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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바라 스톡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11월
평점 :
H군에게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나가고 있어. 지난 번에는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게 돼서 반가웠어. 친구라면서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게 미안했고. 나 자신도 그렇게 굳건하지 못한 상태거든. 그래도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
불안하고 막막할 때 나는 반 고흐를 생각해. 늘 동생에게 신세만 지고 있고 그림은 팔리지 않아 불안해하면서도 "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주겠다"고 말했던 반 고흐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그와, 한없이 게으른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나 또한 보잘것없는 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걸 펼쳐보고 싶어. 그래서 유독 반 고흐에 대한 책들에 끌려.

이 책도 반 고흐의 삶을 그린 만화라는 점에서 끌렸어. 화려하거나 과장된 그림체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만화의 그림체는 단순하고 아기자기하다는 점에 더 끌렸고. 사람들은 보통 반 고흐하면 소용돌이치는 듯한 강렬한 그림체를 생각하잖아. 그래서 이 만화의 단순한 그림체가 반 고흐의 강렬함을 전달하기에는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내게는 반 고흐의 강렬한 삶을 단순한 그림체로 그렸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어. 단순해서 오히려 한눈에 살펴보기에 더 좋고.

그림체는 단순하지만 색채는 반 고흐 그림 속의 색채만큼이나 밝고 화려해. 반 고흐 그림의 짧은 붓터치에서 따온 듯한 점과 짧은 선들로 반 고흐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야. 점들과 짧은 선들만으로도 반 고흐의 휘몰아치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게 신기해.

그리고 컷마다 숨어 있는 반 고흐의 작품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어. 단순화되고 축소되어 만화 속에 숨은 반 고흐의 작품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실제 집을 모델로 한 인형의 집처럼 원본과 닮아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해. 실제 작품이 컷 옆에 있었다면 비교해 볼 수 있어서 더 좋았겠지만.
이 만화는 그림체뿐만 아니라 내용도 간결해. 반 고흐가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그림들을 그렸던 아를 시기부터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 오베르에서 마지막 그림들을 그리던 시기, 이 세 시기만을 다루고 있거든. 반 고흐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이 만화를 본다면 아쉬울 거야. 하지만 나는 이 만화가 반 고흐의 삶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반 고흐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들을 포착한 만화라고 생각해. 반 고흐가 기뻐하고 슬퍼했던 순간들을 단순히 그림과 글로 옮겼다기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재해석했다는 게 마음에 들어. 반 고흐의 팬으로서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사랑스러운 만화 평전이야.
그리고 반 고흐를 다룬 다른 책들이 그렇듯 이 만화 또한 내게 위안이 돼. 네가 뿌리 없는 나무를 그렸었던 걸 기억해. 의사는 그 나무 그림을 보고 네가 지금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처럼 불안한 상태라고 했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고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이 이토록 자연스러운데, 우리한테는 왜 그리 어려운 일일까. 빈센트도 우리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 빈센트에게 만화 속 테오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쟁기를 끌 거야.
그리고 함께 경이에 찬 눈을 돌려 데이지꽃과
새로이 갈아엎은 흙덩이와
봄에 싹 틔우는 관목 가지를,
청명한 하늘의 고요한 푸른빛을,
가을의 뭉게구름을, 겨울의 헐벗은 나무를,
저 태양과 달과 별을 바라보자.
앞날은 예측 못할지언정,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 몫으로 남을 테니. p. 132.

오베르의 언덕에 함께 서 있는 테오(왼쪽)와 빈센트(오른쪽)
쟁기를 끄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숨이 다할 때까지 우리의 일을 하겠지. 그리고 때로는 눈을 들어 꽃과 나무, 뭉게구름과 태양, 달, 별을 바라보자. 우리 또한 우리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을 거야. 그렇게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