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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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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사회를 우리는 흔히 일등독식주의사회라고 말하곤 한다. 치열한 경쟁과정에 의해 선택되고 걸러진 최종승자에게만 집중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경쟁의 소산은 자본주의사회를 추동하는 목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과정은 힘없이 소멸되고 제거되는 모순의 일환이다. 그러나 소멸은 안과 밖의 경계를 생산한다. 승리는 곧 주류가 되고 반대는 비주류가 된다는 이분법적인 시선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몰된 과정보다 결과의 화려함에 더욱 집착하는 전도된 세상에서 살아가는지 모른다.




        승리의 향배가 비록 승자에게 독식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치열한 삶을 분투하며 오직 소명의식과 신명에 믿고 몸을 내맡긴 잊혀 진 승자들의 도전의 여정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것은 곧 다양성과 개성의 인정으로 이어진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상생의 도반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제대로 된 복원의 물꼬를 터야 한다. 복원은 비뚤어지고 왜곡된 시선을 교정하는 효시가 된다. 나아가 물질과 성공이 배합된 편향된 의식을 치환할 확실한 재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평범함에 가까운 그들을 찾아내고 발굴하는 데 인색하다. 혹자는 그들을 이상주의라고 하기도 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무능함에 가득 찬 성마른 시선을 보낸다.




        이처럼 고정관념은 다양성이나 개성을 편향되게 만드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압력은 깊이를 왜곡시키고 그들을 향한 모든 진정성을 폄훼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소개된 인터뷰이들은 모두 치열한 삶의 뜨거운 현장 속에서 굴곡과 변동을 함께 타고 넘나드는 인물들이다. 그들에게서 받은 공통점은 바로 진정성이다.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나아가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 시대의 진정한 개척자라 할 만 하다. 시대에 밀려 침전되고 가라앉기를 반복할지라도 꿋꿋이 터전을 지켜 이어가는 삶은 배금주의세계관에서는 가차 없이 아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들뜨게 하고 정열에 휩싸이게 만드는 동인은 무엇인가? 희망이다. 짓밟히고 뭉개져도 삶을 위무하게 만드는 그것은 흡사 열정과도 같다. 돈 되지 않는 철 지난 영화를 어르신들의 애환과 삶을 다독여주는 시네마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허리우트클래식의 젊은 사장 김은주의 넉넉함을 보면 대번 알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퇴역마 다이와 아라지, 군무 발레리나 안지원, 잊혀진 가수 주정이 등은 모두 기억 속에 지워진 존재들이다. 아니 있으되 느끼지 못하는 존재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음을 우리는 쉽게 망각한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살아 숨 쉬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저자가 발견해 낸 바깥은 사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안과 밖의 정의를 달리하자면 현재의 안이 언제든 밖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나쁜 소린 조심하고 좋은 소리엔 열심히 살면 되지.”라고 명징하게 쏟아내는 점쟁이 천하대신 할머니의 눙치는 삶도 인생굴곡을 염두에 두었음이다. 산악계의 넘버 3로 용케 버텨내며 휴머니스트를 자청하는 산악인 한왕용의 동인은 희망에 맞닿아 있을 테다. 실제 인간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와의 투쟁의 목표는 자기애自己愛이다. 그것은 내부에 겹겹이 쌓인 고준험령을 정복하며 획득하는 강단함과 불굴의지가 빚은 합작품이다.




