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리 테일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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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소년 찰리 리드는 사고로 엄마를 잃고 현재는 술 중독에서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다. 찰리가 사는 마을에는 '사이코 하우스'라는 별명이 붙은 집이 한 채 있다. 사이코 하우스는 주변의 깔끔하고 아담한 집들과 다르게 더럽고 여기저기가 망가져 있으며, 그 집에 사는 노인과 개는 성질이 아주 더러우니 건들면 큰일 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찰리도 그렇게 믿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사이코 하우스 앞을 지나가던 찰리는 개 한 마리가 길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이건 사람에게 겁을 주려고 내는 소리가 아니라 겁이 나서 내는 소리라고 직감한 찰리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훨씬 더 작게 들린 소리. "도와줘." 찰리는 곧바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사이코 하우스의 주인인 보디치 씨였다. 


보디치 씨를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디치 씨의 간병인이 된 찰리는 보디치 씨의 집이 외관만 허름한 게 아니라 안에 있는 물건들도 엄청나게 낡았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래서 가난한 노인인 줄 알고 병원비는 어떻게 낼지 걱정했는데, 어느 날 보디치 씨의 부엌 밀가루 통에서 엄청난 금액의 돈을 발견하고 며칠 후에는 보디치 씨의 금고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 알갱이가 담긴 양동이를 본다. 대체 이 노인 정체가 뭘까.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페어리 테일>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제목이 왜 동화(fairy tale)인지 궁금했다. 운동 특기자인 17세 소년과 사이코로 소문난 노인의 만남으로 시작하는 것부터가 전혀 동화 같지 않은 데다가, 보디치 씨의 간병을 하면서 신뢰를 얻은 찰리가 보디치 씨의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인으로 지정되고 그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받는 것은 동화보다 범죄 스릴러 소설에 어울리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디치 씨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알려준 대로 뒷마당으로 간 찰리가 동화 속 세계로 이어지는 우물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며 이 소설은 동화가 맞는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케 하는 본격적인 환상 동화! '세상의 우물'을 통해 입장할 수 있는 그 세계에는 수명을 연장해 주는 거대한 해시계가 있고, 찰리는 그 해시계를 이용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개에게 두 번째 삶을 주고 싶어 한다. 


불과 며칠 전까지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던 소년이 거대한 박쥐 떼가 날아다니는 환상의 세계를 모험한다는 설정이 기발하고 신선하다. <그림 동화> 같은 고전부터 <사악한 것이 온다>, <로건의 탈출>, <끝없는 이야기> 등 유명한 SF 소설을 언급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해시계를 이용해 수명을 연장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데 그 대가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서 2권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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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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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보고 있는 미국 드라마에 나이 차이가 스무 살 가까이 나는 이성애자 커플이 나온다. 여자가 사십 대 초중반이고 남자가 이십 대 중반인데, 이 커플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여자도 남자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둘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같은 여자인데도 '나라면 저렇게 어린 남자(애)랑 사귈 수 있을까' 싶고, 둘이 함께 있을 때 여자 쪽이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걸 보면 '나는 못 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내가 아는 연하남 만나는 여자분들 전부 동안+미인...) 


아니 에르노의 <젊은 남자>는 제목 그대로 저자가 자기보다 훨씬 젊은 남자와 연애했던 경험에 대해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때는 1998년. 저자는 대학생 A와 만남을 시작했다. 당시 저자의 나이는 54세. A는 저자보다 서른 살 가까이 어렸다. A에게는 동거 중인 여자친구가 있었다. A의 친구들은 "어떻게 폐경한 여자랑 잘 수 있냐"라는 눈으로 저자와 A 커플을 바라봤다. 저자는 그래도 좋았다. 저자는 A에게 운명적인 사랑이나 결혼 또는 아이를 바라지 않았다. 이 연애로 새로운 책을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실제로 A와의 연애를 통해 저자는 새로운 책의 영감이 될 만한 경험을 많이 했다. A가 사는 집 창문에선 저자가 불법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후에 출혈을 일으켜 실려간 병원이 보였다. 아직 학생인 A의 낡고 검소한 집은 전 남편과 신혼 초에 살았던 불편하고 초라한 집을 떠올리게 했다. 서른 살 가까이 나이 차가 있다 보니 저자가 어릴 때 직접 경험한 일이 A에게는 오래된 역사처럼 느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반대로 A에게는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 저자에게는 미래의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아도 사람에 따라, 나이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별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인식한 것은 저자의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저자는 A와의 연애를 끝낸 후 이십 대 초반에 불법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경험을 고백한 책 <사건>을 발표했다. A의 집 창문 너머로 그 병원을 보지 않았다면, 그 시절로부터 시간상으로는 이만큼 멀어졌지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생생하다는 걸 깨닫지 않았다면, <사건>이라는 역작이 출간되지 않았거나 더 늦게 출간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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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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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는 지혁은 소설을 계속 쓸지 말지 고민한다. 이 와중에 투병 중인 어머니의 상태가 안 좋다는 연락이 오고, 정규직으로 전환될 희망이 보였던 한국어 강사 자리를 완전히 잃게 된다. 여기까지가 문지혁의 소설 <초급 한국어>의 줄거리이자 결말이다. 후속편에 해당하는 <중급 한국어>는 주인공 지혁이 한국에 돌아온 이후의 일들을 그린다. 


