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명언 - 멋진 인생을 위한 15가지 지혜
알렉스 로비라 지음, 박선영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만약 인생을 값지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 조건 등을 따져 봐야 될 테고 마음의 상태를 드려다 봐야 할 테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인생의 역경과 세파를 극복하는 방법 혹은 자세는 반드시 일정한 나름의 틀을 만든다. 아직 가보지 못한 미래의 불확실한 범주에 해당하는 영역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그 틀은 견고해지거나 혹은 허물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어진 선택의 상황이 불확정적인 순간일수록 인간은 두려움에 빠지거나 불안해지고 막연해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간결한 문제만 남게 된다. 마음은 실체는 없으되, 상황을 움직이는 강력한 구심점이 된다.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무엇인지 안다면 아마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든든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고 치유하며 단련시키는 방법은 다양하게 공존한다. 그 중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인 위대한 인물들의 행적이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때론 그것이 일화의 형태로 메시지의 형태인 명언으로 이어지고 연결되기도 한다. 한 번 쯤 명언에 대해 아무런 저항 없이 크게 공감한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지 싶다. 나는 명언을 남긴 역사적 가치의 위상보다 그 순간의 절실함 또는 삶을 바라보는 진정성에 눈길이 오래도록 머물곤 한다. 상황을 주도하는 힘,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에너지가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모티브가 되었으리라. 그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부르며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라고 지칭한다. 현명함에 대해,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에 대해, 자유로운 삶을 위해 지혜는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이처럼 멋진 인생을 위해 우리는 위인들이 남긴 행적을 거듭 되살펴 보게 된다. 이러한 이유가 진부한 소재로 치부되는 이러한 류의 책을 일축시키는 내재된 힘이다. 이 책 <내 인생 최고의 명언> 또한 분명한 진리를 다룬다. 격언이나 명언이 퇴색되지 않는 이유가 실체적 경험을 통해 검증되고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저자 알렉스 로비라는 이러한 가치에 대해 고무적으로 작용하고 판단하였으며 그만의 프리즘을 통해 알고리즘을 분해하여 해석하여 놓았다.  위대한 선인들의 고민과 사색의 추출물에 대해 인생을 관조하는 거대한 공감에너지로 바꾸게 만드는 알렉스의 이 책은 강한 영감을 불어 넣어 주기에 충분하다. 지식정보화사회에 사는 현대인의 어지럽고 혼탁해진 마음을 정화시켜 주고 희석시켜 주는 것으로 최고의 명언은 참된 값어치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을 멋지게 만드는 순간을 '태도(attitude)'에 함축시키고 있다. 좋은 태도가 좋은 운을 불러 모으고 멋진 인생을 사는 첩경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가 몸에 밴 사람들의 공통점에 대해 그는 9가지 습관으로 분류했다. 긍정적인 마음자세, 남의 탓 하지 않기, 실수로부터 배우기, 언제나 자신감, 생생하게 꿈꾸기, 잘 참고 잘 결단하기, 자발적인 의미부여,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기, 행복 전도사와 같은 자세를 가리킨다. 각각의 자세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보편적인 진실이다. 그것이 비록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글로, 소설로 쓰여졌다할지라도 명징한 진실을 향한 돋을새김처럼 되뇌고 반복되어도 변질되거나 오염되지 않는다. 태도는 곧 행동을 유발하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은 감정과 이성을  대변하는 관념이다. 풀이해서 보면 관념은 마음이다.

 

그러하기에 문제는 저자의 반듯한 주장처럼 자세와 태도를 만드는 생각, 즉 마음에 있다. 이 책을 구성하는 총 15장에 함축된 내용들의 목적이 바로 마음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역경을 극복하고 한계를 이겨내는 힘에 대해 일갈하며 강렬한 열망을 분출하고 에너지를 만드는 긍정력에 대해 논하는 배경 또한 마음을 세우는 것에 향한다. 불가능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었다.(p.84, 앨버트 아인슈타인) 어렵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다. 감히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p.110, 루사우스 세네카) 가능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불가능한 것을 재차 삼차 시도하는 것은 값진 일이다.(p.131, 헤르만 헤세)

 

