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과 폭력 - 공산주의 문제에 대한 에세이 우리 시대의 고전 17
메를로 퐁티 지음, 박현모.유영산.이병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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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서관에 가서 영국 철학자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저술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라는 서적을 대여하여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이제 막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문학에 대하여 입문할 시절 본인이 직접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철학사와 철학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 도서를 빌려보았다.

 

당시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는 분야를 처음 접하면서 이들의 학문 역시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소쉬르와 같은 근대철학자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연결이 된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도서를 읽으면서 그리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과 그리고 그 이전과 그 외로 하여 시기별로 따라 토마스 아퀴나스, 마키아 밸리, 루소, 칸트, 니체, 마르크스로 점점 따라오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 철학자 러셀과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가 나왔다.

 

메를로 퐁티라는 인물이란 이름을 여기서 처음 보았고, 현상학에 대한 인식 여부와 더불어 현상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했는지도 몰랐기에 사실 당시 메를로 퐁티라는 인물은 상당히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인상이 정말 깊은 점은 무엇이냐면, 메를로 퐁티가 1961년 심장병으로 서거하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철학적인 연구와 업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가 남긴 많고 많은 연구와 업적으로 메를로 퐁티의 장례식에 수 만명의 인파가 몰렸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 메를로 퐁티를 생각해본다면 시각(視覺)의 현상학(現象學)이란 도서를 저술하여 후설과 하이데거를 이은 현상학적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인은 현상학에 대한 입문을 하지 못했다는 점과, 현상학에서 꼭 다루어야 할 헤겔의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까지도 입문하지 않아 현상학을 뭐라고 딱 표현하기는 어렵다.

 

단지 이 메를로 퐁티라는 사람이 당시나 지금이라도 마르크스주의 내지 신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를 어떻게 다시 보았는지가 아주 흥미로운 점이다. 수 만명의 인파가 몰려온 메를로 퐁티의 장례식과 달리 현대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준 마르크스의 죽음에는 불과 열 명 내외의 쓸쓸한 배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죽어도, 엥겔스에 의한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21세기에 계속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저술한 도서였고, 미완성의 명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 엥겔스는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의 유지를 이어 받아 마르크스의 글과 사상을 정리하였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가 시작했으나 그 끝은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딸에 의해 정리된다.

 

완성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미완의 도서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란 이미 완성된 책이 아니고, 끝없이 적어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하던 무렵 영국 도서관에서 애덤 스미스, 리카도 등과 같은 경제학자에 대한 도서를 볼 뿐만 아니라 각종 문학과 철학에 대한 도서까지 참고하여 저술했다. 또한 세계가 움직이고 사회가 조금 유동하는 과정에 마르크스의 자본은 집필 도중에 계속 수정과 추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주석과 첨부내용은 마르크스의 자본은 완성본이 아니라 지금도 오늘 그가 죽은 지 130년이 다 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자본은 적어나가고 있다.

 

어떻게 마르크스주의 또는 신마르크스주의는 그냥 그대로 끝내거나 한번 요동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똑바로 보면서 자신과 사회 그리고 그 세상에 대한 지속적인 과학적, 객관적인 탐구와 비판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상실하고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그저 사이비주의로 전략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이란 이 책은 아마 그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영향이 미친 러시아혁명과 그 후에 이루어진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담은 도서이다. 참고로 이 책의 후반부에 가면 재미있는 말이 있다. 공산주의가 아닌 좌파 지식인이라는 역자들의 후기가 말이다. 그 말의 의미는 아직까지도 좌파하면 공산주의로 보는 한국의 현실과 더불어 공산주의 노선만이 좌파라고 착각하는 많은 인식불가한 자들에 대한 조롱이랄지 아니면 착각이랄지 혹은 아쉬움을 나타낸 것인지, 왠지 모를 다양한 생각을 오고가게 하는 문구가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메를로 퐁티의 이 도서의 집필에서 재미있는 이름이 하나 나왔다. 실존주의 철학자이면서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게 그토록 칭송을 하였던 장 폴 사르트르라는 이름이다. 실존주의적인 장 폴 사르트르는 구조주의 인류학을 만든 레비 스트로스와의 학문적인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는 구조주의가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 이전에 장 폴 사르트르는 학문적 동지인 메를로 퐁티와 결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발발에 의해서다. 기존에 메를로 퐁티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통한 무능한 차르왕권이 무너진 것을 환영했으나, 러시아혁명 속에 큰 역할을 맡은 레닌이 1924년에 죽고, 1929년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의해 권력을 잃은 채로 타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부터 스탈린주의가 시작되고, 레닌이 후계자로 지명한 6명의 후보자 중에서 트로츠키를 포함한 5명은 모두 죽거나 정치적 숙청을 당하고, 오로지 스탈린만이 살아남아 공안정국을 만든다.

