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에드워드 호퍼, <좌석차>, 1965.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겪은 삶의 변화와 고독, 불안을 그린 화가.  많은 사람들이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 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시인 마크 스트랜드 Mark Strand 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조금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고.  호퍼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현실과는 다르다. 그의 그림 <좌석차> (1965) 속 열차에는 승객들의 머리 위 짐칸도, 문의 손잡이도 없다. 사람과 사물, 공간의 형태와 색채는 현실보다 단순화되어 있다.  시간이 멈춘 세상인 듯 그림 속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멈춰 있다.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스트랜드는 호퍼의 그림과 당대 사회를 연결시켜서 보던 해석에서 벗어나, 그의 그림 속 공간을 읽는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새는 사람들>, 1942.


  스트랜드는 호퍼의 작품 속 공간에 '나아가라'와 '머무르라', 이 상반된 두 명령어가 공존하면서 긴장감을 자아낸다고 이야기한다. <밤을 새는 사람들>(1942)에서 사다리꼴 모양 창문의 두 변은 서로를 향해 기울어 있지만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두 선이 만나는 소실점은 캔버스를 벗어나 그림의 바깥쪽 어딘가에 존재한다. 사다리꼴은 그 점을 향해 계속 가라고 우리를 재촉하지만, 어두운 도시 속 식당의 환한 실내는 우리에게 머물라고 한다.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은 팽팽하게 맞선다. 


에드워드 호퍼,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 1960.


 호퍼 그림 속 공간에서 대비되는 또 다른 한 쌍은 시각적 요소 서사적 요소다.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1960)에는 잡지를 읽고 있는 중년 부인과 발코니에 걸터 앉아 어딘가를 바라 보는 젊은 여자가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지,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야기가 제자리를 잃고 너무 멀리 가 버리면 그림 속 기하학적인 형태들(세모난 지붕과 네모난 벽, 나란히 평행하고 있는 집들)이 우리의 시선을 다시 그림 속으로 불러들인다.  눈에 보이는 것도, 이야기도 그림 전체를 지배하지 않고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1932.


  호퍼의 그림 속 공간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그들은 함께 있어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뉴욕의 방>(1932)의 두 남녀는 함께 있지만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이들 사이의 소원함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림에서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더욱 커지는 고립감이 표현되어 있다.


에드워드 호퍼, <빈 방의 빛>, 1963.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이다." <빈 방의 빛>(1963)에서는 사람들마저 사라지고 공간과 빛만이 남는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은 한 순간 반짝이고 언젠가는 사라지는 빛이다. 그러나 호퍼의 빛은 반짝이지도 흐르지도 않는다. 어느 한 순간에 멈추어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호퍼의 그림은 현재진행 중인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이나 일어난 직후, 짧고 고립된 순간들만을 표현한다. 

  한 마디로 호퍼의 그림 속 공간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공간이다. 그림 속 사람들은 우리가 추측할 수만 있는 어떤 비밀스러운 일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마치 제목을 알지도 못하는, 대사를 알아들을 수도 없는 공연을 보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그림 속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지만 개입할 수도, 침범할 수도 없다. 그 공간은 일상적인 공간으로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은 벗겨져 나가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고립된 순간들, 고립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스트랜드의 해석이 단 하나의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배경 지식이 아닌 작품 자체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작품 자체에 집중하면서 나만의 시각으로 그 작품을 바라보는 법. 그렇게 호퍼의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호퍼의 그림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P. S. 이 책의 원서 초판은 흑백 도판들이 실린 페이퍼백이었다고 한다. 한국판 번역자는 호퍼의 그림을 컬러 도판으로 싣기 위해 열 군데도 넘는 기관들에 그림 사용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몇 년만에 컬러 도판이 실린 한국판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마크 스트랜드는 한국판 번역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름다운 책이네요. 미국판보다 훨씬 좋아요."라면서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용기를 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마트 쉘터 공간 - 예술과 공학이 만나다 스마트 쉘터 공간 1
고경호 외 지음 / 미진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쉘터shelter'는 피난처, 은신처, 오두막, 수용소, 쉼터, 주거지, 보금자리 등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이다. '스마트 쉘터smart shelter'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더 기능적이고, 더 경제적이고, 더 안전하고 편안하며 지속 가능한 주거지를 말한다. 자연재해와 테러, 전쟁은 과학 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고, 어떤 대책을 써 봐도 주택난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어느 때보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보금자리가 필요한 때다. 그래서 2015년 9월부터 스마트 쉘터 공간을 만들기 위한 철학, 건축, 예술, 공학 분야에서의 합동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책은 그 3년 동안 연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 사보이 하우스. 벽이 아닌 기둥만으로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필로티 구조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지진에 취약하다.


