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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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직해 힘든 나날을 보내던 수연은 세들어 살던 다가구 주택에 불이 난 것을 핑계로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엄마가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 고향도 아니고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엄마는 수연에게 자신이 밥을 해주는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때로는 식당 일을 거들고 심부름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던 수연은 일 문제로 상의하기 위해 서울에 와 달라는 연락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이주란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별일은 없고요?>에는 일견 별일 없이 살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의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별일이 없지 않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의 수연은 고독한 타향 살이와 회사 생활로 인해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다. <사람들은>의 두 은영은 어머니와 사별하고 깊은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른>의 '나'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를 여의고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 혈연도 아닌 아줌마로부터 깊은 위로를 받는다. <여름밤>의 상은은 고단한 시절을 함께 지나온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쓸쓸해 한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위해>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셋이서 살았던 수현은 '조용히 살라'는 할머니의 당부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표현을 자제하며 자랐다.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가난했던 수현은 어른이 되고 스스로 돈을 벌게 되면서 점차 형편이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수현은 옆집 아이 유리가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보여서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처음에는 도움을 거부했던 유리가 점점 수현에게 마음의 문을 열면서 둘만의 특별한 하루를 보내게 되는 과정이 감동적이었다.


이어지는 단편 <이 세상 사람>은 가정 폭력 피해자인 '나'가 캠핑장에 갔다가 어떤 장면을 목격하면서 경험하는 감정을 그린다. <서울의 저녁>은 예전에는 한 집에서 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더는 볼 수 없는 친구를 그리워 하는 내용이고, <파주에 있는>은 남편이 죽은 후 대학 후배의 집에서 지내는 현경이 첫사랑의 메일을 받고 재회하는 과정을 그린다. 어느 단편도 서사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편이지만, 대체로 이별 또는 상실이 원인으로 제시되며, 재회 또는 귀향으로 과정이 전개되며, 공감 또는 회복으로 결말이 난다. 어떻게 보면 심심하고 뻔한데 왠지 모르게 좋고, 계속 따라 읽게 되는 매력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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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이동 경로
김화진 지음 / 스위밍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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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의 별명은 '사랑의 신'이다. 어느 모임, 어느 집단에 속하든 누군가의 구애를 받고 끊임없이 연애를 하기 때문이다. 오월의 어느 밤에도 그랬다. 주희는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한 테이블에 둘러 앉게 된 사람들 중 한 명인 현우와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 주희의 관심은 현우가 아니라 다른 두 사람 - 솔아 언니와 지원 언니에게 있었다. 이들은 '되기 전 모임'이라는 일종의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고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는데, 주희는 다른 두 언니를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우를 이용한다. 현우는 이를 모르지 않았고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점점 그런 주희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김화진 작가의 연작 소설 <공동의 이동 경로>는 글쓰기 모임의 네 멤버 - 주희, 솔아, 지원, 현우- 가 각각 주인공인 네 편의 단편을 포함해 총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의 신>의 뒤를 잇는 <나의 작은 친구에게>는 타투이스트인 친구 지원을 좋아하는 솔아가 주인공이다. 솔아는 지원이 해준 공룡 문신이 사라지는 사건을 겪으며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나 여기 있어>는 솔아의 마음을 사실은 알고 있는 지원이 주인공이다. 지원은 우울증을 앓았던 친구 효진이 사고로 죽은 후 자신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 자신에게 다가와 준 솔아에게 고마운 감정을 품고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