마음은 때론 신념의 다른 모습이다. 신념은 인간이 가진 본질적 자유에 대해 존재감을 부여한다. 신념은 인간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며 그 바탕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내며 인생을 경이롭게 만든다. 나는 이성의 힘보다 사랑의 힘을 더 신뢰한다. 사랑이 값진 이유는 삶을 윤택하게 하고 살아가는 것에 목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간을 위해 알렉스는 명석한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지혜와 힘과 지식의 비밀은 겸손이다. (p.142, 어니스트 헤밍웨이) 부족한 것들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이다.(p.154, 다니엘 디포)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 의하면 인생을 사는 의미는 사랑으로 집약된다. 사랑은 다정함으로 겸손을 깨우고 겸손은 감사를 뒤따르게 한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의 연결고리는 행동이라는 틀을 갖추고 그 틀은 습관이 되어 인격이 될 것이다. 인격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며 태도를 만들게 됨은 분명하다. 이렇듯 인생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비단 이 책이 일러주는 방법에 대해 식상해 할지라도 자신만이 갈고 닦은 마음의 지도를 다듬고 겸허한 순간을 수용하는 진실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남긴 명언 한 마디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한 번 쯤은 읽을 가치가 높은 책임은 분명하다. 다른 계획들을 세우다가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p.198, 존 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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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2-09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긍정적인 마음자세, 남의 탓 하지 않기, 실수로부터 배우기, 언제나 자신감, 생생하게 꿈꾸기, 잘 참고 잘 결단하기, 자발적인 의미부여,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기, 행복 전도사" - 좋은 얘기 맞네요.
행복 전도사만 빼고. 저는 이상하게도 행복 전도를 대놓고 내세우면 위화감이 느껴져요.
왜 그럴까요? ^^

마음은 신념의 다른 모습. 행동도 그런거 같구요. 아마 행동이 더 그렇겠죠. 마음은 인식하는 거지만, 행동은 무의식까지 짬뽕되어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리는거니까. 신념이란거, 나도 모르게 형성되는 것도 많이 있잖아요.

곡우님, 눈이 왔어요. 좋은 날 되셔여!

穀雨(곡우) 2010-12-09 15:42   좋아요 0 | URL
마고님 말씀처럼 행복을 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인데,
위화감이 느껴지는 현상.....아이러니하죠...^^
아마 지나친 논리나 주장을 펴기 때문이 아닐까해요.
공감할 수 있는 틀, 나와 너를 인정하는 틀이 있어야 행복 또한
바로 설 수 있지 않을까해요.

아...제가 있는 곳은 눈이 귀한 곳이예요. 대신 바람이 세차지요.
어제 오늘 모공을 자극하는 바람에 혼났더랬지요...^^

2010-12-09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흐름을 읽는다는 것, 중요한 일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모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바쁜 것도 이유겠지만 숲과 나무를 혼동하는 우를 범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근래 무엇에 쫓기듯 마음이 편칠 못하다. 중심을 잡고 집중을 하여야 함에도 그러질 못한다. 빽빽하던 하루 하루가 밑천을 드러내서 일수도 있고 속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현기증에 숨이 막혀서인지 모르겠다. 

책을 읽어도 마음의 지도가 그려지질 않는다. 난독증에 걸려 무한반복 재생하는 도돌이표처럼 나는 읽은 곳을 읽고 또 읽는다. 하지만 혼탁하게 흐려진 생각은 분탕질하기에 바쁘다. 여유가 절실하다. 바쁜 것이 반드시 생산적이지 못함을 절실하게 인식한다. 바쁘다는 간단하고 직접적인 이유, 알고 보면 허당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귀가 맞질 않고 삐꺽삐꺽대는 소리만 요란하다.  

