOS 5D Mark IV 완벽가이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사용설명서가 아니다. 여러 촬영 상황을 실제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어떤 기능과 설정을 활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새 카메라를 샀으니 이번에도 책을 잘 읽고 기능을 익혀 제대로 활용해 보겠다는 마음이었다.

마음은 늘 그렇다.


2. 오막포 완벽가이드와는 달라진 미러리스의 세계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를 읽다 보면 전에 읽었던 『캐논 EOS 5D Mark IV 완벽가이드』와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두 책 모두 카메라의 기능과 실제 촬영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지만, 아마추어 사용자인 내가 받아들인 느낌은 조금 달랐다.

EOS 5D Mark IV는 광학식 뷰파인더와 전용 AF 시스템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DSLR이었다. AF 포인트를 어디에 둘 것인지, 측광과 노출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 조리개와 셔터속도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 등 사진가가 카메라를 직접 다루는 감각이 강했다.

반면 EOS R6 Mark II로 넘어오자 카메라가 스스로 해주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사람이나 동물을 알아보고, 눈을 찾아 초점을 맞추고, 움직이는 피사체를 따라가는 기능도 훨씬 발전했다. 카메라가 장면을 보고 판단하는 능력 자체가 오막포 시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똑똑해진 것이다.

그래서 두 책을 읽는 느낌도 달랐다.

오막포의 완벽가이드에서는

‘내가 카메라를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

를 배우는 느낌이 강했다면,

R6 Mark II의 완벽가이드에서는

‘이 똑똑해진 카메라가 어디까지 해줄 수 있고, 나는 무엇을 정해주면 되는가.’

를 배우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알아야 할 것은 오히려 많아졌다.

AF 영역이 어떻고, 피사체 검출이 어떻고, 트래킹이 어떻고, 전자셔터가 어떻고, 고속 연사가 어떻고….

책을 읽을 때는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인다.

“아하, 이런 기능도 있구먼.”

문제는 여행 현장이다.


3. 카메라는 더 똑똑해졌다. 그러니 이번에도 자동이다

오막포 완벽가이드를 읽을 때 나는 생각했다.

“아, 이거 엄청 복잡하구먼. 이걸 다 알고 어떻게 사진을 찍나?”

그때 자동모드는 어느 정도 ‘에라이, 모르겠다’에 가까웠다.

그런데 R6 Mark II는 조금 다르다.

책에서 배워야 할 기능은 더 많아졌지만, 카메라 자체도 그만큼 훨씬 똑똑해졌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다 할 필요가 있나.

여행은 사진만 찍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고, 눈앞의 사람들은 계속 움직이며, 빛도 변한다. 함께 간 사람들을 세워놓고 카메라 메뉴를 들여다볼 수도 없다.

무엇보다 여행에서 중요한 장면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히려 마음 편하게 카메라를 믿었다.

자동모드.

오막포 때의 자동이

“에라이, 니가 알아서 해라.”

였다면,

R6 Mark II의 자동은

“니가 나보다 똑똑하니 니가 해라.”

에 조금 더 가까웠다. ㅎㅎ

두 완벽가이드에는 공통된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책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문제는 독자가 나였다는 것이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감탄한다.

그리고 여행 현장에서는 자동으로 찍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그리 미안하지도 않다. 카메라가 그만큼 똑똑해졌으니 말이다. ㅎㅎ


4.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 ― 렌즈를 사고 싶게 만든다

두 완벽가이드에는 또 하나의 위험한 점이 있다.

책 뒤쪽의 렌즈 소개다.

이 렌즈들의 가격은 어마무시하다.. 무서울정도다. 그런데,,

여러 렌즈의 특징과 그 렌즈로 찍은 실제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자꾸 욕심이 생긴다.

“이 렌즈로 찍으니 이런 사진이 나오는구먼.”

“이것도 하나 있으면 좋겄는디….”

렌즈 하나를 보고 있으면 또 다른 렌즈가 눈에 들어온다.

완벽가이드의 잘못은 아니다.

좋은 렌즈를 제대로 소개했을 뿐이다.

문제는 또 독자다. ㅎㅎ

그러나 실제 여행은 책 속 렌즈 소개와는 조금 다르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도 바쁜데 여러 렌즈를 가지고 다니는 것 자체가 부담이고, 좋은 장면이 나타날 때마다 가방을 열어 렌즈를 갈아 끼우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내 여행사진의 대부분은 결국 Canon RF24-105mm F4 L IS USM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24mm 광각에서 105mm 준망원까지 한 렌즈로 사용할 수 있으니 풍경과 도시, 사람과 역사유적을 계속 오가며 찍는 내 여행에서는 활용도가 가장 높았다.

