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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평점 :

<순수의 시대> 다음으로 읽은 이디스 워튼의 작품이다. 이디스 워튼의 작품이라는 정보 외에는 아무 지식 없이 읽었는데, 여러모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여름>에 비하면 <순수의 시대>는 순한 맛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
배경은 19세기 말 미국 뉴잉글랜드 주의 작은 시골 마을. 변호사 로열 씨의 딸 채리티는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되었다. 채리티는 부유한 로열 씨 부부 슬하에서 외동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는데, 사실 채리티는 그들의 친딸이 아니다. 산에서 태어난 그를 로열 씨가 마을로 데려와 키웠고 채리티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채리티는 자신이 로열 씨 부부의 친딸이 아니며 산에서 왔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로열 씨의 아내가 살아 있을 때에는 괜찮았는데, 로열 씨의 아내가 죽고 큰 저택에서 로열 씨와 단둘이 생활하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로열 씨가 자신을 '여자'로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로열 씨로부터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한 채리티는 마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돈을 벌기 시작하지만 쉽지 않다. 때마침 도서관장의 조카인 건축가 루시우스 하니가 마을에 나타나 채리티의 마음을 헤집는다. 시골 마을 남자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세련된 매너와 탁월한 교양에 반한 채리티는 하니와의 연애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하지만 도시 출신에 촉망 받는 건축가인 하니가 태생도 불분명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자신을 신붓감으로 여길지 확신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채리티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는데...
수양딸 이름을 '채리티'라고 지은 시점에서 로열 씨는 타인의 감정을 상상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 것 같았다(내가 주워온 딸인데 양부모가 내 이름을 '자선'이라고 지으면 나라도 싫겠다. 누가 자선해 달랬나...). 그래도 문제의 그날 밤 이후 로열 씨는 채리티가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건드리지 않고, 채리티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하러 와주기도 하는 등 좋게 볼 만한 면도 없지 않기는 한데, 원래 나쁜 사람들이 얼굴에 나쁜 놈이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거 아니고 평소에는 착한 척 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 친다는 걸 떠올리면 그냥 나쁜 놈이 맞다. 루시우스 하니도 나쁜 놈이기는 한데 채리티도 좋아했으니까 나쁜 놈만은 아닌가...(그렇지만... 그래도...)
채리티라고 해서 올바르고 착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채리티는 문제의 그날 밤 이후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일자리도 구하고 자신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갈 만한 남자도 찾아봤다. 하지만 수중에 가진 돈도 없고 먹고 살만한 기술이나 지식, 인맥조차 없는 채리티에게는 선택지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생모가 있을지도 모르는 산으로 가보기도 하지만, 직전에 알게 된 어떤 사실 때문에 현실과 타협하는 결정을 내린다. 채리티가 하루 빨리 마을에서 벗어나길 바랐던 독자로서는 아쉬운 선택이었지만, 현실에는 채리티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결정을 내린 여성들, 어머니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타협이 과연 행복의 시작일까. 내 눈에는 고통의 연장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