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과 안생
칭산 지음, 손미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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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소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스포일러 포함


 올해 초에 중국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보고 마음이 아렸었다. 서로를 소중히 여겼지만 서로 너무나 달라서 엇갈려야 했던 두 친구의 애증. 나에게도 그토록 지독하게 아끼고 미워했던 친구가 있어서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칠월과 안생』이 우리나라에 번역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읽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 같아서 이제야『칠월과 안생』을 읽게 되었다. 


"칠월七月이 안생安生을 처음 만난 건 열세 살 때였다. 입학식장에 길게 늘어선 낯선 얼굴들이 눈부신 가을 햇살에 어른거렸다. 그 중 한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이 첫 문단에서부터 맑고 싱그러운 영화의 분위기가 다시 떠올랐다. 영화 속 싱그러움, 두 친구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원작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평범한 삶을 꿈꾸었던 모범생 칠월(마사순)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안생(주동우). 그러나 둘의 입장이 뒤바뀌어 둘은 상대가 원하던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화 쪽을 더 높이 평가한다. 원작에서도 안생이 "왜 나는 칠월이 될 수 없을까"라고 부러워하는 말을 하지만, 평범한 칠월이 독특한 개성을 지닌 안생에게 일방적으로 매혹되는 느낌이다. 안생도 칠월을 아끼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칠월이 안생을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편이다. 심지어 안생이 자기 남자친구를 유혹해 그의 아이까지 가졌는데도 칠월은 임신한 안생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영화에서는 칠월의 남자친구 가명의 딸이 안생이 아니라 칠월이 낳은 아이로 설정이 바뀌었다.) 영화에서 두 친구가 상대가 원하던 삶을 살게 되면서 상대의 입장에 놓이게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원작 속 안생이 공중에 붕 뜬 것처럼 살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것과 달리, 영화 속 안생은 칠월처럼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오히려 칠월을 돌보게 된다. 반면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안생을 돌보던 칠월은 안정된 삶을 버리고 여행을 떠난다. 현실에서는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면서 칠월의 여행이 끝나지만, 안생의 소설 속에서 칠월은 여전히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매혹된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지독하게 아끼다 못해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된 관계. 각본가들이 둘의 관계를 더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칠월과 안생」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개 단편은 하나의 이야기나 다름 없다. 안安(또는 란藍)이라는 이름의 아름답고 자유분방하지만 불안정한 여자와 린林이라는 잘생기고 따뜻한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린은 인내와 사랑으로 안을 감싸려 하지만 안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한 채 붕 뜬 것처럼 살아간다. 린은 결국 현실에 지쳐 안을 포기하고, 안은 자살하거나 살해당하는 등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작가의 소설 속에서 사람은 세 부류다. 아름답고 불안정한 젊은 여성(안)과 잘생긴 외모에 그녀보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만 결국 그녀를 놓게 되는 남자(린), 그리고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 이 틀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벗어난 게「칠월과 안생」인데, 이름에 '안'이 들어가 있듯이, 안생도 '아름답지만 불안정한 여자 주인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주인공 가명도 다른 소설 속 남주인공 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소설 속 평범한 사람들이 여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독특한 여주인공을 이해하고 포용하려 하는 칠월이 이 소설집에서 가장 개성적인 인물이다.


  아련한 첫사랑과 가혹한 현실, 그 사이에서 무너지는 남녀의 사랑. 이런 비극적이고 애틋한 정서, 한없이 여린 풀꽃 같다가도 독을 내뿜는 독초 같은 여주인공의 매력. 이런 분위기와 정서의 묘사는 정말 뛰어나다. 그 덕분에 중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내용이 열 편 내내 반복된다는 것이다. A 단편의 안A를 B단편의 안B와 바꿔도 문제가 없을 만큼 비슷한 인물들, 비슷한 이야기, 비슷한 정서가 반복된다. 처음 들을 때는 아름다워 매혹되지만 들을수록 지치는 음악 같다. '아름답고 청초하고 신비스럽지만 자기 고독에 잠겨 비극에 빠지는 여자'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둘러싼 세계에 작가 자신이 매혹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소설을 써도 자기복제만 하고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요즘 일본 애니메이터들이 현실에서 인간을 관찰하지 않고 애니메이션 캐릭터만 보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했었다. 칭산 작가는 현실이 아니라 자기 세계 속 캐릭터들만 보면서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느낌이다. 자기 세계에서 눈을 돌려 더 넓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작가의 동어반복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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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노트 - 알고 싶은 클래식 듣고 싶은 클래식
진회숙 지음 / 샘터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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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됐을 때 '책에 실린 QR 코드로 클래식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갔다. 종이로 된 책 중에서 QR 코드를 활용하는 책은 처음 봤으니까. 음악은 백 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듣는 것이 더 나으니, 음악을 주제로 하는 책으로서는 음악을 직접 들려주는 게 큰 장점이 될 것이다. (이미 3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신기한 신제품을 처음 써 보는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친절하게도 책 서두에서부터 QR 코드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QR 코드를 비교적 정확히 인식해 주는 앱들까지 추천해 준다. 사용법대로 QR 코드를 인식하니 정말 해당 곡의 유튜브 영상이 뜬다.


