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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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강주룡의 모습과 당시의 보도 기사. 당시 언론들은 강주룡에게 '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라는 뜻의 '체공녀'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 스포일러 포함

  체공녀 강주룡낯선 수식어에 낯선 이름이다. ‘체공녀滯空女는 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인 한 여성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강주룡은 그녀의 이름이다평범한 노동자였으니 고공농성을 했다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장편소설의 소재로 삼기에는 공백이 너무 많은 인물인데강주룡을 영웅화하면서 프로파간다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우려 반 호기심 반인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서장에서부터 그런 우려를 씻어낸다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비장한 상황에서도 주룡은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엉뚱한 상상을 한다나 자신을 삼키면 비어 있는 배가 다시 부를 거고뒤집어진 나는 또 배가 빌 거라고그러나 누군가가 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운다그것이 굶주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가장 나중 된 저항의 몸짓이었다그녀의 저항은 거창하거나 비장하지 않다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할 뿐이다

  주룡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서장을 지나 이야기는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혼례식 날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남편을 만나 혼인하기 전 주룡의 삶은 당시의 다른 농민 여성들의 삶과 다름없었다사상이나 투쟁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집안일을 돕다 어른들이 시집을 보내면 시집을 가는 삶그러던 그녀가 어떻게 투쟁하는 사람이 되었던 걸까

  작가는 그녀의 투쟁을 사랑에서 시작된 것으로 재해석했다어머니가 통화현(주룡의 가족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가장 고운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토끼 새끼라고 대답했던 주룡은혼인하고 나서는 가장 고운 것이 남편이라고 생각한다그 정도로 주룡은 얼굴 곱고 성정이 순수한 남편에게 빠져 있었다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룡은 시댁에서 남편을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남편과 함께 독립군 활동에 뛰어들기로 선택했다. “주룡이 독립을 원하는 것은 제 임자 때문이다당신이 좋아서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여성은 연애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라는 편견에서 나온 재해석이 아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거창한 대의보다도 더 와 닿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투쟁에 뛰어들었지만주룡은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편견억압과도 싸워야 했다독립군 동지들은 주룡을 동지라기보다는 부엌일 해 주는 하녀 정도로 취급했고주룡이 기지를 발휘해 활약하고 대장인 백광운 장군에게 신임을 받자 시기했다심지어 백광운 장군과 주룡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다사랑하는 남편마저 주룡에게 열등감을 느끼고동지들이 퍼뜨린 소문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은 주룡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남편이 독립군 활동을 하다 병으로 죽자시댁에서는 남편 잡은 년이라며 주룡을 살인죄로 고소해 감옥에 갇히게 만든다일주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와 친정에 돌아오니친정아버지는 남편을 잃은 딸을 위로하기는커녕 딸이 과부가 되었다고 부끄러워한다게다가 친정 식구들은 땅 몇 마지기 구해보겠다고 늙은 지주에게 주룡을 후처로 보내려고 한다. “망그러진 간나 거둬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면서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온갖 억압을 당한 끝에 주룡은 결심한다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평양으로 간 주룡은 그곳에서 고무 공장에 취직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뒷받침해 준 것은 노동이었다자기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되면서 주룡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다시 시집갈 마음도 없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도 관심 없다. 그저 제 한 몸 재미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극장 구경도 하고. 저 커피에도 맛을 들이고. 양장도 맞춰보고. 빼딱구두에 실크 스타킹이니 하는 것도 신어보고. 고무 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담.”


그녀가 꿈꾸는 새로운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 한 몸 부양할 수 있고일을 마친 뒤에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삶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노동이었기에비인간적인 노동 조건과 작업반장의 폭력도 그런 대로 견뎌보려 했다

  그러나 파업단의 교육을 들으면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월급을 제 때 받고손찌검을 당하지 않고아이를 낳고 집에서 쉬면서도 월급을 받는 게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자신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주룡은 동료가 파업단에 가입했다 회사로부터는 해고할 것이라는남편으로부터는 이혼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파업단에 가입했다자신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사람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서

  인생에서의 두 번째 투쟁을 시작했을 때주룡은 또 다시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싸워야 했다평양적색노동조합에서 함께 투쟁하자고 권유하러 왔던 동지 정달헌조차 처음에는 주룡이 여성이라는 것에 당황해한다여성 혁명가 콜론타이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정작 여성인 주룡이 말할 때는 미심쩍어 하고엘리트 남성인 달헌이 말해야 신뢰한다그럼에도 주룡은 모든 억압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낸다오히려 남성 동지들의 모순을 비판한다여성 혁명가의 글을 공부하면서 왜 아내에게는 사상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지노동자가 으뜸이고 근본 되는 계급이라고 하면서 엘리트들은 노동자를 계도와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는지주룡은 사상을 배울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라는 당사자성을 활용해 세상의 모순과 억압을 간파하고 그것들과 맞서 싸운다

  이 책의 홍보 문구는 삶이란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다첫 번째 투쟁에서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면 두 번째 투쟁에서 주룡은 사랑하는 동지들의 손을 잡았다주룡은 어린 직공인 옥이에게 말한다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삶이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라면혁명은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고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고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그렇기에 주룡에게 혁명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지들과 목숨을 걸고 두 번째 파업을 결행했지만 경찰들에게 무참히 진압 당했을 때그녀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혼자서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것경찰들의 손으로 끌려 내려간 뒤에도 단식 투쟁을 거듭하던 그녀는 건강을 해쳐 이듬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소설은 주룡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동료 직공 삼녀를 통해 주룡의 최후를 알린다비극적인 최후인데도 소설은 지극히 담담한 문장으로 끝난다. “저기 사람이 있다.” 

  저기 그녀가 있었고또 다른 높은 곳에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그들 모두가 사람이었다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사람답게 살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다이렇게 이 소설은 우리의 현재와 삶을 위해 투쟁했고삶 자체가 투쟁이자 혁명이 된 한 사람의 삶을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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