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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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명성을 듣고 있었다. 서구사회의 철학과 사상이 동양으로 유입되면서 현대사상과 철학은 거의 서구사회의 기준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가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동양에서 서구철학에 대한 명백한 판단력과 더불어 세심한 고찰과 정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가라타니 고진일 것이다. 그 정도로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세계는 매우 심오하고 깊다는 점이다.

 

 

단지 문제는 그의 책을 읽으면 보통 고전처럼 읽고 거기에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고전을 가라타니 고진이 해석하여 그것을 새로운 관점과 대안으로 돌려놓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타라니 고진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여지까지 갇혀버린 셈이다. 혹은 가라타니 고진의 책 자체가 어렵고 난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체 자체는 어렵지는 아니하나, 그가 가진 철학과 사유의 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넓다.

 

 

그가 트랜스크리틱에서 왜 비평의 전환이라는 것을 전하려 했는가? 다소 같은 단어의 사용이 반복적으로 나와 약간의 지루함이 오기도 했으나, 그가 보는 사실은 칸트와 마르크스를 어떻게 다시 해석하는가이다. 칸트가 평생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같은 도시에 80년 동안 눈 감는 그 날까지 머물렀다. 심지어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초빙 받아도 가지 않았다. 칸트는 자신이 학문적으로 자유롭기 바란 것이지,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베를린에 갔다면 그의 3대 비판서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류의 고전 중의 고전인 3대 비판서는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칸트의 성과는 인간의 인식과 그 인식으로 통한 실체적 행위이다. 그는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 수단이 아닌 항상 목적으로서 대하라고 한다. 그의 사상은 타인이란 제3의 존재를 인정하는 셈이다. 본래 책은 개인적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객관적인 정보와 과학적인 자료로서 꾸미는 것은 분명하나, 그 모든 것은 개인으로부터 시작이다. 하지만 칸트는 개인의 영역보다는 제3자인 타자로서 보려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칸트의 시도는 항상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신이란 절대적 존재로 인해 유럽은 지동설이란 천체운동을 신봉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동설이어야말로 그의 발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중요성은 단순히 지구가 돌고 있다와 하늘이 돌고 있다 로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돌고 있음은 과학적인 법칙에서 다루는 1부분이나, 그 부분은 모든 사회와 인간들의 사고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지동설이 아닌 천동설이 옳다고 하는 것은 지구는 절대적이고, 그 절대적인 지구는 결국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뒤받쳐주는 하나의 절대적인 권위라는 점이다. 중세 유럽의 과학적 사고는 그야말로 위험한 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절대적 존재가 만들어 놓은 지구야 말로 절대적이지 않은 변방의 별이라는 사실은 모든 종교의 부정이다.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사회는 대중을 신앙심을 부여함으로 만들어내는 정치적 도구와 같았다.

 

 

근대문학의 종언에서도 가라타니 고진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을 걸고 있는데, 그것은 종교가 종교적인 부분을 탈피해야 더 종교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국가와 결탁하고, 자본주의사회구조 이전부터 종교는 자본과 결탁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부분에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를 이은 마르크스가 등장할 때 국가정치 이데올로기에 종교란 그저 착취를 합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주장한다. 종교는 과거 신화를 단절시키고, 그 신화를 미개한 것으로 보아 파괴했으나, 사실 계몽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계시는 결국 억압이란 새로운 신화로 탈바꿈 한 것처럼, 계몽은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른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계몽이란 주변의 영향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깨우치고 나오는 것이야 말로 시작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의 계몽은 분명히 마르크스로 이전된 것은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다소 칸트와 다른 노선을 걸어가나, 그의 행동을 보면 계몽의 현실화를 노력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도서보다는 자본(資本) 즉 das kapital에 대해 고찰해야 하다고 했다.

 

 

그의 과학적이고 사회구조를 밝혀두는 하나의 체계도서야 말로 마르크스의 정신과 사상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현실의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한다. 고전경제학들이 공황을 부정했다고 하나,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는 분명 공황이 존재했었다. 따라서 자본은 그런 공황과 불황, 호황까지 모두 겪은 후에 저술한 것이고, 자본주의 이전인 중상주의 내지 절대왕정의 사회에 대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이나 지침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문제를 계속 되돌아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를 알기 위해서는 자본을 읽어야 하는 점이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이길 거부하고 코뮤니스트로 보기를 바랐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하나의 사상적 뿌리로 맺게 된 것은 그의 친구 엥겔스였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장본인이고, 엥겔스는 마르크스 자신부터 체계화하려 하지 않은 마르크스의 학문을 세분화한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지금도 마르크스의 도서들은 많은 학문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이었다. 당시 마르크스가 자본을 저술할 때 공업화와 자본주의가 활성화하던 영국이었다. 영국의 경우 세계적인 식민지를 건설하고, 많은 무역이 존재했다. 마르크스가 살던 영국에 이미 고전경제학의 대부인 아담 스미스와 진보적인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리카도의 서적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국의 자본주의는 다른 자본주의와 달랐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국내경제만 보고 있을지 모르나, 사실 진정한 자본주의는 세계자본주의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그런 상황을 잘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룬 부분에서 빵의 원료인 밀의 유통과정과 더불어 화폐가 중요한 자본주의의 도구로 상승한 원인 역시 무역에 의해서이다. 가령 화폐 G에서 상품 W로 이전되다가 다시 이윤인 G'가 돌아오는 과정에 W의 이동이나 생산에 따라 이윤이 증가된다.

