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 세계적 지성이 들려주는 모험과 발견의 철학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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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가을의 기본자세는 수직이라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의 두 작가님들(김하나, 황선우)의 말씀에 따라 주말마다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서울숲에 다녀왔는데, 서울 사람 다 여기 왔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나무도 많고 새도 많고 호수에 물도 많고... 오랜만에 힐링하는 시간이었다.


집순이답지 않게 열심히 나돌아다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이다. 이 책을 쓴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르도노상과 메디치상을 수상했고,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인정받는 공쿠르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인 프랑스 대표 석학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철학, 문학, 사회학적 지식과 통찰을 기반으로 우리가 왜 집에만 있지 말고 부지런히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실내에 머무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야외로 나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철학계에서도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다. 플라톤은 "가장 용감하고 대담한 자들만이 동굴의 환상에서 눈을 돌려 별이 빛나는 밤하늘, 태양, 천체들을 감히 쳐다본다."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 역시 동굴 밖 하늘이야말로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과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했다. 반면 이마누엘 칸트는 "집은 허무, 어둠, 모호한 근원의 공포를 막아주는 유일한 방벽이다."라고 했다. 


랑스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실내 생활을 찬양한 작품으로는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꼽을 수 있다. 드 메스트르는 42일간의 가택 연금형을 받고 자신의 집에만 머무르며 집 안의 가구, 책, 옷 등에 관한 책을 썼다. 그의 책은 영웅의 정복이나 순례 이야기가 대부분이던 당시 흐름과 정반대였으나 큰 성공을 거뒀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도 자기 방에서 영감을 받아 <사형수 최후의 날>을 썼다. 


사실 실내에 머무르든 야외로 나가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현대인들이 야외 활동보다 실내 활동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고, 팬데믹이 이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20세기가 성장과 확장을 숭배하고 과도한 경쟁이 팽배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정체와 축소를 추구하고 패배주의와 극단적 비관론이 넘쳐나는 시대다. 팬데믹은 역경에 맞서기를 꺼리고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핑계가 돼주었다. 


야외 활동에 따른 비용이 증가하면서 "진짜 활동다운 활동은 특권층의 호사가 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부자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집에서 OTT로 철 지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 먹방을 보면서 가공식품을 먹는다. 서핑이나 스키 같은 운동을 실제로 하면 많은 돈이 들지만 실내에서 온라인 게임으로 즐기면 돈도 절약되고 다칠 위험도 줄어든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현실에서의 사교 활동이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현상도 언급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SNS에 자신의 실물보다 훨씬 잘 나온 사진을 올린다. 그런 사진에 익숙해질수록 실제 사람은 더욱 못생기고 불완전하고 흠 많은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구독하는 SNS, 내가 속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나를 닮은 타자들 밖에 없다. 그런 모임에 친숙해질수록 나와 다른 사상과 취향을 가진 사람을 대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일부러라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는 도전과 모험이야말로 "삶이 제공하는 최선을 온전히 누리는" 행위이고 "우리의 두려움이 실상은 망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진짜로 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의 생장에도 바람이 필요하듯이 인간의 성장과 성숙에도 바람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메시지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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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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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얼마 전 고등학교 앞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학원 강사로 일할 때보다 월급은 적지만 주인 부부가 친절하고 손님들도 다정해 일하는 마음이 훨씬 편하다. 지영은 엄마, 세상을 떠난 언니가 남긴 조카딸 송이와 함께 산다. 남들이 보기에는 가난하고 불완전해 보일지 몰라도 지영은 지금이 좋다. 좋아하는 작가의 낭독회에 가고, 휴일엔 조카와 서점에서 책을 사고, 이모가 만든 떡볶이가 제일 맛있다는 칭찬을 듣는 삶이 행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주란 작가의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읽은 책이다. 일단 표제작 <한 사람을 위한 마음>부터가 내용이 잔잔하고 편안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지영의 상황은 그저 좋다고만 볼 수 없다. 언니가 조카를 남기고 죽었고, 애인과 헤어졌고, 직장을 그만뒀고, 세 식구의 생계 부양자는 오로지 자신이다. 그러나 지영은 상실에 아파하기보다 상실의 고통을 함께 나눌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고, 가난에 주눅 들기보다 적은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음에 행복해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인물이 은근히 드물고 귀하다. 