  1부에서는 미술을 통해 '더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 있다.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어떤 사람은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보기에 아름다운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공간,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공간, 경쾌하고 명확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는 공간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능과 아름다움 모두를 갖춘다는 것은 모순이다. 건물을 벽이 아닌 기둥만으로 지탱하는 필로티piloti 구조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건물 전체에 투명하고 가벼운 느낌을 주지만, 지진에 의한 진동에는 취약하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의 획일성에 반발해 건물 하나 하나의 개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 건물이 배제했던 장식을 다시 건물에 넣거나 한 구조가 한 가지 기능을 갖는 모더니즘 건물과 달리, 한 구조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개성적으로 보였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도 그 장소가 가지는 개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모습을 가진다. 두 건축 모두 인간의 실질적인 삶, 그 장소에서 사는 사람들 고유의 전통과 개성, 삶의 방식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 하우스>. 누나 마르가레테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이 건축 전 과정을 전담한 이 저택에서 현실의 문제를 가리는 전통 양식, 화려한 장식은 배제되어 있다. 


  미술가들과 건축가들은 인간의 삶이 공간에 반영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누나 마르가레테가 살 저택 '비트겐슈타인 하우스'의 건축을 맡았다.(기초 설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친구였던 파울 엥겔만이 시작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설계 초안의 일부를 변경하고 내부 설비 디자인과 건물의 완공에 이르는 전 과정을 전담했다.) 집의 중심이 되는 지상 1층을 예술가들이 공연하고 교류하는 장으로 만든 것은 근대 이전부터의 가문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지만, 전통적인 양식과 화려한 장식은 거부했다. 그에게 윤리는 삶에서 가치 있는 것, 진실로 중요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었고, 집을 짓는 것은 거주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저택이 있던 빈의 심각한 주택난과 계급 갈등을 가리는 전통 양식과 장식을 배제했다. 그러나 이 공간조차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거친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순수하고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 저곳을 떠돌다 낡은 오두막집에 머물며 철학을 연구했다. 


안드레아 지텔의 작품 <A-Z 이스케이프 비히클>에 사용자가 들어가 있는 모습


 한편 미국의 미술가 안드레아 지텔은 다양한 쉘터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이 도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1997년 처음 전시되었던 <A-Z 이스케이프 비히클 A-Z Escape Vihicles>은 바퀴가 달린 욕조 모양의 스테인리스 통 두 개가 맞붙어 있는 형태의 작품이다. 작품 내부는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꾸미고 변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겪는 스트레스, 억압, 구속에서 벗어나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현대인을 위한 쉘터이다. 그녀 밖에도 여러 미술가들과 건축가들, 디자이너들이 유목민들처럼 일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 누구나 조립하고 공유하고 배포할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있다. 주택 문제에 시달리는 서민들이나 전쟁으로 집을 잃은 난민들까지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대안이 되어 주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2부에서는 공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스마트 쉘터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건축가 김덕수는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과 보행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공간, 통합정보센터가 도시에서의 정보 처리의 중심 역할을 하고, 대중교통의 환승 거점에 공용 사무 시스템, 다목적 문화 시설이 설치되며 외곽 지역에는 직접 농산물을 생산해 지하 구조물로 도시 곳곳에 농산물을 배송하는 실내 재배 시스템이 설치된 도시 공간을 제안한다. 건축가 송복섭은 스마트 쉘터에서 기능성, 경제성, 지속 가능성, 안정성, 편안함, 사회적 기능, 미학적 아름다움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고려되어야 할 특성들이다. 그리고 공간을 건물-가로-시설-지구-도시-광역 등의 단위로 분류하고 공간 단위에 따라 체계적으로 스마트 도시를 계획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 김언용은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전 세계의 도시가 개성을 잃고 획일화될 수 있고, 효율적인 도시 관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비판들을 이야기하면서, 스마트 공간이 가진 위험성 또한 잊지 않는다. 건축가 지승열은 아직은 사람의 뇌파(뇌세포가 활동할 때 일어나는 전류)가 전달하는 정보에 기반한 자동화 시스템이 스마트 쉘터에 적용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뇌파와 뇌파를 이용하는 자동화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3년 동안의 연구 결과라지만 아직까지는 큰 그림을 제시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 큰 그림을 실질적인 세부 내용으로 채워나가는 것은 후속 연구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사람들이 주택난, 자연재해, 전쟁과 테러의 위협에서 벗어나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예술과 공학이 서로 접점을 가진다기보다는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의 접점을 찾으며 더 좋은 생각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도판이 작아서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 데(특히 공학 파트의 스마트 쉘터, 시스템에 대한 도판들) 도움이 되지 못하고, 2부의 공학 파트가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이 읽기에 좀 어려운 것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소설,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포일러 포함 


