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선 유학인가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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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문화 내지 고유의 사상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한국은 고조선 즉 단군조선에서 시작된 문화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태조 이성계가 수립한 조선까지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조선 시대를 생각하면 너무 아득하지 않을까 하나, 사실 한국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농업은 단군조선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우사, 운사, 풍백을 데리고 신시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이미 기상학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그 인식은 바로 농업에 필요한 비와 관련된 것이다. 농업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물은 벼이다. 벼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은 논이고, 논은 언제나 물이 필요하다.

 

물의 이용에서 농업문화가 시작되는 것이고, 벼 외에도 밀이나 각종 곡식도 물하고 관계성이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는 이민족 내지 사냥수렵보다는 농업문화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농업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는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일제강점기 시절, 고종황제가 폐위되면서 조선왕조는 끝이 났다. 게다가 고종의 마지막 종손이 작고하면서 황실 적계는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대한민국의 전신인 대한제국의 역사는 그렇게 사라졌던 것이다.

 

고조선의 시작에서 마지막 조선까지 한국역사의 여정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 도래는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고수하기보단 해체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강만길 교수 외 여러 학자들이 저술한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의 비교>를 읽으면,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 방법에서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은 조선왕조를 신봉하는 국민들의 의식이었다. 왕의 존재가 국가의 시작이 아니라 개인적인 목적이 국가라는 근대주의사상을 주입했다. 여기에 자유주의사항이 도입되고, 자유주의는 반봉건적인 형태로 갔지만, 한편으로 일제통치에 대한 반대여론을 형성했다. 자유란 개인의 권리는 개인에게 있지 조선의 국왕도 조선총독부 총독도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개인주의적 성향인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 사상은 기존 조선이 가진 가치관을 해체하기 좋은 사상이고, 특히 유교문화 중심인 조선에서 가장 먼저 도입될 문화였다. 조선의 유학은 사대부 중심이기도 하나, 그 사대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성립되기 위해선 조선은 농경문화가 계속 유지되어야 했다. 그래서 해방과 전쟁 이후에도 농경사회는 유지되고, 한국의 전통문화가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경제화는 기존 사회를 다른 식으로 변경했다. 농업문화는 시골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그들 대부분은 가족 내지 일가 같은 씨족부락이 제법 많았다.

 

조선시대 유학은 사림의 승리로 끝이 나고, 사림들이 중앙정부를 점령해도, 그들의 기반은 여전히 사림, 농경사회 속에 있었다. 농업을 하는 것은 양민들이고(사대부 내지 일반농민), 그들은 대가족 중심으로 집단노동으로 생산품을 만들어내었다. 20세기 산업화에서 농업이 소나 인간의 노동력보단 기계로 대체하기 시작하고, 생산성 증가만큼 인력의 잉여로 남게 되고, 도심지 및 그 주변이 공업화 내지 도시화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농업이 중심인 조선은 공업이 중심인 한국으로 변했고, 이제는 공업에서 지식정보사회로 흘러가게 되었다.

 

21세기가 도래하면서 세계는 글로벌주의라는 통용을 중시하게 되고, 기존 산업체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지닌 문화콘텐츠가 생산품으로 변모해갔다. 한국의 위기와 기회는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가 1년 동안 판매한 승용차보단 미국 할리우드가 만든 <쥐라기공원>이 훨씬 높은 이익을 창출했다. 물리적 생산품보다 문화적 생산품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문화콘텐츠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했고, 여기에 수많은 서사들이 필요했다. 한국의 서사를 이루어줄 문화적 자본은 여기서 큰 위기를 봉착했다.

 

일제강점기시대와 산업화시대는 전통문화를 해체와 파괴를 기반으로 성립된 사회였고, 21세기에 와도 한국은 서구화가 되어, 기존 한국사회의 기반이 되는 서구화 논리로 문화적 상품을 내놓기에는 부적절했다. 한국에서 만든 문화콘텐츠는 검은머리 서양인들이 나와 서구애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내놓을 뿐이다. 대안은 무엇이고, 새로운 돌파구는 무엇인가? 결국 한국은 과거에 버린 조선의 역사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사극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에 비해 제작도 어렵고, 연기수준도 높기에 제작하기가 쉽지 않다.

