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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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哲學)이란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의 사유적 행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대사회에서는 철학이란 사유의 힘은 언제나 뒤로 밀리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이성의 동물이면서 한편으로 감정을 가진 동물이다. 그 이성과 감정에서 우리의 이성은 언제나 마비되어 가고 있고, 감정 역시 메말라 가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으랴?

 

언제나 TV뉴스와 신문기사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막상 그 모습은 우리 일상생활의 주변에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토록 그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이성과 그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따뜻한 가슴은 없는가? 그래서 현대사회는 철학이란 학문적 영역에서 발전해오고 있지만, 철학 그 자체에서는 큰 실용성이 보이지 않는다.

 

철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학문은 배우고 정진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곧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가? 그 대상은 본인일 수도 있으며 가족, 친구, 연인, 심지어는 나와 동고가 없는 자도 가능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철학적으로 미숙한 것 같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람은 주변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다.

 

그리고 <선악의 저편>에서도 사람은 사랑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측은이라는 마음보다 마치 대장부의 풍모처럼 그것 자체에 대하여 자선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그 자체가 당연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말처럼 쉽고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는 것, 사람이 사람에게 어느 감정과 이성으로서 대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살다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을 사는 것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라. 그 평범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 평범한 인생 중에서 한 번이라도 위기의 폭풍이 비켜갈 수 있으랴? 하물며 그 폭풍이 나만 온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지나간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읽어보게 된 강신주 교수님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란 책에서는 그런 고민에 대해 진실한 심정을 담은 시와 그 시에 대한 강신주 교수님의 철학적 깊이를 반영했다.

 

()는 총 21명의 시인 중에서 각각 1개의 시를 뽑아 놓았다. 물론 친절하게도 어느 chapter가 끝나는 마지막 부분에 그 시인에 대한 시집까지 소개해주었다. 평소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인지라 시를 읽고 난 뒤에 강신주 교수님의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연 그 시와 그 시에 대해 연결한 철학자의 사유가 뭔가 모르게 매치가 되는 것 같았다. 시라는 것은 감정적인 어조로 노래할 수 있으나, 그것 역시 우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

 

철학이란 시처럼 감정적 영역보단 이성적 영역에 가까우나, 철학은 보편적 사유에 대한 추구함이 있다. 단지 개인에서 보편적 영역으로 흘러가기에 그 개인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평범한 사람들에게 낯선 공간으로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도 분명 시라는 것에서 감정의 흐름으로 통해 철학적 사유도 추구할 수 있었다. 예전에 한 번 도종환 시인을 초빙한 강연회에 가보았다.

 

시를 낭독하고, 그 시가 주는 의미를 관객에게 알려주고, 그 시의 의미로 통해 인생이란 어떤 가치로 봐야하는 것까지 이야기해주었다. 그냥 시를 볼 때면 그 시에서는 어려운 낱말이나 내용은 없었고, 누구라도 그 시를 보면 이해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 시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힘을 냈고, 어느 방황한 청소년은 도종환 시인의 시를 보고 마음을 새롭게 굳혔다고 한다. 아직 자신은 흔들리고 있으니, 그 흔들림이 멈추면 새롭게 성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대신 조금 안타까운 심정이나, 이 책에서는 도종환 시인의 시는 가구라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집에서 사용하는 의자, 책상, 탁자 등의 소재로 사용한 시다. 그 시에서는 도종환 시인이 아내와 사별 이후 다른 아내를 결합해도 가구라는 시처럼 새로운 아내는 마치 집안에 놓인 하나의 가구처럼 느낀 것이다. 사람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혼자가 아닌 둘이서 사랑한다고 했던가? 도종환 시인의 마음은 그렇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읊어만 볼 수밖에 없었다.

 

도종환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달리 다른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 철학이란 인간을 생각해야 하는 학문이다. 어려운 현학적 연구도 좋으나, 결국 그것이 인간에게 윤택한 삶의 질을 부여하는 점에서 철학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철학은 너무나도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어느 강가에 난간을 부수고 차가 아래로 떨어지면 물이 오염된다고 한다. 사실 차에 사람이 있는데, 강가에 떨어지면 그 사람의 목숨은 무엇일까? 자연의 환경도 소중하나 사람의 목숨도 중요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보는 이 현실 속에서 인간의 소외에 대해 시로서 노래하고, 그것을 극복해 보려하는 시도 있다. 그 시에서 철학적 사유로 인간사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즐거우나, 한편으로 즐겁기보단 괴로운 마음도 든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가난한 자들이 소외되어 인간적 존중조차 받지 못하는 세상에 살아있는 육체가 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죽은 자로 배척당한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인데, 그 생명의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일도 있다. 시로서 그것을 노래하는데, 어떻게 내가 그 시를 보며 즐겁다고 생각할 수만 있을까? 어떻게 보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매우 이중적인 서적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느끼는 내 심정을 잘 파악했는지 강신주 교수님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이란 서적도 있었다. 그것을 읽으면 얼마나 내 마음은 괴로워야 할까?