 

그 후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 스탈린은 북한과 손을 잡고 한국 즉 남한을 남친하게 된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든 공산주의에 대해 결별을 선언한다. 문제는 그 공산주의의 환상에 장 폴 사르트르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후에 장 폴 사르트르는 1968년 프랑스 파리 5월 혁명을 지지함에 따라 구좌파적인 낡은 정신을 비판적으로 보고 잘못됨을 인정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문제는 이 메를로 퐁티가 어째서 이렇게 바라보게 되었는가 이다. 메를로 퐁티는 단순히 어느 문제되는 것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문제로는 어느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반대하는 개념이 강하다.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안했는지 모른 채 자기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아니라면 “나는 혹은 그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믿지 못하는 것 자체는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처럼 정말 인간은 자신이 믿거나 믿지 못함을 정말 믿고 있다거나 믿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정말 믿는지 혹은 안믿는지 조차도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인식이란 언제나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와 한도 안에서 판단하려고 한다. 그 외의 것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음이 보통 인간의 인식이다.

 

인간이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범주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보편적인 인식 안에서 알고 있다는 것에서 더더욱 심한 편견과 오해가 생긴다. 그런 점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더 크게 빛을 발휘하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폭력이다. 폭력은 분명 타인에 대해 일정한 육체적, 정신적, 소유적인 부분을 훼손 내지 피해를 주는 행위이다. 더구나 폭력의 강도가 강해지면 생명과 존재에 대한 위기감으로 다가온다.

 

이 폭력에 대한 가치와 존재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정의, 이 모든 것이 과연 옳고 그런지 혹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주게 된다. 메를로 퐁티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기존 차르왕조가 폭력적인 행위 즉 군중억압과 무력사용은 폭력에 의한 정치적 방법이다. 오직 국가만이 폭력의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처럼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 이전 봉건적 국가에서는 국가적인 권력은 곧 군주와 군주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에 대한 정치권력 합리화이므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하나의 정당성을 가졌다.

 

하지만 권력의 집중은 부패하게 되어있고, 부패된 권력은 결국 폭력을 부르게 되기 마련이다. 러시아혁명은 폭력으로 물든 차르왕권에 대해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군인과 여성이란 하위조직이 부패하고 지나친 횡포로 인해 그들의 차르를 내몰았다. 폭력에 대항하는 혁명이라고 하나 사실 그 혁명조차도 폭력이라는 정당성을 가지게 되었다. 혹은 그런 폭력에 대항하여 폭력을 남용한 혁명가도 이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폭력적인 행위를 당한다.

 

그렇다면 누가 평화와 정의를 위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는 “가치, 도덕적, 순수성, 내적 인간에 대한 허세적인 숭배는 폭력, 증오, 환상과 은밀한 유사성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어떻게 본다면 기존 체계에 대한 문제에 대한 반발은 역사적인 주체 당사자에게 당연한 권리이겠지만, 한편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반항 역시 기존 체계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도서에서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후진국인 나라에서 그것도 타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독립을 하려고 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식민지국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조직은 진보적인 존재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하는 극단적 인종주의 내지 국가주의적 보수에 가까운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진보적인 독립 운동가들이 나라를 되찾으면 그들은 진보노선이 아니라 보수노선 특히 민족주의적인 노선을 걷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제 막 세운 국가는 매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에 의해 건국한 나라는 결국 내외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다소 강압적인 전체주의적인 정치가 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러시아혁명까지의 그 투쟁이 역사는 분명 민주주의적이지 못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안을 초래한 차르의 퇴진은 분명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 이후의 길이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세계는 군국주의와 더불어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끊임없이 세계분쟁이 일어났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같은 서구국가들은 대량생산된 공업물품을 팔고, 값싼 원자재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경제적 식민지는 필수였다. 그런 점에서 땅이 넓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러시아는 분명 위기의 국가였을 것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경험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다른 국가 강대국들의 손실을 막기 위한 총알받이로 출전하였던 러시아군으로서는 아마도 통제라는 수단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스탈린 체제에 들어서면서 러시아혁명의 혁명가들은 점차 숙청되어가고, 소비에트연방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렇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이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했다. 또한 자본주의에 반하는 공산주의라도 경제적인 조건은 필요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트로츠키는 숙청당하기 전에 그런 점을 고려하여 농업을 육성하려고 했다.