 

장소도 제한적이고, 의복 역시 그렇고, 대화체 내지 문화적 배경도 그렇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를 보면, 사극드라마가 정규TV만 아니라 인터넷방송에도 방영되고, 영화관에서 사극 중심소재가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 과거에 버린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로 등장했다. 웹툰 <신과 함께>는 사극중심보다 한국의 신화, 그중에 무속신화를 소개한 것이다. 현대사회에 등장한 무속신들을 이해하려면 다시 조선의 역사를 이해해야 했다. 저승사자 중 강림도령은 포도대장의 휘하 무관이었고, 또 다른 저승사자는 변방의 무관이었다.

 

이민족을 토벌하는 무관이나 혹은 관아에 등장하는 지방수령관의 벼슬은 조선시대의 산물이었다. 조선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의 문화조차 이해하기 조금 힘들지 못할 것이다. 제사문화가 있기에 설날과 추석이 늘 교통지옥이고, 조선시대 음식문화가 내려오기에 김치와 된장이 있다. 제사문화와 음식문화도 남아있는데 다른 문화가 남아있지 않을 리가 없다. 그 문화들이 다시 학문적 영역에서 떠오르고 있고, 일반 대중에게 영화와 드라마, 만화로 등장하고 있다.

 

전통의 단절은 왜 다시 21세기에 재연결로 이어진 것인가?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산업화의 탈근대화 내지 제3국의 가치관을 내세우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학문 영역을 다양성을 연계하는데 일조한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사는 아니나,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잊은 과거를 불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를 부른 이유는 획일화 정형화 규격화가 정답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다양성을 내보이는 것으로 여러 가지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모두가 서구화가 된다면 언젠가 이들의 모습에서는 누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모두가 같은 색을 칠하면 나와 타인의 관계성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한국의 서원이나 향교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현들이 모셔져 있다. 이들의 위패 내지 관련 자료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문물이다. 그런데 지난 중국의 마오쩌둥 시대에 과거의 산물을 모조리 파괴하고 부정하는 바람에 공자의 사상과 문물도 배척했다. 중국에서 한국의 향교에 와서 공자의 위패를 받아가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중국이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는 중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면서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난 중국은 근대화를 통한 과거의 단절에서 오히려 과거로 지향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여러 학자의 책을 보면 과거 유학을 버렸던 이들이 말년에는 오히려 유학으로 돌아서고 있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문화는 경제적 규모가 되고, 국민의 삶이 향상될수록 역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그건 자국의 위상을 올라가면 갈수록 자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 즉 상징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을 보자. 20세기 한국의 뮤지컬에서 한국역사를 기반으로 만든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만든 뮤지컬이 넘쳐나고, 이들은 국내만 아니라 세계 문화상영관에도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왜 조선유학인가>라는 책은 우리가 기존에 잊은 유학을 다시 집어 들어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지 설명한다. 유학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리타분한 것으로 본다. 원래 한국은 한글 훈민정음이 아니라 한자로 기록하고, 한자는 오직 사대부 양반과 일부 천민만 알고 있었다. 조선의 문자문화는 지배계급의 위상을 알리는 수단이다. 문자를 알면서 지식을 알고, 지식을 알면 지식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

 

지배계급의 지식독점은 곧 모든 권력을 독점할 수 있다. 조선의 유학은 공맹의 유학보단 남송의 주자가 만든 성리학을 토대로 시행한다. 공자의 유학은 철학보단 정치학에 더 가까웠다. 정치학과 철학은 연결되어 있더라도 공자는 주자의 성리학과 비교하여 형이상학적이지 못했다. 주자의 성리학은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이때까지 우리가 서양에서 받아들인 서양철학 내지 사상과 유사한 요소도 있었다.

 

