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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비밀
톰 녹스 지음, 서대경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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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하드보일드문학을 자주 접하는 편이 아니다. 섬뜩하고 괴기스러운 내용도 그렇거니와 광기에 대한 본능을 자극하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자극적이고 거친 내용을 좋아하는 메니아층이 꽤나 두껍다. 대개 추리물이나 판타지물에 압도적으로 자주 결합되어 사용된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심리에 중점을 둔 스타일은 현재의 주류적 문화관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놀랍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는 학습에 의한 결과다. 아울러 이러한 문학의 패턴에는 신비주의에 얽힌 내용을 즐겨 쓰는 것도 한 특성이다. 금기시 된 내용이나 보편적 관습에 의해 고착화된 관념의 틈을 파고드는 내용은 독자들에게 쉽게 어필된다. 그래서 미디어물이나 추리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프러파일러식의 사건 전개는 큐브의 풀이처럼 난제를 던져 줌과 동시에 시각적 충격을 함께 도모함으로써 몰입을 상승하는 시너지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작가의 특성에 따라 메타포를 통해 인간본질의 문제를 통찰하기도 하며 심도있게 다루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 책의 소재가 된 인류사와 고대종교에 얽힌 창세기의 비밀은 현재의 동류의 문학이 보이는 패턴을 충실하게 따른다. 복선과 암시를 통한 양방향 대결구조는 사건을 풀어 가는 얼개다. 인도의 신비의 수학 스도쿠나 마방진처럼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는 것이 매력이다. 이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에서 익히 본 패턴이다. 하지만 엇비슷하게 얽히는 전개방식이라도 이 책의 내용의 특성상 다른 작품들과 달리 두 가지의 커다란 특색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종교적 제의에 대한 도전적 해석이다. 창세기라는 미지의 영역을 다루었다는 것 외에도 진화론을 내세우며 신을 부정하는 암시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다. 두 번째는 헬파이어라는 무신론자들을 내세워 종교적 권위를 무너트린다는 것에 있다. 문체의 전개방식이나 스타일을 차치하고서라도 소재로 차용된 테마가 인간이 진화의 과정에서 발현한 화학적 작용에 의한 진화의 흔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강한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짐작된다.

 

        인간의 시원은 식물에서 분화되어 다종의 군의 영향을 받아 포유류로 안착되었다. 이런 틈바구니에 파충류의 기질적 특성을 일정부분 받아 들였을 것이므로 인간의 본성이 폭력적이고 악에 취약한 특성을 보이는 경향을 설명한다. 이것이 거듭된 진화를 통해 영장류를 거치며 현재의 인류의 시초로 알려진 호모 사피엔스종으로 모아졌다는 것이 기존의 가설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작가가 보여 준 터키 남동부의 샤를루우르파의 괴베클리 테페의 새로운 발굴작업에 의해 제시된 가설은 잊힌 인류의 기억을 복구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는 가까운 시일 내에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뿌리가 같고 창세기 이전을 설명하지 못하는 난제를 풀어 줄 의미심장한 키워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논쟁거리로 해석된다.

 

        또한 이 책에서 드러난 창세기의 비밀은 만들어진 신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다. 에덴동산이 실제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종의 충돌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진위여부의 옳고 그름은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이처럼 기자 출신인 작가 톰 녹스는 경험을 근거한 가설을 토대로 상상의 집을 물샐틈없이 지었다. 스타카토처럼 ‘간결하고 빠르게’를 시종일관 구사하며 독자를 지배한다. 작가의 심리적 우위는 예측을 불허하고 수수께끼를 더욱 미궁으로 내모는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래서 알레고리에 의한 밀접한 연결 관계는 작중인물을 연대하게 만들고 정서적 유대감을 공유케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책에서 포레스트 형사와 로브가 공통적으로 딸아이를 잃었거나 위험지경에 빠지는 설정은 모종의 매개체를 이끌어내는 토대가 되며 책의 사실성을 높이는 부수적 장치로 훌륭하게 작용한다.

