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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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라는 도서는 현대사회에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한 정치, 사회,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학자의 논제에 대해 기술한 도서이다. 이 책을 보자면 현대사회에서 세계에서 내놓으라고 하는 유명 대석학들의 의견과 사고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책을 읽어보면 8명의 세계 유명 석학들이 길지 않은 페이지에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흐름과 현황을 적어 놓았다. 그들의 의견은 모두 조금씩 다르게 나왔으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 민주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로서 가치를 발현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진정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그것이 오히려 아니라는 것일까?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세계에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는 공산주의국가와 민주주의국가의 2원화적인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된 운명을 바꾸어 버렸다. 이른바 탈(脫)이데올로기. 탈(脫)냉전 등의 단어들이 줄기차게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탈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조되면 될수록 오히려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완성되기 보다는 오히려 비뚤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민주주의라는 것은 결국 다수의 국민이 가진 투표권을 토대로 선출되나, 그 투표권에 의해 추대된 정치대표자가 과연 정치적인 행보가 옳은지?

혹은 다시 투표함에 있어서 국민들 즉 주권을 가진 투표권자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한 활동을 하는지 말이다. 이들을 움직이는데 뭔가 강력한 미끼가 필요할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민주주의적인 방법보다는 전체주의적인 부분이 강하다.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민주주의를 부정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본다면 독일의 나치즘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민족 그리고 독일이란 국가를 위해 타인을 희생시켜야 했다. 자신들이 정당함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를 자신들의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혹은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라던 그리스 아테네의 폴리스도 그렇다. 폴리스에서 정말 정치적으로 민주적으로 잘 운영하더라도 단 10%의 남자성인이었다.

이방인, 노예, 여자, 아이들, 그 밖의 소외계층은 무시되었다. 민주주의는 이때까지 누군가의 기반과 혹은 누군가를 국가의 적이나 사회 내부의 악적인 존재가 존재할 때 정말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이 책에서 아직도 고발하고 있다. 가령 기독교와 반기독교 사이의 문명대립은 과거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가령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문화권 국가에 대한 이질적인 존재감은 과연 세계 평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평화가 정당한 것인가 의심하게 한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그것을 하나의 교조적인 잣대로 삼아 마치 신의 영역까지 올려, 더 이상 거기에 의문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여 그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망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자라고 외치는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목 높여 외치는 하나의 진리이기도 하나 그 진리가 의도되지 않거나 혹은 조작되어 타인들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국가적 정치에서 자유로운 국민 스스로의 권리를 찾을 때 민주주의라면 우린 어떤 역사를 보았는가? 예전에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었는데, 187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는 독일군에 대항한 프랑스 파리의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파리코뮈니스트라고 불렀다. 그들이 독일군에 저항한 이유는 당시 독일이 프랑스 정부와 짜고 프랑스 국민들을 국가권력 안에 가두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시민들은 무력으로 진압하는 독일군과 독재로 억압하는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하지만 그 역사는 차마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무참히 파리의 시민들은 무장된 총칼에 무너지고, 점령된 파리의 거리는 총살된 시민들의 주검만이 무성했다. 맑스·엥겔스 평전에 본 당시 기록에는 10대 후반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몸이 아주 불편했고, 게다가 10대 중반의 여자아이도 있었다.

왜 이들은 이기는 것이 힘든 싸움에 총탄이 쏟아지는 그 거리에서 목숨을 던져 투쟁할까? 민주주의라는 것은 과연 이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야 과연 납득하게 될까? 아니면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단순히 국민들을 속이고 만든 하나의 상징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그 상징이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최고의 적이 아닐까?

세상에 정보가 발전하고 교류도 발전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국가인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는가? 민주주의라고 외치는 국가가 식민지를 건설하고 식민지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자신만의 이익에 충실한 현실 속에서도 민주주의라고 외친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은 가장 잔혹하고 비겁한 상징이다.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절실하게 유용하게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제는 민주주의를 망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주인들은 그것을 파악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른바 소비의 사회와 스펙터클의 사회라는 거대한 인간의 욕망과 수동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본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주인 없는 노예, 노예 없는 주인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주인도 노예도 없다.

