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미학 - 서양미술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미와 교코.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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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이렇게 어려운 나라는 별로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나친 성의 발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상을 어둡게 만들어버리나, 막상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음탕한 세계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남자라면 태어나서 눈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고, 게다가 아주 도발적이고 매력을 뿜는 옷을 입고 가는 것을 본다고 하자. 가끔 시내 길가에 지나가는 도발적인 패션을 하는 여성을 보는 순간 모든 시선이 거기로 꽂힌다. 그래서 성에 대한 얽매이는 자신의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오히려 그것이 있기에 내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읽은 도서도 그러하나 나 역시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한다. “성(成)은 성(性)스러운 것이노라!”, 성이란 매개는 인간이 살아오는 그 순간부터 문제였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추운 날씨, 무서운 짐승, 거기다가 병에 걸리면 영락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방 맞고, 알약 1개 집어먹으면 금방 회복되는 병이 당시에는 죽음의 징조였다. 인간의 수명이 지금이야 80세가 넘어간다고 하나, 내가 아주 어린 시절만 해도 60세 환갑잔치를 하는 곳에는 장수했다고 한다. 시골에 가서 친척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전에 동네에 60세 넘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대개 40~50대에서 죽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출산과 결혼에서 현재 남녀들이 보통 30세 이상이면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불과 20년 전에는 20대 중후반이었는데 말이다. 거기서 여자는 남성보다 2~3살 정도 어린 경우가 많았다. 남자는 군에 가야 하니 대학졸업과 취업, 그리고 결혼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대학이란 제도가 정식 교육절차가 아닌 정식 교육절차로 되면서 연령이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20세 이전에 결혼하여 이미 아이가 탄생하고, 40대에 이르면 손자를 보는 것이 당시 풍속이었다.

 

성이란 존재는 결국 남녀의 성적인 유희와 쾌락도 중요하나, 한편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위대한 업적이다. 따라서 성(性)은 성(聖)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성(聖)스러운 존재와 가치는 아주 많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가진 가치관에서 인권이 중요하고, 그 인권은 인간이 가진 생명의 대한 권리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삶의 욕망, 즉 에로스라는 것이다. 왜 에로스가 중요하고, 그 에로스가 슈퍼에고와 이드의 중간에 놓인 에고에서 계속 갈등을 누리고 있으나, 만약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인간은 왜 존재하느냐? 라는 의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도 인간에게 과학의 발달은 한편으로 물질적 혜택과 더불어 오류의 편견을 깨어주는 도구가 되었으나, 한편으로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의 목을 향한다. 최근 동식물 관련 연구와 의학에 대한 연구에서 복제생물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 놓여있다. 복제한 동물들이 탄생하고, 언젠가는 인간도 태어나서 버젓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인공수정으로 한 시험관 아이에 대해 생각하면 그들의 생명은 누구의 의지로 태어났는가? 남녀 간의 쾌락과 고통 그리고 강간 등에서 오만가지 감정에 의해 태어난 것이 인간의 존재적 위치다.

 

성에 대해 어떻게 이래저래 말할 수 있겠냐마는 생명의 모든 시초는 성이다. 왜 신화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서양의 가이아 여신과 한국에서 단군왕검 신화에서 나오는 웅녀는 결국 하늘과 땅의 교합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성(性)에 의해 가장 신성한 성(聖)도 나올 수 있다. 신화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위대한 서사시로 나오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매우 음탕하거나 또는 납득할 수 없는 묘한 이야기가 많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전설에서 어느 양반집의 배경을 말해주는데, 그 양반가문에서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낳지 못해, 산에 가서 칠성님께 기도하여 얼마 후에 태기가 있었다는 시놉시스가 많다.

 

하지만 신화학을 연구한 대학교 교양교수의 해석으로 남성의 생식능력이 없음에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여성이 외도를 한 것에 대한 미화가 바로 전설에서 많이 보이는 이야기란 점이다. 음란한 것에 대한 신성화와 찬미는 결국 새로이 태어날 자에 대한 운명적 길을 알린다. 그가 보통 인간이 될 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성의 미학>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모두 서양의 중심이다. 그런 부분이 정말 아쉽다는 점과 국내에 대한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나, 이런 도서 역시 국내에서 흔한 도서가 아니란 점이다.

 

내가 학창시절 멋모르고 보았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미술교과서에 실렸을 때, 왠지 모르게 성적인 호기심보다는 낯설다는 느낌만 들었다. 그것의 진실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볼 수 있다. 얼굴은 안보이나 상당히 허리와 허벅지가 굵고, 가슴 역시 거대한 느낌이 든다. 비너스의 의미는 우리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서 많이 따온다. 가끔 TV선전에서 아주 몸매 좋고 볼륨이 넘치는 섹시한 의상을 입은 여성이 광고하는 속옷선전에서 업체의 로고송이 부드럽게 내 귀를 속사여 준다. “사랑의 비너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비너스는 지금의 미학에서 결코 미인이 아니다. 단 아주 하얀 피부와 생기가 넘치는 머리카락만은 매우 매혹적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피부와 머리카락을 가꾸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인 모양이다. <성의 미학>은 이렇듯이 신화와 종교경전, 문학과 현실의 소재에서 끊임없이 에로스와 에로스의 반대인 타나토스에 대한 부분을 보여준다. 대부분 성이란 것은 에로스의 영역으로 볼 수 있으나, 적어도 나는 성의 미학은 에로스이더라도 그 성의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은 타나토스라고 본다.

 

타나토스는 죽음의 욕망이다. 성의 행위로서 새로운 생명과 삶의 희망을 찾는 것에서 왜 타나토스가 태어나는 것인가? 성의 주체자에서 결국 남자와 여자가 기본이고, 최근에는 소도미스트인 레즈비언과 게이, 그리고 양성애자도 존재한다. 적어도 양성애자에겐 앞으로 태어날 후손은 존재하나 안타깝게도 레즈비언과 게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이 고맙게도 가족이 없는 고아를 데리고 와서 가정을 꾸려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아가페적인 즉 이상을 가진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그 아이를 데리고 오는 과정 역시 남녀 간의 결합은 전제가 되는 점에서 역시 사회적인 불리함을 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성의 미학>이란 도서표지를 보다시피 백합이란 꽃에 노란 돌기가 올라와 있다. 백합은 순수를 말하기도 하나, 왠지 꽃잎이 주름지어 구멍처럼 보이는 것이 여성의 음부를 나타내는 것 같다. 거기에 올라온 노란 돌기는 꽃가루를 만들어 날리는 것으로 결국 생명의 원천을 알리는 곳이다. 성이란 결국 표지에서 알리다시피 생명의 미학과 연결되는 점이다. 그러나 암술과 수술이 교배하는 순간 꽃이 지거나 혹은 열매를 맺을 후에 죽는 식물이 있다. 에로스를 위한 과정에서 이들은 타나토스로 이어진 것이다. 자신들의 죽음에 새로운 삶이 온다.