불규칙적인 리듬과 불협화음으로 흐름은 깨어졌다. 나는 흐름을 에너지의 맥이라고 본다. 에너지가 생성되고 발현하는 기저에는 의식 속에 머무는 생각의 모임이 핵심이다. 에너지는 원하는 방향과 대개 일치한다. 그러나 원하는 것과 일치하지 못하는 혼동의 현상, 난감하다. 누구나 불안, 두려움, 무지, 의욕상실 등 네가티브한 상태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나는 표리부동한 현실의 반영처럼 에너지 또한 구부러진다고 믿는다. 구부러진 에너지는 원치 않는 곳에 정박하기도 하며 혼란이나 충돌은 가중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에너지의 방출이 스트레스가 될 것이고 기의 운행을 어지럽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다스리는 방법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 양식의 본질을 파헤친 기념비적 저서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에 있다고 했다. '놀이'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원형이 된다고 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문화가 표방하는 공통된 형태가 바로 '놀이'로 상징된다고 한다. 결국 '놀이'가 삶의 결락된 부분을 메워주는 충전제로 인간을 외부적 저항이나 내부적 갈등으로부터 부드럽게 윤활해주는 역할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 즐겨 읽었다는 제레미 리프킨의 신작 <공감의 시대>에 의하면 인간은 생물적 유전자코드에 사회적 인간으로 진화해 왔으며 관계의 접촉에 감정이 전이되고 공감의 틀을 만든다고 하였다. 아직 완독하지는 못하였으나, 공감의 큰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다. 실제 잘 알려진 심리적 상황을 공감이라는 변주에 맞춰 사실적인 현상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풀이되어 있어 피로감이 없다.

 

나는 놀이와 공감이 주는 엄청난 효과를 잊고 살았던듯 하다. 놀이의 의미부여는 고착화된 관념에 의지하는지 모른다. 놀이에 대한 자본주의적인 사고가 흡착되어 다른 관념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놀이는 쓸모없는 낭비된 시간이 아님을 알면서도 은연중에 시간을 버린다는 이분법적인 사고 속에 갇힌다. 그러므로 놀이를 거창하거나 생산적인 것으로 격상할 필요도 없거니와 에너지의 흐름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하지 않을까 한다. 무엇이든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기의 운행과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공감은 흐름을 고무시키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구실을 한다. 나 스스로에 대한 공감, 서툴다. 불안의 근원은 자기를 믿지 못해서 생긴다고 본다. 자신을 믿는다면 불안은 적당한 긴장으로 바뀔 것이고 그것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으는 또 다른 방법이 될테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 어렵다. 과연 나는 나 자신을 믿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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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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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전문가들은 지금의 시대를 인간중심의 세계라고 일컫는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시간 중 가장 번영한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전 세계를 하나로 묶고 발생 가능한 정보의 획득과정이 만천하에 오픈된 사회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문화적 변화를 추동하는 동인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정치적 지각 판까지 흔들어 바꾸기는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뉴욕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지구 반대편에서 생생하게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사건에 대한 각양각색의 반응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세상이다. 대개 팩트에 대한 평가는 가치판단의 문제다. 가치를 구성하는 요인은 목적의식을 설정하고 자아의 기준점을 관념이라는 거름망을 통해 개별화된다. 이러한 가치판단의 문제는 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철학은 인간이 집단화되고 사회를 구성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될 무렵부터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어 왔다. 그것은 가치관으로, 삶의 준거점으로 인간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시금석이 되어 왔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 즉 관념의 틀은 기술의 발달과는 별개로 변화의 속도에 둔감하다. 사회의 분화적 발달의 속도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근래에 와서야 개인의 권리와 자유, 행복, 평등에 대한 가치판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상대적 차별과 권리 상호간의 충돌에 대한 내재화된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토마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판단하고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야지 시민사회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존 로크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은 자유이며 이러한 상태에 대한 타자와의 충돌, 즉 불편한 상태 혹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부에게 권리를 양도하여 국가를 창설하였다는 사회계약론으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중세철학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다분화되고 가치충돌에 대한 문제가 다양화되면서 일차적인 기준점으로 모든 문제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산업혁명을 거치고 인쇄술의 발달로 교육의 평준화로 인해 지식의 보편화는 그 자신의 권리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철학적인 접근, 미시적인 윤리의 보편화에 대한 판단은 유동적인 상황을 보편타당한 가치로 바꾸는 터전이 됨은 당연한 이치겠다. 마이클 샌던이 정의를 논하고 다시 도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문제의 출발선이 바로 개별화된 판단의 문제를 인식가능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것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그는 이미 정의에 대해 불편한 환부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핏대를 세웠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옳은 일은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옳은 일은 좋은 일에 선행하며 무연고적 자아, 즉 자율의지의 주체만이 인간을 감각적 존재보다 더 높은 존재로 격상시켜 준다고 했다.

