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마을 청호리
배명은 지음 / 네오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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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인 미주는 어릴 때부터 귀신을 보았다. 사람들은 귀신을 본다는 이유로 미주를 배척하고, 귀신들은 자신들이 보인다는 이유로 미주를 좋아해서 미주는 어디서도 오래 살지 못하고 이삼 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다. 더는 이사할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번에 이사를 간 곳은 충청도 거천시 근처의 작은 마을인 청호리. 엄마의 고향이자 외가 식구들이 살고 있는 청호리에는 이상한 규칙이 있다. 첫째는 마을 바깥의 것을 탐내지 말 것. 둘째는 14세 이상의 남녀 청소년은 한자리에 있거나 대화하지 말 것. 셋째는 '선녀님'의 존재를 마을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말 것.


이상한 규칙들 때문에 미주는 청호리가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단체로 거주하는 곳은 아닌지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엄마의 고향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학교 친구들이 대체로 친절하게 대해줘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적응한다. 하지만 마을에서 처음 사귄 친구인 연희가 같은 동아리에 들자고 하도 떼를 써서 들어간 오컬트 동아리 '그믐' 활동을 하면서 마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하나둘 알게 되고, 보기와 달리 이 마을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급기야 연희가 마을에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주가 느끼는 공포는 극에 달한다.


<이상한 마을 청호리>는 장편소설 <수상한 한의원>, 단편소설 <계화의 여름> 등을 쓰고 앤솔러지 <절망과 열정의 시대>,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괴이 학원>,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 등을 쓴 소설가 배명은의 신작이다. 소설 맨앞에 '변재천녀(변재선녀)'에 관한 설명이 나오는데, 처음 접하는 단어라서 뜻에 대해 좀 더 찾아보니 불교에서 모시는 최고의 여성신으로 <삼국유사>에도 언급된다고 한다. 청호리 사람들이 모시는 '선녀님'이 바로 이 변재천녀(변재선녀)이며, 소설은 선녀님이 깃들어 계시다고 여겨지는 마을의 오래된 느티나무에 문제가 생기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다.


이 소설의 장점은 평범한 오컬트 소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현실에 적용해 볼 수 있는(봐야 하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청호리는 이상한 규칙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견 평화롭고 풍족하고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규칙이야말로 청호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동시에, 청호리 사람들이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진실(혹은 비밀)을 담고 있다. 미주는 외부인의 시각과 귀신을 보는 능력, 그리고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청호리 사람들이 오랫동안 쉬쉬했던 문제를 밝혀낸다. 미주의 이런 끈기와 용기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도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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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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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그 후로 14년이 지난 2025년 4월 10일 현재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12차 방류가 시작되었고, 올해만 5차례 더 방류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걱정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아니 분명 (나를 포함해) 걱정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하지만 뉴스나 신문 같은 매스 미디어에서는 오염수를 방류했다, 같은 뉴스를 기계적으로 내보낼 뿐 이에 대해 항의하거나 부작용을 걱정하는 보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더 이상 원전 건설을 하지 않고 기존 원전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전력 사용량을 줄여야 할 테지만 요원한 일이다. 


이나가키 에미코의 책 <그리고 생활은 계속한다>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이십여 년 간 재직한 저자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스스로 전기 사용을 줄이며 탈원전 생활을 실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마흔 살 때 퇴사를 결심하고 퇴사 이후의 삶에 대비해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 내용은 저자의 첫 책 <퇴사하겠습니다>에 자세히 나온다.) 한 달 지출 중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생활비를 줄이는 과정에서 전기 사용료를 줄이기로 결심했는데 생각 외로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10퍼센트를 줄이는 게 어려우면 50퍼센트를 줄이라"는 파나소닉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말에 힌트를 얻어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같은 전기제품 자체를 처분해 버렸다. 그 결과 전기 사용료가 줄어든 건 물론이고 생활도 대폭 간소해졌다.


냉장고 없이, 세탁기 없이, 청소기 없이 어떻게 살아? 싶겠지만, 저자가 해보니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장 볼 때 식재료를 덜 사게 되고, 식재료를 덜 사니 요리를 많이 안 하게 되어서 요리에 쓰는 시간이 줄었다. 반찬 수도 줄었지만, 사실 반찬은 한두 가지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나는 그렇다). 세탁기도 없으니까 옷을 덜 사게 되고, 사더라고 세탁이 쉬운 옷만 사게 되고, 세탁이 쉬운 옷만 사니까 세탁하는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 청소기 대신 빗자루와 걸레로 청소하니 청소할 때마다 거슬렸던 청소기 소음을 안 들어서 좋다. 이 밖에도 전자레인지, 헤어 드라이어 등 당연하게 사용했던 전기제품이 의외로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가 팔랑팔랑... 나도 없애볼까?


저자가 처분한 전기제품 중에서 나라면 그래도 이건 처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물건은 냉장고다. 겨울에는 몰라도 여름에는 어떻게 하려고... 근데 저자의 경험에 따르면 여름은 여름대로 냉장고 없이 살 만하다. 무청(시래기)을 햇볕에 말려서 무쳐 먹고 끓여 먹고 다양한 요리에 활용하듯이, 다양한 채소들을 햇볕에 말려서 먹을 수 있고 맛도 영양도 더 좋다. 저자가 냉장고 없이 살면서 요리의 달인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후속작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 자세히 나온다(지금 읽고 있다). 채식, 자연식물식 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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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아비와 오야마 2 - 완결
아이다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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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중연극 배우로 활약하고 있는 키타가와 엔노스케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해 집을 나와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카페 마스터 이타미 코이치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타미는 몇 년 전 아내와 딸을 사고로 잃고 삶의 의욕을 잃었다가 우연히 엔노스케를 만나 함께 생활하면서 죽은 딸에게 못해줬던 것들을 대신 해주고 있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지내고 있던 두 사람에게 위기가 닥친다. 엔노스케의 아버지가 이타미의 집에 나타난 것이다.