 

어떻게 보면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사지로 찢어진 디오니소스가 다시 생명을 찾아오는 것처럼 죽음에서 삶이 다시 오는 것이다. <성의 미학> 표지에서 백합에서 보이는 노란돌기는 마치 여성의 음부에 있는 클리토리스를 상징하는지 모른다. 죽음과 삶을 모두 가진 여성의 음부, 하지만 여성이 남근이 없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여 클리토리스가 있다는 것으로 여자에게 남자에게만 있는 남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어째든 왜 여성의 음부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존재하는 것인가? 일단 이 책에서도 사티로스와 님프가 성교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남성은 여성의 가슴에 매우 매혹적인 감정을 가진다. 그것은 어린 시절 구강기에 의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남성이 다시 그 가슴을 보면 만지거나 빨고 싶을 욕망이 들 것이다. 과거의 기억, 무의식 속에 가려진 회귀하려는 본능이 타나토스와 에로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명 성적행위에서 생명은 탄생하나, 그 생명을 주는 자는 이미 생명을 가졌기에 그가 바라는 것은 원래의 모습이다. 성적 행위에서 남성의 페니스가 여성의 음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은 남근이 여성음부로 들어가고, 그것이 결국 여성 안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에서 태어나고, 그 후에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인 후에 테베의 골칫거리인 스핑크스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되어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그 후에 딸 2명, 아들 2명을 낳으나,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테베는 저주에 걸린다. 이런 오이디푸스왕의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의 열망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망이란 점이다. 최근 어느 생물학 연구에서 남녀에서 성적인 나이를 비교하는데, 남성은 10대, 여성은 40대라고 한다. 10대의 남성은 막 성적호기심에 눈을 뜨고, 여성은 오르가즘이 최고로 느낄 나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인륜의 기반이 되는 윤리의 금기를 깨기에 용납할 수 없는 죄다. 물론 그렇기에 터부라는 것은 상당히 매력이 넘치는 유혹이다. 망해버린 자신들의 성을 피해 도망친 롯과 그 2명의 딸이, 종족번식 문제로 아버지에게 술은 먹힌 후 성교하려는 시도에서 근친상간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쾌락과 불행인 것이다. 어째든 죽음에 대한 부분에서 남성이 여성 안으로 간다는 것은 타나토스이기도 하면 희귀본능이다. 하지만 무의식적 본능의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삽입과 분리과정에서 타나토스는 자기 안의 정액으로 대체된다.

 

우리 인간은 그나마 수정이 성공하면 생존이 가능하나, 야생에서 수컷들은 사정을 한 이후 바로 죽는 경우가 많다. 2세의 탄생은 아버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암컷의 경우 알을 낳고 죽는 경우도 많다. 특히 어류나 곤충들은 그런 점이 강하고, 그 중 곤충은 자신이 낳은 알에서 새끼가 태어나면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새끼들의 영양분으로 삼게 한다. 성이란 바로 에로스를 유지하기 위해 타나토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세계에서 메마르고 차갑고 죽음만 가득한 땅에서 푸른 잎이 돋고 꽃이 핀다. 생명의 노래가 대지를 울려 퍼진다.

 

삶이 존재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성의 미학>이란 도서는 타나토스에 대한 점은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고, 사랑의 에로스만 중시된다. 그런다고 모든 성이 에로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에로틱이 좋은 것 같다. 그림에 보이는 여성의 관찰시점은 관음적인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마치 남자가 그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아니라면 관객들에게 주시하도록 하거나 말이다. 이런 에로스의 세계가 미술에서 많이 드러난다. 성에 대한 소비를 과거에는 대놓고 들어댈 수 없었다, 은밀하게 은어로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숨을 쉬어온 것이다.

 

지금처럼 TV에서 섹시한 여자가수들이 허벅지를 다 내어놓거나 가슴상반신을 드러날 듯 옷을 입고, 춤을 보면 마치 쇼걸이 봉을 타고 춤을 추듯이 혹은 성교를 하기 위한 자세를 잡는 부분은 많은 남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그것은 성적인 욕망에서 에로스보단 리비도에 대한 강력한 집념을 부여한다. 그런 상황에서 반짝이는 조명 뒤에 동굴과 같이 보이는 배경도 보인다.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여성가수들의 성적인 자극은 당연할지 모른다. 직접 눈이 아닌 이미지로 제공되어 거기에 같이 매료되는 많은 남성과 그 여성가수의 모습을 따라하는 많은 여성들의 모습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보이는 요소이나, 욕망에서 전자는 단순히 성적 그 자체에 빠졌다면, 후자는 아마 욕망에 대해 욕망하는 주체자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남성 화가들이 그렸던 그림이란 점에서 남자의 시선이 지배적인 구조임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지나친 꼰대주의자를 비판하는 의미가 숨어있다. “팜므 프탈”이라고 불리는 무서운 여자들, 대부분 그림들은 남근중심사회에 나온 그림이기에 여기에 당연히 사회적 가치관이 반영된다. 당시 그림이 지금에 와서 그린다고 그렇게 큰 감명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시대적 흐름이란 말이다. 성에서 육체적인 미에 대해 지금과 다른 이유도 그렇다. 적어도 남성의 거세공포는 매우 공감한 부분이다.