 

        종교는 인간의 불안을 치유하고 삶의 방향성을 설정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 중심에 신을 얹고 인간의 참회를 통해 구원을 제시한다. 또, 종교적 삶은 높은 윤리적 의무와 인고의 시간을 요구받는다. 누구에게나 문호를 열었으되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속성을 더욱 경외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든 신에 의해 문이 열렸든 종교의 본질은 폐쇄적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에 대한 저항과 종교의 정체성에 대한 외경심을 높이고자 고대 종교의 대부분이 인간의 희생을 대상으로 삼는다. 인신공희와 같은 참혹한 살육이 자행되고 인륜을 져 버리는 행위를 용인하고 종교적 배경으로 대체하는 이유는 인간의 통합을 희망한다. 이러한 사상이 종교를 거부하는 대상이라고 못질하기에는 성급한 일인지 모르나 이 책에서 드러난 종교적 희생의 장면들은 계층을 지배하는 권력집중현상과 인종차별에 그 선을 긋는다. 사이코 패스 같은 살인자를 뒤쫓다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창세기의 비밀. 그것은 인간이란 대체 무엇이냐는 자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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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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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식은 실체적 표식을 따라 밟은 관념작업의 일종이다. 쓰이는 자에 따라 치우침과 부침이 공존하는 극단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알고 있던 사실과 실제가 다를 수도 있으며 공간, 시간, 상황 등의 조건적 제약에 따라 관점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식을 보는 관점의 일종이지만 실제 역사의 기술방법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문학계의 팩션작업 또한 같은 맥락이다. 기록된 상황의 무미건조한 외피를 박피하듯 들춰내며 상상력의 정서적 이완작업을 병행하는 과정이 팩션소설의 핵심이다. 팩션은 어디까지나 실제를 바탕으로 하나 서술자의 관점을 탈피해 대상인물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이미 역사의 시간에 압착된 기록의 범주를 벗어나서도 흩트려 놓아서도 안 되는 정교하고 치밀함을 요하는 발굴작업과 같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등장인물인 소현세자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 있었음은 짐작으로나마 가능하다. 철저한 고증작업과 연대기 표를 통한 인물간의 상호관계, 지리적 배경, 정치적 이슈 등 사소한 하나의 역사적 사실까지 샅샅이 훑고 엮어야 한다는 것에 더해 가공의 인물의 창조는 굳어 버린 의식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과 같음이다. 더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시비비가 불거지는 경우에는 편향된 의도로 재단하기에는 무리수가 따름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저자 김인숙은 말과 말 속, 행간의 잠든 템포를 통해 심상의 변화를 보기 좋게 잡아냈다. 상황적 설명은 심리적 시선을 따라 밀렸났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자연스러운 변주를 통해 실제와의 거리감을 단축한다. 그것은 절제를 통한 미학이다. 닿을 듯 말 듯 전해지는 소현의 마음을 절절히 드러낸 완숙의 절경이다. 한 숨에 달려 시공을 뛰어넘고 소현의 아픔이 곧 읽는 자의 아픔이 되는 감정이입의 숨 막히는 전율이다.

 

