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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창작 - 동시대 미술의 형식과 의미
테리 바렛 지음, 이지연.강주희 옮김 / 미진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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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늘 염려되었던 것은 내가 조형적인 측면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측면보다는 작품과 관련된 배경 지식에 더 강했고명도와 채도도 구분하지 못했을 정도로 조형적인 측면에 무지했다미술가는 조형적인 요소들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데 이렇게 조형적인 면에 소홀해서야 미술사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그 미술가가 어떻게왜 이러저러한 조형 요소들을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그래서 미술 창작의 지침서인미술 창작을 읽게 되었다이 책은 미술을 창작하는 학생들을 위한 책이지만미술가의 창작 과정을 이해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비아 곤잘레스, <어린 천사>, 1995.

 "인물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가상의 선은 양쪽을 정확히 대칭하여 나눈다. ... 인물의 내리뜬 눈과 은은한 색조는 대칭 구성과 어우러지며 명상에 잠긴 고요한 느낌을 강조한다."(p. 187-188.) 이렇게 이 책은 작품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조형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실제 작품들을 예시로 들면서 설명한다.


  내가 바랐던 대로 이 책은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이 책의 열세 개 챕터 중 여덟 개가 조형 요소를 다루고 있을 정도로 이 책은 조형 요소에 많은 비중을 쏟고 있다작품의 소재와 물감돌 같은 재료와 회화조각 같은 미술 형식 모두를 포함하는 매체, 작품의 물리적 구조인 형식, 미술가에게 영향을 미친 개인적 경험시대적 배경 등을 뜻하는 맥락이 합쳐져 작품의 의미를 형성하는데이 요소들은 작품 속 조형 요소를 통해 표현되거나 조형 요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조형 이론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양감질감 같은 조형 요소들이 실제 작품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직접 보여주고 있다덕분에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면을 보는 눈을 좀 더 키웠다.


마틴 퓨리어, <부커 T. 워싱턴을 위한 사다리>, 1996. 부커 T. 워싱턴은 노예로 태어나 사회적 평등 운동의 지도자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시민권을 요구하기보다 교육을 통해 흑인들을 진보시키려고 했다. 워싱턴의 이러한 전략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보기에도 위태로운 사다리와 같다고 퓨리어는 비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워싱턴의 의지를 찬양하는 의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미술 작품의 해석은 다양한 방향으로 열려 있다.

  그리고 미술가들이 어떤 태도로 창작과 비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들을 읽으면서미술가들과 미술 작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미술가는 작품의 구성 요소들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만감상자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석의 폭을 열어놓아야 한다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신이 말하려는 것과 정반대로 해석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해석의 범위를 좁히지만아예 닫아두어서는 안 된다미술가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뒤집어보면 감상자인 내가 어떻게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그리고 학생들이 만든 실제 작품에 대한 다른 학생들의 비평을 보면서내 눈에는 그저 사물들의 집합처럼 보이는 미술 작품이 얼마나 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론적인 팁 외에도 선배 미술가들이 남긴 조언들을 한 챕터에 모아 놓았다이들의 조언은 미술 창작에 대한 것이지만 나에게도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주었다. “여러분의 작품과 소통하는 사람이 단 두 명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불쾌해하지 마세요.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았는지얼마나 많은 리뷰를 받았는지로 인해 맘 상해하지 마세요여러분의 작품은 계속 존재할 것이고세상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또한 여러분의 작품이 주목을 받든 받지 못하든끊임없이 세상이 변화하는 데 영향을 줄 겁니다.” 오노 요코의 이 말은 미술 작품뿐 아니라 뭔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들각자의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그러니 내 자신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물론 미술 창작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고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하지만 미술 창작자가 아닌 감상자인 내게도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미술에 대한 내 눈을 조금은 더 넓혀주었으니. ‘이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책이야라고 생각되는 책들도 이렇게 종종 뜻하지 않은 선물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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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H.M. - 기억을 절제당한 한 남자와 뇌과학계의 영토전쟁
루크 디트리치 지음, 김한영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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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가상 인터뷰입니다.