 

문제는 그 거세의 공포가 이제 남성들의 성적억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성들도 여전히 자신의 클리토리스에 대한 관점에서 무조건 남근지배를 해체함이 남녀의 평등에 옳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글쎄다.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와 <아내의 역사>로 보는 여성과 아내의 이야기에서 분명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20세기 초에 분명히 여성이란 존재는 소외된 위치였다. 하지만 200년 전 한국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 군포를 내지 못해 자신의 남근을 자른 남성이나 그 피가 흥건한 남근을 들고 관아에 통곡의 비명을 지른 아낙네를 생각하면 남근이란 것은 사회적인 지배력도 가진 만큼 그만한 부담감도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아이를 가지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성적 행위는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애정행위로 가능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것에 얽매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사람이 먼저 탄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의 억압에서 우리나라는 매우 심각하다. 성의 약자가 곧 사회의 약자다. 그런다고 나는 여성이 성의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가 곧 성의 약자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하도 억울한 일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나그네 방에서 시 구절이나 읊었다는 애절양의 일화에서 그것을 반증할 수 있다.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운전하다가 신호대기를 받은 적이 있었다. 도로가 옆의 인도에 어느 여성이 자기의 아이를 보며 미소 지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시내에서 운전하면서 신호대기 중에 내 밑에 용달트럭 하나가 서 있었다. 거기에 운전하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는 아이를 안으며 서로 노래를 하는 것 같았다. 3가족은 가난하고 조촐한 식구이나 매우 행복해보였다.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욕망을 노래하는 에로스는 결국 생명인데, 그것은 모두 <성의 미학>에서 시작됨이라. 그런다고 하여 모든 성의 미학이 그렇게 에로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의 미학>에서 보여주는 그림처럼 에로틱만 강조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 삶의 욕망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권리다. 그러나 최근 그런 순수한 세계가 흔들리는 것에서 안타깝다. 나라고 하여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서문에서 이 책의 공통저술자가 “포르노그래피가 배를 채우기 위한 패스트푸드라면, 에로틱 예술은 잘 차려진 정찬이란 말이 있다. 오늘날은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종류의 포르노그래피를 접할 수 있다. 그 표현의 노골성이 ‘아직도 에로틱 예술이 필요 한가’하는 물음에 갖게 한다. 하지만 패스트푸드가 범람하는 시대야말로 어쩌면 에로틱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과제를 포르노그래피가 맡았으니, 예술에 암시된 ‘에로틱’을 찾는 데에 급급한 수준을 넘어 에로틱을 암시하는 ‘예술’을 볼 여유가 생긴 게 아닐까?”

 

많은 그림들이 나올 때에는 예술적 목적보단 사회적 문화적인 생산성에 가깝다. 그리고 현재의 대중문화는 복제기술이 있기에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이런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에 입에 맞추어진 우리들의 모습에서 스펙타클의 합리성을 찾으려 한다. 그림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이 그림을 보면서 남자인 내가 성적욕망이 그다지 올라오지 않았다. 지금의 미와 당시의 미의 기준이 다르기에 당시 미를 미학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석상이 예술로서 만들기보단 하나의 정치적 제의적 의식을 위해 만든 점에서 조금 그렇게 볼 필요가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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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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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이란 이름은 예전에 한 번 들어본 경험이 있다. 문화평론이나 또는 문학비평이라든지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본 수전 손택의 글은 마치 살아있는 양심적 지식인 중 하나인 노암 촘스키 교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단지 노암 촘스키와 다른 점이라면 폭력과 죽음이 남성들에게 나오는 원인에 주목하는 점은 약간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나 같은 경우 마빈 해리스 교수와 같이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빈 해리스 교수 역시 인류의 폭력, 억압, 착취에 대한 시스템과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복했다. 단지 관점만 다를 뿐이지 보고자 하는 것과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같아 보였다.

 

그래도 일단 여성학적으로 글을 적은 것이 아니지만 여성학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폭력을 우리는 한 번 제대로 생각해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읽어본 책들이 내 머리 안에서 계속 흘러간 느낌이 들었다. 우선 보드리야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읽으면서 정말 재밌는 부분을 본 기억이 난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나 TV에서 방영되는 베트남전쟁영화로 통해 더욱 우리는 베트남전쟁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미국에서 수입한 폭력적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흑백TV를 경험했고, 칼라TV를 보면서도 여전히 전쟁을 소재로 한 드라마물이 계속 나왔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 항상 미군이 승리하는 모습을 본다. 제일 기억나는 영화나 드라마가 월남전에 대한 것이었다. “햄버거 힐”이란 것으로 미군이 1969년 아주 피를 흘린 대가로 얻은 성과이나, 1968년 테드 공세 이후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미디어의 영향이 커지고 있었다. 이미 미국 국방부에서 인정한 통킹만 사건이 전세계적으로 공표되고 있는 시점에서 베트남 전쟁이 아직까지 자유주의 도전이란 착각은 여전히 엉뚱한 파괴적 이상주의만 양성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드리야르의 베트남전쟁이야기는 그야말로 정확한 답이다. 우리는 미디어에 의해 모든 사고를 좌지우지 당하는 열렬한 구경꾼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름이 나왔으니 그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큰 기여를 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스펙타클, 흔히 사람들이 뭔가 장황하고 거대한 것들을 보면 “참으로 스펙타클해!”라고 하나 사실 스펙타클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스펙타클이 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체가 스펙타클의 하나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이성이란 기관은 아주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판단하기 쉽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성이 충만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모든 불행과 저주 운명의 굴레가 시작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정의로운 존재를 위해서는 그것에 대체되어야 할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여긴다. “세상의 악(惡)은 정말 사악한 존재였기 때문에 악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악으로 되기를 사람들은 원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옆에서 내 글을 보는 순간 나에게 “당신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이며 또한 너무 부정적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꼭 비딱하게 보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아니 그 사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지나온 과거에서 보여준 상처들이다. 지난 우리 과거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억지로 죄에 몰리거나 혹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시대적인 저항이 가득한 말을 남긴 사건도 있었다. 인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재생산되었다는 점과 그 재생산에서 그 자체에 대한 의문과 문제점들을 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순간 적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전기고문에 의해 파킨스씨 병에 걸리거나 혹은 의자에 앉아 있는 어느 대학생이 있었는데, 어느 누가 책상에 손바닥으로 탁! 하고 쳤는데 억! 하고 죽었다는 사실은 불과 전자는 1년 전, 후자는 25년 전의 인물이다.

 

타인에 대한 고통에 대해 고통을 받은 이들이 아주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사회 역시 스펙타클로 가득한 사회였다. 아니 시뮬라크르의 세계라고 할까? 진실은 언제나 사실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서 만들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 기억해야할 사실이다. 개인의 한 명은 그저 감시와 처벌로 육체와 영혼이 소멸되어가나 사회에서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불안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부 심리에 자리 잡은 불안 심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불안 심리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방법보다 일시적인 방법이 효율적이다.