하지만 현재 사회는 민주주의는 주인과 노예를 만들어도 그것이 아닌 것처럼 합리적으로 눈을 속인다. 그래서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닌가? 그 스펙터클은 이미지가 매개가 되고, 이미지의 매개에서 이미지는 우리의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한 존재이니, 그 욕망이 소비로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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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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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예전에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이택광 교수님 덕분이었다. 이택광 교수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이다. 이른바 좌파라고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2원화적인 대립구도이기 보다는 인문좌파로 통해 보수나 진보나 모두 비판해야 할 하나의 과제를 알려준 도서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좌우이데올로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상대방의 가치와 논리를 따지기 보다는 무조건 매도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점이다. 그런 도서에서 나는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을 본 것이다. 알랭 바디우를 소개한 그 책에서는 좌파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부터 시작하여 장 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르, 발터 벤야민,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자크 데리다 등 수많은 학자가 소개되나 그들이 순수하게 마르크스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롭게 해석하거나 혹은 반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인문좌파라는 것은 다양한 학자를 소개하고 그들의 주요 사상을 소개하여 기존의 체계를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체계를 비판하고 있는 것도 비판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하지 않은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온 근대현사를 거치어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그 역사적인 흐름에서 많은 담론이 오고 가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담론 중에서 윤리학을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인문학적인 요소에서 윤리학은 제1의 철학이라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윤리학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리고 생각해 봄으로써 자신만을 위한 에고이스트가 아닌 진정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윤리는 다른 철학 내지 혹은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부분과 다르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에 크게 관여하고 있다. 그런 부분인 만큼 윤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세계 자체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윤리라는 것은 어느 시대이나 중요하고 어느 사회나 문화에서도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다루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각종 잔혹한 테러들은 왜 멈추지 않은 것인가? 분명히 그런 잔혹한 행동을 하는 무리나 단체 그 존재들도 자신에게 윤리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의 윤리가치가 옳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옳다고 여기는 윤리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지 못할 뿐이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언어로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지능화한 동물이다. 그런 인간이 언어로 통해 논리로서 상대방과 접하면서 그런 이성에서 나오는 논리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구심이다. 오히려 자신들만의 논리가 옳다는 이성 관념이 오히려 논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런 일들은 분명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마녀사냥, 지금도 일어나는 중동 분쟁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강렬하게 인상 깊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와 차이나는 자가 정확하게 나처럼 차이들을 존중하는 한에서만 차이를 존중한다. “자유의 적에게 자유란 없다”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차이가 바로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있는 그러한 자들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차이나는 자들은, “근본주의적” 이슬람교도와 유사한 모든 자들에 대해 윤리 신봉자들이 지니고 있는 강박한 불쾌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세상에 분명 이런 모순이 있다. 전에 미국 9/11 테러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탄생하고 이것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국가의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사마 빈라덴 조직과 거기에 관련된 적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미국에게 비극적인 플롯을 선사하여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보이는 narrative처럼 집단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집단을 공격한다.

문제는 이런 사건으로 통해 정말 그 테러조직과 범죄 집단만을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닌 자들도 응징한다. 미국 내에서 살아가는 중동지역 계열 민족이나 혹은 이슬람 문화권에 접한 사람들까지 차별하고 때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보복했다는 점이다. 진실의 적은 지구 저편 너머에 있다. 분명히 그들이 응징의 대상들은 거기 내지 혹은 거기가 아닌 곳에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응징해야할 정의적 가치가 어느 순간 잘못된 가치로 나가고 있다. 자유를 지킨다는 그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내세운 슬로건인 자유를 뭉개고 있다. 진짜 적을 대신하여 가상의 세계 즉 자기 관념 속에서 보이는 적들을 만들어 버린다. 이 서적에서는 그런 현상에 대해 simulacre라 한다. 그것은 인종, 피, 흙, 관습, 공동체로 인해 분리하게 하여 있지도 않은 혹은 본래 없는 것들이 현실화하여 비극을 만들어낸다.

