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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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감시와 처벌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엇부터 생각해야 할까? 일단 감시라는 것은 주변에 있는 어떠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일거수 일투족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계속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심지어 사적인 영역까지 지켜보든 하나의 개인 인권 침해 개념으로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감시가 어느덧 하나의 당연성과 더불어 인간사회에 살아가는데 오히려 너무 밀접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감시라는 사회적 구조가 하나의 특별한 정치적 권력에서 그 권력의 압박이 생활의 일부분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감시로 통해 결정되어지는 각종 처벌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미셀 푸코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은 바로 그런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적은 도서이다. 이전부터 구조주의학자 중에서 항상 나오는 미셀 푸코는 기존의 권력체계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고, 인간에 대한 인권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진 인물이다. 게다가 계보학적인 학문영역으로 통해 정치사회적인 활동까지 주저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

 

그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은 무엇을 고발하려고 하는 것일까? 솔직히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의 이야기보다는 중세유럽과 근대유럽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현재의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이전에 있었던 과거로 찾아가서 지금까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먼저 감시와 처벌에서는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른바 신체처벌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의 죽음은 참 쉽고도 어려운 이야기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상당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큰 부담감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은 말을 하는 동물이기에 단순히 그 고통을 몸짓과 비명 소리가 아니더라도 언어로 통해 전파할 수 있다. 따라서 죽어가는 수형자의 죽음과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강한 자극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 책 제1장 수형자의 신체에서 다미엥이란 한 병사가 루이 15세를 살인시도가 실패하여 사형을 선고받는다. 문제는 인간을 죽이는 그 자체는 보통 인간의 식견으로 매우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기 때문에 어려우나, 그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하다는 점이다. 일단 다미엥이란 사람에 대한 죽음을 열거하기 전에 대표적인 사형이 인간의 목을 베는 참수형이 있고, 참수형도 단두대에서 하는지, 도끼로 하는지 칼로 하는지 작두로 하는지가 있고, 인간 절단에서 요참형이나 또는 사지를 찢어 버리는 능지처참도 있다.

 

그것만 있는가? 끓은 기름이나 물에 넣거나 불에 산채로 태우거나 짐승 밥으로 만들거나 수장시키거나 전기고문하거나 총살하거나 머리를 박살내거나 교사시키거나 약을 먹이거나 너무 많은 사형방법이 있다. 그래서 사형은 어찌 보면 자신이 죽는다는 하나로 고통스럽고 끔찍할 수 있으나, 과거 고문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를 참고하면 사형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하나의 특권까지 주게 되었다.

 

가령 마녀사냥을 기록한 사료에는 피가 흥건한 지하바닥, 주변에 인간의 눈과 팔에서 떨어진 손, 다리에서 떨어진 발, 고문에 지치지 못해 차라리 화형대 위에서 불타 죽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잔혹한 고문을 받는 사람 속에 인간이란 죽음이 쉽고도 어려우며, 한편으로 죽음이 불행한 저주이면서도 행복한 마무리라는 엇갈림을 볼 수 있다.

 

그런 사형과 고문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형자 입장에서는 죽음이 어차피 결정된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죽는 편이 행복할 줄도 모른다. 죽음의 고통보다는 죽음 이전의 고문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다미엥의 사형 이전의 고문행위는 참혹하다.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 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 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 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처형 과정이 너무나도 상세하고 잔혹하며 하다못해 편하게 죽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단순히 도보수의 칼에 목을 베어 효시하는 처형법이 아닌 최대한 고통을 주어 그에게 하나의 권력으로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권력자의 권력에 대항하고 거슬린 대가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주는 것이다. 처형자는 임금을 죽이려한 범인이므로 그는 고문당하는 순간에 임금이 된다. 즉 임금이란 신체에 가해자란 사실만큼 임금에 걸맞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전의 공개적인 처형 집행은 많은 군중들에게 구경거리와 동시에 국왕의 권력을 상기시켜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비추어진다. 처벌의 기능은 곧 군중들에게 권력기관에게 대항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교육이다. 처벌로 통해 나도 역시 저런 비참한 최후를 당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권력에 복종하게 만드는 매우 강력한 조치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강력한 고문과 사형을 당하는 범죄자의 특징은 권력자들에 대한 반항이 가까웠다. 아니라면 사회구조적인 부분이었다. 어느 도적의 죽음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야유와 욕을 얻어먹겠지만, 그가 죽기 전에 하는 연설은 오히려 그를 영웅으로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해서 되기보다는 사회의 왜곡이나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군중들은 모두 범죄자에게 큰 분노보다는 거기에 있는 사형집행자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죽음의 왕관을 쓴 자가 군중에게 하나의 신화의 영웅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공개적인 처형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군중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는 인물이 특수한 목적의식보다는 사회구조적인 부분에 의해 죽어간다면 그는 군중들에게 큰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죽이거나 고문하는 것을 점차 공개적인 영역에서 비공개로 변경되고, 얼굴을 알리기보다는 두건을 씌우고, 사형은 점차 광장이 아니라 교도소 내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이런 처형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았다. 처벌은 반드시 인간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면 되는 것이었다. 가령 우리 현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처벌기능을 하는 공간이라면 어떨까? 아니 처벌보다는 감시가 당연시 되는 것이 어떨까?