책에 실린 QR 코드를 QR 코드 앱으로 스캔하면 해당 곡의 유튜브 영상 링크와 연결된다.


실제로 책 속 QR 코드를 스캔하면 이런 영상 링크가 뜬다. 이 영상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남주인공 카바라도시가 부르는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안타까운 것은 유튜브의 특성상, 해당 계정이 사라졌거나 저작권 문제로 영상이 삭제되는 등의 문제로 지금은 연결되지 않는 링크가 여러 개 있다는 것이다. 해당 링크가 보전되도록 수시로 점검, 업데이트하겠다지만, 출판사가 마냥 이 책만 관리할 수는 없으니 힘든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QR 코드는 320여 개나 된다. 그래서 링크가 연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직접 유튜브에서 곡 이름으로 검색해서 다른 버전을 찾아 들었다. 320여 개의 곡을 다 듣다 보니 이 책을 다 읽는 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덕분에 한 달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었다. 


책에 실린 QR 코드로 볼 수 있는 영상 중 하나.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 '올림피아의 아리아'. 기계 인형 올림피아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 올림피아 역 소프라노의 기계 인형 연기가 인상적이다.


 QR 코드로 직접 해당 곡을 들으니 텍스트로 된 설명만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프시코드 같은 옛 클래식 악기 연주를 직접 들으니 그 악기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연주하며 어떤 음색을 지녔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피아노 멜로디 자체는 아름답지만 오케스트라 파트는 피아노의 반주 수준으로 빈약하다는 이야기도 직접 들으니 납득이 됐고. 아리아의 경우는 그 곡이 오페라 안의 어떤 장면에서 나오는지를 직접 볼 수 있어, 그 곡이 어떤 맥락에서 불리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오페라 속 성악가들의 연기와 의상, 무대를 함께 볼 수 있어 더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책은 QR 코드라는 장치에만 기대지 않는다. 클래식 곡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이나, 클래식 음악가들의 사생활 이야기로 내용을 채우는 책들과 달리 이 책은 클래식 음악의 ABC부터 차근차근 알려준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부터 클래식 악기들, 음악 이론과 곡의 형식, 음악 상식들까지. 오케스트라에는 왜 지휘자가 필요한지, 왜 오보에의 A음으로 오케스트라 악기 전체를 조율하는지, 현대에 탄생한 12음 기법은 어떤 거인지, 실내악, 환상곡, 교향곡, 협주곡은 어떤 형식의 곡인지 등등. 초중고등학교 음악 시간 이후로 음악 이론은 잊어버렸어도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내용의 질에 있어서나 QR 코드라는 새로운 장치에 있어서나 다른 클래식 책들과 차별화되는 책이다. 
한 번만 본 지식은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지니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으면 좋을 것이다. 워낙 많은 곡들이 소개되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곡을 종종 꺼내 들어도 좋을 것이고. 한 번 읽어보고 끝내기보다는 곁에 두고 오래 읽어 보고 싶다. 

P.S 1. 저자는 미술 비평가 진중권의 누나다. 가족이라고 해서 다 닮지는 않지만, 누나나 동생이나 각자의 분야를 대중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데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멜라니 C가 부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넘버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정선아가 부른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한국어 버전 '어떻게 사랑하나'


P. S. 2. 오페라를 원어로 공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넘버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원곡과 한국어 버전을 예로 들었는데, "...하나, ...했어, 라는 유아적인 뉘앙스의 종결어미 때문인지,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마리아의 고뇌가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라는 말에서 한국어 버전을 깎아내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원어 공연의 중요성으로 든 근거들은 납득이 되지만 '유아적인 뉘앙스'의 종결어미라니. 