윤리라는 것이 과연 이런 사항으로 인해 하나의 정의를 성립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은 니체가 제기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마라”라는 것과 같다.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윤리라는 것이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편을 나누어 상대방을 집어 삼키는 거대한 무기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이런 문제는 기존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1792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분명 기존 봉건사회에 대한 체계를 전도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노예 없는 주인” 즉 인권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1933년 나치의 탄생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만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우수하고 탁월하며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웃기게도 결과는 가장 비열하고 치사하고 가장 비이성적인 형국으로 변질되었다. 나치즘도 그렇고 파시즘이란 극단적인 자기우월화가 왜 틀렸는가?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도 자신들에게 윤리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자신에게 윤리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을까라고 생각했으면 어떠한가?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모든 의견과 사고가 옳다고 판단한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라고 했듯이 그런 인간이 다수가 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되어버리면 하나의 거대한 dogmatism이 된다는 점이다. 이런 거대한 dogmatism에 대해 칸트가 인간의 이성 그 자체를 비판하였는데, 사실 그런 문제점이 발생한다면 분명히 그런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혹은 다수) 본인에게 인격 성숙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물리적, 정신적, 심리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윤리학이라는 것을 보면 솔직히 말하여 윤리라는 자체에 대해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그 작은  순간에도 혹은 거대한 사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윤리라는 것을 인간이 바라보는 것은 정말 이것이 옳은가? 혹은 옳지 않은가? 하기 보다는 사회적 통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것이 정의로운 윤리가치라는 내세운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슬로건을 내밀고 하나의 교조로 보는 경우가 가장 윤리에서 멀어지는 지름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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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입문 - 철학사상총서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문예출판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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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아주 지옥같이 느끼던 도서 한권이 있었다. 나에게 많은 도서가 지옥 같은 맛을 보여주나 이번 책 역시 정말 무한의 고뇌에 빠져들게 하는 책 한권이 있었다. 그것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形而上學 入聞)”이다. 형이상학이란 단어는 지금 나에게도 몇 권의 관련 도서를 보아도 쉽게 이해가기가 어렵다.

meta-physics 즉 physics이란 물리학(物理學)에서 meta라는 이른바 그 너머의 세계라는 의미인데, 물리학 너머의 세계라는 것에 대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물리적인 존재에 그 이상의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이상학에서 주요 연구대상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재적인 탐구이다. 즉 형이상학은 철학(哲學)과 긴밀한 관계 아니 거의 그 자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사유함으로 탐구하는 즉 인간과 자연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본다면 형이상학은 아주 쉬우면서도 어려운 학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언제나 살아가면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형이상학에 대해 깊이 통찰하기 보다는 그저 옆에 있어도 모르는 것뿐이다.

책을 읽다가 약간 떠오른 부분은 옆에 있음에도 있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옆에 있는데도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감지할 수 없음이라는 인간의 사고가 조금 인상 깊다. 형이상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의 존재자체와 그 주변을 마주한 모든 세계적인 부분이어도 말이다.

그런 인간이 현실 속에 살아감의 알리는 존재(存在, sein)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문제다. 그런 인간 자체의 삶의 근본 존재라는 것을 다루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물리적인 존재가 있어야 하고, 그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다루는 형이상학 분야는 물리학(物理學)과 논리학(論理學)에 대해서이다.

또 하나의 형이상학의 근본인 윤리학(倫理學)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인 정치적인 존재를 다루기보다는 인간 그 자신의 존재를 다루는 실존주의(實存主義)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보며 늘 궁금한 것은 과연 이 서적은 형이상학이란 그 거대한 학문에 입문용으로 괜찮은가? 라는 것이다.

차라리 입문용이라기보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한번 보고 오는 것이 더 이 책을 유용하게 읽지 않을까? 생각만 앞섰다. 읽는 도중 하나하나 지켜보면 계속 “존재와 시간”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형이상학 입문은 결국 하이데거가 대학교 강의시간에 학생을 상대로 가르치기 위해 생긴 책이라고 하나, 이 책을 보면서 과연 그런가 싶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하이데거라는 인물을 형이상학, 철학, 사상 등에서 찾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막상 떠올랐다.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끼리 대화하다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반복적인 역사적 흐름에 고뇌하는데, 이때 주인공끼리 이런 대사가 나에게 인상 깊었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다” 그 말을 한 사람은 하이데거라는 사실 아래서이다. 물론 이런 대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이데거에 대한 관심이나 대사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염두를 두지 않은 듯했다.