 

처벌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무색하나 인간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감시받고 자신의 개인성을 무시당하고 억지로 개조되는 것 자체가 처벌일 수도 있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다보면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 감시를 받는다. 학교와 공장, 병원, 군대, 직장 등에 말이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기관이다. 아니 인간에게 분리될 경우 많은 문제가 따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당연함을 가지므로 인간은 곧 감시체제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학교를 다닐 적에 교복을 입고, 두발과 복장이 일정해야 하며, 일정한 시간이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교육을 받는다. 또한 일정한 교육과 동시에 시험이 치르고, 시험이 끝나면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받는다. 모두 우리는 당연한 사회적 관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감시의 방법이고, 감시 속에서 상벌의 규정은 처벌로 연결된다. 이미 학교부터 감시라는 체계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군대와 직장까지 가면 그런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에는 이런 기능을 권력에 대한 하나의 운영방법으로 설명한다. 특히 종교기관과 학교, 소년원, 감옥, 군대는 이 기능을 탁월하게 진행하는 방법이었다. 절대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면 페널티로 통한 처벌, 그 후에 교정으로 통해 국가조직에 대항하는 것보단 순종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냈다.

 

더욱 난해한 부분은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는 종교기관이 오히려 속박을 강요하는 수단이었다. 모든 것을 억누르고 강제적으로 실행하게 하고, 특히 시간의 정확한 패턴을 짜서 인간들을 거기에 맞추는 것은 인간 그 자체를 수동적인 존재로 변화시킨다. 소년원이나 감옥은 수시로 감시하게 하여 이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여부에 따라 생활에 영향을 주어 따르지 않게 금 만든다.

 

인간이 마치 인간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인간이 기계와 기구와 같이 하나의 조작도구로 변화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구조로 변화되면서 프랑스에서 일어난 범죄는 참혹하게 죽어가는 다미엥같은 사람보다는 경제적인 영역에 더 가까워진다. 가령 일상생활에 필요한 빵과 의복과 같은 필수품이나, 공장에서 나오는 각종 상품들이다. 이런 일반 사람들이 쉽게 접목하는 물품에 대한 절도나 강도는 다미엥과 같은 처벌보다는 어느 일정한 곳에 교정을 받아야 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문제는 그런 도구로 되어가는 인간이 그곳만 존재하는 것이 사회 전반적으로 흘러간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만큼 일해야 하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월급이 삭감되거나 쫓겨난다. 감시라는 체계가 어느덧 대부분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그것이 처벌까지 이어질 경우 생존영역에 큰 위기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감시와 처벌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죽어가는 다미엥을 비롯한 그 밖의 인물들이 대다수의 군중들에게 많은 교육을 전달해주는 도구로 되겠으나, 점차 그 들이 군중들을 집결할 수 있는 힘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자들을 점차 은밀하게 다루거나 은밀하게 다루는 것에 넘어 모두 개인화하여 범죄자가 감시자와 일대일이란 느낌을 수시로 받게 해야 하고, 감시자는 범죄자를 격리하는 것처럼 보여 이들을 속박하게 만든다. 모든 것에는 교정행위에 대한 효율성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나, 프랑스 근대역사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경제난과 더불어 고용주와 국가기관의 횡포에 불만을 터뜨린다.