 

또한 다른 지도자 역시 식량을 위한 농업과 무역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였던 트로츠키가 우파적인 정책으로 부농에게 농업을 유지할 것을 권했고, 이에 반대하던 세력은 집단화를 요구했다. 아마 소비에트연방의 가장 큰 실수는 인간은 모두 이상주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개인주의적인 존재가 가깝다는 점을 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러시아혁명은 이상주의적인 가치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존에 달린 문제였다.

 

이것에 따라 생각하면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의지는 분명히 따르고 이에 이들을 제대로 인지시키고 각자의 존재를 알도록 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의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란 자신의 이성을 키우기보다는 이미 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욱 쉽고 편하고 흔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집단주의적인 사고로 전환되어 이른바 파시스트적인 관념으로 발전할 수 있다.

 

군중심리로 통한 파시즘은 비이성적인 사고와 관념이 그것 자체 합리적 이성과 관념으로 변모되어 폭력적이 하나의 미적인 가치로 변하는 순간 즉 광기가 보편적 가치가 되는 순간 파시즘이란 큰 위기가 다가온다. 소비에트연방에서 추구하던 그 혁명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으로 끝났기에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사실 루이 알튀세르가 만들어가고 싶은 마르크스주의란 관념적인 부분과 유물론적인 부분이 끊임없이 서로를 비판하고 존재함으로 그 경향을 찾아 발전을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공산주의는 없어지고, 그나마 남은 북한마저 공산주의국가 아닌 그저 스탈린주의를 모방한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 국가자본주의도 매우 아깝고 아쉬운지 가라타니 고진은 북한 독재체계를 이씨 조선의 연장이라고 한다. 이미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끝나버린 봉건국가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을 유토피아적 망상으로 인간중심이라 하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합당하게 보이게 하는 폭력만이 존재한다. 물론 그런 폭력적인 부분은 반드시 저런 허황된 유토피아(사실은 디스토피아에 가까우나)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테러리즘이 일어나는 현대사회 국제무대도 마찬가지이다. 테러의 발달은 무엇인가? 테러를 가하는 존재가 소수약자라면 반드시 그 소수약자에 대한 폭력적인 수단이 가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에 의해 테러리즘을 일으킨 존재로 인해 피해를 입은 국가나 조직들은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반테러리즘으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도 테러리즘과 별반 차이 없는 폭력이란 점에서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행위에는 반드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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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
염수균 지음 / 천지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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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존 롤즈의 정의론이란 도서를 본 적이 있었다. 약 700페이지가 넘는 매우 두꺼운 도서에 아주 많고 많은 담론과 철학이 담겨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았으나, 그 내용을 보자면 정말 현대사회의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 이상의 내용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정의롭고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번 지나치면 좋은 도서이나, 그것을 받아들이기의 과정이란 정말로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런 도서를 받아들이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각자마다 인격이 있고, 존중받아야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 인간의 존재이기에 존 롤즈가 제시하고자 하는 그 철학적 가치관은 다시 되새겨 봐야 할 가치는 아닐까? 그래도 그 가치를 실재 현실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이성적 판단과 양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읽어본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는 바로 그런 존 롤즈의 철학적 가치관을 탐구하고 알아보는 도서이다. 그런 도서이기에 이 책에서는 내가 읽어본 정의론 이외에도 “만민법”과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존 롤즈는 아주 위대한 정치·사상·철학자이지만, 그가 남긴 도서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 도서 하나하나의 가치를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를 읽다보면 금방이라도 그의 사상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존 롤즈의 철학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대하는 방법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문화적인 부분까지 골고루 이야기하고 있었다.

