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감시와 처벌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엇부터 생각해야 할까? 일단 감시라는 것은 주변에 있는 어떠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일거수 일투족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계속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심지어 사적인 영역까지 지켜보든 하나의 개인 인권 침해 개념으로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감시가 어느덧 하나의 당연성과 더불어 인간사회에 살아가는데 오히려 너무 밀접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감시라는 사회적 구조가 하나의 특별한 정치적 권력에서 그 권력의 압박이 생활의 일부분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감시로 통해 결정되어지는 각종 처벌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미셀 푸코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은 바로 그런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적은 도서이다. 이전부터 구조주의학자 중에서 항상 나오는 미셀 푸코는 기존의 권력체계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고, 인간에 대한 인권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진 인물이다. 게다가 계보학적인 학문영역으로 통해 정치사회적인 활동까지 주저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

 

그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은 무엇을 고발하려고 하는 것일까? 솔직히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의 이야기보다는 중세유럽과 근대유럽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현재의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이전에 있었던 과거로 찾아가서 지금까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먼저 감시와 처벌에서는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른바 신체처벌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의 죽음은 참 쉽고도 어려운 이야기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상당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큰 부담감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은 말을 하는 동물이기에 단순히 그 고통을 몸짓과 비명 소리가 아니더라도 언어로 통해 전파할 수 있다. 따라서 죽어가는 수형자의 죽음과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강한 자극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 책 제1장 수형자의 신체에서 다미엥이란 한 병사가 루이 15세를 살인시도가 실패하여 사형을 선고받는다. 문제는 인간을 죽이는 그 자체는 보통 인간의 식견으로 매우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기 때문에 어려우나, 그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하다는 점이다. 일단 다미엥이란 사람에 대한 죽음을 열거하기 전에 대표적인 사형이 인간의 목을 베는 참수형이 있고, 참수형도 단두대에서 하는지, 도끼로 하는지 칼로 하는지 작두로 하는지가 있고, 인간 절단에서 요참형이나 또는 사지를 찢어 버리는 능지처참도 있다.

 

그것만 있는가? 끓은 기름이나 물에 넣거나 불에 산채로 태우거나 짐승 밥으로 만들거나 수장시키거나 전기고문하거나 총살하거나 머리를 박살내거나 교사시키거나 약을 먹이거나 너무 많은 사형방법이 있다. 그래서 사형은 어찌 보면 자신이 죽는다는 하나로 고통스럽고 끔찍할 수 있으나, 과거 고문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를 참고하면 사형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하나의 특권까지 주게 되었다.

 

가령 마녀사냥을 기록한 사료에는 피가 흥건한 지하바닥, 주변에 인간의 눈과 팔에서 떨어진 손, 다리에서 떨어진 발, 고문에 지치지 못해 차라리 화형대 위에서 불타 죽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잔혹한 고문을 받는 사람 속에 인간이란 죽음이 쉽고도 어려우며, 한편으로 죽음이 불행한 저주이면서도 행복한 마무리라는 엇갈림을 볼 수 있다.

 

그런 사형과 고문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형자 입장에서는 죽음이 어차피 결정된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죽는 편이 행복할 줄도 모른다. 죽음의 고통보다는 죽음 이전의 고문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다미엥의 사형 이전의 고문행위는 참혹하다.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 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 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 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처형 과정이 너무나도 상세하고 잔혹하며 하다못해 편하게 죽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단순히 도보수의 칼에 목을 베어 효시하는 처형법이 아닌 최대한 고통을 주어 그에게 하나의 권력으로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권력자의 권력에 대항하고 거슬린 대가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주는 것이다. 처형자는 임금을 죽이려한 범인이므로 그는 고문당하는 순간에 임금이 된다. 즉 임금이란 신체에 가해자란 사실만큼 임금에 걸맞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전의 공개적인 처형 집행은 많은 군중들에게 구경거리와 동시에 국왕의 권력을 상기시켜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비추어진다. 처벌의 기능은 곧 군중들에게 권력기관에게 대항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교육이다. 처벌로 통해 나도 역시 저런 비참한 최후를 당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권력에 복종하게 만드는 매우 강력한 조치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강력한 고문과 사형을 당하는 범죄자의 특징은 권력자들에 대한 반항이 가까웠다. 아니라면 사회구조적인 부분이었다. 어느 도적의 죽음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야유와 욕을 얻어먹겠지만, 그가 죽기 전에 하는 연설은 오히려 그를 영웅으로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해서 되기보다는 사회의 왜곡이나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군중들은 모두 범죄자에게 큰 분노보다는 거기에 있는 사형집행자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죽음의 왕관을 쓴 자가 군중에게 하나의 신화의 영웅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공개적인 처형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군중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는 인물이 특수한 목적의식보다는 사회구조적인 부분에 의해 죽어간다면 그는 군중들에게 큰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죽이거나 고문하는 것을 점차 공개적인 영역에서 비공개로 변경되고, 얼굴을 알리기보다는 두건을 씌우고, 사형은 점차 광장이 아니라 교도소 내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이런 처형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았다. 처벌은 반드시 인간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면 되는 것이었다. 가령 우리 현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처벌기능을 하는 공간이라면 어떨까? 아니 처벌보다는 감시가 당연시 되는 것이 어떨까?