<이무기 애인>은 주희의 애인인 현우의 이야기를 그린다. 기자 지망생이었던 현우는 '되기 전 모임' 멤버 중에서 글쓰기와 가장 거리가 멀었던 자신이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는 것에 열등감을 느낀다. 주희의 애인은 자신이지만, 사실 주희의 관심은 솔아와 지원에게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주희와 헤어지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자신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 주희가 원망스럽다. 마지막 단편 <공룡의 이동 경로>는 지원이 솔아에게 해준 공룡 문신 '피망이'가 주인공이다. 솔아는 문신조차 영원하지 않다며 한탄했지만, 사라진 문신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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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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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혼자서 딸 해민을 키우는 미애는 친구 주희의 빈 아파트로 들어가 살게 된다. 단지 내에서 어린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독서 모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미애는 해민을 데리고 그들을 찾아간다. 독서 모임 멤버들은 미애와 해민이 그들과 같은 아파트 주민일 거라고 생각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지만, 점차 미애와 해민이 그들과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애와 해민을 따돌린다. 그런 와중에 독서 모임의 주축인 선우의 딸 세아와 해민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서 가뜩이나 안 좋은 미애의 상황이 더욱 더 나빠진다.


김혜진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부동산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집도 없고 남편도 없이 혼자서 딸을 키우는 미애의 이야기를 그린 <미애>를 시작으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가족 중 그 누구보다 집을 팔고 싶어 안달이 난 소녀 세미가 나오는 <20세기 아이>, 집주인과 세입자로 만나서 인생의 한 시절을 함께 보낸 만옥과 순미의 관계를 그린 <목화맨션>,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부동산 임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남터미널>, 여섯 채의 빌라를 소유한 집주인을 대신해 세입자와 건물을 관리하는 여자의 일상을 그린 <산무동 320-1번지> 등이 그렇다.


여섯 번째 단편부터는 조금 다르다. <자전거와 세계>는 치과 직원인 현지가 교통 사고로 입원한 할머니의 보상 처리 과정을 지켜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내용이고, <사랑하는 미래>는 전시관 직원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주인이 연하의 중국계 캐나다인 남성과 연애를 시작하며 일상의 변화를 겪는 과정을 그린다. 표제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입주 청소 일을 하는 인선이 경옥과 함께 일하면서 마음의 문을 여는 내용이다. 모든 단편이 한국의 주거 또는 노동 문제를 다뤄서 읽는 마음이 가볍지 않지만, 힘든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데다가 약간의 희망도 보여줘서 책을 다 읽고 덮는 마음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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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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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는 1946년 영국 런던. 소설가인 모리스 벤드릭스는 밤 늦은 시각 술집에서 나오는 길에 우연히 옛 친구 헨리 마일스와 재회한다. 사실 모리스는 헨리를 대하는 것이 불편한데, 그럴 만한 것이 모리스가 전쟁 중에 헨리의 아내 세라와 외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헨리는 모리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자신의 아내가 요즘 누구를 몰래 만나는 것 같은데 고위 공무원인 자신의 체면상 직접 알아보기가 힘드니 모리스가 대신 알아봐 달라는 것이다.


모리스는 헨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는데, 실은 모리스도 세라의 근황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모리스와 세라는 헨리 몰래 불타는 연애를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세라가 이별을 고한 이후로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은 적도 없다. 모리스는 사립 탐정을 고용해 세라의 뒤를 캐고, 이 과정에서 세라의 일기장을 건네 받으면서 세라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했던 이유를 알게 된다.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1951년에 발표한 소설 <사랑의 종말>은 2015년 영국 <가디언>이 선정한 '최고의 영문 소설 100선'에 뽑힐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그레이엄 그린의 또 다른 대표작인 <브라이턴 록>, <권력과 영광>, <사건의 핵심> 등과 함께 가톨릭 소설로 분류되기도 한다. 나 역시 종교 소설이라는 문구에 혹해 읽게 되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로맨스, 그것도 불륜에 관한 소설이라서 의아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은 세라의 일기 내용을 알게 되면서 풀렸다. 세라와 모리스는 헨리의 눈을 피해 불 같은 사랑을 하던 시절에 집 안에서 사랑을 나누다 폭격을 맞은 적이 있다. 폭격 당시 금방 정신을 차린 세라와 달리 모리스는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모리스가 죽었다고 생각한 세라는 "이 남자를 살려주기만 하면 뭐든 하겠다. 이 남자와의 사랑도 포기하겠다."라는 내용의 기도를 했다. 그 후 (세라에게는) 기적처럼 모리스가 깨어났고, 세라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리스와의 사랑을 포기했다. 사연을 알게 된 모리스는 세라의 곁으로 달려간다.


