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31년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강주룡의 모습과 당시의 보도 기사. 당시 언론들은 강주룡에게 '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라는 뜻의 '체공녀'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 스포일러 포함

  체공녀 강주룡낯선 수식어에 낯선 이름이다. ‘체공녀滯空女는 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인 한 여성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강주룡은 그녀의 이름이다평범한 노동자였으니 고공농성을 했다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장편소설의 소재로 삼기에는 공백이 너무 많은 인물인데강주룡을 영웅화하면서 프로파간다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우려 반 호기심 반인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서장에서부터 그런 우려를 씻어낸다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비장한 상황에서도 주룡은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엉뚱한 상상을 한다나 자신을 삼키면 비어 있는 배가 다시 부를 거고뒤집어진 나는 또 배가 빌 거라고그러나 누군가가 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운다그것이 굶주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가장 나중 된 저항의 몸짓이었다그녀의 저항은 거창하거나 비장하지 않다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할 뿐이다

  주룡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서장을 지나 이야기는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혼례식 날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남편을 만나 혼인하기 전 주룡의 삶은 당시의 다른 농민 여성들의 삶과 다름없었다사상이나 투쟁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집안일을 돕다 어른들이 시집을 보내면 시집을 가는 삶그러던 그녀가 어떻게 투쟁하는 사람이 되었던 걸까

  작가는 그녀의 투쟁을 사랑에서 시작된 것으로 재해석했다어머니가 통화현(주룡의 가족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가장 고운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토끼 새끼라고 대답했던 주룡은혼인하고 나서는 가장 고운 것이 남편이라고 생각한다그 정도로 주룡은 얼굴 곱고 성정이 순수한 남편에게 빠져 있었다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룡은 시댁에서 남편을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남편과 함께 독립군 활동에 뛰어들기로 선택했다. “주룡이 독립을 원하는 것은 제 임자 때문이다당신이 좋아서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여성은 연애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라는 편견에서 나온 재해석이 아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거창한 대의보다도 더 와 닿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투쟁에 뛰어들었지만주룡은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편견억압과도 싸워야 했다독립군 동지들은 주룡을 동지라기보다는 부엌일 해 주는 하녀 정도로 취급했고주룡이 기지를 발휘해 활약하고 대장인 백광운 장군에게 신임을 받자 시기했다심지어 백광운 장군과 주룡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다사랑하는 남편마저 주룡에게 열등감을 느끼고동지들이 퍼뜨린 소문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은 주룡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다 병으로 죽자시댁에서는 남편 잡은 년이라며 주룡을 살인죄로 고소해 감옥에 갇히게 만든다일주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와 친정에 돌아오니친정아버지는 남편을 잃은 딸을 위로하기는커녕 딸이 과부가 되었다고 부끄러워한다게다가 친정 식구들은 땅 몇 마지기 구해보겠다고 늙은 지주에게 주룡을 후처로 보내려고 한다. “망그러진 간나 거둬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면서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온갖 억압을 당한 끝에 주룡은 결심한다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평양으로 간 주룡은 그곳에서 고무 공장에 취직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뒷받침해 준 것은 노동이었다자기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되면서 주룡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다시 시집갈 마음도 없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도 관심 없다. 그저 제 한 몸 재미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극장 구경도 하고. 저 커피에도 맛을 들이고. 양장도 맞춰보고. 빼딱구두에 실크 스타킹이니 하는 것도 신어보고. 고무 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담.”


그녀가 꿈꾸는 새로운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 한 몸 부양할 수 있고일을 마친 뒤에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삶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노동이었기에비인간적인 노동 조건과 작업반장의 폭력도 그런 대로 견뎌보려 했다

  그러나 파업단의 교육을 들으면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월급을 제 때 받고손찌검을 당하지 않고아이를 낳고 집에서 쉬면서도 월급을 받는 게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자신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주룡은 동료가 파업단에 가입했다 회사로부터는 해고할 것이라는남편으로부터는 이혼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파업단에 가입했다자신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사람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서