 

그렇다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집단적인 조직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집단을 분리하고 나누어 개인화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또한 이들 개인마다 감시할 수 있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면 이들의 현재 상태를 계속 주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말한 여러 기관으로 통해 이들을 계속 교육을 시킨다면 그것은 권력을 체계적으로 하위조직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헤게모니적인 정치적인 구속현상은 바로 이런 조직화된 국가기관 내지 교육기관, 종교기관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지식이란 것은 하나의 권력으로서 인간들을 조직하므로 각 권력에 알맞은 지식전문가들이 나온다. 이들의 세분화는 권력의 감시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또한 그 감시자의 임무를 맡은 사람마저 감시를 받게 된다. 파놉티콘이란 일망감시체계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일망감시자가 가장 먼저 처벌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감시와 처벌은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분명 중세유럽과 근대유럽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나 저자인 미셀 푸코가 프랑스인이란 점에서 프랑스 역사에 대해 주로 기술한다. 하지만 이런 기술들은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조직과 단체에 늘 속한다. 하지만 거기에 있으면서 어느 기관의 사람에 의해 항상 통제되고 감시를 받는다. 그것 자체로 하여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지 않겠으나, 그것에 의해 정신이나 신체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 내지 큰 조직에 의한 하나의 헤게모니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회적인 관념과 행동이 필요하나 그것 자체가 하나의 도구로 전략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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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 - 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의 본질을 비판하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
문재인.김인회 지음 / 오월의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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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사상가 한 분 이름이 떠오른다. 그 분의 이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정약용 선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인물로서 한국 근현대사 이전의 철학사에서 모든 철학은 다산학으로 마무리될 정도로 그 분의 철학은 이미 그 깊이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정약용 선생의 깊은 철학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 분의 행적과 자취를 생각하면 깊은 존경심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정약용 선생 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은 그 분이 정치인이면서도 사상가, 철학자, 과학자, 의학자 그리고 뛰어난 법학자란 사실이다. 예전에 다산연구소에서 왕성하게 연구하고 계시는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님 박석무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라는 책을 읽어보면서 나는 내 인생의 스승은 다산 정악용으로 신념을 두었다. 물론 그분의 위대하고 진지하고 깊은 세계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작은 존재이나, 적어도 그 분이 행한 업적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산 정약용이 다산을 쓰기 전에 사암이란 호를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붕당정치로 인해 곡산이라는 작은 마을의 목민관으로 부임한다. 그가 곡사부사가 업무를 맡을 적에 어느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이계심의 난이라고 하여, 이계심이란 농민이 관아에 무리 천 명 정도 데리고 가서 항의하던 사건이었다. 당시 원님에게 물러가라고 했을 정도이니 반정부 시위였으며, 정치적으로 신분이 엄격한 조선시기라면 당장 반역죄로 극단적인 형벌을 받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계심이란 인물이 정약용이 부임하던 그 길에 홀연히 나타나 다산에게 자신들이 처한 억울한 10가지 계목을 요목조목 설명하였다. 다산은 그의 말을 듣자 그를 오라로 묻기는커녕 자신과 같이 따라가자고 했다. 모두들 저 반역 죄인을 잡아 당장 치조를 하자고 원을 했으나, 다산은 딱 말을 잘랐다. 다산은 오히려 “백성의 고통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가 없다.”라고 했다.


과연 곡산부사로 오면서 자신의 마을에 얼마나 많은 폐단과 부정이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부당한 농민과 가난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원통함을 당해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억울하고 눈물 나는 일이다. 이계심의 사건처럼 얼마나 많은 일들이 그 당시 조선 민중을 핍박했을까? 특히 군포와 같이 병역 대신 세금을 거두는 행위는 가렴주구 한 조선의 관료들은 백골징포와 황구첨정과 같이 시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군적에 올리고, 아직 배냇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까지 군적에 올렸다.


게다가 중간에서 관리가 횡령하고, 군수가 횡령하고, 중간에서 감찰하는 중앙관료까지 횡령했으니 나라에 세금이 오지 않고,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그런 원통함 사연을 오로지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는 암행어사였다. 물론 다산은 암행어사로도 활약했다. 그는 왕족과 고위정치가들의 친인척을 비롯해 주변 가까운 사람까지 고발하였다. 법의 적용은 제일 권력이 높은 사람부터 해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의 법적인 태도는 이계심 사건만이 아니다. 함봉련 사건이라 하여 함봉련이 시비가 붙어 나무꼬챙이를 상대편에 찌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상대방 항문을 찔러 죽었다는 이유로 큰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다산은 당시 함봉련 수사를 하면서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수사로 통해 함봉련을 무죄 방면하였다. 운이 없었다면 그는 참수당하여 효시될 운명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정약용의 법철학은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연구했다.


권력을 지닌 무소불위 대신에게 오히려 죄를 물었으며, 그 원한을 사게 되어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 사건 때 장기현과 강진군으로 유배로 갔다. 그때 다산은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민중들과 농민들을 울고 가슴이 찢게 하는지 다시 보게 된다. 강진군에 유배오고 나서 형제친구들은 모두 사지가 찢어지고, 가족들은 생이별하게 된 그 비극의 갈림길에서 다시 또 비극을 보았다.