(위) 뇌엽절제술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 헨리 몰래슨

(아래) 헨리에게 뇌엽절제술을 한 의사이자 저자의 외할아버지 윌리엄 스코빌 박사


연구자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신 거죠?


L. D. 저는 <애틀랜타>라는 지방 잡지의 전속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제가 쓴 기사가 지방잡지연합의 연례회의에서 상을 받았고, <에스콰이어 Esquire(세계적인 남성 패션 잡지)>의 편집장이 제게 이야기를 쓰지 않겠냐고 제안했죠저에겐 지방지에서 전국지로 나아갈 절호의 기 회였어요처음에는 윌리엄 퍼먼이라는 사형수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편집장은 퇴짜를 놓았습니다그러면서 이렇게 충고했죠.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쓸 수 없는 이야기를 생각해 내요저는 언제나 깊은 호기심을 느껴왔고어느 누구도 저보다 더 가깝고 확실하게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선택했습니다그가 이 책의 주인공 헨리 몰래슨Henry Molaison이었죠그는 제 외 할아버지 윌리엄 스코빌William Scoville 박사의 뇌 수술로 30초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된 환자였습니다.


연구자 제목의 ‘H.M’은 헨리 몰래슨의 이니셜이었군요왜 헨리 몰래슨이 아니라 ‘H.M’이라는 이름을 제목에 넣은 거죠?


수전 코킨 박사. 코킨 박사는 헨리가 죽을 때까지 30여 년 동안 그를 독점하고 연구해 왔다.


L. D. 헨리는 뇌 수술을 받고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후인간의 뇌 기능특히 기억 기능에 대한 연 구에서 특별한 연구 대상이 되었죠제 외할아버지에게서 헨리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MIT의 심리학 교수 수전 코킨 박사는 죽을 때까지 30여 년 동안 헨리를 독점 했습니다코킨 박사는 다른 사람에게 헨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헨리의 실명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그를 항상 H.M으로 불렀죠.


연구자 헨리가 받은 뇌 수술은 어떤 것이었나요?


(위) 대뇌의 구조.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는 측두엽의 일부분이다.

(아래) 정상인의 뇌(왼쪽)과 헨리 몰래슨의 뇌(오른쪽). 헨리의 뇌에서는 측두엽 부분이 도려내져 있다. 


L. D. 대뇌를 부위에 따라 나눈 각 부분을 이라고 하는데, 19세기부터 뇌의 일부를 제거하거나 손상시켜서 정신병을 치료하는 수술인 뇌엽절제술이 시작되었습니다뇌엽절제술을 받은 환자 들은 폭력적인 성향이나 신경과민이 사라지고 온순해졌죠하지만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수술을 받기 이전의 상태로는 되돌아가지 못했죠. 그런데도 의사들은 정신병을 뇌 수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도취되어 그러한 부작용들을 무시했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면뇌엽절제술의 시대라고 할 만큼 뇌엽절제술은 각광을 받았습니다제 외할아버지도 뇌엽절제술의 가능성을 믿고 뇌엽절제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의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뇌엽절제술에 필요한 수술 도구까지 직접 고안해 가며 많은 환자들에게 뇌엽절제술을 시행했죠외할아버지에게 뇌엽절제술을 받은 다른 환자들과 헨리가 다른 점은헨리의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양쪽 모두 절제되었다는 겁니다.

 

연구자 의사들에게 헨리가 받은 수술과 그 이후 나타난 단기기억상실 증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건가요?


L. D. 외할아버지는 수술 이후 헨리의 단기기억상실 증상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이 논문은 기억 연구의 초석이었습니다헨리는 수술 이후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수술을 받기 전의 경험들까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됐죠하지만 기술을 학습하고 향상시키는 기능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그 덕분에 뇌에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일화를 기억하는 체계와 기술을 학습하고 향상시키는 체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연구자 의사들과 과학자들에게는 뇌과학 발전의 계기였지만헨리 자신에게는 큰 불행이었겠네요.


