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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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유키 리쿠히코는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구인 정보지를 뒤적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조건의 일자리를 발견한다. "연령과 성별 불문. 일주일 동안의 단기 아르바이트. 어떤 인문과학적 실험의 피험자. 하루 구속 시간은 24시간. 인권을 배려하며 24시간 동안 피험자를 관찰한다. 기간은 7일. 실험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외부로부터 격리한다. 구속 시간 동안 시급은 전액 지급한다. 시급 11만 2천엔." 


시급 11만 2천엔이면 다른 아르바이트 시급의 100배가 넘는 금액이다. 24시간씩 7일 동안 일하면 약 1800만 엔(원화로 약 2억 원)을 벌 수 있다. 유키가 사고 싶은 중고 경차를 여러 대 사고도 남을 돈이다. 오자일 수도 있지만, 오자가 아니면 횡재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호기롭게 응모한 유키. 닷새 후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고 기차를 타고 달려간 곳에는 열한 명의 다른 지원자와 '암귀관'이라는 방공호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인사이트 밀>은 2001년 <빙과>로 데뷔한 요네자와 호노부가 2007년에 발표한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다. 외부와의 연결이 단절된 공간에서 한정된 소수의 사람들이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클로즈드 서클' 장르에 속한다. '클로즈드 서클' 장르의 대표작으로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등이 있는데, <인사이트 밀>은 비교적 최근작인데도 이 작품들과 함께 거론될 만큼 명성이 상당하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과정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을 꾸준히 따라 읽어온 독자로서는 작가의 관심사가 이 작품에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무기력해 보이지만 추리만은 열심인 유키와 어리숙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명석한 스와다(쇼코)의 조합은 <빙과>의 '쇼에네' 에너지 절약 주의자 오레키 호타로와 귀여운 외모와 뛰어난 지성을 갖춘 치탄다 에루 콤비를 닮았다. 진실을 말해도 여론에 따라 억울한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 또한 <빙과>에 등장한 바 있다. 


지하 감옥에서 사건 현장을 보지도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최근작 <흑뢰성>에서 아리오카성 지하 감옥에 갇힌 구로다 간베에가 아라키 무라시게의 청을 받아 일련의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을 해결하는 장면과 닮았다. 음식에 대한 묘사가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안 어울리게) 자세한 점도 요네자와 호노부 소설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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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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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뉴욕 월 스트리트가 배경이라고 해서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같은 내용을 상상했고, 소설 초반은 어느 정도 그 상상을 충족했다. 하지만 2부를 읽고, 3부와 4부를 읽으면서 상상한 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래서 미국 평단과 언론이 찬사를 보내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고, HBO에서 케이트 윈슬렛 주연 드라마로 제작한다고 하는 거구나. (소설의 구성이 일종의 트릭인 작품인데, 과연 소설만큼 재미있을지...?) 


소설의 1부인 <채권>은 대대로 큰 부를 축적해온 집안의 후계자인 벤저민 래스크가 이제 막 태동한 금융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헬렌 브레보트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대공황 직후 아내가 의문의 병을 얻어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떠나는 내용이다. 1부를 읽고 단편으로서도 꽤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2부 <나의 인생>으로 넘어갔는데, 1부와 2부의 내용이 다른 듯 닮고, 닮은 듯 달랐다. 일단 주인공 부부의 이름이 다르고, 세부사항이 다르고, 편집상 오류인가 싶은 부분이 1부에는 없지만 2부에는 있고... 


그렇게 아리송한 기분으로 3부 <회고록을 기억하며>로 넘어갔는데, 여기서 비로소 소설 전체의 윤곽과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3부의 화자인 아이다 파르텐자는 2부의 주인공인 앤드루 베벨이 비서로 고용해 자신의 자서전과 아내 밀드레드의 회고록을 쓰게 하는 여자다. 앤드루 베벨은 일 년 전에 나온 '어떤 소설'이 공공연하게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다룬 것을 불평하면서, 직접 자서전과 회고록을 펴내 대중의 오해를 바로잡겠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가난한 인쇄공의 딸인 아이다는 미국 최고 부자인 앤드루 베벨의 말과 그가 주는 돈에 현혹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자서전과 회고록을 쓴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앤드루 베벨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가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급기야 아이다는 일자리를 잃거나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아마도 앤드루 베벨이 숨기고 있는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일 밀드레드의 일기를 찾는다. 


그리하여 읽게 된 4부 <선물>의 내용은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일단 일기의 주인공인 밀드레드 베벨의 비극적인 생애가, 그러한 생애를 은폐, 날조하려고 한 앤드루 베벨의 행위가 충격적이었다. <채권>을 쓴 해럴드 배너조차 편견에 사로잡혀 베벨 부부를 오해한 것도 충격적이지만, 베벨 부부의 진실을 알고 있었던 아이다 파르텐자 역시 앤드루 베벨의 복수가 두려워 오십 년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는 걸 보면 그 또한 공범 아닐까. 


이런 식으로 남편과 아내, 의뢰인과 대필 작가 사이의 연합(trust) 또는 공모를 그린 소설이고, 그러한 연합 또는 공모의 기초는 신뢰(trust)인데, 그 신뢰의 기반 내지는 핵심이 거액의 돈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돈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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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홋카이도 - 겨울 동화 같은 설국을 만나다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4
윤정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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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홋카이도>의 저자 윤정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중학교 때부터 홋카이도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쯤 영화 <러브레터>를 봤고, 그 영화의 OST를 주야장천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홋카이도에 실제로 가본 건, 팬데믹이 발발하기 1년 전인 2019년. 가족과 함께 삿포로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아쉽게도 겨울이 아닌 봄이었는데, 내년 겨울에 다시 온다는 다짐이 계속 미뤄져 아직도 홋카이도에 다시 못 가고 있다. 