당시 어느 농부가 군포세를 내지 못해 집안의 소 한 마리를 관아에서 강제로 끌고 갔는데, 그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남근을 칼로 잘라내었다. 민에서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너도 나도 사람인데 왜 가난하고 힘 없는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까? 갈밭마을 아낙네는 고통에 사무치면 비명을 지르는 남편의 남근을 붙잡고 관아에 달려갔다.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아 피가 손에 철철 넘치는 상태로 말이다.


그러나 관아에 가면 무엇을 하리, 포졸은 관아 문에서 아낙네를 내치고 관아 내의 사또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 아낙네는 그대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아픈 이야기를 실감하면서 나온 시가 바로 애절양(哀絶陽)이란 시조이다. 한국 조선 국문학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시조이겠으나, 당시 이 시조를 짓던 다산의 마음은 피가 거꾸로 흘렀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는 그의 원통함이 말이다.


따라서 법이란 중요한 것이며, 법은 모두 사람에게 공평해야 한다. 특히 힘 없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특히 신중해야한다. 다산 정약용의 서적 중에 목민심서를 보면 형전육조가 있으며, 거기에 더해 흠흠신서라는 전문적인 형법을 연구한 도서도 있다. 그만큼 법이란 무서운 것이다. 법은 어느 한 개인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하고,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멀리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귀양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치적 음모나 억울한 사연으로 많이 끌려간다.


그렇게 가는 것도 억울한데, 그들에게 대해주는 동네주민들 역시 각박하다. 당장 와도 잘 곳을 걱정하고 끼니도 걱정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해주지 않아 외롭고 쓸쓸하다.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억울하게 형을 살아가는 존재의 설움이다. 그런 것은 다산이 살아있을 때와 죽고 나서 지금 2012년 대한민국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이다.


왜 권력을 해체하고, 왜 권력을 분산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 즉 인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이란 도서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으나, 사실 변호사 자체가 인간의 권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변호사 자체가 인권을 위해 일하여 하나 오히려 인권변호사란 칭호가 나왔으니 얼마나 그 많고 많은 억울함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갔을까?


이 책의 말머리에서 그런 억울한 사연과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그 현상을 이 책에서 고발하고, 그것에 대한 대처방안을 강구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힘없는 국민들이 피해를 받으며, 그 사람들은 공포와 좌절감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역시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검찰이란 단체를 어떻게 우리가 파악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결국 민주주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 사법고시 합격 후에 판검사가 되면 키가 2개가 따라 온다고 말이다. 하나는 아파트 열쇠고, 하나는 고급승용차 열쇠라는 것이다. 검사는 5급 사무관으로 임용되나 권한은 3급 부이사관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게다가 특수조직에 엘리트이며,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통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검사라는 말만 들어도 억장이 무너지고, 앞이 안보일 정도로 무섭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바로 검찰이란 점이다. 한국 검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각종 고문과 불법심문 그리고 비윤리적인 행위들을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더욱 확장하기 위해 이른바 마녀사냥 행위를 저지른다. 특히 공안정국이나 독재정치 시에는 법의 중립성을 지키기보다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이제는 오히려 그 권력의 중심까지 올라가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


권력은 분산되어 각각 영향을 받지 않으면 독재로 이어진다는 것은 마키아 밸리라는 군주론 저자도 말했다. 권력이 집중되면 더 이상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먹은 행동을 하면 누구도 관여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현된다. 이번에 보이는 고급승용차, 외제 명품, 현금 수수 등의 일이 터져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 심지어 음주운전으로 인해 경찰에게 단속되어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간다. 만약 음주운전으로 인해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법을 심판하고 관장하는 이들이 법을 무시하고 법을 농락하면 누가 피해를 보는 것일까? 한국 사회는 이런 권력의 집중화가 결국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한다. 사실 보수와 진보를 논하는 희귀한 정치이데올로기에서 보수적인 자유주의정치는 권력이 국민들을 통제하면 안되는 원리를 가진다. 즉 자유라는 것은 국가에서 관여하지 않는데, 한국에서는 그 보수의 자유주의 원리조차도 지키지 않는다. 어떻게 본다면 20C 초중반에 세계적으로 대세인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다.