지혁은 귀국 후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헤어진 여자친구 은혜와 다시 만나 결혼했다. 한 권의 책을 냈고, 강원도의 한 사립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 자리를 얻어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뉴욕에서 혼자 살면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에 비하면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지혁은 현재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다.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안 생기고, 책은 냈지만 여전히 등단하지 못했다. 강원도까지 출퇴근하기 힘들고 수업은 힘든데 이마저도 귀한 자리라서 그만둘 수 없다.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소설은 지혁의 일기처럼 이어진다. 지혁은 매일 눈 뜨면 출근하고 수업하고 퇴근하고 잔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일상이지만, 분명 변화는 있다. 일단 오랜 불임 치료 끝에 지혁과 은혜 부부에게 첫 아이 은채가 태어난다. 지혁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책의 실패를 딛고 세 번째 책을 집필한다. 지혁이 열심히 준비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학생들과도 약간의 교류가 생긴다. 팬데믹을 겪으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비대면 온라인 수업 도중 갑자기 방으로 들어온 은채를 보고 학생들이 환영해 주는 대목이다. 지혁의 학생들은 수업이라는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인 비자발적인 관계이고, 지혁은 이를 서운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은채를 보고 자발적으로 환영 인사를 건네는 학생들을 보면서, 온전히 사랑받기에는 부족하고 불완전하다고 느꼈던 자신의 존재가 딸로 인해 채워진다고 느꼈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식을 가지나 보다 싶기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아빠 껌딱지였던 은채가 얼마 후 BTS 오빠들 노래만 듣는 반전이 ㅋㅋㅋ) 


지혁의 글쓰기 수업 장면들도 좋았다. 매 수업에서 지혁은 프란츠 카프카, 안톤 체호프, 레이먼드 카버, 롤랑 바르트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학생들에게 소개한다. 각각의 소설은 당시 지혁의 삶과 연결되고, 지혁은 그것을 소설로 쓰고 그 소설이 다시 지혁의 삶을 바꾼다. 소설이 삶이 되고 삶이 소설이 되는 가장 훌륭한 사례랄까. 작가 자신의 삶이 소재인 점, 그러나 에세이와는 다르고 자서전과도 다르다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와 닮았지만, 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둘 다 좋다). 얼른 후속편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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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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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소련의 시골 마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열여덟 살 소녀 세라피마는 마을 최고의 사냥꾼인 엄마를 따라 집을 나선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독일군이 엄마와 이웃들을 죽이고, 독일군을 잡으러 온 소련군 지휘관 이리나가 엄마의 시신을 능욕한다. 저항하는 세라피마에게 이리나는 "싸우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라고 묻고는, 싸우고 싶다면 자신을 따라 오라고 말한다. 세라피마는 결심한다. 일단 엄마를 죽인 독일군을 죽이고, 그 다음 저 지휘관을 죽이겠다고. 


세라피마가 도착한 곳은 여성 저격병 훈련학교다. 이곳에서 세라피마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샤를로타, 올가, 야나, 아야)을 만난다. 이들은 매일 강도 높은 체력 훈련과 사격 훈련을 받으며 연약한 소녀에서 강인한 군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전에 투입되는데, 전쟁의 실체는 이들의 상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매일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도 끔찍했지만, 더 끔찍한 건 그렇게 사람을 죽일 때마다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자신이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서점인들이 자신이 직접 팔고 싶은 책을 뽑는 '서점대상' 2022년 1위작이다. 전쟁, 그것도 그리 친숙하지 않은 독소전을 소재로 한 소설이 1위로 뽑힌 이유가 궁금했는데, 읽어 보니 납득이 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3개월 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도 관련 있고, 소설에 직접 언급되기도 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르포르타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내용처럼, 그동안 남자들이 일으키고 남자들만 기억된 전쟁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공헌과 희생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독일군에 의해 엄마와 고향을 잃고 저격병이 된 세라피마는 군인으로서 하달 받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수록 자신의 인간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저격병은 확인 전과가 25명에 도달하면 용맹 훈장, 40명에 달하면 군공 훈장을 받는다. 전쟁 영웅 류드밀라 파블렌코는 확인 전과만 309명이 넘고, 이리나 역시 90명 넘게 적을 사살했다. 이런 식으로 살인이 곧 성과이며 업적이 되는 세계에 있으니, 사람이 더 이상 사람으로 안 보이고 과녁으로 보였다. 이것이 전쟁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고 지속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은 대체 어떤 상태란 말인가. 