엔노스케의 이야기를 읽으며, 부모의 직업을 계승해야 하는 자식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런 경우가 아니지만, 한국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고 일본에는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처럼 스스로 직업을 택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부모의 직업을 계승하는 삶이 편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엔노스케의 경우처럼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뒤를 잇는 삶을 사는 것으로 정해져 철이 들기도 전부터 일종의 직업 훈련을 받아야 하는 삶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래도 이타미의 경우처럼 죽음이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은 경우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지... 


이 만화처럼 혈육도 아니고 혼인으로 연결되지도 않은 사람들끼리 가족을 이루어 사는 이야기가 요즘 일본에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가족은 필요한데 진짜 가족은 싫어' 또는 '가족은 필요한데 결혼은 하기 싫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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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아비와 오야마 1
아이다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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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봤을 때는 절대 안 봤을 것 같은 만화. 다 읽고 보니 이보다 설정과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제목을 찾기가 더 어려웠을 것 같다 ㅎㅎ


대대로 대중연극을 해온 집안의 아들인 키타가와 엔노스케. 가부키의 여성 역을 의미하는 '오야마' 역도 훌륭하게 소화해 내서 아직 어린데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공연을 포기하고 집을 나온 엔노스케는 공원에서 혼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말을 건다. 알고 보니 그 남자, 이타미 코이치는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고 삶의 의욕을 잃은 카페 마스터였고, 갈 곳이 없는 엔노스케는 카페 일을 거드는 대가로 이타미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다. 


두 남자가 한 집에 살면서 친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BL 요소가 없다고 볼 수 없지만, 완결까지 다 본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만화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겪고 있는 엔노스케와 자식을 잃은 홀아비 이타미가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는 일종의 유사 가족물인데, (원)가족은 싫고 (새)가족은 원하는, 그러나 결혼은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인기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은 일본풍을 대표하는 대중연극 배우, 다른 한 사람은 서양 음식을 주로 만드는 카페 마스터로 설정해 일본풍과 서양풍을 대비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에피소드를 나열한 점도 흥미롭다. 엔노스케는 이타미가 만들어주는 빵과 오므라이스를 먹고, 이타미는 엔노스케가 연기하는 대중연극을 보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의욕을 되찾아가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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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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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의 프리랜서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 트레이드 마크인 강렬한 아프로 헤어 때문에 이 분의 존재는 알고 있었는데 이 분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읽어보니 문장이 술술 잘 읽히고 문제 의식과 접근 방법에도 공감이 간다. 저자의 첫 책인 이 책은 1965년생인 저자가 아사히신문이라는 좋은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오십 살에 퇴사를 감행한 과정을 담고 있다. '퇴사'를 주제로 한 책이지만 퇴사를 계획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계속 회사에 다닐 예정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 


저자가 퇴사를 결심한 건 마흔 살의 일이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아사히신문에 입사해 신문 기자로 정신없이 일했던 저자는 선배들이 마흔 살이 될 때마다 "인생의 반환점에 다다르셨네요."라고 가볍게 말했다. 막상 자신이 마흔 살이 되자 '인생의 반환점'이라는 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이대로 '회사 인간'으로서 일만 하면서 남은 생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막막했다. 그렇다고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일 안하고 놀고 먹을 정도로 모아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비혼 비출산으로 의지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와중에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후배에게 업무 명령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오보 사건이 두 번이나 일어나며 이 회사에서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회의감이 커졌다. 그래서 조금씩 퇴사를 준비했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퇴사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남들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회사 다니는 게 즐거워져서 퇴사 계획이 미뤄지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다. 


회사 밖에서는 월급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대비해 씀씀이를 줄이는 노력을 했다. 근데 이게 의외로 즐거웠다. 저렴한 식재료를 사려고 대형 마트 대신 전통 시장에서 장을 보고, 비싼 여가 생활을 즐기는 대신 집 근처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자발적 탈원전을 실천하면서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같은 전기 제품을 처분했다. 그랬더니 구입하는 식재료의 양도 줄고, 옷도 줄고, 물건도 줄었다. (자발적 탈원전 생활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에 자세히 나온다.) 예전엔 돈을 많이 벌어도 쓸 돈이 늘 부족했는데 이제는 돈이 남아돌아 걱정(?)이다.


이 책은 일이나 회사를 부정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일은 계속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일을 좋아한다. 퇴사를 결심한 후에도 십 년이나 더 다녔을 만큼 회사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 겪은 어려움(주택 계약, 세금 납부, 실업 급여, 건강검진 등)도 분명 있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일만 하면서 사는 건 너무 아깝다. 회사에만 의존하면 자신의 진짜 능력이나 가치를 알기 어렵다. "매달 월급이 입금되는 데에 익숙해지다보면 어느덧, 저도 모르게, 일단 돈을 벌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18쪽) 요즘 내 무기력, 우울의 원인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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