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의 미학 - 서양미술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미와 교코.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한국처럼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이렇게 어려운 나라는 별로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나친 성의 발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상을 어둡게 만들어버리나, 막상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음탕한 세계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남자라면 태어나서 눈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고, 게다가 아주 도발적이고 매력을 뿜는 옷을 입고 가는 것을 본다고 하자. 가끔 시내 길가에 지나가는 도발적인 패션을 하는 여성을 보는 순간 모든 시선이 거기로 꽂힌다. 그래서 성에 대한 얽매이는 자신의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오히려 그것이 있기에 내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읽은 도서도 그러하나 나 역시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한다. “성(成)은 성(性)스러운 것이노라!”, 성이란 매개는 인간이 살아오는 그 순간부터 문제였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추운 날씨, 무서운 짐승, 거기다가 병에 걸리면 영락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방 맞고, 알약 1개 집어먹으면 금방 회복되는 병이 당시에는 죽음의 징조였다. 인간의 수명이 지금이야 80세가 넘어간다고 하나, 내가 아주 어린 시절만 해도 60세 환갑잔치를 하는 곳에는 장수했다고 한다. 시골에 가서 친척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전에 동네에 60세 넘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대개 40~50대에서 죽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출산과 결혼에서 현재 남녀들이 보통 30세 이상이면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불과 20년 전에는 20대 중후반이었는데 말이다. 거기서 여자는 남성보다 2~3살 정도 어린 경우가 많았다. 남자는 군에 가야 하니 대학졸업과 취업, 그리고 결혼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대학이란 제도가 정식 교육절차가 아닌 정식 교육절차로 되면서 연령이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20세 이전에 결혼하여 이미 아이가 탄생하고, 40대에 이르면 손자를 보는 것이 당시 풍속이었다.
성이란 존재는 결국 남녀의 성적인 유희와 쾌락도 중요하나, 한편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위대한 업적이다. 따라서 성(性)은 성(聖)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성(聖)스러운 존재와 가치는 아주 많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가진 가치관에서 인권이 중요하고, 그 인권은 인간이 가진 생명의 대한 권리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삶의 욕망, 즉 에로스라는 것이다. 왜 에로스가 중요하고, 그 에로스가 슈퍼에고와 이드의 중간에 놓인 에고에서 계속 갈등을 누리고 있으나, 만약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인간은 왜 존재하느냐? 라는 의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도 인간에게 과학의 발달은 한편으로 물질적 혜택과 더불어 오류의 편견을 깨어주는 도구가 되었으나, 한편으로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의 목을 향한다. 최근 동식물 관련 연구와 의학에 대한 연구에서 복제생물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 놓여있다. 복제한 동물들이 탄생하고, 언젠가는 인간도 태어나서 버젓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인공수정으로 한 시험관 아이에 대해 생각하면 그들의 생명은 누구의 의지로 태어났는가? 남녀 간의 쾌락과 고통 그리고 강간 등에서 오만가지 감정에 의해 태어난 것이 인간의 존재적 위치다.
성에 대해 어떻게 이래저래 말할 수 있겠냐마는 생명의 모든 시초는 성이다. 왜 신화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서양의 가이아 여신과 한국에서 단군왕검 신화에서 나오는 웅녀는 결국 하늘과 땅의 교합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성(性)에 의해 가장 신성한 성(聖)도 나올 수 있다. 신화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위대한 서사시로 나오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매우 음탕하거나 또는 납득할 수 없는 묘한 이야기가 많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전설에서 어느 양반집의 배경을 말해주는데, 그 양반가문에서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낳지 못해, 산에 가서 칠성님께 기도하여 얼마 후에 태기가 있었다는 시놉시스가 많다.
하지만 신화학을 연구한 대학교 교양교수의 해석으로 남성의 생식능력이 없음에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여성이 외도를 한 것에 대한 미화가 바로 전설에서 많이 보이는 이야기란 점이다. 음란한 것에 대한 신성화와 찬미는 결국 새로이 태어날 자에 대한 운명적 길을 알린다. 그가 보통 인간이 될 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성의 미학>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모두 서양의 중심이다. 그런 부분이 정말 아쉽다는 점과 국내에 대한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나, 이런 도서 역시 국내에서 흔한 도서가 아니란 점이다.
내가 학창시절 멋모르고 보았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미술교과서에 실렸을 때, 왠지 모르게 성적인 호기심보다는 낯설다는 느낌만 들었다. 그것의 진실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볼 수 있다. 얼굴은 안보이나 상당히 허리와 허벅지가 굵고, 가슴 역시 거대한 느낌이 든다. 비너스의 의미는 우리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서 많이 따온다. 가끔 TV선전에서 아주 몸매 좋고 볼륨이 넘치는 섹시한 의상을 입은 여성이 광고하는 속옷선전에서 업체의 로고송이 부드럽게 내 귀를 속사여 준다. “사랑의 비너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비너스는 지금의 미학에서 결코 미인이 아니다. 단 아주 하얀 피부와 생기가 넘치는 머리카락만은 매우 매혹적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피부와 머리카락을 가꾸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인 모양이다. <성의 미학>은 이렇듯이 신화와 종교경전, 문학과 현실의 소재에서 끊임없이 에로스와 에로스의 반대인 타나토스에 대한 부분을 보여준다. 대부분 성이란 것은 에로스의 영역으로 볼 수 있으나, 적어도 나는 성의 미학은 에로스이더라도 그 성의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은 타나토스라고 본다.