         옛 말에 제 멋에 산다는 말이 있다. 제 멋의 기준이 당연 개별적 사색의 결과가 우선이겠지만 우리는 타자의 시선에 구속받고 산다. 구속은 멋을 상실하고 개성을 퇴락하는 현실이 되기도 한다. 저자 최윤필 기자가 공유코자한 생각의 우듬지 또한 개성의 탈편중화에 귀결된다. 몰개성화된 현실사회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26명의 개척자들을 통해 우리는 일상에 흩어진 삶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의 연장선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을 통해 조명되어 담긴 멋이 비록 세련되고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노력과 열정이 쌓여 빛을 발한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스며 밴 소박함이 승화하여 만들어 낸 것임을 안다. 때로는 그들의 우직함과 융통성 없음이 못내 미덥지 못하더라도 삶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일러 말해 무엇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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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1인용 식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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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경하다. 그런데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만약 고독의 층위가 분절되고 나뉘어져 있다면 누구든 그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고독은 누구나 공감하고 부정할 수 없는 교집합의 공통분모다. 소외든 고립이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깊은 나락으로 빨려 들어 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흔히 고독한 섬에 붙들어 매곤 한다. 대중 속의 고독, 아이러니컬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완강히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또한 누구나 소통에 목말라 하며 해갈되지 못하는 공감의 목마름에 허덕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인용 식탁>은 고독을 노래한다. 옴니버스로 단락과 장을 구분 짓지만 공통된 메타포는 고독이다. 고독을 이토록 보기 좋게 버무려 낸 젊은 작가 윤고은의 글발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어디서 이런 고소한 팝콘처럼 아삭하게 톡톡 튀겨 볶아진 글이 나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총 9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나름의 아우라를 뽐내며 사뿐사뿐 도도한 시선을 내 지르는 힘에 금세 압도당하고 매료된다. 여태껏 이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가 만든 상상력은 현란하다. 하지만 글과 글 사이에 들어앉은 행간에는 어떠한 기교도 없다. 건조하게 엮어진 문장만이 스미듯 여미듯 관통한다. 이것이 그미의 필력일까? 무언가를 기대하고 따라간 그곳에는 텅 빈 허무만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긴 일탈 후 무겁게 짓누르는 허무함이 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일인용 식탁>은 도시적 삶의 코드를 통해 매몰되고 소실된 인간을 그린다. 그 자장의 범위 내에서는 혼자서 당당히 식사하는 법을 터득하고, 꿈도 대신 꾸어 주며, 달콤한 휴가 내내 빈대에 굴복당하고, 퍼즐을 맞추듯 인베이더 그래픽을 찾으며 일탈을 꿈꾸는 누군가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녀는 주인공들의 성 정체성을 체계적이며 의도적으로 뭉개 버린다. 이를 통해 중성적 대상, 즉 모두를 향해 누구나 그러하리라는 내밀한 공감을 이끌어 내며 원하는 종착점으로의 유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결국 소설 속 화자들이 곧 당신일수도 아니면 작가 자신일수도 있으리라는 든든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오롯이 만끽해 보자는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에 더해 저자의 발칙한 상상력은 당신 안에 잠자던 감성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작가의 문화코드 짚어 내기는 터를 제대로 잡았으며 주춧돌이 튼실하다. 정이현 작가의 <달콤한 나의 도시>가 현실의 모습을 반영하며 거울에 비쳐 퍼진 영상을 복기하는 것과 같다면 저자의 글은 현실과 상상이라는 이스트가 황금비율로 첨가되어 숙성되고 부풀려진 빵처럼 입체적이다. 하지만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공갈빵처럼 쉽게 오그라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홍도야 울지 마라>의 박홍도가 베어 문 솜사탕의 자괴감과 허무함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입 안 가득 퍼지는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고독은 현실 속을 점령한 빈대처럼 상상만으로도 불쾌해 진다. 불쾌감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벗어나고 이성은 빠르게 부유물처럼 떠내려가 버린다. 비단 이러한 현상은 도무지 믿기 어렵지만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러니 그녀의 상상이 허무맹랑한 가십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텁텁함에 거북스럽다. 아픔으로 뱉어 내기에는 사소하고 보편적이다. 그것은 광범위하게 퍼진 삶에 무게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배이고 아프기 마련이다. 상처는 시간이 보듬고 무뎌지게 하지만 고독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피어싱의 날카로운 단말마처럼 차가운 냉소가 자리 잡는다.