이 소설집은 전반부에 비교적 평이하게 읽히는 단편들이 실려 있고 후반부에 은근히 독하고 어떻게 보면 어두운 내용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넌 쉽게 말했지만>,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일상생활>은 일기처럼 읽힌다. 출근하기 싫다, 퇴사하고 싶다, 연애가 안 풀린다, 가족이 말썽이다 등 어떻게 보면 SNS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숱하게 보는 넋두리와도 비슷하다. 그 때마다 맛있는 것 먹으면 기분이 풀리고 한동안은 버틸 만해진다는 것도 많이 본 흐름이다 ㅎㅎ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에는 <한 사람을 위한 마음>과 마찬가지로 자매 중 한쪽이 먼저 사망한 설정이 나온다. 남자친구를 따라 벌초를 하러 간 이야기를 그린 <준과 나의 여름>과 빵집이 배경인 <그냥, 수연>도 잔잔한 분위기인데, <나 어떡해>와 <H에게>는 내용이 무겁다. 앞의 단편들이 상실이나 충격 뒤에 오는 애도와 회복을 그렸다면, 뒤의 두 단편은 상실과 충격의 시기를 그려서 상대적으로 더 어둡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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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뒤에 쓴 유서 오늘의 젊은 작가 41
민병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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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인 '나'는 어느 날 집에서 아버지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최초 발견자라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고 금방 풀려났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상처와 고통으로부터는 어른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풀려나지 못했다. 이후 소설가가 된 '나'는 오랜만에 고향 집을 찾는다. 법주사 근처라서 한때는 관광객이 많았던 동네인데 오랜만에 가보니 스산하기 그지 없다. 고향 집도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탓인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다. 처음엔 '왜' 써야 하는지 몰라서 못 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몰라서 못 쓴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심지어 그 아버지가 깊은 밤에 농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죽어가는 아버지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나라면, 내가 너무 일찍 발견해서 아버지의 고통을 연장한 것이 죄스럽다고 느낀다면 말이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자신의 기억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한정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만 말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환갑을 맞은 어머니와 오키나와로 여행을 간 김에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하지만 묻지 못한다. 고향 사람들과의 대화는 변죽만 울리는 느낌이다. 결국 오로지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해 글을 써야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지 않다. 


소설 제목에 유서라는 단어가 있어서 유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유서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죽기로 결심한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그날 마침 집으로 찾아온 친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는지, 가족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길이 없다. 아버지가 유서를 굳이 달력 뒤에 쓴 이유 또한 불명확하다. 이것은 누구라도 보기를 바란 걸까, 그러지 않기를 바란 걸까. 


소설 속 '나'의 이름이 민병훈이고 직업도 소설가라서 설마 진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가 했는데, 책소개를 보니 자전적인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있어서 소설이라는 것이 달력 뒤에 쓴 유서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을 쓰든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상처와 고통이 비쳐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달력은 인쇄된 날짜가 지나면 넘겨야 하는데 유서가 쓰인 달력은 함부로 넘길 수 없다는 점도 그 시절에 멈춰 있는 저자의 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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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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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일하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삼십 대 청년 인수는 어느 날 우연히 자해공갈로 돈을 벌어 생활하는 가출 청소년 이호를 보고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한다. 눈빛이 거칠고 태도가 불손한 이호를 보면서 인수는 12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지금은 직업도 있고 집도 있는 그가 한때는 이호처럼 거리를 떠돌며 생활하는 가출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12년 전의 어느 날. 인수는 엄마와 자신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거리로 나온다. 인수는 PC방을 전전하고 무료 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자신처럼 집이 없는 또래 청소년인 성연과 경우를 만난다. 성연과 경우는 여러모로 정반대다. 성연은 겉모습부터 불량하고 태도도 위압적인 반면, 경우는 가출 청소년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외모가 단정하고 태도도 예의 바르다. 


