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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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소련의 시골 마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열여덟 살 소녀 세라피마는 마을 최고의 사냥꾼인 엄마를 따라 집을 나선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독일군이 엄마와 이웃들을 죽이고, 독일군을 잡으러 온 소련군 지휘관 이리나가 엄마의 시신을 능욕한다. 저항하는 세라피마에게 이리나는 "싸우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라고 묻고는, 싸우고 싶다면 자신을 따라 오라고 말한다. 세라피마는 결심한다. 일단 엄마를 죽인 독일군을 죽이고, 그 다음 저 지휘관을 죽이겠다고. 


세라피마가 도착한 곳은 여성 저격병 훈련학교다. 이곳에서 세라피마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샤를로타, 올가, 야나, 아야)을 만난다. 이들은 매일 강도 높은 체력 훈련과 사격 훈련을 받으며 연약한 소녀에서 강인한 군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전에 투입되는데, 전쟁의 실체는 이들의 상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매일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도 끔찍했지만, 더 끔찍한 건 그렇게 사람을 죽일 때마다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자신이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는 서점인들이 자신이 직접 팔고 싶은 책을 뽑는 '서점대상' 2022년 1위작이다. 전쟁, 그것도 그리 친숙하지 않은 독소전을 소재로 한 소설이 1위로 뽑힌 이유가 궁금했는데, 읽어 보니 납득이 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3개월 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도 관련 있고, 소설에 직접 언급되기도 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르포르타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내용처럼, 그동안 남자들이 일으키고 남자들만 기억된 전쟁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공헌과 희생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독일군에 의해 엄마와 고향을 잃고 저격병이 된 세라피마는 군인으로서 하달 받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수록 자신의 인간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저격병은 확인 전과가 25명에 도달하면 용맹 훈장, 40명에 달하면 군공 훈장을 받는다. 전쟁 영웅 류드밀라 파블렌코는 확인 전과만 309명이 넘고, 이리나 역시 90명 넘게 적을 사살했다. 이런 식으로 살인이 곧 성과이며 업적이 되는 세계에 있으니, 사람이 더 이상 사람으로 안 보이고 과녁으로 보였다. 이것이 전쟁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고 지속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은 대체 어떤 상태란 말인가. 


세라피마는 또한 전쟁에서 여성의 역할을 두고 고민한다. 소련은 여성을 전투에 투입하지만, 독일은 여성을 부엌에 밀어 넣고 미국은 여성을 치어리더로 쓴다. 샤를로타는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우는 나라가 더 진보한 나라라고 말하지만, 세라피마는 여성 징병이 "성차별을 배경으로 삼아 전쟁터에서 여성을 멀리 떨어뜨리려는 사상"(파시즘)의 반대에 있다 해도 그 또한 "동질성을 강요하는 사상"(파시즘)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여성에 대한 고민은 실전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세라피마는 같은 아군인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군인들을 무시하고 희롱하는 남성 군인들을 보면서,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이 아군인지 여성인지 고민한다. 심지어 여성에 대한 겁탈을 동성 간의 유대와 협력을 확인하는 일종의 놀이로 여기는 남성 문화에 질겁한다. "소련 병사로서 싸우는 것과 여성을 구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때가 온다면, 소련군 병사로서 여성을 구하는 것이 목표인 나는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362쪽) 


책을 다 읽고 작가님이 (이름을 보면 남성 같은데) 여성인가 싶어서 확인해 보니 남성이어서 놀랐다. (1985년생이고 고등학생 때 벌어진 9.11 테러에 영향을 받아 메이지가쿠인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나와 비슷해서 또 놀랐다 ㅎㅎ) 남성 작가가 페미니즘, 그것도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일은 흔치 않은데, 이런 소설이 서점원들이 수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좋겠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에 수여하는 서점대상 1위로 뽑혔다는 게 멋지다. 


페미니즘, 레즈비언 같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진보적인 사상은 수용하면서도 같은 전범국인 일본이 아닌 독일을 적국으로 설정한 이유는 뭘까. 많은 생각이 드는데, 일단 자국 역사를 건드리면 항의할 사람이 많아서 그랬을 것 같고, 전쟁을 일으킨 쪽이나 방어라는 명목으로 자국민을 전쟁에 내보내는 쪽이나 다 나쁘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주 독자층인 일본인들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수 있는 타국의 이야기를 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한국인 독자의 입장에선 일본의 전쟁 범죄를 반성하는 내용을 써줬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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