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에드워드 호퍼, <좌석차>, 1965.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겪은 삶의 변화와 고독, 불안을 그린 화가.  많은 사람들이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 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시인 마크 스트랜드 Mark Strand 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조금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고.  호퍼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현실과는 다르다. 그의 그림 <좌석차> (1965) 속 열차에는 승객들의 머리 위 짐칸도, 문의 손잡이도 없다. 사람과 사물, 공간의 형태와 색채는 현실보다 단순화되어 있다.  시간이 멈춘 세상인 듯 그림 속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멈춰 있다.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스트랜드는 호퍼의 그림과 당대 사회를 연결시켜서 보던 해석에서 벗어나, 그의 그림 속 공간을 읽는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새는 사람들>, 1942.


  스트랜드는 호퍼의 작품 속 공간에 '나아가라'와 '머무르라', 이 상반된 두 명령어가 공존하면서 긴장감을 자아낸다고 이야기한다. <밤을 새는 사람들>(1942)에서 사다리꼴 모양 창문의 두 변은 서로를 향해 기울어 있지만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두 선이 만나는 소실점은 캔버스를 벗어나 그림의 바깥쪽 어딘가에 존재한다. 사다리꼴은 그 점을 향해 계속 가라고 우리를 재촉하지만, 어두운 도시 속 식당의 환한 실내는 우리에게 머물라고 한다.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은 팽팽하게 맞선다. 


에드워드 호퍼,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 1960.


 호퍼 그림 속 공간에서 대비되는 또 다른 한 쌍은 시각적 요소 서사적 요소다.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1960)에는 잡지를 읽고 있는 중년 부인과 발코니에 걸터 앉아 어딘가를 바라 보는 젊은 여자가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지,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야기가 제자리를 잃고 너무 멀리 가 버리면 그림 속 기하학적인 형태들(세모난 지붕과 네모난 벽, 나란히 평행하고 있는 집들)이 우리의 시선을 다시 그림 속으로 불러들인다.  눈에 보이는 것도, 이야기도 그림 전체를 지배하지 않고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1932.


  호퍼의 그림 속 공간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그들은 함께 있어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뉴욕의 방>(1932)의 두 남녀는 함께 있지만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이들 사이의 소원함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림에서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더욱 커지는 고립감이 표현되어 있다.


에드워드 호퍼, <빈 방의 빛>, 1963.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이다." <빈 방의 빛>(1963)에서는 사람들마저 사라지고 공간과 빛만이 남는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은 한 순간 반짝이고 언젠가는 사라지는 빛이다. 그러나 호퍼의 빛은 반짝이지도 흐르지도 않는다. 어느 한 순간에 멈추어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호퍼의 그림은 현재진행 중인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이나 일어난 직후, 짧고 고립된 순간들만을 표현한다. 

  한 마디로 호퍼의 그림 속 공간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공간이다. 그림 속 사람들은 우리가 추측할 수만 있는 어떤 비밀스러운 일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마치 제목을 알지도 못하는, 대사를 알아들을 수도 없는 공연을 보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그림 속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지만 개입할 수도, 침범할 수도 없다. 그 공간은 일상적인 공간으로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은 벗겨져 나가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고립된 순간들, 고립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스트랜드의 해석이 단 하나의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배경 지식이 아닌 작품 자체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작품 자체에 집중하면서 나만의 시각으로 그 작품을 바라보는 법. 그렇게 호퍼의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호퍼의 그림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P. S. 이 책의 원서 초판은 흑백 도판들이 실린 페이퍼백이었다고 한다. 한국판 번역자는 호퍼의 그림을 컬러 도판으로 싣기 위해 열 군데도 넘는 기관들에 그림 사용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몇 년만에 컬러 도판이 실린 한국판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마크 스트랜드는 한국판 번역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름다운 책이네요. 미국판보다 훨씬 좋아요."라면서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용기를 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