검사조직은 일본에서 그대로 담습 했으며, 일본에서는 독립군을 죽이고, 조선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법을 강제적으로 집행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가만히 있어야 했고, 죄를 짓지 않아도 목에 올가미를 뒤집어 씌웠다. 이른바 권위주의적 엘리트적인 검사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건과 마찰이 있었는가? 그런 부분에 대해 이 책에서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결국 필자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 중심으로 화두를 던진 그런 문제들이 계속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상당히 계보학적으로 작성되었다. 서문에서 보이던 철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학자의 글을 보고 사유하고 철학적으로 법을 접근하려고 했다. 철학적으로 접근한 미셀 푸코라는 프랑스 구조주의학자 및 그 외 다양한 학자들을 사상과 철학을 접해 가면서 이 서적은 단순히 정치사회도서를 지나 정치사상에 대한 법철학 도서까지 올리려 했다. 그런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위해 문재인, 김인회 검찰을 생각한다는 정말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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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2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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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 것은 정말 쉽게 생각하고도 어려운 분야이다. 그것은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같이 살아가야 할 존재이고, 게다가 그 존재들이 모인 단체, 조직, 사회, 국가, 연합 등 다양하고 크고 작은 그룹 조직이 있기에 인간의 정치적인 영역은 널리 뻗어 나간다. 그러나 그 정치적인 영역은 단순히 정치라는 것에 이끌려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인자에 의해 변화한다.

 

심지어 신대륙 발견, 천동설에서 지동설, 종의 기원, 무의식의 발견, 컴퓨터와 자동차, 컴퓨터와 핸드폰 이 많고 많은 것이 정치라는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정치에 대해 막상 논하면 많은 문제와 벽에 걸린다. 그 정치라는 것은 언제나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로 보이는가 라는 다양한 의문들이 터져 나온다.

 

정치적으로 일단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보자.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자유주의 공화국이다. 즉 국민들이 주권을 가지고, 평화롭게 자신의 의지와 권리를 가지고 살 천부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화제 정치를 택하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과 시민이다. 공화주의 국가에서 국민과 시민은 전쟁으로 인해 목숨과 재산에 위협 받으면 안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 세계에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란 단순히 나와 내 옆, 혹은 우리 지역과 다른 지역, 또는 국가와 국가라는 대등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내라는 존재가 다른 지역과 다른 국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개인의 존재가 사회구조적, 세계추세에 영향을 받으므로 정치라는 것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 그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있을 것이나, 이제는 개인이 죽더라도 정치적인 담론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고대 그리스 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은지가 2,500년 가까이 되어도 그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계속 가속화되어 철학의 기원으로 살아간다. 인간에게 정치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인간의 정치적인 영향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내가 태어나는 위치와 공간, 부족과 토질, 국가적 상황과 지역적인 현황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지도 않고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사항에서 결정된다. 인간은 어떻게 보자면 결정적인 삶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 운명의 고리에 태어난 인간이 이미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치적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가?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인간이 정치적인 여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은 문명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찾아가지 못하거나 발견하지 못한 곳에 살아가는 원시부족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소수민족에 부족단위로 생활하며, 수렵과 채취로 통해 계급의식이나 신분도 만들지도 않은 채 그저 벌거숭이처럼 살아가는 자연 그 자체 말이다.

 

사실 정치는 문명과 사회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정치의 시작으로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치는 삶의 곳곳에 살아 숨 쉰다. 심지어 국가적 의결사항이 아니라 지역자치단체, 회사, 동호회, 가족 단위의 소단위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경험으로서 아동기부터 배우는 것이고,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교과과목으로 사회, 윤리, 도덕 등의 수업을 듣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과목들은 정치적인 부분이 분명 연결되어 있으나, 그 진실한 가치와 진리를 알려주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사회과학에 대한 전반은 모두 인간존재에 대한 인격형성이 아닌 수험과 성적으로 연계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누가 어느 철학과 사상을 논할 뿐이지 그것이 왜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없다. 물론 가르쳐도 중요하지 않은 분야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쉽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 본인이 서평하고 있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이란 도서는 상당히 좋은 책이다. 솔직히 정치학은 어렵다. 더구나 정치 뒷면에 가려진 철학과 사상을 알아가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의 뿌리가 되던 철학과 사상에 대한 기원들을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 즉 폴리스의 민주주의부터 시작하자고 하자. 그리고 당시 탁월한 논쟁자여 인간 이상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예로 보자.