        소현세자는 조선의 왕이 못된 세자들 중 단연코 비운의 명을 타고 난 인물이다. 아버지 인조의 끝없는 의심과 경계로 일족이 몰살당하는 치욕과 아픔을 겪은 부침으로 점철된 세자다. 소현세자는 청나라가 득세하여 명나라의 국운이 쓰러질 때 심양으로 아버지 인조를 위해 불모의 신분으로 8년이라는 고난의 세월을 심양에서 보내었다. 결국 청나라가 중화를 점령하고 환국이 결정되고 나서도 인조와의 첨예한 대립에 의한 불화 내지는 내각실료들의 간교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후문이 실록의 여러 곳에 기록된 조선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분명 실록의 명암(明暗)은 과정에 따라 색을 달리한다. 실제 소현세자가 어떠한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는지는 단편의 기록이 전부일 것이며 인조와의 관계와 처한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추측이나 짐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겪었을 아픔에 대해 반드시 인식하고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념과 소신을 바로세우기 위한 확립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역사의식의 통속적인 해석을 넘어 팩션을 통한 변화과정의 함의는 독자들에게 관점의 다양화를 제공하는 좋은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팩션소설은 여타 장르에 비해 파급력이 강하고 전이되는 속도가 빠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팩션소설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대상인물을 돕는 가공의 장치와 실존의 장치들과의 관계이다. 이 책에서는 신 내림을 받은 막금이, 신분의 틈을 비루하게 품은 만상, 물과 불의 기운을 품은 흔은 철저하게 가공된 인물이다. 반면 소현세자의 곁을 묵묵히 지킨 효종 봉림세자, 질자(세자의 수행원)의 몸으로 넘지 못할 사랑에 희생된 심석경, 청나라 팔조대왕 중 도르곤의 존재는 사실에 기반을 두나 섬세한 터치로 인해 되살아난 인물이다. 이처럼 두 가지 장치의 상호관계 속에서 소현세자의 완벽한 복원은 실제로 그러하였으리라는 짐작을 뛰어 넘어 가능으로 바꾸는 완벽한 호흡을 뿜어낸다. 고저장단에 맞춰 호흡의 길이를 조절하는 숙련된 작업은 김인숙 작가의 역량이다. 언어를 조련하고 다듬질한 절제의 과정 속에 탄생된 복식호흡이리라. 책 속에 그린 소현세자의 마음이 그와 같음을 절실히 공감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겠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p.316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일컫는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우리는 다양한 생각의 표상을 통찰한다. 이러한 다채로움은 세상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는 지침이 된다. 무엇을 볼 것인가는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 달리 변하지만 역사에 새긴 결과 올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이해관계에 따라 묻히고 지워지기는 하겠으나 그 속성이 발현되고 드러나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종국에는 빛을 보게 된다. 최근 들어 팩션의 열풍이 번지는 현상 또한 무관하지 않다. 환멸과 번민의 과정을 감내한 그들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회고의 작업은 다가오는 미래를 예행해 보는 이치와 같다. 모든 것이 다르고 변하였다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고 추동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외줄타기를 반복하는 불변의 운명을 타고났음이다. 과거를 이해하고 흔적을 발굴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잘 만든 팩션소설은 매몰된 역사의 인식을 복원시켜 주는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하기에 김인숙 작가의 글을 만난 것은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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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4-1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댓글을 다는 것 같네요. 곡우님의 리뷰 잘 읽고 있답니다. 다듬고 닦아낸 흔적이 서평에 대한 긴장감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아 참 좋아요. 한국사전에서 강비를 다룬 것을 보고 참 인상깊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에서 강비는 어떻게 얘기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김훈의 역사소설의 그 냉철하고 건조한 느낌을 좋아하는데 김인숙씨와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라도 이 책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穀雨(곡우) 2010-04-14 08: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블랑카님. 부족한 글에 좋은 평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쉽게도 김인숙 작가의 이 책에서는 강비가 다루어지질 않았습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머문 8년의
세월을 성토하는 내용이며 저 또한 김훈선생의 스타일에 놀랍기도 했답니다. 문장을 다스리는 필력이
흉내로는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능력처럼 보이더군요. 해서 강비를 기대하지는 마시고 다른 리뷰어님들
처럼 말과 말 사이의 깊이를 통해 소현의 아픔을 공감하는 정도로 만족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순오기 2010-04-2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보고 싶게 만드는 멋진 리뷰네요.

穀雨(곡우) 2010-04-26 09:10   좋아요 0 | URL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재미나게 읽었답니다.
 