 

그것은 폭력의 미학으로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서 타인들은 그 폭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고다. 아니면 감옥이란 제도가 정말 감옥이 평범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사람을 격리하기 위한 도구인지 아니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감옥인데도, 그것이 감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인가? 이런 아이러니는 계속 진행된다. 예전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책을 보았다. 휴머니즘이란 인간주의인데, 인간이 인간중심이 되기 위해 이성이란 합리적 사고로 통해 살아야 하나, 오히려 그것이 더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행태로 꼬여갔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말처럼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라는 말은 틀린 것은 없다. 잘못된 세계에 대해 뭔가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폭력의 수단만이 남았다는 점이다. 미국이 9·11 테러에 대한 조치로 반테러리즘을 위한 선언을 했지만, 문제는 그것 역시 테러에 대한 테러였다. 파시즘에 대한 안티 파시즘의 테제가 결국 파시즘으로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계속 반복된다.

 

이런 역사적 비극은 타인의 고통을 하나의 구경거리라는 스펙타클이다. 수전 손택이 지적한 내용이 너무 인상 깊은 부분은 사진을 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사진의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략(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번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이 구문을 보는 순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것은 결국 무대 위에 행해지는 비극으로 통해 우리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을 발견한다. 하지만 사진이란 것은 비극처럼 실제가 아닌 가상도 아니고, 실제를 촬영한 것이 가상의 이미지로 온다. 정말 사진에서 사지가 절단된 아이들, 무차별로 폭격당하는 마을부락, 군인들에게 집단 강간당하는 여성을 본다고 하더라도 남의 일이 되어버린다. 우리도 이런 비극을 불과 60년 전에 겪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고통이고, 그것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면 단지 하나의 눈요기로 끝날 부분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박물관이나 퓰리처상에 올라가 있어서 한 번 궁금증으로 가득한 호기심이 그를 부를지도 모른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박물관에 찾아간 많은 사람들은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인가? 그림이 걸린 벽을 보러 가기 위해서인가?” 이런 의문은 바로 아방가르드 예술에서의 기존 예술과 미학에 대한 반예술과 반미학적인 저항으로 이동된다. 하지만 역설적인 현실에서 그런 반예술과 반미학 역시 예술과 미학으로 바뀌어 버린다.

 

가령 기 드보르라는 상황주의자들은 잠자는데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에펠탑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전화와 자신의 책이 옆에 있는 책에 전시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책 표지를 사포로 만들어버린다. 사포로 된 책표지가 옆에 책과 마찰하는 순간 그 책들은 상품적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포로 된 책표지들이 다시 서점에 올라가는 순간 이들은 중지한다. 그들은 스펙타클에 대한 끊임없는 해체와 파괴, 분열과 훼방을 하지만 현실은 그것마저 스펙타클화한다. 그런 문제는 스승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스승이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대중적 현상이 여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앵무새 죽이기>라는 영미소설을 보면, 어린 시절 스카웃은 자신의 아버지가 변호사로서 흑인을 위해 변호하나 아버지는 마을주민들에게 온갖 횡패와 모욕을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오빠는 죽을 고비를 맞이하고 팔 하나가 불편하게 된다. 당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미국 전역에 깔린 심각한 문제였다. 신의 가르침과 정의의 수호자라 여기던 미국 백인들은 자신들이 강자가 되기 위해 정의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계속 악인을 생산하고, 그것은 사회적 약자로서 흑인이었다.

 

그것은 비단 미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이야기다.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얼굴을 찾아내지 못한다. 마치 남의 고통이 나의 즐거움 내지 정의감을 고취시키는 점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루이15세에 대한 암살을 실패한 다미엥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문과 사형집행에서 육체가 소멸한다. 그런데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 그것을 상징하는 사진이 나왔다. 몽골의 왕자를 죽인 범인이 200갈래로 찢어져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직 살아있는지 동공의 검은자가 아직도 하늘을 보면서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의 살점이 도려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그의 몸은 낭자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 신체적 처형이 아니라 신분에 합당한 상징적 죽음이 되었다. 그나마 그의 사진이 남은 까닭은 그가 상징적인 죽음을 남에게 가한 점과 받은 점이다. 단지 우리의 어두운 과거의 죽음은 그 상징적인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 다르다. 이런 폭력을 보는 대중들의 시선 사진을 보면 왠지 사진관찰자는 이들에 대해 야만인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그 사진을 보는 자신 역시 야만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극단적인 문화우월주의, 인종주의, 지역주의에 맛을 들인 인간들은 자신이 그런 사고를 했다는 자체를 거부하려 한다. 자신의 정의감을 스스로 배반하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그들은 야만의 문명을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유태인들을 그렇게도 몰살한 아이히만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장의 일화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는 평범한 중년 신사였고, 아내와 딸에게 매우 다정한 가장이었으며, 게다가 저녁을 먹기 전에 피아노의자에 앉아 아주 분위기가 좋은 음악을 연주했다는 사실이다. 수전 손택 역시 자신이 느낀 포로가 된 나치군은 무슨 괴물이나 악마와 같은 존재였을 터이나 오히려 그들은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고,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악마처럼 되었나?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든 문화고, 그 문화는 현대사회에 오면서 스펙타클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 미디어로 통해 이미지의 과다수용으로 이미지가 매체로 된 사회로 살아가고 있다. TV공화국이란 말도 있듯이 이제는 스마트폰의 시대다. 인간의 실존성을 넘어 이제는 가상의 인간과 유대를 맺으며 자신들만의 영역을 완성해간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가 마치 현실의 자신을 만드는 것처럼 되어 있다. TV를 보면 항상 우리는 정의로운 편이 우리 쪽이란 사실, 낭만적인(하지만 일반 소시민과 먼 부자들과 엘리트들의 이야기) 사랑을 하는 사람이 내가 바란 사람 등을 보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인 것처럼 생각한다.