 

충분히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책에서도 그렇게 즐거움을 찾아내기보단 한편의 어두운 현실을 엿보는 기분이 드는지라 즐겁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그런 것으로 통해 나와 주변을 돌아봄으로서 내 자신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서 즐거움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까? 차라리 그 시에서 나타난 주제로 철학적 사고로 통해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삶을 찾아가는 편이 더 즐겁지 아니할까? 물론 인간이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싶고,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소통과 대화의 동물이다.

 

내가 생각을 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을 하고 싶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는 것처럼 그 소통과 대화는 우리 인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회적 동물 내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 내 옆에 있어야 하고, 내가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단지 있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있음으로서 존재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그것은 시라는 보편적 노래로 통해 인간의 세상사를 보고자 하는 하나의 대화 도구다. 그 중간지점으로 하여 우리는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살아있는 존재인지 생각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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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으로서의 정의
존 롤즈 지음 / 서광사 / 198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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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황경식 교수님이 은퇴한 기사를 보았다. 서울대학교 출신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철학과에서 직접 존 롤즈의 지도 아래 논문을 쓴 그의 행적으로 봐서는 한국의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한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상을 보면 롤즈의 철학과는 많이 격리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가령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를 한 점과 저자 중에서 현직 육군사관학교 교수도 있었다. 이때 저술시기가 1988720일에 초판을 낸 점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저술 시기는 1987년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생활에서 한국의 엘리트로서 철학의 연구실적을 보면 분명 인정해야 하나, 그가 번역한 도서와 저술한 도서에서 정의, 공정, 윤리, 도덕의 원칙으로 보자면 조금 지식인으로서 활약은 저조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서문에 1980년대와 관련하여 롤즈와 맺은 오랫 동안의 인연으로 생긴 애착인지는 모르나 엮은이의 솔직한 심정은, 롤즈의 <사회정의론>이 한국 사회를 전면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를 지향하는 사회 개혁에 크게 보탬이 될 많은 시사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좌익 이데올로기와의 한판의 대결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런 한에서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모든 사회 철학도들의 보다 진지한 관심과 연구가 절실히 요망된다고 본다.”

 

솔직히 말하여 좌익과 우익의 경계에서 롤즈의 만민법에서는 진보라는 것은 역사적 인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 시작은 철학적 인식이라고 했다. 당시 군사정권 아래 지식인으로서 활동하던 이들에 대해 황경식 교수의 저 머리말은 모욕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롤즈의 <사회정의론>까지는 아니나, <정의론>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과연 그 시대에 좌익에 반대되던 우익의 철학에서 롤즈의 철학 역시 당시 한국에서는 좌익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롤즈의 철학은 독일 관념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영국의 자유주의적 공리주의를 추구한 존 스튜어트 밀의 철학을 많이 계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롤즈의 철학은 상당히 이성을 중시하는 점을 알 수 있다. 만민법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우나 유토피아적인 자유주의 혹은 칸트가 원한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많은 이들의 이성적 능력을 요구했다. 현재나 당시의 한국사회에서 이성의 정치라는 것은 무리가 많다. 이성의 정치라는 것은 합리주의적 이기성이 바탕으로 하는 전형적인 공리주의가 아니라, 타인의 이익과 입장을 고려하는 칸트의 정언명령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황경식 교수의 머리말에서 롤즈의 철학은 20세기 말에 완성된 철학이나, 21세기 철학에 매우 어울린다. 정치적인 영역이나 사회적 영역에서 나는 롤즈의 철학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교과서다. 그러나 그 철학적 입장에 대해 번역하여 이 사회에 기여하려던 사람들이 당시 국민들이 당한 억압와 통제에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마르크스주의와의 한판의 대결을 외치는 점에서 오히려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모든 사회 철학도들을 걱정하기보단 본인 스스로가 더 걱정해보는 것이 어떤가 싶을 정도다.

 

물론 롤즈의 서적을 보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개념과 정의에 대해 고민하던 나에게 황경식 교수가 번역하고 직접 롤즈로부터 시사 받음은 존경할 사항이다. 하지만 1988년의 번역본이 2010년에 다시 인쇄되어 나올 때 황경식 교수는 다시 머리말을 수정하여 지금의 한국과 앞으로의 한국에 대해 고민하는 글을 올려야 했다. 사실 1980년대나 2010년대의 마르크스주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유럽국가에선 매우 중요한 학문적 위치다.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이나, 프랑스의 콜라쥬 드 프랑스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같은 경우 세계의 석학들을 배출하는 명문으로서 그곳조차도 마르크스의 가르침은 유효하다.