 19세기 후반 러시아 오룔 지방에서 끔찍한 사건이 잃어났다. 젊은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귀에 끓는 납을 부어 살해한 것이다.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사람을 그토록 잔혹하게 죽였다는 것에 놀랐다. 오룔 출신인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고향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원작인「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다. 


  레스코프는「러시아의 맥베스 부인」과 이 책에 실린 다른 단편「쌈닭」을 비롯해 고향 오룔 지방의 다양한 여인들을 그려낸 소설을 12편 쓰려고 했지만, 실제로 소설로 쓰여진 것은 이 두 편이다. 두 단편의 주인공 모두 선하고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음먹은 일을 한다. 그래서 남들에게 맥베스 부인(셰익스피어의 희곡「맥베스」에서 여주인공 맥베스 부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남편에게 악행을 더 부추긴다.), 쌈닭(원제는「여전사」)이라고 불리지만, 그녀들은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뿐이라고.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영화 속 캐서린(플로렌스 퓨, 원작에서는 카테리나)의 모습. 캐서린은 가난 때문에 나이 많은 상인에게 팔리듯 시집 온 후 답답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아간다.


"깨어나면 또 다시 러시아의 권태, 상인 집의 권태가 찾아온다. 그걸 견디느니 차라리 목을 매고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이다."


  영화에는 이 문장이 나오지 않지만, 영화 속 주인공 캐서린(원작에서는 카테리나)의 목소리로 읽히는 듯 하다.(영화에서는 배경이 영국으로 바뀌었으므로 '러시아'를 '영국'으로 바꾸면) 젊은 나이에 나이 많은 홀아비 상인에게 팔리듯 시집을 온 카테리나의 삶은 권태의 연속일 뿐이었다. 시집 온 지 5년이 되었어도 아이가 없다고 시아버지와 남편은 카테리나를 죄인 취급 한다. 친한 친구도 없고, 오락거리도 없다. 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소설을 읽을 때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집 안에서 고집스럽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던 캐서린(플로렌스 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에게 제멋대로 구는 하인 세르게이(영화 속 세바스찬)를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바뀐다. 세르게이는 카테리나의 방에까지 찾아와 그녀를 유혹했고, 그녀도 세르게이에게 빠져든다. 그녀는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욕망에 눈을 뜨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카테리나의 불륜을 눈치채면서 사건은 비극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마침 남편은 장사 때문에 먼 도시에 나가 있는 참이었다. 카테리나는 몰래 시아버지에게 독버섯이 든 수프를 먹여 죽인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늙은 시아버지가 노환으로 죽었을 거라고 여기고 의심하지 않는다. 남편은 돌아와서 카테리나가 불륜을 저지른 것을 알고 있었다며 그녀를 추궁하지만, 그녀는 남편 앞에서 당당하게 세르게이와 키스하고 관계를 가진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남편이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를 폭행하다 오히려 그 둘에게 살해당한다. 이제 유산을 차지하고 세르게이와 잘 살아보려 했는데, 사람들이 남편의 어린 조카(영화에서는 사생아)를 데리고 와 그애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는 아직 어린 조카까지 목을 졸라 죽여버린다.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들키지 않아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집안을 차지하는 캐서린


이 사건 이후부터 원작과 영화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영화에서 세바스찬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캐서린과 자신의 죄를 폭로하지만, 캐서린은 모든 일은 세바스찬과 하녀 안나가 저지른 것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자신은 유유히 집안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반면 원작에서는 마침 교회에서 축일 행사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던 한 무리 동네 청년들이 카테리나와 세르게이의 불륜 행각을 훔쳐보려다, 둘이 조카를 죽이는 것을 목격한다. 이러니 변명할 여지도 없다. 둘은 그대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고,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진다.


 카테리나(또는 캐서린)가 저지른 악행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얻는 영화판 결말을 생각해 보면, 원작의 결말은 답답하게 느껴진다. 자기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세바스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망설임 없이 그를 버리는 캐서린과 달리, 카테리나는 끝까지 세르게이를 놓지 못한다. 영화 속 캐서린에게 세바스찬은 낭만적인 연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적 욕구를 푸는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카테리나는 세르게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카테리나는 철저하게 파멸한다. 