사실 이 작품은 주요점은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서 그 자신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자신이 어떤 세계나 다른 접점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과관계를 발생하나 선택지가 정해진 것처럼 흘러가기 보다는 작은 선택이 큰 목적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비효과까지 나타나 그것을 시간의 흐름을 제어함으로 작품 내의 과업을 달성하는 점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에서 존재하는 인간, 반대로 시간을 존재하게 하는 인간이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조금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하기 보다는 오히려 만족감을 얻지 못하게 해버렸다. 단지 인상 깊은 문구는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왜 있는 것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왜 아무 것도 아니야 할 이유가 없는가이다. 따라서 존재의 그 자체가 왜 있으며, 그것이 왜 그렇게 아니면 안되는가이다. 따라서 현실의 있음에 따른 물리적인 세계와 그 인간이 있다는 증거가 있는 언어가 불러지는 순간 논리학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우리 인간의 눈에 앞에 나무가 보인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은 나무이라도 그것이 설사 나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가 나무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다. 결국 나무라 나무로서 존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사고에서 태어난 결국 언어의 존재이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나무는 존재하나 우리가 나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의문가는 점은 언어가 있기 전에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언어로서 나무를 말해주지 않아 나무라는 것이 관념적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분명 탄생의 시점은 나무를 나무라고 말하기 전에 있었지만, 그것이 도대체 왜 있는 것이고 차라리 왜 아무 것도 되지 않아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사소한 문제일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의 구심점으로 하여 넓게 펼쳐가게 된다면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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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 예찬 - 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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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이란 책을 보면서 제일 처음 내가 느낀 것은 세속화라는 것은 “전통적 사회에서의 초월적인 가치나 지배구조가 근대 자본주의의 생성에 따라 쇠퇴하여 보다 합리적인 가치나 규범으로 바뀌는 것으로, 신성화(神聖化)의 대립개념이다.”라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세속화라는 것은 신성화의 반대개념이라는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세속화는 합리적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세속화(世俗化)라는 단어 자체가 그렇게 친숙한 단어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세속화를 예찬하고 있다던 책을 보는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역시 세속화에 대한 나의 입장은 친숙하지 못하게 느낀다. 그러나 단지 말하고픈 것은 이 책에서 느낀 부분은 바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전에부터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사고방식이 홀로 어떤 논제를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런 의견이나 사고가 과거에 어느 누군가에게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왔다. 가령 나는 인간의 욕망은 상상세계에 있는 것으로 우리는 상상의 세계에 대해 볼 수 있다. 물론 그 상상의 세계는 우리의 눈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가상의 이미지처럼 우리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그렇지만 그런 욕망의 세계는 글로서 혹은 말로서 적어가기 보다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이미지로 통해 보는 것이 훨씬 욕망을 잘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 욕망을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가슴 속에 묻혀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분출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회화나 조각 등과 같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나오면서 인간의 표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각적인 부분이 너무 흔하고 흔하다면 어떻게 될까나? 인간의 관념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관념 속에 있는 이미지와 존재론적인 부분에서 서로 대립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마 신성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성화는 모든 것을 다 배제하고 어느 특정 대상을 기념하게 한다.

따라서 신성화는 각각의 사고방식을 지닌 인간에게 하나의 권위와 통제력을 갖출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대중사회에서 나타나는 미디어 그리고 미디어 이전에 존재하던 정치적·종교적인 이데올로기 이 모두가 대중들을 통제하기 좋은 방법이다. 특히나 인간이 문자를 사용하고 문자보다는 영상이미지로 더욱 친숙하게 다가오면 올수록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는 신성화라는 이른바 제의 같은 행위에 스펙타클(Spectacle)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런 대중들을 통제하고 대중들에게 미디어가 신성한 하나의 가치관으로 들어서는 것 자체가 대중들이 거기서 얽매이게 하여 대중들을 한 무리의 구경꾼으로 전략하게 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조르조 아감벤은 그런 미디어에 대한 신성함을 비웃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런 비웃음에 대한 내용인지 아닌지 모르나 작품 9화에 나온 포르노그래피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프랑스 사진작가 클로에 데 뤼세의 사진작품은 매우 독특한 연출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 작가는 직접 포르노에 출연했다는 것도 중요하고, 그런 포르노에 출연한 것도 모자라 그 포르노를 가지고 성적인 희롱을 넣어 예술작품으로 승화했다는 점이다. 어느 30대 포르노 배우가 남성과 성행위를 하는데, 상당히 관음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물론 나체의 모습은 남성의 모습과 카메라 앵글에 따라 감추었지만, 그 감추어진 속에 훔쳐보기가 존재하는 포르노의 새로운 미적 감각을 보였다. 의상은 검정색 스타킹에 가터벨트를 찬 것에서 일반 포르노 여배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배우의 얼굴표정이라는 점이다. 보통 포르노 내지 혹은 성적인 부분을 상품매체로 넘기는 것(여자가수, 배우, 아이돌들도 분명 가진다)에서 화면 아래로 훔쳐보는 관객들이 몰래 본다는 관음적인 요소에 흥분하고 만족한다.

그런데 이 이미지에서 성행위를 하는 여성이 성적인 쾌락 내지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개를 돌려(여성의 자세는 사람이 말흉내를 내듯이 무릎과 손바닥을 지면에 고정), 당신들이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경하는 당신을 구경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보통 Sex라는 것도 정치적인 부분에서 많이 이용된다. 파시즘이 만연한 곳에는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고, 가장 억압된 사회가 가장 음탕한 사회라고 한다.