 

 

대신 기존 무역에선 G-W-G' 과정은 무역의 차이로 빚어졌지만, 공업화와 대규모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G-W-G'는 상인인 자본가가 모든 과정을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임노동으로 통해 잉여가치를 낳음으로서 이익을 발생시키는 점이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면할수록 이윤이 돌아오거나 삶의 질이 향상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수준은 낮아지고 피폐해져 가고 있던 것이다. 결국 비밀은 W의 과정에서 12시간 노동시간 중 6시간은 자신의 노동임금으로 대체될 시간이나 나머지 6시간은 착취로 통해 자본가들에게 돌아가는 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런 착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는 일한 만큼 받아가나, 공산주의는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것이다. 잉여가치가 발생할 경우 그만큼 누군가 착취당하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적으로 물자와 에너지, 토지와 인구는 골고루 분포되지 않은 점이다. 게다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쇼비니즘으로 변모되어 그 민족주의가 국가체계의 존립을 안정화한다.

 

 

가령 일본이 관동군을 일으켜서 대동아전쟁을 일으킬 때도, 그 민족주의적 근성은 천황을 위시한 군국주의라는 강력한 파시즘을 탄생했듯이 말이다. 그래서 네이션-스테이트-자본이란 3가지 구조가 단단히 얽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민족주의에 국가적인 통제력 거기에 자본력의 구조적 결합은 인간들을 거기에 갇히게 하기 좋은 함정일 수도 있다. 가령 나폴레옹의 조카로서 프랑스 왕으로 올라간 나폴레옹 3세는 투표로 인해 뽑힌 군주이나, 그 절대적 지지자는 농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 차르의 경우, 그가 아무리 정치에 대한 점수가 0점이라 거기에 대한 불만으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서 혁명이 성공해도, 결국 러시아 농민의 쇼비니즘적인 요소로 레닌과 트로츠키는 10월 혁명만 성공했을 뿐, 그 이후에는 스탈린에 의해 농락당한다. 물론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가 추방된 후에 트로츠키를 궁지로 넣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외면한 쿨라크를 비롯한 농민 대부분은 모두 재산과 터전을 잃고, 강제노역에 시달린 채 인생을 마감한다.

 

 

생각해보면 국가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참여가 과연 민주적이고,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공화주의냐는 의문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갈림길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예전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란 책에서 밀은 자신의 철학적 자세에서 국민들의 정치보단 시민들의 의한 정치를 원했는데, 시민이란 단순히 시(市)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일정한 기준 이상이 되는 지식인 내지 엘리트들이다. 물론 그들은 적정한 도덕심과 윤리성을 시험받아야 마땅하나, 사실 그 동안의 역사적인 현실로부터 고찰해보면 대중들의 정치적 권리는 정당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도리어 그들은 자유를 위해 자유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 주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재자들은 이것을 잘 이용한다.

 

 

그래서 칸트와 마르크스를 뛰어넘고 싶은 가라타니 고진의 욕망은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임은 분명하다. 그래도 그는 계속 이 책으로서 혹은 계속 그의 사유를 적어감은 어떻게 보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란 현실이 아닌 이상이듯이 이상을 위해 가는 것이 철학자가 아닌가 하는 심정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플라톤에 반대되는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칸트와 마르크스로 통해 현실을 돌아보려는 것은 현재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구조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아가는 것에서 중요하다. 인간 수명이 80살이란 요즘처럼 인간의 생명은 다른 생물에 비해 길기도 하나, 자신의 죽음을 관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죽음과 삶은 언제나 손바닥 위와 아래와 같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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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니체
질 들뢰즈 지음, 박찬국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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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철학자는 나에게 정말 알 수 없는 철학자다. 그는 죽기 전에 나의 철학을 알아주려면 100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100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는지 30년 만에 그의 존재를 알아주었다. 니체의 책을 몇 권정도 읽어봐도 딱히 니체가 무엇일까라고 나는 이야기하기가 참 곤란하다. 그의 문체를 보자면 흐르는 유수와 같이 아름답지만, 때로는 이해 불가한 대립의 날이 가득하다. 그런 니체이기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끌렸는지 아니라면 그는 형이상학의 배반자로서 플라톤을 거침없이 야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혹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로서 너무나도 높은 이상과 기개를 가진 19세기 독일 철학자 겸 문학자로서 니체가 보는 세상은 너무 협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세상이 협소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이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싶다. 니체는 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비판했다. 특히 선악의 저편에서 보인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혐오감은 지나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주어진 것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 의지와 자기 사랑이다.