  인생에서의 두 번째 투쟁을 시작했을 때주룡은 또 다시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싸워야 했다평양적색노동조합에서 함께 투쟁하자고 권유하러 왔던 동지 정달헌조차 처음에는 주룡이 여성이라는 것에 당황해한다여성 혁명가 콜론타이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정작 여성인 주룡이 말할 때는 미심쩍어 하고엘리트 남성인 달헌이 말해야 신뢰한다그럼에도 주룡은 모든 억압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낸다오히려 남성 동지들의 모순을 비판한다여성 혁명가의 글을 공부하면서 왜 아내에게는 사상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지노동자가 으뜸이고 근본 되는 계급이라고 하면서 엘리트들은 노동자를 계도와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는지주룡은 사상을 배울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라는 당사자성을 활용해 세상의 모순과 억압을 간파하고 그것들과 맞서 싸운다

  이 책의 홍보 문구는 삶이란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다첫 번째 투쟁에서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면 두 번째 투쟁에서 주룡은 사랑하는 동지들의 손을 잡았다주룡은 어린 직공인 옥이에게 말한다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삶이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라면혁명은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고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고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그렇기에 주룡에게 혁명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지들과 목숨을 걸고 두 번째 파업을 결행했지만 경찰들에게 무참히 진압 당했을 때그녀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혼자서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것경찰들의 손으로 끌려 내려간 뒤에도 단식 투쟁을 거듭하던 그녀는 건강을 해쳐 이듬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소설은 주룡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동료 직공 삼녀를 통해 주룡의 최후를 알린다비극적인 최후인데도 소설은 지극히 담담한 문장으로 끝난다. “저기 사람이 있다.” 

  저기 그녀가 있었고또 다른 높은 곳에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그들 모두가 사람이었다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사람답게 살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다이렇게 이 소설은 우리의 현재와 삶을 위해 투쟁했고삶 자체가 투쟁이자 혁명이 된 한 사람의 삶을 이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스포일러 포함 


  나는 눅눅한 현실을 그리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성애 묘사가 노골적인 소설도 좋아하지 않는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자이툰 파스타)에 실린 단편들은 그 둘 다에 해당한다그런데도 계속해서 읽게 되었다내 입맛에는 안 맞는데하면서도 자꾸자꾸 손이 가서 어느 새 그릇을 싹싹 비워버리게 되는 음식처럼이 단편들의 어떤 점이 취향을 뛰어넘어 나를 사로잡은 걸까.


  우선자이툰 파스타의 단편들은 눅눅한 현실을 그리고 있는데도 유쾌하다눅눅한 현실을 그린 소설을 읽다 보면 나까지 현실의 비참함에 잠식되는 기분이다하지만 작가는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비참한 현실마저 블랙코미디로 승화시킨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의 라이벌 다니엘 오’ 감독이 의 유도질문에 걸려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무식하고 천박한 진면모를 드러낼 때선배 영화인들이 자신의 영화를 홍상수 아류로 폄하하자 주인공들이 술 마시고 섹스만 했다 하면 무조건 홍상수 아류이기까지 한 것이고. ... 사지말단을 자르면 김기덕장식적이고 예쁜 벽지가 붙은 곳에서 살인하면 박찬욱이라고 하겠지.’라고 가 속으로 비꼴 때 깔깔 웃었다.

 

  하지만자이툰 파스타는 그저 유쾌한 데서 그치지 않는다.자이툰 파스타속 인물들은 모두가 성공을 향해 가는 세상에서 낙오되었다는 점에서 내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그들은 실패하고 망했다그들은 실패가 성공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식상한 조언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안다. “실패는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개소리다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 실패에 그럴듯한 의미를 붙이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성공을 해본 사람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아무것도 아니며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한다그들은 남들이 쯧쯧너 완전히 망했구나.”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래나 망했다!”라고 스스로 당당하게 외친다그런 당당함 덕분에 분명 비참한 상황인데도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오히려 후련하다.