 

20세기에 걸쳐 유럽의 민주주의가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대립과 결탁 그리고 경쟁과 상호연구로 통해 발전한 사실을 생각할 때 황경식 교수가 적어놓은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도서 머리말은 상당히 구시대적 발상에 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당대에 살아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아담 스미스, 제레미 벤담, 제임스 밀과 같은 영국 대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런 사람조차도 마르크스의 과격한 행동에 대한 원인을 알고 있었고, 그도 역시 공감했다. 단지 그 과격함을 밀은 다소 토론과 대화로서 풀어나가려 했다. 밀이 지성의 성인이란 말이 붙은 이유는 바로 그러하다.

 

밀과 마르크스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나, 그들이 공통적 사고방식은 가난하고 열악한 사람들에 대한 인간애적인 윤리의식이다. 단지 마르크스는 그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고, 밀은 중용의 자세를 지키려 했다. 그런 점에서 밀과 칸트의 철학을 이어가는 롤즈의 철학에서 황경식 교수의 머리말은 당시 엘리트 철학자가 군사정권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론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이나 다른 롤즈의 도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상황이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 이 책의 본문 339쪽에 나와 있다.

 

각 개인은 모든 사람의 동일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 가능한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즉 불평등은 (a)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을 되어야 하며, (b)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에서 모두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에 관련된 불평등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 페이지 334쪽을 보면 롤즈가 주장하는 기본적 가치에 대해 다섯 가지의 항목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1) 첫째, 다음의 목록에 제시된 것 같은 기본적 자유들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결사의 자유, 인격체의 자유와 통합성 그리고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해 규정된 자유, 끝으로 정치적 자유들.

(2) 둘째, 다양한 기회라는 조건 아래에서의 이주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

(3) 셋째, 직책과 책임 있는 지위, 특히 주요한 정치적경제적 제도에서 그것들에 따르는 권력과 특권

(4) 넷째, 소득과 부.

(5) 끝으로,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

 

롤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최소 수혜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보장을 주장했다. 그들의 보장을 원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언젠가 사회적으로 크게 이익이 될 것이란 점이다. 과연 나도 그렇게 생각하듯이, 최근 한국사회의 인구감소가 큰 문제로 이어진다. 앞으로 일할 사람들이 없어서 고령의 노인들이 계속 노동을 해야 하며, 노동이 불가한 노인에 대해서는 국가가 부양하는 연금이 점차 고갈되어간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자원 확보를 해야 하나 젊은 계층의 부족이 결국 재원의 부족으로 이어지고, 거기에 대해 국가전반적인 경제활동이나 특히 군사전략에 큰 영향이 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가정이 출산에 대한 부담과 출산 이후 교육에 대한 부담이 결국 우리 사회에 대한 갈등으로 연결되는 사항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롤즈는 불평등한 경제적사회적 위치는 인정하되, 그들이 충분히 사회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 롤즈의 <정의론>에서 인간이 유일하게 자유주의국가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교육으로 통한 성장이다. 그러나 그 기회가 평등하지 않고 고르지 않을 시에는 최소 수혜자들로 하여금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되는 점이다. 최소 수혜자들에 대한 배려로 통해 그 사회의 극대화된 이익을 목표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라는 2가지 테마의 조건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부분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많은 연계점을 두고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다루듯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과 지위보다는 그 사람이 어느 사회에서 가장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 아테네 폴리스라는 도시국가에 살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소수의 남성이 직접 참여하는 귀족적 민주주의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인간의 능력을 펼칠 수 없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위치적 한계에 가로 막힌다면 그 당사자들은 많은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밀의 경우, <자유론>에서 언급했듯이 분명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엄중한 판결로 통해 그 죄에 해당되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1번의 죄로 모든 인생을 파괴당할 부당함까지 받으면 안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죄의 대가를 치룬 후에는 다시 사회에 복귀하여 그가 제대로 인간사회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또한 그런 사람이 다시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치안의 힘도 필요했으나,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대로 알고자 했다.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역시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있었다. 최소 수혜자들의 박탈감은 결국 사회적으로 비합리적인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롤즈는 <정의론>에서 인간이 부정의를 실행할 경우는 오로지 더 큰 부정의가 생기지 전에 방지해야 할 경우만 그렇다는 점이다. 결국 최악의 상황을 피할 때만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런 극단적인 부정의를 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더욱 부정의를 저지르는 상황을 볼 때가 있다. 롤즈는 인간의 합리성은 오로지 합리적인 이성에서만 찾는 것이지 합리주의적 이기성에서 찾으려 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참여에서 자신의 이익보단 공공선을 추구하나, 투표의 현실은 그런 이성적 판단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도 롤즈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이성을 매우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그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 자세는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체의 자유, 정치적 자유였다. 당시 민주화 운동아래 자유라는 이름은 모두 존재할 수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자유에 대한 롤즈의 철학에서 페이지 99쪽에 나온 자유의 원칙과 그 99쪽인 3장 최소 극대화 기준을 옹호하는 몇 가지 근거라는 편의 번역자가 황경식 교수라는 점에서 모순을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지금의 롤즈의 철학이 통하는 사회라면 나는 절대적으로 찬성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정녕 그것을 이론화하여 번역한 사람이 그런 책임을 외면한 점은 분명 비판받아야 할 점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사회적 통합성의 개념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들 사이의 협동 체계로서의 사회라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적 통합성과 공공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성실한 참여는 그들 모두가 동일한 가치관을 채택한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 구조를 통제하는 정치적 정의관을 그들이 공공적으로 채택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장될 수 있다.”