 악행을 저지를 때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주도적으로 행동하던 그녀가 사랑 때문에 무너지다니. 세르게이가 카테리나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다른 여자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카테리나를 모욕하는데도, 그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는 카테리나가 답답했다. 세르게이에 대한 애증 때문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세르게이의 새 애인을 붙잡고 볼가 강에 함께 뛰어들어, 마지막으로 세르게이에게 복수를 한다. 영화의 결말만큼 통쾌하지는 않지만 이 또한 그녀다운 결말이었다. 왜 세르게이가 아니라 바람 핀 상대를 죽였는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세르게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유형지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도록 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더 큰 복수였다고 생각한다.(세르게이는 또 다른 애인을 만들고 유형지에서도 특유의 잔꾀로 그럭저럭 잘 살아갔을 것 같지만.)


 19세기의 독자들에게는 악녀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잘 사는 결말이 납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테리나가 처절하게 파멸하는 결말이라고 해서, 작가가 그녀를 단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레스코프는 톨스토이처럼 자기 작품 속 죄인들을 단죄하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그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 지는 독자의 몫이다. 


쌈닭


「쌈닭」의 주인공 돔나는 카테리나처럼 극단적인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다. 어떤 때는 따뜻하고 푸근하지만, 어떤 때는 놀랄 만큼 이기적이다. 망설이지 않고 선의를 베풀지만, 그 선의라는 것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 멋대로의 선의다. 그녀는 아주 선하지도, 아주 악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이다. 


 그녀의 선의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것인지는 레카니다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돔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며 귀족 부인들에게 레이스나 다른 옷감을 방문판매하고 있다. 레카니다도 그렇게 알게 된 젊은 귀족 부인이었다. 레카니다는 남편에게 권태를 느끼고 자기 집에 세든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 청년이 레카니다를 속이는 바람에 전 재산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는다. 돔나는 며칠 동안 레카니다를 자기 집에서 묵게 해 준다. 레카니다는 남편에게 돌아갈 여비만 달라고 애원하지만, 돔나는 레카니다가 그 동안 먹고 입고 자는 데 든 비용을 따지며, 고관 대작에게 매춘을 하도록 권한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그것이 레카니다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레카니다는 호강하면서 살 수 있고, 자신은 소개비를 챙길 수 있으니까. 울며 불며 거절하던 레카니다는 결국 고관대작에게 자기 몸을 팔고, 귀족들의 정부, 고급 창녀로 전락하게 된다. 


 돔나가 그저 남편에게 돌아갈 여비만 줬더라도 레카니다는 창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돌아간 레카니다를 남편이 받아줬을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돔나는 여전히 자신이 레카니다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원망하는 레카니다를 배은망덕하다고 여긴다. 그녀의 말발이 얼마나 구성진지, 분명 돔나의 잘못인데도 레카니다가 얄미워질 정도다.(물론 자신을 거두어준 귀족 부인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것은 레카니다의 잘못이었고, 돔나가 그것을 폭로할 때는 좀 통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이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에 도둑놈이고 자신은 너무 순진하고 선량해서 당하고만 산다고 항상 한탄한다. 


 그렇게 뻔뻔스러운데도 돔나를 미워할 수 없다. 이 소설의 화자가 돔나의 이런 이기적이고 뻔뻔한 면을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화자는 돔나의 이야기를 듣다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돔나를 싫어하거나 돔나와 연을 끊지는 않는다. 그리고 돔나가 자기 자식뻘인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등골만 빼먹히고 초라하게 죽어간 것을 진심으로 연민한다.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으니까. 


 다 읽고 나면 시장이나 동네 아주머니의 수다를 한참 듣고 난 기분이 든다. 돔나 특유의 푸근하고 수다스러운 말투를 잘 살려서 더 그렇다. 레스코프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구어체와 방언을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번역자는 돔나의 오룔 사투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지만, 표준어로 번역된 문장들을 통해서도 돔나의 수다스러움과 오지랖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레스코프의 이 두 단편은 만들어진 이야기라기보다 현실에서 뚝 떼어온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두 단편 속 주인공들은 선하고 정의롭지 않지만, 어디선가 실제로 살아간 인물들 같다. 거친 세상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때로는 양심도 내려놓다 감정 때문에 무너지기도 않는 현실의 인간들. 비극적인 결말을 맞아도 천벌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갔구나, 싶다. 이런 자연스러움과 현실감이 레스코프의 매력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포일러 포함