 

하지만 정말 자기 사랑에 대한 의지가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진 하나의 선택점인지, 아니라면 그것이 억지로 가면으로 씌워진 거짓으로 꾸민 의지인지는 깊이 생각해볼 이유는 있다. 아마도 니체는 그런 거짓 속에 가두어진 우리의 모습을 독설로서 벗겨버리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뒤편에 역자인 박찬국 교수님의 해설을 보면 상당히 이 책에 대해 그나마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지 모른다. 니체의 주요한 사상은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도전이다. 이분법이란 선과 악이란 큰 틀에서 한 쪽은 선이란 절대적 가치라는 것과 다른 쪽 악은 무조건적 배제라는 점이다.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로 통해 인간은 자신의 양심과 의지에 상관없이 그저 단순히 편을 나누기 식으로 적을 만들어내기 원한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그런 집착적인 모습에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들을 니체가 살기 전이나 죽고 난 뒤의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기나 비슷할 것이다. 이분법의 논리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인간을 좀을 파먹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자에게 의지를 하여 그것에 빠져 나올 수 없는 노예가 된다는 사실이다.

 

자유로운 상상과 이야기가 펼쳐진 그리스 시대의 신화의 신비로움을 찬양하여 만든 니체의 비극의 탄생인 만큼이냐 그것을 부정하고 또는 하나의 원시적인 존재로 만드는 기독교적인 요소에서 누가 더 부정한가라는 의문은 결국 인간 본연의 존재에 대한 의문점을 던져준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포도주의 신이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는 수확의 신, 하지만 그는 인간을 미치게 만들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왜 디오니소스에 매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디오니소스와 반대되는 아폴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예술문화 양식은 조각이나 서사시와 같은 일련의 정해진 틀이 제공된다. 그것에 얽매이고 그것에 정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생명력으로서 가지기 보다는 그저 멈추어진 그 자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체가 바라는 디오니소스는 눈에 영원히 보이지 않고, 귀에 영원히 들리지 않은 음악과 무용을 중시했다. 눈과 귀라는 인간의 정보수용매개체로 통해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영구히 변화하는 존재로서 되기를 바란 것이다. 회귀본능 역시 그런 쪽이다.

 

니체가 바라는 회귀본능은 어느 A라는 지점에서 B로 왔을 때 다시 A로 돌아가는 연어라는 생물이 가진 본능이 아니라 다른 지점 C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회귀본능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끊임없는 회귀를 꿈꿀 수 있는 영원불멸일 것이다. 아니라면 인간은 모든 것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인간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되어 계속 변해야한다는 사실이 영구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니체의 철학을 조금씩 보면 불교적인 요소와 조금 일치하는 것이 느껴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여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있음이라는 불교의 경전처럼 니체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인 1가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이분법적인 기독교 관념보단 디오니소스의 무형의 존재가 변화무쌍한 것을 추구하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모든 것은 불변하지 않음에 따른 절대적이지 않음에 따른 각각의 긍정이 따를지도 모른다. 니체가 살던 시절에 프러시아와 프랑스와 전쟁이 있었다. 그는 간호병으로 복무했고, 그 전쟁은 이겼지만, 니체는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승리에 감축에 빠진 독일 사람들을 비판했다.

 

대중이란 모든 존재에 대해 니체는 자신의 의지보단 타인과 사회의 틀에 틀어박힌 것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니체는 보면 그가 광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광기에 빠지지 않으면 정상이 될 수 없는 현실적 모순에 그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세상은 이분법적인 기독교 관념이 통하고, 서로를 관용하기보단 적을 몰아 죽이기를 바란다. 물론 모든 기독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폭력마저 미화시키는 현실 속에서 니체가 폭로하는 그 언어는 유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 <들뢰즈의 니체>의 저자인 질 들뢰즈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다. 아마 그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다른 서적을 보니 그는 죽기 전에 마르크스의 연구도 해보려고 했다고 한다. 니체와 마르크스를 두고 보면 상당히 상이한데 말이다. 들뢰즈가 니체를 파고 들어간 이유는 니체가 주는 삶의 긍정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들뢰즈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가족인 형을 잃었다고 한다. 무서운 전쟁과 가족의 상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가 다른 쪽을 삶의 의지를 주었는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자신으로 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긍정의 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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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 - 문재인의 힘
문재인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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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서 문재인 의원을 그 본질을 알고 있었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힘 내지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사실을. 그 말을 내놓은 사람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과거에 집필했던 문재인, 김인회, 검찰을 생각 한다라는 도서에서 머리말에 참고한 사상가 및 철학자 이름에 (후기)구조주의 대표적인 주자인 미셀 푸코가 있었다.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 등 수 많은 서적과 프랑스 내에서 세계적 지식인으로 활동하던 그 철학자의 서적들을 읽었다는 사실을 확연히 느꼈다.