 

롤즈의 모든 서적에서 시민불복종이란 주제가 있다. 국가기관이나 어느 특정세력이 부당한 권력으로 통해 부정의를 일으킨다면 시민들은 거기에 대해 저항해야 하며, 그들은 이성적으로 대하여 그런 부조리한 요소를 바꾸어야 하는 점이다.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는 결국 시민사회의 이성의 실천이다. 그래서 칸트와 밀의 철학이 계속 겹쳐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나 여유가 되면서도 혹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조건이 못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롤즈의 최소 수혜자의 배려는 그런 이성이 통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 세계를 추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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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 문명 - 프로이트 이론의 철학적 연구 나남신서 1065
허버트 마르쿠제 지음, 김인환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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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자연 상태의 그대로 존재하는 것들을 인간의 노동으로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하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문명으로 이어진다. 결국 인간은 원천적으로 자연과 분리될 수 없었던 존재이다. 가령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노동은 과일이나 야채를 찾아 먹거나 혹은 산짐승 내지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본적인 열량, 비타민, 철분, 단백질 등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영양분들을 섭취한 것이다.

 

그리고 노동이란 과정은 예전처럼 수렵이나 채취가 아니라 농업국가 형성으로 인해 문명이 발생되고, 특히 불이라는 화학적 반응으로 통해 열을 내는 존재를 발견했다. 인간의 위대한 발견인 불은 프로메테우스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나, 더불어 불은 문명이고 그리고 문명이란 이름 아래 나날이 진행되던 대립과 분쟁의 산물이었다. 인간에게 문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의 존재는 문명의 세계에 살아가는 존재이나 그 존재는 문명 속에 가까운 존재인지 혹은 그 이상의 너머에 있는 영역을 탐하는지 말이다. 적어도 인간은 언제나 도시사회와 문명기술 속에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하나, 진심으로 그들은 행복함을 느낄 수 없다. 예전에 한국사회에 농업사회로 진입할 때는 인간에게 그런 정신적 억압이 있었을까?

 

물론 조선시대와 그 이전에는 농업국가와 더불어 중앙집권체계라는 봉건사회라는 한계점이 있었다. 문명의 발전은 조직사회로 통해 억압, 통제, 착취, 권력이 합법화 되었다. 물론 문화인류학자의 말에 의거하면 농업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물이라는 것이기에 치수와 이수의 관료화의 독점은 식량을 통제하는 방법이므로, 대부분의 대중들은 거기에 속박된다는 점이다. 모든 국가는 아니하나 적어도 동아시아국가인 중국을 비롯한 한국의 경우는 이와 많은 유사점이 보인다.

 

그래도 이때는 그나마 자연 상태에 놓인 땅을 경작하여 수확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노동을 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은 인간 본연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욕망을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타나토스, 즉 인간이 가진 중요한 욕망 중에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죽음을 향하는 타나토스는 항상 대립되기도 하나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간 사람들은 타나토스에 대한 본질적 욕망은 지금 현대인보다 덜 히스테리 할 것이다.

 

왜냐하면 농업을 하는 것은 곧 계절의 변화와 토지의 생산력에 우리가 따라가기 때문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농업을 하는데 있어서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지형적인 조건을 많이 따랐다. 뒤에 산이 있고, 강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은 항상 자연과 일치하려고 하는 점이다. 한국의 신화에서는 이런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다루는 창세신화가 있다. 미륵과 석가라는 창세신화는 미륵이 우월하고 뛰어난 존재이나 석가가 속임수를 쓰는 바람에 인간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은 미륵이 아닌 석가가 된다.