 

  그들은 망했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는다망해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들 또한 이 세상에 없던 훌륭한 퀴어 영화를 만들어 칸 영화제의 주역이 되는 것’ 같은 높은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현실에 치여 살아가다 보니 꿈은 저만치 멀어져버렸다그들도 자신이 꿈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지만여전히 사랑하고 살아간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와 왕샤가 선배 영화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동네 노래방 주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나서도 다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처럼이들은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분명 희망적인 메시지는 아니지만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라는 또 하나의 걸림돌은 어떻게 넘길 수 있었을까사실 이 책 속 첫 단편의 몇 페이지를 훑어봤을 때 노골적인 성애 묘사에 당황했었다그것도 동성 간의 성애 묘사가 대부분이다 보니 더 낯설게 느껴졌다하지만 찬찬히 더 읽어가다 보니,자이툰 파스타속 섹스는 그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행동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성소수자들의 섹스도 이성애자들의 섹스만큼이나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렇게 지극히 일상적인 퀴어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주인공 는 동성애를 훈장처럼 전시하지도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 버리지도 않는” 퀴어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는데,자이툰 파스타속 단편들을 영화화하면 가 만들고 싶었던 퀴어 영화가 될 것이다성소수자들이 가슴 두근거리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권태에 빠지기도 하는지극히 평범한 사랑을 하는 퀴어 영화.

 

  본문 뒤의 해설에서 평론가 윤재민은 이성애적 관점으로 대상화된 퀴어에 대한 의 비판에 경청할 대목도 있지만, ‘가 세상에 없던 퀴어 영화를 만들려는 것은 그저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 욕구의 발로였다고 이야기한다하지만 나는 그에게 퀴어 영화가 단지 인정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선배 영화인들이 그의 퀴어 영화에 퍼부었던 비판들은 퀴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다동성애자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뇌해야 한다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뇌 때문에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등등그들을 보면서 는 생각한다. ‘성적 소수자가 뭔지나 알기는 하냐알 리가 없지특별히도 불행하고 이상하게 섹스를 하는 애들 같겠지애초에 보통의 존재로 생각한 적조차 없겠지.’ 보통의 존재인데도 보통의 존재로 간주되지도 못하는 것바로 곁에 존재하는 데도 멀리 있는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이 그와 같은 성소수자들이 겪는 일상이다그러니 보통의 존재들이 연애하는 퀴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의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정말 인정 욕구의 발로였다 해도그 인정 욕구 중에는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 자체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인정 욕구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매력 중 또 하나는 여성 캐릭터를 현실감 있게 구축한 것이다누군가에게서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캐릭터도여성 작가가 쓴 남성 캐릭터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그 말에 100프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자신의 성별과 다른 성별인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지켜보게 된다.

 

  이 책의 작가는 남성이다그런데 이 책에 실린 단편 일곱 편 중 세 편(부산국제영화제조의 방,햄릿어떠세요)의 화자가 여성이다작가는 여성 캐릭터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하면서그 캐릭터가 품고 있는 감정과 고민들을 섬세하게 풀어낸다.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의 여주인공이자부산국제영화제의 화자인 캐릭터 박소라그녀의 남자친구가 화자인 단편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에서 외모만 예쁘고 머리는 텅텅 비었으며 중학생보다 유치한 자기 예술에 도취된 인물로 묘사된다그러나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복잡한 속내가 드러난다그녀는 부모님 돈으로 편하게 사는 듯하지만 시한부 인생인 어머니를 돌보고 있고, SNS에서의 호응이 헛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SNS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햄릿어떠세요의 주인공 는 연예기획사 연습생이었지만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했고, 20대 중반에 서바이벌 오디션에 도전하지만 본선에 진출하기 직전 떨어진다그녀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포기와 체념이 최선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순수하게 누군가를 사랑했던 시간을 그리워한다박상영 작가의 여성 캐릭터들은 누군가의 고정관념이나 환상 속 존재가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지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현실 속 존재로 느껴진다.

