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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평점 :
대학교 4학년 때 학교 심리상담센터에서 심리검사를 받았다. 검사지를 채워서 제출하자 얼마 후 상담사 가 들어와 이런 말을 했다. "00씨는 부정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나 봐요." 상담사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긍정적인 감정은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이고 표현도 잘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속에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로 인해 남들 눈에는 화도 잘 안 내고 웬만해선 싸움도 하지 않는, 같이 지내기에 썩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혼자서 끙끙 앓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을 거라고 덧붙였다.
정여울 작가의 신간 <늘 괜찮다 하는 당신에게>를 읽으니 그때 그 상담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딸만 있는 집의 장녀로 태어나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자란 나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어리광 부리고 귀여움 받기보다는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의젓하게 행동하길 기대받았다. 슬프다고 울고, 화가 난다고 화를 내는 일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슬퍼도 괜찮은 척, 화가 나도 대수롭지 않은 척하다 보니 그것이 곧 내 성격이 되고 '나'가 되었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런 의문이 내면에 떠올랐을 때, 저자는 문학과 심리학을 만났다. <늘 괜찮다 하는 당신에게>는 그 결과물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학 작품 속 인물의 심리를 분석하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법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법을 알려준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제인 오스틴 <이성과 감성>, 프란츠 카프카 <변신> 등을 읽으며 그동안 억지로 외면했던 집착, 질투, 분노, 이기심 같은 감정을 비로소 들여다보는 법, 거울에는 비치지 않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인 그림자와도 만나는 법을 소개한다.
우리는 애써 모른 척한다.
괜찮다라고 말할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 무언가는 바로 나의 트라우마, 그림자, 그리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문학과 심리학이 저자를 위로한 것처럼, 그동안 나도 저자의 책으로부터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 저자의 안내로 헤세와 융이라는 스승을 만났고, 문학과 심리학을 아우르는 공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장녀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남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무력하게 또는 사악하게 그려지는 여성 인물들에 대해 재차 생각하게 된 것도 저자 덕분이다.
<늘 괜찮다 하는 당신에게>를 읽고 나서는 책을 더욱 깊이, 섬세하게 읽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이 책에 소개된 책 중에는 이미 읽은 책도 적지 않으나 저자처럼 예리하게 분석하며 읽지는 못했다. <유디트>를 읽고 '여성이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은 이렇듯 자신의 소중한 무엇을 포기해야만 가능한가?'라고 질문하는 능력이 내게는 아직 없다. <피그말리온>와 영화 <사브리나>의 결말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채고 비교하는 통찰 역시 부족하다. 괜찮은 문장과 괜찮지 않은 문장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괜찮지 않은 걸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용기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기 일쑤였던 내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고, 울고 싶을 때는 울고 화를 내고 싶을 때는 화를 내도 괜찮다고 어깨를 토닥여준 이 책이 참 고맙다. 책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의 그림자를 살피는 법을 가르쳐준 이 책이 몹시 사랑스럽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지 않아서 괜찮아. 그 말이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날까지 이 책을 읽고 또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