 

반대로 거기와 상반된 존재는 강제로 부정한다. 현실의 직시에서 외면의 환상에 눈을 돌리면서 타인에 대한 입장은 점점 낯선 존재가 된다. 그것은 2012년 총선이나 대선 과정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서민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하나, 막상 그런 사람들이 출마해도 아무도 편을 들어주거나 혹은 편을 들어주지 못할망정 소통과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나 실제적인 행동을 전혀 상반된 점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 후보들만 아니라 그 후보들을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하거나 스스로 공평한 시점을 가진 사람인양 행동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부분만 보려한다. 그것이 결국 fact, 사실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의 세계인 이미지에서 fact는 사진사의 사진기 각도나, 줌의 영역, 햇빛과 그림자에 따라 상당히 달라진다. 어느 포로를 머리가 아래로 하여 경사지게 눕게 하여 거기에 주전자를 입에 갖다 댄다. 하지만 카메라의 각을 정방향이 아니라 90도로 회전하면 편하게 포로를 눕게 한 상태에서 갈증을 해소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알고 보면 물에는 고춧가루나 소금이 가득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희생은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로 누군가에는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만든다. <타인의 상처>를 읽으면서 어디서 왠지 익숙한 그림이 보였다. 그것은 에릭 홉스봄의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에서 나온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쟁의 참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이후 테르미도르반동으로 인해 혁명이 와해되자 포병장교로 있던 그가 무력으로서 프랑스 황제가 된다. 이때 그는 여러 나라를 침공하고 그 나라에는 스페인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모습을 연상하면, 그는 큰 말에 앉아 있고, 손가락으로 돌격하자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침범한 나라에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였다. 고야가 실제 목격한 시체를 그린 그림을 보면 기가 막힌다.

 

벌거벗은 남자들이 나무에 매달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남성의 성기가 잘린 채, 한 사람은 목이 나무 가지에 올려져있고, 두 손은 가지 아래 묶여져 있으며 성기 역시 절단되어 있다. 단순히 참수형 내지 교수형으로 죽이면 될 부분을 그들을 알몸에 부분적 절단은 폭력으로 통한 광기의 표출이다. 그 이전에 자크 칼로의 그림은 더욱 기가 막힌다. 어느 죄수가 무슨 처형인지 고문을 당하는지 몰라도, 그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에 어느 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죄를 용서하는지 혹은 묻는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신이라면 정말 이들을 용서할까?

 

진짜 느껴야 할 가치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이 아닌가? 그나마 이 고통도 상징적인 아픔일지 모른다.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이미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어린이, 여자, 늙은이만 사는 마을에 폭탄을 투하하고 무자비하게 총을 갈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정의를 수행한다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있다. 그들은 아폴론이 되어 피리시합에서 패배한 마르시아스를 강제로 피부를 베끼어 죽음과 고통, 그리고 잔악함의 미를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 역시 아폴론의 존재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나오는 아폴론, 그리고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 사티로스는 디오니소스의 종이다.

 

우리의 본연적인 존재 디오니소스의 생명을 아폴론적인 자신들만의 형이상학적 미에 의해 찢기고 발리고 산산조각을 낸다. 타인의 고통은 그들만의 이성, 즉 광기의 합리화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 사진인데, 그 사진을 보면 죄 없는 희생양이 된 사람이 죽었는데도 마치 기뻐하고 기념 촬영하는 이들은 통시적으로 우리가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도 숨 쉬는 공시적인 존재다. 타인의 고통이 가중되어 파괴되어갈 때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단체의 명분을 보장되어 간다. 타인의 고통으로 이루어진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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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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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탄생되지 않았으나 비극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다보면 비극이란 원래 우리 인간이 마음속에 지니던 세계다. 그것은 비극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것이 비극이라 부르지 않았을 터이다. 그래서 나는 비극은 탄생한 것이 아니라 비극은 인간이 원래 지니고 세상에 나온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제 비극은 탄생해야만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인간의 영혼을 찾아, 그리고 인간의 고뇌에서 더 멀리 나아가 예술과 문화로서 세상을 아우르기 위해 말이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는 그런 논조가 아주 힘차게 흐른다. 니체의 문장력은 각각을 읽으면 하나의 공감이 될지 모르나 모두가 모이면 종잡기 어려운 큰 해일이 된다. 그런 것들이 바로 비극의 서열에서 1번째는 아폴론적인 이성, 2번째는 디오니소스적인 무절제이면서도 생명력, 3번째 이 2가지의 화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들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성으로 볼 수 없는 자기 안의 심연세계가 존재한다. 그 심연세계는 우리는 지금 부정하는 형태를 자주 볼 수 있다.

 

니체는 오히려 그것을 열어두라고 하는 것이다. 니체가 아이러니하게 아버지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에 대한 반기독교로 대항한다. 저 사티로스가 뛰어노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말이다. 현세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한 기독교 관념에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인 데카르트의 산물이 진득하게 남아있다.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죄가 가진 존재,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으로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만 요구한다. 그런 상황에서 서구의 역사는 이상하게도 폭력과 더 잔혹한 역사를 반복했다.

 

그들이 부정하는 절대적인 이성, 이데아의 세계에서 도리어 더 혼란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혼란을 부정했고, 그 자체는 마녀의 장난으로 보았다. 마녀의 장난이 있기에 그 마녀에 대한 응징이 있기에 다시 평화와 안정이 온다고 믿었다. 오!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속 편한 수법이란 말인가? 니체의 디오니소스에서는 그런 인간의 마음을 더 인정하고 가속화 하려고 한다. 인간 본성을 숨기지 말고 분출하는 디오니소스의 예술에서 니체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나약함도 강함도 모두 드러내야 했다. 바로 비극으로 말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숨겨두는 채로 살아간다. 그러나 비극에서 우리의 인간이 신화적으로 보는 대상으로 하여금 갖가지 상황과 묘사가 드러난다. 신이란 절대적이고 위대하고 한 치의 오류가 없는 존재라고 하나, 니체가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의 세계관에서 신이란 음탕하고 폭력적이고 정이 넘치고 게다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요소를 추구했는지 모른다. 저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 쾌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아라. 주인은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이 되며, 왕은 거지가 되고, 사형수는 왕이 된다. 미친 듯이 이 디오니소스의 축제는 인간에게 가려진 욕망의 해소가 된다.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었다는 증거다. 마치 실존적인 자아에 대한 증명과 더불어 니체는 디오니소스로 통한 죽음은 새로운 삶을 알린다. 대지의 축복과 은혜를 내리는 신들, 대지의 모신은 2가지의 얼굴을 가진다. 그들은 생명을 빼앗아가나 또 다시 생명을 내린다. 겨울에 모두 말라버린 대지의 황폐함에서 봄에 새로운 생명의 꽃이 피어난다. 인간도 그렇게 자연에 따라 그 이치를 따름이 정답이리라. 신화의 해체에서 과학이라는 것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과학 이전에 기독교라는 절대적인 종교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신화(억압과 폭력)가 되어 우리의 본성을 억압했다.

