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읽는다는 것, 중요한 일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모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바쁜 것도 이유겠지만 숲과 나무를 혼동하는 우를 범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근래 무엇에 쫓기듯 마음이 편칠 못하다. 중심을 잡고 집중을 하여야 함에도 그러질 못한다. 빽빽하던 하루 하루가 밑천을 드러내서 일수도 있고 속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현기증에 숨이 막혀서인지 모르겠다. 

책을 읽어도 마음의 지도가 그려지질 않는다. 난독증에 걸려 무한반복 재생하는 도돌이표처럼 나는 읽은 곳을 읽고 또 읽는다. 하지만 혼탁하게 흐려진 생각은 분탕질하기에 바쁘다. 여유가 절실하다. 바쁜 것이 반드시 생산적이지 못함을 절실하게 인식한다. 바쁘다는 간단하고 직접적인 이유, 알고 보면 허당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귀가 맞질 않고 삐꺽삐꺽대는 소리만 요란하다.  

불규칙적인 리듬과 불협화음으로 흐름은 깨어졌다. 나는 흐름을 에너지의 맥이라고 본다. 에너지가 생성되고 발현하는 기저에는 의식 속에 머무는 생각의 모임이 핵심이다. 에너지는 원하는 방향과 대개 일치한다. 그러나 원하는 것과 일치하지 못하는 혼동의 현상, 난감하다. 누구나 불안, 두려움, 무지, 의욕상실 등 네가티브한 상태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나는 표리부동한 현실의 반영처럼 에너지 또한 구부러진다고 믿는다. 구부러진 에너지는 원치 않는 곳에 정박하기도 하며 혼란이나 충돌은 가중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에너지의 방출이 스트레스가 될 것이고 기의 운행을 어지럽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다스리는 방법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 양식의 본질을 파헤친 기념비적 저서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에 있다고 했다. '놀이'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원형이 된다고 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문화가 표방하는 공통된 형태가 바로 '놀이'로 상징된다고 한다. 결국 '놀이'가 삶의 결락된 부분을 메워주는 충전제로 인간을 외부적 저항이나 내부적 갈등으로부터 부드럽게 윤활해주는 역할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 즐겨 읽었다는 제레미 리프킨의 신작 <공감의 시대>에 의하면 인간은 생물적 유전자코드에 사회적 인간으로 진화해 왔으며 관계의 접촉에 감정이 전이되고 공감의 틀을 만든다고 하였다. 아직 완독하지는 못하였으나, 공감의 큰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다. 실제 잘 알려진 심리적 상황을 공감이라는 변주에 맞춰 사실적인 현상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풀이되어 있어 피로감이 없다.

 

나는 놀이와 공감이 주는 엄청난 효과를 잊고 살았던듯 하다. 놀이의 의미부여는 고착화된 관념에 의지하는지 모른다. 놀이에 대한 자본주의적인 사고가 흡착되어 다른 관념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놀이는 쓸모없는 낭비된 시간이 아님을 알면서도 은연중에 시간을 버린다는 이분법적인 사고 속에 갇힌다. 그러므로 놀이를 거창하거나 생산적인 것으로 격상할 필요도 없거니와 에너지의 흐름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하지 않을까 한다. 무엇이든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기의 운행과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공감은 흐름을 고무시키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구실을 한다. 나 스스로에 대한 공감, 서툴다. 불안의 근원은 자기를 믿지 못해서 생긴다고 본다. 자신을 믿는다면 불안은 적당한 긴장으로 바뀔 것이고 그것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으는 또 다른 방법이 될테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 어렵다. 과연 나는 나 자신을 믿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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