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스포일러 포함


  사람들에게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자분명 같은 이야기인데도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표현이 달라질 것이다그리고 사람마다 이야기에서 읽어내는 의미도 다를 것이다어떤 사람은 나무꾼을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 볼 것이고또 다른 사람은 나무꾼을 파렴치한 결혼사기범으로 볼 것이다지어낸 이야기뿐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다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건의 진상은 제각각이다그리고 그 사건이 지니는 의미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과연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최제훈의 단편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의 단편들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기존의 이야기를 패러디한 단편들과 평범한 주인공이 일상 속에서 겪는 혼란을 다룬 단편들이 두 종류의 단편은 서로 성격이 전혀 다른 것 같지만이들이 말하는 주제는 같다명명백백한 단 하나의 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패러디 단편의 예로 표제작퀴르발 남작의 성을 살펴보자이 단편은 하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는지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의미들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프랑스의 귀족 퀴르발 남작이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었다는 가상의 설화는,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21세기 초 한국까지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소설과 영화블로그 포스트, TV 뉴스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된다사람들이 퀴르발 남작 이야기에서 찾아내는 의미도 제각각이다. 1950년대의 미국 기자는 퀴르발 남작 이야기에서 공산주의의 폐해를 읽어내는 반면, 2000년대의 일본 감독은 정반대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읽어낸다그리고 작가는 이 모든 변형들을 낳은 실제 퀴르발 남작의 진실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들 또한 유일한 진실을 찾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지어낸 이야기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되는 이야기들과 달리 일상 속에서 우리가 겪는 일들에는 수수께끼나 모호한 구석이 전혀 없을 것 같다그러나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기에진실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그녀의 매듭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에서 지워버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그림자 박제에서는 주인공이 말하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진실인지 주인공의 또 다른 인격 톰이 말하는 학대당하던 어린 시절이 진실인지 모호하게 처리된다.마리아그런데 말이야에서 주인공과 후배의 이야깃거리가 됐던 마리아의 정체도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로 추측될 뿐이다.

 

  디테일한 설정을 토대로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처럼 묘사하는 작가의 서술 기법 또한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호하게 한다.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가상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대학 강의감독 인터뷰리뷰 기사는 실제 대학 강의와 리뷰 기사의 특징을 디테일하게 살리고 있어,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영화가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착각까지 불러온다.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에서는 실제 마녀사냥에 대한 역사 자료들을 활용해 실재감을 높인다.


  독자들은 이 책 속 단편들을 읽으면서 허구와 진실을 구별할 필요도이야기의 명명백백하고 유일한 진실을 찾아낼 필요도 없다소설 속 진실의 파편들을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해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자유롭게 만들어내면 된다그렇게 재구성된 진실은 마지막 단편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속 시체 조각들을 이어 붙여 재조립한 시체와 닮은 모습일 것이다모순되고 충돌되는 요소들로 재구성된 진실은 단 하나의 명명백백한 진실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