즉, 세라가 자신의 사랑을 걸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 모리스를 살렸기 때문에 이 소설이 가톨릭 소설로 분류되는 것인데, 기도의 진짜 목적은 신에게 부탁을 하거나 신과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이 무엇이든 그것을 따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나로서는 세라의 기도나 그 이후의 행동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그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최고의 영문 소설 100선에 뽑히고 기독교 서적으로서도 인정 받는 걸 보면 내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얕은 것을 수도 있고... 몇 번 더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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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담
김보영 지음 / 아작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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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그 자신의 모습을 본떠 우리를 만드셨다." 여기서 '신'은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일까. 한국 SF 최초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김보영의 연작 소설 <종의 기원담>은 신과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살짝 비틀면서 시작된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생물학과 대학원생인 케이는 동료들과 함께 총동창회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케이의 동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두 자리 수 모델은 둥근 원통형이고, 세 자리 수 모델은 네 개의 바퀴가 달려 있고 전신이 도금되어 있으며 신의 모습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네 자리 수 모델은 이족 보행을 하고 살가죽이 부드러우며 표정이 다양해 일상 생활에 부적절하다고 일컬어진다. 이쯤 되면 짐작했을 텐데... 그렇다. 인간처럼 대학에 다니고 부류를 나누며 차별을 일삼는 이들의 정체는 사실 로봇이다. 


이 소설은 로봇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모종의 이유로 생태계가 달라진 지구를 로봇들이 지배한다. 산소가 거의 없고 온도가 영하 100도에 가까우며 콘크리트로 뒤덮인 지구는 높은 습도와 온도에 취약한 로봇들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로봇들은 인간처럼 행위할 뿐만 아니라 인간처럼 사고도 한다. 심지어 이들은 인간처럼 자신들의 기원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창조론을 믿는 로봇들은 자신들이 공장에서 창조된 존재로, 신(공장)에 의해 만들어진 차별은 당연하며 변화나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을 고수한다.


로봇 중에서도 열등한 존재로 취급 받는 네 자리 수 모델인 케이는 하루 빨리 논문을 완성해 학위를 받아서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다. 그런 케이가 학부 시절에 별 뜻 없이 쓴 논문이 사장된 학문이나 다름 없던 유기생물학의 새로운 기원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케이의 삶이 변화한다.


이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다른 시기에 쓰였다. 작가가 2000년에 집필을 시작해 2005년에 완성한 1부는 신과 인간, 로봇의 자리를 뒤바꾼 시도만으로도 기발하고 흥미롭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처럼 행위하고 사고할 수 있게 된 로봇마저도 자신들의 창조 신화를 만들고 차별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대목들은 아직도 창조론을 신봉하고 차별을 일삼는 인간들을 비판 내지는 풍자한다고 느꼈다.


1부가 인류세에서 '로봇세'로 전환된 세상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내용이라면, 2부와 3부는 케이가 만들어낸 인간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그린다. 대학원을 떠나 유기생물을 연구하는 칼스트롭 연구소에 들어간 케이는 연구 끝에 인간을 완성한다. 그러자 로봇의 초기 세팅에 따라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경애하고 인간에게 복종하는 마음이 '작동'한다. 그렇게 인간의 지위가 높아지고 개체수가 늘어나면 로봇의 지위는 낮아지고 생존 가능성 역시 낮아진다. 이렇게 모든 것이 상충하는 로봇과 인간은 과연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1부에서 로봇이 자신들을 창조한 신이라고 믿었던 존재는 사실상 인간이고, 2부와 3부에서 멸종된 인간을 창조하는 것은 신이 아닌 로봇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인간이 인간 자신의 창조물에 의해 창조된다는 점에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이 만든 종말이 새로운 시작의 단서가 되고 그 시작이 또 다른 종말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 또한 인간보다 더 큰 차원에 종속된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용을 온전히 다 이해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앞으로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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