 

사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 다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인 업적과 연구만 해도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갈 것이다. 게다가 매우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인 관념을 우리가 알아가야 할 것이다. 철학과 사상에 대하여 현대부터 들어가도 결국 그것에 대한 기본 과제는 고대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다고 하여 정치사상에 대해 알고 싶어 조금 다가가려 해도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어렵다면 정치사상의 본래 취지인 인간에 대한 배려는 오히려 배려가 아닌 배타로 넘어갈 위험이 높다. 하지만 정치사상이 너무 쉽게 간결하고 지나가는 전봇대와 같다면 그것 또한 문제일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가에 널린 전봇대 수보다 많다고 하여 그 인간 개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인격체란 의미이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통용되던 정치사상과 철학, 게다가 학교수업에서 배우는 윤리, 도덕, 사회 등에서 나오는 많은 학자들에 대한 소개와 대표적인 사상을 알기 쉽게 알려준다. 알려주는 부분은 철학자 한 명당 적으면 3~4페이지에서 많으면 10페이지 가까이 되지만, 그 부분으로 통해 어느 누가 있었고 어느 누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또한 우리가 생각하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방향키를 제시해준다.

 

정치가 철학과 붙어있었으나 그것을 최초로 분리하게 하여 정치가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게 한 군주론의 마키아 밸리부터 토대로, 독일 관념철학의 창시자 칸트, 변증법의 헤겔, 노동자의 대변자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유의 기초를 다진 존 스튜어트 밀, 인간 기존 윤리라는 착각을 비판한 니체, 군중심리와 대중문화를 비판한 프랑크푸르트학파 학자, 20C 새로운 철학자 중의 영미철학자 존 롤즈, 하버머스, 구조주의의 미셀 푸코 등 수 많은 학자들을 어떤 정치적인 테제로 통해 분리했고, 그들이 전개한 논리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 철학자들의 사상과 정치적 사유를 단 몇 페이지에 기록했다고 하여 우습게 생각하지 말 것이다. 실제 그들이 저술한 도서를 읽는 순간 그들이 사유하고 정리한 철학적, 사상적인 전개를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에 대한 얼마나 깊은 통찰과 사회에 대한 깊은 고찰로서 이루어진 인류의 보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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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8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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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을 전에 읽어보았다. 그런 다음에 그의 유명한 저서 중에 하나인 꿈의 해석을 오늘까지 읽어 보았다. 프로이트라고 한다면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매우 친숙하고 유명한 인물이다. 심리학이라든지 혹은 정신분석학이라든지 말이다. 그런 프로이트에 대해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어도 막상 그가 무슨 생각으로 책을 저술하고 거기에 담론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보려고 하지는 않은듯 하다.

 

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내지 심리학 영역은 솔직히 말하여 어려운 분야이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도 알기 어려운데, 거기에 타인에 대해 알려고 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무의식적인 행동은 감지할 수 없을지 몰라도, 타인에 대한 무의식적 행동들은 얼마든지 관찰하고 엿보고 생각하여 재현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을 아는 것에 있어서 언제나 의식이 있는 이성적인 존재도 중요하다면 이성의 영역에서 벗어난 무의식 세계 역시 중요하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은 바로 이런 인간의 이성 체계에서 벗어난 무의식 세계에서 인간을 알려고 했다. 정신분석은 결국 인간의 이성을 분석하기보다는 인간의 이성보다 깊은 심연에 존재한 근원에 다가가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에 혹은 타인들과 세계에 접촉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일이나 혹은 바라지 않은 일들까지 당한다. 사회구조가 좀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규약과 제약 그리고 사회적으로 넓은 구조가 아닌 일상적으로 사소한 가족 내지 친척, 친구 단위의 커뮤니티에서도 인간은 불안함 심리를 감출 수가 없다.

 

그것이 결국 인간에게 하나의 큰 장애물 내지 유령처럼 다가와 나이가 이미 차서 어른이 되어도 아이들처럼 행동하는 꿈을 꾸게 된다. 꿈은 여러 가지를 인간에게 안겨준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대신 반영하여 쾌락과 만족을 대체하거나, 혹은 오늘 내지 어제 즐기지 못한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여 대체하는 것도 있으며, 어린 시절 내지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까지 재현한다.

 

단지 꿈은 있는 그대로를 반영하지 않는다. 내가 30대의 나이에 10대의 꿈을 꾼다고 하자. 그때의 꿈은 10대의 눈에 보인 내가 보는 꿈을 30대에 보는 것이다. 30대의 어른이 10대의 어린아이 사고로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꿈은 아마 어떤 특수한 계기나 사건이 있을 시기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책에서는 이런 주제를 다루었다. 어린 시절의 꿈을 꾼 어느 사람이 자신의 형제에 대해 설명한 꿈이다. 그 꿈에서 자신은 넓은 공간에 있었는데, 꿈의 소유자가 바라본 꿈에서 그의 형제(형 내지 누나)들이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이란 것이다.