        폭설이 쏟아지던 날 삶에 치이고 더 이상 추락할 곳 없는 성인용품 플라토닉 러브 자판기 판매상의 이야기는 상상과 공상의 어느 경계에서 솟아 난 것처럼 가뭇없어 보인다. 냉소 가득한 현실의 절규에 비례해 짜부라지는 화자의 모습과 현실 속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 동일시되는 것은 치열한 경쟁이 낳은 산물이리라. 고립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된 삶의 그늘처럼 야생의 거친 숨소리만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인지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절규하는 것인지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혼자서 폼 나게 식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원이 등장하고 메트로놈에 맞춰 음식을 주문하고 부지런히 먹는 법을 습득하는지 모른다. “나 홀로식사“의 지존은 뭐니 뭐니 해도 삼겹살 공략이다. 그것은 일정한 규칙을 허용하지 않는다. 고립된 쇼 윈도우에 갇힌 존재처럼 쏟아지듯 내리 꽂히는 눈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견뎌야 하는 살벌한 영역이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멀지 않게 존재한다.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빠지는 일이 무시로 일어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의 경계는 우리를 필요 이상 긴장하게 만든다. 연결된 장면이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상황을 건너뛰고 고립된 상황의 재현이라면 우리는 쉽게 궤도에서 이탈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와 함께 라는 심리적 담보에 의해 무탈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혼자는 여전히 민망하다.




        상상이 이처럼 지독하게 현실을 외면한다면 기대한 바와 다르다. 상상은 그저 꿈처럼 말랑말랑하고 블링블링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몽상가의 설렘처럼 조금은 허무하지만 도탑게 다독여주고 위무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작가의 상상은 현실 비틀기를 통해 날것 보다 더 생생하게 버무렸다. 오히려 무게에 눌려 분출된 억압의 잔재를 두텁게 덮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생경한 상상은 현실과 유리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과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희망을 읊조렸다면 더욱 유연해지지 않았을까. 결국 상상은 현실을 담보로 시작된 형체 없는 바람에 불과하며 소멸을 예정한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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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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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풀리지 않는 명제命題가 무수히 존재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철학의 문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미제다. 과학의 출현이 명제를 점령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도구는 될지언정 근본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은 항상 불온해진다. 이처럼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인식의 범주는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기댄 상상에 불과한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이보그처럼 조립과 결합의 과정을 통해 창출된 기계에 담긴 정신의 사유는 어디까지나 무의해진다. 하지만 무의미에 대한 증명은 오롯이 인간의 현재의 범주로 재단한 논거다. 존 코너가 세계를 구원하고 무자비한 터미네이터가 존재하는 그 세계처럼 기계를 벗어난 또 다른 증명되지 못한 정신의 총아가 존재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는가.




        이 책 < 2058제너시스>은 미래의 가능성을 들여다 본 허구가 빚은 이야기다. 인간의 탐욕과 배타성으로 세계가 몰락하고 지구의 귀퉁이 어느 한 작은 섬에 살아남은 인간들에 의해 기록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상상력의 탄탄한 토대위에 세운 과학철학에세이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진화의 종착역을 과학의 프리즘을 통해 펼쳐 보이며 고대철학의 관념을 결부시켜 분절하고 다듬었다는 사실이다. 저자 버나드 베켓은 경제학 전공에 과학 교사라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의 인문학적 통찰력과 과학의 실증성, 철학의 확증성이 결합하여 탄생한 이 책은 결론을 뒤집는 놀라운 반전만큼 시선을 잡아 끌어매는 매력이 넘쳐나는 이야기다.