그런 성적인 부분에서 정치사회적인 것과 연계되어 하나의 억압을 정당화하기 보다는 그 정당화를 오히려 전복하려는 요소를 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라면 10장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6분“에서 재밌는 흑백사진이 나온다. 어느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산초판사는 어느 시골 마을 영화관에 들어가 돈키호테를 찾고 있는데, 돈키호테가 영화를 보고 있다면 어떨까?

그런데 그 돈키호테가 고전소설을 원본으로 한 돈키호테 영화를 보고 있다면 어떨까? 내가 나온 것을 내가 보고 놀라고 있다면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세속화 예찬은 대중들이 하나의 구경꾼처럼 몰려드는 세상이 아니라 그 구경꾼들을 오히려 역으로 구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그런 수동적인 관객을 만들려면 하나의 상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상징을 지배받음에 따라 대중들이 스펙타클화하는데, 그것에 대해 전복시킨다면 정말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라는 것을 이용해 정치적인 신성화를 오히려 세속화하여 대중들 스스로가 보는 것에서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라는 것은 하나의 코미디로 되는 기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 초반과 중반에서 조금 어렵다. 물론 막바지에 가더라도 어렵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그런 역설적인 영화연출과 여자 포르노 배우의 표정을 본다면 기대감으로 가득한 우리는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에 젖게 된다.

사실 현대사회는 욕망을 하는 것을 자신이 욕망하기 보다는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여 더욱 사회적인 존재로 되는 듯하다. 따라서 타인들의 기준에 맞추어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신성화로 되어 교조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신성하기 보다는 신성하다고 믿어버리게 한다는 것이 바를 것이다. 아마 그래서 아방가르드 즉 전위예술가들은 그런 신성화된 가치를 전복하기 위해 별로 가치 없는 것들도 가치 있음으로, 혹은 가치 없음을 가치 없음을 나타내었으나 결국 그것이 가치 있음으로 만들어 버려 현대사회에 숨겨져 있는 정치미학을 비웃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책에서는 주석이 달려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과 자료가 많다. 그곳에 있는 도서도 그러나 영화 역시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정치적 도구인 영화에서 영화의 도구인 정치라는 풍자성이 보이는 것이 있다. 내가 추천해줄 장면은 영화 “자유의 환영”에서 변기통 위에 앉는 장면인데, 사실 화장실이 거실이란다. 그리고 이 영화의 시퀀스는 이어지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 있어 정해진 서사구조를 파괴한다. 영화라는 것도 이른바 정치사회적인 이데올로기가 담겨진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본다면야 무슨 의미인지 알듯 싶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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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전에 시학(詩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詩)는 역사(歷史)보다 더 철학(哲學)적이다” 그것은 역사는 이미 지나간 다른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시는 이제 시작될 개인의 역사를 다루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 말은 아직 당신에게 도달하지 않거나 혹은 이제 막 도달한 운명(運命)이란 장난에서 어떤 가혹한 일들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과연 그렇다. 그런 만큼 마이클 샌델 교수의 불후의 명저 “정의는 무엇인가”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시학의 명언과 가장 부합할 수 있는 범주를 나타냈다. 물론 책 안의 많은 이야기들은 이미 지나간 개인의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언제라도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

그 일들은 당신에게 보이고 있는 이 지루한 후기를 적는 필자에게도 일어나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이나 어렵고 충격적인 서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막상 책 내부를 보았을 때는 그렇게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것이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유도하도록 하는 것이 맞았다.

나는 철학이란 학문을 뭐라 딱하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 그 자체와 더불어 이 세상과 모든 존재를 모두 논할 수 있는 초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초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관이겠으나, 적어도 그런 인간관을 도달하기란 만만치 않을 크나큰 모험이다.

전에 본인은 이런 책을 보았다. “철학 -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책에서 어느 정도 철학적인 안건과 주제에 대해 각종 윤리적·논리적·합리적인 사고로 통해 풀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으나 이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그런 생각을 기대한 내가 어리석게 되었다. 철학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내 자신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부분 즉 자기 존재적·윤리적·인식론 등의 내용을 보았다. 그 내용은 답을 주기보다는 답을 오히려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란 서적을 보고 사람들이 충격적이다 말하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보다는 자신들이 그동안 사고의 한계점에 부딪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본인이라고 하여 그런 벽에 부딪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늘 부딪히고 또 부딪힌다.

