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숨은글에 스포일러 포함. PC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만 모바일, 앱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모바일이나 앱으로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스포일러를 피하시는 분은 처음부터 글을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학교 국어 시간에 1인칭, 3인칭 소설에 대해 공부할 때 한 번씩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면 2인칭 소설은 없을까?'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쓴 이 소설 『아우라』가 바로 2인칭 소설이다. "너는 광고를 읽어. 이런 광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곱씹어 읽어 보지. 바로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광고야." 화자가 2인칭 '너'라고 부르는 인물은 주인공인 젊은 역사학자 펠리페 몬테로이다. 작가는 왜 이렇게 독특한 서술 기법을 사용했을까?


  작품 뒤의 해설에서는 주인공을 '너'라고 부르는 화자가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라고 설명한다. 화자는 다른 사람의 내면은 전혀 설명하지 않지만 주인공 펠리페가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소설 속의'너'를 모두 '나'로 바꾼다면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게 된다. 1인칭 주인공 시점과 이 소설의 2인칭 시점은 어떻게 다른 효과를 줄까?

 펠리페는 작품 속에서 자신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괴기스러운 상황 앞에 놓여 있다. 죽은 남편의 회고록을 정리하면 거액을 지불하겠다는 귀족 노부인 콘수엘로의 광고를 본 펠리페는, 연구비를 벌 생각으로 콘수엘로의 저택에 찾아갔다. 펠리페는 회고록을 정리할 동안 자신의 저택에 머물러 달라는 콘수엘로의 부탁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낮에도 어두침침한 저택에서 펠리페는 존재하지도 않는 정원, 불에 타 죽는 고양이 같은 이상한 환상들을 보게 된다. 펠리페는 콘수엘로의 시중을 들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조카딸 아우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우라는 때때로 이상행동을 보인다. 펠리페는 콘수엘로가 아우라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펠리페 자신이 이야기하는 1인칭이나 3인칭 작가가 말하는 것과 달리, 2인칭 시점은 펠리페의 머릿속 또 다른 자신이 펠리페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자신과 분리된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작품에 기괴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더하면서, 작품 자체의 결정적인 반전을 암시한다.

* 스포일러 부분 


접힌 부분 펼치기 ▼

 펠리페를 '너'라고 부르는 화자가 사실은 펠리페와 같은 사람, 펠리페의 또 다른 자아인 것처럼 콘수엘로와 아우라는 같은 인물이다. 아우라가 콘수엘로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고,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양을 잡고 손질하는 모습, 회고록과 사진 속에서 아우라와 똑같은 모습으로 묘사되는 젊은 시절의 콘수엘로는 이런 반전의 복선이 된다. 콘수엘로는 젊은 시절 동물들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실험을 한 끝에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간직한 아우라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우라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콘수엘로가 펠리페에게 보여준 환상인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든 주술을 사용하든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자동인형인지, 자신이 잠시 젊어지는 약을 마신 건지 알 수 없다.

 

펼친 부분 접기 ▲


  작품의 결말에서도 비밀의 진상은 완전히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비밀의 진상을 정확히 알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 모호함이 작품을 더욱 더 괴기스럽고 신비스럽게 만든다. 흑백으로 된 고전 공포 영화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을 주지만, 또 다른 자신이 머릿속에서 말하는 듯한 2인칭 시점은 영화로는 옮길 수 없는 문학만의 장치이다. 작품 뒤에 실린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너'라는 단어는 모든 시공간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넘나들며 유령처럼 움직일 때 나 자신이 된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젊음과 노년, 삶과 죽음을 분리할 수 없고, 젊음, 노년, 삶, 죽음이라는 이 네 가지가 서로를 부른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정체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확고하고 통일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욕망은 젊음과 노년의 경계도 뛰어넘어 자기만의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