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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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 인근 도시에 자라서인지 나는 고등어에 사족을 못 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고등어 한 손을 바싹하게 구워 내는 날이면 어김없이 밥도둑이 된다. 예전이야 값싼 가격에 영양가도 높은 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대표 서민어종이었지만 지금은 귀하신 몸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나는 고등어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고등어를 금하겠다니 당최 무슨 기막힌 소리란 말인지 나로서는 이해불가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금세 풀린다. 오히려 머쓱해지는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 고등어에 담긴 생활철학치고는 겸연쩍다 못 해 부끄럽기까지 해 진다. 읽을수록 어디서 이런 건강한 생각이 듬뿍듬뿍 솟아나는지 새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 <고등어를 금하노라>의 지은이는 독일에 거주하는 건축학을 전공한 전형적인 한국 아줌마다. 가정을 돌보고 아이를 키워내고 사회 속에서 굳건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똑순이 아줌마다. 하지만 그녀는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산다. 환경을 위해 자동차를 포기하고 즐거움을 위해 치열하게 살지도 않는다. 그녀의 시계는 여유로움에 맞춰 느릿느릿 흘러간다. 불어오는 살가운 미풍에도 고마워하며 헐벗고 굶주린 제3세계 아동들을 떠올리며 추위가 살을 에는 밤에도 열주머니 하나에 황홀해 한다. 목욕물이라도 받아 뜨끈한 물에 담그는 날일라치면 세상을 다 가진 마음에 달뜨는 그미다. 여느 평범한 사람들 같으면 하루도 견뎌내기 힘든 불편한 삶을 살지만 그 속에서 배운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행복은 물질이 먼저가 아님을 온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독일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전 방위로 넘나드는 생각의 단상을 품고 있다. 독일사회를 바라보는 이방인의 눈으로 가족, 교육, 환경, 역사의식 등 알짜한 이야기로 생각의 층위를 넓혀준다. 그녀의 생각은 유쾌, 상쾌, 통쾌하다. 우리 사회가 안고 풀어내야 하는 문제들에 같이 공감하고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더 나아가 그녀는 바라 본 대로 말은 건네 온다. 그 속에서 무엇을 찾고 어떻게 판단할지는 모두의 몫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정답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억척같아 보일수도 구차해 보일수도 있건만 괘념치 않는다. 오히려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매몰된 가치기준에 선동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어 내는 이야기는 당당함 그 자체다.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은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의 차이가 아니다.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 들였느냐는 근본적인 차이가 우선이다.

 

        독일은 우리나라와 닮은 구석이 많은 나라다. 근면한 민족성을 바탕으로 패전이후 침체된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피땀 흘린 과거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위 68세대로 불리는 독일의 전후세대는 우리나라의 386세대쯤 되겠다. 그들로부터 촉발된 혁명은 독일을 일류국가로 만든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진통도 많고 붉어진 문제도 많았다. 전범처리문제와 인종차별문제는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보기 좋게 해 냈다. 그 중심에는 국민적 합의와 배려가 오롯이 녹아들었다. 이러한 사례는 일본과의 문제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독일 국민들이 진심으로 수용하고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협업을 통한 과거청산작업은 좋은 귀감이 된다. 일본의 성의 없음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위안부할머니의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돌아 볼 필요성을 충분히 떠올리게 된다.

 