 

미륵은 석가의 행위에 분노하여 인간 세상에 온갖 부정한 행위들이 생길 것이라며 심한 저주를 퍼붓고 사라진다. 후에 석가를 따르는 무리 수천 명 중에 2명이 석가가 알려준 화식을 이용하지 않은 채 굶어죽었는데, 후에 소나무와 바위가 되었다. 소나무와 바위는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영원불멸한 세상 즉 죽음에 대한 회귀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자연에 대한 동경하는 인간의 심리이고, 그것이 곧 죽음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죽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영원성의 삶일 것이다.

 

타나토스적인 한국인에 대한 모습에서 일생생활에서 흔히 사람이 죽게 되면, “하늘로 가셨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들은 산에 이장하여 묘소를 만든다. 최근에는 토지가격이나 관리문제, 환경적 여건에 따라 화장을 하는 추세이나, 전통적으로 한국의 문화적 요소를 본다면 이런 죽음에 대한 요소가 즉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끌림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현대는 어떠한가?

 

예전에는 우리 사회나 혹은 유럽조차도 농업이었고, 또는 산, 바다, 강에서 수렵을 즐겼다. 인간에게 자연은 언제나 열린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에게 자연이란 낯선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착취의 존재다. 인간의 타나토스에 대한 욕망은 가로막히게 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회귀성에서 더 이상 도시에 사는 수많은 문명인들은 타나토스의 욕망을 대체할 수 없다. 자본주의화 되던 문명국가 속에 인간들은 황폐한 거리 속에서 억압의 주체로 살아간다.

 

인간의 억압은 본디 태어나면서 아버지에 대한 거세공포로 억압이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다른 억압이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의 40페이지에 그런 중점 단어가 정리되어 있었다.

 

(1) 개체발생 : 유아기 초기로부터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의 억압된 개인의 성장

(2) 계통발생 : 원시 유목부족으로부터 완전히 제도화된 문명 상태로의 억압된 문명의 성장

 

문명의 사회에서 인간에게 언어라는 것은 langue 즉 사회적 당언이다. 하지만 그 사회적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고 하나의 상징이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곧 사회에 순응해야 하고, 그들이 거세공포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된다. 물론 추후에 아버지라고 불리야 할 이 세계는 다시 그 자리를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여 다시 그 후세들에게 거세공포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야할 것이다. 문제는 억압이란 것에서 인간의 해방구가 없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다루는 부분이겠지만, 우리는 놀이문화가 매우 절실하다. 놀이가 왜 중요한가? 놀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죽이기 식의 Killing-Time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억압의 형태를 승화하는 방법이다. 이 책을 보면서 최근 TV와 컴퓨터에 빠져 사는 현대인들에게 타나토스는 이상한 방향으로 전이된다. 즉 인간이 스스로 문명의 감옥에 빠져 더욱 더 자신을 억압하는 형태로 변질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억압이 자유라는 것으로 오도되어 그 자유를 만끽하면 할수록 더욱 더 큰 공허감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삶에 대한 열정은 에로스로 표출되지 않은 채 단지 리비도의 성적무의식 본능에 충실하다. 인간에게 삶의 긍정에 대해 물어본다면 뭔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을 대체할 것들이 없다. 그런다고 하여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 역시 충족되지 않는다. 문명에 의해 소외된 삶과 죽음에 대한 욕망이 다른 문명의 진보로서 채우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문명이 도래해도 결코 자신의 욕망의 귀착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계속 억압된 심리를 표출할 수 없기에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나 계속 제자리 형태다. 자연이 인간의 노동으로 인해 변해가는 문명이 아니라 이제 문명 안에서 자연이 없이 노동으로 채워지는 문명이다.

 

그 자연이란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 자연을 대체할 자연적인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자연의 착취가 종점에 이르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착취하기 시작한다. 그 착취에서 억압에서 벗어날 기회는 바로 놀이이나, 현대 자본주의체계로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획일화가 되어버린 문화정체성에서 인간에게 삶의 욕망인 에로스가 꽃 피우기가 좋은 것일까? 죽음의 욕구에서 그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보다는 심리적, 정서적 죽음이 좋은 듯하다. 인간은 최초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분리될 때부터 억압이 시작된다. 인간에게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회귀하고픈 타나토스의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결코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운명이다. 인간은 시간적으로 비가역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비가역을 돌릴 방법이 없다. 오로지 자연이란 어머니의 세계만이 그를 충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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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진보적 자유주의 - 이근식 자유주의 총서 03
이근식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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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존 스튜어트 밀의 대한 가치는 저자의 마지막 장에서 잘 나와 있었다. "밀의 영원한 위대함은 불공정한 분배와 민주주의의 결함과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것에 있기보다는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올바른 시각과 태도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차가운 머리와 함께 더운 가슴으로 노동자, 여성, 아동, 식민지 백성과 동물과 같은 약자를 위하여 평생 애를 썼다. 풍부한 지식만이 아니라 올바른 윤리의식도 갖추어질 때에 비로소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밀은 이의 전형이라 할 만이다“