 

마이클 샌던의 확고한 믿음의 원천은 옳은 일에 있다. 그의 논점은 임마뉴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핵심가치인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지향한다. 공리주의자들의 쾌락에 근거한 행복에 대한 오류를 수정하고 점검하는 방향틀로 그는 칸트를 택했다. 목적에 대한 견고한 신념, 그것은 윤리를 일으켜 세우고 이 시대의 딜레마를 무찌르는 힘이 된다. 기실 자유주의에 대한 접근은 앞서 언급한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의 이념처럼 정부에 대한 역할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부는 모든 권리를 이양 받아 개개인의 권리형평에 맞게 적용하여야 한다. 하지만 마이클 샌던이 이 책 <왜 도덕인가?>의 1부에서 언급한 동성애자, 낙태에 대한 가치충돌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옳다는 관념의 총합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의 튼실한 자원이 되며 나아가 보편타당한 정치의 틀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는 믿음이다.

 

그가 자본주의에 점령당한 인간 본성의 문제를 푸는 키워드로 철학과 윤리의 카드를 꺼내든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의 창이기 때문이다. 속임수가 횡행하고 무관용이 판을 치는 이기적인 행동을 치환하는 방편이 될 것이다.  마이클 샌던이 주장하는 철학의 문제는 비단 미국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글로벌화되고 웹 2.0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에 그의 명징한 통념은 화두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의 전작 <정의란 무엇인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도덕성 결여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제대로 보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물론 철학은 고민과 고민의 시간이 응집된 가치의 총체다. 공감의 문제와 밀접하다. 공감은 역차별이나 상대적 반사이익을 옳은 것으로 유지하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마이클 샌던이 던지는 이 시대의 화두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자신의 권익과 자유의 근원적인 뿌리가 되는 윤리에 대한 진중한 문제다. 우리 사회가 정의와 윤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불편한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인식 타당한 가치의 얼개를 구축하는 사회적 합의의 출발점에 바로 정의와 윤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완전한 상태의 이상理想, 그 너머가 아닌 현실의 내재된 이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치열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될 것이며 다원주의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는 존재의 판단이 아닌 현상을 이해하는 목적이 될 것이며 인간을 한 차원 높은 상태로 이끄는 정신적 진화의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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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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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쌍성(雙星)의 밀고 당기는 힘처럼 자연의 법칙이다. 음과 양, 사물의 겉과 속, 어디든 존재한다. 듀플렉스처럼 상호 독립하여 병존하지만 불가분이다. 인식이 스치는 모든 곳, 더블이 지배한다. 획득가능한 모든 것에 더블의 관념이 기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간에게 실현가능한 변수의 조합은 더블의 관념에서 발현하는지 모른다. 박민규 작가의 더블에 담긴 그 의미, 행과 불의 경계이다. 상상과 현실의 테두리를 넘나들며 마치 우주의 언어나 미래의 언어로 기록된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법칙을 담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말한다. 이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가리킨다. 때론 섭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섭리는 인간의 관념을 고착화하기도 한다. 당연한 인과율의 법칙, 그 속에 지배된 인간의 불완전한 의식은 새롭거나 기이한 상태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박민규의 이 책 <더블>의 단편은 연역적 관계를 차단하는 존재의 반항을 오롯이 천명한다. 그의 생각의 틀 속에서 짜여 나온 이야기의 실재는 기존 관념의 존재를 포섭과 파괴의 양립된 현상으로 병존하며 평행선을 내달리는 가히 더블의 연속이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중어의 반복을 통해 공고히 다져지고 흡입된 관념의 거름망 속으로 박민규式의 언어로 재해석된다. 그의 이야기는 그로테스크한 상상의 변주다. 현실이 존재한다면 상상이 존재한다는 실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21세기를 사는 동시대의 인류에게 전하는 공감의 또 다른 코드라고 할만하다.