        실제 미래의 사실은 예측이라는 확률의 무대 위에 서 있다. 파생가능한 모든 개연성이 현재와 결합하여 빚어 낸 것이 미래다. 그러므로 저자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추출해 낸 미래의 현실이 공상에만 그치란 법은 없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실현가능한 상태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그 속에 담긴 실체의 이면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을 보는 또 다른 맛이다. 아울러 이 책의 얼개는 대화체를 통한 관점의 유연한 이동이 현실성을 증강하는 요인이 된다. 액자의 틀에 솟아 난 구멍처럼 바깥과 안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몰입을 유도한다. 몰입된 관점은 관념을 위무하고 본성을 통찰하게 된다.




        또한 저자는 아낙스라는 대상을 통해 아담이라는 인물을 평하고 사이보그에 가까운 로봇 아트의 정체성을 논한다. “저를 만든 건 누구일까요? 누구라고 말하고 싶으세요? 사유하는 기계를 만든 건 누구일까요? 압도적인 효율성을 지닌, 생각을 전파하는 저 같은 기계 말입니다.” “저를 만든 건 인간이 아닙니다. 바로 관념이 저를 만들었죠.” (P.131) 이 책에서 정신은 진화의 대상으로 파악된다. 인간이 진화를 거듭해서 먹이사슬의 최고봉에 오른 유일한 개체라는 진실은 인간의 시선으로 표현된 진실이다.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면 진화와는 무관한 무체물에도 진화의 출현이 가능해 진다. 그 중심에 관념이 자리 잡고 의식이 자란다면 그것을 현재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요원해 지기만 한다. 환원된 진실은 철학의 시선으로 범위를 넓혀 가지만 관념과 사유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오만함에서 현실성은 무참히 무너진다.




        이 책은 시종일관 인간의 관념에 천착한다. 공화국으로부터 사육된 훈련된 명령과 지시의 반기는 폭력과 압제의 역사를 반영한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다. 제도화된 폭력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무서운 도구로 변하는지 우리는 현재도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본성에 쫓아 행동하고 표출했던 결과가 체제를 보호하는 이익과 인권을 보호하는 이익과의 사이에서 양립가능한가라는 문제로 회귀한다. 그러나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이념이나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희생해도 된다는 식의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존재하지 못할 실현 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 냈다. 계급과 계층의 구분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나뉘고 엉킬지라도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아담이 인간을 통찰했다면 로봇 아트는 관념을 자극한다. 인간의 구성단위를 분자로 쪼개고 나누면 무생물인 개체들과 유사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는 가정 하에 세워진 이념의 실체는 관념 또한 진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 즉 로봇이 감정을 점령하고 사리분별을 식별할 수 있는 분별력, 지능을 갖추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치다. 그래서 지능을 갖춘 로봇은 더 이상 전력공급에 의지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닌 무형의 시스템에 올라 선 진화의 새로운 강자가 된다는 것이다. 기발한 상상의 추출물이지만 그 상상의 준거 틀을 일거에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미 저자가 구성한 상상의 논리는 강력한 개념으로 무장된 상태다. 진화는 모든 것에 깃들여 있다는 새로운 관점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해체시켜 버린다.




        제너시스(창세기)는 이렇게 다시 쓰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존재는 정체성을 동인하는 연결고리다. 인간이 사유하고 획책한 현실이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 지 이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관념이라는 토대가 빚은 사물과 현실의 궁극적인 이해는 본성에 맞닿아 있다. 인간은 본성의 분해를 위해 철학을 사용했다. 이렇게 철학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포섭한다. 포섭된 범위가 옳든 그르든 그것은 하나의 가정에 머문다. 가정은 다듬어지고 깎여지기를 반복하며 명제가 된다. 하지만 명제는 언제든 참과 거짓의 경계에 머문다. 동전의 양면처럼 뒤집어지기를 희망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저자 버나드 베켓의 상상력은 동전에 가려진 이면을 보는 열쇳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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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눕 - 상대를 꿰뚫어보는 힘
샘 고슬링 지음, 김선아 옮김, 황상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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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 모든 것은 반드시 궤적을 남긴다. 그것은 우리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사소한 하나의 흔적이 모든 것을 밝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CSI과학수사대에서나 연출된 상황만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반경 모든 곳에는 불가피하게도 자신이 지나온 모습이 반드시 투영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회 속에 묻혀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 나가고  상대방의 상태를 꿰뚫어 본다는 것은 상당한 우위에 서는 포지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그것들을 유추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영향력 범위 내에 놓여 있는 사소한 단초, 즉 옷차림새, 머리스타일, 행태 등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습관과 행동을 통해 어떠한 성격의 소유자로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짜릿하고 매혹적이겠는가.




