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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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니체의 서적은 읽는 그 순간만큼은 곤란하지 않으나, 그 순간이 지난 다음 순간, 또 이후의 순간이 연결되면 상당히 곤란해지기 시작한다. 뭔가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하다가 마치 다른 이야기로 빠지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책의 역자인 김정현 교수의 이야기처럼 니체는 자신의 도서들은 10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인정받을 것처럼 니체가 작고한지 112년 지난 이후 니체는 분명히 큰 영향은 주고 있으나, 그런다고 하여 그렇게 쉽게만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다.

 

 

전에 읽어보았던 비극의 탄생과 반사회적고찰은 어느 정도 공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쉬운 도서는 아니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관으로 통해 그리스의 그 웅장하고도 진실한 문화를 찬양했다. 반사회적고찰에서는 독일(당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독일이 이겼다고 거기에 대한 자국민들의 광기에 넘치고 자만에 빠진 황홀에 대해 비판했다.

 

 

도대체가 니체라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는 인식 내지 사고구조에 대해 무척이나 비판을 가했다. 심지어는 그 보통 사람에 지나 유명한 인물이나 철학자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적인 어조는 상당히 황당하고도 놀라웠다. 독일의 관념철학만 아니라 세계 철학사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인 임마누엘 칸트와 합리주의의 기여자이며 이성에 대한 이원론적인 체계를 확립한 데카르트를 아주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우습게 보는 시야가 그렇게만 틀렸다고 그런다고 맞다고 여기기에도 난감하다는 점이다. 전에 다른 철학도서에서 니체에 대한 내용을 봤는데, 니체주의는 자신이 니체주의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니체주의라는 것이다. 과연 그의 책들은 기존의 가진 모든 생각을 버려야지 가능하고, 심지어 버려서 니체의 말에만 따라가도 버림을 당한다.

 

 

니체의 철학도서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말하고 싶은 말들을 보면 처음에 차라투스트라가 어리석음에 흥겨워하는 사람들을 선도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 순간 자신을 따라오는 많은 무리를 모두 내쫓아 내려고 한다. 도대체 그는 자신의 사고를 맞다고 하는 것인가? 틀렸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단순히 맞다와 틀렸다는 아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넣고자 하는 것일까?

 

 

이번에 읽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는 역자 후기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또 다른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중간에 차라투스트라의 등장을 암시하는 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신은 죽었다는 것처럼 신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가 강력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모이는 곳일수록 니체는 그곳을 진리나 인간의 도리가 있기 보다는 인간을 망치는 곳으로 보았다. “선악의 저편”에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소인(小人)의 냄새가 베여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먹고 마시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들이 숭배하는 곳에서조차 악취가 나곤 한다.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면 교회에 가서는 안 된다.>

 

 

사실 이 부분에 강렬한 충격적인 발언을 니체가 가한다. 당시 유럽사회에서 기독교의 부정은 곧 자신의 입지마저 꺾을 수 있는 위험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도덕의 계보”에 보이다시피 교회가 주도한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이 보인다. 마녀사냥이란 광기는 결국 종교적인 부패에 의해서이다. 그러한 광기의 축제 속에 현명한 재판관은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마녀사냥 당하는 존재마저 거기에 동조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을 넘어 제대로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도덕이란 단어와 윤리라는 단어에 대해 전에 나는 다소 혼돈을 가졌다. 윤리(倫理)와 도덕(道德)하면 왠지 서로 비슷하고 유사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은가? 아니라면 우리 같은 일반 한국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는 도덕이나 윤리라는 과목조차 듣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다시 생각해야 한다. 도덕이란 어느 특정한 시기와 공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사고관념이라고 한다면, 윤리는 어느 특정한 시기나 공간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고관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존재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란 말을 했듯이 윤리라는 개념은 철학에 가까운 개념으로 본다. 그렇다면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은 철학적인 영역보다는 철학이 아닌 그저 강제적인 인간의 관념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 니체의 서적으로 돌아가서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 나온 아포리즘의 문구에서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이라든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와 같이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집단이란 광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광기는 윤리의식이나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이미 없다. 단지 절대적인 다수의 논리로서 진리로 받아들인다. 진리라는 것이 진리가 아닌 하나의 집단의 무기가 되는 순간 전체주의적인 조건으로 변모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당연시 되는 것이 예나 지금의 모습이다. 니체는 100년 후의 인간에게 공감이 가는 것이라 1,000년도 넘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런 인간의 집단적 광기는 이미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룩하면서부터 시작된 하나의 잔혹한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광기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언의 약속이라는 강항 충동이 있기에 이성만이 아니라 양심마저 내다 버린다. 그것은 인간들은 자신의 눈앞에 불타고 있는 마녀 앞에서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분노의 저주를 퍼붓고 있다. 단지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다음 불의 정화의식은 자기 차례인 것을 말이다.

 

 

따라서 니체는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가지는 사고방식에 대해 무척이나 경계한다. 그 중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성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므로 절대적인 영역을 제시하고 있는 하나의 선이라는 전제를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면을 인정하더라도 왜 인간들은 계속 타락을 하고 있는가?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플라톤과 이후의 기독교의 교부철학이 과연 인간에게 좋은 삶과 진리를 주고 있는가?

 

 

플라톤 자신에 대한 논리라면 좋을지 몰라도 후세는 그렇게 플라톤처럼 될 수는 없다. 아니라면 기독교가 가진 그런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인간을 망치고 타락하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얼마 전에 읽어보았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생각난다. “감시와 처벌”에서 인간에게 하나의 죄의식을 옭아놓아 인간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죄를 갚기 위해서 구속당하는 것이 당연시 하는 체계적인 인간조작, 더 심각한 사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인간의 사고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에서 인간의 자유란 과연 그 위대하다는 자유가 어디까지 논하고 생각해봐야 하는가? 그저 나는 자유롭다고 여기면 자유인가? 그 자유마저도 억압인데도 그것이 하나의 자유라는 관념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선악의 저편” 각주에 나온 어느 단두대에 자신이 이슬로 변하게 프랑스 롤랑이란 부인의 외침인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처럼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그 자유 역시 광기에 차버린 하나의 행위가 아닐까?

 

 

인간은 항상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과연 당연한 것인가? 라고 의문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가령 내가 오늘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데,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인간의 의식구조는 물과 음식을 먹어야 하는 동물적인 인간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비교하기를 단지 상식적으로 보기엔 너무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어렵게 보일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고, 다르게 보자면 물과 음식은 눈으로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항상 가지고 있는 이성이란 관념은 물과 음식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잠을 자지 않고 마음만 먹는다면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의문을 품는 것이 어려울까? 정해진 양만 채울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물과 음식일까? 눈에 보이지 않은 인간의 이성과 그 사고관념일까? 차라리 후자 편이 더 위험해 보이지 않을런가? 물은 썩으면 뱉으면 되고, 음식이 상하면 토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사고는 뱉을 수도 토할 수도 없다. 도리어 그것이 인간의 속박하니 선악이란 존재는 정확한 인간의 윤리의식보다는 단지 도덕이란 사회적인 흐름, 그것도 광기어린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악의 저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이며, 도덕의 계보를 잡아내어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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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공부중 2013-10-1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