 

 실패한 사람들성소수자들여성들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이 흘려두고 온 시절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씹다 버린 껌이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여기는 사람, ... 함부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그렇게 잘난 척을 하며 살다 보니 나 아닌 누군가에게 한 번도 제대로 가 닿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아 버린 사람.” 작가는 이 책이 좀체 웃을 일이 없는 그들에게 건네는 자신의 수줍은 농담이라고 했다그의 수줍은 농담은 내 마음에 와 닿아 나를 울고 웃게 했다나뿐만 아니라 웃을 일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 것이다나는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의 가 제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작가에게 매일 농담 하나이야기 하나씩 들려달라고 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 - 시리아 내전에서 총 대신 책을 들었던 젊은 저항자들의 감동 실화
델핀 미누이 지음, 임영신 옮김 / 더숲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스포일러 포함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책이 빼곡하게 들어찬 서가 앞에 두 청년이 있다한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고 있고다른 청년은 서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도서관 풍경이다그러나 이 도서관은 한 달에 600여 차례의 폭격이 쏟아지는 도시 한복판에 있다.


폐허가 된 다라야 시내


 이 도서관이 있는 도시 다라야는 8년째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의 중심에 있다시리아 내전은 2011년 시리아의 민주화 운동과 그 밖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시작되었다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 50여 년째, 2대에 걸친 아사드 일가의 독재가 계속되어 왔던 시리아에도 찾아왔다다라야 시민들이 독재에 저항하는 비폭력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아사드 정부는 다라야를 봉쇄하고 매일 쉴 새 없이 폭격을 퍼부었다다라야의 시민들은 식량과 의약품도 보급 받지 못한 채 매 순간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다.


다라야의 젊은이들이 세운 지하 비밀 도서관의 모습


  많은 시민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그러나 이 모든 진실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도시에 남은 젊은이들이 있었다폭격이 시작된 지 1년쯤 지난 2013년 말그들은 무너진 폐허에서 찾아낸 책들로 지하 도서관을 만들기 시작했다책을 안전하게 둘 수 있는 지하공간을 찾아 서가와 소파발전기를 들여놓았다폐허 속에서 1 5천여 권의 책을 모으고종류별로 분류하고목록을 작성해 서가에 꽂아 정리했다다라야 사람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폭격을 헤치고 지하 비밀 도서관을 찾았다.

  그 뒤 2015년에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델핀 미누이는 페이스북에 올라 온 사진을 통해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에 대해 알게 되었다독재 정권의 폭력에 맞서 도서관을 지은 청년들의 이야기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그녀는 2016 8월까지 스카이프(Skype, 국제 인터넷 전화 서비스)로 다라야의 청년들과 대화했고그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지하 비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다라야 사람들


  세상 한구석에 고립된 다라야의 젊은이들에게 책은 밖을 향해 열린 문이었다그들은 다라야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지만온 세상이 책 안에 있었다그들은 배우기 위해미치지 않기 위해정신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책장 사이에서 미지의 세상을 탐험할 때 책은 견고한 성벽이자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전쟁을 멈추지는 못했지만 전쟁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그들은 정부의 검열을 거친 책을 읽어야 했고토론의 장도 가지지 못했다오히려 전쟁으로 사방이 막힌 뒤 그들은 지하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고 강의를 열고 토론을 펼치게 되었다책은 수많은 사상과 해방을 위한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시리아의 작가 무스타파 칼리파가 12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을 그린 책껍질은 아사드 정권의 잔혹함을 고발하면서 강제로 갇힌 상황을 견뎌내는 법을 알려주었다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이스라엘에게 억압당하는 현실을 그린 시들은 마치 그들 자신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이제는 식상해진 자기계발서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도 위기 상황 속에서 자아를 지키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책은 그들에게 저항의 수단이자 해방의 통로가 되었다.


폐허가 된 다라야 도서관


  그러나 도서관 밖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아사드 정부는 점점 더 맹렬하게 다라야를 공격했고외부에서 구호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버렸다다라야 청년들이 기대한 것과 달리 유엔과 세계의 다른 국가들은 다라야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아니주지 않았다결국 2016 8정전협정이 이루어지고 다라야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강제이주되었다그리고 지하 도서관은 지금까지도 폐허로 남아 있다

