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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창작 - 동시대 미술의 형식과 의미
테리 바렛 지음, 이지연.강주희 옮김 / 미진사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늘 염려되었던 것은 내가 조형적인 측면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측면보다는 작품과 관련된 배경 지식에 더 강했고, 명도와 채도도 구분하지 못했을 정도로 조형적인 측면에 무지했다. 미술가는 조형적인 요소들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데 이렇게 조형적인 면에 소홀해서야 미술사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 그 미술가가 어떻게, 왜 이러저러한 조형 요소들을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미술 창작의 지침서인『미술 창작』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미술을 창작하는 학생들을 위한 책이지만, 미술가의 창작 과정을 이해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비아 곤잘레스, <어린 천사>, 1995.
"인물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가상의 선은 양쪽을 정확히 대칭하여 나눈다. ... 인물의 내리뜬 눈과 은은한 색조는 대칭 구성과 어우러지며 명상에 잠긴 고요한 느낌을 강조한다."(p. 187-188.) 이렇게 이 책은 작품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조형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실제 작품들을 예시로 들면서 설명한다.
내가 바랐던 대로 이 책은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의 열세 개 챕터 중 여덟 개가 조형 요소를 다루고 있을 정도로 이 책은 조형 요소에 많은 비중을 쏟고 있다. 작품의 소재와 물감, 돌 같은 재료와 회화, 조각 같은 미술 형식 모두를 포함하는 매체, 작품의 물리적 구조인 형식, 미술가에게 영향을 미친 개인적 경험, 시대적 배경 등을 뜻하는 맥락이 합쳐져 작품의 의미를 형성하는데, 이 요소들은 작품 속 조형 요소를 통해 표현되거나 조형 요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조형 이론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점, 선, 면, 양감, 질감 같은 조형 요소들이 실제 작품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직접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미술 작품의 조형적인 면을 보는 눈을 좀 더 키웠다.

마틴 퓨리어, <부커 T. 워싱턴을 위한 사다리>, 1996. 부커 T. 워싱턴은 노예로 태어나 사회적 평등 운동의 지도자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시민권을 요구하기보다 교육을 통해 흑인들을 진보시키려고 했다. 워싱턴의 이러한 전략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보기에도 위태로운 사다리와 같다고 퓨리어는 비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워싱턴의 의지를 찬양하는 의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미술 작품의 해석은 다양한 방향으로 열려 있다.
그리고 미술가들이 어떤 태도로 창작과 비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들을 읽으면서, 미술가들과 미술 작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가는 작품의 구성 요소들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만, 감상자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석의 폭을 열어놓아야 한다.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신이 말하려는 것과 정반대로 해석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해석의 범위를 좁히지만, 아예 닫아두어서는 안 된다. 미술가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뒤집어보면 감상자인 내가 어떻게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 그리고 학생들이 만든 실제 작품에 대한 다른 학생들의 비평을 보면서, 내 눈에는 그저 사물들의 집합처럼 보이는 미술 작품이 얼마나 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론적인 팁 외에도 선배 미술가들이 남긴 조언들을 한 챕터에 모아 놓았다. 이들의 조언은 미술 창작에 대한 것이지만 나에게도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주었다. “여러분의 작품과 소통하는 사람이 단 두 명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불쾌해하지 마세요.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았는지, 얼마나 많은 리뷰를 받았는지로 인해 맘 상해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작품은 계속 존재할 것이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 또한 여러분의 작품이 주목을 받든 받지 못하든, 끊임없이 세상이 변화하는 데 영향을 줄 겁니다.” 오노 요코의 이 말은 미술 작품뿐 아니라 뭔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들, 각자의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 그러니 내 자신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물론 미술 창작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고, 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미술 창작자가 아닌 감상자인 내게도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미술에 대한 내 눈을 조금은 더 넓혀주었으니. ‘이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책이야’라고 생각되는 책들도 이렇게 종종 뜻하지 않은 선물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