 

니체가 바란 비극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신화에서 그 신화를 깨고, 본래의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본래의 신화, 그리스라는 곳에서 디오니소스의 종마 사티로스들을 장난이 일상화되는 곳을 말이다. 예술이란 바로 그런 도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아폴론의 세계에서는 생명력이 없는 조각이나 영웅서사시만 등장한다. 생명력이 없기에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생명력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없는 생명을 다시 또 구하기 위해 바닷물을 갈증해소로 여긴다. 소금이 가득한 물이 사람에 들어가면 더욱 더 갈증을 부추기게 되어 결국 자멸한다.

 

로마제국의 정복 욕구는 바로 아폴론적인 인간상의 말로다. 그리스로마의 연결을 생각하나 니체는 그리스와 로마를 분리했다. 그래서일까? 유럽의 르네상스시기를 그리스의 연결이 아니라 로마의 연결이다. 이성의 재탄생이 옳은 것이 아니라 이성은 그저 디오니소스와의 화해만이 해결이다. 예전에 <비극의 탄생>을 읽기 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비극시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자신의 제자에게 절대 비극시를 옆에 두지 않으려 했다. 이에 절대적인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한 플라톤은 자신 스스로 비극시를 불을 태워 그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생명력을 죽이는 이 행동에 대해 니체는 처음에는 비판하나 후에 소크라테스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 음률의 세계에 찾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성은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스위치에 머물러야 하는가? 하기사 디오니소스의 분출된 자에겐 생명의 노래와 더불어 파괴의 욕구도 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겐 사람들에게 마성을 깃들게 한다. 술은 인간에게 삶을 행복하게 하는 활력소가 되나, 때로는 인간에게 독이 되어 정신병자가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술로서 모든 인간들을 지배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의 권한에서 인간은 신의 운명 앞에 농락당한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죽음까지도 삶을 위한 연속으로 보기에 포도주에 취한 자 대부분 죽음보단 디오니소스의 찬미에 노래한다. 바로 인간이 가진 원초적 세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생명력을 가진 자로 말이다. 니체는 그런 사람들이 아쉽게도 많지 않다고 했다. 니체는 당시 유럽에서 불어온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를 혐오했다. 인간 스스로가 약하기를 바라기에 강한 의지가 없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 보았다. 강자는 항상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만하고 교활한 자가 아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힘에 대한 의지에서 강한 자는 동정으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서 대하기 때문에 강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무기와 권력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뛰어넘은 초인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니체의 사상은 독일 나치에 오용되기도 하고, 그에 동조한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지식인들에 의해 오용되기도 했다. 결코 니체는 파시스트로 가득한 나치즘에 동조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이든 그 모든 것에 대한 얽매여 자신 스스로를 거기에 매달리게 하는 것을 우려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바로 그 모든 것들로부터 탈피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의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니체는 무조건적인 죽음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이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 그곳에 위생병으로 자원입대하나 거기에 보이는 것은 시체와 사지가 절단된 부상병이었다. 자신마저 전염병에 의해 제대했으니, 그가 바란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삶의 부여다. 하지만 니체가 바란 디오니소스적인 전쟁은 당시에 문명국가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신화가 숨 쉬고, 문명이 닿지 않은 원시사회야 말로 디오니소스가 살아있는 세계다. 그러나 거기는 아폴론은 없다. 물론 인도와 같이 불교가 강한 곳은 삶의 의지가 미약한 곳이기에 비극으로 한계성이 크다.

 

비극은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합리와 비합리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것이다. 니체가 그토록 목청을 높여 부른 이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비극의 탄생>의 한 부분을 읊어보자.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펴라, 활짝, 더 활짝! 그리고 그대들의 다리도 잊지 마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 올려라. 그대들 훌륭한 무용가들이여, 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려만!

웃는 자의 이 왕관, 장미로 엮은 이 왕관을 스스로 내 머리에 썼노라. 그리고 나 자신이 나의 웃음을 신성한 것이라고 말했노라. 그렇게 해줄 만큼 강한 자를 나는 타인들 중에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춤추는 저 차라투스트라여. 날개로 신호하는 가벼운 자 차라투스트라. 모든 새들에게 신호하면서 날아오를 준비가 끝난 자, 지복에 가득 찬 가벼운 자.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진정으로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성급하지 않은 자, 절대자가 아닌 자, 높이 뛰어오르기와 옆으로 튀기를 좋아하는 자, 나는 스스로 왕관을 썼노라!

웃는 자의 왕관, 장미꽃으로 엮은 이 왕관,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진다! 나는 웃음을 신성하다고 말했노라. 그대들 높은 인간들이여, 나에게서 배울지어다 - 웃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며, 스스로 왕이 되어 그 왕관조차 누군가에게 주고선 자신의 자유로움을 맛보라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자신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느껴보라고 한다. 권태로운 자들에게 그는 그저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권태의 늪에 빠져 평생 그 늪이 자기 세상인 것만 생각하면 오히려 미친 사람이 정상일 것이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도리어 광기가 예술과 학문 그리고 예언의 시작이라고 했다. 광기에 빠진 자들이어야 말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진 공간에서 광인들은 그저 갇혀 사는 죄수가 되었다. 이성의 세계는 자신의 비이성을 광인으로 하여금 수용소에 가두어 이성의 세계가 오히려 광기에 찼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처럼 말이다. 니체는 그 광기의 주체, 디오니소스의 열정을 아폴론적인 세계와 결합과 충돌로서 예술을 그리고 그 절정인 비극을 탄생시키려 한다. 인간 본성을 향하여 말이다. 문명이란 존재는 결국 자연의 세계를 노동으로 통해 이룩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연의 파괴와 인간 본성의 파괴로서 존재된 파괴의 습작물이다.

 

숲에는 님프가 춤을 추고, 여신들은 호숫가에서 목욕하며 서로를 바라보면 능욕과 생식력을 자극하는 생명력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우리의 디오니소스는 안타깝게도 아폴론적인 회화와 조각으로 통해 본다. 아니 이 역시 비극인가? 디오니소스의 열정이 아폴론적인 세계와 조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관찰자가 아니라 서로가 관찰될 수 있을 만큼 모두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 신은 권태와 부정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신,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죽음과 삶이 함께 하고, 개인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나로서도 인간이 가진 4계절은 죽음과 삶의 반복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 역시 없으니,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그 “달콤한 죽음이여 나에게 와라”라는 타나토스가 있기에 에로스의 세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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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성찰.세계론) -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자의 학문 연구 방법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5
르네 데카르트 지음, 권오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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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o, ergo sum.”이라고 하면 당연히 사람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명언을 남긴 르네 데카르트 철학에서 실제 그의 서적인 방법서설을 읽는 순간, 그렇게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나와 스타일이 맞지 않은 점은 분명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형적인 서구의 사상을 기반 되었던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시작한 “cogito, ergo sum” 대신 “je pense, done je suis.”가 오히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이 책에서 말한다.

