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내 만들기 - 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 걸작 논픽션 13
웬디 무어 지음, 이진옥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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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해당 책, 희곡 <피그말리온>,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스포일러 포함


  고대 그리스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그는 현실의 여인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물 크기의 여인상을 만들었다. 그 여인상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하게 되었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자신의 조각상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된 조각상을 아내로 맞았다. 18세기 말 영국에도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아내를 만들려고 한 남자가 있었다. 문제는 그가 조각상이 아닌 사람을 자신의 이상에 맞는 완벽한 아내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은 조각상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도 말이다.


(왼쪽) 완벽한 아내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했던 토머스 데이. (오른쪽) 토머스 데이의 실험 대상이 되었던 소녀 사브리나 시드니. 만년에 그려진 초상화다.


  토머스 데이 Thomas Day 는 18세기 영국의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가 친구 존 빅널과 함께 쓴 시 <죽어가는 검둥이 The Dying Negro>는 흑인 노예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의 부당함에 공감하게 했다. 그는 노예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선거권을 위해서도 싸웠고,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했으며 아이들을 위한 동화도 썼다. 그러나 그가 보호하고 권익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대상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의 재혼에 충격을 받고 연애에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 데이는 여성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여성을 의심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데이는 자신이 아직 제대로 된 여성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연애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나섰을 텐데, 그는 제대로 된 여성이 세상에 없다면 만들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여성, 자신의 이상에 맞는 여성은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며 거친 시골 생활을 견딜 만큼 건강하고, 자신과 말이 통할 정도의 지성을 갖추면서 자신의 희망사항에 따라 완벽하게 순종하는 여성이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의 남성으로서 진보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데이는 여성이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닌, 자신의 완벽한 부속품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미 교육 받고 가치관이 정립된 성인 여성이 아닌 어린 소녀를 데려와 자신에게 맞는 아내로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부모도 자기 딸이 미래의 남편의 손에 넘어가 그의 뜻대로 양육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데이 자신도 자신이 하는 일이 떳떳하지 않음을 알았던지, 아무 연고도 없는 고아 소녀를 고아원에서 데려왔다. '미래의 내 아내로 키우기 위해 데려갑니다.'라고 말하면 고아원에서도 당연히 아이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데이는 소녀를 하녀로 데려간다고 거짓말했고, 고아원은 아무 의심 하지 않고 흔쾌히 소녀를 내어주었다. 그는 예비용으로 소녀 한 명을 더 데려왔다. 둘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소녀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었다. 나중에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데이는 소녀들의 이름까지 바꾸었다. 앤 킹스턴에게는 사브리나 시드니라는 이름이, 도카스 카에게는 루크레티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데이는 소녀들에게조차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고, 아무런 설명 없이 두 소녀에게 교육 실험을 했다. 자신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 소녀들에게 지리학과 물리학, 천문학을 가르쳤고, 사치스러운 풍조에 물들지 않도록 외출할 때도 화장을 하지 않고 검소한 옷을 입게 했다. 사교계가 겉치레만 하고 헛되다고 경멸했기 때문에 사교를 위해 악기 연주나 춤을 배우지도 못하게 했다. 집안일은 하인들이 아닌 아내가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집안일을 두 소녀에게 모두 맡겼다. 좀 더 발랄하고 활발한 루크레티아를 내친 뒤 사브리나에게 실험을 집중하게 되면서, 실험은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데이는 고통을 초연하게 견뎌내야 한다면서 사브리나를 연못 깊은 곳에 던졌고, 사브리나의 피부 위에 끓는 밀랍 덩어리를 부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고아원에서 꺼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데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브리나도,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고통당하게 되자 데이에게 반항했다. 


 놀랍게도 데이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데이에게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계획 이야기를 들었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협조했다. 어떤 친구는 고아 소녀를 데려오는 데 자신의 명의를 빌려주었고, 어떤 친구는 데이와 함께 직접 고아 소녀를 골랐다. 데이의 계획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인까지 있었다. 데이의 실험이 점점 더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실험을 중지하라고 당부한 지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조차 실험으로 고통 받는 소녀보다는 실험을 하면서 광기에 사로잡혀가고 실험이 발각되었을 때 비난을 받을 데이를 더 걱정했다. 