  책이 패배한 것일까그들의 저항은 실패한 것일까그러나 책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책의 힘을 믿고 책이 심어준 것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파괴할 수 없다지하 도서관은 폐허가 되었지만 도서관을 세운 젊은이들은 살아남아 더 나은 삶더 나은 시리아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작가는 그들에게 약속했었다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이 세상에 나와 그 도서관에 있는 다른 책들과 나란히 놓이게 될 거라고그 약속은 반만 지켜졌다시리아가 자유로워지는 날다라야에 다시 도서관이 세워지고 이 책이 그곳의 서가에 꽂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세상의 야만 앞에서도 여전히 책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은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다

P. S. 1. 
 https://edition.cnn.com/videos/world/2016/10/06/daraya-syria-secret-underground-library-orig.cnn/video/playlists/atv-syria-civil-war/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다룬 CNN 뉴스의 영상 링크. 지하 도서관의 모습과 친구들에게 '사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도서관을 사랑했던 소년 암자드,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지만 정부군에게 희생된 청년 오마르의 모습이 나온다. 오마르는 이 책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암자드도 적은 분량이지만 등장한다. 

P. S. 2. 

지하 도서관에서 다라야의 젊은이들이 함께 보았던 단편영화 <2+2=5>(원제 Two & Two). 이란 출신 영국 감독 바바크 안바리 Babak Anvari 의 작품이다.(책에는 바바크 아미리 Babak Amiri 로 잘못 나와 있다.) 2+2=5라는 잘못된 답을 강요하는 수학 교사에게 저항하는 영화 속 학생들에게 다라야의 젊은이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식사의 문화사 Breakfast
헤더 안트 앤더슨 지음, 이상원 옮김 / 니케북스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버터를 얹은 노릇노릇한 토스트가 하얀 바탕 위에 놓여 있는 표지부터 눈길을 끌었다. 책을 펼쳐 보니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들과 아침식사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읽게 되었다. 언제부터 아침식사를 먹게 되었는지, 아침식사 메뉴로 어떤 음식들을 먹었는지 등등, 너무 일상적이어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침식사 속에는 우리가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소박한 빵과 음료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중세시대 농민들, 14세기 프랑스의 『모뒤스 왕과 라티오 왕비의 책』에 실린 삽화다.


  근대 이전 동양에서 하루 식사는 아침과 저녁, 두 끼였다. 점심을 정식 식사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근대 이전까지 아침식사를 먹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고 한다. 모든 쾌락이 억압되었던 중세시대에 교회에서는 아침식사를 하는 것을 탐식의 죄로 여겼다. 가벼운 점심과 그보다 더 든든히 먹는 저녁 두 끼면 하루 식사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농민이나 육체노동자, 어린이나 병자 같이 몸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아침식사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아침식사는 신분 낮은 육체노동자들이나 병자, 어린아이들이나 먹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반인들은 아침식사를 한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상류층 사람들은 아침식사를 금기시하는 관습을 신경쓰지 않고 아침식사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17세기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낡은 옛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 18세기 중반에는 아침식사의 인기가 높아져 부유한 사람들은 집에 아침식사를 위한 전용공간까지 마련했다. 교회가 아침식사를 허용하지 않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아침식사를 할 때 술을 함께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였는데, 사람들이 해외무역을 통해 들어온 커피와 차를 술 대신 아침식사 때 마시자 교회는 아침식사를 금지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렇게 아침식사는 하층민들이 먹는 천박한 끼니가 아니라 사회 모든 계층이 누리는 합리적인 식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탄이 마녀들을 위해 차린 식사'는 수프와 오트밀, 빵, 우유, 치즈였다. 참 소박하고 가정적이다. 


  그럼 아침식사로 무엇을 어떻게 먹었을까? 죽은 비교적 저렴하고 만들기도 쉽고, 아침에 먹어도 소화하기 힘들지 않아 전세계에서 사랑 받아온 아침식사 메뉴다. 심지어 17세기 말 스웨덴에서 열린 사탄의 파티에서도 사탄이 마녀들을 위해 손수  수프와 오트밀을 차렸다고 한다. 사탄의 파티 음식 치고는 참 소박하고 가정적인 음식이다. 이웃끼리 같이 먹고 마시는 소박한 식사까지도 사탄과 마녀의 파티로 몰아붙인 것은 아닌가 싶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베이컨과 달걀, 팬케이크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 왔지만 19세기 후반 도덕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자는 '클린 리빙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아침 식단을 단순한 곡물 중심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했고, 식탁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혼합 곡물 시리얼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얼을 오래 보관하고, 시리얼의 주된 고객인 어린이들의 입맛을 겨냥하기 위해 시리얼에는 많은 양의 설탕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사실상 건강식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럼에도 시리얼은 여전히 건강식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전기 토스터인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토스터 D-12. 1909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전기 토스터는 번거로운 토스트 굽기를 간편하게 만들어주면서 아침 식탁에 혁명을 불러왔다.


