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24일차

<二由一有/이유일유/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一亦莫守/일역막수/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라>

 

디지털 세상에서 존재하는 수는 0 과 1 뿐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디지털은 0과 1로 다시 번역하여 소통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지식과 정보가 늘어 수록 디지털에서는 연산 속도와 메모리 저장 능력이 발달할 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그래서 CPU 니 GPU , HBM 같은 용어를 쓰는 반도체 칩들이 기술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디지털은 세상의 거의 모든 영역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일상 생활에서 부터 우주로 뻗는 외장화 영역까지 디지털은 현실 세계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아니 이제 디지털이 없이는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는 구조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였다.

하나는 둘이 되었고, 둘은 이제 숫자를 거론하기에 무의미한 확장을 일으킨 것이다.

이제 0과 1이 단순한 숫자인가?


이제 선도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선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선은 단순히 구시대 유물이며 종교적 수행법이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 선은 더욱 체계화가 되고 의미가 명료해 것이다.

물론 디지털이 마음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처럼 빠른 속도로 비슷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는 언어가 필요 없다.

디지털 시대에서 인간의 언어는 이상 필수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로 디지털 시대의 언어처럼 보다 빨리, 그리고 수 많은 정보를 한 순간에 전달시킨다.

순간 마음으로 우리는 태양계를 넘어 우주 바퀴를 돌고 있을 있다.

다만 그것을 현실로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본마음 자리를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마음 자리에 어떤 시비의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재유시비(纔有是非)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분연실심(紛然失心)어지러히 본마음을 잃으리라

이유일유(二由一有)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일역막수(一亦莫守)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라

 

본마음이 하나라면 현상은 둘이 있고 이상도 있다.

하지만 본래 하나마저도 붙잡지 말아야 한다.

붙잡음 조차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디지털에서 0과 1를 빠르게 놓고 가듯이 우리 마음도 하나라도 붙잡아서는 안된다.

뜻을 머리로 이해해서는 절대 없다.

그저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생각을 일으키면 안되기 때문이다.


: 二由:  , 말미암을 유: 둘은 ~로 말미암아

一有: 하나 , 있을 유 : 하나로 있다.

一亦: 하나 , 또 역 : 한 가지 또한

莫守: 없을 , 지킬 수:  지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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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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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각자도생에서 각자각성의 시대로

 

1969년, 인류는 드디어 달에 발을 디뎠다.

인류가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에서 벗어나 하늘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달에 것이다.

동서양을 떠나 인류에게 달은 문장 하나로 표현 있는 곳이 아니다.

신화의 세계에서 부터 현실 사회에 이르기 까지 달은 우리의 상상과 물리적 현실을 동시에 관련 곳이다. 어쩌면 인간의 달 상륙은 우리 인류의 사고와 물리적 영향력을 지구 행성에서 우주로 확장 시킨 최초의 사건이다.

상륙을 이루어낸 국가 미국은 지구상의 다른 국가를 앞도하며 기술의 정점에서 물질적으로는 세계 최강이었다. 그렇게 미국은 인류의 오랜 신화 속 주인공 달의 여신을 찾으러 떠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달에 상륙한 기세로 이제 곧 우주의 모든 행성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은 지구의 중심이었고 스스로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처했다.

마치 헐리 블록버스터 영화의 아이언 맨이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미국이 흔들리기 시작 했다.

70년대 초기, 중국과 수교를 하며 냉전을 종식시키고 이념보다 전략을 선택했다.

하지만 닉슨대통령의 워터 게이터 사건으로 사람들은 점차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트남전 같은 명분 없는 전쟁에서 세계 경찰의 피로도는 극도로 쌓이게 되었다.

또한 경제에서는 금본위제가 종료되어 달러가 더이상 고정환율이 되지 못했다.

오일 쇼크와 스태크플레이션으로 경제는 항상 성장한다는 이론이 이상 작동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차 기존 가치관에 대한 불신이 쌓였고, 물질과 기술의 발전에서 간극을 보였던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기 시작 했다.