 

<더블>은 총18편의 단편 선으로 두 권의 양장본으로 묶였다. 형태는 디스크자켓처럼 작품의 본질을 적확하게 제시하는 일러스트와 작가의 소회로 구성되었다. 박민규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 흔적 등을 특정의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방식으로 틀과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의 시도는 규격의 틀에 재단된 눈과 마음을 유연하게 해 준다. 기실 18편의 단편에 담긴 각양각색의 에피소드를 구성한 그의 방대한 창작력에 경의를 표하게 되지만 겉과 속에 담긴 각기의 본질을 은연중에 시각화시켜 주는 그의 배려가 더욱 도탑게 다가선다. 생각이 곧 문화가 된다는 사실처럼 그의 이야기 속에는 범 글로벌문화를 표방한다. 지역과 우주를 가르는 광활한 무대배경, 도시인의 고독한 삶, 인간의 존재의미를 다루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반전과 허무의 일상 등이 고스란히 차오른다.

 

트렌드나 문화의 일종이라면 <더블>은 지구의 언어가 해석가능한 모든 언어로 표현되고 공감할만한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견고한 상황을 가볍게 무너트리는 공력, 그의 필력이다. 인류가 탐욕에 의해 멸망하는 절체절명의 암흑의 상황을 층간소음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일상과 포개는 그의 상상력의 빚어낸 이야기 <끝까지 이럴래?>. 인간에게 더 시급한 문제는 사소한 불편의 해결일지도 모른다는 불변의 진리인지 모른다. 이러한 사실은 BC1700년전 한반도를 무대로 한 <슬>을 관통하는 관념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욕망의 해갈의 근원적인 물음도 사소하거나 단순한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박민규의 이야기에 걸려든 관념의 거름망은 인간의 의식을 양분하는 갈래의 커다란 경계를 해체하고 분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관념은 18편의 전편을 지배하는 공통의 메타포이다.

 

그래서 더블의 중첩적인 시선으로 이 책에 담긴 이야기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박민규의 관념에 포위당하고 공감의 마법에 어김없이 걸려들게 된다. 치명적인 유혹이거나 감미로운 선율이든 시나브로 젖어드는 그의 이야기의 깊이에 지구의 해저 끝까지 압력의 밀도가 차오르는 <깊>에 주억거리게 되고 <아치>에 올라선 현대인의 불일치에 동조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더블>의 안에 담은 이야기를 동일한 패턴으로 구동시키지는 않는다. 생각의 엔진을 가동하고 가열되고 분사된 에너지로 가속의 변속을 폭발하듯 그는 우주로 날아가고 시공을 넘나든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크로만, 운>이다. 묵시록적인 소설인 이야기는 뉴질랜드의 작가 버나드 베켓이 쓴 <2058 제너시스>와 궤를 같이 한다. 박민규의 이야기가 인간의 존재의미를 고찰한다면 버나드 베켓의 이야기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철학적인 시선으로 묻는다. 이러한 박민규식 해학은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에 보다 정확하게 드러난다. 스나이프, 동성애, 무차별 처단, 배설, 섭취의 일련의 행위들에 따라 전혀 어울리지 않을법한 조합의 인자를 상대로 엉뚱한 곳에 불시착한 느낌처럼 낯선 감각을 토해낸다.

 

때로는 이렇게 낯설고 거친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더 자연스러운지 모른다. 그가  생뚱맞은 상황을 현란하게 주무르고 고정된 퍼즐조합을 이것과 저것의 지칭을 혼합하는 작업을 선행한 것처럼 뒤따르는 결과물 또한 자연과 부자연의 경계를 구획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독자의 예상을 빗나가는 반전이나 재미의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조합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는 결론은 성급하다. <루디>의 냉혹하고 인과관계가 단절된 행위를 보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해 진다. 절벽의 끝, 폭풍 같은 질주로 마감하는 장면은 인간의 욕망이 브레이크 없는 전차와도 같다는 무지한 현실에 다다른다.  따라서 박민규가 그의 단편 하나에 실은 의미의 총합은 여지 혹은 공백을 통한 공감의 유도나 해석으로 가능케 한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보이는 세계, 보지 못한 세계, 다다르지 못한 세계, 정복하였으나 오류로 점철된 세계를 무시로 경험한다.