세라피마는 또한 전쟁에서 여성의 역할을 두고 고민한다. 소련은 여성을 전투에 투입하지만, 독일은 여성을 부엌에 밀어 넣고 미국은 여성을 치어리더로 쓴다. 샤를로타는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우는 나라가 더 진보한 나라라고 말하지만, 세라피마는 여성 징병이 "성차별을 배경으로 삼아 전쟁터에서 여성을 멀리 떨어뜨리려는 사상"(파시즘)의 반대에 있다 해도 그 또한 "동질성을 강요하는 사상"(파시즘)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여성에 대한 고민은 실전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세라피마는 같은 아군인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군인들을 무시하고 희롱하는 남성 군인들을 보면서,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이 아군인지 여성인지 고민한다. 심지어 여성에 대한 겁탈을 동성 간의 유대와 협력을 확인하는 일종의 놀이로 여기는 남성 문화에 질겁한다. "소련 병사로서 싸우는 것과 여성을 구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때가 온다면, 소련군 병사로서 여성을 구하는 것이 목표인 나는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362쪽) 


책을 다 읽고 작가님이 (이름을 보면 남성 같은데) 여성인가 싶어서 확인해 보니 남성이어서 놀랐다. (1985년생이고 고등학생 때 벌어진 9.11 테러에 영향을 받아 메이지가쿠인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나와 비슷해서 또 놀랐다 ㅎㅎ) 남성 작가가 페미니즘, 그것도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일은 흔치 않은데, 이런 소설이 서점원들이 수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좋겠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에 수여하는 서점대상 1위로 뽑혔다는 게 멋지다. 


페미니즘, 레즈비언 같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진보적인 사상은 수용하면서도 같은 전범국인 일본이 아닌 독일을 적국으로 설정한 이유는 뭘까. 많은 생각이 드는데, 일단 자국 역사를 건드리면 항의할 사람이 많아서 그랬을 것 같고, 전쟁을 일으킨 쪽이나 방어라는 명목으로 자국민을 전쟁에 내보내는 쪽이나 다 나쁘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주 독자층인 일본인들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수 있는 타국의 이야기를 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한국인 독자의 입장에선 일본의 전쟁 범죄를 반성하는 내용을 써줬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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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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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 12월 어느 늦은 오후. 스물한 살 대학생 샘 매서는 매직아이로 만든 광고판을 보는 군중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다. 한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전우'였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멀어진 세이디 그린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옛 친구를 만난 반가움에 샘은 세이디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다시 만난 샘에게 세이디는 디스켓 한 장을 준다. "이거 내가 만든 게임이야. 혹시 시간 나면 한번 플레이해봐. 네 의견이 무척 듣고 싶거든."이라는 말과 함께. 


<섬에 있는 서점>, <비바, 제인>의 작가 개브리얼 제빈의 신작 장편소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어린 시절 친구였던 샘과 세이디가 대학생이 되어 재회한 후 함께 게임을 만들면서 성공과 실패, 인정과 상실, 우정과 사랑 등을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이들이 처음 만난 건 샘이 열두 살, 세이디가 열한 살 때다. 교통사고를 당해 발에 장애가 생긴 샘이 입원해 있던 병원이 마침 세이디의 언니가 암에 걸려 입원한 병원이었다. 


언니를 보러 병원에 온 세이디는 휴게오락실에서 자기 또래 남자애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게임이라면 세이디도 제법 잘하는 편인데 남자애의 실력도 상당했다. 그렇게 서로를 알게 된 샘과 세이디는 하루가 멀다 하고 휴게오락실에서 게임을 했다. 병원에선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자신도 장애를 얻은 후 성격이 어두워졌던 샘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며 세이디를 칭찬했다. 그러나 얼마 후 둘은 멀어졌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말도 하지 않았다. 


게임으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을 다시 연결해준 것 역시 게임이다. 세이디가 건네준 게임 디스켓을 플레이한 샘은 어릴 때 함께 게임을 하면서 놀았던 친구가 이제는 스스로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실력이 상당하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는다. 전공인 수학을 계속 공부하거나 졸업생들의 전철을 밟아 금융계에 취직하는 것보다 세이디와 같이 게임을 만드는 편이 훨씬 더 즐거운 인생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함께 게임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한 샘과 세이디는 샘의 룸메이트 마크스까지 더해 셋이서 그들의 인생 첫 게임 '이치고'를 완성한다. 이치고가 예상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면서 샘과 세이디는 순식간에 게임 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고 했던가. 샘과 세이디의 사회적 입지가 높아지는 것과 개인적인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둘은 각각 일과 사랑, 우정, 가족 등 다양한 면에서 실패를 겪고, 그 때마다 서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이 소설은 샘과 세이디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두 사람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장애 때문에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던 샘, MIT 전공 수업에 단 둘뿐인 여학생 중 한 명이었던 세이디,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연극에서 주연을 맡지 못했던 마크스, 게이인 사이먼과 앤트 등 사회적으로 약자, 소수자 취급 당하던 이들이 게임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고 마침내 세상을 바꿔가는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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