이 책에서 중점으로 다룬 내용으로 실학이 있다. 실학은 조선의 지식인이 민중을 무시하고 뜬 구름만 잡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말놀이만 하는 게 아니라 백성에게 도움이 되고 국력의 이익이 될 수 있는 방향성이 있었다. 문제는 그 실학을 연구하던 자들은 중앙정부에서 활약한 관리가 아니라 모두 거기서 떨어진 자들이다. 대표적인 자로 다산 정약용을 보자. 정약용은 1800년 정조가 붕어하자,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각종 수모를 당하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정약용만 아니라 박지원 내지 박제가, 홍대용 등 수많은 실학자는 현실에서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들이 평생 남긴 서적은 당시 현실을 개선하기보단 20세기 한국으로 넘어와 조선의 발견으로 대두되었다. 생각하면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국내 대통령만 아니라 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즐겨 읽은 책이고, 하다못해 식민지시대 일본학자가 다산을 두고 조선의 영광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다산이 살던 조선은 다산이 박해받던 세상이다. 자신이 연구한 서적을 1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다산이 이제 20세기에는 조선의 대표학자가 되었고, 21세기에는 세계 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유학을 연구한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구는 유학이 아닌 기독교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천주교회사를 연구하면 서구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톨릭이 외국에서는 각종 박해와 전쟁 등 무력충돌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고, 가톨릭에서 기독교의 메시아주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종교가치관이 되었다고 하면, 조선의 가톨릭은 이와 다르다. 조선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가톨릭이 유입되고, 학문으로써 가톨릭이 어느새 종교로 바뀌게 되었다. 가톨릭이 서구에서 피지배계급의 메시아주의 관념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갔다면, 한국은 사대부 비주류권에서 학문의 영역에서 민중의 메시아주의 관념으로 변해갔다.

 

조선의 학문은 한자를 이해해야 했고, 조선에 없던 천주교를 이해하려면 맨 처음 성호 이익의<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을 읽었고, 그 뒤로 북경에 오가면서 얻은 책으로 연구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광암 이벽이나 만천 이승훈은 신부가 없던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한국천주교회를 만들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자발적으로 가톨릭이 열린 곳은 없었다. 하지만 마테오 리치는 가톨릭의 God을 동양사상의 하느님인 옥황상제 내지 천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가톨릭을 전파했다.

 

가톨릭의 전파는 서구종교이고, 동양문화인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새로운 문물의 유입이다. 여기서 뜨거운 감자로 오른 인물은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책에서 거론한 것처럼 한국 최초 순교자 윤지충의 외사촌이었고, 정약종의 친동생이었다. 윤지충과 그의 동생 윤지헌, 정약종과 그의 딸들은 한국만이 아니라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천주교 성인들이다. 21세기에 와도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했는지 아니면 마지막까지 마음에 두고 그것을 속였는지에 대한 문제점이 남아있다. 우연히 알게 된 천주교 쪽 사람과 책에서는 다산은 배교한척만 했다고 하고, 강진 다산초당을 천주교회사에서 유적지로 삼았다.

 

한국의 유교에서 다산 정약용은 성리학자이면서도 성리학 이외에 실학을 토대로 공맹의 원시유학을 넘어가고, 민중의 문화에 관심을 두었고, 서양과학 및 문물을 위해 서학을 배운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은 현대 한국 지식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가 천주교를 배교하지 않았다면 천주교회사는 엄청난 성과로 볼 수 있고, 서양의 유학연구자들은 한국의 전통사상종착지인 다산이 결국 유학이 아닌 서구의 학문으로 종점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조선의 유학에서 이 논쟁은 아직 그치지 않은 모양이다. 이 이야기들은 외국 유학 세미나에서 나온 논쟁이라 하니 말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국가였고, 사대부에 의해 망한 국가였다. 사대부 중에 비주류가 가려졌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학문적 성과이다. 그 성과가 이제 한국역사 교육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주류이다. 200년 전 정조가 죽을 때 순조의 외척인 김조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에 의해 그나마 정약용 일파마저 숙청되었다. 특히 정순왕후는 천주교회사에서 지울 수 없는 신유사옥을 일으킨 공작정치가이다.

 

신유사옥은 천주교를 이용하여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정치라도, 천주교 입장에서는 신앙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은 정약용의 철학을 연구하면서 왜 남인이 천주교가 많은지 그들의 학문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왜 조선유학인가>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다. 천주교에 대한 최초 연구는 성호 이익이 했다. 성호 이익은 남인의 정신적 지주이며, 성호 이익은 다산 정약용의 외가 조상과 친우 관계를 수 백 년 넘게 유지했다. 이익 선생이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다소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익의 후예 사대부들이 그것을 토대로 천주교회사를 만들었다.