  지인들에게 그렇게 무모한 실험을 하느니 다시 연애를 하라는 충고를 받고, 소녀들이 자신의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것에 절망한 데이는 소녀들을 내버려두고 연애를 몇 번 더 했다. 그러나 한 연인은 아내가 완벽히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데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부의 행복은 두 사람의 평등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데이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뒤에 사귄 연인에게는 푹 빠져 있었는지, 웬일로 자신을 바꿔볼 생각을 했다. 아내에게는 온갖 조건을 요구하면서 지저분하고 매너도 없는 자신의 모습은 고칠 생각도 안 하던 위인이 말이다. 연인의 마음에 드는 멀끔한 신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수업까지 받았지만, 오히려 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에 경악한 연인에게 차인 뒤, 데이는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사브리나에게 눈을 돌렸다. 자신의 아내 후보에서 밀어낸 뒤 시골의 기숙학교에 보내놓고 몇 년 동안 신경도 쓰지 않다, 연인에게 차이고 나서야 사브리나를 다시 아내 후보로 생각한 것이다. 사브리나는 자신의 후원자라고만 생각했던 데이가 자신을 아내 후보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경악했고, 당연히 데이의 청혼을 거절했다. 데이도 사브리나의 반항적인 모습을 보고 사브리나를 아내로 맞으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데이의 혹독한 실험을 겪었지만 사브리나는 사람이었고,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호락호락하게 조물주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인간이 평생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안타깝게도 데이는 결국 결혼을 했다. 데이의 높은 이상에 반한 에스터 밀네스라는 여성이 데이가 연애에 실패하고, 사브리나에게 한 청혼도 실패하는 과정까지 모두 지켜보면서 끝까지 그를 기다렸다. 연애도 아내 만들기 실험도 실패한 데이는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에스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터는 데이 못지않은 지성에 데이보다 훨씬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데도, 데이의 뜻대로 제일 가까운 이웃과도 십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딴 시골집에서 남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인내심 강한 에스터조차 데이의 독재를 견뎌내지 못하고 종종 데이와 부부싸움을하고 가출했지만, 매번 자신이 다 잘못한 거라고 사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데이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낙마 사고로 사망했을 때 (나는 속이 시원했지만) 에스터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에 데이를 따르듯 세상을 떠났다.


 에스터는 데이의 죽음(또는 자신의 죽음)으로 데이가 씌워놓은 굴레에서 해방되었지만, 사브리나는 데이의 아내 후보에서 탈락된 이후로도, 심지어 데이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고통 받았다. 데이는 사브리나의 삶에 계속 간섭해, 성실한 젊은 약사가 사브리나에게 청혼했을 때도 사브리나 대신 그에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정작 사브리나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브리나는 그 약사 대신 데이의 친구인 빅널과 결혼했지만, 빅널은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살다 빚과 두 아들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브리나는 주변 지인들의 호의 덕분에 어느 사립학교의 관리인이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학생들과 아들들 모두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데이의 친구들이 회고록을 출간하고, 그 회고록들에 사브리나의 이야기가 실리면서 사브리나는 만년에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물론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을 한 데이도 큰 비난을 받았지만, 사브리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사브리나는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고 가족들과 학교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데이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문학 작품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의 희곡 작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영화화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피그말리온>의 주인공 일라이저는 자신을 우아한 숙녀로 교육시킨 히긴스 교수가 자신을 실험대상으로만 대하는 것에 반발해, 다른 사람과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일라이저가 히긴스 교수와 맺어지는 것으로 결말을 바꾸어, 피조물이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당당한 결말에서 한참이나 퇴보했다. 그리고 피그말리온 신화가 낳은 환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는 아버지로 설정된 이용자가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기본 설정인데, 경악스럽게도 딸이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와 결혼하는 결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결말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는 이러한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아내를 창조하겠다는 것은 이루지 못할 목표다. 물론 갈라테이아(후대 사람들이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에 붙인 이름이다.)도 신비의 존재일 따름이다."


  우리는 완벽한 상대방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약자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데이가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이유로 사브리나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했는데도, 데이는 부유한 귀족에다 지식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지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비호를 받았다. 데이의 친구들은 사브리나에게 연민을 가졌지만 데이가 사브리나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하고 사브리나의 삶을 통제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브리나는 고아, 가난한 사람, 여성이라는 삼중의 굴레를 쓰고 있는 약자였기에 보호받지 못했고, 피해자였는데도 온갖 소문에 시달렸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실험 대상이 되고 고통 당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개척한 사브리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게임이나 문학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닌 실제 사람에게 자신의 환상을 투영하고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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