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주의 요리책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필리아 지음, 이용재 옮김 / 마티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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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주의 Futurismo, Futurism 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현대 예술 운동으로, 예술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기존의 가치와 문화를 혁신하려고 했던 운동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과거의 것과 전통을 현대화의 걸림돌로 여겼고, 현대화된 도시와 기계 문명의 속도감과 역동성을 찬양하며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산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서, 미래주의자들은 삶과 예술 모두를 현대화시키고 싶어했다. 삶과 예술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현대화되는 것이 미래주의자들이 꿈꾸는 혁명이자 미래였다. 미래주의자들이 혁신시키려고 하는 대상에는 미술, 음악 같은 예술뿐만 아니라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래파의 창시자이자 수장인 마리네티 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 는 동료 미래주의자인 화가 필리아(Fillia, 1904-1936, 본명은 루이지 콜롬보)와 함께 1930년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2년 뒤에는 미래주의가 창안한 음식 레시피와 새로운 식사법을 소개하는 책 『미래주의 요리책』을 펴냈다. 


 서문에서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요리 혁명을 통해 이탈리아 민족의 식습관을 바꾸고, 실험과 상상력이 가득한 새로운 음식과 인간다운 식사법을 제안하겠다고 패기 넘치게 선언한다. 그런데 그 제안이 황당하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파스타를 추방하자는 것이다. 그가 파스타를 추방하려는 이유는 이렇다. "입에 맞을지는 몰라도 파스타는 구시대 음식입니다. 비만을 초래하고 짐승처럼 먹게 합니다. 영양이 많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회의적이며 굼뜨고 비관적이게 만듭니다." 파스타를 이탈리아인의 식탁에서 영원히 추방하자는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마리네티가 파스타를 게걸스럽게 먹는 사진이 찍혔지만 마리네티 본인은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성사진이라고 일축했다. 


 미래주의자들이 꿈꿨던 식생활은 비만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을 몰아내고 신체에 필요한 열량을 빨리 공급하며, 음식의 맛과 색, 형태, 촉감, 음식을 먹을 때의 주변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대 기술을 적극 활용해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요리들을 개발해, 사람들에게 미래적인 감성을 일깨우려고 했다. 그런데 이 요리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항공음식', '탄성케이크', '이혼한 계란', '입체파 채소밭', '당근+바지=교수', '직관적인 전채', '깜짝 바나나' 등등. '최강정력'이라는 요리 이름에서는 풋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뒤로 이름만큼이나 정신 나간 레시피들이 이어진다. 강철의 맛을 느끼기 위해 강철 볼베어링을 닭고기 안에 넣고 오븐에 10분 구워 볼베어링의 맛이 닭고기에 배게 한다.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향수에 재료를 재워두는 레시피들도 여럿 있다. 심지어 다양한 향수를 풍선에 채우고, 풍선 입구 가까이에 불붙인 담배를 가져다대고 빠져나오는 향을 들이마시는 것도 요리라고 한다. 그럭저럭 먹을 만해 보이는 레시피조차 재료의 양은 대략적으로만 적혀 있고, 아예 적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조리 시간은 아예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 재료의 양과 조리 시간이 적혀 있지 않아서 오히려 요리사의 창의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식사법도 레시피만큼이나 독특하다. '항공음식'은 검은 올리브와 회향 구근, 금귤을 아무 조리 없이 그냥 먹는 간단한 요리이지만, 먹을 때 왼손으로 사포, 비단, 우단을 엮어 만든 천을 만지고 종업원이 식사를 하는 손님의 목 뒤에 카네이션 향수를 뿌리고 비행기 모터 소리와 바흐의 음악을 틀어 공감각적인 식사로 만든다. '미래주의 항공시 저녁 식사'는 고도 3000미터 높이에 오른 비행기 조종칸에서 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는 식사다. '지리학 저녁식사'에서 종업원이 몸에 두른 아프리카 지도 중 한 군데를 손님이 가리키면 손님이 가리킨 지역과 관련된 요리를 내어온다. 


  이 모든 정신 나간 소리를 아주 진지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요리가 식생활의 혁명이라고 240페이지 내내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역시 맨 정신으로 프로파간다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들의 요리 혁명에 전 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주목했다는데, 과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관심을 가져주었을지 모르겠다. 기계 문명을 느끼기 위해서 쇳덩어리를 음식에 넣고, 빵을 비행기 모양으로 만들어낸다는 것도 1차원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외국인과 연애하거나 외국 음악을 즐기고 외국 제품을 쓰면 해외병 환자로 매도하는 국수주의에, "감성적인 여성 화장실에 있는 암컷 침팬지처럼", "뱃사람 애인만큼이나 뚱뚱한 양파" 등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표현, 흑인을 항상 "검둥이"로 지칭하고 식사 분위기를 돋우는 도구로 취급하는 인종 차별까지 미래주의자들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솔직히 말하면 본문보다 본문을 패러디하면서 미래주의자들을 풍자하고 놀리는 번역자 후기가 더 재미있다. 번역자는 마리네티에게 현대의 레스토랑들을 보여주면서 파스타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사람들도 파스타를 즐겨먹고 있다. 탄수화물과 면이여, 영원하라. 파스타의 당당한 기세에 기가 죽은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요리는 현대적인 요리라기보다는 충격을 주고 주의를 끌기 위한 일종의 장난이었다는 냉정한 분석에 더욱 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아이팟으로 재생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산물 요리를 먹게 하고, 꽃 향기가 나는 캘빈 클라인의 향수 '이터너티'와 어울리도록 오렌지꽃 젤리, 바질, 바닐라 크림을 곁들인 귤 그라니타(granita, 과일과 설탕, 와인을 혼합한 뒤 얼려서 만든 디저트)를 만드는 등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21세기 요리사들의 모습을 보면 흡족해할 것이다. "마리네티를 비롯한 미래주의 일당에게 미친 구석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렇게 미친 자들 기운데 일부가 결국은 선구자가 되는 게 아닐까." 번역자의 말처럼 미래주의자들의 장광설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이 숨어있기는 하다. 미래주의자들의 방식 그대로 미래주의자들을 풍자하면서도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에서도 가치를 찾아내는 멋진 번역자 후기다. 이 후기가 이 책을 읽는 노고에 대한 보상이 되었다. 


미국의 요리사 맷 바인가르텐이 재현해낸 미래주의 요리 '직관적인 전채'. 오렌지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살라미 소시지, 버터, 버섯절임, 앤초비와 녹색 파프리카를 채운 뒤 

미래주의 격언을 적은 쪽지를 넣는다. 


P. S. 2009년 미국의 요리사 맷 바인가르텐은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미래주의 요리들을 재현한 정찬을 열었다. 바인가르텐의 말에 따르면 미래주의 요리들의 맛은 훌륭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인가르텐의 미래주의 정찬을 기사로 쓴 기자는 여전히 미래주의 요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네티즌들도 기사 댓글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사에 실린 요리 사진만 보면 그럴 듯한 요리 같긴 한데. 


참고 기사: https://dinersjournal.blogs.nytimes.com/2009/02/23/the-future-arrives-on-park-ave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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