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수록작 '실버들 천만사'는 권여선식 모녀 이야기(창작과 비평 2020년 여름호 발표). 아래 옮긴 글은 2020 김승옥 문학상 작품집이 출처.


Mother and Daughter - Theodule Ribot - WikiArt.org



아마 예전의 나라면 이런 식으로 밋밋하게 흘러가는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더 꼬아야 하는데, 감추고, 에두르고, 덧칠해야 하는데, 하면서 꼬고 감추고 에두르고 덧칠해서 내놓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렇게 흘러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이 민틋하면 민틋할수록 나는 어떤 불쾌의 선이 끊임없이 자극되는 것을 느꼈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신경의 소소한 폭발들을 경험했다. 이 소설은 그 기록이다.

이상하지만 이번 한 번은 이렇게 하겠다.

또 이럴지 몰라도, 이번 한 번은 이렇게.

나도 한 번은 이렇게 무엇을 덜 하는 힘겨움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싶었나보다. 작가노트조차 이렇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한 번에 쓰게 될 줄 몰랐다. - 작가노트 | 이번 한 번 (권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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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4-05-29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타자를 상정한 애씀에서 놓여나고 싶은 어떤 궁극의 해방에
자신을 한동안 방기해 두려는 욕심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서곡 2024-05-29 21:54   좋아요 0 | URL
권여선 작가, 지금껏 많이 썼고 다양한 돌파구를 시도해봄직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여성작가로서 모녀서사를 쓴다는 일은 꽤 의미심장하니까요...
 


전도연 배우 주연의 연극 '벚꽃동산' 공연이 6월에 있다.


WOMAN SHOOTING CHERRY BLOSSOMS, 2019 - Yinka Shonibare - WikiArt.org


Cherry blossoms, 1953 - Pyotr Konchalovsky - WikiArt.org



「벚나무 동산」에서는 마치 그동안 체호프의 다른 희곡에 나왔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제를 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라네프스카야 부인과 트로피모프의 관계는 「갈매기」의 여배우 아르카디나와 그녀의 아들 트레플레프를 닮지 않았는가? 「바냐 삼촌」의 노처녀 소냐와 「세 자매」의 올가는 「벚나무 동산」에서 바랴의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네프스카야의 한심한 오빠 가예프는 앞서의 작품들에서 좋았던 옛 시절을 되뇌며 빈둥거렸던 모든 러시아 귀족들의 모습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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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5-28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곡은 꼭 오디오북으로 들어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훨씬 재밌거든요. 소설은 종이책이 더 좋습니다. 오디오북은 밑줄을 칠 수 없거든요. 제 오디오북에 체홉의 작품이 많아요. 요즘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을 듣고 있는데 굉장합니다. ˝제가 죽었다고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요?˝ 그러자 스크린을 켜서 수술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러저러해서 수술 받다가 죽었다, 라고 설명해요. 그러니까 사후 세계에 가 있는 거죠. 가짜 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실제 있는 일 같아요. 무엇을 더 보여 줄지 기대됩니다. 종이책을 살까 하고 고민 중입니다.ㅋㅋ^^

서곡 2024-05-28 11:40   좋아요 1 | URL
네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읽는 오디오북 말고 여러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 읽는 오디오북도 있더라고요 희곡을 그렇게 읽으면 듣는 연극이 되겠네요 저도 종종 오디오북을 듣습니다 더 다양한 오디오북이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Waltz - Gino Severini - WikiArt.org


'각각의 계절'(권여선) 수록작 '기억의 왈츠'는 2021년 '여덟 편의 안부 편지' 발표작으로서 그해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이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나는 스스로 내 내부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폐허였고 욕망이 소진된 폐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그러니까 그런 거고, 그런 식이니까 그런 식이라며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내가 굳이 뭔가를 결정하지 않아도 어차피 어떤 파국이 와서 끝내줄 테니까 뭐, 그런 식이었다. - 기억의 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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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5-28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여선, 제가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안녕, 주정뱅이> 중에서 ‘이모‘라는 단편이 참 좋았어요.

서곡 2024-05-28 12:4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안녕 주정뱅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쵸 이모 좋지요
 

재작년의 포스트로부터

A young ladys adventure, 1921 - Paul Klee - WikiArt.org



자신을 위해 써라 - 자유롭게 쓰기를 활용하여 생각의 흐름을 탐사하고, 뭔가를 결정하고, 우울함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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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깜빡이'는 웹진 비유 2022년 발표작. https://www.sfac.or.kr/literature/epi/A0000/epiView.do?epiSeq=856 (전문)

사진: UnsplashSandra Seitamaa



가까이서 보면 대책 없다 싶은 동생이, 화면 속 인물처럼 멀리서 다가오면…… 정처 없다…… 쟤는 왜 가엾게…… 어디 딱 붙은 데가 없이…… 마음도 육신도…… 그런데 육신이란 말은…… 어쩐지 욕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 들어 혜진이 급격히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느꼈지만 혜영은 절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이 혜진과 세상을 이어줄 유일한 밧줄인 걸 아니까. 그런데도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육신…… 육신…… 그 말이 자꾸 입안을 맴돌았고, 니 육신…… 내 육신…… 하면 왜 더 심한 욕 같은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엄마 진짜 귀신같지 않냐?
혜진이 말했고 혜영은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짜 귀신같은 게, 내가 언제 약간 행복해지고 내가 언제 약간 기분좋아지는지를 딱 노리고 있다가, 딱 재 뿌리는 시점을 엄마는 귀신같이 아는 것 같아.
엄마가 무슨…… 뭘 그렇게 노리고 뿌리고…… 그러다 혜영은 쿡 웃었다. 그럴 만큼 남의 일에 부지런한 분 아니야.
그러니까 귀신같다는 거지. 의도가 없는데도 딱 그렇게 하니까. - 깜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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