타나토스는 죽음의 욕망이다. 성의 행위로서 새로운 생명과 삶의 희망을 찾는 것에서 왜 타나토스가 태어나는 것인가? 성의 주체자에서 결국 남자와 여자가 기본이고, 최근에는 소도미스트인 레즈비언과 게이, 그리고 양성애자도 존재한다. 적어도 양성애자에겐 앞으로 태어날 후손은 존재하나 안타깝게도 레즈비언과 게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이 고맙게도 가족이 없는 고아를 데리고 와서 가정을 꾸려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아가페적인 즉 이상을 가진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그 아이를 데리고 오는 과정 역시 남녀 간의 결합은 전제가 되는 점에서 역시 사회적인 불리함을 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성의 미학>이란 도서표지를 보다시피 백합이란 꽃에 노란 돌기가 올라와 있다. 백합은 순수를 말하기도 하나, 왠지 꽃잎이 주름지어 구멍처럼 보이는 것이 여성의 음부를 나타내는 것 같다. 거기에 올라온 노란 돌기는 꽃가루를 만들어 날리는 것으로 결국 생명의 원천을 알리는 곳이다. 성이란 결국 표지에서 알리다시피 생명의 미학과 연결되는 점이다. 그러나 암술과 수술이 교배하는 순간 꽃이 지거나 혹은 열매를 맺을 후에 죽는 식물이 있다. 에로스를 위한 과정에서 이들은 타나토스로 이어진 것이다. 자신들의 죽음에 새로운 삶이 온다.
어떻게 보면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사지로 찢어진 디오니소스가 다시 생명을 찾아오는 것처럼 죽음에서 삶이 다시 오는 것이다. <성의 미학> 표지에서 백합에서 보이는 노란돌기는 마치 여성의 음부에 있는 클리토리스를 상징하는지 모른다. 죽음과 삶을 모두 가진 여성의 음부, 하지만 여성이 남근이 없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여 클리토리스가 있다는 것으로 여자에게 남자에게만 있는 남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어째든 왜 여성의 음부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존재하는 것인가? 일단 이 책에서도 사티로스와 님프가 성교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남성은 여성의 가슴에 매우 매혹적인 감정을 가진다. 그것은 어린 시절 구강기에 의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남성이 다시 그 가슴을 보면 만지거나 빨고 싶을 욕망이 들 것이다. 과거의 기억, 무의식 속에 가려진 회귀하려는 본능이 타나토스와 에로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명 성적행위에서 생명은 탄생하나, 그 생명을 주는 자는 이미 생명을 가졌기에 그가 바라는 것은 원래의 모습이다. 성적 행위에서 남성의 페니스가 여성의 음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은 남근이 여성음부로 들어가고, 그것이 결국 여성 안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에서 태어나고, 그 후에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인 후에 테베의 골칫거리인 스핑크스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되어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그 후에 딸 2명, 아들 2명을 낳으나,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테베는 저주에 걸린다. 이런 오이디푸스왕의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의 열망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망이란 점이다. 최근 어느 생물학 연구에서 남녀에서 성적인 나이를 비교하는데, 남성은 10대, 여성은 40대라고 한다. 10대의 남성은 막 성적호기심에 눈을 뜨고, 여성은 오르가즘이 최고로 느낄 나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인륜의 기반이 되는 윤리의 금기를 깨기에 용납할 수 없는 죄다. 물론 그렇기에 터부라는 것은 상당히 매력이 넘치는 유혹이다. 망해버린 자신들의 성을 피해 도망친 롯과 그 2명의 딸이, 종족번식 문제로 아버지에게 술은 먹힌 후 성교하려는 시도에서 근친상간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쾌락과 불행인 것이다. 어째든 죽음에 대한 부분에서 남성이 여성 안으로 간다는 것은 타나토스이기도 하면 희귀본능이다. 하지만 무의식적 본능의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삽입과 분리과정에서 타나토스는 자기 안의 정액으로 대체된다.
우리 인간은 그나마 수정이 성공하면 생존이 가능하나, 야생에서 수컷들은 사정을 한 이후 바로 죽는 경우가 많다. 2세의 탄생은 아버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암컷의 경우 알을 낳고 죽는 경우도 많다. 특히 어류나 곤충들은 그런 점이 강하고, 그 중 곤충은 자신이 낳은 알에서 새끼가 태어나면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새끼들의 영양분으로 삼게 한다. 성이란 바로 에로스를 유지하기 위해 타나토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세계에서 메마르고 차갑고 죽음만 가득한 땅에서 푸른 잎이 돋고 꽃이 핀다. 생명의 노래가 대지를 울려 퍼진다.