        또한 국민들의 교육관 또한 열의나 관심이 높다는 것도 비슷하다. 천연자원이 빈약하다는 자연적 환경이 인재육성으로 집중한 여건도 우리와 같다. 하지만 그들의 교육시스템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경쟁중심주의라면 그들은 인간중심주의다. 하향 평등에 굴하지 않고 함께 사는 공동체 의식을 심어준다. 실제로 저자가 건축학도를 가르치는 에피소드는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부러움마저 절로 생긴다. 성적으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잘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강요를 하지 않는다는 확고부동한 교육철학이 오늘날 그들을 만들었으리라. 부족한 것은 메우고 넘치는 것은 나누는 자연의 순리를 그들은 알고 있다. 결국 하향평준화는 가진 자의 횡포이자 배타적인 생각이다. 기회의 불평등을 제거하지 않고 경쟁에서 성공하라는 말은 관대함도 없고 아량도 없는 살벌한 사회다. 그녀는 아이들을 더 개성이 넘치는 인재로 키워 냈다. 생각의 틀을 원대하게 세우는 주춧돌만 세웠을 뿐 다른 모든 것은 아이의 자율에 맡겼다. 그런데도 결이 곧고 바르게 컸다. 아이들은 가치기준이 분명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연대의식이 확고부동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지성인의 행동역할에 대해 담론을 펼쳤다. 독일인이 나치를 배출해 내고 비록 몰락해 패전국이 되었지만 다시 꿈틀거리는 인종차별의 망령에 물들고 있다는 위험성이다. 이성이 잠들면 야수가 꿈틀댄다는 그녀의 표현처럼 인간은 지배에 대한 본능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이 아프리카에 범한 만행은 쉽게 잊히고 사라진 이면에는 물리적 거리도 아니고 세계사회의 변방이라는 계급적 차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와 같은 역사의 수난과정은 그 당시로서는 너무도 익숙했다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녀가 독일주재 일본특파원이 독도에 대한 칼럼작업을 포용과 관용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설득해 가는 과정도 모두 지성인의 살아 움직이는 행동이다. 그녀는 지성인은 조약돌과 같아서 물살의 흐름을 바꾸어 주는 작업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의식의 흐름을 일탈하지 못하게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인식 있는 지성인의 행동은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살뜰하게 아끼고 화통하게 베푸는 그녀의 생활철학에 많은 것을 배우고 감사한다. 융통성 없고 패기 없다며 지청구를 해 대는 우직한 독일남편과 자유와 책임을 멋지게 통제할 줄 아는 아이들이 있는 그녀는 진정으로 부자다. 고등어 한 마리를 먹기 위해 누군가의 피눈물과 삶의 고통과 바꿀 수 없어서 먹지 못하겠다는 그녀의 착한 마음과 멋들어진 왈츠 한 자락에 홀딱 넘어 가는 소녀적 감상을 겸비한 그녀의 삶은 유쾌한 자유가 사는 건강한 터전이다. 불필요한 집착을 삶에서 걷어 낸다면 이렇게 삶이 행복하고 멋져 보일 터인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지 진지한 물음이 필요하다. 그녀와 같은 삶의 동행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살 맛 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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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8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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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8 2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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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5 16: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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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09: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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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심벌 1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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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 문학사상 초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기록된 댄 브라운이 또 다른 이야기로 찾아왔다. 어마어마한 인기를 한 몸에 받은 근저에는 과학과 신비의 양극단에 선 대립구조가 주된 이유겠다. 로버트 랭던. 기호학자이자 모험을 즐기는 쾌도난마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전작의 <다빈치코드>, <천사와 악마>의 주인공이자 댄 브라운을 일약 스타작가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랭던의 신비한 기호학풀이와 미래과학의 절묘한 조합은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원천이다. 하지만 이 책 <로스트 심벌>은 전작들의 입지전적인 성공에 비해 거품이 들러붙은 형국이다. 이미 패턴에 익숙해 버린 독자층의 호기심을 채워 주기에는 2% 부족한 연출이다.

 

        실제 할리우드 어드벤처 스타일에 길들여진 대중들은 패스트푸드처럼 생산해 내는 이야기에 식상해진지 오래다. <인디애나 존스>시리즈로 유명한 영화스타일도 댄 브라운의 이야기와 겹쳐지는 것도 무관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또 도입부분의 엽기적인 장면 설정과 선악의 이중적 대립구조를 따라 흘러가는 구조는, 마치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처럼, 새로울 것도 신비함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댄 브라운의 스토리텔링의 힘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한다. 미래공상과학물에나 등장할 법한 노에틱사이언스(Noetic science, 지력과학), 반물질 생성 등의 미래구현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 마법처럼 다가선다. 여기에 잊힌 과거의 비밀이 적절하게 버무려지고 얽혀지면 이미 지루해진 이야기도 생기를 띄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변한다. 그래서 댄 브라운이 로버트 랭던을 통해 만들어 가는 상상의 세계는 가히 만화경처럼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모양이다.