냉각처리된 헨리의 뇌. 헨리가 죽은 뒤 헨리에게서 적출된 뇌는 2401개의 조각으로 분해되어 의사들과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L. D. 외할아버지의 수술은 헨리를 죽이고 환자 H.M을 탄생시켰습니다헨리는 2008년에 죽을 때까지 수백 건의 실험에 시달려야 했어요모든 실험은 헨리의 동의를 받은 것이었다고 하지만30초 뒤에는 그 실험이 어떤 것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동의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헨리가 죽은 뒤에도 헨리의 뇌 조각 2401개와 헨리의 뇌를 분석한 데이터의 소유권을 놓고 과학자들이 법적 분쟁을 일으키기까지 했죠.


연구자 헨리를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이 선생님의 외할아버지인데외할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내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그런데도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파헤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한 점이 놀랍습니다.


L. D. 제 외할아버지수전 코킨그 밖의 많은 의사와 과학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헨리에게 빚을 졌습니다저 역시 이 책을 쓰면서 헨리의 불행으로 이득을 보고그에게 빚을 지게 됐죠우 리 중 어느 누구도 헨리에게 진 빚을 갚지 못했습니다.

 

연구자 이 책에서는 헨리의 이야기뿐 아니라 고대의 뇌 수술선생님의 가족사과학계의 암투와 신경 전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습니다게다가 여러 시점을 오가는 구성이어서 좀 산만하다는 느낌도 드는데헨리에게 좀 더 집중하는 구성이었어도 좋지 않았을까요?


L. D. 기억이 우리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였지만우리가 기억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최근에야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헨리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우리가 어떻게 기억을 이해하게 되었는지기억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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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궤적 - 과학과 이성은 어떻게 인류를 진리, 정의, 자유로 이끌었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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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을까?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쉽지 않다. 폭력, 살인, 강간, 테러, 전쟁 등 악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스를 기다리는 줄에서 새치기하는 사람부터 우리에게 부당한 처사를 일삼는 집주인이나 직장 상사, 수십억 원의 뇌물을 받고도 아주 적은 형량만 받는 정치인까지 세상은 크고 작은 불의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미국의 과학자 마이클 셔머는 저서『도덕의 궤적』에서 인류가 과학과 이성을 통해 지금까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도덕적으로 더 진보한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셔머는 어떤 근거로 세상이 도덕적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걸까? 그리고 도덕과 과학은 서로 별개의 영역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과학이 도덕의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일까? 과학보다는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을 제공하는 종교가 도덕의 진보를 이끌어내지 않았을까? 셔머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역사가 도덕적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도덕적 진보의 원동력이 종교가 아닌 과학과 이성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우선 셔머가 도덕과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셔머가 생각하는 도덕은 감응적 존재의 생존과 번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감응적 존재는 감정, 지각, 감각, 반응, 의식이 있어서 느끼고 고통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모든 인류뿐만 아니라 동물들까지 포함된다. 그리고 과학은 이성을 토대로 일련의 논증과 경험적 입증을 거쳐 그 결론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는 절차다. 


요하네스 얀 루켄, 안네켄 헨드릭스의 화형. 헨드릭스는 1571년 마녀라는 혐의로 화형당했다. 헨드릭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 과학은 마녀사냥과 같은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생각들을 허물어뜨렸다. 


  근대 이전 노예와 여성, 동물들은 주인과 남성,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응적 존재였음에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재산이나 수단으로 취급받으며 폭력과 차별, 학대로 고통 받았다. 성소수자들은 신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비도덕적인 존재라는 이유로 박해 당했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들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에 수천 년 동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옹호하고 정당화해 왔다. 