 

권력을 계보학적으로 풀어감으로서 어떻게 대중을 통제하고, 거기에 권력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결국 그것은 누구를 위해 흘러가게 되는지 말이다. 문제는 그런 행동의 끝에는 언제나 약자들의 눈물과 한탄으로 이어진다는 결과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정치란 무엇인가? 딱히 나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이 기본적인 현황에 대해 크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부부분이 바로 모든 것은 단기간으로 해결되지 않고, 장기간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정치라는 것은 그런 난점이 있다.

 

대신 만약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나버리면 그때부터는 하락의 길을 걷는다. 그런 것들은 이미 잘 보았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사는 주민으로,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으로, 그리고 이공계를 출신이란 점을, 또한 군복무를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많은 정치인들의 입에서 향상 말하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국민을 위하여, 서민을 위하여”, 문제는 그 국민과 서민의 경계와 구분은 어디까지라는 점이 문제다.

 

서민이란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존재인가? 아니면 희망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존재인가? 내가 볼 때는 후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최고의 내용 중에 경제전반적인 문제다. 몇 년째 월급동결도 모자라 월급 삭감까지 당해본 입장에선 경제적인 문제는 심각하다. 서민경제에서 가장 절실히 느끼는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대기업 위주 성장체계이다. 대기업이 위주라는 것은 결국 중소기업에 덜 투자 내지 지원이 된다는 점이고, 그것은 국민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입힌다.

 

솔직히 말해보자. 주변에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중소기업 내지 장사 및 가게와 같은 소규모 단위가 많을까? 당연히 후자에 가깝다. 예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다. 노동자는 자신과 생산하는 물건과 관계가 없을지언정 다른 노동자가 생산하는 물건은 매우 친숙하다고 말이다. 다른 생산자가 생산하는 것을 소비하는 것은 다른 노동자다. 결국 내수산업의 활성화와 구조적 안정은 국가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만약 대기업 위주 수출에 의존하면 관세, 원자재 가격 상승 또는 기타 이유로 무산될 경우 경제적 위기에 빠진다. 내수시장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있다면, 대기업만 아니라 중소기업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중요성은 특히 청년실업과 더불어 일자리 확보에 중요하다. 대기업의 수는 한정되고, 그 채용인원은 한정적이다. 게다가 이들은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자사보단 하도급 내지 협력사로 통해 이윤을 더욱 추구한다. 이런 구조는 하도체계로 통한 원가 하락과 더불어 하도업체에 큰 자금압박을 가한다.

 

만약 국가적으로 이런 문제를 나두는 것은 심각하다. 결국 하도업체가 도산하면, 거기에 매달린 직원들은 실직이 된다. 우리나라와 같이 노동시장이 유연하지 못한 국가에서 해고는 살인에 가깝다. 특히 가정과 식솔이 있는 가장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가정파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많은 정치인들은 바로 이런 이들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분노와 눈물로 소리칠 때 그저 단순한 농성자 내지 불만세력을 여긴다면 과연 희망이 있을까?

 

노력을 해도 이를 악물어도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손가락질, 그리고 자신에 대한 책망은 우리 사회의 깊은 냉소를 만드는 한 부분이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바꾸어가는 것은 정치적 숙제임은 분명하다. 정치는 분명 철학적이야 한다. 정치와 철학은 분리되면 안 될 영역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정치는 그저 권력을 위한 도구로 변모한다. 문재인 의원은 그런 난관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다.

 

읽는 내내 많은 공감을 일으킨 점은 역시 지방에 살아가는 공학출신자고, 그것도 환경공학 전공자란 점에서 4대강 문제는 심히 공감했다. 국가예산이 중앙집권화 되어 결국 토목건설로 가는 바람에 내 주변이나 기타 여러 곳에서 엔지니어업계가 발전하기는커녕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나오고, 월급이 삭감되고, 어느 회사는 합병되거나 도산되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다시 이공계 대학교로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며, 현장에서 이공계들은 제 능력을 발휘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나라와 같이 수출만 의존하고, 인구가 고령화되는 국가에서 과학 기술력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그것의 기본은 과학과 공학이다. 이공계에 발을 끊기면 과학 기술력의 확보는 무리수를 둔다. 또한 과학 기술력의 발전은 억압된 교육환경이 아니라 자유롭고 창의적인 공간이다. 일제고사로 통한 경쟁선상에서 달리는 아이들에게 창의적인 사고란 없다. 획일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만 유도하기에 그들에게 사유의 깊이와 넓이는 없다. 단지 컴퓨터처럼 정답만 찍을 뿐이다. 이 책에서 그런 문제는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문화예술도 그렇다고 했다.