사실상 내 여행의 주력렌즈다.

밤에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조금 더 넓은 화각이 필요할 때는 Canon RF15-35mm F2.8 L IS USM을 사용했다.

특히 야간에는 F2.8의 밝은 조리개가 좋다. 어두운 거리에서 F4보다 더 많은 빛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 셔터속도를 확보하거나 ISO를 지나치게 올리지 않는 데 유리하다. 넓은 화각까지 더해지니 밤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찍기에 좋았다.

Canon RF70-200mm F4 L IS USM도 가지고 있다.

망원 영역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분명 좋은 렌즈지만 실제 여행에서는 사용 빈도가 높지 않았다.

무게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RF24-105mm F4 L IS USM보다 가볍다.

문제는 활용도였다.

도시와 자연, 역사유적을 계속 이동하며 찍는 내 여행에서는 24mm부터 105mm까지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RF24-105mm F4 L IS USM이 훨씬 활용도가 높았다. 70mm 이상의 망원이 꼭 필요한 장면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고, 그 몇 장을 위해 여행 중 렌즈를 바꿔 끼우는 일도 번거로웠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세 렌즈 가운데 RF70-200mm F4 L IS USM은 가장 사용 빈도가 낮았다.

책은 수많은 렌즈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행이 내게 가르쳐준 답은 점점 단순해졌다.

기능은 많지만 똑똑한 카메라를 믿고 자동모드. ㅎㅎ
렌즈는 세 개지만 대부분 RF24-105mm F4 L IS USM.


5. 짧았지만 진하게 함께한 1년 반

EOS R6 Mark II와 함께한 시간은 오막포에 비하면 길지 않았다.

2024년 6월에 구입했고,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에 들고 나간 것은 같은 해 9월 중국 귀주 여행부터였다.

하지만 그 뒤 약 1년 반 동안 정말 많은 곳을 함께 다녔다.


가. 2024년 9월 중국 귀주 ― R6 Mark II 여행의 시작

R6 Mark II를 처음 본격적으로 들고 나간 해외여행은 중국 귀주였다.

만봉림에서는 밥공기를 수없이 엎어놓은 것처럼 둥글둥글한 봉우리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름 그대로 수많은 봉우리가 숲을 이룬 듯한 풍경이었다.

마령하 대협곡에서는 깊게 패인 협곡과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폭포들이 이어지는 장관을 만났고, 묘족성시에서는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은 묘족 여성들의 공연도 카메라에 담았다.

거대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황과수폭포도 만났다.

그리고 직금동.

지금까지 내가 들어가 본 동굴 가운데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규모와 풍경이 압도적이었다.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운 종유석과 석순, 기기묘묘한 지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R6 Mark II의 셔터를 계속 눌렀다.

R6 Mark II는 그렇게 귀주에서 본격적인 내 여행카메라가 되었다.


나. 2024년 10월 일본 규슈

한 달 뒤에는 일본 규슈로 향했다.

구마모토를 지나 아소산의 거대한 화산지형을 바라보았고, 유후인의 한적한 풍경을 걷고, 벳푸에서는 지옥온천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귀주의 거대한 자연과는 또 다른 일본의 화산과 온천 풍경이었다.


다. 2025년 1월 나고야와 시라카와고

2025년 1월에는 나고야를 거쳐 시라카와고를 찾았다.

눈 덮인 합장촌과 갓쇼즈쿠리 가옥은 오래 보고 싶었던 풍경이었다.

하얀 눈 속에 자리 잡은 전통가옥들을 바라보고, 실제 생활공간과 가옥의 구조를 살펴보며 사진을 남겼다.

눈과 오래된 집이 만들어낸 시라카와고의 겨울 풍경은 R6 Mark II와 함께한 여행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다.


라. 2025년 12월 중국 윈난 ― 대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2025년 12월에는 중국 윈난성으로 향했다.

차마고도를 걸으며 오래전 말과 사람, 차와 물자가 오가던 길을 따라갔고, 호도협에서는 거대한 협곡 사이를 거칠게 흘러가는 물줄기와 깎아지른 산세 앞에 섰다.

리장에서는 만년설을 머리에 인 옥룡설산의 장엄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상여강〉 공연을 보았다.

화려한 공연이었지만 내게 오래 남은 것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었다.

소수민족의 전통의상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 속에는 높은 산과 깊은 협곡, 척박한 고원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함께 담겨 있었다.