  오페라와 같은 이유로 수입 뮤지컬은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원어로 공연해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라이센스 뮤지컬도 좋아하는 뮤덕으로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가 예시로 든 두 영상 중에서는 나는 오히려 한국어 버전에 더 공감하고 감동했다. 한국어로 개사되면서 원어 가사에 맞춘 리듬과 강세가 어그러지고 가사 속 미묘한 뉘앙스, 의미가 뭉뚱그려지는 것은 인정하지만, 모국어로 가사를 들었을 때 노래의 감정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의미 전달은 한국어 자막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했지만, 무대와 한국어 자막으로 시선이 분산되는 것보다 한국어로 바로 듣는 것이 의미를 전달하는 데 더 유리하다. 그리고 프랑스 뮤지컬의 라이센스인 <노트르담 드 파리>나 미국 뮤지컬의 라이센스인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넘버들처럼 의미 전달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음악적인 운율 모두를 살리는 번역이 있다. 이런 좋은 번역, 좋은 라이센스 공연도 필요하고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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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 샘터 우리문화 톺아보기 2
이지양 지음 / 샘터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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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즐겨듣는 음악의 범위는 아주 한정적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나 좋아하는 뮤지컬들의 넘버 외에는 아는 음악이 얼마 없다. 특히 국악은 중학교 때 수행평가 때문에 본 공연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국악 공연일 정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옛 글 속의 우리 음악 이야기를 모은 책 『홀로 앉아 금을 타고』를 알게 되었다.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져오진 않았지만 우리 역사에는 관심이 많았고, 그 동안 잘 몰랐던 것에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은 한문학자 이지양이 고문헌 속의 우리 고전 음악 이야기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첫 번째 글이 우리 음악을 잘 모르는 지금 세대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담은 글이니, 저자의 목표가 우리 음악을 더 친숙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 이 책을 읽은 뒤에도 국악은 내 귀에서 아직 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초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국악 지식은 기억 저 편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평조, 계면조가 어떤 조성이고 도드리장단, 중중모리장단이 어느 정도의 박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국악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저자가 국악 전공자가 아니라 국악을 사랑하는 한문학자이기 때문에 서문에서부터 음악 이론에는 무식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출판사에서라도 용어 설명을 추가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음악은 글로 읽는 것보다 귀로 들을 때 확실히 아는 것인데, 이 책은 음악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음악을 이야기한 글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 글로만 나오는 우리 음악이 궁금해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 그런데 글로 읽는 노래와 직접 듣는 노래는 전혀 달랐다. 클래식 음악에서의 '라르고largo(느리게, 표현을 풍부하게)'가 빠르게 느껴질 정도로 느릿느릿한 가사와 시조창에 충격을 받았다. 책에 나온 가사가 '봄잠을 느지막이 깨어 중창을 반가이 걷으니'인데 실제로 들어보면 '보오오오오오옴자아아아암으으으을 느으으으으으지이이이이이이마아아악이이이이이 깨어어어어어어으 주우우우웅차아아아앙으으을 바아아아아안가이이이이이 거어어어얻으으으니'이다. 과장이 아니다. 그리고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쓴 게 아니라 한자음 그대로 읽는 가사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坐撫樹而終日 濯淸天而自潔'을 "앉아서 나무를 어루만지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맑은 냇물에 몸을 씻어 스스로 깨끗하게 하기도 한다"고 풀어쓰는 게 아니라 '좌무수이종일하고, 탁청천이자결이라'라고 한자음 그대로 읽는 식이다.) 아직은 국악보다는 클래식이, 클래식보다는 가요가 귀에 익숙하고 편하다. 

  하지만 국악 속에 배어 있는 옛 사람들의 생활상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을 보낼 때 부르는 노래 <배따라기>는 항구가 있는 고을마다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신이 떠날 때도 <배따라기>를 불렀다고 하는데, 아예 떠나는 것도 아니고 잠시 여행을 다녀 오는데 이별이라며 슬퍼하는 게 언뜻 생각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여행을 갔다 사고를 당해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만큼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여행길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판소리 <춘향가> 중 이몽룡이 과거를 보는 장면인 <춘당대시과> 부분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 풍경을 어느 역사 기록보다 생생하게 전한다. 