 

존 롤즈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란 누구나 공평한 기회를 주고, 경제적·사회적 차이가 있더라도 누구나 정치적인 참여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화주의적인 요소, 즉 국민 스스로가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공화주의적인 요소를 실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참여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감이었다. 가령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옮기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만약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희생을 해서라도 남에게 공공적인 이익을 넘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화주의적인 요소에서는 자신만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야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제시한 자유주의처럼 인간은 자신만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로 통해 자신의 윤리적인 가치를 보임으로서 타인과 자신이 서로 잘 원만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존 스튜어트 밀은 그 존재자 대상이 학식과 능력이 높으면 정치적인 권력을 더 부여한다고 생각했으나, 밀의 사상을 수용하던 롤즈는 그런 권력적인 요소보다는 각 개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수약자나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외면 받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표현의 가치가 적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롤즈는 언제나 정치적, 사회적 입장에서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기도 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재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최소수혜자에 대한 사회적 보장으로서 그들에게 큰 사회적 지위나 이권을 주지 않겠으나 적어도 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문화에 대한 향유를 박탈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곧 시민이나 국민들이 주인이고, 그들이 진정한 국민으로서 공화주의적인 가치를 실현할 때 비로소 정의로운 민주적 자유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인간 그 개인마다 정치적인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 자유가 박탈되는 세상은 결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롤즈는 최소수혜자의 입장에 대해 중요하게 여겼다.

 

민주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누구나 더 낳은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롤즈의 입장에서 그것을 이루게 할 수 있는 요건은 바로 교육의 기회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각자의 천성적인 능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머리가 아주 뛰어나거나 아니면 다리가 엄청 빠르거나 혹은 힘이 매우 세거나 말이다. 물론 이런 선천적인 행운에 대해서는 누군가의 조작이 아닌 우연적인 일이므로 그 자체로는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 중에서 일반적인 교육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에 대한 성장이나 발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계속 자신의 인생을 더 좋은 미래로 만들 수 없다. 이런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그 사람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면 좋은 가치관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자신 역시 성장하게 되면 사회에 많은 기여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발전과 성공으로 통해 사회에 발전이 있다면, 거기에 따른 사회의 발전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에 따라 다시 그 사람이 아닌 타인에게도 좋은 결과가 올 수 있다. 이것은 공공선이란 가치를 떠나 더 높은 공동선이란 영역으로 향할 수 있다. 결국 이 사회를 이루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지내고 어떤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는 가이다. 결론은 인간의 존재는 경험주의적인 부분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이런 인간의 경험에 대한 롤즈의 철학은 인간에겐 그 자신이 얼마든지 나래를 펼칠 수 있는 하나의 공정함과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공정과 정의는 말로는 쉬우나 현실을 그렇지 않다. 위에서 말하다시피 인간이란 합리적인 존재이다. 합리라는 것은 이익 추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약 이익을 떠나 윤리적인 가치로 합당한 가치관을 지닌다면 민주적 자유주의는 반드시 도래해야할 사회이다.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위해 그 개인의 영역을 훼손하면 안된다. 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자유주의에서 개인의 재산권과 이권이란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진실의 자유주의는 인간의 부나 권력으로서의 자유가 아닌 천부인권적인 그 가치이다. 민주자유주의에서 부와 권력으로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단지 그것은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것에 불과하다. 단지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그 많다는 이유로 다른 타인들에게 피해와 불쾌감을 가하는 것은 그것은 민주적 자유주의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태어나면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평등하지 않다. 오히려 불평등이란 명제가 엄격히 존재하므로 평등이란 가치관이 두각될 수밖에 없다. 누구 일정한 기준으로 평등이란 선을 긋게 된다면 그 사회는 분명히 불공정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 평등선이란 기준에 일치하는 사람보다는 일치하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일치하지 못한 불평등에서 사회적 약자가 그 기준에 계속 도달하지 못한 채 사회적 소외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세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교육적, 정치적, 문화적 권리를 박탈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겐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해도 사회적으로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압박이 가해진다면 저항할 권리가 있다. 롤즈는 그 사회에서 어떤 사회적인 마찰이나 분쟁이 있어서 그것이 사회적 화합을 망치는 순간에 대해 그 문제를 화합을 망치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도록 만든 존재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적인 민주자유주의는 그런 부정의한 사회에 대한 충분한 개선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되지 않을 시에는 그 사회에 대하여 바꾸어야 하는 점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표현과 다양한 여론이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롤즈는 어느 다수 및 혹은 특정을 위한 포괄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나 그 포괄적인 민주주의마저 포용하여 그 자체로도 포괄적인 민주주의를 하나의 체제로 봐야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기준을 잡기보다는 그 기준을 많은 길 중에서 하나라는 점이다. 만약 그 기준만 내세우게 된다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단순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자신의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롤즈는 단순히 그 사회에 속한 개인적인 시민에게만 정의를 부여하지 않았다. 롤즈는 이른바 범세계적인 윤리적 가치로서 공정과 정의를 내세웠다.