 

예전에 한 번 밀의 자유론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내 정치적 입장과 사고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밀의 자유론은 그저 자유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통한 인간과 인간, 사회 그리고 모든 가치와 철학까지 담론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왜 이런 밀과 같은 철학자의 이야기를 귀 담을 필요가 있을까? 밀은 이성의 성자라고 불릴 정도로 넓은 포용력과 철학적 사유를 소지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조차 밀은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고, 항상 신사적으로 대했다.

 

그는 언제나 인간의 인격과 자유, 권리에 대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성이면서 여성의 인권을 중시한 그는 아내인 앨리엇 밀과 함께 한 시간을 통해 만든 <여성의 종속>은 현재까지 페미니스트 인문학에서 큰 중요성을 미친다. 특히 영미계열 인문학자 중에서 매릴린 옐롬과 같은 미국 페미니스트 인문학자에게도 밀의 철학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밀은 왜 이렇게 주장하려고 했을까?

 

밀이 살던 시절은 산업혁명과 동시에 왕정봉건국가 시대에서 자본주의국가체계로 전환되고 있었다. 물론 왕권은 존재하나, 왕권 아래 의회가 존재했으며, 절대주의적인 왕권이 아니라 다소 의회제로 통해 결정하던 국가체계였다. 당시 영국의 정치수준은 그 만큼 높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추방된 카를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앞에서 연설하는 것이나 혹은 마르크스가 계속 저술해도 밀은 마르크스의 행위를 존중하고 인정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와 의사에 대한 권리이며, 직접적인 행동으로 인한 물리적 충격이 없다면 충분히 그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 점과 자유에 대해서는 집회의 권리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다르게 생각해보면 밀 역시 마르크스처럼 노동자, 여성, 어린이에 대한 인권을 매우 중시했다. 당시 17세면 벌써 노동자의 길을 걷고 있었고, 심지어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 공장에서 가혹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제대로 된 음식은 섭취하지 못했으며, 먼지와 소음이 가득한 불쾌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마르크스가 그런 노동에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뛰어다닌 점으로 보아 밀 역시 마르크스의 업적을 인정했으나, 그런다고 마르크스처럼 혁명이라는 극단적 행위를 배제했다. 밀은 이들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런다고 하여 극단적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밀의 특징은 어느 한 곳에 모두 발을 담구는 것보다는 중간에 서서 절충주의로 가려고 했다. 이를테면 진보와 보수에서 어느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가지고 간 것이다. 그래서 밀의 자유주의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서로를 배제하고 의사를 나누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보단 비난으로 이어져 가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추구하는 토론의 과정이 아니었다.

 

밀은 오로지 서로간의 대화로 통해 토론문화를 형성하여 인간의 이성적 행위로서 결정하려고 했다. 그렇기에 그의 노력은 무척이나 고되고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영국인들이 당시 유럽사회에 비해 정치적 수준이 높더라도,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밀은 정치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그가 살던 마을에서 하원의원에 출마하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출마했지만, 밀은 자신이 하원의원이 되어도 절대로 그 마을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오로지 대의를 바라보며 의원을 한 것이다.

 

문제는 너무 자신의 의지에 충실했기에 재선의원은 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바로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고, 모순과 왜곡을 제도적으로 혹은 교육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특히 여성인권에 대해서 논할 때 그는 잦은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사회라면 당연한 것이 그때는 당연하지 못한 것이다. 과거의 진보는 현재로서는 보수의 가치와 동등한 것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을까? 그래서 밀이 보수와 진보 모두 가져가는 것이야 말로 정치적 자유주의가 아닌가 싶다.

 

밀은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과 공존하는 삶을 추구하길 바랐다. 그는 분명 자유주의자이다. 자유주의자인 만큼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운영하던 산업체나 지대의 이윤을 인정했다. 마르크스와 달리 부르주아 경제체계는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도 인정했다. 최근 영국의 수상인 토니 블레어를 비롯해 우파진영조차도 임금지급을 한국처럼 최저임금제가 아니라 생계운영임금제로 통해 근로자의 생계를 보호하려 했다.