 

어째든 합리주의 시작인 데카르트의 서적을 보면서 느낌은 점은 뭔가 차가운 물이 내 입에서 들어와 그 물만의 독특한 맛을 주기보단 그저 맹맹한 느낌이라고 할까? 기본적으로 이 서적은 윤리학적인 형이상학보다는 관념과 인식, 그리고 물리학에 대한 부분으로 서술한다. 당시 중세에서 교회의 정치적 압력이 너무 강했을까?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돌고있다 라는 지동설을 발표하고 교회로부터 큰 죄인이 되어야만 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으면 분명히 수학과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적인 요소가 나온다. 지금의 과학에선 다소 어긋난 점은 많은 수학에 대해 생각해보면 정말 치밀할 정도다.

 

수학에 대해 지식수준이 엉터리인 공대전공자로도 대충 수학에 대한 명제를 들으면 그렇구나 하는 정도다. 수학의 공식은 논리적으로 풀어가니 말이다. 그런다고 수학적 지식이 없다고 논리적인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학의 논리에 모든 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논리적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논리가 논리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윤리가 선행되어야 논리가 가능하다고 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그런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논리보단 단지 사회적인 기준, 도덕적인 영향에 의해 이 책을 저술했다는 점이 의미가 크다.

 

그는 분명 과학적인 논리로 전개하고 있으나, 그 당시 사람이듯이 신학에 대한 지나친 편중으로 인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점이 안타까웠다. 스콜라철학자 내지 혹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생각해보면 기원전에 그리스와 그 주변에 기거한 아리스토텔레스 쪽이 훨씬 나에게 납득이 된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s)에 대한 부분이 종교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해부학이나 기계기술은 분명 후대에 발전했으나, 인식과 관념에 대한 세계는 오히려 막혔는지 모르겠다. 그 막힌 상태에서의 데카르트의 논리는 자기의 주장은 강력하게 끌고 가기보단 이것에 대한 설명이 아닐 수가 없음을 말하고 싶으며, 반드시 이것을 대해 여러분들은 통찰해주기 바라는 듯한 문체였다. 그런 상태에서 정신과 육체에 대한 언급에서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 있는 점, 정신이 절대적인 영역으로 남겨두었으며, 그것은 마치 신이 이미 만들어놓았고, 그것에 대한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것은 방법서설이 논리학적인 내용이 담고 있으나 그런 요소가 논리로부터 크게 벗어난 점이다.

 

서구 합리주의 모델로 본다면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가 책 내용 안에서 드문드문 보인다는 점이다. 서구사회 특히 프랑스 주변으로 하는 국가와 민족에서 그는 동양권 문화를 낮추어 보았다. 식인종과 중국인에 대해 같이 묶어 설명하려는 점과 그들 중에서 물론 지식인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는 바이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에게 그들만의 구조화되어있는 무의식의 체계가 있을 뿐이지 윤리적인 이성에서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식인종과 중국인들에 대해 같은 취급을 하고도 그들 사이에 지식인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기만하는 행동이었다.

 

오로지 이성이란 관념은 자신들의 합리에만 찾는 방법서설로는 엄청난 오만과 편견이 녹아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분명 데카르트 자신은 이지적인 인간은 분명하나, 물질에 대한 부분을 모조리 부정하고 그 물질조차 관념이란 존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은 18세기까지 절대적 논변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역사가 전쟁이란 큰 소용돌이에서 그 합리성을 찾아본다는 사실에서 아이러니하다. 단지 데카르트 그 자신과 그 자신이 살던 시절이 합리적이라고 믿고 싶다는 강렬한 의미만 느껴질 뿐이다.

 

자고로 철학이라 함은 비판적 의식이다. 그 비판은 시작은 자신에 대해서부터 자신이 가진 이성과 그 이성에 대한 의문이다. 관념으로 이루어진 사유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의 강력한 흐름만 대변할 뿐이었다. 관념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단지 이 부분은 매우 동의한다. 데카르트는 일부러 군대에 자원하는 부분에서 부상당한 군인을 예로서 인간의 신체손실에 대한 관념적 고통을 나열한 부분이다.

 

이것은 마치 신체가 절단되어 의식에 의해 느낄 수 없으나 무의식적으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점을 말이다. 가령 손이 절단된 사람은 이미 절단되어 없는 부분에서 격렬한 통증이 온다고 한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손실되었기에 그 통증은 분명 심리적인 통증이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가 하나의 통각으로서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든 전반적으로 데카르트의 서적을 처음 읽어본 나에게 이 책은 읽기가 참으로 거북했다. 읽는 내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거부감이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에서 신이 창조한 것보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보는 나의 신화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판단하게 만든 것일까?

 

신에 대한 부분에서 충분히 경건하게 상대방의 의지와 의미를 존중한 준비는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신에 대한 존재성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이 있더라도 그 자체가 신에 의해서라면 합리적인 요소가 비합리적인 부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관념론과 유물론은 계속 끊임없이 대립하여 충돌하여 변증법적인 결론이 멈추지 않고 생산하는 것이 20세기 사상을 지배적으로 다룬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 발상이다. 아니라면 오히려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구조에서 관념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지배당하도록 하는 착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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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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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서 나는 어느 가수의 이름과 그 가수의 노래가사가 생각났다. 가수 이름은 김현식이고, 그의 앨범 5집에 수록된 넋두리란 곡이다. 김현식 5집의 넋두리를 듣고 있는 순간 오로지 절규와 비명, 탄식과 한숨, 허무와 절망으로 메워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김현식은 그 길을 가겠다고 한다. 절망 안에서 외치다가 정말 그는 간경화로 1990111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죽음은 이미 그 5집의 가사에서도 나와 있다. 그 노래는 김현식 자신이 작곡과 작사를 했다. (앨범 표지 후면에 보인 완전 떨어진 운동화가 인상적이다),

 

 

 

쓸쓸한 거리에서 나 홀로 앉아 있어 바람에 떨리는 소리를 들었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설레이는 이내 마음이여

꺼질듯 타오는 거리의 네온을 내 품에 안고서 헤매고 있었지

멀리로 떠나는 내님의 뒷모습 깨어진 꿈이었나

힘없는 내 발길에 다가선 님의 모습 인생을 몰랐던 나의 길고 긴 세월

갈테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들면 가다가 지치면 또 일어나겠지...