 

        댄 브라운이 이전의 작품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밀을 파헤쳤다면 이 책 <로스트 심벌> 또한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언뜻언뜻 전작에서 실체의 비밀을 짙게 엿보였던 프리메이슨의 출현은 당연한 수순을 밟았는지 모른다. 프리메이슨은 미국 건국 역사상 매우 오래된 베일에 싸인 비밀단체다. 18세기 중세 석공(메이슨)의 길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계몽주의를 받아들이고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종교적 믿음을 신봉하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또 미국 건국에 깊숙이 관여하여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앨버트 아이슈타인, 뉴턴 등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단원이었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워싱턴 시에 미국 건국 유물들과 프리메이슨과의 연관성은 이 책을 따라 가는 재미 중 하나다. 1달러 지폐에 담긴 기호의 신비, 미 의회 도서관, 스미소니언박물관 등 실존하는 역사적 유물의 철저한 고증을 거쳤기에 이 책의 사실성이 더욱 또렷해지는 이유다.

 

        그래서 로버트 랭던의 모험이야기의 백미는 역사 속 유물에 새겨진 기호나 상징을 풀어 가는 추론과정이 압권이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암호와 상징들을 해독하고 풀어 가는 일이야말로 독자의 관심을 확실하게 잡아끄는 매력의 고삐겠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분한 <내셔널 트레져>에서 템플기사단의 비밀을 푸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처럼 신비주의에 기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엇비슷하게 펼쳐지는 이유는 모종의 쾌감과 무한상상이 가져다주는 희열감의 간접경험 아니겠는가. 결국 대중적 문화코드에 부응하는 트렌드의 일종으로 적확하게 들어맞는 퍼즐처럼 현상을 대변한다. 따라서 로버트 랭던을 통한 소위 대리만족은 극한상황을 통해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체험하는 극적 카타르시스의 전형이겠다.

 