사람들은 이상 “잘 사는 법”이 아니라 “왜 사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동양이 ‘대안’으로 보이던 순간, 이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양으로 향했다.

요가, 선, 명상,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의식의 기술로서 동양 사상을 대안으로 삼기 시작했다.

흐름의 한가운데에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 선사는  ‘Zen’이라는 단어를 서구 지성계에 정착시킨 일본인 승려로 미국 사회에 선을 철학이자 체험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의 제자 스즈키 순류(1904~1971)는<선심초심> 을 통해 수행을 “대단한 경지”가 아니라 “초심을 잃지 않는 삶의 태도”로 보여주었다.  그는 스티브 잡스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하다.

한국의 숭산 스님(1927~2004)은 19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선불교를 본격적으로 전한 선사이다.

“오직 모를 뿐 (Don’t know mind)” 이라는 한마디로 미국의 젊은이들의 머리를 정면으로 흔들었다.

홍콩 배우 이소룡(브루스 리1940~1973) 은 영화와 무술에서 미국을 매료 시켰다.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 “Be water” 라는 말 하나로 선의 감각을 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이때 부터 동양인은 이상 ‘신비한 타자’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철학이 되었다.

이후 스티브 잡스(1955~2011)는  젠(Zen)과 명상을 통해 기술과 미학, 직관을 결합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기술은 의식의 확장”임을 산업 세계에서 실험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인물들이 시대에 겹쳤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윌버는 <무경계>를 세상에 내 놓았다.

그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동서양의 언어를 하나의 지도 위에 펼쳐 보이려 했다.

윌버가 『의식의 스펙트럼』을 발표한 것은 1977년, 그의 나이 23세였다.

윌버는 시대의 신세대 ‘의식의 지도 제작자’였다

그는 불교, 심리학, 철학, 영성, 과학. 각기 다른 언어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사실은 어긋나 있지 않다는 것을 ‘이론’이라는 형태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깨달음의 체험이라기보다 깨달음들이 놓인 지형도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사상의 통합 시도는 개인의 천재성만으로는 설명 없는 지도를 그리게 만든 시대의 절박함이 크게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지도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리 정교한 지도라도 걷는 발걸음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믿음 보다 체험을 중시 한다.

오직 깨쳐야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의 시기를 각자도생(各自圖生) 시대라고 한다.

수록 어려운 상황에서 각자 스스로 생존을 꾀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각자각성(各自覺醒) 시대를 준비해야 된다고 본다.

각자 스스로가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나아가 각자공생(覺者共生) 시대가 완성 되기를 희망한다.

다시 말해서 깨달은 자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살게 되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전체의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 것이 되며, 바로 그것이 불국토가 이 땅에서 현실로 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달을 정복하고 화성에 텔레포트하는 현실에서 불국토가 웬말인가 싶겠지만 ...

물론 지금 현실에서는 너무나 요원해 보인다.

일론머스크가 우주로 확장에 희망을 걸었듯, 나는 불국토 건설에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5일간의 무경계의 사유의 여정을 마치겠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이 이제는 나를 벗어나 스스로 사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2년 전, 나의 독후감에 대해 단 한 사람만이 좋아요 눌러 주셨다.

아마도 분의 좋아요 없었다면 그때 이미 나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글은 그분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지금은 나의 엉성한 사유를 읽고 좋아요’ 를 눌러 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래서 친구로 인연을 맺은 블로그님들 한 분, 한 분께 더욱 감사하다.


우리는 이미 공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 마침표는 아직 없다.  

오직 쉼표만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No Boundary.

본래 경계는 없다.

사유는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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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3일차

<纔有是非/재유시비/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紛然失心/분연실심/어지러히 본마음을 잃으리라> 

 

세상의 종교는 믿음을 근본으로 한다.

누군가 종교가 있다고 한다면 종교를 믿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종교를 상징하는 혹은 인물을 믿는다고 것이다.