  우리 옛 노래에 중국 한시와 고사에 관련된 가사가 왜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화는 그것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향유하는 사람들의 것이니, 처음에 누구에게서 나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저자의 말에 납득이 되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한자와 중국 문학은 널리 공유되던 문화적 자산이었을 테니까. 근대 이전의 유럽 문화권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예술을 공유했던 것처럼. 서민들이 즐기는 판소리, 민요에서도 중국 옛 고사와 한시가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중국 한시와 고사가 뿌리 깊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 같다. 


<무신진찬도병> 중 '선유락'이 그려진 부분.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불러주던 노래 <배따라기>는 외국 사신을 떠나보낼 때도 불렸다. 이 때 <배따라기>에 맞추어 기녀들이 추던 무용이 선유락이다.


신윤복, <서생과 아가씨>. 이 그림은 변방 지역의 거친 분위기를 그린 노래 '관산융마'에 대한 글과 함께 실려 있지만,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옛 노래들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책 중간중간에 들어간 옛 그림들이 이해를 도우면서 전통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모든 그림이 책의 내용과 딱 맞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 소개되는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 음악이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고, 가사와 어울리는 산수화나 풍속화를 보면서 그 노래 특유의 정취를 더 짙게 느꼈다. 

  우리 음악을 기초부터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다. 나처럼 읽고 나서도 국악이 아직은 귀에 낯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옛 우리 음악 속의 마음들은 와 닿는다. "누군가 저 멀리 있는 이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가는 것이다. 자기와 직접 인연이 닿지 않아도 자기 내면의 온기를 늘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그리운 대상이 없어서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고 삭막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미덥고 정이 가지 않나?"(「그녀와 놀고픈 봄날의 꿈-춘면곡」 중)
"...칭찬조차 다시 상처가 되고 마는 그런 때, 메시지는 없이 사람의 따뜻한 목소리만으로 얼러 주는 <구음 시나위>가 진정으로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영혼을 얼러 주는 가락-구음 시나위」 중) 아직 국악이 귀에 낯설다 해도, 우리 옛 음악 속에 담긴 옛 사람들의 마음을 전해주었으니, 우리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의 씨앗은 심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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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우주생각 - 오지랖 우주덕후의 24시간 천문학 수다
지웅배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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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주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할 때마다, NASA 우주정거장에서 보내주는 실시간 방송을 본다. 언제 접속해도 보이는 것은 우주정거장과 지구, 까만 우주 공간뿐이다.(운 좋을 때는 유영하는 우주인도 보이긴 하지만.) 하지만 방송을 볼 때마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화면 속에서는 파란 바다와 하얀 구름만 보이는 지구 어딘가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지구는 우주 공간에 덩그라니 놓여 있으니까. 지구가 떠 있는 광활한 우주 공간은 나를 두렵게 하면서도 매혹시킨다. 

  우주에 매혹되다 보니 과학책들 중에서도 천문학 책에 더 눈길이 간다. 하지만 뼛속까지 문과인 나는 천문학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천문학 책을 읽는다. 그렇게 읽은 천문학 책 중에서 『하루종일 우주생각』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책이었다. 