 

과연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경험의 거리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박민규의 이 책에서 하나의 답을 보았다. 우문현답이 아닌 현문우답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상상력의 뭉치에서 무엇을 만들지는 개별의 몫이다.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에 등장하는 잘 나가던 세일즈맨의 비극적인 현실처럼 붙들 곳 없는 현실에 매달려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기운다. 화성으로 자동차를 팔러 가고 그 곳에서 만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흑인 세일즈맨과의 동질의 교감, 황망한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하기에 나는 <더블>의 세상에서 희로애락의 4중주를 만끽했다. 진실과 거짓의 양면 외투처럼 세상은 그렇게 움직인다. 스테파니 아가씨가 보았던 그 <별>이 곱디 고왔다면 박민규식 <별>에 쏟아진 풍광은 현실이다. 결국 세계는 양면, 듀플렉스의 반영이며 더블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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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1-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 다른 책 주문했더니,소책자가 왔더라구요.
다른 분 서재 글 보고 망설이고 있었는데,이 리뷰 보니 읽고도 싶어지는 걸요~
별의 해석도 재밌구요~
요즘은 양면,더블이 대세인가 봐요,하루키의 1q84도 그렇담서요~^^

마녀고양이 2010-11-1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보면서 입 벌리고 감탄 중입니다.

곡우님께서 별 다섯개를 주셨다니, 어쩐지 믿음이 갑니다. 최근 들어
국내 작가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했던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만...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리뷰를 보면서 1Q84를 연상했는데, 나무꾼님두 그렇게 보셨나보네요.
세상의 양면, 또는 현실과 이상, 선과 악,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곳들, 데미안도 생각나구요.

좋은 하루되셔요.

穀雨(곡우) 2010-11-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나무꾼님..더블이란 제목이 주는 인상, 전 양면성으로 보았어요.
자웅동체처럼 늘 붙어 다니는 자연적인 법칙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1Q84의 구조와 비슷하게 나아간 모양입니다.

마녀고양이님...박민규의 책을 드문드문 접했지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구조가 흡족하더군요. 이야기에 따라 달리 해석가능하겠지만
제게 그 네러티브가 맞았던 모양입니다.^^

비로그인 2010-11-1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쯤되면 본 책보다 리뷰의 심도가 더 깊다고 봐도...^^
곡우님의 넓고 깊은 감상이 더블과 함께 따따블로 버무려진 감동 그 자체입니다.
얼른 읽어야 하는데, 어흑~~밀린 책들이...^^

穀雨(곡우) 2010-11-19 13:19   좋아요 0 | URL
아~~박민규 작가님이 읽으면 웃겠습니다.^^
그래도 기분 좋은데요..ㅋㅋ
 
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웹 2.0 시대를 사는 요즘, 글은 생활이다. 때로는 말보다 글이 편할 때가 있다. 글은 음절과 음절을 이어 단어를 만들고 다시 문장을 형성하는 동안 생각은 다듬어진다.  비록 상황에 따라 글은 퇴색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반해 글이 가진 파급력은 무차별적이리만큼 크고 넓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글을 잘 쓰는 재능 혹은 자질을 가진 이를 부러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일한 상황을 해석하는 힘, 능력이 남다르다면 그 또한 축복이겠다. 계절이 피고 짐에 따라 감정의 중추가 미묘하게 반응하는 상태를 문장으로 복기하듯 옮겨 내는 능력은 부럽고 또 부럽다. 정수리로 떨어지는 햇살의 양태를 마치 감촉이 손끝으로 전달되어 짜르르 퍼지게 하는 감각의 전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의 드넓은 세계로 안내하는 훌륭한 길라잡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글은 누구나 쓰지만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하기에 창작을 뜯어 먹고 사는 작가의 고통과 독자의 즐거움은 반비례한다고 했다.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그 결과는 냉혹하다. 진심으로 짓겠다는 흔해 빠진 광고처럼 간결한 진심은 궁즉통이다. 이 책 <라이팅클럽>의 저자 강영숙 또한 그런 동질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어마 무시한 시간을 인내하고 마치 소믈리에가 최적의 와인을 선별해 내 듯 문장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선택된 문장은 감정의 틀 속에 숙성을 해야 비로소 글이 된다. 그러므로 잘 된 글은 진심이다. 진심이 결여된 글은 형식에 불과하다. 유행에 휘둘리듯 흘러가는 부유물이다. 누에로부터 실을 추출해 내는 그 사소하고 반복적인 행위들이 모여 윤기 나는 비단이 되는 것처럼 잘 된 글에서는 윤이 난다. 읽는 자는 귀신처럼 알아본다. 무엇이 잘 된 글인지에 대해.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강영숙의 문장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 조각에 불과한 미묘한 상황 변화에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힘이 탁월하다. 그래서 같은 문장으로 쓰인 글이라도 상황의 가변성에 적확하게 어울린다. 보기에 따라 기교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강영숙의 색깔임에 분명하다. 이 책의 소주제인 설명하기와 묘사하기의 형식처럼 작가는 이 책의 중심 배경인 계동의 모습과 인물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 온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실제 이 글을 읽는 동안 창작을 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구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절묘하게 버무려 내는 작가의 글에 감탄하고 또 공감한다.

