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넘어가는 우리역사 2 -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한우리역사독서연구회 엮음 / 해와나무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발해 멸망 이후, 신라는 비교적 길었지만 또 다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라의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이후의 두 여왕은 방탕한 생활을 즐겨서 신라의 상황을 더 악화시켰고, 결국 농민 봉기로 인해서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때 등장한 비교적 큰 세력이 바로 궁예와 견훤이며, 견훤은 어느집 누구의 자식인지 정확한 기록이 나와있지 않고, 궁예는 신라의 버려진 왕자라는 일설로 보아 왕권다툼에서 패배한 일족으로 보인다. 

궁예는 승려가 되었다가 양길의 부하가 되어 군사를 받아 신라로부터 독립할 정도의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 견훤은 옛 백제땅을 차지하여 명분을 얻기 위해 후백제라는 이름을 내세웠고, 이렇게 다시 후삼국이 성립되었다. 궁예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았으며 나라이름을 고려라 했다가 태봉으로 바꾸었고, 후에 왕건이 다시 세운 고려와 비교하기 위해 후고구려라 칭한다. 궁예는 승려출신이기에 제정일치에 맛들여 차츰 포악해졌고, 민심을 잃어 권력은 왕건에게로 돌아간다. 

왕건이 내가 옛날에 읽었던 만화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한없이 유순했던 인물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는 될 수 있으면 전쟁대신 평화롭게 동화되기를 주로 택했다. 후백제에 시달리던 신라는 왕건에게 항복, 후백제에선 왕위 다툼이 일어나 옥에 갇힌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하여 결국 대세는 고려에게로 돌아간다. 

그렇게 세워진 고려는 왕건의 훈요 십조를 바탕으로 대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혜종, 정종은 일찍 사망했고 광종은 왕건 이래 최초로 강한 왕권을 흭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공포 정치와 지나친 불교 신앙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으나, 그가 많은 부분에 대하여 좋은 정치를 이룬 훌륭한 왕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에는 원나라 세력의 성장으로 인하여 고구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의 풍습을 강요당하고, 여자들을 공출당했으며, 왕들은 원나라의 여자들과 결혼해야 했다. 그리고 그 혼란한 상황에서 등장했던 것이 그 유명한 공민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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