단지 그 부딪히는 것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는지 아니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는가의 차이다. 우선 이 책에서는 정답을 절대로 주지 않는다. 정답을 주기 보다는 정답의 원인부터 찾아 이럴 경우와 저럴 경우 그리고 다른 인자와 속성, 상황들을 보여준다. 단순히 획일화된 사고로 접근하는 자체를 거부한다. 게다가 2원화적인 대립구도에서 점차 사상적인 혹은 이념적인 부분으로 통해 그 이상의 대립관계도 등장한다.

사실 이 책에서는 마이클 샌델은 정답을 "콕“하고 찍어 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담론들을 찾아 과거로 가고 다시 그 과거의 논제를 현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한다. 일단 서구철학의 기본이 되었으면 윤리학과 정치학의 대가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경우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통해 인간의 가치를 적절히 실현할 수 있어 그 것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합목적성이 이루어야 정의라 한다. 그러나 웃기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옹호하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반대했다.

지금 시대라면 분명 그의 사고는 틀렸으나,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계속 읽히고 연구된다. 그 후에 데이비드 흄, 존 로크, 루소와 같은 사람에 거쳐 벤담의 공리주의에 이르고, 초반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돌아가나 그 이익이 너무 수단화되었다는 점에서 인간 그 자체의 존엄적인 부분이 모자랐다. 물론 여기에 자유론을 저술한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적인 부분을 추구한 공리주의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는지 혹은 더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는지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윤리형이상학정초(이 책에서는 윤리는 도덕으로 됨)”,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내용을 거론하면서 인간은 수단이 아닌 그 목적에 의의를 두어야 했다. 물론 이런 면은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인 존 롤즈의 “정의론”까지 이어온다.

하지만 그렇게 많고 많은 철학자의 서적과 사상을 인용해도 여전히 난관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계속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인간 역시 변했다. 인간이 변하고 변해 복잡 다양한 사회구조에서 정의를 찾는 것은 1가지 관점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무리고 위험한 일이었다. 얼마나 위험한지 그런 사례들을 이 책에서 수없이 풀어 놓았다.

개인의 권리, 타인의 권리, 사회구조와 정치적 상황, 그리고 많은 여파들 그 모든 것을 이제는 단순하게 여기는 자체가 어리석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답을 주기 보다는 문제를 던져주고 답이 아닌 답을 내어주어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은 부분에서 시작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의견에 반박되는 내용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그런 이질적이고 상반되고, 자신과 타인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이익이 오고가는 치열함에 정의는 무엇에 따라 움직일까? 사실 윤리적인 부분을 추구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모든 것의 평가로 이어질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철학에서 제1의 철학이 윤리학이라고 한 레비나스의 말처럼 정의는 무엇일까? 나 자신만을 위해 타인을 못 본채 해야 할까? 아니면 내 자신을 포기하면서 타인을 희생해야 할까? 아니라면 이 모두를 못 본채 도망쳐야 할까?

어느 길이든 혹은 벽이든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던져진 채 끝없는 고민과 혼선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정의에서 중도적인 종착점을 찾기가 어렵다. 나는 오히려 자신이 중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위험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중립적인 가치를 소지한 게 아니라, 중간이라 애매한 부분에서 지탄과 고민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나의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분명 나도 내 자신의 인권과 재산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것만큼 타인의 인권과 재산도 소중하다. 또한 거기에 지나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고민이다. 나 역시 논리적으로 내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논리와 타인에 대한 배려와 미덕, 어느 것을 선택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나만이 아니라 타인도 돌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고 미력한 존재는 국가와 지역사회에는 보잘 것도 없는 미미한 인간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들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존재하고 그 수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런 존재들이 단독적인 부분이 아니라 거대한 부류에 속한다. 단지 서로 볼 수 없음에 인지하지 못함이다. 사회구조는 이런 서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위기로 통해 사회문제를 보여준다. 그런 문제는 결국 언제가 큰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고, 정치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나는 이 책에서 이 말이 생각난다. 어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2부류의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전 부류를 이들의 고통을 보고 가엾다는 생각에 동정심이 유발하여 마음이 불편하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고통을 보고 - 대부분 그들은 가난하고 허약하고 외형적인 외모가 훨씬 부족하므로 - 시각적인 미에서 불쾌감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불편한 마음을 덜기 위해 혹은 이런 일이 아닌 다른 문제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분명 말하지만 이 책에서 답을 찾지 마라! 답은 책을 읽고 있으면서 생각해야할 당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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