  이 책은 하루의 일상에 빗대어 우주를 설명한다.아침, 낮, 저녁, 밤이라는 네 개의 시간대 안에 오전 6시 30분 '깊고도 달콤한 침대 위의 블랙홀'부터 밤 12시 30분 '늦은 밤 TV 잡음 속 우주의 소리'까지 16개의 하루 일과와 엮은 우주 이야기가 들어 있다.  예를 들자면, 아침 7시에 커피를 끓이는 일과는 이렇게 우주와 연결된다. "물이 다 식고 컵 전체에 커피 가루가 골고루 스며들 때까지,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물의 흐름을 따라 커피 가루도 함께 움직인다. 온도가 높으면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아지면서 위로 올라가려 하고, 온도가 낮으면 밀도가 무거워지면서 아래로 내려가려는 흐름, 이 두 가지 흐름이 함께 나타나면서 작은 커피잔 속에는 인상적인 대류 사이클이 그려진다. 마치 지금 이 시간에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밝은 태양처럼. 태양을 비롯한 우주의 모든 별들은 그 표면에서 거대한 대류 사이클을 그려내면서, 중심에 가라앉은 물질이 표면 위로 올라가며 골고루 섞이고 있다." 이렇게 친근한 일상에 빗대니 천문학적 지식이 더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저자가 일상 이야기와 우주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루 종일, 24시간 동안 우주에 푹 빠져 있는 '우주덕후'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모닝 커피에서 별들의 핵융합을 떠올리고, 퇴근길 꽉 막힌 도로에서 은하 속 별들이 꽉 차 있는 나선팔을 떠올리는 모습에서 그가 우주와 천문학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다. 블랙홀이 강한 중력으로 주변의 가스와 별을 집어삼키는 것을 '과격한 먹방'이라고 하고, 변광성의 밝기가 주기적으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것을 변광성의 비트, 우주가 천문학자들에게 허락하는 유일한 마약이라고 하는 등 요즘의 유행어도 자연스럽게 섞어 쓰는 문체가 재기발랄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상 속의 우주를 보면서, 일상 또한 우주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수명이 다한 별이 폭발해서 사라진 뒤 남은 찌꺼기는 계속 우주에 남아, 별과 행성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을 만드는 데 재활용된다. 우리 몸과 모닝 커피 속에도 별이 남긴 다양한 화학성분들이 남아 있다. 안방에 놓인 TV도 우주 빅뱅(우주를 탄생시킨 대폭발)이 남긴 에너지의 파장을 미세하게나마 감지한다. 모든 방송이 끝난 후 TV에서 들리는 잡음의 파도 속에는 빅뱅의 여운이 아주 일부 섞여 있다. 우주는 보이지 않게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거대한 우주의 작은 천체 조각'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언제라도 나를 까마득하게 먼 곳으로 집어삼킬 것 같았던 우주가 늘 나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던 우주가 조금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 책의 가장 큰 목표가 그 동안 너무나 당연해서 느끼지 못했던 '우리가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 포근하게 안긴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만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저자는 그 목표를 충분히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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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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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일곱 개의 단편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사소한 엇갈림 때문에 서로 관계가 끊어지거나,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혼자 남겨진다. 상대가 말도 없이 멀어지거나 세상을 떠나서. 

  이런 관계의 단절은 나 자신도 현실에서 자주 겪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약하고 불안정한지, 생각지도 못한 일로 관계가 깨진 적이 수도 없다. 지금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 속에서도 서로 어긋날 기미가 바닷속 암초처럼 숨어 있다. 용하게 서로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다 해도, 한쪽이 세상을 떠나면 그 관계는 끝난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이 책 안의 단편들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뜻하지 않게 겪는 관계의 단절을 통해서. 

  그래서 이 책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현실도 우울한데 소설마저 우울한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드니 더 지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도 그렇게 뜻하지 않은 이별을 겪었어'라고 말하는 이 책 속 단편들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나는 왜 그 때 그애를 잡지 못했을까, 그 사람은 갑자기 왜 내게서 멀어졌을까, 우리는 어떤 관계였던 걸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고, 고민해 봐도 이해할 수 없다. 실패한 관계들이 남긴 상처가 때로는 쓰라리고 쿡쿡 쑤신다. 내가 멍청하고 관계에 서툴러서 그랬던 거야, 라고 자책할 때 이 책은 말했다. 너만 그런 게 아냐, 네 잘못만은 아냐. 관계는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거니까, 어느 한 쪽의 잘못만으로 끊어지는 게 아니라고. 

  이 책 속 인물들은 어떤 관계든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만히 서로의 손을 잡는다. 이미 끝난 관계에서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담담히 관계의 끝을 받아들인다. 죽음으로 갈라진 관계에서도 죽은 이는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과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서 같이 울고 후련해진 기분이 든다.한 점의 허세나 가식, 자의식 과잉 없이 일기를 쓰듯 조용하고 담담한 문체 덕분에 마음이 더 맑아진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한 소설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들끓어 오르게 하는 드라마틱한 소설도 있다.  그래서 『쇼코의 미소』의 서사가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듯, 이 책을 읽으면서 끊어진 관계들로 인해 상처 받고 요동 치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모든 관계에 끝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다양한 관계의 끝을 보여주는『쇼코의 미소』 속 이야기들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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