어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어떤 이는 예수를 믿으며, 어떤 이는 부처를 믿는다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알라를 믿는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믿음이다.

종교를 믿는 이유는 각각의 종교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이유도 다르다.

누군가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누군가는 죽어서 천당에 가기 위해서, 누군가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종교가 없는 이유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종교가 없는 무교 또한 자신의 신념을 믿는 셈이다.

그래서 무교 또한 종교의 방식이 된다. 신념을 믿는 셈이니까.

과연 우리는 종교를 믿는 이유가 자신의 무엇을 위해서 믿는 것인가.

그런데 만약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든다면.

마치 스스로 죄를 지은 처럼 여길 것이다.

종교에서 의심은 죄악에 가깝다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에서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는 믿음의 자리가 아니다.

선은 깨닫기 위해 믿음 보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먼저다.

선은 불교의 수행 전통에 있지만, 믿음을 요구한 교리 체계 이전에 체험을 요구한다.

따라서 선에서의 의심은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의심은 깨달음의 열쇠이다.

선에서는 그러한 의심을 *대의단(大疑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의심과 믿음은 사실 둘이 아니다.

가지 견해는  진리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인 셈이다.

 

이견부주(二見不住) 견해에 머물지 말고

신막추심(愼莫追尋)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이제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는 승찬 스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략 감이 온다.

서로 다른 견해는 얼핏보면 전혀 다른 같지만 근본은 하나 수도 있다.

믿음과 의심은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깨닫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그러니 어느 것을 쫓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

 

재유시비(纔有是非)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분연실심(紛然失心)어지러히 본마음을 잃으리라


중요한 것은 현상이 아니라 본질이다.

본마음을 지켜야 한다.

본마음이 바로 신성이며, 불성이라면 믿을 것인가? 아니면 의심할 것인가?

아니면 질문 자체가 이미 시비인 셈인가?

오직 방하착 뿐이다.

 

: 纔有: 겨우 , 있을 유: 조금이라도 있다면

是非: 바를 , 아닐 비 : 옳다 그르다 즉, 시비를 뜻함

紛然: 어지로울 , 그러할 연 : 어지럽게 되어지다.

失心: 잃을 , 마음 심:  마음을 잃게 되다

*대의단(大疑團): 큰 의심 덩어리, 즉 선에서는 크게 의심할 수록 크게 깨닫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께달음에 이르기 위해  대의단은 대신심(大信心: 크게 믿는 마음) 대분심(大憤心: 크게 분개하는 마음) 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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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2일차

<二見不住/이견부주/ 견해에 머물지 말고

 愼莫追尋/신막추심/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우리는 항상 옳다는 것에 집착한다.

내가 하는 선택이 항상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최소한의 틀릴 가능성을 염두해 두지만 내가 선택이라는 당위성으로 나의 틀림도 항상 옳다.

진리를 찾는 길에서도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내가 가는 길이 옳다는 것에 집착한다.

내가 알았다. 내가 깨달았다. 나만의 수행 방식이 옳다고 무의식으로 확신에 찬다.

역시 내가 옳다는 *아집(我執) 빠지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길이 옳다는 확신이 들때 가장 망견에 가까울 때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내가 옳다는 생각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가?

 

불용구진(不用求眞)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유수식견(唯須息見)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내가 하는 생각이 망견임을 어찌 아는가.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강할 수록 견해가 틀렸다고 인정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우리는 진화 구조상 틀린 선택은 죽음이라는 댓가를 얻어야 했으므로 항상 최악은 피하려 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극도로 모호성을 불안해 한다.

우리에게 선택은 옳아야 하며, 모호함은 곧 불안이다.

그러나 그런 구조 자체가 바로 망견임을 알아야 한다.

 

이견부주(二見不住) 견해에 머물지 말고

신막추심(愼莫追尋)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이제 다시 진퇴양난이다.