 

분쟁과 전쟁이란 투쟁보다는 그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하나의 덕목과 자신이 만약 무기를 들고 싸워 나가야 할 때는 오로지 다른 국가가 부정의하게 자신의 나라를 공격할 때이다. 설렁 전쟁이 일어나도 롤즈는 전쟁에 참가한 병사에게 큰 대가를 물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장교와 같은 상급자들은 본래 군인으로서 자기 스스로 활동하는 부류이나, 병사는 자신이 스스로 원해서 군인이 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위험해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책임과 권리를 명확하게 판단하고, 그 책임과 권리를 판단함으로서 전쟁을 물론이거니와 자신 주변의 삶과 사회, 더 나아가서는 국가적으로도 그 공정과 정의가 미쳐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민주사회가 정립되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가야할 가치관이다. 인간은 본래 정치적 내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그 정치적, 사회적인 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의식과 더불어 나 자신을 뛰어넘어 타인과의 원활한 관계가 존재해야지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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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저작 선집 5
소광희 지음 / 문예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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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 대한 철학은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전에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에서 하이데거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고, 그의 도서인 “존재와 시간”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본다면 <하이데거와 그가 저술한 존재와 시간>은 이미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으나 그것을 나는 기존에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존재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여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이라는 그 존재가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전에 하이데거 관련 도서와 관련하여 하이데거가 저술한 “형이상학(形而上學) 입문”이란 도서를 읽었다. 물론 거기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입문이란 제목과는 달리 입문 후에 제대로 하려는 사람을 위해 적어 놓은 것처럼 상당히 난해했다.

 

단지 그때 생각난 어구 하나가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 기존에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이 저술한 책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럴 만하게 여긴다. 차라리 내가 그 실존했던 인간과 현재도 실존하는 그 서적에 대해 몰랐다면 나에겐 아무 것도 아니지 않았겠는가?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소광희 교수의 “존재와 시간 강의”에서 필자인 소광희 교수의 강의도서를 보자면 충분히 저런 생각을 나게 만든다. 물론 존재와 시간이란 원전을 읽기 전에 참고적으로 읽었다고 하여도 나는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존재라는 것은 있고 없고도 중요하지만, 그 있고 없고의 인식에서 그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존재라는 것은 있다는 것이 되겠으나, 우리 인간의 눈을 비롯한 감각적인 기관으로 통해 존재를 느낄 수 있지만, 직접적인 감각으로 느끼지 못할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맞대고 있어도 존재와 확인 유무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가령 우리 몸 주변에는 1기압의 힘을 가진 대기가 분포한다. 그런데 그 대기는 78%의 질소(N2), 21%의 산소(O2), 그리고 아르곤(Ar), 이산화탄소(CO2) 등을 비롯한 기체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공기를 들어 마시고 내뱉어도 그것이 공기란 사실을 그 공기가 어떤 화학적인 결합에 있는지 알 수 없다면 그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다. 단지 그 존재를 있는 것만 감지할 수 있다고 하여 그 존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존재라는 것은 역시 인식의 차이일까?

 

가령 우리 눈으로 보이지 않거나 만질 수 없는 초현실적인 존재라면 어떨까? 가령 관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신이라는 영역에 대해 말이다. 신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것이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정말 그것이 없다고 할 수만 있을까? 존재의 유무는 인간의 인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그 존재는 인간이 계속 인식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 인식의 범위는 인간 자신이 유한하다는 전제 아래 가능한 게 아닐까?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분명 태어나고 죽는 그 시간까지 일정한 기간 아래 인간은 살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삶과 동시에 죽음이 이어져 있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까지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동물과 식물은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단지 적대적인 큰 천적만 나타날 경우 죽을 수가 있다 라는 본능만 있다.