 '로봇Robot'은 '노동, 부역'이라는 뜻의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따온 말로,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가 그 개념을 만들어냈다.('로봇'이라는 신조어 자체는 카렐과 공동 창작을 하던 형 요제프가 제안했다.) 사람과 비슷한 인조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차페크 이전부터도 있었지만, 과학의 힘으로 인조인간을 만들어 대량생산하고 판매한다는 발상, 현대적 의미의 인조인간은 차페크에게서 처음 나왔다. 그러니 로봇을 처음 등장시킨 그의 1920년 희곡『로봇』은 최초의 로봇 SF라고 할 수 있다. 


  차페크의『로봇』은 1921년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23년에는 런던에서『로봇』 을 놓고 버나드 쇼와 G.K.체스터턴 등 당대의 유명 작가들이 공식 토론을 벌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로봇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했다. 그러나 차페크 자신은 로봇보다 인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차페크에게 로봇은 생산성과 효율성만 따지느라 인간을 하나의 부품처럼 대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선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무표정한 승객들의 모습에서 로봇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승객들은 아무 생각 없이 출근을 하고 일을 한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인간으로서 배려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노동자를 더 싼 값에 부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노동자의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극 중에서 로봇의 인권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여주인공 헬레나에게 '로숨 유니버설 공장(작품 속 로봇을 만들어내는 회사)'의 관리자들은 말한다. 로봇 덕분에 사람들은 더 싼 값에 빵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로봇은 인간이 아니니 임금을 주지 않아도 돼서, 로봇이 만드는 빵의 가격이 저렴해진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로봇의 노동 덕분에 식량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로숨 유니버설 공장의 사장 해리 도민은 로봇 덕분에 인간이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세상을 꿈꾸었다. 노예들의 노동 덕분에 정치와 문학, 예술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데만 몰두할 수 있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인간이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노동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인간은 즐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고, 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도 의욕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아이도 낳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헬레나의 요청으로 로봇 개발자 갈 박사는 자의식을 가진 로봇을 개발해내고, 로봇들은 인간의 종 노릇을 그만두고 인간의 주인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로봇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로숨 사의 건축 담당자 알퀴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류를 절멸시킨다. 로봇을 이용해 신세계를 만들려고 했던 도민도, 로봇을 동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려 했던 헬레나도 죽임을 당한다. 알퀴스트는 아직까지도 스스로 노동을 하는 인간이어서 유일하게 살려둔 것이다. 로봇들은 알퀴스트에게 자신들도 인간처럼 번식을 하고 싶다고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지만, 로봇의 설계도는 로봇의 대량생산을 두려워한 헬레나가 불태워버렸다. 알퀴스트는 로봇들을 해부하며 방법을 찾아보려 하지만, 과학자가 아니라 건축가인 그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이 죽어버렸으니 뭔가를 할 의욕도 없다. 그러나 상대방이 해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해부당하겠다며 서로 희생하려고 하는 두 로봇 프리무스와 헬레나(인간 헬레나에게서 이름을 따 왔다.)를 보고, 알퀴스트는 그들이 인간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퀴스트는 그들을 풀어주면서 그들을 통해 생명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두 로봇이 기계라면 알퀴스트는 두 로봇이 생명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작품 속 로봇들은 기계라기보다는 유기물들을 합성해서 만든 인조 생명에 가깝다. 도민은 로봇이 여러 부품을 조합해 만들어지지만 조립된 뒤 부품들 스스로가 자라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로봇들을 해부하면 피가 나오고, 로봇들은 고통스러워한다. 기계라기보다는 인조인간이었기 때문에 헬레나가 더욱 더 그들을 인간처럼 여기고 도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서로 사랑하면서 인간성을 얻게 되었다. 카렐 차페크가 이 최초의 로봇 SF에서 말하려고 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스스로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 인간성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작품 자체를 보면 구성이 다소 엉성하다. 그리고 작품 속 로봇에 대한 발상들은 식상하게 여겨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봇에 대한 이후의 상상들은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고,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이제 작품에서처럼 로봇이 산업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지만, 로봇과 인간이 공생하는 세상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인간 복제도 시도되고 있다. 복제인간에게서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들을 적출하는 상상을 하는 SF들도 나왔다. 로봇과 복제인간 등,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과 유사한 존재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고민에서 더 나아가 인간 아닌 것들과의 공존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차페크는 원래 의도했던 현대 사회 비판과 함께 미래에 대한 고민까지 제시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칠월과 안생
칭산 지음, 손미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 소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스포일러 포함


 올해 초에 중국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보고 마음이 아렸었다. 서로를 소중히 여겼지만 서로 너무나 달라서 엇갈려야 했던 두 친구의 애증. 나에게도 그토록 지독하게 아끼고 미워했던 친구가 있어서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칠월과 안생』이 우리나라에 번역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읽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 같아서 이제야『칠월과 안생』을 읽게 되었다. 