지금 고물가 인플레이션에 의해 생계가 어려워지는 한국 서민들에게 저런 제도야 말로 국민경제 발전과 내수산업을 지키는 보전방법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것처럼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생산품에 소원해지더라도 다른 노동자가 생산한 생산품을 구매한다. 예를 들어 신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식품공장에서 나온 제품을 구매할 것이고,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신발공장의 제품을 구매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밀이 따르고 있는 고전경제학 아담 스미스의 논리에 충실한 것처럼 말이다.

 

본래 밀은 아담 스미스의 고전경제학, 데이비드 리카도의 경제학,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아버지 제임스 밀의 철학과 인문학까지 다 섭렵했기에 다양한 사유와 현실에 대한 안목을 높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은 손이라는 것은 저런 국민들이 살아가는 자유로운 흐름에 맡기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스미스의 고전경제학 시대와 달리 마르크스와 밀이 살던 시대는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했기에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으로 설명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에 괴로워하던 대부분의 국민들에서 스미스의 이론은 해결방법이 되지 못한 것이다. 밀도 역시 그 문제들을 인지했고, 그것이 국민들을 좀먹고 있음을 알았다. 게다가 가난한 국민들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못해 국가재정이 부족해지는 점과 가난한 국민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가난을 대물림을 하는 것까지 생각했다. 특히 교육의 문제는 당시 사회적 도덕과 관계있었다. 교육의 기회가 적을수록 범죄가 높았고, 교육으로 통해 좋은 사회구현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그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밀은 벤담처럼 단순히 양적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황경식 교수님의 의견대로 공리주의(公利主義)를 추구했다고 한다. 양적인 부분이 아닌 질적인 부분이었다.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좋았고, 배부른 인간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가 좋았다고 한다. 인간은 본능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의 자유론에서 자유란 자신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위한 선처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에게 이익이 되어 그것이 정신적인 성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어떻게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인간 스스로가 그 사회구성원들에게 도움이 되어 인정받는 때라고 하니, 타인을 위한 선의 추구야 말로 진정한 기쁨인 것이다. 점점 삭막해지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사회구조는 오히려 인간 스스로의 기쁨을 빼앗는 것이 되었다. 그 의미는 밀은 이성을 중시했고, 그만큼의 윤리를 중시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처럼 정언명령의 의지를 밀은 가졌던 것이다.

 

밀의 철학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그렇고, 영미철학에서 큰 획을 이은 존 롤즈의 <정의론> 역시 밀의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특히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보았다. 롤즈 역시 정치적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상호간의 불평등을 인정하나, 그런다고 하여 그 불평등으로 어느 개인에게 인생의 패배와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가 있기 위해서는 개인의 인권이 필요했고, 그 개인이 최소한으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실직자, 미취업자, 장애인, 고아, 이방인, 노인 등등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계층들을 생각하면 절실하게 배울 점이 아닐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좌절하여 인간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음이고, 이들의 외적인 형태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하여금 미적 불쾌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불쾌는 단지 보기가 싫어서인지 혹은 보는 이에게 마음의 아픔을 주는지에 따라 틀리겠지만, 적어도 좋은 예를 아니다는 점이다. 노인은 모르더라도 적어도 고아와 실직자, 미취업자의 경우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밀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에게 항상 범죄의 길과 연결되었다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 역시 범죄를 저지르는 많은 사람들이 불우한 어린 시절과 절망적인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죄를 물어보는 것과 동시에 왜 그런가라는 의미도 봐야한다. 단순히 1회의 범죄를 1회의 처벌로 끝날지언정 그 1회가 멈추지 않고 계속 굴러간다는 점이 이 사회의 병폐인 점을 본다면 말이다.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존재한다.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자유를 논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를 죽이는 행위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밀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한번 생각하게 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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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 "조제프 자코토"라는 인물로서 이 서적은 모든 것을 시작한다. <무지한 스승>이란 서적 명에서 분명 무지라는 것에서 고대 그리스 플라톤이나 혹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또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정답 중에서 일부는 해당되나, 정답 자체에는 근접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지한 스승>에서 자크 랑시에르는 이들의 가르침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왜 조제프 자코토란 인물을 등장시켜 교육이란 인류의 과제를 문제 삼았을까? 그것도 그렇게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그저 역사 속에서 등장한 의원이며 교육자인 그를 말이다. 교육적 부분에서 분명 탁월하나 세계사적인 영역에서 그렇게 큰 비중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자크 랑시에르의 도서를 읽다보면 조제프 자코토란 인물이 이렇게도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불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으나, 적어도 그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계속되는 내분으로 네덜란드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조제프 자코토는 네덜란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에게 불문학을 가르치는 행위는 아이러니하다. 그런데도 그는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학생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낳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교육적인 부분에서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방법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는 전형적으로 교수직을 맡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무지를 알아 그 무지 자체가 모르는 것을 알아주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 소크라테스가 여러 인물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소크라테스 자신에게 돌아오는 공격적 발언을 오히려 역으로 물어봄으로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게 한다.