인수는 성연처럼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친 말투와 강압적인 태도에는 거리감을 느낀다. 경우처럼 남에게 피해를 안 주고 배려하는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무법천지나 다름 없는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에서 경우 같은 모범생으로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체념한다. 


같은 가출 청소년이라도 성향은 정반대인 성연, 경우와 어울리던 인수는 가출한 아이들의 공동체인 이른바 '가출팸'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는 화장실이나 공사 중인 건물이 아닌 반지하 빌라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좋았는데, 식구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해졌고 이로 인해 점점 더 불법적이고 위험한 일에 관여하게 된다. 


백온유 작가는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인수와 성연, 경우처럼 청소년기에 가출한 경험이 있거나 소년원에 가본 경험이 있는 인터뷰이들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에 묘사된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가 무척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런 아이들이 지금도 거리에 있을 것 같고, 그동안 나는 이런 아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봤던가 돌아보게 한다.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를 그린 소설이지만, 누구나 할 법한 보편적인 삶의 고민을 다룬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연이 악을 행한다면 경우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인수는 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악을 행하는 성연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꼿꼿하게 선을 행하는 경우의 방식도 동경한다. 완벽한 악도 완벽한 선도 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우물쭈물하는 인수의 모습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인수는 받고 싶었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주고 싶었던 사랑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 이호를 만났고, 이호에게 자신이 받고 싶었던 사랑과 주고 싶었던 사랑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인수가 경우에게 배운 사랑이고 삶의 자세다. 인수처럼 경우를 기억하고 경우의 삶을 따르는 사람이 있는 한, 경우는 계속 이 세계에 '있는' 게 아닐까. 경우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오랫동안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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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지 마라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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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작가의 <눈감지 마라>는 총 49편의 짧은 소설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집이다. 주인공인 박정용과 전진만은 지방대 졸업 후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사회로 나오기 전에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부터 떠안은 이들은 월세 30만 원짜리 방에 둘이 살면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들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편의점은 기본이고 음식점, 출장 뷔페, 택배 상하차, 고속도로 휴게소 등 장소와 날짜를 안 가리고 돈 주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 


이렇게 보면 노동과 생계 걱정으로 얼룩진 어두운 이야기일 것 같지만, 의외로 코믹하고 유머가 많다. 일단 정용과 진만의 캐릭터가 재미있다. 정용은 성실하고 정의감이 높은 만큼 분노도 많은 반면, 진만은 정용에 비해 헐랭하지만 그만큼 정도 많고 실수도 많다. 그런 두 사람이 집에서 일터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며 생활하는 모습이 유쾌하고 푸근하다. 내복보다 싸고 따뜻하다며 성인 남자 둘이 집에서 팬티 스타킹을 입고 생활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ㅋㅋㅋ 


정용과 진만이 일상에서 또는 일터에서 맞닥뜨리는 사람들도 하나 같이 개성 있고 재미있다. 특히 나는 이들의 옆방에 사는 아저씨가 웃겼다. 어떤 사정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혼자서 사는 이 아저씨는 딸과 통화를 할 때마다 어떻게든 딸을 웃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통화 끝에 항상 회심의 유머를 날린다. 정용과 진만은 처음엔 아재 개그라며 무시하다 점점 어이가 없어서 웃고 나중에는 진심으로 웃겨서 웃는다 ㅋㅋㅋ 


가난하고 힘들어도 열심히 사는 정용과 진만이 결말에선 형편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닌 점도 인상적이었다. 해피엔딩은 할리우드 영화에나 있는 것이고 현실에는 없다는 비관 또는 체념일까.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자신의 젊음을 희생하고 있고 심하게는 신체와 목숨을 잃고 있다. 이런 현실을 그저 소설의 글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소설이라서 더욱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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