 

그 의미는 자신의 형제들이 모두 천사가 되면 좋겠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곧 인간은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는 종교적인 관념에 의해서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천사의 날개를 달고 올라가는 의미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마 당시 그 꿈을 가진 소유자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다른 형제들이 없어지길 바란 것이다. 조금 죽음의 의미를 돌이켜본다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의 관념과 달리 어린 아이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조금 다른 의미라는 점이다.

 

그런 꿈들을 아주 어릴 적에도 꾸었지만, 다시 어른이 되고도 꿀 때도 있다. 단지 꿈의 의미가 알 수 없거나, 그때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하지만 꿈을 그렇게 꾸어도 나쁜 것이 아니라고 프로이트는 이야기한다. 오히려 인간의 숨은 무의식적인 세계와 인간의 욕망이 그대로 반영되어 인간에게 보이지는 꿈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런 인간에게 이성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욕망이란 이름 뒤에는 무의식이란 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간 역사상 3가지 패배 중에서 1가지가 프로이트라고 한다. 인간을 동물의 영역으로 이끈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지는 억지스러운 이성은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한다.

 

자신이 병들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밝히는 것 자체를 부정하여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 스스로 병들게 한 것이다. 자신의 오류나 추악한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 스스로에게 마음이 편하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논리답지 못한 논리라는 커다란 오류 속에 갇혀 마음에 더욱 더 큰 억압을 누르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바로 이런 점들을 뛰어 넘으려고 한 것이다. 그의 진정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추후 인간에 대한 다양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프로이트 도서 중에 토템과 터부가 있다. 이 서적은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인류학에 매우 중요한 도서가 되었다. 프로이트 사망 이후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인류학으로 세계적으로 큰 학문을 이룩한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기초자들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니깐 말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이성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인간이 과연 이성적일 수 있을까? 인간은 자기의 비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말이다. 그것이 결국 인간 본연의 무의식까지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게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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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 한길그레이트북스 7
레비 스트로스 지음 / 한길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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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를 읽어보기 전에 나는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읽어보았다. 야생의 사고와 달리 슬픈 열대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기 보다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 남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면서 그리고 그 밖의 공간을 이동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하나의 기행문에 가깝다.

 

그래도 그런 기행문일지라도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인 영역에서 인류학자의 관점에서 적어 내려갔기에 거기에 살고 있는 원주민에 대한 현재와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아온 과정을 서술한 점에서 인류학적인 가치가 있었다. 또한 인류학적인 관점에 떠나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원주민들은 기존에 서구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이 아닌 레비 스트로스의 새로운 관점으로 그들을 관찰하였다.

 

레비 스트로스가 인류학을 연구하기 전에 레비 브릴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연구한 내용은 분명 인류학적인 부분에서 당시 기준의 근현대 문화에 살고 있는 유럽사회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했는지, 레비 브릴과 레비 브릴 같은 사람이 관찰하는 인류학이란 그저 오만과 편견에 가득한 입장에서 본 학문이었다.

 

이에 반해 레비 스트로스는 그런 서구사회의 이성을 중시하는 일방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마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가지고 있던 이성중심사고 방식이 오히려 이성적인 영역만 치중한 것 자체가 이성적이지 못한 것을 알릴 계기라고 본다. 앞서 보았던 슬픈 열대의 경우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다수의 원주민들을 볼 때 레비 스트로스의 깊은 관찰력과 이해력이 돋보였다.

 

레비 스트로스 본인이 서구인으로서 원주민들을 관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고 했다. 아마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계속 발전해 오면서 문명사회를 이룩한 서구사회가 아닌 말 그대로 원주민들의 사회구조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레비 스트로스가 프랑스에서 만들었으나, 곧 세계적으로 크게 학문과 사상의 발전을 이룩한 구조주의가 시작됨을 알린 것이다.

 