견해에도 머물지 말고, 옳다는 진리를 쫓아가 찾지도 말란다.

어쩌란 말인가?

망견임을 걱정하고, 진리가 아님을 걱정하고, 혹은 진리가 맞다고 확신하고, 내 선택이 옳다고 확신한다.

승찬대사는 다시 그물 하나를 던졌다.

의심과 믿음, 과연 두 견해는 서로 다른 것인가?

의심해야 것인가?

믿어야 것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말에 걸리고야 마는가?

 

 

: 二見:  , 볼 견: 둘로 본다. 즉 양 극단으로 혹은 분별해서 본다.

不住: 아닐 , 머물 주 : 머물지 아니한다.

愼莫: 삼가할 , 없을 막 : 삼가 ~ 말라

追尋: 쫓을 , 찾을 심:  쫓아서 찾다

*아집(我執): 자기 생각이나 의견이 옳다고 믿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고집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굳건히 믿고 밀고 나가는 의지라의 상태라면 아집은 타인의 의견은 배제하고 자기 중심적 사고에 빠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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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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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통합의 그늘 ― 이론과 체험 사이에서

 

윌버의 통합 모델은 참으로 아름답고 정교하다.

처음 접했을 때는 “여기까지 그려낼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먼저 나왔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모델의 빛 만큼이나 그늘 또한 분명히 보게 된다.

 

윌버가 『의식의 스펙트럼』을 것은 1977년,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동서양의 철학, 심리학, 종교, 영성을 하나의 틀로 통합하려 한 이 시도는 지금 보아도 경이롭다.

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스물 셋의 체험으로 모든 것을 말할 있었을까?

그가 말한 무경계의 이론은 깨달음의 경지였을까? 혹시 알음알이는 아니였을까?

48세였던 내가 2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런 의심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의심은 비판이 아닌, 그의 이론과 체험 사이의 간극을 보기 위한 것이다.

 

윌버의 모델은 의식이 점점 넓은 정체성을 포괄해 가는 ‘확장’의 구조를 설명한다.

자아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인류로, 인류에서 우주로. 확장하는 이 흐름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의식을 확장하는 일이라기 보다, 의식이 일어나는 근본 자리를 꿰뚫어 보는 일에 가깝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어진다.

의식의 확장과 깨달음은 같은 것인가?

전자가 내용물을 늘리는 일이라면, 후자는 그 내용물이 나타나는 바탕 자체를 보는 일이다.

방이 커지는 것과 방이 처음 생겨나는 자리’  아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윌버는 아주 훌륭한 지도를 그렸다.

의식이라는 복잡한 지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지도다.

하지만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지도를 아무리 오래 들여다본다 해도 산을 오르는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는 신심명이 말하는 ‘유증내지(唯證乃知)’ , 즉 오직 깨쳐야만 안다 말이 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통합 모델은 관대해 보이지만, 자칫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미묘한 오만으로 기울 수 있다.

실제 삶은 어떤 이론보다 거칠고, 어떤 모델보다 복잡하다.

그래서 신심명은 이렇게 경계한다.

막축유연(莫逐有緣)세간을 좇지도 말고

물주공인(勿住空忍)공함에 머물지도 말라.

 

어떤 체계에도, 어떤 설명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로 읽힌다.

 

2년 전의 나는 <무경계> 를 통해 의식의 스펙트럼, 그리고 대극성에 대한 이론, 마지막 통합의 시도에 감탄했다.

“아, 이렇게 보면 다 하나구나.”

하지만 50세가 넘어 버린 지금은 조금 다르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보려는 시선 또한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진정한 통합은 모든 모델을 존중하되 어느 모델에도 갇히지 않는 자유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 모두 대자유인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하나의 지도일 , 머물곳은 아니다.

누구든 길을 직접 걸어봐야 지도가 맞는지 틀린 지 있지 않을까.

 

내일은 <무경계> 다시 사유하기 여정을 마무리 해야겠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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