 

라이팅클럽과 계동 글짓기 모임, 양극단의 문장이나 같은 내용이지만 질감은 다르다. 작가를 자칭하는 엄마를 둔 사생아 딸과의 이야기다. 둘은 견원지간처럼 사이가 벌어져 있지만 동일한 지점을 지향한다.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기 위한 몸부림을 토해 내기 위해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라이팅클럽과 글짓기 모임이다. 그래서 책은, 두 여자의 글쓰기를 추적하며 글을 잉태해 내는 과정을 뒤쫓는다. 구르고 뒹구는 삶의 파란만장한 편린들에 대해 작가는 글쓰기로 묘사하며 집중한다. 간결함 속에 강렬한 색감이 뒤섞여 튀어 나오는 느낌이다. 무덤덤해지기 쉬운 혹자의 인생을 호기심으로 뒤채는 능력이 결부되었기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강영숙의 이 글 속에는 다양한 시각들이 혼재한다. 무기력하고 나른한 인생을 살아가던 주인공 영인과 관계를 맺는 인물들의 다양성은 광각의 확장처럼 파노라마로 꿈틀댄다.  정체성의 혼란, 질풍노도의 시기와 같이 누구에게나 지나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인생의 그렇고 그럼에 대해 작가는 관조적인 언어로 대응해 준다. 음각과 양각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한 어머니는 대척점에 가 선다. 수평의 균형을 맞추듯 이야기는 내용의 독특함에 반해 안정감이 느껴진다.

 

돈키호테의 무모함이 때로는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 나가는 커다란 견인차가 되기도 한다는 과정을 용기라는 의미로 교차시키며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와 잭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의 문장들을 슬쩍 슬쩍 삽입하며 글쓰기의 고통을 노동의 직접적인 대가, 진정성에 비유한 전개는 인생을 조망하는 관점의 일치감을 형성하는 모티브가 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어제와 오늘의 생활이 달라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글은 간결하다. 영인이 엄마의 히스테리를 혐오하며 닮기를 거부하지만 어느새 닮아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오히려 능청스럽다. 결국 둘은 의도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언어와 시선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쳤던 셈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맴돌기만 하던 이야기의 끝이 하나의 합일을 이루어 내며 계동을 감싸주던 햇살처럼 공감을 이룬다.

 

공감의 언어는 글쓰기의 존재의미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에 대한 밀접한 관계다. 누구에게나 2박3일을 꼬박 지새울 사연 하나쯤은 있듯 개별적인 삶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그 속에서 스며든 사연의 흔적은 우여곡절이 만든 삶의 침전물이다. 토해내지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사연을 글은 갈무리하고 단정하게 변화시켜 준다. 강영숙의 글쓰기, 라이팅 클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농밀한 언어로 정제된 문장을 선보인다. 글을 단순히 관계를 매개하는 수단이 아닌 자신을 투영하는 하나의 성숙한 감각의 무엇으로 활용하는 길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라이팅클럽>에 모인 그들 모두는 사실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글은 그렇게 읽히고 퍼져 나가며 공감하게 되며 관계를 묶는다. 만약 글쓰기에 목말랐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책을 보시라. 울고 웃는 사이 묘사와 설명이 절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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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1-1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몰라서 망설였는데...이 책 조용히 회자되더군요~^^

穀雨(곡우) 2010-11-18 13:14   좋아요 0 | URL
여성 특유의 감각이 착 감기는 책이지요.
촉감의 시각화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