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때 "생각 없다."는 말을 숱해 써 댔다. 딴에는 상대방이 신중하지 못하다거나 결과가 엉성할 때마다 연신 버릇처럼 읊조렸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왜곡된 시각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결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수용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오히려 부정적 관념이 지배적이다. 다양성을 묵살하고 동조하지 않는 타자의 요구와 이해를 거부하는 편협한 사고의 일환이다. 이처럼 생각없다의 논리는 따져 보면 배려나 소통이 단절된 불협화음의 한 단면이자 일방적 대화의 표본이다. 두 번째는 "생각 없다."를 행위의 관념을 통해 상태의 무지와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가 고착화될 때 무지를 빌미로 생각을 강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은 무지를 포함하게 되고 상대를 얕보게 되는 원인이 된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과 어떤 목표나 결론에 도출하기 위한 관념의 과정인 생각이 동일시될 수는 없다. 남발된 생각으로부터의 공격은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나에게 "생각 없다."는 단정적 의견의 표현은 이제 쉽게 혀끝으로 내뱉기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일 핫이슈처럼 떠오르는 우리 사회의 현안문제들 대부분 생각 없다는 일방통행으로 춤춘다. 이 책 <생각의 좌표>는 생각이 잉태한 의식화된 문제를 생각하고 되짚어 보며 방향성을 제시한다. 아울러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생각의 개념을 시원하게 해소해 준다. 나는 저자 홍세화를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로 처음 만났다. 그가 풀어 낸 프랑스 생활의 고단함보다 똘레랑스(관용, tolerance)의 표현이 그윽하고 울림을 줬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에게는 의식의 지표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할 지에 대해 무척 진지한 물음을 던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만 해도 김영삼 정부가 집권하던 때로 민주화를 향한 거친 항해를 막 통과하던 시기였다. 학내에는 투쟁보다는 취업의 현실이 더욱 살벌하게 버티고 서서 영혼을 옭아매고 저주받게 만든 세월의 연속이었다. 관용은 잊혔고 경쟁과 살기위한 몸부림만 남았다. 안전판은 고사하고 떨어지면 낙오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팽배했다. 불안을 감추기 위해 세운 목표와 도전은 명분에 불과했으며 위선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통해 나는 진정 행복한가를 진지하게 되묻게 된다. 88만원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그토록 고군부투했던 지난한 세월과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구르고 기었던 세월이 대체 누구를 위해 그토록 시큼하고 얼얼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생각을 추동하는 물질은 뚜렷한 명분과 소신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현재 생각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사회로부터의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저자의 단상은 우경화의 굴레를 벗겨 주는 소중한 틀이다. 사람은 환경과 습관에 지배를 받는다. 의식 또한 마찬가지로 주체적 사고를 말살하고 치우친 좌표에 따라 움직이다보면 좀처럼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이 책에서는 우리를 향해 날 선 시선처럼 물어 오는 불편한 질문들이 반복 계속적으로 출현한다. 자유에 대한 불온한 생각의 실체, 천형과도 같은 지역주의에 대한 망령, 나눔과 배분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회구조, 현실에 안주하는 암묵적 동조 등 소통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꾹꾹 눌려 숨겨 왔던 환부를 고스란히 까발린다. 자각증세가 없는 암세포가 점령해 시어빠진 몸뚱이처럼 우울하다.

 

        이 책 속에 자주 등장하며 눈에 뜨이는 단어 중 사회귀족이 있다. 사회귀족은 계급과 신분이 없는 민주사회가 자본주의와 결탁하면서 만들어 낸 계층쯤으로 이해된다. 그들에게 우리는 오블리스의 영예를 부여했다면 노블리주는 체화되어 드러나야 온당 옳다. 그런데 노블리주는 형식화되고 명분만 남았다. 1% 상위 부자에게만 국한되는 종합부동산세를 평등에 반한다는 논리로 무력화시키고 감세에 환영하는 처사는 불온한 작금의 현실이다. 우리는 세금에 민감하다. 저자 말마따나 세금이 제대로 쓰일 리 없다는 의심이 팽배하기도 한 현실도 한 몫 했겠거니와 유리알처럼 얇은 지갑을 여는 행동은 약탈처럼 섬뜩하게 다가선다. 하지만 실제 세금은 소외된 저 소득자를 돕고 분배의 패러다임을 유기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다. 목적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누는 것에 인색하다면 사회의 안전은 위태롭다. 목 놓아 부르는 저자의 톨레랑스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관용과 미덕은 색깔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나눔으로써 더불어 사는 사회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자연적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

 

        고이면 섞게 마련인 것을 우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서 산다. 이곳에서 산다면 당신을 말해준다는 건설광고의 한 자락처럼 물질이 정신을 지배했다. 아파트 크기와 사는 곳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계급을 만들어 준다면 진입장벽이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마땅하다. 사회적 평등이란 조건과 기회가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와 다르며 이상주의자들의 희망이 아니다. 생각의 좌표가 물질에 맞추어 져 만들어 낸 결과이며 미디어가 확대 재생산한 물신경배에 대한 현실이다. 이처럼 저자는 물신경배에 대한 삐뚤어진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된 기회 차별의 깊은 골에서부터 출발하는 물질만능주의이념에 전도된 세상의 비루한 현실에 대해 통렬한 생각 한 줄기를 던진다. 강남에서 잘 사는 아이와 소도시 아이의 인생은 같을 수 없다. 운명은 예정되어 있다는 숙명에 무릎을 꿇게 되는 비열한 현실이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구전된 민화의 흔적으로나마 찾을 수 있겠다. 교육의 양극화에 대한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양극화를 부추긴 데에는 모두의 잘못으로 우리는 곧잘 해명한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미루기만 난무하고 정녕 대책은 없다. 특목고를 만들어 개성을 담고 자율화를 높이겠다는 미명 아래 양극화를 더욱 조장하는 현실은 아이의 앞날에 먹구름만 짙다. 생색내기용 사회적 배려도 그들에게는 무소용이다. 면제된 학비에 육박하는 기타 보충수업비 등은 수입의 전부를 훌쩍 넘어선다. 결국 노블레스를 위한 마름으로 우리는 열심히 산다는 푸념만 한 가득이다.

 

        그렇게 차별화된 교육현장을 뚫고 사회로 배출된다해도 인생역전은 없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황정음이 남긴 잉여인간처럼 불안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은 줄곧 해 왔음은 틀림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저자의 지적처럼 의식화되고 세뇌된 회색논리로 물든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이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책임이 뒤따른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무관심도 자유를 유기하는 공범이다. 하지만 여기서 되묻게 된다. 너의 밥그릇을 내어 놓을 수 있겠느냐고. 비약적 추궁인지는 모르겠으나 사회적 연대를 꿈꾸는 소시민으로서 갈등이 앞선다. 언제부터 이렇게 염세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나마 분명한 것은 희망은 치이고 베여도 미래를 품는다는 사실이다. 똘레랑스의 저자처럼 쓴 소리 가감 없이 뱉어 주는 따끔한 일침은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됨은 분명하다. 역사는 지루하지만 변해 가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프랑스대혁명의 숭고한 이상이 이 땅위에 바로 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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