        반면 댄 브라운이 다른 여타 모험장르문학과 차별을 두는 이유는 인간성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 담겨 있는 것도 주효한 이유겠다. 인간이 쌓아 올린 역사의 업적 속에 담긴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선과 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결론의 도출은 관점의 유연화를 담은 작가의 속내다. 극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여운의 복선의 한 가운데에 댄 브라운은 항상 인간을 내세웠다. 과학과 종교의 불확실성의 거름망을 걸러 추출된 복원된 핵심은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어 온 관념적 진실이나 종교적 본질도 결국 인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실 인간의 광기와 이성은 집단적 의식에서 비롯된다. 집단의 이념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기저에는 의식화 작업이 반드시 수행된다는 것도 의미 있는 관점이다. 이러한 작업은 종교나 국가의 근본주의로 인해 강하게 고취되는 경향을 보인다. 과학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우월한 시기에 양자 간의 충돌은 상당한 진통을 낳았다. 그래서 과학이나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주제는 항상 뜨거운 감자일수 밖에 없다. 만들어진 신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리처드 도킨슨의 주장처럼 우주이전의 세계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서 모든 논쟁은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댄 브라운이 이 책을 통해 프리메이슨을 언급하고 고대의 수수께끼를 찾아 풀어가는 기호학과 검증된 과학의 학문적 연계는 대척점에 선 두 관점의 실증적 풀이로 해석된다. 코드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 보면 인간으로 귀결한다는 의미가 전편을 통해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익숙한 스토리라인이지만 장르소설에서 쉽게 찾기 힘든 배려이자 핸디캡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자층의 기억력은 익숙한 환경에 대한 빠른 복원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짜임새 있는 완성도에 비해 댄 브라운식 수순대로 흘러가는 패턴을 통해 파동이 금세 꺾여 버린다는 아쉬움이다. 그렇지만 뻔히 내용이 예측되는 모험이야기라도 마니아층을 폭 넓게 형성하는 이유도 흡입력과 몰입도면에서는 따라올 장르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원초적 본성을 자극하는 추론의 공조효과의 극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러한 이유로 추리소설을 오늘도 내일도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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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때 "생각 없다."는 말을 숱해 써 댔다. 딴에는 상대방이 신중하지 못하다거나 결과가 엉성할 때마다 연신 버릇처럼 읊조렸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왜곡된 시각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결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수용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오히려 부정적 관념이 지배적이다. 다양성을 묵살하고 동조하지 않는 타자의 요구와 이해를 거부하는 편협한 사고의 일환이다. 이처럼 생각없다의 논리는 따져 보면 배려나 소통이 단절된 불협화음의 한 단면이자 일방적 대화의 표본이다. 두 번째는 "생각 없다."를 행위의 관념을 통해 상태의 무지와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가 고착화될 때 무지를 빌미로 생각을 강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은 무지를 포함하게 되고 상대를 얕보게 되는 원인이 된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과 어떤 목표나 결론에 도출하기 위한 관념의 과정인 생각이 동일시될 수는 없다. 남발된 생각으로부터의 공격은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나에게 "생각 없다."는 단정적 의견의 표현은 이제 쉽게 혀끝으로 내뱉기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일 핫이슈처럼 떠오르는 우리 사회의 현안문제들 대부분 생각 없다는 일방통행으로 춤춘다. 이 책 <생각의 좌표>는 생각이 잉태한 의식화된 문제를 생각하고 되짚어 보며 방향성을 제시한다. 아울러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생각의 개념을 시원하게 해소해 준다. 나는 저자 홍세화를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로 처음 만났다. 그가 풀어 낸 프랑스 생활의 고단함보다 똘레랑스(관용, tolerance)의 표현이 그윽하고 울림을 줬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에게는 의식의 지표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할 지에 대해 무척 진지한 물음을 던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만 해도 김영삼 정부가 집권하던 때로 민주화를 향한 거친 항해를 막 통과하던 시기였다. 학내에는 투쟁보다는 취업의 현실이 더욱 살벌하게 버티고 서서 영혼을 옭아매고 저주받게 만든 세월의 연속이었다. 관용은 잊혔고 경쟁과 살기위한 몸부림만 남았다. 안전판은 고사하고 떨어지면 낙오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팽배했다. 불안을 감추기 위해 세운 목표와 도전은 명분에 불과했으며 위선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통해 나는 진정 행복한가를 진지하게 되묻게 된다. 88만원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그토록 고군부투했던 지난한 세월과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구르고 기었던 세월이 대체 누구를 위해 그토록 시큼하고 얼얼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생각을 추동하는 물질은 뚜렷한 명분과 소신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현재 생각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사회로부터의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저자의 단상은 우경화의 굴레를 벗겨 주는 소중한 틀이다. 사람은 환경과 습관에 지배를 받는다. 의식 또한 마찬가지로 주체적 사고를 말살하고 치우친 좌표에 따라 움직이다보면 좀처럼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이 책에서는 우리를 향해 날 선 시선처럼 물어 오는 불편한 질문들이 반복 계속적으로 출현한다. 자유에 대한 불온한 생각의 실체, 천형과도 같은 지역주의에 대한 망령, 나눔과 배분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회구조, 현실에 안주하는 암묵적 동조 등 소통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꾹꾹 눌려 숨겨 왔던 환부를 고스란히 까발린다. 자각증세가 없는 암세포가 점령해 시어빠진 몸뚱이처럼 우울하다.