 

처벌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무색하나 인간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감시받고 자신의 개인성을 무시당하고 억지로 개조되는 것 자체가 처벌일 수도 있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다보면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 감시를 받는다. 학교와 공장, 병원, 군대, 직장 등에 말이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기관이다. 아니 인간에게 분리될 경우 많은 문제가 따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당연함을 가지므로 인간은 곧 감시체제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학교를 다닐 적에 교복을 입고, 두발과 복장이 일정해야 하며, 일정한 시간이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교육을 받는다. 또한 일정한 교육과 동시에 시험이 치르고, 시험이 끝나면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받는다. 모두 우리는 당연한 사회적 관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감시의 방법이고, 감시 속에서 상벌의 규정은 처벌로 연결된다. 이미 학교부터 감시라는 체계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군대와 직장까지 가면 그런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에는 이런 기능을 권력에 대한 하나의 운영방법으로 설명한다. 특히 종교기관과 학교, 소년원, 감옥, 군대는 이 기능을 탁월하게 진행하는 방법이었다. 절대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면 페널티로 통한 처벌, 그 후에 교정으로 통해 국가조직에 대항하는 것보단 순종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냈다.

 

더욱 난해한 부분은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는 종교기관이 오히려 속박을 강요하는 수단이었다. 모든 것을 억누르고 강제적으로 실행하게 하고, 특히 시간의 정확한 패턴을 짜서 인간들을 거기에 맞추는 것은 인간 그 자체를 수동적인 존재로 변화시킨다. 소년원이나 감옥은 수시로 감시하게 하여 이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여부에 따라 생활에 영향을 주어 따르지 않게 금 만든다.

 

인간이 마치 인간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인간이 기계와 기구와 같이 하나의 조작도구로 변화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구조로 변화되면서 프랑스에서 일어난 범죄는 참혹하게 죽어가는 다미엥같은 사람보다는 경제적인 영역에 더 가까워진다. 가령 일상생활에 필요한 빵과 의복과 같은 필수품이나, 공장에서 나오는 각종 상품들이다. 이런 일반 사람들이 쉽게 접목하는 물품에 대한 절도나 강도는 다미엥과 같은 처벌보다는 어느 일정한 곳에 교정을 받아야 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문제는 그런 도구로 되어가는 인간이 그곳만 존재하는 것이 사회 전반적으로 흘러간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만큼 일해야 하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월급이 삭감되거나 쫓겨난다. 감시라는 체계가 어느덧 대부분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그것이 처벌까지 이어질 경우 생존영역에 큰 위기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감시와 처벌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죽어가는 다미엥을 비롯한 그 밖의 인물들이 대다수의 군중들에게 많은 교육을 전달해주는 도구로 되겠으나, 점차 그 들이 군중들을 집결할 수 있는 힘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자들을 점차 은밀하게 다루거나 은밀하게 다루는 것에 넘어 모두 개인화하여 범죄자가 감시자와 일대일이란 느낌을 수시로 받게 해야 하고, 감시자는 범죄자를 격리하는 것처럼 보여 이들을 속박하게 만든다. 모든 것에는 교정행위에 대한 효율성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나, 프랑스 근대역사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경제난과 더불어 고용주와 국가기관의 횡포에 불만을 터뜨린다.

 

그렇다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집단적인 조직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집단을 분리하고 나누어 개인화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또한 이들 개인마다 감시할 수 있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면 이들의 현재 상태를 계속 주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말한 여러 기관으로 통해 이들을 계속 교육을 시킨다면 그것은 권력을 체계적으로 하위조직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헤게모니적인 정치적인 구속현상은 바로 이런 조직화된 국가기관 내지 교육기관, 종교기관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지식이란 것은 하나의 권력으로서 인간들을 조직하므로 각 권력에 알맞은 지식전문가들이 나온다. 이들의 세분화는 권력의 감시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또한 그 감시자의 임무를 맡은 사람마저 감시를 받게 된다. 파놉티콘이란 일망감시체계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일망감시자가 가장 먼저 처벌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감시와 처벌은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분명 중세유럽과 근대유럽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나 저자인 미셀 푸코가 프랑스인이란 점에서 프랑스 역사에 대해 주로 기술한다. 하지만 이런 기술들은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조직과 단체에 늘 속한다. 하지만 거기에 있으면서 어느 기관의 사람에 의해 항상 통제되고 감시를 받는다. 그것 자체로 하여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지 않겠으나, 그것에 의해 정신이나 신체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 내지 큰 조직에 의한 하나의 헤게모니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회적인 관념과 행동이 필요하나 그것 자체가 하나의 도구로 전략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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