 

예전에 내가 알던 교수님과 식사하면서 어느 영화시나리오 작가가 굶어죽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관문 중앙에 밥 좀 주세요라고 적었으나, 결국 그는 죽었다. 문화예술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중간에서 모두 챙기고,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다. 게다가 국민들 역시 제대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문화예술 영역이 터 없이 부족하다. 사회가 획일적이고 관료적인 구조에서 자유로운 사고는 불가하고, 게다가 의미 없는 인생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국가에서 지금처럼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는 세계에서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돈에 모든 것을 의존하면,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어느 철학자가 자본주의국가에서 자유는 자본에 비례한다고 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다른 의미로 있지만, 국가조직에서 경제, 사회, 문화, 정치에서 여러 가지가 섞여 같이 움직인다. 왕이 봉건사회로 지배하던 시기에도 자본주의가 있었고,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국가에도 자본주의는 있다.

 

어느 멍청한 정치인은 공화주의가 무엇이냐 묻자,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에서 황당한 부분을 보았으나, 정녕 공화주의란 국민들이 전쟁이나 기타 위험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에 위험당하지 않아야 할 국가이념이다. 공화주의가 민주주의와 닮아가는 이유는 국민의 인권이 존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양단하여 공포정치로 통제할 수 있다. 개인은 국가를 움직이기 어렵지만, 국가는 개인을 흔들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따라서 국가의 정치권력이 개입되는 순간 민주주의 영역은 그대로 부수어진다.

 

늘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민주주의 실현은 많은 난점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치적 자유주의 내지 시민주의를 원한다. 문제는 시민주의라는 것은 시민 자체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소양을 갖추어야 만족한다. 공리주의 영역에서 벗어나 공공선이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정치에서 철학이 필요한가? 의미에서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윤리적인 부분이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나 나는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평등하지 않기에 그 불평등을 알아보고 개선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평등하기에 그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 일정 평등이란 기준이 된다면 더욱 심각한 불평등이 일어난다. 그래서 철학은 주변에 불행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정치란 철학을 계속 유지하고 고찰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먼저라는 것은 결국 철학적인 부분이다. 왜 먼저이고, 왜 그렇게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앞날에 대한 비전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중국처럼 광활한 대륙도 없고,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석유도 없다. 오직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재화와 생산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오로지 개발 체계위주는 성공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 유럽역사가 말해주듯이 기술발전은 생산력을 높이나 숙련된 다수 인력 대신 비숙련 소수 인력으로 교체가능하고, 이들은 모두 실직자로 전락한다.

 

계속 기술력이 높아지더라도, 그런다고 하여 첨단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 기술력을 발견하여 만들고 이용하는 것도 사람이다. 모든 정치가 사람으로 시작되고,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 정치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문재인의 힘이라고 이 책에서 나와 있다. 201212월 대통령선거 전에 나온 여러 가지 정당과 정치인 도서에서 나 같은 지역에 사는 소시민에겐 현실적 문제들을 잘 반영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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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 홍신사상신서 24
에리히 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 홍신문화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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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상 깊은 문구 : 그들에게는 자신의 철학은 상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념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좌표계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란 이름은 예전에 기다 겐이라는 일본 철학자가 저술한 <현대사상지도>에서 처음 보았다. 그의 학문적인 사상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독일의 지식인 집단이었다. 당시 1920~1930년대에 활성화하였으나,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핍박을 받자 외국으로 망명가거나 혹은 전쟁이 끝난 직후 다시 독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20세기 중반 전후로 세계의 학문과 사상, 철학의 중심이던 프랑스의 구조주의와 더불어 활발한 연구를 한 집단이다.

 

때마침 세계 2차 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인권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오로지 자본의 자유만을 추구한 자유주의와 스탈린이 추구하던 파시스트적인 공산주의, 기존 유럽사회 만행하던 파시스트이나 겉으로는 사회주의로 둔갑한 사회파시스트들, 이 모든 것이 어지러운 유럽과 전 세계적으로 퍼진 현상이었다. 지식인이란 그저 독재자와 탐욕의 얼룩에 물들인 자들에겐 방해꾼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 중에 발터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망치려고 했으나, 그것이 좌절되어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한 지식인이다.