 

        이 책 속에 자주 등장하며 눈에 뜨이는 단어 중 사회귀족이 있다. 사회귀족은 계급과 신분이 없는 민주사회가 자본주의와 결탁하면서 만들어 낸 계층쯤으로 이해된다. 그들에게 우리는 오블리스의 영예를 부여했다면 노블리주는 체화되어 드러나야 온당 옳다. 그런데 노블리주는 형식화되고 명분만 남았다. 1% 상위 부자에게만 국한되는 종합부동산세를 평등에 반한다는 논리로 무력화시키고 감세에 환영하는 처사는 불온한 작금의 현실이다. 우리는 세금에 민감하다. 저자 말마따나 세금이 제대로 쓰일 리 없다는 의심이 팽배하기도 한 현실도 한 몫 했겠거니와 유리알처럼 얇은 지갑을 여는 행동은 약탈처럼 섬뜩하게 다가선다. 하지만 실제 세금은 소외된 저 소득자를 돕고 분배의 패러다임을 유기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다. 목적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누는 것에 인색하다면 사회의 안전은 위태롭다. 목 놓아 부르는 저자의 톨레랑스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관용과 미덕은 색깔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나눔으로써 더불어 사는 사회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자연적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

 

        고이면 섞게 마련인 것을 우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서 산다. 이곳에서 산다면 당신을 말해준다는 건설광고의 한 자락처럼 물질이 정신을 지배했다. 아파트 크기와 사는 곳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계급을 만들어 준다면 진입장벽이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마땅하다. 사회적 평등이란 조건과 기회가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와 다르며 이상주의자들의 희망이 아니다. 생각의 좌표가 물질에 맞추어 져 만들어 낸 결과이며 미디어가 확대 재생산한 물신경배에 대한 현실이다. 이처럼 저자는 물신경배에 대한 삐뚤어진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된 기회 차별의 깊은 골에서부터 출발하는 물질만능주의이념에 전도된 세상의 비루한 현실에 대해 통렬한 생각 한 줄기를 던진다. 강남에서 잘 사는 아이와 소도시 아이의 인생은 같을 수 없다. 운명은 예정되어 있다는 숙명에 무릎을 꿇게 되는 비열한 현실이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구전된 민화의 흔적으로나마 찾을 수 있겠다. 교육의 양극화에 대한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양극화를 부추긴 데에는 모두의 잘못으로 우리는 곧잘 해명한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미루기만 난무하고 정녕 대책은 없다. 특목고를 만들어 개성을 담고 자율화를 높이겠다는 미명 아래 양극화를 더욱 조장하는 현실은 아이의 앞날에 먹구름만 짙다. 생색내기용 사회적 배려도 그들에게는 무소용이다. 면제된 학비에 육박하는 기타 보충수업비 등은 수입의 전부를 훌쩍 넘어선다. 결국 노블레스를 위한 마름으로 우리는 열심히 산다는 푸념만 한 가득이다.

 

        그렇게 차별화된 교육현장을 뚫고 사회로 배출된다해도 인생역전은 없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황정음이 남긴 잉여인간처럼 불안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은 줄곧 해 왔음은 틀림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저자의 지적처럼 의식화되고 세뇌된 회색논리로 물든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이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책임이 뒤따른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무관심도 자유를 유기하는 공범이다. 하지만 여기서 되묻게 된다. 너의 밥그릇을 내어 놓을 수 있겠느냐고. 비약적 추궁인지는 모르겠으나 사회적 연대를 꿈꾸는 소시민으로서 갈등이 앞선다. 언제부터 이렇게 염세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나마 분명한 것은 희망은 치이고 베여도 미래를 품는다는 사실이다. 똘레랑스의 저자처럼 쓴 소리 가감 없이 뱉어 주는 따끔한 일침은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됨은 분명하다. 역사는 지루하지만 변해 가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프랑스대혁명의 숭고한 이상이 이 땅위에 바로 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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