구조주의에 대해 내가 설명하고자 하면 그렇게 쉽게 간단히 하지 못한다. 그러나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레비 스트로스의 글에서 모든 것을 1가지 기준으로 하여 2원화적인 대립구도로 나누어 차별하기 보다는 그 2원화 대립이 보이는 각각 영역에서 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런 레비 스트로스의 시점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최근 서구사회의 문화가 세계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정치,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인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사회는 이미 자기들의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서구화가 되었다면, 이에 반면에 비서구사회에서는 그 자체적으로 역사적 흐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화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영역이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변모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것은 기존에 있던 것을 지키기 위해 변화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유한한 생존을 가진 동물로서 어느 한 개인이 그것을 유지하고 가꾸고 지키고 싶어도, 그의 수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흐름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키고 하려한 그 가치가 그대로 소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레비 스트로스에겐 인류학이란 현재의 모습에서 미개사회라고 하는 곳은 보고 서구사회의 입장으로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서구사회에 있는 인간이 그 세계의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고 한 것이다. 단지 미개인들은 문명인과 달리 문자문화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적인 영역의 축적이 되는 문자와 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파할 언어학적인 체계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미개인이란 존재라도 문명사회가 가진 이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성적이지 못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그들이 가진 하나의 과학이란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문명사회의 인간보다 더 그들은 과학적인 면모를 가질 수도 있다. 그들이 생존하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연 있는 그대로를 따르고 적응하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적으로 물리공식이나 화학반응에 대한 내용은 원주민들은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연에 놓인 어느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여 그것을 하나의 생활화 시킨 점은 분명 과학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중 제일 인상 깊었던 점은 식물분류학적인 내용이었다. 일반 식물학자들도 발견하지 못한 식물들을 매우 상세하게 관찰하여 분류한 점과 그 식물의 잎, 씨앗, 뿌리 등의 식물체 특성을 보고도 어떤 식물인지 알 수 있는가이다.

 

당시 20세기 중반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생물학 영역의 식물학자들도 활발히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식물분류체계를 훨씬 자세히 아는 반면 식물학자들은 같은 식물을 다른 종으로 착각하여 중복되는 식물종이 8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주민들이 과연 비과학적이란 사실이 맞을까?

 

그런 점을 시작하여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원주민들의 생활은 단지 그들이 미개하였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큰 착각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단지 내가 아쉬운 부분은 야생의 사고를 읽기 전에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과 구조인류학을 읽지 않은 것이다. 또한 레비 스트로스가 원주민과 그들의 생활에서 신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신화는 공시론적인 영역 즉 시간의 영원성을 강조한 점, 역사는 통시성으로 공시적이지 못한 점을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다.

 

일단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 영역은 구조주의라고 하여도 그의 구조주의 영역 아래 있는 학문은 마크르스의 사회과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또한 기호학을 만든 소쉬르의 언어학이다. 이전에 마르크스 자본,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도 읽어보았지만, 메를로 퐁티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은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그런 학문적 체계의 연계성에서 각각 이어주는 고리가 없는 상태에서 읽다보니 야생의 사고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적인 고찰 역시 매우 깊이 들어가고, 그들의 신화를 풀이하고, 그들의 이름과 토템까지 풀이하면서 원주민들의 생존방식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나는 레비 스트로스가 해석하기 위한 전초과정에 대한 부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야생의 사고를 읽는 내내 조금 힘들었다. 물론 다른 서적도 마찬가지이나, 야생의 사고는 어떤 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정립을 내세우기 보단 인류학적 고찰로 인해 탄생된 학술서적이기 때문에 못내 아쉬운 것이다.

 

단지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역자후기에서 나온 것처럼 레비 스트로스가 얼마나 원주민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당시 서구사회에서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와 그리고 마르크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 시초자인 레비 스트로스 사이에 벌어진 학문적 논쟁이었다. 야생의 사고 9장에 레비 스트로스는 장 폴 사르트르와 그동안 벌어온 논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가 레비 스트로스에게 학문적으로 패배한 것은 프랑스 학문과 사상이 구조주의로 변화한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본다면 미개인들이나 혹은 미개인까지 아니지만 비서구사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적인 서구지식인들에게 큰 여파를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단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 서적 앞부분에 흑백과 컬러 사진이 있는데, 거기에 언제나 원주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1980년대 레비 스트로스가 안동 하회마을에 찾아와서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관찰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분명 어느 국가와 민족, 하물며 국가와 민족으로 규정하기도 어려운 소수 부족들까지 계속 생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원주민들의 신화이야기에 서구사회의 야만성이 엿보인다. 사실 기존에는 원주민과 같은 미개족속들이 야만적이라 하지만, 그들은 야만적이라 생각하면 안될 존재였다.

 

그들은 그저 자신만의 영역, 즉 인간 역시 자연이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원주민 신화와 그리고 토템에서 초반엔 동물, 식물, 돌, 생체 일부부분, 생활도구 등에서 칼, 총, 비행기와 같은 무기나 기계문명이 올라가 있었다. 이들의 생활영역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인간은 통시성과 공시성을 둘 다 가지고 있으나, 이들의 통시성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역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슬픈 열대나 야생의 사고를 읽으면 원주민들이 무참히 자신의 서식처를 잃고, 희생되는 장면이 머리 안에서 그려진다. 또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등을 비롯한 그의 서적 내용도 생각난다. 욕망으로 가득한 문명사회보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미개사회가 문명사회보다 행복하지 말란 법은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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