<한 달의 홋카이도>는 <500일의 영국>, <영국 일기>, <한 번쯤 일본 워킹 홀리데이>를 쓴 윤정 작가의 신간이다. 윤정 작가는 1994년생으로 영국과 일본에서 거주한 경험을 에세이와 만화로 표현해 꾸준히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한 달의 홋카이도>는 제목 그대로 홋카이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한 경험을 담고 있다. 2023년 1월 말부터 2월 말까지 약 한 달 동안 홋카이도의 중심 삿포로에서 생활하며 주변 도시들을 여행한 기록이다. 


저자가 일본에 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사카와 교토를 여행으로 가기도 했고, 도쿄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낸 적도 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도쿄에 있는 한인 학원에서 한국어 강사를 한 적도 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다시 찾은 일본은 느낌이 색달랐다. 도쿄, 오사카보다 북쪽에 위치한 홋카이도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도 했고, 학생이나 노동자가 아닌 여행자 신분으로 일본을 찾는 것이 오랜만이기도 했다. 


한 달이라는 주어진 시간을 저자는 알차게 사용했다. 숙소가 위치한 삿포로 시내는 물론이고 비에이와 오타루, 하코다테, 조잔케이 온천, 삿포로 국제 스키장 등 홋카이도를 찾는 여행자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은 거의 다 가보았다.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음식도 열심히 먹었다. 유명한 수프 카레와 징기스칸, 라멘과 스위츠 등은 물론이고 맛있다고 소문난 홋카이도 대학 학식, 하코다테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햄버거 체인점 럭키 피에로의 대표 메뉴 차이니즈 치킨버거 등도 섭렵했다. 


윤정 작가의 책의 매력 중 하나는 여행과 생활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책에서도 그랬다. 저자는 한 달 살기의 처음 2주는 여동생 수정, 나머지 2주는 남자친구 알렉스와 함께 지냈다. 저자의 이전 책들을 읽은 독자라면 반가울 이름들이다. 여행 틈틈이 온라인으로 (저자의 본업인) 한국어 수업을 하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여행 정보만이 아니라 저자가 여행하는 '사람', '일하는 여행자'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어서 더 유익하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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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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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연인>은 <모스크바의 신사>, <링컨 하이웨이> 등을 쓴 미국 작가 에이모 토울스가 2011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모스크바의 신사>, <링컨 하이웨이>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소설도 좋았다. (세 권 다 좋지만 개인적인 순위는 링컨 하이웨이>모스크바의 신사>우아한 연인 순) 


소설은 1966년 한 중년 여성이 남편과 함께 뉴욕의 사진전을 둘러보다가 한 사진 속 남자에게 시선이 고정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중년 여성의 이름은 케이티, 남자의 이름은 팅커 그레이다. 케이티는 오랜만에 팅커의 얼굴을 보면서 젊은 시절의 일들을 떠올린다. 1937년 뉴욕. 자수성가하겠다는 꿈을 품고 혈혈단신 뉴욕에 온 케이티는 낮에는 타자수로 일하고 밤에는 여성 전용 기숙사에서 만난 친구 이브와 뉴욕의 거리를 누비며 놀러 다닌다. 


젊고 예쁘지만 가난하고 인맥이 없는 케이티와 이브 앞에 어느 날 젊고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맥도 훌륭한 은행가 팅커가 나타난다. 세 사람은 이야기가 잘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서 논다. 케이티는 상류층 신사처럼 매너도 좋고 교양도 갖춘 팅커에게 호감을 느끼고, 팅커 또한 케이티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케이티와 이브, 팅커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그로 인해 각각의 인생도 달라진다. 


배경이 미국 뉴욕이고 시대적으로도 가까워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이 소설을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나 또한 비슷하다고 느꼈다. 특히 개츠비와 팅커의 캐릭터가 상당히 닮았고, 화자가 개츠비 또는 팅커를 동경했지만 나중에 그 감정이 바뀌는 것도 유사하다. 두 작품 모두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 또는 허상을 고발하는 내용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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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편혜영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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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초기에 전염병을 다룬 책들이 큰 주목을 받았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딘 쿤츠의 <어둠의 눈>,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 등이 그랬다. 이 책들을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얼마 전에 읽은 편혜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재와 빨강> 속 팬데믹 상황이 실제로 내가 경험한 팬데믹 상황과 가장 비슷했다. 작가가 이 소설을 발표한 건 2010년이고, 소설을 구상하고 쓸 당시만 해도 실제로 전염병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데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썼을까. 대단하다. (참고로 내가 읽은 건 2010년에 출간된 초판이 아닌 2023년에 출간된 리마스터판이다.) 


제약회사에서 약품개발원으로 재직 중인 '나'는 파견근무를 발령받고 C국에 있는 본사로 떠난다. 출국과 동시에 감기에 걸린 '나'는 때마침 발생한 전염병과 증상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공항에 격리된다. 이를 시작으로 '나'에게 계속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숙소로 가려고 하니 택시 기사가 그 동네는 위험하다며 가까이 가기를 거부한다. 본사 담당자인 '몰'은 출근 일자가 미뤄졌으니 숙소에 있으라는데, 숙소 상태가 엉망이다. 심지어 트렁크를 도난 당하고, 트렁크에 있던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까지 잃어버리면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본국에서의 '나'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아내가 자신의 동창과 바람을 피면서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직장 생활의 즐거움도 사라졌다. 도망치는 기분으로 C국에 왔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진짜 도망자가 되는 '나'를 보면서, 어쩌면 내가 지금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일상도 막상 벗어나면 아쉽고 그리운 소중한 시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지난 3년 간 팬데믹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체득한 교훈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통찰력(예지력?)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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