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니체
질 들뢰즈 지음, 박찬국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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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철학자는 나에게 정말 알 수 없는 철학자다. 그는 죽기 전에 나의 철학을 알아주려면 100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100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는지 30년 만에 그의 존재를 알아주었다. 니체의 책을 몇 권정도 읽어봐도 딱히 니체가 무엇일까라고 나는 이야기하기가 참 곤란하다. 그의 문체를 보자면 흐르는 유수와 같이 아름답지만, 때로는 이해 불가한 대립의 날이 가득하다. 그런 니체이기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끌렸는지 아니라면 그는 형이상학의 배반자로서 플라톤을 거침없이 야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혹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로서 너무나도 높은 이상과 기개를 가진 19세기 독일 철학자 겸 문학자로서 니체가 보는 세상은 너무 협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세상이 협소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이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싶다. 니체는 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비판했다. 특히 선악의 저편에서 보인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혐오감은 지나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주어진 것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 의지와 자기 사랑이다.

 

하지만 정말 자기 사랑에 대한 의지가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진 하나의 선택점인지, 아니라면 그것이 억지로 가면으로 씌워진 거짓으로 꾸민 의지인지는 깊이 생각해볼 이유는 있다. 아마도 니체는 그런 거짓 속에 가두어진 우리의 모습을 독설로서 벗겨버리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뒤편에 역자인 박찬국 교수님의 해설을 보면 상당히 이 책에 대해 그나마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지 모른다. 니체의 주요한 사상은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도전이다. 이분법이란 선과 악이란 큰 틀에서 한 쪽은 선이란 절대적 가치라는 것과 다른 쪽 악은 무조건적 배제라는 점이다.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로 통해 인간은 자신의 양심과 의지에 상관없이 그저 단순히 편을 나누기 식으로 적을 만들어내기 원한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그런 집착적인 모습에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들을 니체가 살기 전이나 죽고 난 뒤의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기나 비슷할 것이다. 이분법의 논리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인간을 좀을 파먹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자에게 의지를 하여 그것에 빠져 나올 수 없는 노예가 된다는 사실이다.

 

자유로운 상상과 이야기가 펼쳐진 그리스 시대의 신화의 신비로움을 찬양하여 만든 니체의 비극의 탄생인 만큼이냐 그것을 부정하고 또는 하나의 원시적인 존재로 만드는 기독교적인 요소에서 누가 더 부정한가라는 의문은 결국 인간 본연의 존재에 대한 의문점을 던져준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포도주의 신이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는 수확의 신, 하지만 그는 인간을 미치게 만들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왜 디오니소스에 매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디오니소스와 반대되는 아폴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예술문화 양식은 조각이나 서사시와 같은 일련의 정해진 틀이 제공된다. 그것에 얽매이고 그것에 정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생명력으로서 가지기 보다는 그저 멈추어진 그 자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체가 바라는 디오니소스는 눈에 영원히 보이지 않고, 귀에 영원히 들리지 않은 음악과 무용을 중시했다. 눈과 귀라는 인간의 정보수용매개체로 통해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영구히 변화하는 존재로서 되기를 바란 것이다. 회귀본능 역시 그런 쪽이다.

 

니체가 바라는 회귀본능은 어느 A라는 지점에서 B로 왔을 때 다시 A로 돌아가는 연어라는 생물이 가진 본능이 아니라 다른 지점 C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회귀본능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끊임없는 회귀를 꿈꿀 수 있는 영원불멸일 것이다. 아니라면 인간은 모든 것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인간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되어 계속 변해야한다는 사실이 영구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니체의 철학을 조금씩 보면 불교적인 요소와 조금 일치하는 것이 느껴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여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있음이라는 불교의 경전처럼 니체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인 1가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이분법적인 기독교 관념보단 디오니소스의 무형의 존재가 변화무쌍한 것을 추구하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모든 것은 불변하지 않음에 따른 절대적이지 않음에 따른 각각의 긍정이 따를지도 모른다. 니체가 살던 시절에 프러시아와 프랑스와 전쟁이 있었다. 그는 간호병으로 복무했고, 그 전쟁은 이겼지만, 니체는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승리에 감축에 빠진 독일 사람들을 비판했다.

 

대중이란 모든 존재에 대해 니체는 자신의 의지보단 타인과 사회의 틀에 틀어박힌 것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니체는 보면 그가 광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광기에 빠지지 않으면 정상이 될 수 없는 현실적 모순에 그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세상은 이분법적인 기독교 관념이 통하고, 서로를 관용하기보단 적을 몰아 죽이기를 바란다. 물론 모든 기독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폭력마저 미화시키는 현실 속에서 니체가 폭로하는 그 언어는 유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 <들뢰즈의 니체>의 저자인 질 들뢰즈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다. 아마 그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다른 서적을 보니 그는 죽기 전에 마르크스의 연구도 해보려고 했다고 한다. 니체와 마르크스를 두고 보면 상당히 상이한데 말이다. 들뢰즈가 니체를 파고 들어간 이유는 니체가 주는 삶의 긍정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들뢰즈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가족인 형을 잃었다고 한다. 무서운 전쟁과 가족의 상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가 다른 쪽을 삶의 의지를 주었는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자신으로 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긍정의 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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