 

그 죽을 수가 있는 것을 지나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인간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유한한 생명은 동물과 다를 수밖에 없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그 유한성을 계속 연결해 와서 인간의 존재는 지속된다. 생각해 보면 하이데거는 이미 죽고 없어진 존재다.

 

그렇지만 나는 하이데거라는 존재가 존재했음을 알고 그의 존재로 통해 “존재와 시간”이 존재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인간의 인식이 과거에 사라져버린 존재를 재확인을 통해 다시 존재에 대한 존재성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존재성에 대한 재확인과 더불어 “존재와 시간”은 개인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 그 주체적인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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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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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니체의 서적은 읽는 그 순간만큼은 곤란하지 않으나, 그 순간이 지난 다음 순간, 또 이후의 순간이 연결되면 상당히 곤란해지기 시작한다. 뭔가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하다가 마치 다른 이야기로 빠지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책의 역자인 김정현 교수의 이야기처럼 니체는 자신의 도서들은 10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인정받을 것처럼 니체가 작고한지 112년 지난 이후 니체는 분명히 큰 영향은 주고 있으나, 그런다고 하여 그렇게 쉽게만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다.

 

 

전에 읽어보았던 비극의 탄생과 반사회적고찰은 어느 정도 공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쉬운 도서는 아니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관으로 통해 그리스의 그 웅장하고도 진실한 문화를 찬양했다. 반사회적고찰에서는 독일(당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독일이 이겼다고 거기에 대한 자국민들의 광기에 넘치고 자만에 빠진 황홀에 대해 비판했다.

 

 

도대체가 니체라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는 인식 내지 사고구조에 대해 무척이나 비판을 가했다. 심지어는 그 보통 사람에 지나 유명한 인물이나 철학자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적인 어조는 상당히 황당하고도 놀라웠다. 독일의 관념철학만 아니라 세계 철학사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인 임마누엘 칸트와 합리주의의 기여자이며 이성에 대한 이원론적인 체계를 확립한 데카르트를 아주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우습게 보는 시야가 그렇게만 틀렸다고 그런다고 맞다고 여기기에도 난감하다는 점이다. 전에 다른 철학도서에서 니체에 대한 내용을 봤는데, 니체주의는 자신이 니체주의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니체주의라는 것이다. 과연 그의 책들은 기존의 가진 모든 생각을 버려야지 가능하고, 심지어 버려서 니체의 말에만 따라가도 버림을 당한다.

 

 

니체의 철학도서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말하고 싶은 말들을 보면 처음에 차라투스트라가 어리석음에 흥겨워하는 사람들을 선도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 순간 자신을 따라오는 많은 무리를 모두 내쫓아 내려고 한다. 도대체 그는 자신의 사고를 맞다고 하는 것인가? 틀렸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단순히 맞다와 틀렸다는 아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넣고자 하는 것일까?

 

 

이번에 읽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는 역자 후기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또 다른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중간에 차라투스트라의 등장을 암시하는 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신은 죽었다는 것처럼 신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가 강력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모이는 곳일수록 니체는 그곳을 진리나 인간의 도리가 있기 보다는 인간을 망치는 곳으로 보았다. “선악의 저편”에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소인(小人)의 냄새가 베여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먹고 마시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들이 숭배하는 곳에서조차 악취가 나곤 한다.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면 교회에 가서는 안 된다.>

 

 