프랑스 인권선언문. 계몽주의자들은 과학에서처럼 비판과 논쟁, 실험을 통해 민주주의와 민권의 원리를 정립해 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은 정말 도덕적으로 진보했을까? 셔머는 통계자료들을 통해 세상이 도덕적으로 진보했음을 보여준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을 비교해 보면 현대에 들어 전쟁 사망률은 크게 감소했다. 정치적 자유가 있는 나라들의 비율은 1970년대 이래 증가했고,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나라는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저자가 그 예로 우리나라와 북한을 비교한 것이 흥미롭다.) 남녀 간의 임금 격차는 점차 줄어들고 있고,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대한 생각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더 포용적인 응답을 하는 사람의 비율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채식주의자들과 인도적으로 기른 축산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도덕의 진보는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앞으로도 세상은 도덕적으로 진보할까? 셔머는 그럴 것이라고 믿고, 우리가 닿아야 할 곳이 유토피아가 아닌 프로토피아(Protopia)라고 말한다. 프로토피아는 프로그레스(progress,·진보)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로,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이상향인 유토피아와 달리, 측정할 수 있는 꾸준한 진보가 일어나는 현실의 장소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서 탐욕과 폭력성이 유전적으로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모든 감응적 존재가 번성할 수 있는 사회의 특징들을 전 세계로 퍼뜨린다면 모든 사람이 차이를 넘어서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문명 2.0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도덕의 영향권을 나 자신과 혈연관계로 맺어진 친족들을 넘어서 나와 다른 집단에 있는 타인들, 동물들, 즉 더 많은 감응적 존재들에게까지 확장해서 그들이 더 많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장소에서 진리와 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그의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역사와 사회는 도덕적 방향을 향해 항상 진보하지만은 않고 때로는 퇴보한다. 미래에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악조건이 생겨 도덕의 진보를 막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지침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프로토피아와 도덕적 진보에 대한 셔머의 믿음이 도덕의 궤적이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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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바라 스톡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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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군에게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나가고 있어. 지난 번에는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게 돼서 반가웠어. 친구라면서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게 미안했고. 나 자신도 그렇게 굳건하지 못한 상태거든. 그래도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

   불안하고 막막할 때 나는 반 고흐를 생각해. 늘 동생에게 신세만 지고 있고 그림은 팔리지 않아 불안해하면서도 "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주겠다"고 말했던 반 고흐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그와, 한없이 게으른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나 또한 보잘것없는 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걸 펼쳐보고 싶어. 그래서 유독 반 고흐에 대한 책들에 끌려. 


 이 책도 반 고흐의 삶을 그린 만화라는 점에서 끌렸어. 화려하거나 과장된 그림체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만화의 그림체는 단순하고 아기자기하다는 점에 더 끌렸고. 사람들은 보통 반 고흐하면 소용돌이치는 듯한 강렬한 그림체를 생각하잖아. 그래서 이 만화의 단순한 그림체가 반 고흐의 강렬함을 전달하기에는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내게는 반 고흐의 강렬한 삶을 단순한 그림체로 그렸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어. 단순해서 오히려 한눈에 살펴보기에 더 좋고.

  그림체는 단순하지만 색채는 반 고흐 그림 속의 색채만큼이나 밝고 화려해. 반 고흐 그림의 짧은 붓터치에서 따온 듯한 점과 짧은 선들로 반 고흐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야. 점들과 짧은 선들만으로도 반 고흐의 휘몰아치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게 신기해.

  그리고 컷마다 숨어 있는 반 고흐의 작품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어. 단순화되고 축소되어 만화 속에 숨은 반 고흐의 작품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실제 집을 모델로 한 인형의 집처럼 원본과 닮아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해. 실제 작품이 컷 옆에 있었다면 비교해 볼 수 있어서 더 좋았겠지만. 

  이 만화는 그림체뿐만 아니라 내용도 간결해. 반 고흐가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그림들을 그렸던 아를 시기부터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 오베르에서 마지막 그림들을 그리던 시기, 이 세 시기만을 다루고 있거든. 반 고흐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이 만화를 본다면 아쉬울 거야. 하지만 나는 이 만화가 반 고흐의 삶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반 고흐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들을 포착한 만화라고 생각해. 반 고흐가 기뻐하고 슬퍼했던 순간들을 단순히 그림과 글로 옮겼다기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재해석했다는 게 마음에 들어. 반 고흐의 팬으로서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사랑스러운 만화 평전이야. 

