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무심코 누군가로부터 지청구를 듣게 되었다. 왜 우측통행을 하지 않느냐는 꾸지람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중년은 역내가 떠나갈 듯 목소리를 높여댔다. 분명 그분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자 규범이다. 그런데도 나는 분이 가시질 않는다.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한 나의 주절거림도 그랬지만 더욱 분한 것은 그것이 나의 통행권을 막을 자유가 있느냐는 사실이다.
작년 연말께부터 시행된 우측통행은 좌측통행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혼란이다. 갑자기 좌측으로 걷던 길을 우측으로 걸으라는 지시는 명령을 떠나 무언의 폭력이다. 이렇게까지 혼선이 있을 것을 미처 우려하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만 반드시 바꾼 계기가 있을 테다. <트래픽>의 저자 톰 밴더필트의 주장에 의하면 우측통행은 인간의 행동을 예측 가능한 범주에 놓이게 한다고 했다. 실제 스웨덴은 우측통행을 위해 오랫동안 계획하고 측정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시행했다. 우측통행은 안전사고를 줄이고 효율적인 보행편의증진과 통행량 개선으로 상당한 비용절약과 사고방지에 탁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측통행을 명분 지을 구실이 될까? 나는 그 중요성을 차치하고라도 일의 선후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규칙은 사회통념상 최선의 공공가치를 보장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규칙을 변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 지금처럼 일방적인 지시나 명령에 의해서는 파시즘을 이내 연상할 도리 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일방의 의견이나 지시에 의해 움직인다면 다양성과 개성을 뭉개는 것은 더욱 쉽게 벌어지지 않겠는가. 지금도 그렇다고 하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계획된 대로 길들여진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의 표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측통행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내가 반발하는 이유는 변화를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그 변화의 시작점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규칙은 물 흐르듯 거스름이 없어야 한다. 변화를 유도하는 시작은 밀어붙이기식의 일방통행으로는 모든 것을 수용하기에는 용량초과다. 또한 우측통행이 좌측통행보다 나으리라는 확정적 단서를 제공할 근거도 없는 현실에서는 말이다. 비록 서구의 나라 몇몇이 우측통행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다고 하여도 여과 없이 우리에게 바로 대입해서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의 시작은 실행의 첫 단계다. 실행을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반드시 필요로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실행되는 일이라도 잘 따져보면 일정한 패턴과 틀 속에서 움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유형을 살피고 분석하는 일에 매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측통행을 위한 안내나 설명이 지금보다는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변화의 필요에 대해 알리고 이해를 구했어야 이치에 부합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의 생략하고 구체적인 실행에 돌입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와 같은 불편을 수반한다. 나에게는 불편이지만 이것이 모이면 충돌이 된다. 충돌은 혼란이다.
그러하기에 규칙은 모두에게 최선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교량이 되어야 한다. 양보와 미덕이라는 정서적 가치도 규칙이 바를 때 조화를 이루는 작용이다. 우리 사회가 우측으로 통행하는 명분이 좌로부터의 탈피에서라면 웃지 못 할 해프닝이겠으나 곱씹을수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