 

그런 세계 속에서 전쟁도 끝이 나고, 냉전사회가 왔고, 인간은 다시 평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은 그런 복잡하고 난해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서적 <소유냐 삶이냐>는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를 고찰하고 비판하고 생각해보려 하는 철학도서인 것이다.

 

예전에 내가 알던 블로그 이웃이 자신의 블로그 화면에 에리히 프롬의 사진을 올려놓고, 그의 글귀를 적은 놓은 것을 보았다. 당시에 <소유냐 존재냐>이란 것이었는데, 원문이 <To Have or To Be>라는 제목이었다. 이렇게 보아나 저렇게 보아도 가질 것이냐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위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난 뒤에 그가 낸 서적 중의 당연히 명작이 되어버린 이 도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흔히 우리들은 쉽게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만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므로 함께 살아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은 매우 깨끗하고 아름답고 누가 보더라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문구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더 반대로 가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여기려 하는 사람일수록 더 심한 존재의 위험성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을 만큼의 이상을 원하고 노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특히나 우리의 일상을 능동적인 동사형으로 언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명사적인 언어로 채우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사랑하는 생겼다고 가장하자. 그러면 보통 우리는 “나는 애인을 가지게 되었다.” 내지 “나는 애인을 가졌다.”라고 한다. 즉 목적의 대상이 하나의 존재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소유물인 객체로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말을 어떠한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물론 의미적으로 애인이 생긴 점은 같으나 이것은 소유와 존재로서 분리되어 보인다. 전자는 사랑하는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의 소유물이고, 후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소유물이란 점이다. 즉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인지 아니면 그 사람과 유대감인지에서 판가름이 나는 셈이다. 솔직히 이런 사소한 단어와 언어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소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이런 일상적인 흐름에서 우리 인간들은 쉽게 놓치고 만다.

 

왜 그럴까?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하여 의문과 비판, 그리고 자아고찰이 부족하거나 필요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것은 자기가 항상 가지면 가질수록 계속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물이 빠진 항아리이다. 물론 항아리 안에 물이 차있지 않으면 그것은 항아리의 활용가치가 상실하게 되어 그것은 물리적으로 항아리독이라도 실질적으로 아무 필요 없는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항아리가 가진 기능을 사용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항아리에 필요 이상으로 물을 붇게 되면 물은 항아리는 넘칠 것이고, 그 수압이 강할수록 항아리의 어딘가에는 물이 새게 될 것이다.

 

그 물은 새더라도 결국 그 물을 부은 인간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고,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 넘칠 물 이상으로 물을 더 집어넣으려고 한다. 오늘날 이런 모습을 우리 주변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볼 수 있다. 자신에게 충분한 재산이나 금전적 능력이 있어도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거나 약자들을 갈취하거나 착취하는 이들, 충분히 세계적으로 안정화할 수 있는데도, 무기와 병력을 늘려 전쟁의 위협을 야기하는 존재들, 이 모든 존재들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지적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현상일 것이다.

 

자기가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을 남에게 빼앗아하고, 그 빼앗기 위해 준비하고 소모한 자신의 소유물을 대체하기 위해 또 자신의 욕망에 이끌린다. 자기의 소유만이 오로지 정의이고, 그 외의 존재들은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 과연 삶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많은 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목표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적인 요소는 인간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인간이란 통계적으로 나누어 일부 10% 내외의 존재들은 수치적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존재가 언제부터 수치로서 대하여 그렇게 실행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확률의 숫자로서 그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들에게 삶의 기회를 박탈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줄 수 있는 인간으로서 가치는 소실된다면 점점 세상은 각박해 보일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의 그런 비판은 자본주의와 관료주의로 통해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서 결정되고, 관료주의로 통해 인간의 양심은 맹인처럼 변했다. 과거 독일 나치에서 가스실을 보낸 어떤 사람이 자신은 단순히 상부의 지시를 따르기만 바빴다.

 

그는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이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양심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직행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양심에 가책도 없었고, 그저 시키는데로 하는 기계적인 삶을 살았다. 결국 그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함에 따라 전범재판소에서 유죄를 확정 받았다. 에리히 프롬은 그렇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남을 괴롭히는 것보다, 차라리 사디스트처럼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자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여겼다. 그는 고통을 주더라도 그 고통에 대해 타인과 공유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인과의 공유에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가 이 책의 궁극적 목표다. 또한 위대한 성인인 붓다, 그리스도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소유하지 않으려 했고, 그 소유를 남과 공유하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존경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성인을 존경하고 떠받들어도 결코 그 성인들처럼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성인들의 행위를 한 것을 보고 그들을 동조하는 것으로 모든 성스러운 행위를 했다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모이고 모여 그 성스러운 존재를 이름삼아 자신들만의 소유를 기획하고, 그들은 거기에 매달리는 삶을 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삶을 창조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인간의 윤리관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사회로 갈수록 인간들은 니체가 비판하는 “자신만의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그 이상으로는 배타적이다. 자신의 주변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결국 인간은 자신의 주변사람이 결국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계속 상승 중이고, 그 대상은 한계가 있다. 어느덧 그것이 범접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그 무엇이라도 소유할 기회라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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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비판 대우고전총서 24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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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라고 하면 우리 지구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하나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칸트가 무엇을 적고, 무엇을 논했는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칸트라는 사람이 엄청난 철학자란 사실만 알지 그 이상으로 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칸트에 대해 작년부터 본인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칸트의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이번에 <판단력비판>까지 읽게 되었다.