차마고도를 오가던 마방의 고단한 삶과, 거대한 자연에 순응하는 듯하면서도 그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때로는 극복하며 자신들의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강인함이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눈앞의 옥룡설산이 대자연의 위엄을 보여주었다면, 〈인상여강〉은 그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연에 맞서기만 한 것도, 그저 자연에 자신을 내맡긴 것도 아니었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그 안에 삶의 방식을 만들고, 어려운 환경에는 적응하며, 필요한 순간에는 그것을 극복해온 사람들.

그래서 그날 R6 Mark II에 담긴 것은 설산의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그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사람들의 고단함과 강인함도 함께 남았다.

이후 리장고성의 오래된 골목을 걷고, 더 높은 고원의 샹그릴라를 지나 쿤밍의 석림까지 이어갔다.

윈난 여행은 차마고도와 협곡, 설산과 고성, 소수민족의 삶이 한데 이어진 여행이었다.


마. 2025년 12월 도쿄와 후지산

같은 달에는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도쿄의 도시풍경을 찍고, 왕인박사와 사이고다카모리의 흔적과 관련된 장소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후지산을 찾아 나섰다. 후지노미야의 시라이토 폭포도 찾았고, 하루종일 구름과 숨바꼭질을 하는 후지산의 하얀이마를 마주했다.

그리고 이 시라이토 폭포는 훗날 R6 Mark II를 떠나보낸 뒤 다시 펼쳐본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에서 뜻밖에 다시 만나게 된다.


바. 2026년 2월 튀르키예 ― R6 Mark II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

R6 Mark II와 함께한 마지막 해외여행은 2026년 2월 튀르키예였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에서는 기암괴석 사이로 이어지는 독특한 풍경을 담았고, 파샤바에서는 마치 스머프들이 살 것 같은 버섯 모양의 요정 굴뚝들을 만났다.

콘야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시 「여인숙」을 쓴 수피 시인 루미가 잠들어 있는 메블라나를 찾았다.

오래전 글로 만나왔던 한 사람을 직접 찾아간 순간이었다.

안탈리아에서는 푸른 지중해를 바라보았고, 파묵칼레에서는 하얀 석회붕이 계단처럼 이어지는 풍경을 걸었다. 그 위에 남아 있는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흔적을 지나고, 에페수스에서는 거대한 고대도시의 폐허 속을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장면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마지막 이스탄불에서는 다시 풍경의 성격이 바뀌었다.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 올라 유럽과 아시아 사이를 흘러가며, 그 옛날 골든혼에 울려퍼지던 오스만 투르크군의 피리소리와 대포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톱카프궁전과 아야소피아, 돌마바흐체궁전을 찾아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함께 카메라에 담았다.

피에르 로티 언덕에서는 골든혼을 내려다보았고, 이스탄불의 박물관들을 돌아보며 오랜 제국과 문명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괴레메의 바위산에서 지중해의 푸른 바다로, 다시 그리스·로마의 고대도시를 지나 보스포러스 해협까지.

R6 Mark II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은 참으로 많은 풍경을 보여주었다.

2024년 9월 귀주에서 시작된 이 카메라와의 해외여행은 그렇게 2026년 2월 이스탄불에서 막을 내렸다.

오막포가 거의 10년에 걸쳐 천천히 쌓아 올린 여행의 기록이었다면, R6 Mark II는 약 1년 반 동안 숨 가쁘게 몰아친 여행의 기록에 가까웠다.

시간은 짧았지만 남긴 사진과 기억은 결코 적지 않았다.


6. 카메라를 떠나보낸 뒤 책에서 다시 만난 시라이토 폭포

R6 Mark II를 떠나보낸 뒤 아쉬운 마음으로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를 다시 펼쳐보았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가 낯익은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후지노미야의 시라이토 폭포였다.

“어? 여기 내가 갔던 데잖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에는 몰랐다.

그때는 새로운 카메라의 AF가 어떻고, 셔터가 어떻고, 설정이 어떻고 하는 기능을 익히느라 책 속의 수많은 예제사진 가운데 하나로 그냥 지나쳤던 모양이다.

그런데 2025년 12월에는 내가 실제로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바로 R6 Mark II가 있었다.

폭포 앞에서 나 역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떠나보낸 뒤 책을 다시 펼쳐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 사진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오막포 완벽가이드에서는 시부야 스크램블의 사진을 책에서 먼저 보고 훗날 내가 직접 그곳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반대였다.