 

서학이 남인 지식인들이 만든 실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나, 그 모든 것은 아니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끝까지 믿었다면 그의 모든 성과는 천주교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학의 관점과 천주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탐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산이 유배를 갔던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 일원에 사는 주민들의 반응을 보면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다산에 대해 연구한 다양한 도서에 당시 교황청은 다른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고유문화를 존중했으나, 교황의 교체 및 정치적 성향이 개편되면서 동양의 국가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선비가 어머니의 신주를 불살랐고,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사촌과 더불어 참수되었다. 피로 얼룩진 천주교회사고, 그의 선혈은 전주에 위치한 전동성당의 터가 되었다. 지금의 전동성당을 가면 전주 한옥마을과 연계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순교자의 한이 어느새 한국의 대표관광지로 바뀐 것이다. 성리학과 천주교의 마찰에서 근대문물의 유입과 전통의 갈등에서 전통의 승리로 끝나고, 조선의 멸망과 산업화로 전통이 패배했다.

 

이제는 다시 전통의 세계가 문화콘텐츠와 관광사업이 되었다. 전주에 가면 오래된 향교에서 전통결혼식을 올리는 커플도 있다. 향교와 전통혼례는 유교문화의 흔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양한 관광 상품이 되었다. 게다가 진동성당 근처에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는 곳이다. 조선의 역사가 담긴 곳 역시 유교문화이나, 또 다른 관광장소이다. 전주한옥과 전주한복이 유명을 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한복을 개량하여 입고 다니는 젊은 여성분들도 많다. 한복은 유교문화의 복식이다. 물론 100% 복원한 것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전통문화 그것도 유교문화가 다시 회귀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유교 그중에 성리학이 가진 문제는 심각했다. 공자는 사대부는 백성을 위해 존재하나, 그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생활에 문제없이 살 수 있도록 행정적인 제도를 개선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 주류세력은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백성의 농지 수탈하고, 군역을 빠졌으며, 세금조차 내지 않았다. 성리학은 공자의 유학을 보강했지만, 공자의 유학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저자도 주자의 성리학에 대한 경구 하나에 이론을 다르게 봐도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백호 윤휴의 이름을 거론했다.

 

유학이란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것은 학문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져 할 가치이다. 학문은 다양한 가치와 사람과 소통해야 하나, 조선의 성리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 왜곡되어 갔다. 지배주류세력을 위한 맞춤형 유교가 된 것이다. 흔히 붕당정치하면 자주 등장하는 세력이 노론과 남인, 소론, 북인 등이다. 천주교가 남인과 같이 어울리게 된 동기는 남인의 학문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주리론, 즉 이()에 중점을 두었다. 노론은 기()에 중점을 둔 점에서 다르게 간 것도 있지만, 남인의 주리론은 기에 의해 이는 변동되어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으니 이에 대한 완비 내지 반성이 필요하다고 봤다.

 

즉 인간은 절대적 가치인 이에 대하여 지켜야 하나, 기에 의해 변동되어 그게 왜곡될 수 있으니 언제나 마음을 수양하고 몸은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원죄의식을 강조하는 것까지는 아니나, 원죄의식을 가진 기독교사상에서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점에서 유사하다. 서학과 유학은 다르지만, 동서에 살고 있는 많은 인간들이 가진 다양한 가치관 중에 서로 일치하거나 맥락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리학이 어렵지만, 현대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나 우리가 알 수 있는 서양철학 내지 사상과 비교하여 큰 벽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석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받아들이기가 다소 어려울지 몰라도, 거기에서 주장하는 세상의 이치나, 삶의 자세에서는 비슷한 맥락이 존재했다.

 

조선건국 초기 성리학이 지배되던 유교국가에서 처음에 여성에 대한 정책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재산분배가 공평되게 아들과 딸에게 갔고, 재혼도 되었던 모양이다. 전쟁을 걸치며 열녀문이 새기야 가정의 영광이 되었고, 청나라에 끌려간 환향녀가 지금의 화냥년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열녀문이 세워지려면 청산과부가 자살을 해야 하고, 환향녀들은 억울하게 청나라에 끌려가 겨우 고향에 돌아온 여성이다. 이들이 겪은 고통은 이뤄 말할 수 없다. 이런 잘못된 여성관 그리고 주자의 성리학에 토씨 하나 달지 못하는 학문의 자율성이 없어지면서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 성리학이 조선의 성리학으로 종점부를 찍은 것이다. 그러면 누가 봐도 유학인 성리학을 좋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위대한 유학자인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의 호를 딴 연구소들이 대학에 설립될 정도로 업적을 유지된다. 유학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유학자들의 연구하는 학문기관은 여기저기 있다. 유학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돌려 다르게 볼 것인가? 한국인 정체성은 위협받지 않을 시기가 없었다. 조선 개국부터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침략,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거대한 조류에서 한국인은 오늘을 살고 있다.