        스눕은 상대방이 남긴 흔적을 통해 그 사람을 꿰뚫는 과정을 의미한다. 스눕이라는 생소한 심리분석을 통해 우리는 묵살하고 무시한 것들에 담긴 통찰의 묘미를 엿보게 된다. 이 책 <스눕>은 젊은 심리학자 샘 고슬링의 기발한 착상을 통해 연구되고 발전시킨 행동심리의 한 분야다. 인간이 행동하는 파장범위를 일정한 프레임을 통해 담고 그 틀을 해체하고 뒤집어 봄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영역을 만든다는 가정에서 시도된 것이 이 실험을 기획하고 연구하게 된 시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유형의 심리분석을 숱하게 접해 왔다. 범죄인들의 심리를 분석한 프러파일러, 행동특성을 조사하고 유형을 분류하는 행동심리학 등은 스눕과 동일한 선상에서 서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스눕은 독심술사의 초능력처럼 스누퍼들의 상황적 이해와 알고리즘을 통해 혜안을 만들어 간다는 것에서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스누퍼의 세계는 단서와 수수께끼사이의 연결고리를 통해 짜릿한 쾌감을 맛 볼 수 있는 호기심이 가득한 곳이다.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설득력 있는 논거로 맥 애덤스는 정체성의 확립을 말한다. 저자의 모든 사상의 근저를 관통하는 맥 애덤스의 정체성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정체성은 재구성된 과거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상을 통합해 삶의 일관된 통일성과 목적, 의미를 제공하는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정체성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경험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주는 끈이라고도 했다. 결국 각자의 삶에 기록된 흔적의 구성요소들은 용해되고 산화되고 남은 일정한 화학작용에 의해 분출된 공통분모를 갖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한 사람의 인성을 형성하고 정체성이라는 포섭된 틀로 묶인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스눕은 인간 본성을 지향한다. 이것이야말로 스눕의 영역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주는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스눕을 통해 밝힌 인간의 유형을 아울러 기록하고 통찰한다. 그렇게 인간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을 거쳐 남긴 흔적이 바로 인간의 본성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단서들의 향연을 추적해서 밝힌 인간의 성격은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동조성, 신경성, 자기애적 성향의 인자를 불러 모았음을 밝혀냈다. 그는 한 사람이 머물다 간 침실이나 욕실의 은밀한 공간들이 주는 단서들을 따라 규칙적인 틀을 창조해 낸 것과 같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직관의 영역으로 간주해왔는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거나 예리한 사람으로 인식했든지 말이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애거시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명탐정 에르큘 포와르처럼 말이다.




        스눕이 막연히 은밀한 단서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적 특성을 밝히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스누핑을 통해 추적하고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해서 퍼즐의 해법을 찾아가는 외형적 카테고리 외에도 예견 가능한 행동범주를 가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관을 넘은 통찰력의 영향력은 놀랍도록 정교해진다. 하지만 장애는 언제나 산재한다. 누군가가 맡긴 두드러진 물건의 존재가 오히려 그 사람의 특성을 밝히는 데 방해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흔적이 남긴 실질적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주요함을 간과할 수 없다. 샘 고슬링은 이러한 장애물에 대해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접근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무의미한 요소를 제거하고 장애를 극복하는 방편을 만드는 셈이다.