"칠월七月이 안생安生을 처음 만난 건 열세 살 때였다. 입학식장에 길게 늘어선 낯선 얼굴들이 눈부신 가을 햇살에 어른거렸다. 그 중 한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이 첫 문단에서부터 맑고 싱그러운 영화의 분위기가 다시 떠올랐다. 영화 속 싱그러움, 두 친구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원작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평범한 삶을 꿈꾸었던 모범생 칠월(마사순)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안생(주동우). 그러나 둘의 입장이 뒤바뀌어 둘은 상대가 원하던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화 쪽을 더 높이 평가한다. 원작에서도 안생이 "왜 나는 칠월이 될 수 없을까"라고 부러워하는 말을 하지만, 평범한 칠월이 독특한 개성을 지닌 안생에게 일방적으로 매혹되는 느낌이다. 안생도 칠월을 아끼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칠월이 안생을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편이다. 심지어 안생이 자기 남자친구를 유혹해 그의 아이까지 가졌는데도 칠월은 임신한 안생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영화에서는 칠월의 남자친구 가명의 딸이 안생이 아니라 칠월이 낳은 아이로 설정이 바뀌었다.) 영화에서 두 친구가 상대가 원하던 삶을 살게 되면서 상대의 입장에 놓이게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원작 속 안생이 공중에 붕 뜬 것처럼 살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것과 달리, 영화 속 안생은 칠월처럼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오히려 칠월을 돌보게 된다. 반면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안생을 돌보던 칠월은 안정된 삶을 버리고 여행을 떠난다. 현실에서는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면서 칠월의 여행이 끝나지만, 안생의 소설 속에서 칠월은 여전히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매혹된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지독하게 아끼다 못해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된 관계. 각본가들이 둘의 관계를 더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칠월과 안생」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개 단편은 하나의 이야기나 다름 없다. 안安(또는 란藍)이라는 이름의 아름답고 자유분방하지만 불안정한 여자와 린林이라는 잘생기고 따뜻한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린은 인내와 사랑으로 안을 감싸려 하지만 안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한 채 붕 뜬 것처럼 살아간다. 린은 결국 현실에 지쳐 안을 포기하고, 안은 자살하거나 살해당하는 등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작가의 소설 속에서 사람은 세 부류다. 아름답고 불안정한 젊은 여성(안)과 잘생긴 외모에 그녀보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만 결국 그녀를 놓게 되는 남자(린), 그리고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 이 틀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벗어난 게「칠월과 안생」인데, 이름에 '안'이 들어가 있듯이, 안생도 '아름답지만 불안정한 여자 주인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주인공 가명도 다른 소설 속 남주인공 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소설 속 평범한 사람들이 여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독특한 여주인공을 이해하고 포용하려 하는 칠월이 이 소설집에서 가장 개성적인 인물이다.


  아련한 첫사랑과 가혹한 현실, 그 사이에서 무너지는 남녀의 사랑. 이런 비극적이고 애틋한 정서, 한없이 여린 풀꽃 같다가도 독을 내뿜는 독초 같은 여주인공의 매력. 이런 분위기와 정서의 묘사는 정말 뛰어나다. 그 덕분에 중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내용이 열 편 내내 반복된다는 것이다. A 단편의 안A를 B단편의 안B와 바꿔도 문제가 없을 만큼 비슷한 인물들, 비슷한 이야기, 비슷한 정서가 반복된다. 처음 들을 때는 아름다워 매혹되지만 들을수록 지치는 음악 같다. '아름답고 청초하고 신비스럽지만 자기 고독에 잠겨 비극에 빠지는 여자'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둘러싼 세계에 작가 자신이 매혹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소설을 써도 자기복제만 하고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요즘 일본 애니메이터들이 현실에서 인간을 관찰하지 않고 애니메이션 캐릭터만 보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했었다. 칭산 작가는 현실이 아니라 자기 세계 속 캐릭터들만 보면서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느낌이다. 자기 세계에서 눈을 돌려 더 넓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작가의 동어반복은 계속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