 

 

산파술을 사용하는 반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대상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알려주나, 그 무지함을 아는 것에서도 소크라테스가 지닌 고도의 언변술에 상대방이 넘어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에 조제프 자코토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교수, 그리고 그 학생에게 프랑스어와 문학을 알리는 것은 그 중간지점의 전환소가 없었다.

 

 

조제프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으로 통해 그저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했다. 1장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그 과정을 되풀이하자. 기적은 날개처럼 날아올라왔다. 네덜란드어로 살아가던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쓰고 이해하고, 수준이상으로 어려운 단어와 내용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가능한 교육상황에서 위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우리는 봐야 하는 것일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런 방법은 매우 위험하다고 나는 지적했다. 그것은 정말 위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사회는 그저 엘리트주의적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재능을 다르게 지니고, 거기에 누구는 우등하거나 열등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좋다. 한국의 교육여건에서 가장 어려운 사실은 spec이란 능력치이다. 최근에 대학입학에서 고교수능에 대한 부담을 없앤다고 하나, 오히려 이것은 더욱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이미 대학입시는 고교준비생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까지 포함된다. 최근 영유아의 영재교육 및 조기유학교육에서 우리는 교육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은 매우 전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가령 존 롤즈의 <정의론>이란 서적을 참고하면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인자는 오로지 교육이다. 교육으로 통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상승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란 조건에서 경제적 조건은 필수이다. 학교를 다니고 교재를 사야하며, 여기에 대한 노동의 상실(학생들 즉 미성년자들은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이나 한편으로 노동의 실시는 교육의 미실시로 연계된다.)이 따르기에 교육을 받는 자들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물론 할 수 있다고 해도 그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활동력은 제한되어 있기에 교육과 노동은 동시에 하기에는 불가한 사항이 많다. 특히 교육의 기회에서 질적, 양적인 조건이 따라붙지 못함은 결국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면 될수록 그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매우 낮아지란 사실이다.

 

 

바로 현대사회에서 엘리트주의 평등교육은 겉으로 평등이란 제한선을 맞추고 있으나, 그 내부에는 심각한 불평등을 합법적으로 맞추고 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관념의 교육이 잘못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학부모에게 묵언의 동의를 받는다. 어떻게 본다면 학생들의 교육은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고, 그 결정에 따라 학생들의 갈 길이 달라진다. 왜 계속 우리는 이런 과정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따로 생각하면 정해진 틀에 의해 거기에 매달릴 경우 우리는 진실로 똑똑해 지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는 그런 행위들이어야 말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자주 나오는 단어인 “똑똑한 바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들은 그것 말고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나, 그 알고 있는 것만 지니고 있어도 충분히 똑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그런 것만 필요로 하고, 교육과정은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진정 바보 만들기 과정은 바보들의 재생산과 연결되고, 그 바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그러면서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자유라는 허무맹랑한 슬로건을 내세운다. 마치 이것은 신의 지배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겉으로 평등이라 하나, 그 내면에 숨은 불평등을 마치 평등한 것이라고 주입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불평등이 있기에 그 평등하지 못함에 대한 보완점 내지 유동성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함이 아닐까? 이 책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노동자들도 글을 알고 예술도 아며, 그들도 화가가 아니더라도 화가라고 할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은 일정한 차이로 두어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에서 삐에르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과 동시에 문화자본도 같이 추가했다. 곧 그말은 인간들은 태생적으로 불평등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어진 환경으로 통해 계속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이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부분에서 고급예술은 재산이나 신분이 높고, 저급은 신분이 낮고 노동자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문화의 공통적 영역에서 사람들의 분류가 일어나고 거기에 대한 계급성과 차별성이 발생된다. 얼마든지 저급이든 고급이든 넘나들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언제나 우월함을 제시하고 싶다.

 

 

따라서 집단적으로 누군가 구분할 필요성이 있고, 자신들에게 쏘일 수 있는 화살의 과녁을 다른 누군가의 광기로서 메우고 싶어 한다. 따라서 인간들의 존재는 매우 신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은 신화라고 자크 랑시에르는 말한다. 이분법적으로 보자면 알고 모르고의 차이를 교육학에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이분법이 바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뭐든지 알기 위해 주입되어야 하는 억압의 욕망보단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용서하지 않음에서 말이다.

<무지한 스승>은 아무 것도 모르는 스승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것으로 통해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소중한 교육관을 제시한다.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인간적 평등을 위한 교육으로서 첫 걸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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