 

내가 다시 찾아보는 유학은 예절을 중요했지만, 예절을 떠나 서로간의 의견을 존중하고 학문의 자율성을 존중했다. 율곡 이이는 자신보다 대선배인 퇴계 이황과 편지로 논쟁을 했고, 고전을 읽고 거기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구성하여 학문을 발달해왔다. 유교경전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고, 어떻게 내가 살아가면 좋을까를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유교경전은 과거시험을 볼 때 필요한 문제지 수준을 변한 것이다. 현대사회에도 학문은 다양한 관점과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 논지는 500년 한국 성리학이 최고인 시기와 비교해도 그 시선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끔 보면 이 못난 성리학의 폐단은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유학자들은 본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학문은 다양성을 연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소통이 되어야 새로운 학문을 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보다 처지가 아래인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조한다. 밑에 있거나 혹은 다른 생각이 가진 사람이 말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바른 말을 하든 혹은 그렇지 않은 말을 하든지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돌아오는 말은 항상 같다. “어린놈이 버릇없네.”

 

최근 유행하는 단어 중에 답정너라는 것이 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 권위의식적인 가치관은 이미 조선 성리학의 모순에서 시작된 병폐이다. 조선의 유학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은 아니다.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의 시작점까지 찾아간다. 조선유학이 답인 것도 아니고, 배척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다시 화두로 올라오는 전통문화 담론에서 조선유학을 반드시 우리가 생각해야할 문화적 유산이다. 유산은 좋은 것만 오는 게 아니다.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빚도 찾아온다.

 

현대는 과거로부터 쌓여진 시간의 축척물이다. 조선의 유학이 그 축척물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이다. 대한민국 역사는 상해임시정부를 기준으로 100년이 되어가지만, 조선왕조는 이미 600년을 가졌다. 600년이 가진 역사가 현대사회 한국인에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겉모습은 바뀌어도 심연의 세계에는 여전히 조선시대의 산물이 남아있다. 하다못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이 한글로 되어 있어도 한자어로 되어 있고, 그 이름이 조선시대 사람들과 비교해도 비슷하다. 앞으로 한국인들이 살아가도 과거에 존재한 조선이란 존재에서 강제로 벗어날 수 없다. 책제목처럼 <왜 조선유학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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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11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역사에서 벼농사는 석탈해 집단이 대두하면서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벼농사 기술이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단군신화에서 벼농사에 대한 해석은 개인적으로 처음 봅니다만..

석탈해 집단은 동남아 이주민으로 보는 설이 국사학계의 다수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음....한형조 교수가 쓰신 책이군요. 이 분이 쓰신 책들은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죠. 밀도 높은 리뷰 잘봤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6-11 22:39   좋아요 0 | URL
단군신화와 관련된 논문에서 곰족은 수렵부족이고, 그리고 마늘은 항생제 및 살균작용이 있어 야생에서 수렵한 곰족에게 소화기관 및 각종 내성을 키우는 능력이고, 쑥은 부인병에 좋은 약초이죠.
단군신화에서 환웅의 신화가 곧 농경문화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저는 봅니다. 단지 벼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바는. 제가 2년 전에 815 광복절날에 서울에 있었습니다. 서울에 단군성전이 있는 곳에 갔습니다(규모가 너무 적어서 참으로 슬픈).
거기 가니 관리인이 책을 주는데, 떡국을 먹는 풍습과 각종 전통문화가 단군조선 때부터 시작했다는 글을 보았죠.
그 유입물은 4년 전 개천절 행사 유입물이었던 것이죠. 떡을 만드는데 곡식이 필요하나 주재료는 쌀인 점과

신문기사에서 이미 5천년 전 고양 일원에서 쌀농사가 있었다는 기사도 있네요.

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5294

이게 다 고고학에 대한 분석기술이 늘어남에 따른 고증이 아닌가 합니다. 한형조 교수님의 동서를 막론한 지식과 역사적 관점 그리고 엄청난 분석력에 깜놀했습니다. 대신 뒤부분에 신해사옥이 1791년인데 1795년 오타가 보여, 문학동네에 인터넷메일로 제보했으나 모르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