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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모델, 미국 - 미국의 인종법은 어떻게 나치에 영향을 미쳤는가
제임스 Q. 위트먼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미국이 히틀러의 모델이라니, 선뜻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수호자, 세계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 땅으로 자부해 왔다. 히틀러에게 미국은 최대의 적이었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미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민주주의와 평등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 책은 나치 독일이 반유대주의 법인 '뉘른베르크 법'(1935년 발표)을 제정할 때 미국의 인종 차별적인 법들을 참고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법학자인 저자는 미국이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역사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
수많은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이지만 건국 당시부터 인종주의(인종의 생리학적 특징에 따라 민족 사이의 불평등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는 미국 법에 스며들어 있었다. 미국 초대 의회에서 제정된 법 중 1790년의 귀화법은 "자유로운 백인 외국인"에게만 귀화를 허용했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868년에는 "미국 영토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시민권 여부와 관계 없이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 받는다"는 수정헌법 14조가 헌법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문맹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법, 노예 해방 이전에 조상이 투표권을 가졌을 경우에만 투표권을 주는 "조부조항" 등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려는 교묘한 인종 차별법들이 생겨났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의 식민 지배권을 넘겨받았을 때 필리핀 사람들은 법적 권리를 가진 미국 시민이 아니라 단순한 "비(非)시민 국적자"가 되었다.
나치의 법조인들과 입법자들은 이러한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사례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이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만큼이나 쉽다고 비꼬았던 히틀러가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꼼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법에서 유대인의 국적과 참정권을 박탈해 단순한 체류자로 전락하게 했다. 나치 법률가들은 미국인들의 출중한 법적, 정치적 재능과 교양을 보여준다며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법들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인종의 순수성'을 지키는 점에서도 나치 독일은 미국을 모범사례로 보았다. 나치 독일에게 미국은 게르만 족의 친족이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인 노르딕 인종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였다. "백인과 흑인의 혼인, 백인과 위로 3대 이내에 흑인 조상이 있는 자의 혼인, 또는 백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 또는 흑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은 영구히 금지되며 무효다. 이 조항의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18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메릴랜드 주의 혼혈금지법, 한 방울만 흑인의 피가 섞여 있어도 흑인으로 간주한다는 "한 방울 법칙(one drop rule)"은 나치 법조인들조차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진저리 치게 만들었다. 다만 미국이 유대인을 백인으로 취급하는 것만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혈통이나 배우자의 인종, 과거의 노예 신분 등 다양한 기준으로 인종을 규정했던 미국의 법들을 참조해, 뉘른베르크법에서는 조부모 중 두 명이 유대인이고 유대인과 혼인하거나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인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할 때 미국의 영향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독일 외에 인종주의를 법에 적용했던 유일한 나라였고, 그러한 나라가 세계에서 강대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나치를 자극했다. 미국이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독일에 맞서게 되면서 둘은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데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이게 다 미국의 잘못입니다. 미국을 탓하세요."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과거에는 우리(미국인)가 잊고 싶어하는 측면도 담겨 있고,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인 학자인 저자나 미국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뼈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현재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출마 당시 출생시민권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올해 10월 30일에도 "외국인이 미국에 들어와서 아이를 낳으면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모든 혜택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뿐"이라며, 출생시민권을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미국에 들어오는 다양한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고 있고,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의 대표였던 극우 인종주의자 데이비드 듀크는 그런 트럼프를 지지한다. 인종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려는 이 시기가, 미국인들이 교묘한 인종차별법을 최근까지도 시행하고 있었던 자국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할 때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인종주의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 우리는 동양인으로서 인종차별과 인종혐오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이민자와 난민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나치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의한 극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극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 선하다고 자신하면서 자신 안의 악을 직시하지 못할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읽고 되새겨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참고 기사: "트럼프 '출생시민권' 폐지 발언에 수정헌법 14조 논란 격화"(2018.12.31.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1031_0000459692&cID=10101&pID=1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