 

칸트의 3대 비판으로 널리 알려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이 세 가지의 비판을 읽으며, 솔직히 이해하는 것은 후자로 두더라도 책 자체를 읽는 것 자체가 지독한 악몽이었다. 문구가 매우 난해하고, 낱말의 전개나 단어의 해석, 그리고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내용들이 이때까지 내가 본 서적 중에 가장 난해한 도서 베스트로 올라갈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전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솔직히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정식으로 칸트를 배우지 않고서는 힘든 작업이란 것을 이번 <판단력비판>을 읽으면서 더욱 느꼈다.

 

그런다고 해도 배움의 길에는 끝이 없고, 모른다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나갈 수만은 없다. 언제 다시 한 번 3대 비판을 다시 읽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때까지 3가지의 비판을 보면서 난이도가 <순수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실천이성비판>이었다. 책의 두께가 굵거나 혹은 서적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난이도가 높았다. 그런데 이 3가지의 서적을 보면서 느낀 점은 칸트의 3대 비판을 읽으면 같이 서로 비교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판단력비판의 경우에는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책 자체 내용만으로 어려우나 순수이성비판의 사전지식의 누락은 이 책에서 다루는 진실한 의미를 놓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문구는 판단력비판에 제시된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마음의 능력 상위 인식능력 선험적 원리 산물
인식능력 지성 합법칙성 자연
쾌·불쾌의 감정 판단력 합목적성  기예
욕구능력 이성

동시에 법칙인 합목적성

(책무성)

윤리 

 

1부터 4까지의 능력과 원리, 대상별로 어떤 점들이 인간의 내부의 의식을 작용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판단력비판은 단순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판단능력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력이란 자체가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을 토대로 그것을 보고 있는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정신활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판단력비판은 판단과 비판이 같은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하는 능력 자체를 비판하고 있기에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순수이성비판이 중요한가에서 그 판단해야할 대상에 대해 인식하거나 사고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원리들이 숨어있는지 말이다. 어떻게 보자면 물리학적인 요소가 많이 통용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칸트의 철학은 순수철학인 형이상학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미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취미능력 판단에서 우선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바로 지성이 필요한 이유가 그러하다. 만약 지식이 없다고 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을 배워 암석에 대한 구조와 더불어 건축학을 알지 못하면 건축미학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조경학을 모르고서는 공원미학을 알 수 없다.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미학(美學)이란 미를 공부하는 학문이기는 하나, 미학 자체에 대한 학문적 배움은 없다. 단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잡다한 것들을 습득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학이란 것은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찌르거나 잘라보는 학문이니, 기본적으로 철학이란 토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만으로는 그것을 다 정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철학적인 영역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인간의 사고로서 취미에 대한 감성적 판별을 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에서 과연 단순히 자연에 대한 미만 존재하는 것일까? 칸트의 미는 단순히 자연의 숭고함이나 위대한 신앙심을 담은 건축물만도 아닌 것 같았다.

 

본문과 주석을 잠시 찾아보면 <나는 인민의 땀을 그처럼 불필요한 것들에 소비하는 권력자들의 허영을 꼭 루소와 같은 투로 꾸짖을 수 있다 - 아마도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에게는 사치품이 넘친다.”의 끝 대목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인간학 강의⌋>처럼 칸트가 직접적으로 루소가 언급한 문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글을 전개하지 않으나, 적어도 앞의 문장들을 보고 있자면 칸트의 미적인 감각에서 아름다움을 눈에 당장 보이거나 귀에 들리거나 냄새를 맡거나 피부에 닿거나 입 안에서 맛을 느끼는 것처럼 개인이 직접적으로 신체의 오감을 통해 대상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가령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의 미의 가치를 논하므로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이 가지는 감각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수이성비판>을 읽어야 이 책이 어느 정도 연결되듯이 한편으로 <실천이성비판>까지 파악하는 편이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야할 사항이다. 루소의 문구처럼 루소의 주장은 결국 가난한 자들은 당장 생계에 곤란하여 큰 위기와 고뇌로 슬퍼하고 있는데, 어느 소수의 인간들은 사치품으로 장식하여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점이다.