삶이 존재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성의 미학>이란 도서는 타나토스에 대한 점은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고, 사랑의 에로스만 중시된다. 그런다고 모든 성이 에로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에로틱이 좋은 것 같다. 그림에 보이는 여성의 관찰시점은 관음적인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마치 남자가 그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아니라면 관객들에게 주시하도록 하거나 말이다. 이런 에로스의 세계가 미술에서 많이 드러난다. 성에 대한 소비를 과거에는 대놓고 들어댈 수 없었다, 은밀하게 은어로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숨을 쉬어온 것이다.
지금처럼 TV에서 섹시한 여자가수들이 허벅지를 다 내어놓거나 가슴상반신을 드러날 듯 옷을 입고, 춤을 보면 마치 쇼걸이 봉을 타고 춤을 추듯이 혹은 성교를 하기 위한 자세를 잡는 부분은 많은 남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그것은 성적인 욕망에서 에로스보단 리비도에 대한 강력한 집념을 부여한다. 그런 상황에서 반짝이는 조명 뒤에 동굴과 같이 보이는 배경도 보인다.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여성가수들의 성적인 자극은 당연할지 모른다. 직접 눈이 아닌 이미지로 제공되어 거기에 같이 매료되는 많은 남성과 그 여성가수의 모습을 따라하는 많은 여성들의 모습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보이는 요소이나, 욕망에서 전자는 단순히 성적 그 자체에 빠졌다면, 후자는 아마 욕망에 대해 욕망하는 주체자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남성 화가들이 그렸던 그림이란 점에서 남자의 시선이 지배적인 구조임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지나친 꼰대주의자를 비판하는 의미가 숨어있다. “팜므 프탈”이라고 불리는 무서운 여자들, 대부분 그림들은 남근중심사회에 나온 그림이기에 여기에 당연히 사회적 가치관이 반영된다. 당시 그림이 지금에 와서 그린다고 그렇게 큰 감명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시대적 흐름이란 말이다. 성에서 육체적인 미에 대해 지금과 다른 이유도 그렇다. 적어도 남성의 거세공포는 매우 공감한 부분이다.
문제는 그 거세의 공포가 이제 남성들의 성적억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성들도 여전히 자신의 클리토리스에 대한 관점에서 무조건 남근지배를 해체함이 남녀의 평등에 옳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글쎄다.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와 <아내의 역사>로 보는 여성과 아내의 이야기에서 분명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20세기 초에 분명히 여성이란 존재는 소외된 위치였다. 하지만 200년 전 한국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 군포를 내지 못해 자신의 남근을 자른 남성이나 그 피가 흥건한 남근을 들고 관아에 통곡의 비명을 지른 아낙네를 생각하면 남근이란 것은 사회적인 지배력도 가진 만큼 그만한 부담감도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아이를 가지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성적 행위는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애정행위로 가능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것에 얽매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사람이 먼저 탄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의 억압에서 우리나라는 매우 심각하다. 성의 약자가 곧 사회의 약자다. 그런다고 나는 여성이 성의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가 곧 성의 약자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하도 억울한 일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나그네 방에서 시 구절이나 읊었다는 애절양의 일화에서 그것을 반증할 수 있다.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운전하다가 신호대기를 받은 적이 있었다. 도로가 옆의 인도에 어느 여성이 자기의 아이를 보며 미소 지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시내에서 운전하면서 신호대기 중에 내 밑에 용달트럭 하나가 서 있었다. 거기에 운전하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는 아이를 안으며 서로 노래를 하는 것 같았다. 3가족은 가난하고 조촐한 식구이나 매우 행복해보였다.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욕망을 노래하는 에로스는 결국 생명인데, 그것은 모두 <성의 미학>에서 시작됨이라. 그런다고 하여 모든 성의 미학이 그렇게 에로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의 미학>에서 보여주는 그림처럼 에로틱만 강조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 삶의 욕망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권리다. 그러나 최근 그런 순수한 세계가 흔들리는 것에서 안타깝다. 나라고 하여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서문에서 이 책의 공통저술자가 “포르노그래피가 배를 채우기 위한 패스트푸드라면, 에로틱 예술은 잘 차려진 정찬이란 말이 있다. 오늘날은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종류의 포르노그래피를 접할 수 있다. 그 표현의 노골성이 ‘아직도 에로틱 예술이 필요 한가’하는 물음에 갖게 한다. 하지만 패스트푸드가 범람하는 시대야말로 어쩌면 에로틱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과제를 포르노그래피가 맡았으니, 예술에 암시된 ‘에로틱’을 찾는 데에 급급한 수준을 넘어 에로틱을 암시하는 ‘예술’을 볼 여유가 생긴 게 아닐까?”
많은 그림들이 나올 때에는 예술적 목적보단 사회적 문화적인 생산성에 가깝다. 그리고 현재의 대중문화는 복제기술이 있기에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이런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에 입에 맞추어진 우리들의 모습에서 스펙타클의 합리성을 찾으려 한다. 그림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이 그림을 보면서 남자인 내가 성적욕망이 그다지 올라오지 않았다. 지금의 미와 당시의 미의 기준이 다르기에 당시 미를 미학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석상이 예술로서 만들기보단 하나의 정치적 제의적 의식을 위해 만든 점에서 조금 그렇게 볼 필요가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