  그리고 반 고흐를 다룬 다른 책들이 그렇듯 이 만화 또한 내게 위안이 돼. 네가 뿌리 없는 나무를 그렸었던 걸 기억해. 의사는 그 나무 그림을 보고 네가 지금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처럼 불안한 상태라고 했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고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이 이토록 자연스러운데, 우리한테는 왜 그리 어려운 일일까. 빈센트도 우리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 빈센트에게 만화 속 테오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쟁기를 끌 거야.
그리고 함께 경이에 찬 눈을 돌려 데이지꽃과 
새로이 갈아엎은 흙덩이와 
봄에 싹 틔우는 관목 가지를, 
청명한 하늘의 고요한 푸른빛을,
가을의 뭉게구름을, 겨울의 헐벗은 나무를, 
저 태양과 달과 별을 바라보자.

앞날은 예측 못할지언정,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 몫으로 남을 테니. p. 132.


오베르의 언덕에 함께 서 있는 테오(왼쪽)와 빈센트(오른쪽)


  쟁기를 끄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숨이 다할 때까지 우리의 일을 하겠지. 그리고 때로는 눈을 들어 꽃과 나무, 뭉게구름과 태양, 달, 별을 바라보자. 우리 또한 우리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을 거야. 그렇게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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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죽은 그녀
로사 몰리아소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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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3월 13일, 뉴욕에서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제노비스는 죽기 직전까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38명이 그 모습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만약 우리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될까. 괜히 나섰다가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공포를 이기고,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나서주길 바라지 않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아름답고 죽은 그녀』는 이탈리아 어느 도시의 강가에서 발견된 한 여인의 시체를 통해 시체를 발견한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다섯 사람이 여인의 시신을 발견했다. 첫 번째 사람은 명품 매장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하는 전직 모델. 그녀는 명문가의 자제인 남자친구와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심하게 말다툼을 해 헤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이런 일로 경찰서에서 고초를 겪고 싶지 않아 신고하지 않는다. 두 번째, 세 번째는 학교를 땡땡이치고 데이트 하러 나온 고등학생 커플. 그들은 대마초를 피우려 했기 때문에 경찰에 들킬까 봐 신고하지 않는다. 네 번째는 정신이상이 있는 노숙자. 그에게는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들을 구덩이 안에 숨겨 놓는 버릇이 있는데, 노숙자는 죽은 여자가 자신에게 점퍼를 건네주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시신에서 핸드백과 구두만 벗겨 구덩이에 묻어둔다. 다섯 번째 사람은 기 치료사. 그는 기 치료와 안마를 해서 번 돈으로 감옥에 있는 동성 연인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자신까지 범죄에 휘말리면 감옥에 있는 동성 연인에게 해가 갈까 신고를 하지 않는다. 


 죽은 여인의 시신으로 인해 이야기가 시작하지만, 작가는 죽은 여인이 아닌, 죽은 여인을 발견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시체를 보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하지만 일상에서 크고 작은 고민을 겪으면서 그들은 양심의 목소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지금 약혼자와 헤어지게 생겼는데, 경찰서에 갔다가 내가 대마초를 피운 것을 들킬 수도 있는데, 내 인생이 엉망인데 다른 누군가를 신경쓸 여력이 어디 있어? 각자의 걱정과 고민거리에 밀려 다른 사람의 곤경은 외면해 버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책 속 다양한 인간들의 비루하고 찌질한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비루함과 찌질함 또한 돌아보게 된다. 나는 저러지 않을 거야, 라고 다짐하지만 실천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P.S. 이탈리아어 번역가들도 있는데 왜 굳이 프랑스어판을 중역했는지 모르겠다. 번역도 나쁘지 않고 역주도 꼼꼼히 잘 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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