사실 이 부분에 강렬한 충격적인 발언을 니체가 가한다. 당시 유럽사회에서 기독교의 부정은 곧 자신의 입지마저 꺾을 수 있는 위험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도덕의 계보”에 보이다시피 교회가 주도한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이 보인다. 마녀사냥이란 광기는 결국 종교적인 부패에 의해서이다. 그러한 광기의 축제 속에 현명한 재판관은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마녀사냥 당하는 존재마저 거기에 동조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을 넘어 제대로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도덕이란 단어와 윤리라는 단어에 대해 전에 나는 다소 혼돈을 가졌다. 윤리(倫理)와 도덕(道德)하면 왠지 서로 비슷하고 유사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은가? 아니라면 우리 같은 일반 한국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는 도덕이나 윤리라는 과목조차 듣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다시 생각해야 한다. 도덕이란 어느 특정한 시기와 공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사고관념이라고 한다면, 윤리는 어느 특정한 시기나 공간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고관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존재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란 말을 했듯이 윤리라는 개념은 철학에 가까운 개념으로 본다. 그렇다면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은 철학적인 영역보다는 철학이 아닌 그저 강제적인 인간의 관념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 니체의 서적으로 돌아가서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 나온 아포리즘의 문구에서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이라든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와 같이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집단이란 광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광기는 윤리의식이나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이미 없다. 단지 절대적인 다수의 논리로서 진리로 받아들인다. 진리라는 것이 진리가 아닌 하나의 집단의 무기가 되는 순간 전체주의적인 조건으로 변모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당연시 되는 것이 예나 지금의 모습이다. 니체는 100년 후의 인간에게 공감이 가는 것이라 1,000년도 넘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런 인간의 집단적 광기는 이미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룩하면서부터 시작된 하나의 잔혹한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광기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언의 약속이라는 강항 충동이 있기에 이성만이 아니라 양심마저 내다 버린다. 그것은 인간들은 자신의 눈앞에 불타고 있는 마녀 앞에서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분노의 저주를 퍼붓고 있다. 단지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다음 불의 정화의식은 자기 차례인 것을 말이다.

 

 

따라서 니체는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가지는 사고방식에 대해 무척이나 경계한다. 그 중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성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므로 절대적인 영역을 제시하고 있는 하나의 선이라는 전제를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면을 인정하더라도 왜 인간들은 계속 타락을 하고 있는가?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플라톤과 이후의 기독교의 교부철학이 과연 인간에게 좋은 삶과 진리를 주고 있는가?

 

 

플라톤 자신에 대한 논리라면 좋을지 몰라도 후세는 그렇게 플라톤처럼 될 수는 없다. 아니라면 기독교가 가진 그런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인간을 망치고 타락하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얼마 전에 읽어보았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생각난다. “감시와 처벌”에서 인간에게 하나의 죄의식을 옭아놓아 인간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죄를 갚기 위해서 구속당하는 것이 당연시 하는 체계적인 인간조작, 더 심각한 사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인간의 사고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에서 인간의 자유란 과연 그 위대하다는 자유가 어디까지 논하고 생각해봐야 하는가? 그저 나는 자유롭다고 여기면 자유인가? 그 자유마저도 억압인데도 그것이 하나의 자유라는 관념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선악의 저편” 각주에 나온 어느 단두대에 자신이 이슬로 변하게 프랑스 롤랑이란 부인의 외침인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처럼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그 자유 역시 광기에 차버린 하나의 행위가 아닐까?

 

 

인간은 항상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과연 당연한 것인가? 라고 의문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가령 내가 오늘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데,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인간의 의식구조는 물과 음식을 먹어야 하는 동물적인 인간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비교하기를 단지 상식적으로 보기엔 너무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어렵게 보일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고, 다르게 보자면 물과 음식은 눈으로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항상 가지고 있는 이성이란 관념은 물과 음식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잠을 자지 않고 마음만 먹는다면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의문을 품는 것이 어려울까? 정해진 양만 채울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물과 음식일까? 눈에 보이지 않은 인간의 이성과 그 사고관념일까? 차라리 후자 편이 더 위험해 보이지 않을런가? 물은 썩으면 뱉으면 되고, 음식이 상하면 토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사고는 뱉을 수도 토할 수도 없다. 도리어 그것이 인간의 속박하니 선악이란 존재는 정확한 인간의 윤리의식보다는 단지 도덕이란 사회적인 흐름, 그것도 광기어린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악의 저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이며, 도덕의 계보를 잡아내어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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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공부중 2013-10-1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봤습니다.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기원
토니 클리프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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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중에서 아직 읽어보지 않은 소설로 아리랑이란 작품이 있다. 조정래 작가의 역사소설로서 실존 인물인 김산이란 인물을 토대로 당시 일본강점기 아래 비극적인 시대상황과 동시에 독립군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쉽게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소설의 주인공 김산은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움직인 독립군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한 분들 중에 미국의 자유주의와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로서 활동했는데 불구하고 왜 후자 측이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숙청이 되었을까 라는 것이다. 예전에 본 드라마 중에 김두한을 소재로 한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아버지가 독립군의 위대한 장군인 백야 김좌진으로 나온다.