R6 Mark II를 들고 시라이토 폭포를 직접 다녀온 뒤, 카메라까지 떠나보내고 나서야 책 속에서 그 장소를 다시 발견했다.

카메라는 이미 내 곁을 떠났는데, 책 속에는 그 카메라와 함께 다녀온 여행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음 읽을 때는 기능을 배우는 책이었다.

다시 펼쳐보니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 되어 있었다.


7. 좋은 카메라였지만 끝까지 마음에 걸렸던 2,420만 화소

EOS R6 Mark II에 큰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약 1년 반 동안 여러 여행을 함께하면서 상당히 만족스럽게 사용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계속 남는 것이 하나 있었다.

화소수였다.

R6 Mark II는 약 2,420만 화소의 풀프레임 센서를 사용한다.

일반적인 사진 촬영에 부족한 화소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게는 조금 아쉬웠다.

왜냐하면 그전에 거의 10년을 사용한 EOS 5D Mark IV가 이미 약 3,040만 화소였기 때문이다.

더 오래된 DSLR보다 훨씬 새로운 미러리스인데도 숫자만 놓고 보면 오히려 화소가 줄어 있었다.

물론 화소수가 사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은 나도 안다.

R6 Mark II는 AF와 연사, 손떨림 보정과 여러 편의기능을 포함하면 오막포보다 훨씬 발전한 카메라였다.

그런데 다음 카메라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나는 카메라를 2~3년 쓰고 계속 바꾸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막포처럼 앞으로 또 10년을 바라보고 오래 사용할 카메라를 생각하니 2,420만 화소라는 숫자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이패드의 큰 화면으로 여행사진을 다시 보고, 때로는 사진의 일부를 잘라 쓰기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더 여유 있는 해상도를 가지고 싶었다.

결국 R6 Mark II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10년을 생각했을 때 남아 있던 작은 아쉬움 하나.

그것이 화소였다.


8. 2026년 3월, R6 Mark III의 시대로

2026년 2월 튀르키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3월, R6 Mark II를 떠나보냈다.

1년 반 동안 수많은 여행을 함께한 카메라였으니 이것 역시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오막포를 처분할 때에도 그랬지만, 카메라는 단순한 전자제품만은 아닌 모양이다.

여행지에서 내가 보았던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그것을 사진으로 남겨준 물건이니 떠나보낼 때마다 조금씩 마음이 남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소수에 대한 아쉬움을 더 이상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EOS R6 Mark III로 넘어갔다.

이번 카메라는 가능하면 오래 함께하고 싶다.

오막포처럼 10년을 바라보고, 더 욕심을 내자면 내 사진생활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은 카메라다.

R6 Mark III를 손에 넣은 뒤에는 곧바로 새로운 여행도 시작되었다.

2026년 5월과 7월, 두 차례 일본 북알프스를 찾았다.

5월에는 가나자와에서 윤봉길 의사님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를 찾아 소주한잔에 절을 올렸고,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와 구로베협곡을 돌아보았다.

7월에는 다시 북알프스로 향해 가미코치를 걸었고 노리쿠라다케에도 올랐다.

R6 Mark II가 튀르키예에서 자신의 마지막 여행을 마쳤다면, R6 Mark III는 그렇게 일본 북알프스에서 새로운 여행의 기록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아직 『EOS R6 Mark III 완벽가이드』가 나오지 않았다.

카메라는 이미 내 손에 들어왔는데 공부할 교과서가 아직 없는 셈이다.

언젠가 그 책이 나오면 아마 또 사서 읽을 것이다.

AF가 어떻고, 셔터가 어떻고, 새로운 기능이 어떻고….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한번 써보겠다고 또 열심히 읽을 것이다.

그리고 여행 현장에 나가면?

아마 또 자동모드일 것이다.

ㅎㅎ


9. 돌아보며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는 DSLR에서 미러리스로 넘어온 내게 새로운 카메라를 이해하게 해준 책이었다.

처음에는 기능을 배우기 위해 펼쳤지만, 이제 R6 Mark II가 내 곁을 떠난 뒤 다시 생각하면 이 책에는 그 카메라와 함께했던 1년 반의 시간이 겹쳐 있다. 카메라는 바뀌었지만 그때 찍은 사진과 여행의 기억은 그대로 남았다.

R6 Mark II는 짧게 함께했지만 참 많은 곳을 보여준 좋은 카메라였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카메라를 배우기 위해 산 활용서에서, 어느새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한 권의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찍은 사진 속에는 지난 1년 반 동안 내가 직접 보고 걸었던 세계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거면 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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