꺼질듯 타오는 거리의 네온을 내 품에 안고서 헤매고 있었지

멀리로 떠나는 내님의 뒷모습 깨어진 꿈이었나

힘없는 내 발길에 다가선 님의 모습 인생을 몰랐던 나의 길고 긴 세월

갈 태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 들면 가다가 지치면 또 일어나겠지...

 

 

 

절망 속에서 걸어가는 모습에서 왜 나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통해 보는 것일까? 전혜린 교수에 대해 잘은 몰랐다. 단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문구는 들어보았다. 아주 어렴풋이 어디서인지 몰라도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 마치 니체의 서적들이 생각났다. <비극의 탄생>으로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논하는 것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그 사회적인 통념과 한계를 넘어 보려는 의지를 전혜린의 글을 무섭게도 흘러갔다.

 

책을 보면서 그분의 독일 유학생활이 인상 깊었다. 이때까지 착한 딸로 아버지 말을 잘 따르던 엘렉트라적인 자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 뭔휀대학으로 간 것은 엄청난 도발적인 그녀의 도전이었다. 그런 모습은 후에 잘 나온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난 지식인의 딸이고, 그들은 러시아인과 중국인들이 보이는 한반도 북쪽에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대피한 것이다. 특히 부산으로 그것도 영도라는 애환이 담긴 곳에 온점은 매우 인상이 깊다. 왜냐하면 내가 부산 영도에 살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영도, 그분은 부모님이 전쟁을 피해 왔지만, 나는 부모님이 가난에 의해 왔었다.

 

그분은 거기서 서울대학 법대에 입학했고,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았다. 그분은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고, 특히 니체와 니체에 빠진 작가를 좋아했다. 특히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지와 사랑>에서 그분의 진실한 니체에 대한 사랑을 인상 깊다. 하물며 부록에 나오는 아포리아는 니체의 <선악의 피안>에 나오는 점을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독일유학과 자신의 사랑하는 딸 정화가 보일 때면 허무한 심정에서 벗어나 인생의 가치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발터 벤야민이 러시아혁명 이후 아직 트로츠키가 추방되기 이전에 모스크바로 가서 그가 사랑하던 여성 아샤 라시스와의 만남이 생각난다. 처음에 벤야민은 기대감과 희망으로 갔으나 그녀와의 관계에서 좋지 않게 흘러가고, 권태와 허무 속에서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장에 돌면서 러시아인형과 각종 민속공예품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과 애정에서 상당한 관찰력이 인상 깊었다. 전혜린 교수의 글을 보면 니체와 벤야민의 조합인 것 같았다. 보통 니체와 벤야민은 우리의 손에 잡히기 전에 번역가의 손에 거치나, 이 책은 이미 본인의 손에 창조되었기에 그 문체의 감각이 직접적으로 느꼈다. 그분은 자유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미아와 같았다. 어린 시절 정해진 공부 착한 아이로 산 그분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법학에서 독문학자로 변신하면서 그분이 추구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분의 출산에서 정화의 탄생은 그녀에게 죽음의 의지인 타나토스의 맛을 보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심정과 동시에 그 고비 후에 정화를 손에 직접 만졌을 때 새로운 삶의 의지인 에로스를 맛보았다. 글에서도 마치 정화가 자신의 분신인지 아니면 자신이 정화의 분신인지 그래서 정화로 통해 자신은 영원할 것이라 하는 기대감, 하지만 그분은 자살을 했다. 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가? 천재라는 명칭에서? 아니라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것처럼 박제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절망에 저주했는가?

 

뮌헨대학에서 어려운 유학을 선택한 그분의 글에선 처음에 불안과 위기라는 심정에서 오히려 자유와 편안한 세상을 본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제일 부러운 사실은 그 당시 젊은이들이 동경하고 되고 싶은 존재가 루이 암스트롱이란 사실이다. 재즈음악을 하던 흑인 뮤지션, 거리에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고, 모두 이방인이어도 마치 그 속에 다 녹아들어가 자유분방함이 왠지 매력적이다. 집시와 같은 존재로서 보헤미안 세상을 떠나는 그 삶을 보는 것만으로 왠지 모르게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한국보단 오히려 독일 슈바빙의 거리가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거친 삶을 사는 부산이 이성을 추구하는 서울보다 좋다고 한 점에서 말이다. 아니 어떻게 말하면 인간의 언어는 결국 사회적이면서도 하나의 권력을 지닌 억압이다. 그 억압에서 전혜린은 억압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서 표출한다. 이성의 세계인 서울의 생활에서 자본주의 가속화로 인해 그 언어의 가치는 물질의 가치로 대변된다.

 

유일의 진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회피하고 자그마한 일들, 물질, 사치스러운 생활, 남자에게 의존 또는 기계와 같은 나날의 틀 속에 안면하는 의식, 이러한 것들 속에 자기를 소외해 버리는 생활은 허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 특히 이 사회의 구조와 한국적 풍토 속에서 너무나 신경이 긴장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전생의 의의가 무로 화하는 것이니깐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우리 삶에의 죄인 것이다.”

 

이 문장은 마치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전혜린 교수의 남편을 보는 눈에서 단순히 아내는 남편만의 종속인가라는 의문에서 남성 역시 사회의 종속물이다. “10년 개근, 5시 퇴근, 석간, 취침왠지 모르게 톱니바퀴라는 굴레에 돌아가는 것은 정말 누구로 보이는 것인가? 그래서인지 전혜린 교수의 에세이는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혜린 교수가 보는 이 세상에 대한 의문이다. 자신이 광기에 빠져 니체처럼 글을 적는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지 모르고 돌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속박된 어린 시절, 거기에 대한 저항, 정화로 통한 삶의 의지, 그리고 자살로의 마감들.

 

왜 처음부터 작고한 김현식과 그의 노래 넋두리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인생이 마치 죽음에 대한 강한 충동에 자리 잡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허무로 채운 자신의 그 공백을 허무로서 되돌리는 타나토스의 열망은 글에서 끝까지 보여준 내용이었다. 아마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죽음이란 극단적 선택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증거를 자신 스스로 끝맺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너무 철저하다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삶에서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딸을 뒤로 한 채 죽음을 택한 전혜린, 죽음에서 진실한 삶을 찾아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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