 

따라서 저 문구를 보자면 칸트가 루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프랑스나 혹은 가난한 유럽의 가난한 사람이 어려워하는 것을 공감하는 셈이고, 그것은 정치가나 혹은 권력자들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함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라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처럼 선험적인 이성 안에서 지성을 통해 판단하여 그것에 대한 원리와 논리를 찾는 것도 좋으나, <실천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선(Goods)을 베푸는 것 역시 중요한 미라는 점이다.

 

결국 미라는 것은 진과 선의 영역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그것이 예술이란 하나의 체계에서 다루고 있으나, 예술 역시 인간의 삶과 밀접하고, 인간의 정신과 상당히 밀접하다. 인간이 가진 사고가 그대로 예술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을 광학으로서 삶을 보고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만큼 판단력비판에서 인간의 지성을 쌓고 판단하여 그것에 대한 윤리적 이성으로 그 대상을 판단하는 것 자체까지 재비판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칸트는 인간의 교조주의적인 관념과 논리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논리를 위한 논리가 아니라 윤리가 아닌 논리라는 점이다. 칸트의 인간에 대한 가치란 인간은 수단이 되는 대상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대상이란 점이다. 즉 인간의 존재는 고귀하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실천이성비판>에서 자기의 이성적인 가치 아래 자신의 선을 남에게 건네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목적의 대상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남에게 선을 주거나 혹은 남의 선을 빼앗아 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전자의 경우 쾌감을 남에게 주는 것이고, 후자는 남에게 불쾌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 위에서 보이는 4개의 세로와 4개의 가로로 이루어진 도식에서 1번 라인은 명제를 구분되는 셈이고, 2번은 <순수이성비판>으로 연결되고, 4번은 <실천이성비판>으로 연결된다. 결국 판단력의 비판은 자신이 사물을 보는 것도 그러하나 자신이 하는 판단하고 실천하는 행위 자체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학에 대하여 적은 <판단력비판>에서 정말 아름다움 것들이 무엇으로 봐야 할 것인가? 일단 우리가 예술가 중에 유명한 인물을 상기시켜보라고 하면 보통 파블로 피카소가 생각날 것이다. 미적 감각을 다루는 점에서 보편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것에서 천재화가 피카소의 거명은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피카소는 우리가 다 알고, 그가 무슨 그림이 있는지 대략 몇 가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가 무슨 삶과 사고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일단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좋은 예술은 천재만이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천재만이 남이 만들지 않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의 예술에 대한 담론에서는 진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천재의 창조성이었다. 그 뒤에 그 누구든지 완벽하게 따라 해도 그것은 원래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할 모조품이고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리 인간이 아름다운 새의 울음소리를 잘 내어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 자체 역시 자연적이고 이루어지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피카소를 예로 들었을까? 어느 책에서 재미있는 피카소의 일화가 등장한다. 피카소가 아주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너는 정치를 하면 대통령이 되고, 신부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피카소가 말 한 마디를 더 붙이어 문구를 완성했다. “나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되었다.” 천재화가 피카소의 탄생이란 이렇게 되었다. 피카소가 어떻게 하여 큐비즘으로 혹은 초현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을 만들었을까?

 

그는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보았고, 제2차 세계대전 시의 나치의 포로로 잡혔으며, 그 외에도 프랑스 자체의 정부로부터 억압도 받았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위로하고 싶었고, 그들의 슬픔을 일그러진 이미지로서 그림판으로 내세웠다. 웃기게도 그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부르주아적인 가치관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던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엄청난 거액이 붙여질 정도로 높은 가격이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신의 예술로서 저항했으나, 결국 자신의 예술품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엄청난 상품이 되는 반전을 겪었다.

 

문제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는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인간의 가치관이 상실하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 그리고 보니 피카소의 그림들은 결국 전쟁과 기아, 분쟁이 원인이었다.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독재자의 최후의 목표는 대부자라는 점에서 물질만능주의자들의 탐욕에 희생되어간 자들을 그렸는데 말이다. 어째든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예술이 왜 천재로부터인가에서 피카소의 예로 보면 된다. 일단 천재가 기존에 없던 것을 보고 만들고 했으니, 천재만이 예술을 크게 기여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에서 창조하는 것은 모방이란 말이 있다. 비록 제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이 없으면 불가한 것이다. 피카소가 그림을 아주 훌륭히 그려도 그가 처음에 미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그가 만든 위대한 작품은 없었다. 단지 다른 방면으로 예술이 나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예술에서 칸트가 최고로 보는 것은 미술이었다. 미술에 인간의 감성과 의식이 가득하며,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 하여금 왜 저렇게 되었을까? 라는 사고와 그 사고에 대한 판단을 주게 되면, 그 판단으로 통해 삶에 대한 윤리적인 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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