  한편 아침식사의 변화를 통해 변화해 가는 시대상도 엿볼 수 있다. 전기가 널리 보급되고 아침식사를 위한 가전제품들이 부엌에 자리잡으면서 아침의 주방 풍경은 크게 변화했다. 전기 토스터가 생기기 전 토스트의 양면을 적당히 노릇노릇하게 굽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어서 여성의 살림 솜씨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인 1909년 최초의 전기 토스터가 출시되고, 1926년에는 빵이 다 구워지면 자동으로 툭 튀어 오르는 토스터가 최초로 출시되었다. 커피메이커, 토스터, 달걀과 소시지를 굽는 전기팬까지 20세기 전반기 동안 아침식사를 편하게 하는 각종 가전제품들이 등장했다.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 혼자 우유에 타먹을 수 있는 시리얼, 인스턴트 커피, 팬케이크 믹스 등도 아침 식사를 만들 때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날 선물로 아침식사 준비에 필요한 주방 기기를 추천하는 1950년대의 광고들, 1세기 전과 다름없이 "여성은 밝고 예쁜 모습으로 아침식사를 차려서 가족, 특히 남편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답습하는 1950년대의 요리책들을 보면 아침식사 준비 같은 가사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것이 보여 씁쓸해진다. 


 작가가 미국인이다 보니 유럽과 미국에서의 아침 식사를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 외 다른 지역의 아침식사에 대해서도 언급되지만 다소 뭉뚱그려져 나온 것이 아쉽다. 특히 아시아에서 수억 명이 먹고 있는 밥은 소단원 하나로 다뤄질 가치가 있는데 아침 식사 메뉴의 이야기에 곁다리로 나오는 것이 아쉽다.(원서에서는 다른 제목이었겠지만, 밥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 '밥 죽 빵'이라는 소단원 제목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그리고 작가가 역사가가 아닌 음식 전문 저술가이다 보니 큰 흐름을 잡고 역사책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내용들이 500여 페이지에 걸쳐 단순나열되는 느낌이라 읽다 보면 좀 지칠 수 있다. 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의 선명한 사진들과 아침식사에 관련된 온갖 사소한 이야기들을 보고 있으면 아침을 거르는 사람이라도 아침을 먹고 싶어질 것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보기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리하는 조선 남자 - 음식으로 널리 이롭게 했던 조선 시대 맛 사냥꾼 이야기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먹방의 민족이라고 하지만, 우리 민족만이 먹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SNS에 먹방, 쿡방 영상을 올리고 있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세계 공통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이 음식을 먹고 만들었던 이야기는 흥미롭다. 마냥 엄격, 근엄, 진지할 것 같았던 우리 조상들도 먹는 즐거움 앞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즐겨먹는 음식이 옛날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요리하는 조선 남자』는 그런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는 역사책이다. 


  조선시대 남자가 요리를 한다니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궁중 요리는 남자 요리사인 숙수熟手들의 몫이었다. 궁중 밖 민간에서 요리는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지만, 음식을 해 줄 아내나 며느리, 딸이 자신보다 일찍 죽었거나 혼자 귀양을 가 있는 신세인 경우에는 남자라도 직접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집권층인 노론 벽파가 천주교도 박해와 함께 남인 등 반대세력을 몰아낸 사건) 때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섬에서 생선밖에 먹을 수 없었던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에게 고기가 먹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정약용은 섬에 사는 들개를 잡아먹으라고 하면서 개를 잡는 덫 만드는 방법과 개고리 요리법까지 적어서 보냈다. 그런데 이 개고기 요리법은 박제가가 고안해낸 것이었다. 박제가는 '한 번에 냉면 세 그릇, 만두 백 개를 먹는 먹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다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를 중시하는 실학자였으니 직접 개고기 요리를 만들 법 했을 것이다.