 

김좌진 장군은 항일활동을 전개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더불어 민족정신을 재정비한 위대한 선조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그 인물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기존에 항일투쟁활동을 하던 중국과 조선에게 영향을 줄망정 방해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선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이 숙청되고, 게다가 강제로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이주되었다.

 

그것은 누구의 계략인가? 1927년 러시아에서는 매우 특별한 일이 발생된다. 그것은 레닌과 더불어 러시아 왕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상과 체계를 펼치려 한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공산당에서 제외되고, 1929년 러시아 영토로부터 추방된다. 그것은 결국 트로츠키와 적대관계로 되어버린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을 장악한 것이었다.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의 장악은 결국 기존 반파시스트 내지 반독재에 저항한 마르크스-레닌으로 이어지는 사상이 결국 막히게 된 것이다. 문학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보면 나폴레옹이란 사나운 돼지가 용기 있고 지혜로운 스노볼이란 작은 돼지를 내쫓으면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독재와 암흑정치에 대해 비판한다.

 

그 모든 암흑정치의 원인점은 바로 스탈린에 의한 트로츠키의 추방이고, 그것도 모자라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다. 트로츠키가 왜 이렇게도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를까? 전에 읽어 보았던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에서 한국의 근현대사의 암울한 이야기를 다시 수중 올라왔을 때 아직까지 한국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메카시즘의 덫을 결국 스탈린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트로츠키의 추방은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꾸던 볼셰비키의 영웅을 영원한 추방으로 이어짐에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오던 비극은 시작되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한 숙청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실패하거나 또는 변질된 노동자의 국가로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를 저술한 토니 클리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변질된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자본을 소유하고 독점해 버리는 국가자본주의라고 한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국가자본주의, 사실 일반적인 자본주의는 자본의 유통과 힘으로 통해 시장경제를 자유적으로 활동하는 곳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과 더불어 동유럽, 현재 유일하게 스탈린주의에 골수처럼 박힌 북한의 국가독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주의이고 파시스트의 국가였다.

 

재미있는 내용은 예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스트에 몸담은 자들이 반파시스트 세력에 제대로 된 응징이나 처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같이 권력을 소유했다. 가령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라면 정치적인 참여가 농민과 노동자들이 많아야 하나 오히려 엘리트와 재력가 내지 관료들이 더 많았다.

 

처음에는 그나마 농민과 노동자처럼 민주주의 근간이 되는 제일 많은 국민이 많은 참여를 보이다가 어느 순간 그 비율이 줄어들고 어느새 국가 당을 장악하는 것은 관료들이 되었으며, 이것은 곧 관료주의 내지 전체주의로 변모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모택동과 같은 중국 공산당이라 하는 작자도 결국 관료들과 군인들로 채워진 하나의 권력수단으로 변모했다.

 

군중에 향해서는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그 뒤로는 권력의 장악에 힘쓴 것이다. 물론 이런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토니 클리프의 어린 시절에 나온다. 고통 받는 노동자가 이스라엘인이냐 팔레스타인민족이냐에 따라 서로 차별을 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적은 누구란 말인가? 솔직히 말하여 진실로 우리가 봐야 하는 것보다는 그저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비록 페이지 수도 작고 책의 크기도 작아 봐야할 내용은 적지만, 생각할 것들은 정말 복잡하다. 마르크스 이후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이야기, 글리고 트로츠키와 스탈린과의 마찰에서 말이다. 최근에 스탈린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스탈린이 자기가 사랑한 여자에게 보낸 연서가 아주 로맨틱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로맨틱이 아닌 악마틱했다. 미소 냉전 이데올로기는 스탈린과 스탈린을 위주로 한 허울 좋은 반파시스트의 파시즘이 결국 자기 권력만 나누어 먹으려 한 위선자의 도구로만 사용되었다.

 

그래서 1967년 체 게바라가 죽을 시에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오히려 체 게바라를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변질된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 위에 군림하려던 동물농장의 주인공 나폴레옹이란 돼지였다. 그리고 조심할 점은 스탈린주의의 나폴레옹만이 문제가 아니라 나폴레옹과 같이 식사하러 온 옆 동네 농장 주인장들도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다. 그러나 반대가 있기에 그 옆 동네 농장 주인장들은 편하게 먹고 마시고 논다.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 중에 최고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리마인드 한다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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