        스눕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보다 넓은 차원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연결점에서 타자를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스눕의 메커니즘을 통해 상대방에게 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주입하고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의 특성에 따라 나를 그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호감형 인간으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스눕의 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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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에 무심코 누군가로부터 지청구를 듣게 되었다. 왜 우측통행을 하지 않느냐는 꾸지람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중년은 역내가 떠나갈 듯 목소리를 높여댔다. 분명 그분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자 규범이다. 그런데도 나는 분이 가시질 않는다.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한 나의 주절거림도 그랬지만 더욱 분한 것은 그것이 나의 통행권을 막을 자유가 있느냐는 사실이다.

 

작년 연말께부터 시행된 우측통행은 좌측통행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혼란이다. 갑자기 좌측으로 걷던 길을 우측으로 걸으라는 지시는 명령을 떠나 무언의 폭력이다. 이렇게까지 혼선이 있을 것을 미처 우려하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만 반드시 바꾼 계기가 있을 테다. <트래픽>의 저자 톰 밴더필트의 주장에 의하면 우측통행은 인간의 행동을 예측 가능한 범주에 놓이게 한다고 했다. 실제 스웨덴은 우측통행을 위해 오랫동안 계획하고 측정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시행했다. 우측통행은 안전사고를 줄이고 효율적인 보행편의증진과 통행량 개선으로 상당한 비용절약과 사고방지에 탁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측통행을 명분 지을 구실이 될까? 나는 그 중요성을 차치하고라도 일의 선후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규칙은 사회통념상 최선의 공공가치를 보장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규칙을 변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 지금처럼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에 의해서는 파시즘을 이내 연상할 도리 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일방의 의견이나 지시에 의해 움직인다면 다양성과 개성을 뭉개는 것은 더욱 쉽게 벌어지지 않겠는가. 지금도 그렇다고 하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계획된 대로 길들여진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의 표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측통행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내가 반발하는 이유는 변화를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그 변화의 시작점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규칙은 물 흐르듯 거스름이 없어야 한다. 변화를 유도하는 시작은 밀어붙이기식의 일방통행으로는 모든 것을 수용하기에는 용량초과다. 또한 우측통행이 좌측통행보다 나으리라는 확정적 단서를 제공할 근거도 없는 현실에서는 말이다. 비록 서구의 나라 몇몇이 우측통행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다고 하여도 여과 없이 우리에게 바로 대입해서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의 시작은 실행의 첫 단계다. 실행을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반드시 필요로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실행되는 일이라도 잘 따져보면 일정한 패턴과 틀 속에서 움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유형을 살피고 분석하는 일에 매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측통행을 위한 안내나 설명이 지금보다는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변화의 필요에 대해 알리고 이해를 구했어야 이치에 부합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의 생략하고 구체적인 실행에 돌입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와 같은 불편을 수반한다. 나에게는 불편이지만 이것이 모이면 충돌이 된다. 충돌은 혼란이다.

 

그러하기에 규칙은 모두에게 최선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교량이 되어야 한다. 양보와 미덕이라는 정서적 가치도 규칙이 바를 때 조화를 이루는 작용이다. 우리 사회가 우측으로 통행하는 명분이 좌로부터의 탈피에서라면 웃지 못 할 해프닝이겠으나 곱씹을수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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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5-12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측 통행이 아니라 우측 통행으로 바뀌었군요. 그런데 저도 곡우님 해석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저 중학교때 윤리선생님이 하도 좌측통행을 부르짖고 연습을 시키셔서 절대 적응 못할 것 같습니다.^^;;

穀雨(곡우) 2010-05-12 15:15   좋아요 0 | URL
적응한다는 게 신기합니다.

순오기 2010-05-13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시절 우린 모두 좌측통행을 강제당했어요.
몸에 배인 것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은데... 그랬군요.

穀雨(곡우) 2010-05-13 11: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강제였죠. 아무런 이유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