  박제가의 동료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먹는 것과 식사 예절에 깐깐했지만, 그도 역시 맛있는 것, 특히 단것을 좋아했다. 박제가가 자기가 먹던 단것을 빼앗아 먹었다고 이서구에게 하소연할 정도였다. 이덕무는 자신의 책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카스텔라 레시피를 적어두기까지 했다. 재료는 지금의 카스텔라 재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계란을 거품 내어 공기를 집어넣고 카스텔라의 질감을 폭신폭신하게 한다는 내용이 없으니, 이덕무가 이 레시피대로 만들었다면 카스텔라가 아니라 계란빵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안타까워서 이덕무에게 꿀카스텔라, 녹차카스텔라, 블루베리카스텔라 등등 종류별로 카스텔라를 대접해 주고 싶을 정도다. 이덕무의 학문적 선배인 박지원은 직접 고추장을 쑤어 아들에게 보냈지만, 아들의 답장에 고추장 이야기가 전혀 없자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무람없다, 무람없어. ...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라고 아들에게 투덜거렸다. 서책만 들여다 봤을 것 같은 선비들이 직접 요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레시피를 전수하고,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을까 반응을 궁금해 하다니, 귀엽지 않은가.


궁중 음식연구원에서 재현한 '고종 냉면'. 고종은 야식으로 냉면을 즐겨먹었는데, 동치미 국물과 면 위에 편육을 십자 모양으로 가지런히 얹고, 나머지 빈 곳은 배와 잣으로 채웠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을 '먹방하는 조선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먹는 것 자체를 즐겼던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고려 말의 유학자 이색은 먹는 것을 좋아해서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 감상을 시로 남기기까지 했다. 고려 말 조선 초를 그린 사극들에서 깐깐하고 보수적인 성격으로 묘사되는 이색을 생각해 보면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학생식당에서 밥 먹은 횟수를 출석 횟수로 쳤기 때문에 억지로 맛없는 성균관 급식을 먹어야 했던 유생들은, 복날 특식으로 나오는 개장국을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냉면을 끼니나 간식으로 즐겨먹었다. 검소한 태도를 중시했던 성리학도, 지금처럼 냉장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한 상황도 먹는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책에 실린 조선시대 음식들의 일러스트


참외를 즐겨먹었던 조선 사람들을 그린 책 속 일러스트. 하정우가 영화 <황해>에서 김 먹방하는 장면을 패러디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요리법들도 함께 실려 있다.『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요록要錄』, 『수문사설謏聞事說』등의 조선시대 요리책에서 찾은 요리법들이다.(이 요리책들의 목록은 본문 뒤에 부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지금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 흥미롭다. 조선시대에도 백숙을 만들었지만, 냄비 대신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 주둥이를 종이로 막고 쪘다. 그리고 찹쌀과 마늘이 들어가는 지금의 삼계탕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찹쌀을 닭고기와 먹으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고 마늘도 닭 요리에 넣지 않았다. 흔히 일본 음식으로 여겨지는 회도 고려 때부터 즐겨먹었는데, 무채 위에 굵게 썬 회를 놓는 지금과 달리 회를 가늘게 썰어 무채와 섞어 먹었다고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지금의 요리법과 비교해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요리법과 함께 조선시대 음식들을 그린 일러스트, 음식과 관련된 풍속화, 풍속화를 패러디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먹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린 삽화까지 실려 있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출판사에서 공을 들여 책을 만든 것이 보인다. 


 작가 자신도 책을 즐겁게 썼다고 한다. 수백 년 전의 요리들과 그것을 즐긴 사람들의 이

야기를 찾는 일이 신기하면서도 이채롭고 즐거웠다는 것이다. 독자들 또한 작가가 찾아

낸 조선시대의 음식 이야기를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책에 나온 음식이나 그 음식에서 

유래한 음식을 먹을 때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현재 속에 남아 

있는 조선과 조선 사람들의 삶이 느껴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